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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가? / 최갑종 교수

by 【고동엽】 2021. 10. 19.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것은 사본학적으로 볼 때 설득력이 약하며 본문 구절을 고대 헬라의 문화-사회학적으로 살펴볼 때 이 구절은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근거로 보기에는 부당하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서 사도 바울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교훈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한다. 반면에 여성의 성직 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만날 때마다 설명하는 일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낀다. 지난해 「목회와신학」에서 여성 안수 문제와 관련한 글이 여러 차례 실렸는데,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대한 해석은 항상 논쟁의 한 축이 되어 왔다.

 

예를 들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인권 신장과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김세윤 교수(미국 풀러신학교 신약학)는 2004년 5월호에서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5월호, pp.56~71)와 “서창원 목사의 ‘여성 안수 허용 문제에 대한 이의 제기’에 답함”(11월호, pp.186~199)에서 사본학적 이유를 들어 고린도전서 14절 34~35절을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본문으로 단정함으로써 논점의 아킬레스건을 피해 갔다.

 

반면에 서창원 목사(서울 삼양교회 담임)는 김세윤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여성 안수 허용 문제에 대한 이의 제기”(10월호, pp.200~207)에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眞正性)을 거듭 주장함으로써 바울이 여성의 성직(목사, 장로, 감독, 안수 집사)을 명백하게 금하고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 말씀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것을 후대에 첨부된 비 바울적인 것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여성의 성직 안수를 명백하게 금하고 있는 바울의 가르침으로 봐야 하는가? 본고에서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것은 사본학적으로도 설득력이 약하다는 점이다. 둘째, 본문 구절을 고대 헬라의 문화-사회학적으로 살펴볼 때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규범적인 성경 말씀으로 보기는 부당하다는 점이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

 

과연 본문 말씀은 진정성을 갖고 있지 못하는가? 김세윤 교수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J. Weiss, C. K. Barrett, H. Conzelmann, G. D. Fee, J. M. Ross, R. W. Allison, P. B. Payne, R. B. Hays)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후대에 첨가된 비 바울적인 본문이라고 단정한다.

 

첫째, 서방 계열의 사본들인 D, E, F, G, 88, 소수의 라틴 사본들 d, e, f, g, 그리고 4세기 교부 암부로시에스터(Ambrosiaster)가 이 구절을 생략하거나 40절 이후에 배치하고 있다. 둘째, 34-35절에 대해 진정성을 가진 바울의 기록으로 볼 경우, 이것은 바울이 교회 안에서 여성의 기도와 예언 활동을 분명히 허용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1장 5절과 모순을 일으킨다. 셋째, 34~35절은 예언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전후 문맥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는다. 넷째, 34절에서 ‘성도의 교회’라는 말과 바울이 자신의 주장을 ‘율법’에 호소하려는 내용이 바울의 통상적 언어 용법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상당수의 다른 학자들(Antoinette Clark Wire, Curt Niccum, Anthony C. Thisleton, David E. Garland)은 위의 이유들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여성 안수 문제와 관계없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

 

첫째, 몇몇 서방 계열의 사본들이 이 본문을 생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대다수의 고대 사본들과 번역본들 이를테면 p46, a, B, A, 33, 88mg, Origen, Chrysostom, Theodoret 등 교부들의 증언과 Vulgate, Old Syriac, Coptic, Armenian, Ethiopic, Georgian, Slavonic 등 역본들과 Lectionaries 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사본들이 34~35절의 본문을 유지하고 있다. 사본학적으로 보면 34~35절을 생략하는 증거들은 연대적으로 후대에 속하며, 지역적 분포로 보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방에 편중돼 있다. 반면에 34~35절을 유지하는 증거들은 연대적으로 훨씬 앞서 있고, 지역적으로도 동방과 서방 교회를 포함해 전 중동 지역에 분포돼 있다. 따라서 사본학적 면에서 34~35절을 생략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설득력을 지닌다. 그래서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희랍어 성경, NA 26판 및 27판, UBS 3판 및 4판은 모두 34~35절을 유지하고 있다. UBS 4판은 각주에서 34~35절을 ‘B’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런 평가는 본문의 진정성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과 11장 5절의 모순 문제는 양 본문을 어떻게 접근해 해석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답변이 달라질 수 있다. 성경에 보면, 같은 저자의 글이지만 서로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경우마다 한 본문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나 서로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본문의 진정성을 배제시킬 수는 없지 않는가? 만일 고린도전서 11장 5절이 여성 전체에 관한 일반적인 원리를 말하고 있고, 반면에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어떤 결혼한 여성들의 지나칠 정도의 무례한 행위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양 본문이 서로 모순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셋째, 34~35절이 예언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전후 문맥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본문의 몇몇 단어들이 바울의 일반적 언어 용법으로 볼 때 낯설다는 주장도 어떤 관점에서 본문의 주제나 흐름을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 몇몇 주석가들(E. Ellis, B. Witherington, A. C. Thiselton)에 의해 세심하게 연구된 것처럼, 34~35절에 나오는 중요 어휘들이 이미 그 앞 절에서 사용되고 있다. 곧 34~35절의 핵심 단어들인 ‘말하다’(14, 32절), ‘잠잠하다’(28, 30, 34절), ‘교회 안에서’(28, 35절), ‘복종하다’(32, 34절)가 그 앞 절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사본학적으로 내외적 증거들로 보아 그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 오히려 사본학적 증거들은 34~35절이 본문의 진정성을 옹호하고 있다. 만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진정성을 가진 바울의 본문에 속한다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성경적 근거로 삼을 수 있는가? 문제는 바울이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어떤 배경에서, 무엇을 주장하기 위하여 이 말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고대 헬라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

 

고대 헬라 사회에서 남성은 그 신분과 존재에서 원천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은 것이 일반적이다. 남성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여러 영역에 관여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여성의 위치와 역할은 남성의 영역에 관여할 수 없었고 주로 가정에 제한돼 있었다. 주전 4세기 아덴에서 여자들은 가까운 친척을 제외하곤 자신의 얼굴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야 했다. 심지어 결혼하는 처녀는 신랑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첫 번째 사람이 되도록 했으며, 결혼한 후에 남편이 자기 아내의 얼굴을 대중 앞에 노출시키게 될 경우에 그는 자신의 얼굴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간주했을 정도다. 고전적인 아덴의 법에 따르면, 아내 된 여자가 가정을 떠나 대중들 앞에 나서게 되면 그 여인은 남편으로부터 부정하게 간주돼 이혼을 당할 수도 있었다(Plutarch, Bride 31, Mor. 142CD).

 

일반적으로 고대 헬라 세계에서 정숙한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에는 자기 아버지의 허락 없이, 결혼한 후에는 남편의 허락 없이 일절 집을 나서지 않았다. 결혼한 여자들은 남편이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혹은 개인적이든 집을 나설 때 따라나서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다. 부인이 남편과 동행해 참석한 파티 장소에서 술을 마시게 될 경우, 그것은 남편과 자신에게 모두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창녀들만이 남자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에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 아래 복종하고 결혼한 후에 남편에게 복종하면서 가사 일에 매달리고 아이를 낳아 양육해야 했다. 그리고 집안에도 외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거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인의 방’이라는 별채에 머물러야만 했다. 여자들이 부득이 집을 나서게 될 경우, 남자들에게 일절 말을 할 수 없었다. 유리피데스(Euripides)는 “결혼한 여자가 젊은 남자와 함께 서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자 특히 결혼한 여자가 거리에서 젊은 남자와 함께 있으면, 수치스러운 일을 한 여자나 창녀로 취급받았다.

 

1세기의 헬라 작가 플루타르크(Plutarch)는 「신부와 신랑에게 주는 충고」라는 책에서 “결혼한 여자는 집안에 머물러야 하며, 손과 발과 얼굴을 제외하고 어떤 신체도 일반 사람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아야 하며, 밖에서 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매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 여자가 말을 하고 싶으면 자기 남편에게만 하거나 남편을 통해 말해야 하며, 바깥에서 직접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일이나 남편을 욕되게 하는 일로 간주되었다.

 

물론 바울 당대에 마케도니아 여성들은 사도행전 16장 14~15절과 빌립보서 4장 2~3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고대 헬라 지역의 여성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 집안 일은 물론이고 장사를 포함해 시의 관리나 민중의 주요 제사와 국가 제사의 여사제로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자 종들이나 노예들은 일반 여자들에게 적용되는 사회적 규범이나 제약에 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집안에 있는 여주인을 대신해 외부 세계에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대중들이 사용하는 샘에서 물을 길어오거나 기타 다양한 심부름들을 하기 때문이었다. 시골에서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부의 아내들에게도 이 같은 규범들이 엄격히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다수 헬라 여성들은 철저하게 남자들에게 예속돼 있었고, 남자들이 하는 일에 함부로 관여할 수 없었다. 헬라 세계에서 여성들을 남성들에게 종속시키게 된 배경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처럼(Aristotle, Generation of Animals, Ⅱ. 3-4, Pol. 1.2.12, 1254b), 여성들은 존재론적으로 남성들에 비해 불완전하고 하급 존재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세속적 영역에서 종교적 영역으로 방향을 돌릴 경우에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는 점이다. 종교적 영역에서 헬라 여성들의 역할은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정치적, 사회적 영역에서 성적 불평등이 종교적 영역에서 거의 사라졌다. 여자 사제들은 남자 사제들과 똑같은 의무와 책임을 갖는다. 모든 여성들은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성전의 모든 장소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기도와 제사 행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여자 사제들은 국가적 제사를 집전했으며, 신탁의 전달자가 되곤 했다. 따라서 헬라 사회의 여성들 중에 종교 행위 참여를 자신의 신분 상승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종교적 영역을 통해 더 높은 영역 곧 남자의 영역에 속하기 위해 엄청난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한다. 여자가 남자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선 성전에 가서 모든 사람들이 성전을 떠난 다음에도 남아서 기도에 전념해야 하며, 감각적이고 육적인 여자의 영역을 벗어나 영적인 남성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성생활을 멀리하는 금욕적인 생활에 힘써야 했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의미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거부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울은 본문에서 너무나 단호하고 분명하게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어떤 면에서 여자가 말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 여자가 말할 수 없는지에 대해 선을 긋거나 구분해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교회에서 여자들이 설교나 가르치는 것은 할 수 없고 그 대신에 예언, 방언, 기도 및 찬송 등은 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바울은 아무런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에서 바울이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서 일절 말하지 말고 잠잠해야 함을 가르친다고 봐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본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바울이 이미 고린도전서 11장 5절과 39절에서 여자들이 예배 때에 남자와 마찬가지로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과 정면으로 대립할 뿐 아니라, 바울과 함께 사역한 여러 여성 지도자에 대해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바울 서신에 종종 등장하는 브리스가, 뵈뵈, 순두게, 유니아, 눔바 등 많은 여성 사역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절 말하지 않아야 했다면 그들이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이 여자들에게 교회에서 일절 말하지 말고 잠잠해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는 식으로 쉽게 결론을 내려선 안 된다.

 

또한 본문에서 바울이 어떤 것은 말할 수 있고 어떤 것은 말할 수 없다는 식의 인위적으로 선을 긋고 있는 것처럼 봐서도 안 된다.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 여자들을 향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가르치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바울이 여자들에게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이유를,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여자 성도들 특히 가정을 갖고 있던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으킨 분쟁과 예배시의 무질서를 경계하고 예방하기 위함으로 본다. 여기서 바울이 일반 여성 전체를 두고 말하기보다 남편이 있는 기혼 여성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복음을 전할 당시 헬라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예속돼 있었고, 남자들이 있는 공중 장소에서 여자들이 함부로 나서거나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들의 활동 영역은 가정에 제한돼 있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차별이 철폐되고 동등하다는 바울의 복음이 고린도 지역에 선포되었을 때 특히 여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아마 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여자들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자신들의 가정과 사회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 곧 남녀가 동등하게 예배에 참여할 수 있고 방언, 예언 등 성령의 은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부부 생활에서도 남편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전 7:2~6). 그때 여자 성도들 중에 일부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남녀의 동등권을 남용해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세우신 남녀의 신분과 역할의 차이는 물론이고 결혼과 부부 생활까지 거부하며 심지어 가정과 교회를 혼동해 교회 안에서까지 남자와 같이 행동하려는 극단적인 상황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들은 가정과 교회, 특별히 공중 예배 때에 일부 여성도들이 당시 사회에서 금기로 여겼던 통념을 깨고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에게 여자들은 자기 남편들이 함께 있는 교회의 모임 중에는 다른 남자들에게 말하지 말고 잠잠하며 오히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보라는 특수한 교훈을 줘야만 했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1장 34~35절의 본문을 바울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 와서 집으로 갈 때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절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일반적인 명령을 하는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예배 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몇몇 기혼 여성도들에게 주는 특수한 명령으로 봐야 한다. 바울이 전후 문맥에서 계속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교회 예배의 질서이다. 그는 14장 34~35절의 본문 앞에 예배 질서에 대한 교훈을 주는 문단을 두고 있다. 즉 문단이 시작되는 14장 26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 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면서, 문단이 끝나는 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교회의 예배에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아무리 예배 때에 어떤 개인에게 찬송과 말씀과 계시와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더라도 회중에게 덕이 않되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도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한다(14:27~28). 비록 자신에게 계시가 주어졌더라도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주어졌으면 잠잠하라고 한다(14:30). 그런 후에 구체적인 실례로서 교회에서 여자들이 잠잠해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40절에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면서 14장을 종결한다. 바울은 방언과 계시가 남자들에게만 주어진 특수한 은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4장 5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모두 방언과 예언하기를 원한다고 할 때, 또 14장 39절에서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명령할 때, 바울은 남자만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14장 31절에서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라고 말할 때도 여성도들을 제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방언과 예언과 말씀을 배우는 일에 여성도들이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이 아니라 이 모든 일에 질서가 있다는 점이다.

 

바울이 14장 34~35절에서 교회의 여성도들 특히 결혼한 여성도들이 공예배시에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여자로서 할 수 없는 방언과 예언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공예배의 질서는 물론이고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구분돼 있는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여성도들은 성령 체험을 통해 자신들은 이미 모든 영역에서 남녀의 역할과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자들로 자처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고린도 성도들이 공예배시에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았다고 한다면, 바울은 그런 교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교회나 갈라디아교회나 그밖에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 동일한 교훈을 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이 공예배 때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한다면, 교회와 가정의 질서 유지를 위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여성도들이 교회 질서를 혼란하게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그들을 향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서, 마치 바울이 시대와 장소와 여건을 초월해 여자들에게 무조건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교훈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은 어떻게 교회의 예배와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혔는가?

 

우리는 바울이 14장 35절에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가 결혼한 여성도들이라는 것과 그들이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 두고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남자 교우들)에게 질문을 제기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집에서 자기 남편과 더불어 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을, 교회에 와서 다른 남자들과 해결하려는 것은 교회와 자신의 남편을 동시에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본문에서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선행 문단이 방언과 예언과 계시에 관해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아마 교회 예배 중에 방언과 예언과 계시 혹은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을 때 그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 소란을 피우면서 질문들을 던진 것 같다. 바울이 제기한 질문을 자신들의 남편들에게 집에서 물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방언, 예언, 계시보다 오히려 말씀에 대한 가르침일 가능성이 더 크다.

만일 그렇다면 여인들의 질문은 마치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님이 예배 중에 말씀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어떤 무식한 여자 교우가 주제 넘는 질문을 던져 예배를 방해하는 일과 유사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예배 중에 남자들이 아니라 왜 여자들이 질문을 제기했는가 하는 점이다. 바울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우리는 적어도 여성도들의 남편들은 자신들의 아내들이 궁금해 하는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여자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어서 그와 같은 질문을 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당시에 헬라, 로마, 유대의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거나 제한돼 있었다. 유대 사회에서 여인들은 회당이나 학교에서 율법을 배우는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헬라 로마 사회에서 여인들은 가장 기본적인 공교육의 내용인 수사학도 가르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여자들은 대체로 남자들에 비해 이해의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이나 능력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성도들이 예배 중에 터무니없는 질문도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여자들은 본성적으로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과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바울은 어디까지나 당대의 사회와 문화적 관습 아래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당시 여인들이 대부분의 정보와 지식을 가정에서 남편에게 의존하고 있던 것처럼, 교회의 여성도들도 교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부딪혔을 때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남편에게 물어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왜냐면 여자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당대의 사회적 문화적 규범으로 볼 때, 여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남편을 제쳐 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일종의 성적 유혹으로 간주될 정도로 자기 남편에게도 대단히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율법에 호소해 남편과 아내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유지돼야 할 올바른 질서를 회복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왜냐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 교회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비쳐져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바울은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남녀 동등함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자유가 성도들이 살고 있는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환경에서 부도덕한 일로 간주될 때, 그 자유의 사용을 부분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 안수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나가는 말: 바울과 여성의 안수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고린도전서 11장 2~15절, 디모데전서 2장 8~15절과 함께 사도 바울의 여성 안수 금지를 위한 규범적인 본문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고린도전서 11장 2~15절과 디모데전서 2장 8~15절도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처럼, 고린도교회와 에베소교회의 여성도들 중에 복음의 자유를 남용하거나 곡해해 남자와 여자의 구분과 남편과 아내의 질서까지 부정해 가정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선교의 문까지 닫게 하는 위험을 주는 자들에게 주는 바울의 특별 교훈으로 봐야 한다.

 

우리가 이 구절들을 예배 때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이나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권면(롬 16:16, 고전 16:20)처럼,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특수한 정황에 비춰 해석해 그 의미와 메시지를 오늘에 적용시키지 않고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구절들로 받아들인다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여성이 가르치고 말하는 모든 행위들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 교회는 여성가대원, 주일학교 여교사, 여전도사 등을 세우지 말아야 하고 신학교는 여자 신학도에게 입학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또 목사 후보생을 가르치는 여성 신학 교수도 둘 수 없게 된다. 여성들은 교회에 올 때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써서 자신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당부해야 하고, 교회 안에서 여성도들은 어떤 경우이든지 말하지 말고 잠잠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물론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들은 예배 때 머리에 수건을 쓰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권면을 현재 우리 교회 안에서 그대로 적용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구절들을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신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바울은 이 구절들을 통해 모든 시대에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에서 예배 때 여자가 갖춰야 할 마땅한 태도에 대한 메시지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권면에서 성도간의 우의와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모든 여성도들이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며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교훈에서도 모든 시대를 초월해 선포되는 남녀의 구분과 가정과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남녀의 질서에 대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어떤 성경 구절이 시대와 문화에 매여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으로 곡해해선 안 됨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성경 구절을 문화-사회학적으로 혹은 역사-문학적으로 접근해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도전하는 일로 오해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강조를 신성에 대한 도전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점이다. 예수님의 인성에 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인격과 사역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역사-문화적, 문화-사회학적 접근 없이 성경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이런 해석학적 관점과 동시에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바울 서신의 특수한 구절들을 해석할 때 그것을 바울의 일반적이고 통일성 있는 교훈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이해하기 힘든 다양한 교훈들을 만나더라도, 바울이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비논리적이며 비체계적인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우리가 느끼는 모순과 비일관성은 어떤 면에서 바울의 문제이기보다 접근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로 일어나는 것이다.

 

필자는 바울 신학을 제시하면서 바울 신학 전체를 묶는 어떤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중심 사상이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것은 바로 ‘창조’, ‘타락’, ‘구속’, ‘재창조’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입각한 종말론과 그 종말론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기독론과 성령론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런 관점에서 인간과 세계 역사의 모든 문제들을 보고 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남녀 관계를 포함해 모든 인간 사회의 문제들이 아담의 범죄로 타락하고 죄로 오염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속되었고,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보내신 성령 안에서 새롭게 회복되는 새 창조 사역이 이뤄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바울에게 새 창조는 단순히 아담의 타락 이전으로 복귀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있다. 그것은 타락 이전보다 더 고차원적인 새로운 창조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원문의 뜻은 ‘새로운 창조’)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할 때, 이것은 그야말로 옛 창조와 대비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또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원문의 뜻은 ‘새 창조’)만이 중요하니라”라고 선언할 때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새 창조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가르침은 신약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 문제를 첫 창조나 구약 시대의 관점에서만 보아선 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여성의 역할 문제를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볼 것을 시사한다.

 

사실상 바울은 자신의 목회와 선교 사역에서 그가 살고 있던 헬라와 로마와 유대의 가부장적이고 남성 위주의 문화를 뛰어넘어 적지 않은 여성 사역자들을 동참시킴으로써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새 창조를 이미 부분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했다. 다시 말해 새 창조는 ‘아직’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 비록 그 완성은 주님의 재림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오심으로 지금 여기서 이뤄지고 있는 현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강하고 부정적인 교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도 바울의 구속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새 창조를 말하고 있더라도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옛 세계와 함께 공존한다. 다시 말해 ‘이미’(새 창조 세계)와 ‘아직’(옛 창조 세계)이 함께 공존한다. 이런 사실 때문에 비록 어떤 것이 ‘이미’의 관점에서 보면 가능하더라도, ‘아직’이라는 세계와 문화와 역사의 구조를 함부로 뛰어넘을 수는 없을 뿐더러 때로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고린도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교우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성령 체험을 통해 자신들이 마치 이 세상을 초월할 수 있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면서 부부 생활과 결혼까지 거부하고, 당시 고린도 교회가 처해 있던 문화와 사회적 정황을 혁명적으로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구조를 교회 안에서 만들려고 했다. 이것은 결국 가정의 파괴와 교회의 무질서는 물론이고 교회의 선교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성 교우들에게 특별 교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리적으로 여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차별 없이 동등하게 되었더라도 여자들이 누릴 수 있는 원리적 자유 됨이 특수한 교회의 상황에서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경우에 그것은 유보되거나 제한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여성에 관한 바울의 ‘이미’와 ‘아직’에 관련된 교훈이 서로 상치될 때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 교훈을 우선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교회와 교단 그리고 교단이 서 있는 시대적 정황에 따라 다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아직’에 대한 교훈을 ‘이미’에 대한 교훈의 빛 아래서 이해하고 적용하고 그 반대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즉 고린도전서 12, 14장,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여성의 역할과 위치에 관한 부정적 교훈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 고린도후서 5장 17절,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긍정적 본문에 비춰 해석해야지 그 반대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옛 창조가 새 창조의 빛 아래서, 특별한 교훈이 보편적인 교훈 아래서, 과거가 미래의 빛 아래서 해석돼야지 그 반대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른편으로 돌아가는 시계의 시침이 왼편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처럼, 옛 창조는 새 창조를 향해 ‘아직’은 ‘이미’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지 그 반대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주후 1세기 헬라-로마-유대의 남존 여비와 가부장적 사회 구조 안에서도 초기 기독교가 여성의 문제에 관해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이미’ 앞섰다면, 지금 남녀평등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가 일반 사회보다 ‘아직’ 뒤떨어져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 교회는 여성의 성직 안수를 포함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제한하는 모든 제도와 법을 과감하게 개선하고 오히려 사회를 선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이 땅에서 인종과 신분과 성차별이 없는 새 창조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진정한 주역이 될 수 있다.

 

 

주(註)1. 이 글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 아래 수행 중인 “고대 헬라-로마-유대 사회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연구”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object TEXT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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