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우 교수(구약신학)
구약성경의 관점에서 본 목회자상
[총신논단]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처음 나가던 교회의 목사님은 새벽마다 울부짖는 듯한 기도
를 하곤 하셨다. 나도 처음 믿을 때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목사님께서 새벽마다 울부짖는
듯한 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어느 선교단체를 통하여 기독교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곳에서 나는 <사영리>를 효과적으로 전하는 법과, 성령충만함을 받는 비결
을 여러 번 반복하여 학습하였으며, 기독교인의 삶은 기쁨과 확신이 넘치는 삶이라는 오리
엔테이션을 받았기 때문에, 새벽마다 징징우는 듯한 목사님의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리고 그 때 (1970년대초)에는 웟치만 니의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우리의 자
아가 깨어지면, 성령의 은혜가 자동적으로 흘러 넘친다는 주술비슷한 신앙이 은연 중에 무
의식 속에 깔려 있기도 하였다. 따라서 늘 책망하는 듯한 설교와 딱딱한 웨스트민스터 소요
리문답 교육과 엄격한 주일성수를 요구하시던 목사님은 어쩌면 율법주의적인 테두리 안에서
살며, 기쁨과 확신과 자유로 가득찬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닌
가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30년이 지났고, 신학을 시작한지 25년이 되었다. 그리고 기라성
같은 목회자들을 가까이서, 또한 멀리서 보아왔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거의 핵폭발에 버금가
는 양적인 팽창이 있었고,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목회자들도 배출해 왔다. 그분들의 깊
은 내면은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다들 뭔가 자신감에 넘치고, 승리의 비결을 알
며, 때로는 호령도 하고, 마치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신분을 즐기고 누리는 듯한 모
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그 모든 외형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예
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역사 속에서 나아가야 하는 근본적인 방향을 상실하고 표류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사실 눈물 젖은 목회자상과 기쁨이 넘치는 목회자상은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메시야의 두 모
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구약에는 영광의 메시야와 수난의 메시야가 늘 중첩
되어 나타나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신약이 시작되던 당시의 유대주의에서는 후자의 모
습은 거의 완전히 잊혀지고 전자의 모습만 부각되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구원자로
서의 메시야를 기다리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시 수난의 메시야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예수께서 바로 영광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자가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을 받
아야 함을 잘 알고 계셨고, 십자가를 지시며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셨다.
구약성경에는 두 가지 메시야의 모습이 나타나는 데, 왜 사람들은 한 모습을 잃어버렸을까?
아마 수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사람들이 쉬운 인생을 원했기 때문일 것 같다. 소위 하나님
의 백성들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줄 터이니,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도록 해주시오라는 현세
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갈구하였으며, 유대교에서는 메시야를 통해 황금시대가 그들을 위
해 오리라는 예언으로 구약성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에 대한
적절한 현실적 보상을 바랐으며, 영적 지도자들은 이 백성의 소리(vox populi)를 잠재우고
영적 각성을 하도록 애쓰기 보다, 순종과 축복의 짧은 신앙적 회로를 만들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메시야의 영적인 승리와 종말론적인 승리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하였고, 결국은 수난의 메시야 상을 상실하게 되었다.
구약의 메시야 사상 형성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소제가 된 사람은 다윗이다. 다윗은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사사시대의 모든 혼란을 극복하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세우며, 통일
이스라엘을 이루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안치하며, 솔로몬의 성전을 준비하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 영원한 왕조를 약속 받았다. 따라서 후대 이스라엘의 역사가들과 선지자들과
시인들은 다윗 안에서 메시야의 모습을 찾았고, 그의 아들 가운데 온 세계를 다스릴 영광스
러운 왕이 올 것을 바라보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시로서
의 구약성경은 이외로 수난의 메시야의 모습을 너무나 많이 그려주고 있다. 이것이 신비이
다. 어떤 민족과 나라의 메시야상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철저하게 외면되고 버
림받고, 죽음까지 당하게 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렇지만, 구약성경은 건축자가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신비를 메시야상 속에 아름답게 그려놓고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신비로운 섭리 가운데, 수난의 메시야를 준비해 주셨을까? 그것은 인간
의 죄가 우리의 모든 상상을 초월하여 깊고 넓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는 지성과 감정과 의
지의 모든 영역에 회복될 수 없는 심각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는
메시야는 죄인들의 질시와 미움과 버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21세기를 맞이하며, 우리는 혁명적인 문화적 변혁 가운데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죄된
본성은 영원하며 하나님의 사랑도 영원하다. 목회자는 죄인된 인간과 사랑의 하나님의 중간
에 서서 중보자로 일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 때문에 감격하지만, 또한 자신의 죄성
과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거스리는 세상 때문에 울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운다는 것은 약
하기 때문 만은 아니다. 그것은 성인으로서 철이든 증거이며, 이제는 책임을 지는 위치에 섰
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유명한 강사가 노자 강의에서 성자란 근심하는 자이다라고 정의
하였다고 한다. 성자는 자신의 부족 때문에 근심하고, 사회의 아픔과 악함 때문에 근심하며,
더 큰 자유와 진리와 생명을 위하여 근심한다.
구약성경의 메시야 상에서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 두 본문인 시편 22편과 이사야 53장은 근
심하는 성자 정도가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와 그 모든 책임을 홀로지고, 하나님과 사람과
이웃과 동료들과 부모에게서조차 완전히 버림받는 자로서의 메시야를 그려주고 있다. 그러
나 그는 죄는 없으시며 오히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으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다 (사53:5). 목회자는 수난의
메시야의 길을 따르며, 영광이 메시야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고 사는 자이다. 그렇지만 여전
히 죄성은 있으며, 죄인된 인간 가운데서 그들을 섬기기 위하여 부름받은 자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21세기의 목회자도 성화와 겸손과 헌신에 더욱 힘써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새벽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울부짖던 나의 첫 목사님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그렇지만, 나
에게도 그 울부짖음과 눈물이 지금 있는가?
*자료출처/총신원보 146호(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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