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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중심한 교회생활

by 【고동엽】 2021. 10. 20.

가정을 중심한 교회생활 화란의 개혁교회를 소개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우리의 눈에 띄는 가장 인상적인 면을 말하면서 소개한다면, 그것은 가정 중심의 교회생활이다. 이것은 물론 화란 사회전체의 모습과 크게 다르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단지 사회 전체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개혁교회의 독특함도 있다. 먼저 일반적으로 가정 중심적인 화란사회를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이곳은 토요일에 직장들이 대부분 쉬고, 그리고 학교도 수업이 없다. 그리고 가게들도 일찍 문을 닫는다. 평소에는 저녁 6시에 닫는 다면 토요일은 오전 12시 혹은 오후 1시에 닫는다. 최근 들어서 슈퍼마켓 등은 예외다. 저녁 8시, 그리고 관광지에서는 더 늦게도 닫는다. 점점 미국식의 자본주의적인 경쟁 체제의 도입이 눈에 뛴다. 그러나 이러한 슈퍼마켓을 제외하면 거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물론 술집과 카페 영화관 등의 유흥업소 등은 밤 늦게 영업을 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대부분의 가게들은 저녁 6시 이후로 영업을 하면 법을 위반하고 문제가 된다. 그러기에 자연 저녁 시간은 가족들과 함께 지나게 되고, 혹은 이웃들과 지나게 된다. 이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이다. 저녁이 되기 시작하면 활기를 띄는 서울의 거리하고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시골 마을의 한적한 저녁 분위기를 이곳의 대도시의 주택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일반 가정 집들이 우리나라의 유명 카페처럼 조명을 잘 해놓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테레비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이야기 하면서 지내는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의 일반적으로 저녁 식사를 5-6시 정도에 한다. 하루에 아침과 점심은 빵을 중심한 식사이고, 저녁만이 대부분 따뜻한 식사를 한다. 즉 숲과 요리가 나온다. 우리의 삼시 세때 먹는 밥과 국은 이곳에서 상상도 못한다. 식사 후에 저녁시간이 가족들과 함께 지나는 시간이고 개인적인 시간이다. 그리고 직장인들이 회식을 하기 위해서 늦게 들어오는 그런 사회분위기가 아니다. 모임도 각자 저녁 식사 후에 다시 모인다. 이제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교회의 생활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교회도 가족 중심적인 분위기를 간직한다. 그런데 사회와는 다른 특이한 면들을 나누고 싶다. 1. 아이들이 예배에 함께 참석 먼저 아이들이 함께 예배에 참석한다. 이미 개혁교회에 대한 소개에서 익숙한 면이지만 이것의 구조적인 중요성을 인지해야 한다. 아이들이 함께 예배에 참석한다는 사실이 신앙과 가정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유지시키는지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교회 현실은 아이들과 예배드리지 않는다. 유치부, 혹은 유아부로부터 시작해서 중고등부까지 최근에는 심지어 청년예배라는 이름으로 분리된 예배를 드린다. 이것은 가정 개념을 교회가 가지는 데에 장애 요소가 될 수 있다. 같은 말씀을 받고, 함께 나누는 가정의 상과 관련되어서 그러하다. 여기서 우리 교회의 장점은 아이들과 분리해서 예배를 드림으로 선교적인 즉 전도의 효과를 생각할 수 있다. 이곳의 교회들이 이러한 면이 약점이다. 주간 교회(기독교) 학교가 있어서 주일학교 제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있어도 아주 약하기에 안 믿는 아이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줄어 든다는 것이다. 전도에 대한 열정이 작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개혁교회들의 모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강점은 아이들과 함께 예배함으로 가정중심적인 신앙생활 태도의 일관성과 가정이 신앙의 중심점임을 계속해서 강조할 수 있는 면이다. 우리의 교회들이 이러한 좋은 양자의 면을 효과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이제 아이들과 함께 예배 드리는 개혁교회의 모습을 좀 더 묘사해보자. 여기에는 교단마다 차이가 나는 면이 있다. 어떤 교회들은 예배중간에 설교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서 따로 주일학교와 같은 것을 시작한다. 아이들이 설교의 긴 시간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활동을 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주일학교 제도와 개혁교회의 제도가 절충된 방식이다. 물론 초등학교 학생들까지의 경우이다. 중학생 이상이면 다 같이 예배를 드린다. 고신 교단과 자매가 된 교단인 31조 파의 경우는 끝까지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이것을 유지하는 데에 굉장한 관심을 가진다. 아이들과 학생들의 흥미를 위해서 시편 찬송만이 아닌 복음송을 도입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이곳의 개혁교회가 시편만을 부른다는 것은 이미 사실이 아니다. 종교개혁 시에 칼빈 시대에 불렀던 시편 찬송들이 불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절기에 부르는 일반적인 찬송과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그리고 삼위 영광송 등과 일반적인 찬송들도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100여곡 이상의 일반 찬송들이 예배에 부를 수 있다는 결정아래 불리워 지고 있다. 이것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한 방식이다. 한국의 개혁교회를 지향하는 모습이 반대로 나아가면 안된다. 시편 찬송만이 합당하다는 주장은 곤란하다. 이곳에서 물론 신앙고백에 일치된 찬송과 시편은 아니지만 성경본문을 중심한 찬송을 부르려고 노력하고, 논쟁을 한다. 신앙고백적인 산물과 역사적 표현으로서 감사의 찬송과 경배의 찬송들이 다양한 형태를 지님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여간 아이들이 함께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다. 설교를 듣는 아이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여기서 가정마다의 분위기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어떤 가정의 아이들은 어리지만 설교시간에 바른 자세로 앉아서 설교에 집중한다. 그러나 다른 가정은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를 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떠들지는 않는다. 집중을 못해서 떠들지 않도록 하는 방법들이다. 그리고 설교시간에 이곳에서는 페퍼민트라는 사탕 비슷한 것을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이 먹으면서 설교를 듣는다. 우리의 설교시간에는 상상이 안되지만 그렇다. 설교본문을 읽고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다 들 주머니에서 드롭같이 생긴 흰 사탕들을 꺼내서 먹는다. 이것은 오래된 관습인데, 페퍼민트가 기억을 돕기 때문에 설교를 잘 기억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옛날에는 설교가 길어서 졸지 않도록 하는 각성제의 역할도 있고, 최근에는 아이들이 떠들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도 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아 보인다. 옛날에는 한두 개 정도 먹었지만 지금은 아이들의 경우 더 많이 먹는 경우도 있는 것 같고, 이전에는 페퍼민트만 먹었지만 이제는 온갖 사탕류가 다 나온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들이 예배에 함께 참석한다. 설교를 같이 듣는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는 설교를 들은 것은 이야기 하고, 나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설교에 대해서 느낀 바를 나눈다. 성도들은 설교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에서는 월요일에 주일날 교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아이들에게 질문한다. 그럼으로 성찬식이나 설교에 대해서 아이들이 기억하고 나누게 한다. 어떤 주일에는 오전 오후에 설교했던 설교자들이 설교하면서 둘 다 울었다. 이것은 이곳에서는 낯선 일이기에 아이들에게 회자거리이다. 이상한 주일이었다면서 목사가 둘 다 울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일 지난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 예배를 온 가정이 함께 드림으로 말씀을 같이 받고 나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리고 나아가 설교를 이해하도록 가정에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전과 오후에 동일하게 이루어진다. 2. 가정에서 신앙생활-성경읽기와 기도 이제 다른 가정 중심적인 성도들의 생활은 식사 후에 성경읽기와 기도이다. 이곳에서는 식사 후에 꼭 성경을 읽는다. 엄격한 집은 하루 세끼를 다 지킨다. 그러나 점점 바쁜 세상이 되면서 아침 점심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저녁때에는 꼭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한다. 가장이 읽고 기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어머니가 읽고 기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도시간은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기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은 아이들이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일용할 것도 영적인 필요를 연결시키는 태도를 길러준다. 신앙적 훈련의 중심이 가정임을 말해 준다. 이곳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유학 온 가정들이 얻는 유익이 이런 것임을 다 고백한다. 식사 후에 성경을 읽어주고, 읽고 기도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아이들이 말씀과 동행하도록 양육을 하는 것이다. 하루 하루 별 크게 진전되는 것 같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생활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관습은 한국교회의 가정예배 관습과 다른바 없다. 시점과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가정이 중심이 되어서 사회, 학교생활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과의 생활에 기초가 되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의 다른 형태는 잠잘 때에 또 나타난다. 화란 사회가 아이들이 잠들 때에 부모들이 함께 재워주면서 동화를 읽어주는 분위기이다. 이때에 성도들은 성경 이야기를 읽어준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이러한 류의 동화나 성경이야기가 발달되었다. 말씀을 들으면서 아이들은 잠이 든다. 이곳에서는 보통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6시 반 이전에 초등학생들도 8시 이전에는 거의 잠을 잔다. 그리고 새벽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다. 중학생들도 10시면 거의 잠을 잔다. 이곳에서 중고등학생의 밤샘은 거의 생각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곳의 교회에서는 새벽기도회와 같은 기도회가 드물다. 소그룹으로 기도모임을 하는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교회 전체로 기도회로 모이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예배당을 개방하여서 기도하도록 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도하는 곳이 가정이라는 것이다. 가정에서 식구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할 제목을 함께 나누고 기도한다. 이러한 인식이 분명히 있다. 이곳에서는 예배시간 15분 전에 도착을 하여서 사람들이 자리에 앉으면 우리처럼 조용히 묵상기도를 드리거나 성경을 읽지 않고 서로 안부를 묻는 인사나누기에 여념이 없다. 크게 떠들지는 않지만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단상에 올라가기 까지 서로 대화를 나눈다. 이것 크게 다른 분위기이다. 예배를 위해서 기도하고 준비하는 일은 가정에서 하는 것이라는 태도이다. 그리고 예배당은 그야말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지 그 외에는 일반 건물일 뿐이다. 장소만 다를 뿐 숙연한 다른 태도를 가지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그리고는 설교시간의 집중도는 대단하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으로 여기고 경청하고, 받는다. 설교하는 분위기나 혹은 설교자까지도 드러나지 않는 설교라는 인상을 받고 있다. 설교자의 재치와 만담, 혹은 능력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분위기를 받게 한다. 하여간 기도를 가정에서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중요하다. 가정 식구들이 기도의 제목을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 한국에 최근에 경건의 시간의 보급이 개인적 경건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그러나 정작 강화되어야 할 요소는 역시 가정이 함께 경건에 나아가는 일을 많이 계획하고 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신앙은 가정속에서 열매맺고, 그럼으로 대 이웃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출발점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많은 기도회,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금요심야 혹은 철야 기도회, 금요 구역기도회 등이 있지만, 정작 참된 교회의 핵심체인 가정이 얼마나 함께 기도하는가를 생각해보자. 교회의 성도들이 이러한 모든 교회의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으로 신앙의 척도를 삼는 분위기에서 벗어나서 가정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고, 훈육하고, 실천하는 방식을 더욱 깊이 생각했으면 한다. 예를 들어서 주일 학교 교사로 열심히 봉사하는 교사가 자기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말씀을 읽어주고, 설명해주고, 가르치는지 생각해보자. 아니 목회자를 예를 들어보자. 교인들에게 설교도 하고, 성경도 가르치지만 식구들과 성경공부를 하거나 같이 기도하거나 나누는 것이 얼마나 될까? 나의 이전 시절을 생각해보면 아찔한 생각이 든다. 무엇을 붙잡고 생활했던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3. 다른 가정을 방문하는 가정들. 우리가 이곳에 와서 공부하면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가정들의 방문을 자주 받는다. 우리도 다른 가정을 방문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언어나 학업의 압박 등으로 여유가 없어서 적극적인 방문을 아직은 시작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방문의 형태에 있어서 가정의 식구들이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많다는 표현이 언제나 그러하다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다양한 종류의 방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형편과 다른 것은 식구들이 아이들을 포함해서 한다는 면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는 어른들만이 방문하는 경우가 많지 않는가? 이곳에서는 생일 축하는 하는 것이 큰 일중에 하나이다. 한 2500원 내외의 화분이나 꽃, 초코렛을 사들고, 생일을 맞은 집을 방문한다. 이때에 그 집에 큰 아이부터 작은 아이까지 전부 같이 가서 방문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우리 집에 아이들이 생일을 맞은 경우에, 옆에 있는 성도들의 가정이 주일날 혹은 당일에 다 같이 찾아온다. 이곳에서는 교인들이 자녀를 5명 이상 낳는 경우가 흔하기에(이것은 사회와 절대로 다른 현상이다) 우르르 와서 축하를 한다. 그리고 주일날 가정이 서로를 방문하는 일을 많이 하는데, 이때도 서로 식구들이 다 같이 가서 지낸다. 이곳에서는 식사를 함께 하는 경우는 특별한 경우이고, 대체로 차를 마시는 만남으로 서로의 부담을 최소화하도록 습관이 되어 있다. 그리고 서로 대화하고 교제한다. 식사시간 전에는 돌아간다. 여기서 받은 인상은 아이들도 함께 방문하는 일이 우리 사회와 교회의 분위기에서 쉽지 않다는 사실에서이다. 아이들은 항상 빠지는데, 이유는 공부하기에 바쁘고, 부모와의 교제의 단절에서 싫어하는 분위기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는 옆집 성도의 7살짜리 아이의 생일에 다 큰 대학생들도 따라 나서서 축하를 하는 분위기 무척 새롭고 놀랍다. 그만큼 가정이 하는 일에 함께 동참하는 습관이다. 이러한 가족들의 유대의 깊은 저류에는 가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또한 교회가 늘 가족을 중심한 단위의 삶을 유도하는 적극적인 면을 보아야 한다. 마치면서 이제 이러한 글을 쓰려고 하면서 아내와 나눈 생각이 있다. 우리는 아이들을 끔직하게 위한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런데 정작 어떤 문제가 생기면 작은 부분에서 우리는 아이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많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어른들이 만나는 모임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가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마냥 기다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힘이 없는 자이다. 당장에 무시를 해도 무리가 없다면 무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강자 중심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할수록 그들을 더욱 고려하는 것이 복음적 정신이다. 복음은 항상 연약한 자가 권리를 희생당하지 않도록 힘있는 자가 희생하는 것이다. 주님의 부요함을 버리고 가난한 자가 되신 것은 가난한 우리를 부요케 함이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현상 중에 하나는 주일에 아이를 보기 위해서 부부 중에 한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예배 시간에 아이들 돌보아 주는 탁아프로그램이 있지만 너무 어린 아이의 경우는 안 된다. 그때 부모들은 교대로 오전과 오후에 예배를 참석한다. 그리고 어떤 교회는 탁아 프로그램이 오후에는 안되면 부부 중에 한 사람 만이 예배를 참석한다. 이것은 주일을 범하는 일이 아니다라는 사고방식이다. 가정이 연약한 아이를 돌아보는 일이 예배보다 중요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이다. 대체로 큰 명분아래 가정과 아이들이 고려되지 않는 교회의 모임도 많다는 생각이다. 가정이 많이 고려되는 교회의 본질적 구성이 요청된다. 다양한 교회의 모임과 회의가 필요하되 구체적인 의의 생산을 위한 모임이 되도록 해야겠다. 가족을 중심한 신앙생활이 가능하면서, 한국교회와 같은 교회 역사가 어린 교회가 전도와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떤 형태의 모습을 가져야 할까? 주일학교와 성가대등을 어떻게 조화있게 운영하여서 주일에 가정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교제하게 할까? 주일날 이루어지는 수많은 회의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이곳에서는 당회는 월요일, 제직회도 월요일 월 1회가 원칙, 그리고 나머지 회의도 평일에 저녁때 주로 이루어짐. 주일에는 회의 없음)? 회의보다는 가정들이 서로 모여서 시간을 보내고, 식구들이 말씀을 읽고 설교를 나누고 기도하r고 성도들이 서로 방문하여 교제하는 일을 돕도록 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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