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예수를 믿는 자들로서 우리는 모두 믿음의 혈통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육체를 따라서나 본성을 따라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난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약이 있습니다. 사도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하였듯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들이 주어졌으니,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16, 29)라는 것이 이미 결정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혈통에 속해 있고, 언약의 특권들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도 믿음에 속해 있으며, 우리의 삶이 그 시작부터 계속해서 모두 믿음에 속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목회 사역도 믿음에 속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시내산의 율법이 아니라 골고다의 사랑을 전하는 사자들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할 일은 “이것을 행하면 너희가 살리라”라는 명령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은 은혜로운 믿음의 사역이지, 사람을 뒤쫓는 것도 아니요 육체적인 계명의 율법을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의 공로를 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설교의 대상은 -물론 설교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바로 믿음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기 전에는 우리가 그들에게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설교가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인정할 뿐입니다. 믿음이 우리에게는 씨를 뿌리는 능력이 되며 또한 우리가 뿌리는 씨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믿음 안에 담겨져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의 이랑 속에서 믿음이 돋아나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이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수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삶 전체와 또한 우리의 목회 사역의 모든 일과 얽혀 있는 것이 바로 이 믿음의 교리요 또한 믿음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분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작은 일이지만 이 일에 강건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처럼 믿음에 강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스데반처럼 믿음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의 사역은 특별히 믿음을 요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실패하면 차라리 사역을 하지 않은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우리의 봉사와 함께 가지 않으면 곧 지쳐서 쓰러지고 맙니다. 주를 위한 섬김에서 성공한 모든 예들을 잘 살펴보면, 대부분이 믿음이 그만큼 강건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네 믿음대로 될지니라”라는 것이 예외 없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쓰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하며, 크게 쓰임을 받으려면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필연적인 법칙인 것입니다.
쓰임을 받는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즉, 진리의 원수들을 상대하여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기 위해서도, 또한 우리의 직분을 둘러싼 갖가지 유혹들을 대적하여 능히 서기 위해서도 믿음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풍성한 믿음을 지니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 옛날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믿음을 갖고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서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한 것입니다(히11:33-34).
Ⅰ. 목사인 우리들에게는 과연 무엇을 믿는 믿음이 절실하게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습니다(히11:6). 인격적인 존재이시오 영원토록 동일하신 ‘스스로 있는 자’이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목적과 계획을 지니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엡1:11). 우리는 세상과 그 거민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신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삶의 모든 일들 속에 계속해서 관여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늘 계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와 우리 주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입니다. 또한 모든 일에서 그의 뜻을 견고하게 이루어 가시는,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분명히 선한 일뿐 아니라 악하게 보이는 일에서도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며, 무한하신 그의 지혜로 택하신 목표를 향하여 모든 일 가운데서 그의 영원한 병거를 몰아가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 하나님께서 자신이 말씀하신 모든 것에 신실하신 것을 믿고, 거짓말을 하시거나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 아니신 것을 믿습니다. 전능하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여호와 바로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48:14).
둘째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에게 지극하고도 진지하게 초점을 맞춘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합니다. 영감된 성경의 역사가 그에게 관하여 말씀하는 모든 것을 믿습니다. 그에 관하여나 그의 생애에 관하여 신화를 만들어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로 사람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을, 또한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골고다의 십자가에 진정으로 속죄를 행하셨다는 것을 틀림없는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동시에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히7:25)는 것을 믿습니다. 또한 그는 지금도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며 그의 오른 손에 별들을 쥐고 계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참조, 계1:13, 16). 또한 우리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늘로 올리신 것과 똑같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합니다(벧후3:12). 그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며 그 육체들이 무덤에서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또한 성령님도 똑같이 신뢰합니다. 우리는 그의 신성과 인격성을 어김없이 믿습니다. 과거 오순절 날 사도들에게 행하셨듯이, 지금 이 순간 성령께서 우리를 능력으로 옷 입혀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의 설교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하루에 천 명이 거듭나는 역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과연 믿으십니까? 우리 모두 그렇게 믿고 있다면 우리는 사도들과 한 무리에 속할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을 믿는 충만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질” 것입니다(엡6:10).
넷째로, 우리는 복음의 교리들을 믿습니다. 우리는 계시된 진리의 확실한 것들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스스로 ‘진보의 사람’이라 자처하는 자들은 복음에 물을 타는 일이 진행됩니다.(목사의 여정을 포도원에서부터 로마까지의 포도주 통의 비유) 조금씩 진리를 포기해 가고 그 빈 자리에 사람의 견해와 사색과 이상들을 가져다 채웁니다. 인간의 지혜의 말과 자기들이 만들어낸 사색들을 갖고서 많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것입니다. 각 사람이 미가야 선지자처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왕상22:14)라고 선언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것을 지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면, 그리고 성경의 영감성을 믿는 것이 미친 짓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세상 끝까지 어리석은 자들로 남아 있기를 택하며 또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해서 택하신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 사이에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참조, 고전1:29).
다섯째로, 우리의 믿음은 복음의 도리들과 복음의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며, 또한 기도의 능력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음성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들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귀에 우리의 필요를 말씀드리면, 그의 귀가 마음의 느낌으로 이어져서 그의 손이 우리를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기도는 참된 능력인 것입니다.
여섯째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우리의 사명을 믿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소명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청중에게 요구하고 명령하며 확신 있는 자답게 나아갈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나 자기의 말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담대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니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기반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부족하지만, 양들의 위대하신 목자장께서 우리에게 충족함을 허락하셔서 그것으로 그의 백성들을 먹이게 하신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만유에 충족하신 하나님을 믿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보리떡과 물고기가 늘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창고에 그냥 두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밖으로 나가서 그것들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모든 것을 우리 영혼으로부터 쏟아 붓도록 합시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가 우리 편에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분별합니다. 우리가 일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도 함께 일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편에 역사하는 힘이 강단에만 한정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주 동안 내내 하나님께서는 보살피심과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서, 때로는 기쁨과 위로를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도록 사명을 주신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준비를 갖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또한 어려움이 극복되어 성공을 촉진시킨다는 것을 믿게 해 줍니다. 우리는 어려운 것들이 우리에게 크게 거룩하게 작용하며, 그것들은 그저 더 큰 결과로 향하는 디딤돌로서 우리 앞에 주어지는 것뿐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실패도 믿습니다. 성공이 없는 것이 결국 더 크고 더 고상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켜 준다는 것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발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 안에서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어리석은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이 그 복음에 대해서 코웃음을 치지만, 우리의 복음이 과연 진리라면 그것이 전면에 드러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의 효력은 마치 남태평양의 푸른 바다 속에서 자라는 산호섬보다도 더디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산호초는 자라나고 있고, 그 밑에 깔려 있는 엄청난 기초 위에서 표면을 향하여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는 영원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뢰 가운데서 기다리며 인내로 우리의 시대를 견딥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일을 따지듯이, 하루하루의 진도로 우리의 일을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요 따라서 하나님 자신의 표준으로 따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시간과 창조된 것들과 주의 진리를 거스르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사라질 때가 올 것이지만, 진실하게 전해진 모든 설교와 간절히 드린 모든 기도와 정직하게 행해진 모든 형태의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기로 작정하신 그 위대한 구조물 속에 그대로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Ⅱ. 우리의 믿음이 우리 속에서 어떤 일을 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믿음은 우리 속에서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 영광스러운 자세를 일구어냅니다. 진정으로 돕는 자들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기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고, 또한 성령을 믿는 사람은 오직 주님만을 기대어 서 있는 법입니다. 독불장군처럼 홀로 있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그러면서도 스스로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인간적인 대부분의 도움이 있을 때에도 여전히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는 데에 힘쓰는 것입니다.
둘째로, 참된 믿음은 그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우리에게 줍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전할 사명을 부여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임하여 계시다는 확신을 갖는다면, 마땅히 매우 담대하게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우리의 소명도 그만큼 존귀하게 여기게 되며, 또한 비겁한 행동으로 그 소명을 더럽히는 일은 감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로, 참된 믿음은 선한 행실에서도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얼마 가지 않아서 반드시 풍성한 선행이 함께 있게 되는 법입니다. 복음을 믿는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 믿음이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하는 것은 마치 몇 년 전 토스카나의 해변가에서 암초에 걸려 좌초된 배와도 같습니다. 토스카나의 해안 경비병은 정말 애처롭게도 배가 좌초되었다고 상부에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배에 타고 있는 승무원들에게 나의 확성기를 이용하여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었으나, 안타깝게도 이튿날 오전 해변가에 여러 구의 시체가 쓸려나왔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계시며, 그러면서도 더 많은 것을 하려고 힘쓰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상을 하고 있어야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보다도 더 나아가며, 그보다도 더 나아가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큰 환난을 견디며 자기 부인을 실천하게 할뿐더러, 동시에 여러분의 사역에서 인내하도록 해 줍니다.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주를 섬기기 위해 열심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인 성공을 누리지 못해도, 여러분의 사역이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목회 사역에서 끝까지 인내하도록 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탐나는 보수가 보장되어 있는 그런 직업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크게 확대시켜 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개방성 내지 포용성).그리고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봉사에 강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믿음은 우리를 새롭게 해 줍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의 온갖 지치고 괴로운 것들을 가볍게 해 줍니다.
Ⅲ. 우리의 믿음이 오늘 아침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그 기초가 확실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진리들이야말로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혹시 학식 있는 사람이 성경을 뒤집어엎을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듣더라도, 결코 움츠러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근거가 확실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으니, 또한 그 믿음이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습니다. “마치 내가 꿈인 것처럼 나를 대하지 말라. 잔뜩 움츠러들어서 숨을 죽여서 메시지를 전하지 말라. 그것을 대적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이니 그것을 담대히 증거하라!”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믿음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속인 적이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이라도 여러분을 실망시키신 일이 있습니까? 환난의 날에 여러분에게 등을 돌리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주의 팔에 기대었을 때, 과연 그것으로 충족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믿음은 “나의 범위를 더 넓혀라. 네 하나님을 훨씬 더 신뢰하라”
우리는 아직 그저 무릎 정도의 깊이 밖에는 믿음 속에 잠기지 못했습니다. 가슴까지 차도록, 아니 그보다 더 깊이 차도록 계속 깊이 들어갑시다. 믿음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내 아들아, 내가 너로 하여금 말씀을 더 잘 전하게 할 것이니 나를 신뢰하라. 더 힘써 수고하고, 더 담대하라. 교회의 집회에서 네 스스로 싸우지 말고, 네 하나님께 맡기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 저 입이 더러운 사람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에게 이야기할 합당한 말을 네게 줄 것이니라. 나를 신뢰하고 저 어두운 악의 소굴로 들어가라. 분별을 갖고서, 또한 열정을 갖고서 그리로 들어가라. 지극히 악한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의 구원을 구하라. 네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넷째로, 믿음은 “나를 먹이라! 나를 먹이라!”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먹고 삽니다. 하나님의 진리로 믿음을 먹이십시오. 모세가 믿음이 있었는지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십 일을 산 위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다면,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의심한다는 것이 정말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주께서 이 신학교에 믿음을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세워지고 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곧, 반석 위에 세워지고, 또한 은혜 언약의 축복들이 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이제 믿음과 완전히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물러서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곧 전진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앞에 온갖 위험 요소들이 놓여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계속 전진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발걸음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본 도리들을 포기한다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형제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보십시오. 하나님의 천사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선봉에서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46:7).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46:2-3).
아아, 복된 믿음이여! 하나님, 더 큰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앞으로!
오늘 아침 드릴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출14:15). ‘앞으로’ 이것이 계속해서 여러분에게 쟁쟁하게 울리도록 하십시오. 뒤로 물러가는 것은 곧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쓰임받는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전진합시다. 우리에게 놓은 유일한 길은 이랑의 저 끄트머리까지 계속해서 밭을 갈아 가는 것이요, 주께서 우리를 집으로 부리시기까지 절대로 밭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버림받은 자들이 아닌 이상 우리는 평생을 주를 섬기는 일을 위하여 자신을 드린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표시가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종들로서, 그의 표시를 우리의 몸에 지니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존재를 섬길 자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군병들이 된 것입니다. 오로지 앞으로 전진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 외에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함께 군사 된 여러분, 우리는 숫자가 적습니다. 우리 앞에는 처절한 전투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 각자가 최선을 다하여 싸움에 임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능력에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고, 은사와 은혜에서 자라야 하겠고, 하나님의 일을 위한 강건함과 또한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일에 있어서도 자라야 하겠습니다.
Ⅰ. 우리가 정신적인 능력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최악의 상태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절대로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최선의 상태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게으름으로 인하여 흠이 있고, 점이 있는 상태를 하나님께 드린단 말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가능한 최고의 상태로 우리를 올려놓아야 합니다. 우선 지식을 모아들여서 곳간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분별력을 발휘하여 곡식더미를 타작으로 쳐서 가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작이 된 알곡을 견고한 노력으로 창고에 쌓아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정보를 얻기에, 특별히 성경에 관한 정보를 얻기에 힘써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성경을 연구하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장장이의 주요 업무는 말굽을 제작하는 것인데, 황금으로 허리띠를 만들어 천사에게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말굽을 만들어 말에다 끼워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대장장이로서는 실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탁월한 시를 짓는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고 죄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해 주는 효과를 내는 건전하고 설득력 있는 설교를 하지 못한다면, 시를 짓는 능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연구하십시오. 얻을 수 있는 도움은 모조리 동원하여 철저하게 연구하십시오. 이전보다는 지금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접할 수 있는 보조 수단의 폭이 매우 넓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 청중들보다 앞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훨씬 더 훌륭한 성경 학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든 지식에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신학에 대해서도 올바른 지식을 지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도리들을 철저하게 습득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성경을 강해하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지니도록 합시다. 저는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만큼 오래 가고, 또한 교회를 세우는 데에 확실한 역할을 하는 것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의 목회 사역이 오랜 세월 동안 유익을 끼치려면 반드시 성경 강해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여러분 스스로 말씀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또한 사람들이 말씀으로 세워질 수 있도록 그 말씀을 강해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정통한 사람들이 되십시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글은 정말로 친숙하게 접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참조, 골3:16).
그 이외에 다른 분야에 대한 지식도 소홀히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자연을 통해서, 혹은 과학자의 일기를 읽거나 여행가의 항해 일지를 읽어도 거기서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오래된 식물도감이나 연금술 교범도, 마치 삼손의 죽은 사자처럼 여러분에게 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자연의 역사와 식물학이 많은 유익을 줍니다. 지질학 혹은 역사는 굉장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의 각 부분이 다 고귀한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시간과 기회와 능력이 닿는 대로 모든 지식을 습득하십시오. 너무 지나치게 높은 수준을 갖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에 지식을 습득하는 일에 주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학식이 있다 해도 우쭐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지식을 습득하여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이런저런 것들을 서로 분별하기를 항상 배워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는 이 점을 더욱더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기한 것들을 좇아가고, 새로운 것마다 매력을 느낍니다. 그러니 진리와 거짓을 판단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곁길로 가지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옛 가르침을 그대로 고수합니다. 마치 바위에 딱 달라붙어 있는 따개비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옛날의 오류들을 고수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참조, 살전5:21). 선명한 눈을 주셔서 진리를 바로 보고 또한 그 의미들을 분별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구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능력을 끊임없이 사용함으로써 정확한 판단을 지니게 된 사람은 과연 하나님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목사들이 다 그런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아무것이나 진지하게 가져다주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데,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뻔뻔스럽게도 겉으로 신실한 것처럼 꾸미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영적인 돌팔이 의사가 주는 이런저런 약을 그냥 그대로 삼켜버립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고전14:20)고 했습니다. 저도 똑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믿으라고 하면서 어떤 내용이 주어질 때마다 항상 그것이 진리인지 시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선과 악을 분별할 능력을 주시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양 떼들에게 독이 든 풀들을 먹이는 일이 없게 되고, 그들을 안전한 초장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그 배운 바를 그대로 유지하고 견고히 붙잡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스스로 바람개비인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견고히 붙잡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붙잡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제는 믿었으나, 오늘은 믿지 않습니다. 내일에 가서도 믿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늘 변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달이 계속 변하듯 그들의 믿음도 계속해서 변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확실하게 가졌으면, 그것을 확실하게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자세를 갖추십시오. 단, 그것이 과연 진리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태양보다도 더 나은 빛이 발견되었다는 식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데에는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신문팔이 소년들이 날마다 새로운 석간 신문을 뿌리고 다니듯이, 새로운 진리를 거리에 뿌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전혀 무가치한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날 ‘현대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영혼에게 말할 수 없는 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무수한 영혼들이 정죄를 받고 있는데도, 이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론들을 만들어내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지옥이 그 문을 활짝 열어서 무수한 사람들을 삼키고 있는데도, 구원의 소식을 전하여야 할 사람들이 ‘새로운 노선의 사상을 추구하는 데’에 여념이 없습니다. 제발,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알고서 그 일을 붙잡읍시다. 온 나라가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는 때에, 빵을 굽는 합당한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계속 왈가왈부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직을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3:7)라는 말씀은 최악의 사람들의 모토인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모델이 되어야겠습니까?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알기에 힘쓰십시오. 그리고 알고나서는 분별하기에 힘쓰시고, 또한 좋은 것을 취하시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깨달아야 하고, 그것을 견고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을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Ⅱ. 설교에 필요한 요건들에 있어서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원대한 디자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떠한 것도 하찮은 것일 수가 없습니다. 조그만 못 하나가 없어도 말은 발굽을 잃게 되고, 전쟁에 나갈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발굽은 땅을 딛는 쇠로 된 하찮은 기구에 불과하지만 아무리 말이 목을 우레로 무장하고 있다 할지라도 발굽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소용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품이나 영성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어도 정신적으로나 언변에 있어서 실패해 버리면, 영적인 유익을 끼치는 면에서 돌이킬 수 없이 망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 어떤 설교자가 하는 것과 똑같이 설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설교를 도저히 참기 어려울 정도로 못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분들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든지, 아니면 잠을 자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잠을 자게 만드는 효과에 있어서는 그들의 설교가 어떠한 수면제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사람도 무한한 인내의 은사를 받지 않은 이상 그들의 설교를 끝까지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설교의 은사가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자기의 소명을 잘못 깨닫고서 목사가 된 분들을 모두들 주변에서 보아오셨을 것입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일이 없는지 확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설교의 능력에서도 전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또한 명확한 스타일을 배양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게 납득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자기 자신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교인이 설교자의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설교자를 탓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임무는 문제를 명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니 말입니다. 여하튼, 명확하게 말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르치는 진리들을 듣는 이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설교에 생수가 있다면, 매우 깊으면서도 진리의 빛이 그것을 명확하게 드러나게 해 줄 것입니다.
또한 명확한 스타일과 더불어 설교의 힘을 배양해야 합니다. 청중에게 힘을 발휘하여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말을 크게 하면 그렇게 되는 것처럼 상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내용의 탁월함을 통해서 힘을 주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설교 속에 던져 넣는 영적인 에너지를 통해서 청중을 설득하여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의 말이 자연스럽고도 살아 있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전문적인 연설가들이 쓰는 트릭과 의도적인 효과나 절정 혹은 미리 계산해 놓은 중지, 극적인 효과 같은 것은 이미 버렸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땅에는 그런 식으로 인위적으로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설교자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머지않아서 그런 설교자들이 멸종된 짐승들처럼 사라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살아 있고, 자연스러우며, 단순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기를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스타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스타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도 설득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보다 더 큰 재능들이 있으면서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능력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것 같고, 그들을 사로잡지 못하며, 그들로 하여금 느끼도록 만들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설교를 하는 중에 마치 듣는 이들을 하나씩 단추 구멍 속으로 집어넣는 듯 진리를 그들의 영혼 속에 곧바로 집어넣는 설교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저 대충 얼버무리고 전반적으로 냉랭하여, 듣는 이들이 그 설교자가 마치 먼 나라에 사는 사람이어서 청중들의 일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그런 설교자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설득하는 능력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주님을 자주 뵈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군병이 다리우스 왕을 죽이려 하자, 어린 시절부터 벙어리였던 그의 아들이 깜짝 놀라며 갑자기, ‘저분이 왕이시라는 것을 아지 못하느냐?’라고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랑이 극진하여 맺혀 있던 혀가 풀렸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본다면, 우리의 혀도 그렇게 풀려서 진지한 설교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두려우심을 안다면, 그로 인하여 사람들을 설득하도록 자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을 설득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분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그들의 비결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그와 동일한 능력을 얻기까지 절대로 쉬지 마십시오. 그들이 매우 단순하고 꾸밈이 없어 보이는데도 그들이 진정 쓰임을 받는 것이 드러나면, 여러분 스스로 ‘저것이 내게도 적용되리라’고 이야기하십시오. 그러나 반대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나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의 사역으로 인하여 영혼이 회심하여 구원받는 역사가 없다면, 여러분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나 스스로 우대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 쓰임 받기를 원하니, 이 스타일을 본받아서는 안 되겠구나.’
그러므로 여러분의 설교가 명확함과 힘과 자연스러움과 설득력에 있어서 언제나 진보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청중에게 잘맞는 그런 설교 스타일을 익히도록 힘쓰십시오. 많은 것이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지식 수준이 높은 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 과일 행상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할 때 쓰는 언어를 사용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어리석은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대로, 탄광촌의 광부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전문적인 신학 용어를 사용하고 응접실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처럼 바보 같은 짓이 없을 것입니다. 휫필드(1714-1770)는 설교의 가장 큰 대가처럼, 사람의 계층에 따라서 그들의 처지에 맞도록 말씀을 전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말의 힘에 있어서 절대로 남에게 뒤지지 맙시다. 우리의 혀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검입니다. 이 검을 예리하게 갈아야겠습니다. 말의 힘을 배양하여, 언어의 땅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뒤지기 때문에 이런 권면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상당한 은사가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은사를 완전하게 만드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Ⅲ. 우리는 도덕적인 면에서도 더욱 진실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목회를 위하여 최고의 자질을 얻기를 바랍니다. 정신적인 자질과 설교의 자질을 얻었다 할지라도, 높은 도덕적인 자질을 소유하지 못하면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의 모든 감정과 습관을 합당하게 절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지도자들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탐닉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이 들릴라의 손에 망하는 일이 없도록 두려움으로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자기가 중요한 존재라는 모든 생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잠27:2). 또한 우리의 격한 감정들을 잘 제어해야 합니다. 감정은 모가 난 연장이어서 그것을 다루다가 다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급하게 끓어오르기를 잘하는 분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직 마귀만 좋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경박스러워지는 성향을 정복하여야 합니다. 거룩한 쾌활함은 덕스러운 것이지만, 전반적인 가벼움은 악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한낱 직업꾼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진지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편협스러운 고집과 비슷한 모든 것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이 외에도 사소한 잘못이 실패의 근원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을 더 많이 쓰임받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그 어떠한 것도 사소한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잘못된 것들을 제거하는 것과 더불어, 특정한 도덕적인 기능들과 습관들을 배양해야 합니다. 심령의 순전함이 없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용기라는 위대한 도덕적 특징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말하는 용기란 올바른 일을 조용히 행하고 말하며, 아무도 좋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곧게 나아가는 진정한 용기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인내, 끈질긴 열정과 신성한 끈기, 자기 부인, 거룩한 부드러움, 강인한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한 가지 능력에 뛰어나십시오. 즉, 부르심을 받은 그 사명에 온 힘을 집중시킬 수 있는 능력에 뛰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모으고, 여러분의 모든 기능들을 집합시키고,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여러분의 역량을 결집시키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존재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께 포로가 되게 하시고, 여러분을 위해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그분의 사랑스런 발 앞에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시기를 바랍니다.
Ⅳ. 이 모든 것보다도, 우리는 영적인 자질에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친히 우리 속에서 역사하셔야 할 은혜들입니다. 확신하건대,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심이 되는 문제입니다. 다른 것들도 소중합니다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귀중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나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사람이나 가리지 말고, 사람을 알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최상의 상태를 살피시고, 사람의 최악의 상태를 살피십시오. 그 사람의 구조나 그 사람의 비밀이나 그 사람의 감정들을 알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자격 요건 가운데서도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질병들의 확실한 치료가 되시는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십시오. 그의 발 아래 앉으십시오. 그의 본성과 그의 사역과 그의 고난과 그의 영광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의 임재 속에서 즐거워하며, 날마다 그와 함께 교제를 나누십시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야말로 모든 학문 가운데서도 최고의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에 거하십시오. 가끔씩 그에게 나아가지 말고, 그 안에 거주하십시오. 예수님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는 영혼이 병들어 있는 법입니다. 주의 빛 가운데 다시 들어가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왕성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우리의 모든 생각과 탐구의 위대한 대상으로 삼는다면, 우리의 탐구에는 한계가 없고, 우리의 생각의 방향에도 편협함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지식의 결과로서 우리는 강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뿐더러, 또한 우리 주님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게 되면, 우리의 목회 사역에 놀라운 기름 부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정신적인 자격 요건에서 부족하다 할지라도, 설교의 능력에 있어서 매우 부족한 상태라 할지라도, 거룩에 의지하십시오. 거룩한 삶이야말로 그 자체가 놀라운 능력으로서 갖가지 모자란 부분들을 채워줄 것입니다. 사실상 거룩이야말로 최고의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설교인 것입니다.
Ⅴ. 실질적인 사역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말보다는 우리가 행한 일들이 결국 우리의 진면목을 드러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있다면 우리는 별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힘써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하십시오. 계획은 그만 마치고 무언가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간절히 바라거니와 여러분 모두 행동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Ⅵ. 여러분의 활동 범위를 선택하는 문제에서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이방 세계의 무수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꺼이 헌신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선봉에 설 담대한 심령들이 없습니까?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개성, 그리고 그 반대
오늘의 주제는 이중적인 것으로 인격을 고취시키는 것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곧 개성, 그리고 그 반대라 하겠습니다.
Ⅰ. 먼저, 우리의 개성(個性)에 대해서 말하기로 합시다.
우리들 모두가 자기 중심주의 같은 것에서 가능한 한 거리가 멀었으면 좋겠습니다. 허영(虛榮)과 교만은 우리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서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제넘게 스스로 참견하는 것이 우리가 피하여야 할 또 한 가지의 자기 중심주의일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예를 들어, 설교 중에 ‘I(나)’를 많이 집어넣어 크게 강조한다든가,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몇 가지 분야에서 훌륭하게 사용하셨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이 그렇게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은 절대로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우리 개개인이 지닌 개성 즉, 자신의 개별적인 인격성을 인식하고 존귀하게 유지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고(EGO), 즉 자아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것, 몸의 한 부분이 아닌 전인으로서 우리의 개인적인 사고와 양심과 태도와 행동의 순전함을 유지해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개성의 문제에 대해서, 첫째로 주의할 것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우리 각자가 반드시 진지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이라는 것을 느낄 때만큼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구주를 잘 전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슬피 울며 회개하는 자세가 회개를 설교하는 우리에게 합당한 자세입니다. 괴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 중에는, 설교자가 자기 가슴을 치는 것을 보고, 또한 그가 자신의 비천함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을 들을 때에 비로소 용기를 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 스스로가 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씻음 받았고 또한 나의 구주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다가올 진노에서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이 모든 사실들이 내 마음에 늘 새롭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우리 개인의 경건이 결코 부족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義)안에 있는 우리의 칭의, 성령의 내주(內住)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는 우리 각자의 성화(聖化), 그리스도와의 필수적인 연합,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영광에 대한 기대와 은혜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전진 등, 이 모든 것들을 잘 알아야 하고 늘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짓 음성을 써서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거나 우리 자신이 체험하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한 것처럼 이야기하거나 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혹시 우리가 어느 정도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느끼면, 목표를 바로 찾아야 하고, 우리가 현재 서 있는 그 상태에서 그대로 회개하며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은혜 안에서 자랐을 경우, 우리가 맛보고 만진 바를 감추어서 거짓으로 겸손을 떠는 것도 악한 일입니다. 사실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내적인 충만함 가운데서 말해야지, 결코 다른 사람의 충만함을 빌려다가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침묵하고 있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유익한 교리가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확실히 입증된 보배로운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저 푸주간에 서서 손님들에게 고기 덩어리를 잘라서 파는 그런 푸주간 주인처럼 말고, 우리가 먼저 그 고기를 먹어야 하고, 굶주린 사람들 앞에서 그 고기가 주는 유익을 우리 자신의 얼굴 모습으로 생생하게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러한 삶의 모습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서, 우리 개개인이 직접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런 사명을 개별적으로 받았고 또한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사라면 누구든지 복음을 전할 사명을 직접 부여 받은 것입니다. 이런 소명으로 인하여 우리의 설교가 정말 엄숙한 역사(役事)가 되는 것입니다. 이 아침 그가 친히 주시는 명령 즉,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들었던, “내 양을 먹이라”, “내 양 떼를 먹이라”는 명령을 새롭게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소명의 문제를 언제나 똑똑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1-12)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정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설교할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개성과 관련하여 우리 자신의 수고의 영역에 대해서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혼들을 살피기 위하여 세움 받은 목회자들이며, 동시에 특정한 곳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목회자들입니다. 여러분 전체를 놓고 보면, 온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여러분 각자는 성령께서 여러분을 감독자로 세우신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의 양 떼들을 먹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된 수고가 그곳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곳이야말로 여러분이 책임을 맡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각자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곳을 매우 높이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 주께서 여러분에게 주님의 일 가운데 어떤 부분을 맡겨주셨는가를 깨달으시면, 여러분의 영혼 전체를 그 일에 헌신하십시오. 어느 날 세브레(Sevres)의 한 유명한 공장을 견학한 일이 있는데, 한 화가가 매우 아름다운 화병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으나 그 사람은 저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낯선 사람을 쳐다보는 일보다 그림 그리는 일이 그에게는 훨씬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 화가는 한 번도 자기의 일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할 사명을 띤 우리 모두들에게서 이러한 일념과 헌신의 자세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 한 가지 일을 내가 하리라”는 자세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에 전심을 기울여 헌신한다면, 여러분이 맡은 그 일이 작고 하찮게 보인다 할지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아주 조그만 시계를 만드는 일에나, 마을의 시계탑에 들어가는 큰 시계를 만드는 일에나 똑같은 기술과 노력이 들어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 큰 것보다도 아주 미세한 작은 것이 더 큰 놀라움을 자아내는 법입니다. 양(量)보다는 질(質)이 훨씬 더 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특정한 일이 하찮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없다거나, 아니면 철저하게 잘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져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한 사람이 앉아 있는 앞에서도 올바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법입니다. 진정 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잘 해야 할 가치도 있는 것입니다. 거리를 빗자루로 쓰는 일을 해야 한다면,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쓰는 것이 좋습니다. 저 변두리의 페드링턴(Peddlington)에서 설교하는 일을 맡았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곳의 유익을 위해 힘쓰고 있다는 것을 페드링턴으로 하여금 알도록 해야 합니다. 수많은 목사들이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되는 교인들을 놓고서 열심히 수고하여 명성을 얻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목사는 큰 교회를 맡아서 처음에는 위대한 나팔 소리가 났으나 결국 침묵으로 이어져 완전히 실패하고 만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맡은 일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을 다 던져 넣으십시오. 그 일이 크든 작든, 그 일에 충성을 다하면 그 일을 통하여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여러분, 순경(順境)이든 역경(逆境)이든, 여러분이 맡은 성채를 든든히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시대를 탓함으로써 자기들의 소홀함의 핑계로 삼으려 합니다. 아무리 불평해도 시대를 바꿀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옆에서 그를 섬기고 있는한, 여러분은 안전하며 악이 여러분을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계속 살피시고, 일을 계속하십시오. 절망의 틈이 눈 앞에 보이더라도 말입니다. 시대와 때는 하나님께 맡기시고, 여러분 자신의 일을 계속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우리 각자의 역량을 잘 살펴서, 그것을 가능한 한 최고의 상태로 유지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일이 주어져 있을 뿐 아니라, 각 사람마다 자기 일에 적합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인이 쓰실 그릇다워야 하고, 우리들 각자가 그대로 적절하게 주를 위하여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모습 그대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일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음악에서 최악의 음은 자기 음이 아닌 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음을 빌려다가 망쳐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것을 전하시고, 여러분 자신의 방식으로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중에 주께서 그 말씀에 복 주시기를 여러분이 친히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의 사역을 위하여 여러분의 역량이 최고조로 발휘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어주는 데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나머지, 받아들이는 일을 아예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연구와 사적인 기도와 정당한 준비를 뒤로 제쳐둔다는 것은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상태에서 행하는 사역 전체가 다 시간 낭비가 되고 말 것입니다.(예화, 톱날이 무뎌져서 톱질이 잘 안되는 상태-날을 갈면 지금 하는 것보다 일이 훨씬 쉬울텐데)
여러분의 역량을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십시오. 특별히 영적인 면에서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떠한 사람들보다도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야 할 이유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생명수를 다른 이들에게 날라주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자주 우물에 나아갈 수밖에 없고, 일반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큰 통을 갖고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경건의 용량을 잘 살피시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지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우리의 개인적인 책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일을 잘하든 못하든 판단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일이 하나님 앞에 제시되어야 하고, 불로 시험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영혼들이 맡겨져 있고,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영혼들을 복 주시려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들을 통해서 그들이 회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그들을 회심시키실 만한 그런 방식으로 행하고 계시고, 살고 계시고, 설교하고 계십니까? 이것이야말로 우리들 각자가 대답해야 할 질문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개개인의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것이 강제적으로 매우 고통스럽게 우리에게 와 닿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 생전에 우리의 일을 어떻게 수행했느냐 하는 것은 영원토록 문제가 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시고 그 중심을 살피시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이도다”(단5:27)라는 판결이 우리들 중 누구에게도 임할 수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신실함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개인의 책임을 올바로 깨닫게되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를 삼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심판대 위로 올라가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교인들이 별로 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자기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제가 회심하는 사람들을 별로 보지 못한다면 제 자신을 극심하게 책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의 교회가 우리 교회보다 작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적은 회심자를 얻은 형제들이 많은 회심자를 얻은 형제들을 판단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습니다. 각자가 자기의 처소를 알고, 자기 자신의 일에서 기쁨을 누리고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이 사라질 것입니다. 시기는 참으로 혐오스러운 것이요, 궤양처럼 좀먹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이웃이 하나님의 존귀함을 받으면,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이 그 만큼 존귀를 받지 않으면 겸손해지고, 더 진지하게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축복이 임하지 않더라도, 동료가 축복을 받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Ⅱ. 이제 개성과 반대되는 것을 말해야겠습니다.
사실 이것은 반대가 아니라 동격(同格)이며, 역(逆)이 아니라 전환(轉換)입니다.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어 그냥 사용하기로 합니다.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 할 일이 있고 우리들 각자가 그 일을 하기에 합당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서 유일한 일꾼들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느끼도록 합시다. 우리는 그저 신비한 몸의 한 지체일 뿐이요, 거대한 군대의 한 병사일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모든 신실한 백성과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루터와 칼빈 그리고 위클리프, 휫필드와 웨슬리가 모두 우리의 동료들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모든 성도들이 우리와 한 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천군 천사들이 우리 주위에 둘러서 있습니다. 영화롭게 된 영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돕는 자들의 막강한 무리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봅시다”(히12:1-2).
또한 덧붙여서 말씀할 것은, 우리들이 비록 개인들이어서 우리의 개성을 유지해야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복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따금씩 정말 지쳐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위대한 진리에로 돌아가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그 진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게으름을 조장하는 것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움을 얻는 침상이 되어야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뒤에 계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여러분 속에 계시다는 것을, 또한 그가 여러분과 함께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정말로 복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우리를 담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십니다(마28:18-19).
오늘 아침 저는 마치 그가 이 자리에 계셔서 여러분을 그의 군병들로 바라보시며, “내 이름으로 정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여러분, 가십시오. 저 마을들로 달려가 사람들을 일깨우십시오. 도시로 나아가 항복할 것을 선포하십시오. 대도시들로 나아가서 “여러분이 마음을 드리기를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십니다”라고 선포하십시오. 이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여러분의 말씀을 효력 있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 개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좋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殿)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존중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의 영향을 받아 행하는 일이, 여러분 혼자서 하는 일처럼 미약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이 없이 육천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설교는 그 말에 따라서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내적인 힘이 그 영혼과 생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판단하실 때에, 설교라는 잎사귀들과 더불어 거하시는 성령의 진정한 꽃과 열매가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결론을 맺으면서 드릴 말씀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즐거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육해야 하는 모든 양 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떼들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이끌어야 할 영혼들은 주님의 보혈로 값주고 사신 존재들이요, 우리가 세워야 할 신령한 집은 주님의 거주를 위한 것입니다. 모두가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주님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정말로 기쁩니다.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 시대의 악을 이기는 법
세상의 일들이 변하고, 우리의 눈에 비치는 상황들이 선한 쪽으로든 악한 쪽으로든 바뀝니다. 따라서 오늘날 시대에 그 나름대로의 위험과 유혹거리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저는 우리가 지금까지 싸워본 것보다 훨씬 더 처절한 싸움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싸움에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여러분 각자에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우리의 신뢰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가 그 자신의 대의(大義)에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악 가운데 첫째로, 우리는 미신이 다시 기승을 부리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주변에 있는 교회들은 로마교회의 의식주의(儀式主義:ritualism)의 힘과 결연한 의지를 보이며 로마교회의 모든 교리들을 다 전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최악의 현상은 제도권 교회 내에서 성례지상주의(sacramentalism)가 성장하고 있는데, 이것이 나무에 기생하는 버섯 같은 것이 아니라 나무의 원 가지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 전체를 그 자연적인 의미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저 평생에 한 번 읽을까 말까 하는 정도의 것들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괴리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의식주의와 허례의식에 물들어 있어 그저 자세와 치장, 예복 등 온갖 쓰레기 같은 것들만 믿는 무리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 미신은 인간의 마음에 본래부터 있는 우상숭배와 잘 들어맞아서 그것들을 동경하게 되고, 따라서 눈에 보이는 사제와 외형적인 상징물들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즉 이 미신은 외형적인 예배를 제시하고 사람들을 위하여 신앙의 행위를 해 주는 사제를 공급해 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지 않아도 무방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들은 참된 중생이 없이 사람을 위로해 주고, 그리스도의 의에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았는데도 사람에게 헛된 소망을 주어 들뜨게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악도 이와 똑같이 끔찍한데, 곧 가득한 불신앙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비국교도 교회들 속에 들어오고 있고, 그 교회들의 강단에 올라서고 있으며, 스스로도 교양과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여기는 교인들에게서 지도자로 인정받는 이들의 증언을 왜곡시키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신학은 불변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마치 바람처럼 변덕이 심하여 견고한 가르침을 경멸하고 ‘발전’이 그들의 표어였습니다.
그들이 의도하는 ‘발전’이란 과연 무슨 의미입니까? 진리로부터 벗어나는 발전일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곧 사실상 거꾸로 퇴보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더 높은 사상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밑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발전은 우리가 바라는 참된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 발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설교는 처음에는 사람들의 매력을 끌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잘못된 것은 전혀 따지지 않고 진기한 면을 지닌 사람에게 무조건 매혹되니까요. 하지만 조금만 지나보면, 사람을 계속 유지할 만한 생명력도 능력도 없는 것이 드러나고 맙니다.
그리고 소위 과학의 발견들이 속속 이루어지고 있어 우리 조상들의 케케묵은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스스로 입증하지도 못할 것들을 대담하게 주장하고, 무턱대고 믿을 것을 요구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성경을 제쳐두고, 소위 과학자들의 항상 변하는 가르침에 따라 우리의 믿음을 형성시켜야 한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과학적인 불신앙이든 다른 유의 불신앙이든 담대히 맞서 싸워야 하고, 또한 주의 이름으로 그것과 맞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악이 있는데, 이는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나 매우 언짢은 것입니다. 곧, 분열의 정신이 하나님의 교회에 퍼져가고 있고, 그것이 이곳저곳에서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불화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어떤 사람이 회심하게 되면, 자기가 가장 동의하는 교회에 소속되어 그 교회와 연관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곳에 나가기를 원치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이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수고는 마치 추수할 곡식을 저장해 놓을 창고가 없이 씨를 뿌리고 거두는 것과도 같습니다. 물론 그 수고들이 유익하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불완전한 것입니다.
정말 진지하게 주목해야 할 네 번째 악은 이 나라에 악행이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두 가지 형태로 자라고 있는데, 그 하나는,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는 자들 중에서 세상적인 사고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사치에 탐닉하고 있고, 화려한 습관과 복장과 연회 등에 빠져서 자기들이 청지기들로 맡고 있는 물질들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풍성하게 드린다면, 그 사람이 다른 면에서 풍성하게 소비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라 여깁니다. 우리는 이처럼 자라나는 악에 대해서 사려 깊고 지혜로우면서도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교회들에서 모든 경건한 자세들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 이외에, 술 취함이라는 국민적인 죄악이 이 나라에 계속 증가하고 있는 끔찍한 상황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술값에 들어가는 비용을 보십시오! 그 정도의 비용이 매년 소비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술 취함과 범죄, 방탕과 사망의 기록을 끔찍하게 만들어 놓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늘어가는 술 소비의 주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식품점에서 술을 팔도록 허용한 법령이야말로 현대의 법에서 가장 악법 가운데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제가 아는 지식으로는, 독주를 아주 손쉽게 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제도 때문에 여자들 사이에 술에 취하는 죄악이 몇몇 경우들에서 나타났고, 또한 어떤 경우들에는 권장되기도 했습니다. 여자들 가운데서 술에 취하는 빈도가 잦다는 것은 곧 술에 취하는 암적인 죄악이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간다는 증거인 것이다.
술 취함 때문에 생겨나는 범죄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빈곤이 생겨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라 전체가 주 앞에서 악취를 풍기고 있고, 이 술 취함의 죄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이 악을 제거하는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목사들이 이를 치료하는 데에 그들의 역량을 최고로 기울이지 않는다면, 세상은 불신앙과 기타 악들에 대해서 외치는 그들의 부르짖음이 매우 진실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늑대를 대항하여 외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사자를 대항하여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현 시대의 악한 현상들입니다. 그러면 이제 치유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러한 미신과 불신앙과 분열 현상과 또한 증가일로(增加一路)에 있는 세상적인 사고와 술 취함을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저에게는 오직 한 가지 치유책밖에는 없습니다. 곧, 우리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몸의 여러 가지 질병들에 대해서 오로지 한 가지 치유책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 돌팔이 의사나 하는 짓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문제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갖가지 악들이 아무리 서로 다를지라도 그 모든 악들을 다 처리할 만큼 복합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모든 악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직 살아 있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에서 복음이 충실히 받아들여진다면, 그 복음이 모든 노예 제도와 모든 전쟁을 사라지게 할 것이며, 모든 술 취함과 사회적인 악들을 다 제거할 것입니다. 사실 복음으로 제거되지 못할 도덕적인 저줏거리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복음의 정신은 우리 이웃의 복지와 관계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주목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사회의 개혁을 촉진시키게 되고, 그리하여 민족들을 치유하는 나무 잎사귀들이 그 유익한 목적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고수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이야말로 한 가지 보편적이고 결코 실패가 없는 치유책을 강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의 도리를 전하십시오. 여러분에 대해서 무어라고 하든 단호하고도 확고하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나팔처럼 성경의 진리를 명확하게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거기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동시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들과 동료 교인들이 복음의 증거에 화합하고 또한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마음을 다하게 되도록 그렇게 교회에서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복음의 지식에서 자라야 합니다. 복음의 전체를 파악하고 잘 이해해서 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소한 것이라 생각하는 문제도 결코 사소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주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치신 대로의 복음 그 전체를 전하시고, 그 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전하지 마십시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영감된 말씀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도록 열심히 찾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 고귀한 복음이 마치 동굴과도 같아서 성령의 횃불을 들고서 들어가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을 이끄사 연구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그 은밀한 깊은 것들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복음을 잘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에 정통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그런 지식이 있어야 하고, 보통 하는 말처럼 우리의 손가락 끝에까지도 그런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화들을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풍부해야 합니다.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잘 교육받은 서기관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점을 잘 명심하도록 합시다. 여러분 중에 누구라도 사사로이 행하는 연구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과 말씀을 깊이 살피는 일을 그저 가볍게 처리해온 분이 계시다면,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금방 소모되거나 곰팡이가 피어 못쓰게 되고 말 것이니 말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만나를 모아들이십시오. 날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새로운 만나를 거두어 들이십시오. 만나가 떨어지는 곳에 가지 못할 경우에는 형제의 바구니에서 얻어서 공급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칙은 각 사람마다 자기 스스로 직접 만나를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원하시면 책들에서 빌려오기도 하십시오. 하지만 책을 전해서는 안 됩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내적인 지식을 많이 얻고, 그 다음 그것을 여러분의 교인들에게 쏟아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더 깊게, 그리고 더 체험적으로 복음을 대면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복음 진리를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종들이 그렇게도 많은 시련을 겪게 되는 것이 바로 체험을 통해서 많은 진리들을 진정으로 배우게 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맑은 날씨에 많은 것을 배우겠습니까? 비바람이 치는 때에 가장 많은 유익을 얻지 않습니까? 병들었을 때에나 가까운 사람을 여의었을 때에 혹은 심령이 침체에 빠졌을 때에야말로, 고요함과 기쁨 속에서는 절대로 배울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까? 우리는 기쁨을 통해서는 물론 슬픔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몸소 시험하여 확증한 자로서 그 말씀을 다루는 목사는 교인들이 곧바로 알아봅니다. 심지어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라도 그 영혼의 의사의 손길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직접적인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부패함을 실질적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그 영광스런 능력과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풍성함에 대해서도 우리 심령 속에서 계속해서 더 절실하게 깨달아 가야 합니다. 능력으로 설교하려면, 그리하여 이 시대의 악한 것들을 대처하려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그저 오스트레일리아의 황야에 사는 벌거벗은 사람들에게만 관계되는 그런 것으로 제시한다면,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리가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복음을 계속해서 순전하게 유지해 가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지극히 간단한 초보적인 도리들을 자주, 매우 자주, 가르쳐야 합니다. 영국에 그렇게도 많은 설교가 있었지만, 수많은 대중들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초를 배워야 할 사람들입니다. 영혼 구원에 가장 관련이 깊은 그런 주제들을,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유익이 되는 그런 주제들을, 중점적으로 가르치십시오.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긴밀하게 전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과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 도리를 계속해서 지적하십시오. 이것들을 올바로 전할 때에 언제나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함께 할 것입니다. 모든 진리 하나하나가 다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하나를 정당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진리들을 제쳐두고 부차적인 진리에 치중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들이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수백 가지의 고귀한 사색이나 가르침보다도 무한히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가르치느라 수백 번의 주일을 허비하는 것보다도,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무한히 더 고귀한 것입니다.
저 유명한 베르나르(Bernard:1090-1153)에 대해서 한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그가 어느 날 어느 교회에서 놀라운 언변과 시적인 언어로 멋지게 설교했답니다. 모든 교인들이 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자, 베르나르는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교회당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는 황야로 들어가 홀로 밤을 지새우며 금식하며 자기의 슬픔을 달랬습니다. 그 이튿날, 설교 시간에 그는 다시 강단에 올라가 그저 평범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 전날 그의 설교를 들은 귀족들은 그 이튿날의 설교가 아주 초라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비천한 백성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였고 거기에 잠겼습니다. 비판하는 자들이 형편없는 설교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교회당 밖을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즐거운 마음으로 빵을 먹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가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어제는 내가 베르나르를 전했으나,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라고 했답니다. 여러분, 교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기쁠 것입니다. 누가 눈살을 찌푸리든, 여러분은 편안히 잠자리에 들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님이 여러분을 인정하셨을 것이니 말입니다.
복음에 충실하십시오. 더욱더, 더욱더 복음을 충실하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다른 어떠한 것도 말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하십시오.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 주십시오. 몇몇 사람들이 복음에 질려서 역겨운 지경이라고 불평을 해도 전혀 개의치 마십시오.
복음에 대한 설교와 복음이 행하는 일에 대한 설교들을 지금까지 수없이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아무것도 보탠 것이 없는 상태에서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이 이룬 일과 복음이 장차 이룰 일에 대해서 놀라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 굉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복음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복음 그 자체를 설교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죄를 깨닫는 일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서 즉시 죄를 깨닫는 일을 일구어 내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이어 생기는 평안을 묘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람이 믿어야 할 진리 그 자체를 증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여러분이 묘사하는 그 평안을 실제로 누리도록 만드시기 바랍니다. ‘말만 하는’ 설교는 적어야 하고, ‘행하는’ 설교가 더 많아져야 합니다. 사람들의 영혼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씨름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우리는 더욱더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전하도록 항상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어느 유명한 설교자는 화려하고도 위엄 있는 언어를 구사하고 세련된 문장을 구사하여 때때로 젊은이들이 그 스타일에 매료되거나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보이는데, 여러분은 이런 것을 언제나 혐오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멸망으로 향하는 죄인들에게는 시나 고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임무입니다. 그 점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병사가 싸움에도 이길 수 있고 동시에 아름답게 노래도 할 수 있다면, 노래를 부르도록 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노래를 하다가 원수들에 대한 공격을 놓치는 일이 발생하면, 노래는 즉시 중단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젊은 군사 여러분, 노래를 던져버리고 말안장에 올라타십시오! 강단을 여러분의 군마(軍馬)로 여기시고, 싸움에 몰입하여 용맹스럽게 좌우를 내리치십시오. 그리하면 돌아올 때에 뒤늦게 온갖 화려한 행렬을 이끌고 나갔다가 그저 수치스럽게 돌아온 영웅보다 대장께 더 큰 존귀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지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곧, 복음이 이 시대의 악을 대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강단에서 내려와 있을 때의 우리의 삶이 복음을 모범으로 보여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형제들 중에는 그들의 자기 부인과 자기 희생의 삶을 통해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한 형제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년 수입이 이십 파운드밖에 안 되는 직분이지만, 저는 그것을 위해 저의 직장을 버렸습니다. 그 직분이 제가 더 폭넓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자리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세워놓은 기초 위에 집을 짓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새로운 영역을 정복해나가겠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각오인지요!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 찬양합니다. 여러분에게 열심이 있고, 가난을 이기는 끈기가 있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니 말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들에게서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정신이 나타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마음이 기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온갖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하나도 자랑하지 않으며, 누구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데도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그 일을 계속하십시오. 필요 이상으로 고난을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그러나 여러분의 고난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기쁨으로 고난을 당하시기 바랍니다. 정복하기 위해서 몇몇의 희생이 없을 수가 없을 경우라도,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말고 기꺼이 자신을 희생시키십시다. 성벽 바깥 도랑을 죽은 시체들로 가득 채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성을 정복할 수가 없다면, 우리가 그 도랑으로 뛰어듭시다. 가난이나 조롱이나 힘든 수고가 있더라도 절대로 움츠러들지 맙시다. 성채 꼭대기에 그 옛 깃발이 올라가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류가 발로 짓밟혀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그것은 여러분이 정말 열심히 섬겨 마땅한 대의(大義)입니다. 하루에 천 번 피를 흘려 순교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섬겨 마땅한 대의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대의요, 그리스도의 대의요, 인류의 대의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이 이 멸망을 향해 가는 세상을 구원하도록 돕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 복음의 정신으로 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복음으로 가득 차도록 힘쓰십시다. 언제나 제 스스로 발견하는 일입니다만, 제가 성경 본문 속에 누워서 그것으로 흠뻑 젖어 있을 때에 가장 좋은 설교를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본문을 얻고, 그 의미와 의의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 본문으로 목욕을 한 후에, 그 속에 누워서 그 본문에 저를 흠뻑 적시도록 합니다. 그렇게 하면 본문이 저를 부드럽게 하고 견고하게도 하고, 여하튼 그 본문이 제게 해야 할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 그 본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본문의 정신이 여러분을 가득 채우게 되면, 어떤 특정한 단어나 문구의 미세한 의미에 대해 개의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생각들이 떠오를 것이고, 자기들에게 맞는 옷을 스스로 찾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향기에 흠뻑 젖어드십시오. 그러면 그 향기가 여러분에게서 풍겨나게 될 것이고 사방으로 퍼져갈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가리켜서 기름부음(unction)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사는 형제의 말씀을 듣기를 정말 사모하지 않습니까? 단 몇 분만이라도 그런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그가 섬기는 주님처럼 그의 길에서 향기가 나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 거하십시오. 그리고 진리가 여러분 속에 거하도록 하십시오. 진리의 정신과 영향력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 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으시면 그것을 설교하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은 근본적인 자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더라도, 마치 양초 심지가 기름을 흠뻑 빨아들이는 것처럼 여러분이 복음에 흠뻑 젖기 전에는 복음을 전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복음에 흠뻑 젖어들어야만 복음의 불을 밝히고 빛을 드러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복음은 그저 믿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저의 존재와 뒤엉켜서 저의 의식의 일부가 되었고, 저의 생각의 일부가 되었고, 그래서 절대로 제게서 떼어낼 수가 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옛날 정통 신앙고백을 믿는 믿음은 제게 있어서는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제시되는 온갖 새로운 견해들을 세세히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청을 거절합니다. 그런 견해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것들 속에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는 것을 찾을 수가 없고, 그저 인간 본성을 높이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형식들이 그 간교한 재주로 나의 믿음을 공격한다 해도, 나는 그것들을 허무요 거짓말이라 부를 것이요, 복음으로 내 마음을 온전히 묶으리로다”
복음의 진리들이 이미 우리의 삶이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체험이 그 진리들을 우리의 존재와 하나로 묶어 놓았기를 소망합니다. 고난 가운데서 스스로 낮아지십시오. 그러면 오로지 은혜로운 진리들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간절히 부탁하거니와 그 옛 복음을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이 그것을 가득 채워지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그 복음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심지가 기름으로 흠뻑 젖게 되면, 불을 붙일 수 있습니다. 하늘로서 임하는 불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 속에서 불길을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그 옛날 호렙 산의 가시덤불에 불이 붙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등할 경우, 하나님의 불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이 가장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그 불이라 불리는 것은 미묘하고도 신비하기 그지없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힘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모든 힘의 원동력이 되는 힘인 것 같습니다. 태양에서 나오는 빛과 열기가 모든 힘의 근원이니 말입니다.
여러분, 온갖 악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것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악들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책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더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힘써야겠습니다.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전합시다. 할 수 있으면 책도 쓰시고, 능력이 닿는 대로 무엇이든 합시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일을 다 하지 못하더라도, 오직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마귀는 복음 전하는 일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설교만큼 그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설교야말로 우리의 위대한 무기입니다. 그러니 그 무기를 끊임없이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설교야말로 주님이 쓰시는 대포입니다. 옛 바벨론의 성벽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에 충실하십시오. 그 일을 계속하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설교할 수 없을 때까지, 설교하고, 설교하고, 설교하고, 설교하고 설교하십시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 거기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천사들에게 구속의 사랑의 그 신비한 것들을 알게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새로운 출발
함께 그리스도의 종 된 여러분, 우리의 사역을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가능한한 최상의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라도 우리는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최상의 상태 아래로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들로서 언제나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하며, 우리의 심령에 녹이 슬어 있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또한 우리의 마음의 칼날을 예리하게 하여 주께서 명하실 때에 즉시 응답하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가 그렇게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오늘 아침의 말씀의 제목을 “새로운 출발”로 혹은 다른 말로 하면, 갱신, 부흥, 새로운 시작으로, 혹은 첫 사랑에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잡은 것입니다.
이 주제는 우리 모두에게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침체 상태에 빠지기가 너무도 쉽기 때문입니다. 조심하거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침체에 빠집니다. 그러기를 바라지 않아도 침체에 빠지고 맙니다. 농장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수고와 경계가 필요합니다. 조금만 일을 게을리하거나, 그저 그냥 내버려두거나, 계속해서 곡식을 베어내기만 하고 거름을 주지 않고 쉬게 해주지 않으면, 결국 비옥하던 밭이 메말라버리고 정원이 황무지로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드리는 기도로 여러분의 영혼을 감아주는 일을 게을리 하기만 해도, 금방 침체에 빠집니다. 마음을 제대로 가꾸기를 소홀히 하기만 해도 가시와 엉겅퀴가 마구 돋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적인 삶을 소홀히하면, 여러분의 존재 전체가 썩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의 충만한 상태를 지속할 에너지가 과연 우리 중 누구에게라도 있겠습니까? 마치 천사처럼 타오르는 사람도 불꽃이 다소 누그러지는 순간을 경험하리라 믿습니다. 태양도 언제나 똑같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마치 찬란하게 비치는 빛처럼 항상을 빛을 발하는 사람도 언제나 똑같이 밝은 것도, 언제나 정오처럼 빛을 발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자연과 비슷하므로, 우리에게도 변화가 있는 것이요, 또한 언제나 높이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삶이 언제나 절정(絶頂)에 달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심령이 썰물의 상태에 있다고 해서 침울해 있지 맙시다. 삶의 파도가 다시 밀려올 것이요 그리하여 지금보다 더 높은 상태에까지 이를 것이니 말입니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도, 교회들에게 번성기가 있고 동시에 메마른 기근의 시기가 있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부흥의 시기도 있었지만, 그 중간 중간마다 휴지기도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현재 경험하고 있는 모든 침체 상태를 안타까워 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어둠 속에 헤매면서 빛을 전혀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또한 더 밝은 날들을 주시기를 그에게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점들을 다 감안하고, 여러 가지 정황들을 고려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합당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데 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영적 힘이 약화되는 현상은 어느 정도는 순전히 육체적인 요인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 곧 청년 시절 누리던 왕성한 활력이 사라진 데에 그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서 젊은 시절의 활력과 열정, 순발력과 용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활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또 하나의 흔한 원인은 젊은 시절의 성공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마치 좁은 연못에서 처음에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지만, 남아 있는 고기가 별로 없게 되기 때문에 계속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때때로 그와 비슷한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데, 날마다 그물을 던져서 고기들을 가득 건져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임무가 그저 일상적인 일과가 되어 버리는 것 때문에 침체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매일 설교를 하기 때문에 그 일을 지겨운 일로 생각하며 타성에 젖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교하는 일은 기쁨이 되어야 마땅한데 그것이 하나의 힘겨운 임무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들의 경우에는 다른 동료들과의 따뜻하고도 친절한 심령의 교류가 없기 때문에 침체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외로움이야말로 가장 가혹한 시련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귀한 주제에 대한 대화로 마음에 큰 힘을 얻는 영적 친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것들은 결코 우리가 침체에 빠지는 일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적인 쇠퇴가 우리의 연약한 영적 상태의 결과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첫 사랑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고, 우리의 단순한 믿음에서 벗어나 방황해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반(反)하여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반하여 행하시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기도가 없어서 비가 그쳐졌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돛을 펼치기를 게을리했기 때문에 하늘의 바람이 불지 않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축복을 가로막는 불신앙이 우리에게 없었습니까? 어쩌면 과거보다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덜 느끼며, 그의 일을 하는 데에 열심이 식어졌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덜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별로 누리지 못하고 곧 침체 가운데 빠지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뿌리가 든든하지 못한데 어떻게 가지들이 잘 자랄 수 있겠습니까?
자기 탐닉에 불신앙이 뒤섞인 것은 아닙니까? 한때 누리던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처음에는 거룩하게 시작했으나, 지금은 그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렇게 불결한 곳이니 푸른곰팡이가 피게 될 것이 당연합니다. 이기심이 우리의 강건함을 깨뜨릴 것이고, 우리의 유익함을 망칠 것입니다.
끔찍한 사실은, 때로는 이런 침체가 결국 파국으로 끝나버리고, 더 나아가서 교회에 더 큰 해악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목사의 사역이 영적 부패에 계속해서 먹혀 들어가는 것입니다. 즉 인도의 흰개미가 가구를 갉아먹는 것처럼(겉으로 보면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속을 다 갉아먹었기 때문에 모두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져 내리고 만다), 목사들이 목회 현장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만, 그들의 목회 사역에 진정한 열심이 사라져 버렸고,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어 있는 것이고, 주위에 온통 죽음을 뿌리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존경받는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이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여러분 중에 누구라도 높은 산에서부터 내려온 분이 계시면, 이제는 다시 그리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첫 사랑에서 떨어졌다면, 즉시 젊은 시절의 그 열정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일 것입니다. 우리가 내려온 것이 아주 미약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잃어버린 곳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도움을 구하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행복 때문에라도 이것이 필수적인 일입니다. 마음이 침체 상태에 있고, 믿음이 연약해져 있고, 심령에 의심이 있는 형제에게 묻고 싶습니다. 불행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가장 순결한 기쁨과 가장 견고한 만족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면,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에게 정해진 운명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면 반드시 지옥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그리스도를 떠나 방황해왔다면, 즉시 다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침체 상태에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처음에 소망으로 가졌던 우리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과 비교할 때에 과연 제대로 그런 상태에 이르러 있습니까? 처음 신학교에 들어올 때, 혹은 처음 목회 사역을 시작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때에 여러분 자신에 대해 얼마나 높은 표준을 세웠었는지를 기억하십니까? 목표는 아주 높게 잘 잡았는데, 거기에는 훨씬 못 미치는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세운 이상에도 못 미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이상을 여러분 자신의 모습과 비교하게 되면, 정말이지 머리를 숨기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죄인들이 자기 자신을 대적하는 그 큰 모순을 다 견디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반대를 받으면 곧바로 화가 납니다. 주님은 그의 양 떼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이 곁길로 나가면 그들을 따라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부름을 듣고 모이는 사람들에게조차도 불쌍한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이지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우리 주님의 영광에 못 미칩니다. 그리고 그를 닮고자 우리가 세운 미약한 이상에조차도 너무나 못 미치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사사로운 기도들에서나, 그의 공적인 삶에서나, 그의 사역이나 그의 가르침에서나 마땅히 그를 본받아야 하는데도, 우리는 전혀 거기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를 닮는 일에 이처럼 모자란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얼굴이 붉어지고 슬피 울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침체 상태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상태가 가장 최상의 상태에 못 미친다면, 그 어떠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그냥 거기에 머물러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의 사역이 제대로 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한때 우리의 온 힘을 다하여 설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 설교를 시작했을 때, 얼마나 열정과 생명이 넘쳤습니까? 과거를 돌이켜 볼 때에, 우리의 젊은 시절이 지금 현재보다 더 절실했고 더 강렬했다고 느껴지면, 우리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설교가 더 나아졌다고 비평자들은 말합니다. 그리고 설교의 사상이 더 깊어졌고 또한 표현이 더 정확해졌습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보다도 더 나은 언어를 구사합니다.
하지만 그 젊은 시절 우리가 가졌던 그 눈물이 어디 있습니까? 처음 설교하던 시절에 넘쳤던 그 가슴을 치던 뜨거운 열정은 지금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다해 토해내던 그 시절에 자주 느꼈던 그런 강렬한 신앙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때로는 과거에 행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리라 다짐하고 강단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삼손이 과거에 힘을 쓴 것처럼 다시 힘을 쓰리라 다짐하고 나아간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과거에 자기를 묶은 밧줄을 끊어버렸습니다. 그 일을 다시 하려 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미 그를 떠나셨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똑같이 전혀 힘을 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께서 여러분을 떠나시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도, 우리의 사역도 모두 허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황소를 향해 여러 차례 창을 던졌는데도 전혀 맞추지 못하자, 군중들이 그 사람에 야유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갈리에누스 황제는 그 사람을 자기 앞으로 불러서 그의 머리에 월계관을 씌우고는, “그렇게 큰 목표를 향해 그렇게 여러 번 던졌는데도 맞지 않다니, 그대야말로 가장 솜씨가 좋은 자로다”라고 말했답니다. 전혀 마음을 찌르지 않고, 전혀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지도 않고, 전혀 바리새인에게서 자기 의를 도려내지도 않고, 죄인을 감화시켜 그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게 만들지도 않는 그런 목사들에게 우리는 과연 무슨 면류관을 씌워주겠습니까? 우리는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베냐민 지파의 왼손잡이들처럼 되어야겠습니다(삿20:16).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고 또한 풍성히 있지 않으면 이런 상태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보살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목사인 사람은 자기가 책임 맡은 사람들을 위하여 더욱더 자기 자신을 보살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비록 그릇된 교리를 지녔다 할지라도, 고양이나 개처럼 그냥 죽을 그런 피조물들의 영혼이 아니라, 값을 따질 수 없는 그 불멸한 사람들의 영혼들이-우리의 책임에 맡겨져 있습니까? 영원의 문제들이 우리의 사역에 달려 있으니, 과연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겠습니까? 우리의 영적인 건강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만일 외과 의사로서 환자에게 수술해야 할 상황이라면, 마음이 불쾌하다거나 혹 손이 떨리는 경우에는 절대로 칼이나 환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을 것입니다. 털끝만큼만 실수를 해도 고귀한 생명이 사라질 수 있는 그런 순간을 위해서는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하며 가장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의가 전진하느냐의 여부가 우리가 최상의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에게 고결한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중의 가장 약한 자들을 다윗 같이 만드시고, 또한 다윗의 족속을 하나님 같게 만드시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숙12:8).
결론을 맺기 전에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곧 지금 이 시간이 우리들 각자가 새로움을 얻는 시간이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부흥을 구하도록 합시다.
우선 우리의 모든 실수들과 과오들을 회개하는 일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엎드림으로써, 다시 힘을 얻고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처음 가졌던 단순한 믿음으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잃어버린 우리의 힘을 회복합시다.
그 다음으로, 우리를 거룩히 구별하여 드리는 헌신을 새롭게 합시다. 여러분을 문자 그대로 신학교의 문설주를 여러분의 피로 물들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인 종이 섬김의 기한이 다 되어 해방될 때가 되었는데 그 주인과 그 주인의 자녀들을 너무 사랑하여 계속 남아 봉사하기를 택하면, 결국 문설주에다 귀를 대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었는데, 그 종의 심정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 각자의 귀에 구멍을 뚫으셔서 우리가 영원토록 그의 종이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일을 사랑합니다. 그 옛날의 종의 상태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옛적에 전하던 말씀을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와 똑같은 설교가 아니라, 그때와 동일한 힘을 드러내는 그런 설교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이야기했습니다. “저 젊은이는 아는 것은 많지 않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사랑하는구먼. 그래서 오직 그분에 대해서만 말씀하는구먼” 저는 제가 처음 설교했던 것처럼 다시 그렇게 설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때보다 훨씬 더 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젊은 시절의 성경 읽기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약속이 마치 맛있는 음식처럼 여러분의 혀 속에서 녹아 들어가곤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 또한 우리의 영적 행진의 첫 목표들을 새롭게 해 주옵소서! 그때에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전혀 생각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사명을 이루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개의치 않을 만큼 좌우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습니까? 지금도 설교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설교에 있어서 우리가 아주 능숙해졌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처럼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다는 느낌이 없다면 오히려 더 좋겠습니다. 자기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보다 오히려 연약하더라도 기도하는 가운데 강단에 올라가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우리가 처음 예배를 인도할 때에 얼마나 강렬한 책임감을 느꼈었습니까? 그런 엄숙한 심령을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계십니까? 그때에는 찬송가를 선택하는 문제나 성경을 읽는 자세 하나하나에 대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어떠한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염려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나 집에서 성경을 조심스럽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그것을 읽어주기 전에 먼저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제게 변함없는 하나의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목사들 중에는 ‘하루 종일 이리저리 다녔고, 밤중까지 설교해야 하지만, 그럭저럭 잘 할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조심스럽게, 그리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 하던 기도와 살피는 자세와 그 외의 모든 선한 것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좋을 것입니다. 다시 획복하는 데에는 굉장한 희생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희생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우리는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야 마땅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생각하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 폭풍우 치는 큰 바다에서도 임무를 다했는데, 이제 겨우 마을의 연못 따위에 빠지려 하십니까?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그 괴로운 시험을 다 견디고 이겨 왔는데, 이제 마치 비겁쟁이처럼 굴복하고 물 속에 빠져버린단 말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겪은 것보다 더 악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전투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영원히 찬양받으실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오늘 다시 우리의 깃발을 높이 세웁니다. 우리의 표어는 바로 “승리”입니다. 곧 청교도주의, 개신교주의, 칼빈주의의 위대한 옛 대의를 위하여, 사도 바울의 도리를 위하여, 우리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승리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공격할 수도 있고 또한 돌아오는 공격을 견뎌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힘과 인내가 주어져 있습니다. 일할 수도 있고 또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간의 가능성의 최고 상태에 이르도록 우리를 강건하게 만들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승리를 얻을 것이고, 그 모든 영광을 우리의 전능하신 대장께 돌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에게 주께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빛, 불, 믿음, 생명, 사랑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 해전에 임하여 “영국이 기대하는 것은 바로 각 사람이 자기의 임무를 행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주님께서,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직분을 담당할 그의 종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를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굳이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나아가서 주님의 그 고귀한 부탁을 이루십시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서 일하셔서 여러분의 주님께 선한 기쁨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한 위대한 철학자는 인생이란 모두 꿈에 불과하다고 단언한 바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인생은 꿈 그 자체로 되어 있는 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무엇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도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품고 있는 것도 그저 하나의 생각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회 사역을 담당한 사람들 중에 과연 그런 철학의 제자들이 틀림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절반쯤 잠들어 있고, 그들의 정신이 꿈속을 헤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진리를 마치 일시적인 믿음의 체계로서 이 땅의 다른 모든 비전처럼 사라져갈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하지만 그 자세를 보면, 돈을 벌려는 사람이나 대학에서 학위를 따려는 사람에게서 보이는 열심과 수고조차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목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내 사업을 그 목사처럼 했다면, 석 달 내에 반드시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의 목사들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최상의 부지러함과 열심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 정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역에 따라 영혼들이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기도 하고 영원히 구원받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의 그 고귀한 피로 값을 치르신 영혼들인데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명의 본질을 이해한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신이라는 성경의 개념을 제대로 파악한 것 같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꾸벅꾸벅 졸면서 수레를 끄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스스로 졸린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 자기의 팀이 안전하게 집에까지 당도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크로케 게임이나 크리켓 게임을 할 때나, 소풍을 갈 때나, 아니면 바겐세일을 할 때에 가장 활기가 넘치는 목사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서는 졸고 있고, 그림자에 대해서는 깨어 있습니다. 하찮은 일들에 대해서는 진지하고, 엄숙하고도 중대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하찮게 여깁니다. 자기들의 일은 잘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형편없이 하는 종들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자기의 오락에는 큰 능력을 보이면서도 자기의 본연의 임무에 대해서는 무디고, 자기의 소명 바깥에서는 능동적이며, 자기의 소명에 대해서는 지리멸렬한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날이 그것을 밝히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철저하게 충성을 다하여야겠습니다. 마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전적으로 우리게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열심히 수고하고, 그러면서도 뒤로 물러서서 영원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영광스러운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지금보다 어떻게 더 복음을 더 많이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자주 설교하고 있거든요”라고 이야기할 형제분이 있습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자주 설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 설교마다 복음으로 더 가득 채우십시오.” 주님은 혼인 잔치에서 “항아리를 물로 가득 채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인들은 “아귀까지” 가득 채웠습니다. 여러분, 그 하인들을 닮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설교가 내용으로 가득 차야 하겠고, 건전하고도 은혜로운 복음으로 가득 가득해야 할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풍성한 사상을, 풍성한 성경을, 견고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점점 더 나은 방식으로 전달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해마다 나아져서 하나님께서 더욱더 영광을 받으시고 죄인들이 구원의 길을 더욱더 쉽게 배우게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회 사역을 온전케 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여러분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다섯 가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 다섯 가지는 바로 빛, 불, 믿음, 생명, 사랑입니다. 그것들의 가치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이니, 손으로 든든히 붙잡아야 할 것이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것들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Ⅰ. 여러분, 빛을 소유하시고 또 나누어주시기를 진정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 빛을 얻어야 합니다. 지극히 평범한 빛이 있더라도 그것을 얻으십시오. 빛은 다 좋은 것이니까요.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교육은 매우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게으름을 피우는 형제들이 있다면 이 방면에서도 열심을 내라고 자극을 주고 싶습니다. 저와 친한 로저스 목사님은 이미 팔십이 지나셨는데도 여전히 공부하는 분입니다. 어쩌면 과거 어느 때보다 지금이 공부하는 자세가 더욱 충실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젊은 사람이 자신에 대해 만족하고 앉아 있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심지어 천국에서도 배우기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그 끝없는 심연(深淵)속을 더욱더 깊이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땅에서 완전한 지식을 운운한다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더 고상한 종류의 빛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의 본연의 임무입니다. 성경과 또한 신학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는 책들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들을 아무리 연구한다 해도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의사가 되기를 준비하면서 온 시간을 천문학을 연구하는 데에 보내는 어리석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연구하고 우리 자신의 마음을 연구해야 합니다. 섭리와 체험의 학교에 학생들로서 앉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체험을 통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지나가기도 합니다. 어느 청교도가 논쟁을 하는 중에 노트에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주여, 빛을 더 비추어 주옵소서! 더 많은 빛을 주옵소서!” 우리는 이 청교도의 기도를 본받아야겠습니다. 그러나 이 빛이 지식의 빛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빛을 구해야겠습니다. 즐겁게 행하는 목회 사역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울한 얼굴이나 애수에 찬 목소리나 지쳐 있는 자세는 교인들에게 결코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 빛을 풍성하게 받으십시오. 그리고 받은 다음에는 그것을 나누어주십시오. 지식이 없이 그저 진지함만 있으면 된다거나 열심을 내기만 하면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식의 생각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지성에 진리가 들어와서 양심에 닿음으로써 영혼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복음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영혼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설교자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손으로 내리치고 외치고 간청하며 열정적으로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미한 진리의 음성이 지성 속에 들어가야 하고 그리하여 마음에 닿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가르쳐야” 합니다(마28:19-20). 여러분의 편에서 가르침이 없고 또한 그들의 편에서 제자가 되는 일이 없다면, 과연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아는 것은 굉장히 많으면서도 실제로 많이 가르치지를 않습니다. 아주 복잡한 스타일로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말씀을 듣는 교인들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는 아직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매우 분명하게 전달되어야 하고, 쉽게 지니고 갈 수 있도록, 또한 기억에 오래 남도록 그렇게 포장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 예수님을 왜 믿는지를 아는 신자들로 가득한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성경을 믿으며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아는 사람들로, 은혜의 도리를 믿으며 그 진리들의 함축된 의미들을 아는 사람들로, 자기들이 어디에 있으며 또한 자기들이 누구인지를 알며, 그리하여 빛 가운데 거하며, 그리하여 어둠의 주관자에게 속임을 당할 수 없는 사람들로 교회가 가득해야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목회 사역 가운데 풍성한 가르침이 있도록 하십시오. 설교를 그 내용보다는 말로써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지식과 깨달음으로 언제나 교인들을 먹이십시오. 여러분의 설교가 견고해져서, 굶주린 자들에게 필요한 양식이 되며, 병든 자들에게 치료가 되며,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빛이 되어야겠습니다.
Ⅱ. 여러분의 사역에서 하늘의 불을 많이 모으고 또 사용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미지근한 것보다는 차라리 지나치게 뜨거운 것이 사람들에게 훨씬 낫습니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라는 말씀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다른 사람들은 물론 설교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마치 눈보라 속에 있거나 아니면 얼음 창고 속에 있는 것 같은 설교를 듣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분명하지만 차갑고, 질서정연하지만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 설교를 들으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말씀을 잘 쪼개고, 준비도 잘된 설교로구나. 하지만 도대체 왜 저런 설교를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곧, 장작은 있는데 그것을 활활 타게 해 줄 불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탁월하면서도 속에 마음이 들어 있지 않은 그런 설교는 웨일스에 있는 저 거대한 용광로를 생각나게 해 줍니다. 사용을 하지 않아서 정말 애처로운 처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대단한 재능이나 깊은 사상은 없어도 도가니에서 바로 나온 활활 타며 흘러내리는 녹은 금속처럼 타오르는 그런 설교가 더 낫습니다. 사실상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에 설교에서 주가 되는 것은 바로 에너지라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제단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처럼, 불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복음을 진정 믿기 때문에 말씀하시고, 그 능력을 몸소 느끼기 때문에 말씀하시고, 여러분이 전하는 그 진리의 영향력 아래에서 말씀하시고, 하늘로부터 임하신 성령과 더불어 말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기억해 둘 것이 있습니다. 곧, 우리의 불길이 반드시 위로부터 지펴진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불이 지펴지게 해야 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과의 엄숙한 교제 가운데서 나오는 그런 진정한 불이 우리에게서 지펴져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과 제가 그 불을 진정 소유하여 그로 말미암아 완전히 태워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드린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다시 뒤로 물러선단 말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온전한 번제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우리 자신의 존재가 닳아 없어져야만 다른 이들에게서 생명을 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거니와 동시에 영적인 법칙이기도 합니다. 씨앗이 자기를 소모하고 소모하여 스스로 없어지기까지 하여야만 열매가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패함에게 먹히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열정에게 먹히든지, 우리는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주저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주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힘을 다해야 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정으로 우리의 뇌와 마음과 생명을 다 쏟아야 할 것입니다. 존귀와 영광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이러한 헌신을 실행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들로서 우리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평생의 사명을 제쳐두고 다른 곳에서 남다른 것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요, 결국 황폐함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존재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여러분 자신을 굴복시키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의 부귀와 명예와 여러분의 모든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완전한 헌신의 불길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열기 속에서 마치 녹아서 빛을 내는 은(銀)처럼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Ⅲ.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아니,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믿음이라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재능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는 바가 확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믿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계시가 전혀 필요 없다고 믿습니다. 다른 빛이 있어야 한다는 사상은 실제로 현재의 빛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빛은 오직 하나밖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경스런 자들이 성경을 왜곡시키고 뒤틀리게 만들어왔지만, 성경은 여전히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바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의 주된 부분인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경배의 최고의 형태는 바로 우리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존재 전체를 계시된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는 것이요, 그의 거룩하신 임재 속에서 우리의 이해력을 무릎 꿇리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바로 주 우리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48:14)고 말씀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 복음을 위하여 죽기까지 싸우십시오. 바로 그 복음이 여러분의 생명이니 말입니다. 지식에서 자라가면서 여러분이 어떠한 표현을 사용하든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면에 세우시고, 또한 그 주위에 모여 있는 모든 복된 진리들을 마음을 다하여 견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조(信條)가 확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뿐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자신은 모르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아신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대언자가 계시다”(요일2:1)는 느낌을 갖는 것이야말로, 여러분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들어올리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의 모든 일들을 이루신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야말로, 진정 복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우리 주님께 전적으로 굴복시키며, 하나님의 뜻과 길에 대해 온 마음으로 만족하며, 주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에 대해 확실히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제가 아는 한 천국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복락이요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기쁨입니다.
조지 뮐러(1805-1898)의 말씀을 들을 때면, 단순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의 모습이 언제나 저에게 큰 충격을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들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기에는 너무나 위대해져 있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만큼이나 설교도 잘 할 수 있고, 어느 누구만큼이라도 설교문을 잘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실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능력을 시험해볼 기회밖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처지를 증명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무능력을 보게 만드실 것입니다.
Ⅳ. 이제 네 번째, 생명입니다.
설교자에게는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속에 생명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모두 살아 있습니까? 목사로서 과연 진정 살아 있습니까? 어떤 형제들을 보면, 전혀 살아 있는 것 같아 보이지를 않습니다. 머리는 살아 있습니다. 지성이 있고 열심히 공부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냉랭하고, 무감각합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전혀 기회를 찾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 죽음이 완전히 드리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혀도 절반쯤은 죽어 있어서, 더듬거리며 말문이 막혀 있습니다. 그들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 시간 잠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발끝에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완전히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머리와 마음이 함께 살아 있고, 혀와 손이 함께 살아 있고, 눈과 귀가 함께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살아 있어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임무들에서 살아 있기를 힘써야 합니다. 순교자 존 브래드퍼드(1510?-1555)는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철저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또한 주께서 그 일에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절대로 그 일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이 원칙을 양심적으로 이행하기를 바랍니다. 죄를 고백하는 데 있어서도, 여러분의 눈물이 주님의 발을 씻었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계속해서 고백하십시오. 죄 사함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도, 여러분이 하나님과 화목되었음을 성령께서 증거하시기까지 계속해서 구하십시오. 설교를 준비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 속에서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기까지, 여러분이 전하고자 하는 그 진리의 능력을 여러분 스스로 느끼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기까지 주님을 바라십시오.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더욱더 풍성한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직분의 모든 의무들에게까지 흘러 넘쳐야 합니다. 기도에서, 찬송에서, 설교에서, 그리고 심지어 예배 후에 나누는 악수와 인사말에서조차도 뜨거운 영적 생명이 드러나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살아 있어서 여러분의 생명을 퍼뜨리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생명으로 충만해 있기를 바라고, 또한 그 생명이 여러분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드러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목사가 선한 교인들에게서 “우리 목사는 강단에서 행한 것을 술집에서 다 뒤집어 버린다네. 설교는 매우 잘 하는데 그의 삶이 그 설교와 전혀 맞지 않는다네”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다 거룩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일곱 배나 더한 의무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우리 양 떼들에게 선한 모범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살도록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그렇게 되면, 생명이 우리에게서 다른 이들에게로 전해질 것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 살리심을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이 집회에서도 생수가 우리 속으로 흘러 들어와서, 다시 우리에게서 수천의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 들어가 그들이 축복을 누리며, 또한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한 것이라”(요7:39).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가장자리까지 가득 채우시고, 그리하여 흘러넘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우리가 이런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게으름 피우는 형제가 있어서 모든 일을 천천히 행한다면, 그를 깨워 일으킵시다. 우리 중에 누구라도 자기의 임무를 돈을 받고 억지로 하듯 그렇게 생명이 없는 자세로 행한다면, 그 사람도 깨워 일으킵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주를 섬겨야 합니다. 마음에도 없이 그저 억지로 끌려가는 태도는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죽은 시신을 장사지내십시오! 살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려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왕성하고도 강렬한 생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22:32).
Ⅴ.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릴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풍성해야 합니다. 어떤 설교자들 중에는 천성이 딱딱하고 냉랭하며 거칠고 이기적이어서 설교를 사랑으로 가득 채운다는 것이 매우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개중에는 사랑의 면에서 특별히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의 말씀처럼, 사람들의 영혼을 위한 “본성적인 보살핌”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만, 특히 사랑하기가 힘든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거룩한 사랑을 드러내는 일이 배나 더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나 울리는 꽹과리 이상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능력입니다. 성령께서는 대부분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믿음이 많은 일을 이루지만, 사랑이야말로 믿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그 바람을 이루는 실질적인 도구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일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일에 매혹되지 않는 한, 절대로 설교를 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교인들을 사랑하지 않는 한, 절대로 그 어떤 교회에서도 목회를 잘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을 마음으로 사랑하고 또한 우리가 함께 사역하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별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 일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그 일에 대한 열광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예외가 없는 철칙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목회 사역을 통해서 영구한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영혼을 향한 열렬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 어떠한 것으로도 보상할 수가 없습니다. 영혼 구원이 여러분의 열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태어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철주야 그것에 관심을 두어야 하고,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삶에서 가치 있는 유일한 일이어야 합니다. 마치 스위스의 사냥꾼이 정신없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산양을 좇아가듯이, 그렇게 영혼을 좇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오! 우리가 그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살면서 항상 그의 사랑을 우리 가슴으로 느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으면, 사람이 자기의 일을 포기해버릴 지경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마음 전체를 주님께 드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일에 대한 사랑과 영혼들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온갖 어려운 시련들을 기쁨으로 견딜 것입니다. 여러분, 사례비가 적다고 해서 목회지를 떠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불쌍한 교인들을 누군가는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때가 어렵다고 해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나아질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잘 알고 계시니 말입니다.
도시에 전염병이 돌아서 사람들이 도피할 때에, 그 도시에 그대로 남아서 병든 자들을 섬긴 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러분의 교인들과 더불어 지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박애주의에 충실한 것처럼, 여러분의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십시오. 어떻게 해서든 현재의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다면, 목회지를 지키고 교인들을 지키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이요, 또한 여러분에게 상급을 베푸실 것입니다.
여러분, 동일한 복음을 계속해서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날마다 더 큰 믿음으로 전하고, 날마다 더 잘 전하시기 바랍니다.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그리고 작은 곳에 있는 분들은 더 큰 영역을 위하여 스스로 자격을 갖추십시오. 그러나 더 나은 자리를 탐하느라 연구를 게을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제라도 길이 열리면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직분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직분이 맡겨진다는 것을 확신하기를 바랍니다. 등불을 됫박 속에다 감출 수는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정 유능한 사람을 하찮은 직분에 계속 썩힐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역을 위한 자격, 은혜, 능력, 성실함, 그리고 사랑의 기질 등이 목회자를 결정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그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앉히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하는 힘든 일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목회사역에서 그저 쉽게쉽게 행하며 시간을 보낸 자들에게는 끔찍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하여 모든 일을 견디는 자들에게는 큰 상급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롭게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굴복시키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목표입니다. 주께서 이 산 제물을 받아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약한 데서 강함
저는 오늘 말씀의 주제를 고린도후서 12:10의 바울의 말씀에서 취하고자 합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우선 연약하면서도 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삼손! 그는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고 자기의 눈을 잃은 후에 처하였던 그런 연약함의 상태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영웅이 저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종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수천 명을 죽이고 그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았던 사람도 얼마든지 그런 연약한 처지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들릴라가 우리를 파멸로 이끌게 하지 않으려면, 죄로 이어지는 모든 연약함을 대적하여 싸워야 합니다. 특히 거룩한 헌신의 실패로 인하여 연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헌신이 온전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강한 법입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으면, 우리의 강함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게 되고, 우리에게 연약함이 생겨서 결국 불경건한 자들이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사14:10)라고 하며 빈정거리게 되는 치욕을 당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도 연약해져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도 연약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느슨해지자, 사탄은 밧세바를 통해서 그를 이겼습니다. 베드로는 멀리서 따라갔고, 곧바로 그의 주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야말로 우리의 강함의 오른팔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부러지고 말면, 우리는 물처럼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이 살려고 시도하는 만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망치는 것이 됩니다. 거룩한 교제의 잔칫집을 방문하기를 보류한 사람은 영양실조에 빠질 것이고, 결국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사24:16)라고 외치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지 않는 자는 곧 발에 대해서는 므비보셋이 될 것이요, 눈에 대해서는 바디매오가 될 것입니다. 마음이 허약해지고 무릎이 떨릴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약해지면 우리의 전부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사람이 강할 수 있다면, 그런 위험한 강함은 교제에서 벗어난 사람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에 힘입어야만 강건해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깨어진 교제는 곧 깨어진 강함을 낳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사랑에서 연약해지는 일이 절대로 없기를 바랍니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가슴이 소유할 수 있는 모든 능력 가운데 가장 큰 것입니다. 사랑을 다른 은혜들과 비교해서 다른 것들을 폄하시켜서는 물론 안 됩니다. 그러나 모든 적극적인 덕목들 가운데 사랑이 가장 힘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음도 사랑으로 역사하니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이 놀라운 무기를 취하기 전에는 믿음도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를 못하는 법입니다. 사랑을 취하고서야 비로소 그들을 사랑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 열정적인 사랑이, 순결한 불꽃이 되어 타올라 뜨거운 열기를 뿜으며 우리를 불태우는 그런 사랑이 있어야겠습니다! 이 거룩한 불길이 우리 존재의 중심에서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을 열렬하게 사랑하고, 또한 그를 위하여 그 백성들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 점에서 강해지시기 바랍니다. 사랑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말씀을 듣는 교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또 여러분이 선포할 책임을 맡은 그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교회는 마치 기수(旗手)가 기진맥진해지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은 사라지고, 그저 격렬한 감정만 남고, 싸움을 할 힘만 남고, 사람들을 흐트러뜨릴 힘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마치 파에톤(Phaeto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아버지 마차를 잘못 몰아 제우스의 번갯불에 맞아 죽음)처럼, 태양의 마차를 몰려 하다가 곧바로 패망에 이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적 생명의 모든 연약함에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오, 정말이지 그것을 얼마나 사모하는지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로서 우리들에게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벗고서 강건한 청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충만히 장성한 사람들이, 곧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한”(엡6:10) 사람들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이 방면에서 약하다면, 그 어디서도 강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들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풀고자 하시는 그 모든 영적 강건함을 열렬히 사모해야 합니다.
저는 매우 연약했으나 주님께 쓰임을 받은 설교자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조명하심이 없이는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다고 느끼며, 그리하여 그 조명하심을 얻기 위하여 빛들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도록 도움을 받고자 두렵고 떨림으로 그에게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연약한 분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들이 하나님의 뜻에 혹시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했고, 자기들의 뜻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둡게 하지 않을까 하여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 강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제 자신의 설교도 제게는 극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강단을 올라갈 때마다 두려움이 저를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는 쓰라림이 저를 압도할 때도 많았습니다. 심지어 정신적인 감정 상태로 인하여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는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약함이 제게는 큰 교육이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저는 존경하는 저의 할아버지께 올리는 편지 속에서, 설교 전에 제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과 끔찍스러운 두려움 같은 것 때문에 제가 진짜로 아파서 눕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제게 보낸 회답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설교를 해온 지 6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두려움과 떨림을 느끼고 있단다. 그런 것에 그대로 만족하거라. 네게서 그런 감정이 사라지면 너의 강한 힘도 사라진 것이니 말이다”. 설교할 때에 그런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교인들도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 스스로 연약하다는 느낌에 압도되는 것을 하나의 악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목사에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한 쪽에 한 초라한 형제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머리를 쥐어짜고, 무릎을 꿇고 씨름하며, 마음속에서 피를 흘려왔습니다. 그는 설교를 하다가 중간에 말문이 막히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있고,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힘써 행합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은 교인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것이요, 또한 하나님께서 회심자들을 그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 너무도 연약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을 높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약한 설교자가 강자입니다.
여러분, 건강할 때에 건강을 잘 보존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건강을 잃더라도 우리는 온전히 기쁨으로 여기고 바울과 더불어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 외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형태 저런 형태로 우리는 시련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지고 갈 십자가가 없는 설교자라면, 짐을 지지 않은 선지자라면, 그 사람은 무익한 종이요 오히려 교회에 짐이 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염려나 근심이 전혀 없는 목사가 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그런 분들이 없으리라 믿습니다. 이 자리에는 오히려 목사로서 근심거리에 짓눌려 있고, 안타까운 일들에 에워싸여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가 큰 것 때문에, 아니 그보다는 교회가 작은 것 때문에 날마다 괴로움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괴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해달라고 구하지 마십시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내 양 떼들에 대해서 별로 염려할 것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목자가 있다면, 그 목자는 결코 흠모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그런 목자는 아주 차갑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난 겨울 양 몇 마리가 죽었지만, 그런 일이야 늘 다반사로 있는 일이니 염려할 것 없다. 몇몇 양들이 굶주려서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목초가 없어서 그런 것이니 난들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목자는 정말 다음 번에 이리에게 먹혀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참된 목자라면 당연히 야곱과 함께,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창31:40)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자의 경우는 자기 자신이 쉬는 일은 불규칙하기 이를 데 없고 오로지 양들을 위하여 들이는 수고와 염려에 겨를이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목사로서 매우 연약해지고, 여러분의 목회 임무가 여러분을 완전히 짓누르게 되면, 그런 연약함에 대해서 투정부리지 마십시오. 바로 그때가 여러분이 충만하게 강한 상태에 있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로서 강하다고 생각하며, “목사가 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하면, 그때야말로 여러분이 연약하다는 것을 깊이 깨우쳐야 할 때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형제가 스스로 강해져서 자기 자신의 거룩함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은 반드시 허약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자기들의 은혜와 이룬 업적들에 대해 자랑하고 있었는데, 오로지 한 형제만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한 사람이 그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자네에게는 거룩함이 없는가?” 그러자 그는 대답하기를, “아니, 있네. 하지만 자랑할 거룩함은 하나도 없다네”라고 대답했답니다.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거룩함은 모두 다 소유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완전을 향해서 힘써서 전진해야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고요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강할 그때에 우리가 약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완전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그때에 바로 교만이라는 악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로울랜드 힐(Rowland Hill: 1744-1833)의 모범을 좇아서 본문을 빙 둘러왔습니다. 이제는 본문을 본격적으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Ⅰ. 첫째로, 침체의 체험이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약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함을 특별히 의식하게 되는 그런 시기가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는 그가 삼층천에 올라가 환상을 볼 정도로 너무도 기이한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너무 자만하게 될 경향이 그의 속에 있었으므로 그의 육체 속에 조그만 가시를 있게 해서 따끔따금 찌르게 하셨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는 아주 하찮은 것으로 정말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물리쳐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씩이나 간구를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런 처지를 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처럼 가시가 찌르는 고통은 우리 모두가 다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기들의 연약함을 느끼게 됩니다. 곧, 책임에 대한 중압감이 그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책임을 항상 느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느낌을 지나치게 몰아가지는 마십시오. 우리의 책임을 너무 깊이 느끼는 나머지 그 책임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고 우리를 그것의 종으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이제 다시 묻겠습니다. 우리 중에 과연 우리의 책임의 분량을 충실하게 느껴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시다면, 저는 그분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했어야 할 만큼도, 할 수 있었던 만큼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했어야 옳았을 만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앞으로 하게 될 만큼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기대되는 양(量)만큼은 다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질(質)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책무들을 철저하게 느끼게 되면, 그것들이 우리를 완전히 부수어 놓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약한 존재들이 됩니다. 하지만 이 연약함은 바로 강함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악성 때문에 목사로서 전혀 자질이 없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로 인하여 약함을 느끼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역시 강함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입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때로는 우리의 수고하는 영역이 특별히 어렵게 보이는 것 때문에 우리가 침체에 빠지고 연약해지기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동료들 간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교제가 없이 완전히 홀로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고, 이 때문에 여러분에게 침체가 올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여러분 중에는 가난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기조차 힘든 분들도 많습니다. 자녀들의 구두가 다 해어졌는데도 사줄 돈이 없고, 아내의 옷이 다 닳아졌는데도 새 옷을 지어줄 방법이 도저히 없을 때에는, 목사의 마음이 속에서 깊이 가라앉는 것입니다.
게다가, 억울하게 험담을 듣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거짓말의 아비에게서 나온 추문이 여러분을 향해서 공격을 해올 수도 있고, 그것에 대해 여러분이 도저히 방어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작은 흠을 지우려 하다가 책장 하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을까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마음이 상처를 입습니다. 오, 이런 일이 생기면 사람이 얼마나 연약해지는지 모릅니다. 오 여러분, 이럴 때에 주 안에서 강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제가 전혀 고갈되는 일이 없고 언제나 어떤 주제든 새롭게 설교하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여러 권의 설교집을 출간했습니다. 그 책들이 늘어날수록 무언가 새로운 것을 설교한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음 설교는 어느 본문을 근거로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게 해 왔습니다. 설교를 위한 본문을 계속 찾을 수 없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강함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더욱더 약해지고 더 약해질 준비를 갖추고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감이 더욱더 약해지는 일을 여러분 스스로 준비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이 완전히 무(無)가 되기를 준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진행시키시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Ⅱ. 이제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라는 복된 체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복된 체험이 됩니까? 첫째로, 내가 연약할 때에는 반드시 구원과 도움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로 피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약할 때에 강한 것은 우리가 기도로 강함을 얻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의 연약함이 최고의 간구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져서 넘어지기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환도뼈가 부러지자, 간구하는 자가 승리했습니다. 기도할 때에, 여러분의 강함을 하나님께 아뢰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연약함을 아뢰십시오. 그러면 응답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게는 연약함과 고통보다 더 나은 아뢸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는 것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이 없습니다. 눈물과 한숨으로 기도에 깨어 있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도저히 기도할 수가 없다고 느끼면서도 시종일관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자기 영혼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약한 데서 얻는 강함 중에서 우리가 갖는 것이 좋은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의식하고 설교할 때에, 우리에게서 나가는 말들에 놀라운 힘이 더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닐 목사(Mr, Knill)가 병사들에게 책자를 배포하러 나갔는데, 한 병사가 책자를 가지고 다시는 오지 못하게 닐 목사를 저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닐 목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사람을 구원해 주시기를 자신이 얼마나 바라는지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그 병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나누어주는 책자나 목사님이 말씀한 내용은 한 번도 제대로 주목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어린아이처럼 우시는 것을 보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가 온갖 방해를 받지만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우리가 얼마나 사모하는지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말이 더듬거리더라도 그들은 우리의 진실함을 믿습니다. 목사가 슬피 울어서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그들의 마음속에 큰 길을 뚫어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복된 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연약한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도와 더불어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게다가, 연약함에서 다른 형태의 강함이 나오게 됩니다. 연약함을 통해서 우리가 사람들을 공감하기를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연약해지고 심령이 침체 상태에 빠져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됩니다만,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우리가 책임 맡은 사람들을 위하여 많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약한자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저는 목사가 자기가 수고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곳에 대한 사랑 때문에 연약해지는 경우에도 이 본문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가령 어떤 형제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가난한 지역에서 목회한다고 할 때에, 그는 자기의 책임을 느끼고 자기 주위의 비참한 영혼들을 보게 되어, 결국 그것이 그 사람을 사로잡아서 도저히 거기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게 된다고 합시다. 그는 좀 더 유쾌한 일을 생각하려고 애쓰지만 사람들의 빈곤과 죄의 악몽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낮에도 그를 짓누르고 밤에도 그를 짓누릅니다.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여인들의 슬피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남자들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고, 병들어 죽어가는 자들의 탄식이 들려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 큰 섬김의 장에서 자기가 담당한 몫을 향한 절박한 열정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 사람은 근심으로 자기 자신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동안 그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복 주시기 위해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께 경건한 한 사람을 온갖 비참한 처지를 당한 사람들 가운데 집어넣으시고 거기에 두실 때에는 그것이야말로 정말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유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결국 일곱 배나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워드(John Howard: 1726-1790)는 유럽의 모든 감옥들을 다 다녀야겠다고 스스로 느끼고, 온갖 전염병이 나도는 감옥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감옥의 잔혹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종식시키는 일을 위한 열정이 있어 집에 돌아와서는 그 문제에 대해 책을 쓰고, 자신이 품었던 대의를 위하여 순교자의 죽음을 죽었던 것입니다. 형제들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살 수 있고 또 죽을 수 있는 하워드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말 값어치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약해지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확고한 결심으로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혀 어리석은 것 같은 방법으로 여러분 자신이 일을 행해 나가서 냉혹한 권세자들을 떨게 하고, 안일한 자들에게 조롱을 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저로서는 기뻐할 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이 바보가 된다 해도, 그것은 전혀 개의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광신에 가까워지면, 거기에 더욱더 힘이 실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약함이 강함이 되는 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약함을 지각하게 되면 그 사람 전체가 각성을 하게 되기 때문일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나와서 그 사람의 모든 부분 하나하나가 다 강렬해집니다. 신학박사 같은 위대한 사람을 보신 일이 없습니까? 정말 위대하다고 느끼는 그런 분들 말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분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분이 대체 무엇을 이룹니까? 그보다 훨씬 비천한 사람이라도 은혜와 열정에 가득 차서 주를 위하여 살아 움직일 때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스스로 작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정적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약한 때에 강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즉, 희생제사가 완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강하셨을 때가 바로 그가 가장 약하셨을 때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가 나무에 못 박히셨을 때가 아니면 과연 어느 때에 그가 어둠의 왕국을 뒤흔드셨단 말입니까? 그가 창에 찔리셨을 때가 아니면 과연 어느 때에 그가 그 백성을 위하여 죄를 제거하셨단 말입니까? 그가 친히 죽으려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아니면 과연 어느 때에 그가 사망과 옛뱀을 짓밟으셨단 말입니까? 그의 승리는 그의 극한 연약함에, 즉 그의 죽으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교회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힘이 없습니다. 고난당할 수밖에 없고, 비방과 조롱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교회를 통하여 승리하실 것입니다. 십자가는 여전히 정복의 증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끝까지 쇠한다 해도 그것을 온전히 만족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왕이신 주께서 날마다 날마다 영광스럽게 흥하시도록 합시다. 아멘.
우리의 모습
이 모임이 유서 깊은 모임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는 우리가 다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아들들이 우리와 함께 목회사역의 동료들이 되어 있으니, 이제는 우리가 풋내기가 아니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아직 누렇게 말라버린 잎사귀 같은 처지는 되지 않았고, 노망난 늙은이는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숙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고, 또한 우리 주 예수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지금 당장 해야겠다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회고
이 점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곧, 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 언제나 후회스러운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할 거리는 전혀 없습니다만, 제 자신에 대해서는 불평할 거리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공하기는 했으나, 제가 더 나은 사람이었더라면 훨씬 더 크게 성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편에서 믿음이 부족했던 탓에 하나님의 일이 방해를 받았고 더뎌졌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하나님의 성도들을 영적으로 먹였다 해도, 제가 하나님의 성령의 쓰임을 받기에 더 합당한 사람이었더라면, 그 거룩한 목회의 임무를 통해서 주님께 더욱더 영광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제게는 과거를 회고하노라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의 시와 깊은 후회의 한숨이 나옵니다. 주께는 영원토록 영광을 돌리지만, 제게는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후회를 통해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올라갈 수 없다면, 과연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를 더 높이 올려놓지 않는 한숨이라면, 숨을 잘못 사용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채찍질하십시오. 하지만 실망에 빠지지는 마십시오. 과거에 목표에서 멀리 벗어나 떨어졌던 화살들을 거두어들여서, 격렬한 절망감으로 그것들을 다 부러뜨리지 말고, 목표를 정확히 조준하고 힘을 더 집중시켜서 그 화살들을 다시 날려보내십시오. 패배로부터 승리를 만들어내십시오. 실패로부터 성공을 배우시고, 실수로부터 지혜를 배우십시오. 은혜를 통해서 이런 일을 잘 하게 되면, 앞으로는 더 낫게 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과 더 충만히 교제하게 될 것이고, 그와 더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요, 우리의 삶이 더 거룩한 데에까지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전망
우리의 앞날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과거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사납게 날뛰고 있는 그 특정한 형태의 마귀의 공격의 양상을 우리가 파악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이 “현재 사상(진보된 사상)”이 마치 사자처럼 보였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아주 면밀히 조사해 보니, 오히려 여우처럼 보였고, 이제는 야생 고양이에다 비해도 그것을 아주 잘 대접해 주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점점 쇠퇴해 가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그렇게 그것에 매혹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니 곧 사라지고 찌꺼기만 남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를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시를 믿는 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14:13). 물론 다른 원수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말렉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등, 온갖 원수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일어났습니다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는 계속 전진하여 약속된 그 유산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제안
온 세상을 회심시켜 의롭게 하거나 교회를 정통 신앙으로 바꾸어 놓는 일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니 우리가 그 책임을 질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자기들의 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뜨거운 열심을 냅니다. 그들에게 성공이 있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세상은 우리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들입니다. 우리는 그보다 작은 영역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교단조차도 자기 나름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미치는 한계 안에서만 책임이 있으며, 따라서 무언가 우리의 한계 속에 있는 대상을 향하여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맙시다. 이 땅을 저주하는 가시와 엉겅퀴를 우리가 모두 제거할 수 없다면 어찌 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책임 맡은 조그만 구역만이라도 깨끗하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막을 초원으로 바꿀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전에 풀이 한 줄밖에는 자라지 않던 것을 두 줄이 자라도록 만들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어도 상당한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연 믿음 안에서 정도(正道)를 걷고 있는지, 하나님과 함께 거룩하게 행하고 있는지를 잘 살펴봅시다. 개중에는 그런 권면은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을 향한 건전하고 실질적인 사랑을 갖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신의 수준에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최고로 사용하기를 바라는 가운데, 참된 마음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과 바른 교제 속에 있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줄 것을 염두에 두고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최고의 복이 임하기를 진지하게 바라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야망
저는 제 자신을 최대한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만일 제가 강단에서보다 강단 바깥에서 더 유익하게 쓰임받을 수 있다고 느낀다면 저는 즉시 강단을 떠날 것입니다. 만일 거리 모퉁이에 앉아서 구두를 닦는 일을 하는 것이 지금처럼 큰 회중 앞에서 말씀을 증거하는 일보다도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하나님께로부터 얻는다면, 저는 그런 확신을 기꺼이 환영하고 또 실제로 거기에 순종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들이 선호하는 일을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 많은 일을 할 수가 없게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십시오! 아주 직설적인, 훌륭한 설교자가 될 소질이 있는 설교자가 어째서 미사여구를 쓰는 스타일을 배양하여 자기 자신을 망쳐 버려야 한단 말입니까? 또 천성적으로 화려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어째서 지극히 단순한 스타일을 시도하느라 곤욕을 치르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성향을 그대로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볼로는 달변의 재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퉁명스러운 게바를 모방해야 한단 말입니까? 각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무엇을 행하기를 바라시는지를 찾도록 합시다. 그리고 찾은 다음에는 그 일을 행하거나, 아니면 그 일을 시도하다가 죽도록 합시다. 지금 이 땅에 사는 동안 내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나의 주님께 최고의 영광이 돌아가며 그의 교회에게 최고의 유익을 끼칠까? 먼저 이 문제부터 해결하시고, 그리고 그 다음에 실제적인 문제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은혜
한 가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얻으면 우리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이 돌아갈 것입니다. 오, 나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완전히 헌신된다면, 나의 재능이 비록 보잘것없다 해도 나의 삶이 주의 영광으로 불타고 빛나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길이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성도다워지는 일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열려 있고, 또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존귀를 돌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입니다.
조심성이 필요함
여러분, 저의 바람은 주를 위하여 하는 모든 일을 최고의 방식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를 위하여 많은 일들을 행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좀 더 훌륭한 길이 있습니다. 흙손을 부지런히 놀려서 단 육개월만에 성벽을 쌓아올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벽은 엿새만에 다시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조금씩 천천히 하는 것이 결국에 가서는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됩니다. 겉모양만 되는대로 해 놓는 것보다는 한 가지를 해도 철저하게 하는 것이 무한히 더 낫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는 일은 아주 세심하게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일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철저하게 검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은 완전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각성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은사들을 불러일으키기를 제가 구태여 간곡히 부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목회 사역을 위해서 받으신 여러분의 천성적인 은혜로운 자질들을 배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목회 사역이 무언가 유익을 끼치려면 우리 모두 열심히 연구해야 합니다. 배우기를 그만둔 사람은 이미 가르치기도 그만둔 것입니다. 연구를 통해서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은 결코 강단에서 열매를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자
저의 진정한 바람은 우리 모두가 정말 영혼을 구원하는 자들이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누구나 자신이 청중들을 구원하는 수단이 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법입니다. 우리의 평생의 사역의 가장 참된 상급은 바로 죽은 영혼들이 생명을 얻는 데 있습니다. 저는 설교할 때마다 항상 영혼들이 예수님께로 이끌림 받는 것을 보기를 사모합니다. 그런 일을 보지 못하면, 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이 아픕니다. 사람들이 영원 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 너무나도 속히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그들을 즉석에서 구원받도록 해야 합니다. 현재 주어진 기회들을 쉽게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는 은밀한 소망 같은 데 빠져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회심의 역사가 계속해서 보이지 않을 때에는 우리의 회중 전체가 하나님께 비통하게 부르짖어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설교가 전혀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고, 또한 구원할 가망도 전혀 없다면, 차라리 농민이나 상인으로 있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쓸모 없는 목사에게서 대체 주님께서 무슨 존귀를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영혼들이 하늘의 생명을 얻고 살아나는 역사가 없다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은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목적들을 위하여 우리가 쓰임을 받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쓸모 없어져 버렸다면 과연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메마른 상태에 있으면서 과연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구원하려면 그 목적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온통 쏟아 부어야 합니다. 고기를 잡을 생각이 없이는 고기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도 그 일을 목표로 삼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수단을 사용하셔서 일하십니다. 그의 목적에 맞는 수단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서 졸음에 빠지게 만드는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영혼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온갖 천박스런 내용들이 가득한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우리의 은밀한 영혼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주님의 성령께로부터 우리에게 온 메시지가 아닌 것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닿아서 그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역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사
여러분, 우리 모두 “가르치기를 잘하게”(딤전3:2)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벧전4:10)가 되는 것이 우리의 야망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잘 해명하며 신자들을 교육하는 유능한 목사들의 설교를 들으면 언제나 무언가를 얻습니다. 그들은 정말 고귀한 것들을 전해 줍니다. 성경의 특정 구절들을 인용하여 거기에 새로운 빛을 던져 줍니다. 여러분, 우리 각자가 그처럼 성도를 강건하게 세우는 사역을 행하기를 바랍니다. 오, 그런 고귀한 소명에 합당한 체험과 조명하심과 근면함이 우리에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 가르침이 풍성한 그런 설교가 더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오늘날의 많은 설교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불과 열정이 있습니까? 얼마나 재치가 번뜩이며 세차게 돌진합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설교를 합니까? 마치 만화경(萬華鏡)같은 설교를 자주 듣게 됩니다. 그 속에 대체 무슨 내용이 있습니까? 어떤 설교자들은 시(詩)를 인용하고, 또 극적인 사건들을 잘 묘사하여 아주 감동적이고, 아주 감상적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이런 것들이 그 나름대로 유익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혼들이 구원받아야 하고 또한 영혼들이 양식을 공급받아야 할 때에는 보다 견고한 내용물들이 설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 떼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먹여야 합니다. 영원한 진리의 문제들을 다루어야 하고, 마음과 양심과 씨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성도들을 교육시켜서 그들 속에서 주 예수께서 수천 수만의 거울로 반사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사도 바울은 진정으로 말씀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다”고 합니다(고전4:15). 사도의 이 말씀이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진실인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아버지들이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는 견고하고 안정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버지에게서는 무언가 견고한 가치를 지닌 것과 건실한 판단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 설교자들을 가리켜 ‘아버지’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너무 어리석은 짓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고 하면, 무언가 무게가 있고 친절하며 위엄이 있고 안정되며 고귀한 면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위대한 진리들을 정말 사랑합니다. 아버지는 교리의 온갖 풍조에 밀려다니지 않고, 회의론자나 광신자들이 새로운 것들을 외쳐댈 때마다 거기에 솔깃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기가 알고 있는 바를 확실히 알며, 자신이 확증한 바를 견고히 붙들며,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함과 견고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아버지는 부드러움으로 충만하며, 그리하여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드러내 보입니다. 교리적인 신학이 풍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인간성이 메말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돌보고자 하는 목적을 가슴에 품고 있으며, 그런 돌보는 일이 마음에 가득 차기까지는 그의 마음이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의 편에서도 그들의 그런 신뢰와 사랑을 환영하며 자기들을 내어놓습니다. 연약한 심령들을 가르치고 위로하고 구하며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돕는 것을 자기들의 사명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뜻을 같이하여 천성적으로 너희 사정을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빌2:20, 개역개정판은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로 번역하고 있음).
이렇게 디모데에게 천성적인 보살핌이 있었습니다. 새들이 자기 새끼들을 향하여 갖는 느낌에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들이 새끼들을 위해서 얼마나 부지런히 일을 합니까? 그리고 얼마나 담대하게 새끼들을 보호합니까? 날개 속에 병아리를 품고 있는 닭을 보면 용감함 그 자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아버지의 사명을 느끼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영적 자녀들을 위하여 가능한 것이든 불가능한 것이든 모든 일을 다하려 할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드릴 것입니다. 그들을 그렇게 사랑해도 그들에게서 별로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해도, 속에서 용솟음치는 그 강한 사랑에 이끌려서 그는 자기를 부인하는 수고에 온 힘을 다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누가 우두머리냐?’라는 질문을 절대로 제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는 대개 자기가 그렇게 존경받는 것이 자기를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자기를 부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질서가 잘 잡혀 있는 집에서는 ‘어린 아기가 왕’입니다. 그 아기를 위해서 모든 일이 뒤로 제쳐지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이 조그만 아기에게 가장 따뜻한 환영을 베풀며, 집안의 모든 움직임이 그 아기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아버지라면, 교회 전체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장 연약하며 가장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흔들리기를 잘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가장 오류가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여러분의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왕입니다. 가장 연약한 자들이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어린양들을 마구 억지로 몰지 않으려면, 양 떼들 전체가 나아가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연약한 자들을 짓밟지 않도록 함으로써, 또한 자기를 잊는 위대한 모범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다스림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필수적인 법이며, 또한 이것이야말로 과연 능력의 비결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모든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올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기꺼이 우리 자신을 눕혀서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짓밟고 넘어가도록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이 우리의 위치입니다. 아버지는 일용할 양식을 벌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와서 나누어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하나로 뭉뚱그려 놓은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자신들을 다 내어 던져서 우리의 책임 아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행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특별히 존경을 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으시면, 그 길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곧, 자기 부인, 인내, 사랑, 열심, 근면함이 그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7).
아버지에게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그릇된 동기로 지혜를 사모하며, 그로 인해서 어리석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혜가 있다면, 여러분은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그 탁월함을 느끼게 만들도록 그렇게 그 지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지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지혜로워지기를 힘쓰는 데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답니다. ‘내 집에 도둑이 드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소. 도둑이 들어오는 기척이 날 때에 곧바로 이 버튼을 누르면, 바로 그 순간 전류가 흘러서 창고의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게 되고, 도둑은 물론 모든 것이 다 터지고 말 테니까요’. 이런 말을 들으면 웃으시겠지요? 하지만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처신하는 목사들을 여럿 보아왔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형제는 대여섯 교회에서 이런 식으로 처신하기도 했습니다. 한 교인이나 어느 집사가 잘못을 했다고 생각되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가 신실하게 소임을 다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혜로운 아버지의 처신은 아닙니다. 지혜가 있다면, 평화를 유지할 것이고, 온유함으로 개혁을 시도할 것입니다. 자녀들이 생각이 없다거나 신학이 건전하지 못하다거나, 혹은 불순종하는 면이 보인다고 해서, 아버지들이 그 자녀들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아버지들이 되기 위해서는, 높은 거룩함을 목표로 삼고 힘써야 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 완전히 거룩해지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제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완전한 삶이 가능하도록 그것을 얻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절대로 흔들림이 없는 믿음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을 얻기를 구하도록 합시다. 에녹이 그 긴긴 세월 동안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면, 그런 삶을 추구합시다. 심령과 성품에서 성도다움을 사모합시다. 저는 이웃 형제들에 대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능력은 거룩함과 헌신에서 나오는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가정에서의 일상 생활과 교회에서의 생활과 세상에서의 생활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눈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님의 사역자들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니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한다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우리는 주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사람들이 그대로 모방해도 안전할 만한 그런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 자녀들에 대해서 지닌 그 무거운 책임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우리 중에서 교인들 앞에서 감히 “나의 모든 점들을 다 따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인들은 목회자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경향 때문에 거룩한 자들이 영향을 미치게 되고, 또한 그들의 부주의한 잘못이 끔찍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처음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모델을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 예수님을 본받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경건한 사람을 본받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일을 권장하지 않습니다만, 사람들의 경향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연약함에 대해서 부드럽게 대처하여 그것이 악을 조장하는 기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우리의 행실 때문에 난쟁이가 되어 버린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올바로 지도했다면 지금의 모습보다 많이 달라져 있을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이 두렵지 않습니까? 어떤 이들은 응석받이로 자라나서 연약해져 버렸고, 또 어떤 이들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한 면만 더 자라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보고서, “우리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진정 우리 소관입니다. 낯선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말할 때에 큰 책임을 의식하는 법입니다. 가정이 질서가 잡혀 있지 않다면, 지혜로운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처신들을 수정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잘못을 행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책하고 우리 자신의 소홀함을 탓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가 더 나아지면, 우리의 교인들도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들에게 잔소리하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고서 우리의 목회 사역이 어째서 더 나은 결과를 낳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지혜로운 길입니다.
친절하고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악수를 한다든가, 목례를 한다든가 하는 아주 사소한 일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목이 곧고 교만한 자세는 절대로 금물입니다. 언제나 예의바르고 정감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에게서 친절을 기대합니다. 그들을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인 것입니다(참조, 고전9:21).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온유한 심정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도 한량없는 온유함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구주를 거부하며 멸망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에 대해 깊은 슬픔이 우리를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들에게 사랑으로 복음을 전했는데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을 깨뜨리며 울어야 합니다. 자기 백성이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 슬피 우는 사람처럼 여러분의 청중들을 위해 그렇게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청중 가운데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상태로 내세로 들어갈 사람이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며 고뇌를 느끼지 않는 설교자라면, 과연 어떻게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설교자라 하겠습니까?
반면에, 자녀가 그릇 행하던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리신 그림이 있습니다. 일명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가 멀리 있을 때에 곧바로 알아보는 민첩한 눈,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는 기쁨과 즐거움이 그 아버지처럼 우리의 모습이 그래야 합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발을 언제나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그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구주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과연 어떻게 하셨습니까? 거대한 건물을 지으시거나 아니면 거대한 집회를 계획하셨습니까? 아니면 위대한 책을 쓰셨습니까? 아니면 자기 앞에서 나팔 소리를 크게 울리는 방식을 취하셨습니까? 주께서 과연 무언가 큰 것을 목표로 두셨고, 그저 평범한 일상적인 섬김을 완전히 버리셨습니까? 그가 과연 대중의 인기를 높이 여기셨습니까? 그 현란한 감상적인 메시지로 자기를 치장하셨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허영에 들뜬 마음에서 나오는 하찮은 야망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는 큰 회중을 추구하지 않으셨고, 심지어 강단을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헛된 것일랑 뒤로 제쳐두시기 바랍니다. 그는 제자들을 하나씩 부르셨고, 각 사람을 인내와 보살핌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전형적인 예를 그대로 취하여야 합니다.
성숙해져 갈수록, 더욱더 단순해지고 자연스러워지고 아버지처럼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의 일 속에 더욱더 온전히 열중해야겠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니, 우리의 모든 것을 제단 앞에 놓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숨을 쉬어야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를 위하여 살고,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 목숨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콩고 강과 인도의 갠지스 강뿐 아니라 영국의 템스 강과 클라이드 강변에도 거룩한 형제들이 묻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여호와의 집을 향한 열심히 우리를 삼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각자의 역량의 최고의 분량대로 사용하시고, 그리하여 우리가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
고전4:1-2,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사역자들)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청지기)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청지기)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사도는 자신이 올바로 인정받기를 매우 바랐습니다. 사역자들이 올바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나치게 높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또한 우리를 지나치게 낮게 생각하는 이도 있는데, 그들 모두 우리를 진정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긴다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나,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나 훨씬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꾼들(사역자들)입니다. 이 단어는 아주 존귀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 단어를 달리 번역하게 되면, 사역자들은 사환(종)들입니다. 손님이 아니고 웨이터들입니다. 주인이 아니고 품꾼들입니다. 이 단어를 “배 밑창의 노예들”(under-rowers), 즉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일은 정말 힘드는 일입니다. 그렇게 신속하게 노를 젓기 위해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합니다. 노예선에는 노를 젓는 층이 세 개가 있었습니다. 위층은 그래도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맨 밑층의 노예들은 뜨거운 열기와 땀 냄새 등으로 인해서 정말 쓰라린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수고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대하신 대장군이 앞으로 나아가실 수 있고, 또한 그가 타신 교회라는 배가 앞으로 속히 전진할 수 있다면, 지극히 나쁜 처지에서 우리의 생명이 닳아 없어지더라도 만족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기꺼이 사슬에 매여 노를 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을 다 드려서 주님의 배가 파도를 가르고 나아가도록 힘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는 선장들도 아니고, 노예선의 주인도 아닙니다. 그저 그리스도의 노 젓는 노예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를 그냥 사역자나 혹은 사환들로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그리스도의”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사환이 아니라 주 예수님의 사환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책임은 우리가 주님으로 부르는 바로 그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의 명령을 따릅니다. 우리의 섬김은 영광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신발의 끈도 풀 자격이 없는 그분의 시중을 들도록 허락받았다는 사실에 큰 존귀를 느낍니다.
또한 우리를 가리켜 청지기라고 말씀합니다. 청지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우리의 직분입니다. 청지기들에게 요구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임무입니다.
1. 첫째로, 청지기는 사환(종)이요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환이 자기 스스로 ‘주인’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정말 한심한 사태가 벌어집니다. 주인이 종들을 환대해 준다고 해서 종들이 그렇게도 우쭐대기를 잘 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혼자서 우쭐대는 하급 관리가 되어 버린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환들이지, 그가 남긴 유산을 지배하는 주인이 아닌 것입니다. 사역자들이 교회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교회들이 사역자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수고할 때에 우리는 결코 교회를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경영할 재산이나, 우리 자신의 취향에 맞게 가지치기를 할 수 있는 정원쯤으로 여겨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올바른 위치를 지키는 데 조심을 다하지 않으면, 우리 주님은 우리를 책하기를 잊지 않으실 것이요 반드시 우리의 교만을 꺾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위치를 지키지 않고 부당하게 높이 올려진 때문에 온갖 괴로움과 실패와 침체를 겪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분수에 넘치게 여러분을 높이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2. 청지기는 특별한 사환입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환들을 감독하는 책무가 맡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우리의 교회원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서로 다른 많은 이들의 마음을 지도하고 가르치고 위로하고 돕는 일이 어떻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다스리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하고, 은혜로 자격을 갖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높은 지위를 유지하려면 그만큼 우월한 자질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밭가는 농군이나 머슴보다는 지식이 많아야 합니다. 사냥터지기나 짐꾼보다 높은 지성을 소유하여야 하며, 자기에게서 명령을 받는 메리나 존보다 훨씬 신뢰성 있는 성품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청지기들로서 우리는 풍성한 은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환들이 우리를 본받을 것입니다. 청지기가 무디고 무기력하며 느려터지면 그 주위의 다른 사환들도 다 그렇게 되고, 결국 주인의 사업이 그 만큼 무기력해질 것입니다. 목사에게서 가르침 받는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목사에 그 교인’이라는 말이 참입니다. 오, 우리가 언제나 주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활력이 넘치며 진지하여, 우리 교인들도 그와 똑같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언젠가 한 청교도 목사에 대한 글을 읽어보았는데, 그분은 어찌나 생명이 충만했는지 그 교인들은 말하기를, 그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을 먹는 사람처럼 살았다고 했습니다. 오, 살아 있는 떡으로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지지 않으면, 우리가 동료 사환들을 잘 운용하는 좋은 청지기가 될 수 없습니다. 동료 사환들에게 열심과 온유함, 변함이 없는 성품, 열정, 순종으로 모범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언제나 자기 부인을 실천해야 하고, 우리 스스로 가장 힘들고 가장 비천한 일을 택하여 시행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면에서도 동료들보다 높이 올라 있어야 합니다. 가장 소망이 없는 자들을 인도하고 가장 힘든 짐을 떠맡는 것이 우리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3. 청지기들은 위대하신 주님의 명령을 직접 받는 사환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매일 주인의 은밀한 사실(私室)로 들어가 명령을 받는 청지기들처럼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주여, 주께서 제게 원하시는 바를 알려 주옵소서”라고 항상 아뢰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올려보고 그의 뜻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중단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임무를 그만두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인과 한 번도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 청지기가 있다면 그 사람을 과연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품삯을 주고 내보낼 것입니다. 주인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면, 청지기로서 전혀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로 나아가 그에게서 명령을 하달 받는 습관을 배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청지기가 주인의 관심사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면, 혹은 그가 사악하여 주인의 명령을 변경시키거나 뒤집어 놓는다면, 혹은 불의한 종의 비유에 나오는 사람처럼 자기 마음대로 재물을 탕진한다면, 그 밑에 있는 사환들이 똑같이 그런 불충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4. 또한 청지기들은 항상 자기의 사무 현황을 주인에게 보고합니다.
그들이 일을 수행하는 동안 그 일이 계속 기록됩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아야 마땅합니다. “내가 설교하고 있으나, 과연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내 설교가 과연 올바른가? 주께서 전면에 내세워 강조하기를 바라시는 이 교리들을 강조해서 전하고 있는가? 주께서 바라시는 대로 내가 저 영혼들을 보살피고 있는가?”
이렇게 해서 각자의 삶 전체를 반성하고 다음과 같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나는 사사로운 기도에 충분한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가? 성경을 필요한 만큼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가? 여러 가지 모임을 위하여 바삐 움직이는데, 과연 이 모든 일에서 내가 주인의 명령을 이행하고 있는가? 일의 양보다는 일의 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옳다면, 나는 과연 일의 양이 많은 것에 만족하면서 실제로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오, 자주 주님께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 우리의 임무 현황을 분명하게 보고 드리기를 바랍니다.
5. 이제 정말 중요한 문제에 이르렀습니다. 곧,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을 책임 맡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것은 모두가 그의 주인의 것입니다. 고귀한 것들이 그의 관리 아래 주어졌지만, 그로서는 그것들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잘 보살피는 것뿐입니다. 주께서는 우리들 각자에게 특정한 재능들을 맡기셨습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은사, 사상의 은사, 언변의 은사, 영향력의 은사 등은 우리가 자랑할 우리의 것이 아니고, 오직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입니다. 돈을 버는 것은 주님의 돈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본을 증식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은사와 역량이 증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자라는 형제도 있지만, 그냥 그대로 난쟁이처럼 발육이 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형제도 있습니다. 가장 필요하고도 유익이 되는 수고는 우리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발전을 위하여 들이는 수고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된 복음이 자기에게 맡겨져 있음을 말씀합니다. 신실한 재산관리인이라면 언제나 근본 문서에 근거하여 그것에 따라서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저는 이 재산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저 운영자로서 원칙에 따라서 운영해야 할 책임을 맡은 것뿐입니다”. 청지기들은 그들이 받은 명령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재산관리인은 그 재산관리의 조건들을 따라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서 복음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혹 이 임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입니다. 이 시대는 표류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닻을 걷어올렸기 때문에,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습니다. 지난 날, 아주 진보적인 사상가들이 정통 신앙을 쓸어버리려 했습니다만, 지금도 그들의 공격에서 우리는 살아남아 있습니다. 영광된 복음이여, 그대는 절대로 망하지 않으리라! 우리가 죽게 된다 해도 기꺼이 싸우다 죽을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사라져 간다면, 전도자들이 새로이 일어나 우리의 무덤 위에서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복음은 죽음으로써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하튼, 이 싸움에서 혹시 우리가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정절은 지킬 것입니다.
6.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을 그 계획에 따라서 분배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청지기는 진리의 비율을 균형 있게 유지할 것입니다. 새 것과 오래된 것을 골고루 베풀어 줄 것입니다. 언제나 교리만 전하지도, 언제나 실천만 전하지도, 또한 언제나 체험만 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싸움만 설교하지도, 언제나 승리만 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진리를 한쪽으로 치우쳐서 제시하지 않고, 일종의 입체경으로 보듯이 그렇게 진리를 사람들 앞에 “분명하게” 제시할 것입니다. 영적인 양식을 제대로 준비하려면 그 구성물들의 비율을 올바로 맞추어야 합니다. 설교에 균형이 없는 것 때문에 여러 교회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해가 끼쳐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올바로 견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여러분의 달란트를 사용하도록 조심하십시오. 다른 이들에게 영혼 구원자들이라 여김을 받기 위해서 영혼 구원자들이 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우리 주님께는 불충(不忠)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건전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을 것을 생각하고서 건전한 교리를 전한다거나, 혹은 다른 이들에게 기도하는 사람이라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기도한다면, 그것은 결국 예수님께 불성실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오로지 우리 주님의 영광만을 발보고 온 마음을 다하여 그것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복음과 우리 주님의 백성들과 우리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우리 주님을 위하여, 오직 그분만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7. 청지기는 또한 그 주인의 가족들의 호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유익을 구하고, 그들을 마치 여러분의 친자녀들처럼 사랑스럽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의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가 먼저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들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시다. 괴로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돌보아 줍시다. 아버지 없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찾아갑시다. 연약한 이들을 돌보아 줍시다. 우울증 있는 자들과 의기소침해 있는 자들을 참아 줍시다. 주님의 집의 모든 부분들을 다 돌아봅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청지기의 모습일 것입니다.
8. 청지기가 그 주인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인이 출타해 있는 동안에는, 모든 사람이 그 청지기에게 와서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니 청지기는 주인을 대표하는 자답게 처신해야 합니다. 주인을 대신해서 말할 때에는 자기 스스로 사사로이 말할 때보다는 훨씬 더 조심해야 하고 더 지혜롭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청지기가 자기의 말을 삼가 조심하지 않으면, 그 주인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자네는 자네 말을 하는 것이 낫겠네. 그러니 자네가 나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도록 할 수가 없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청지기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길을 지키고 그의 진리를 선포하고 그의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면, 그로 말미암아 주 예수께서 해를 입으시게 됩니다. 사람들은 사환을 보고서 그 주인을 추측합니다. 사정이 그러니, 어떻게 변명하겠습니까? 청지기가 주인의 모습을 따라 처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과 청지기를, 주님과 그를 대신하는 종들을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하신 예수님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이 옷을 입으신 주님을 대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치 않을 때에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최고의 인도자는 바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무슨 오락장에 가자는 유혹이 있을 때에, ‘우리 주께서 가셨다면 나도 가리라’라는 대답으로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시된 진리보다는 여러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라고 종용받을 때라도, 예수님을 그대로 따르십시오. 그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각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여러분은 청지기로서 합당하게 처신하게 될 것입니다. 트집잡는 자들이여, 청지기를 탓하지 말라! 그 사람은 자기 상관의 명령에 따라 행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십자가를 지고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랐다고 느낄 때에, 우리의 양심은 깨끗하며 우리의 마음은 평안한 것입니다. 오늘 당장은 아닐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순종이 독창적인 일 처리보다 낫고, 천재성보다는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들을 알리고 그가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신 그 일을 끝까지 이루기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후반부는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들에 관한 것입니다. “맡은 자(청지기)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청지기에게 탁월할 것도, 동료들에게 좋게 보일 것도, 혹은 성공할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로지 충성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주님 자신이 우리의 지혜와 우리의 힘이 되셔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기에는 간단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이 요구 사항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매우 많습니다.
1. 마치 우리가 사환이 아니라 주인인 것처럼 행동해도 충성을 다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생겨도 사랑으로 참으면 곧바로 해결될 수가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위엄을 따집니다. 그러면 문제가 지속됩니다. 우리도 원하기만 매우 지체 높고 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작을수록 부풀어오르기가 더욱더 쉽습니다. 어느 날 그의 주인이 화난 소작인에게 무례를 당했는데도,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그런 작은 일에 괘념할 만큼 지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청지기는 아무것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고, 모든 일에서 화를 발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과연 정당한 일이겠습니까? 아마도 그 온유한 주인은 그의 격노한 청지기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자네는 이것도 못 견디겠나? 나는 이보다 훨씬 더한 것도 다 견뎠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셨습니다(히12:3). 그런데 과연 우리가 스스로 지쳐버려야 되겠습니까? 우리 스스로 거만하게 행동한다면, 어떻게 온유하신 예수님의 청지기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높은 말을 타지도 말고, 하나님의 맡기신 유산에 대해 주인으로서 처신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요, 따라서 우리가 교만에 빠지면 충성을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주인의 돈으로 이렇게저렇게 투기하기 시작해도 청지기로서의 임무를 다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돈이라면 물쓰듯해도 되겠지만, 우리 주님의 돈은 그럴 수 없습니다. 주께서 오시기까지 이리저리 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운영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인 것입니다. 저는 제 주인의 복음으로 투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 자신의 깊은 생각으로나, 철학자들과 더불어 높이 날아오름으로써 복음을 개선시키리라는 따위의 생각은 꿈도 꾸지 않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의도를 갖고서라도 절대로 복음 이외의 다른 것은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희한한 가르침을 줌으로써 굉장히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해도, 저는 그런 생각 자체를 혐오할 것입니다. 진리를 억누름으로써 부흥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속이는 행위요, 경건한 사기(詐欺)입니다. 그런 식의 처신을 통해서 주님께 유익을 끼치리라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결코 그런 유익은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정직하게 운용하고, 공정한 거래로 얻는 이익을 주께 드리는 것이 우리의 임무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청지기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거래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신앙을 마음대로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선포마저도 우리 자신의 권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의 권위에 기초하여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일하는 일꾼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행동하려 하지 말고, 언제나 마음을 낮추고 우리 주님과 친밀함을 유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또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자로 처신해도 우리의 맡은 소임을 저버릴 수가 있습니다.
청지기가 농군이 좋아하는 것이나 여자 사환의 변덕스런 마음을 살펴서 그대로 일을 처리하면, 모든 것이 잘못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본부에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항상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항상 올바르고 참된 모습을 견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곧 한쪽으로 왜곡되어 버리기 십상일 것입니다. 이 사람을 즐겁게 하느라 주춤하거나, 저 사람을 만족시켜 주느라 앞으로 달려가거나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한다고 해도 한 발자국도 옮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들을 다 기쁘게 하려는 생각을 갖고 처신하고 있다면, 정말 굉장한 임무를 스스로 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아첨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말을 해야 합니다. 양심이 인정할 그런 말들 말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것은 우리 주님을 불쾌하게 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꾸며내어 하는 일에 성공을 거두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복리에 치명적인 악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해서도 안 될 것이고, 우리들 자신을 기쁘게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 보여도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는 더 쉬운 일입니다. 오 청지기 여러분,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3. 게으르게 빈둥거리며 논다면, 우리가 충성된 청지기들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일꾼이 아니면, 진정한 청지기가 아닙니다. 우리야말로 왕의 집에서 근면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담 클라크(Adam Clarke: 1762?-1832)의 다음과 같은 명언을 좋아합니다. “일로 너 자신을 죽이고, 그 다음 너 자신이 다시 살아나도록 기도하라”. 우리가 게으름을 피우면,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절대로 우리의 임무를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지하시고 성실해야 합니다. 무언가 삶의 목표를 갖고 있는 사람답게 사십시오. 설교를 삶의 최고의 행위로 아는 사람답게 설교하시기 바랍니다. 그 일이야말로 하늘 아래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순전히 사기(詐欺)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지침을 성실하게 시행하지 않으면, 주께서 그의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위하여 하는 일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을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니 말입니다.
4. 주인의 재산을 잘못 운용해도, 우리에게 맡겨진 소임을 절대로 감당하는 것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정한 분량의 달란트와 힘과 영향력이 맡겨져 있으며, 우리는 이 맡겨진 돈을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 목적은 바로 주인의 존귀와 영광을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사람들 누구나 자기의 정치적인 입장을 위해서 자신의 영향력을 최고로 발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사역자도 교회에서의 자기 위치를 이용하여 자기 분파의 목적을 증진시킬 자유는 없습니다. 또한 그 어떠한 사역자도 자기의 능력이나 직분을 이용해서 그저 대중을 즐겁게 해 주기만 할 권한은 없습니다. 주께서는 영혼 구원을 위하여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바로 그 목적을 이루는 모든 일이 우리의 사명의 범주에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직접적으로 또한 분명하게 이루는 것이 우리의 주된 사역인 것입니다. 복음을 전함으로써 제 자신이 할 일을 한다면, 그것만해도 할 일이 충분히 많은 것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잘못 운영하게 되면, 횡령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헌신이 참된 것이라면 여러분이 지닌 모든 재능은 주님의 것이요, 따라서 그것들을 여러분의 주님이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하여 사용한다면, 중죄(重罪)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 재산을 챙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제이, 제삼의 목표나 목적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오직 예수”가 여러분의 인생 전체의 동기요 모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인의 유익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청지기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다른 목표에 힘쓰는 나머지 이것을 잊는다면, 그 목표가 아무리 칭찬할 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충성된 청지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할 만큼 활력이 넘치지도 않습니다. 한 가지 목표에 전념해야 합니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일만을 한다”라고 말하기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세한 내용들에 대해 마지막 감사가 이루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청지기인 우리들은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내용 하나하나에 대해서 주께서 살피실 것을 항상 직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5. 청지기로서 충성을 다하려면, 가족의 구성원 하나하나에 대해서, 또한 재산 하나하나에 대해서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인들을 개별적으로 관찰하는 일,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일일이 방문하는 일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제 앞에 병이 여러 개 있는데, 소방 펌프를 가지고 장난치듯 물을 마구 쏟아 부으면 물이 병에 제대로 채워지겠습니까? 병에 물을 확실히 채우려면, 병을 하나씩 들고 조심스럽게 물을 부어 넣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양떼들을 하나씩 일일이 보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대화나 상담을 통해서는 물론, 개개인을 위한 기도를 통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교구 전체를 방문하며, 교인들을 심방하되, 아무도 잊지 말고, 아무도 실망하게 하지 말고, 주 앞에서 모든 사람들을 우리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나 변덕스러운 자들이나, 실망에 빠져 있는 자들을 특별히 생각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그런 보살핌이 울타리가 되어 모든 양떼들을 보호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6.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악을 묵인해서는 안 됩니다.
덕의 균형을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쥐를 죽이기 위해서 곳간을 다 불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화가 나서 여러분 자신이 악을 없애는 것보다 오히려 악을 더 조장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기를 조용히 하게 하라는 말에 유모는 즉시 그 아기를 창문 바깥으로 내던져 버립니다. 유모는 주의 말에 순종했고, 결국 그 아기를 조용히 하게 만들었습니다만, 그 유모는 결코 칭찬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책망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인 모든 일에서는 양보하십시오. 하지만 진리와 거룩이 관련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확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엘리의 죄와 형벌을 초래하게 됩니다. 부자들과 영향력 있는 자들에게 정직하십시오. 흔들리며 불안정한 자들에게는 확고하십시오. 이들의 피가 우리에게 요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7. 어떤 이들은 주께서 오신다는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청지기로서의 소임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주께서 아직 오지 않으실 것이다. 아직도 성취되어야 할 예언들이 무수히 많고, 또한 지극히 평범한 안목으로 보면 그가 아예 오시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우리가 특별히 서둘러야 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 ‘나의 주께서 그의 오심을 연기하신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불충한 종입니다. 시간이 짧습니다. 우리 주님이 문간에 서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온 힘을 다해서 일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그 결산에 다 고정시키고 매시간 최선을 다하여 일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사역에 대한 기록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청지기직에 충성을 다하는 이 일을 위하여 많이 기도하여야 합니다. 불충에 대한 형벌이 무시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충성된 청지기들에게 심히 큰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전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희생이 아무리 크다 해도 뒤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누구도 억지로 여러분을 목사가 되게 만든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거룩한 직분에 강제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선택해서 지금 여기 있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이 거룩한 직분을 사모하였고, 이 직분을 감당하는 데에서 행복을 찾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끝까지 충성하실 수 있겠습니까? 주의 잔을 함께 마시며, 주께서 받으신 세례를 함께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제 나아와 어린 양께서 가는 곳마다 어디든지 따라가는 자들의 반열에 들기를 바랍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복일 것입니다.
현 시대의 악,
그리고 우리의 목표와 필요한 것들과 격려
현 시대의 악
시대마다 언제나 악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가끔씩만 격렬하게 끓어오르는 간헐적인 열병들도 있는 법입니다. 어떤 악들은 이십 년 전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 이 시기에 와서 널리 퍼져 있기도 합니다. 진리는 하나요 모든 시대마다 동일합니다만, 거짓은 항상 그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고, 마치 의복의 유행처럼 왔다가는 사라집니다. 지금은 또 다른 형태의 토론이 등장해 있는데, 성경 그 자체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최종적인 권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현대 사상이 말씀하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과연 속죄라는 것이 있기는 한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대리 속죄를 부인하는 시대가 우리에게 왔고, 우리 주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죄를 씻는 도리에 대해서 모욕적인 언사를 일삼는 시절이 왔습니다. 언젠가 어느 설교자는 말하기를, 죄인이 임종시에 진정으로 회개하고 믿는다 해도 저 세상에서 잠시 동안 고난을 당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도리가 일종의 연옥(煉獄)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다른 견해가 아니라, 믿음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악이 도처에 비일비재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상대하여 싸우는 그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의 생명을 말살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잘못 전하고 악하게 그것을 왜곡시킴으로써 진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한 가지 교리를 마치 우리가 그것만을 믿는 것처럼, 아니면 그것이 우리의 주된 가르침인 것처럼, 고의로 매도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저는 이 논쟁에서 영원 형벌 교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상’을 주장하는 자들은 그것을 항상 거론하면서, 틀린 쪽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입니다. “다가올 진노”에 대한 공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우리의 주된 가르침이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그것을 끔찍하게 경고하는 것이 정통 교리의 특이한 점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또 한 가지 큰 악은 진정 선한 사람들 중에서도 진리를 위한 결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있는 우리 형제들 중에서도, 오류와 분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태도가 서 있지 못한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서 목회하는 한 흑인 설교자는, 자기의 양 떼들 중에는 닭을 훔치는 일을 죄라고 설교하는 일을 조심스럽게 삼갔다고 말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형제들 간의 교제가 경색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그 후원자들 중에 주류업에 종사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독주(毒酒)의 문제를 아주 부드럽게 처리해 버립니다. 불쾌한 진리를 이렇게 억누르는 것이 과연 큰 문제가 아닙니까? 주변에 만연되어 있는 죄들에 대해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들이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모습”이 됩니다만, 그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고전9:22)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그들이 교회의 수입을 불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너무 많이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의 입장이 과연 경건보다 더욱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 어떠한 처지에서도 진리와 그리스도께 철저하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 과연 충분하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가난해져도 좋다. 조롱을 당해도 좋다. 모욕을 당해도 좋다. 하지만 내 주님께 거짓을 행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거룩과 죄, 진리와 오류에 관하여 타협의 자세가 너무도 깊이 만연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 타협의 자세는 하나님의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명확한 결단을 드러내는 것이 가장 지혜 있는 처사입니다.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단호하게 지켜 나가야 합니다. 바람과 파도가 있다고 해서 나아가는 방향을 바꾸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진리의 수위를 마구 낮추어 버립니다. “이 의무는 너무 가혹하다. 그러니 다소 완화시켜야겠다. 이 교리는 너무 혹독하니 좀 더 부드러운 옷을 입히는 것이 좋겠다”는 식으로 처신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희생시키더라도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이런 자세가 바로 현 시대의 스타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옛 신학에서 죄나 인간의 전적 타락 같은 교리를 강하게 말씀한다면, 좀 더 부드러운 새로운 신학을 통해서 그것을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형벌이 너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을 가볍게 다루고 대충대충 넘어가라! 사람들을 겁주어서 회심자들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 “낮추어 주라”. 하지만 그런 부드러운 말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여러분 스스로 입장을 분명하게 정리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스스로 견고하게 서 있는 사람들처럼 미끄러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또 한 가지 큰 악은 도무지 만족을 모를 정도로 오락을 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오락을 공급해 주는 것을 교회의 일로 삼았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신 것이 대중들에게 다블로 비방(tableaux vivants), 즉 살아 있는 밀랍 인형들을 제시하기 위함이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한 비국교도 교회는 사교적인 모임과 곁들이는 특별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모인 회중들이 악단의 연주에 맞추어 흥겹게 노는데, 그런 유치한 게임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여러분이 이해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박스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대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설교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면 그 다음 번에는 우리 교회당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복음의 사역자들이 그런 허튼 짓을 일삼기를 대체 어느 때까지 하려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것과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것은 놀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과 영원한 복락을 위해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죽음과 심판과 영원의 그 처절한 위엄을 놓고서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어리석은 짓들과 헛된 짓들을 멀리하십시오.
우리의 또 한 가지 어려움은 여러 교회들에 강렬한 경건이 결핍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정말 경건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위 신앙인이라 고백하는 자들의 신앙이 얼마나 얄팍한지를 깨닫지 못하십니까? 기도회에 전혀 참석하지 않는 교회원들이 많지 않습니까? 부유층의 사람들은 저녁 식사 시간이 기도회 시간과 겹치기 때문에 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또 바빠서 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변명하는 사람들도 음악회에는 아주 잘 참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공적인 만찬회와 가무회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식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 중에서도 기도회 같은 케케묵은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자들을 많지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탈선의 확실한 징후인데, 이것을 비일비재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들이 목회자들에게 마음 아픈 일들을 많이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오히려 목회자들 자신이 너무나도 타락해 있어서 거의 아무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들에 대해서, 많은 교인들은 그 설교자의 개인적인 경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재능이요 영리함입니다. 사람이 설교하는 내용은 오늘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거나 엘리트들을 즐겁게 해 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진리를 전하든 오류를 전하든, 유창하게 말을 하여 연설자로서 명성을 유지하기만 하면 칭송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원들을 받아들이는 일이 크게 해이해졌고, 그리하여 온갖 악들을 편안하게 누리는 “혼합된 무리”들로 인하여 교회의 질이 떨어지고 하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 시대의 가슴아픈 악을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그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외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하여 결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을 얻기가 힘듭니다. 저는 과거에 우리가 복음을 올바로 전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들으러 몰려들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그런 믿음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는 몇몇 형제들 중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중들 사이에 완악해져 가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우리 모두 느끼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 곳에 있는 교회가 온통 불신앙으로 가득 차 있으니, 세상이 무관심한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현재 강하게 일고 있는 악의 광풍이 곧 가실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교회라는 좋은 배가 역풍을 만나 흔들거리고 있어서 주께서 오셔서 바람과 파도를 향하여 “고요하고 잔잔하라”고 말씀하셔야 할 지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슬픔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시대가 이렇게 악하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한 가지 영구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영구적인 목표
계절이 어느 때든 간에, 농부에게는 경작할 땅이 있습니다. 여름철과 겨울철에 하는 일이 서로 다르지만, 그의 목표는 언제나 같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이미 주님께 손을 높이 들었으니 다시 돌아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음 거룩한 사역에 들어설 때에 가졌던 그 한 가지 목적을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쟁기를 버리고 밭에서 돌아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 여러분의 평생의 사역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지향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우리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죄인들을 회심시키는 것도, 성도들을 강건케 하는 것도 우리의 최고의 임무는 아닙니다. 우리의 최고의 임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이것이야말로 모든 교리의 질을 시험할 수 있는 일종의 측정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면 순전한 복음이 아니요, 따라서 우리나 우리의 청중들에게나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사정이 어떻든 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그 한 가지 목표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영혼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어떠한 형편이 되든, 우리는 예수님을 위하여 사람들을 낚아 올려야 합니다. 회개와 믿음을 강조해야 하고, 거듭남과 죄를 혐오하는 것과 예수님을 신뢰하는 일을 항상 교인들 앞에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목적을 위해서 출생한 사람들이며, 이 목표를 위해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니, 마땅히 영혼을 구원하는 위대한 진리들을 증거하며, 이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에게는 교회를 강건하게 세우고자 하는 강렬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목적을 위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언제나 동일한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발전이 있으면 안 됩니까? 아니오,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계시된 진리의 노선 내에서만 나아가야 하고, 확정된 원리들에서 이탈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일관성 있는 목회 사역이, 여러 해 동안 동일한 진리를 전하는 일을 계속하는 그런 사역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며 교인들에게 결과를 산출하는 것입니다.
든든한 기초 위에 벽돌을 차근차근 쌓아올릴 때에 위대한 건물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가르침이 이리저리 바뀐다면 어떻게 그런 결과가 생기겠습니까? “항상 배우나 끝애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딤후3:7)자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혜로운 건축자로서 진정으로 교회를 세우고자 한다면, 맨 처음 기초에 대해서부터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그 기초 위에 건물 전체를 세워갈 것이니 말입니다. 저에 관해서 말하자면, 제가 맨 처음에 가르쳤던 것들을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것들
우리가 거룩한 부르심을 성공적으로 추구하려면, 우리는 더 나은 사람들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시대가 더 열악해질수록, 하나님께 더 많은 은혜를 구해야 하고, 그 어려움들을 더 잘 대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께서는 “더 풍성히”베푸실 수가 있습니다(참조, 요10:10). 여러분, 더 거룩해지고 더 은혜가 충만해져서 우리의 일에 더욱 합당하게 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 우리의 손으로 주님의 일을 준비하십시다. 교만하게 손을 펴지도 말고, 절망에 젖어 손을 맥없이 내리지도 말고, 거룩한 간구와 온전한 헌신으로 우리의 손을 높이 들어야겠습니다.
그 다음 지금 현 시대에 필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열정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실질적으로, 더욱 의심의 여지 없이 그를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들이 우리에게 더욱더 절실하게 다가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바를 믿어야 하겠고, 오직 믿는 바를 말해야겠습니다. 사람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복음적인 내용과 은혜에 관한 거룩한 내용들을 말하는데도, 정작 거기에 아무런 뜻도 없다는 것은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강단들에도 그런 말장난꾼들이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 앞에다 그림자를 드리우지 맙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명확한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적인 교리들을 믿기 때문에 그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복음적인 신자들을 기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두려워할 일입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교리들이 우리의 목숨만큼이나 우리에게 값진 것이어야 하고, 우리의 피와 살만큼이나 진짜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이 진실임을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는 진짜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영혼을 향한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사랑이 있기 전에는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다가올 진노에서 회중들을 구원하려면, 그들이 우리의 형제들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정 동정해야 하고, 그들에 대해 걱정이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열정과 연민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보다 철저한 자기 희생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아는 탁월한 지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희생은 날마다 필요합니다. 희생이 있어야 우리의 섬김이 풍성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땅의 목회 사역에서 편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후에 그 일에 대해서 정산할 때가 오면 정말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을 위하여 열심을 다하여 삽시다!
그러나 육신적 안락 외에도,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대의(大義)가 필요로 한다면, 우리의 이름도, 우리의 명성도, 우리의 친구 관계도, 모두 남김없이 다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부인하느니 차라리, 우리가 받을 모든 존경과 모든 명예와 사회적 명성이라는 누더기 하나하나까지도 다 버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 어떠한 손해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이미 그리스도의 것이니, 우리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나의 주님, 주님과 주님의 진리에 충성을 다할 수 있다면, 끝까지 “만물의 찌끼”가 되어도 나는 주를 위해 즐거워하리이다.
이런 시기에 아주 적절한 한 가지 작은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교인들과 더불어 근본적인 진리들을 아주 차근차근 살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첫째 가는 근본 진리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그들 모두가, 복음을 이해한다는 것을 당연시한다면, 그것은 교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근본이 되는 진리들을 계속 반복해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어떤 강단에서는 가장 단순한 교리들도 굉장히 새로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교인들과 가장 초보적인 진리들을 공부하십시오. 믿음의 첫째 가는 원리들을 알게 하십시오. 교인들이 그것을 들으며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복을 받을 것이요, 많은 이들이 정말 기뻐할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주 근본적인 교리들을 반복해서 가르치십시오.
구식으로 농사를 짓던 시절에는, 농부들이 밭이랑에 씨앗을 세 알씩 던져 놓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하나는 벌레를 위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새를 위한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자라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씨앗을 넉넉히 뿌립시다. 악한 세력에게 벌레와 새들과 가시나무들이 풍부하게 많으니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빛을 비추기 위해 나가게 내버려두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씨를 뿌리는 자들이니 반드시 씨를 뿌리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씨 뿌리는 일을 계속 반복하십시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3:1).
그 다음으로, 설교를 듣는 자들이 즉각적으로 구원 얻기를 위하여 분명하게 힘쓰십시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마다 언제나 교인들에게 목표(조준)가 맞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인물들을 공격의 목표로 삼는 것은 아주 지혜로운 일입니다. 매 설교마다 적용부분을 살펴야 합니다. 교인들에게 진리를 적용시킬 때에 매우 구체적이고도 명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의사가 어린아이들에게 쓴 약을 처방하여 세 시간마다 한 번씩 먹으라고 하고는 그냥 그 아이들 스스로 먹도록 내버려두면, 그대로 약을 먹는 아이들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일반적인 언어로만 제시하고 그쳐서는 안 됩니다. 개개인에게 필요한 부분을 파악하여 개개인에게 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구원받기를, 그것도 즉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이 목표를 향하여 우리의 온 능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것입니다.
온 힘을 다하여 거룩의 실천을 가르칩시다. 구원의 가시적인 면이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에 대한 설교가 아주 극단적으로 밀어붙여지는 것은 결코 나쁜 징표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광신주의는 끔찍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의 뿌리가 되는 진지함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거룩을 최고로 추구합시다. 은혜의 교리들과 더불어 지극히 순결한 윤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선행이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선행이 구원의 필연적인 열매라는 진리에 대해서도 똑같이 분명히 합시다. 신자들이 거룩하지 않다면 우리의 교회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거룩이야말로 실천적인 정통이며, 따라서 그것이 교리적 정통과 더불어 반드시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높은 수준의 도덕성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생겨난 거룩한 도덕성이 필요하고, 바로 그것이 거룩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권면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에 회원을 받아들이는 문제에서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회원들은 교회의 수준을 저하시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도 유다는 들어오고야 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다를 초청해 들이지는 맙시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자가 우리와 편안히 지내도록 그 일을 쉽게 만들어 놓지는 맙시다. 세상을 교회와 뒤섞는 일은 범죄 행위입니다. 그 일은 끔찍스러운 저주를 초래하게 되며, 경건에 대해서 큰 돌풍과 더러운 곰팡이의 역할을 합니다. 모든 순전한 심령들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읍시다. 하지만 마음이 세상에 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문을 닫아걸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경건의 능력은 전혀 모르면서 경건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의 영혼을 값있게 여긴다면, 교회의 출입구를 잘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도, 여러분의 영적 생활에 해를 미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과는 전적으로 관계를 끊으십시오. 저는 술주정뱅이나 도둑과도 어울리지 않지만, 믿음을 부인한 자와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도덕적인 모습은 물론 저의 영적인 모습도 똑같이 열심히 보호할 것입니다. 충성된 신하는 반역자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결코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한 경건한 목사는 어느 설교자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 강단에는 절대로 저런 사람을 세우지 않을 것이오, 나는 나의 침실만큼이나 나의 강단을 소중히 여긴다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과 어울림으로써 그 진리를 타협시키는 일이 없도록 우리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들끼리 서로 더욱 긴밀하게 뭉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서로서로, 또한 주 안에서 동일한 믿음을 지닌 모든 사람들을 돕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는 교단적인 차이는 가라앉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믿기로, 지금 눈으로 볼 수 있는 큰 구분은 바로 우리 주님의 대리적 희생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적 교리에 있습니다. 여하튼 함께 연합하여 우리의 힘을 모으도록 합시다.
격려의 말씀
이 시대가 악하지만, 악한 날들 뒤에 좋은 날들이 오는 법입니다. 위더스푼(Witherspoon)이 쓴 위로의 말슴을 한 구절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는 불가능이 없다. 영국의 이 지역에서도, 진리가 길바닥에 무너져 내렸고 정의가 들어갈 수 없었던 처절한 배도(背道)의 시기 다음에 곧바로 지극히 놀라운 신앙의 부흥의 시기가 이어졌다. 1638년 직전에 그런 배도의 시기가 있었다. 교리적 부패와, 실천의 이완 상태, 그리고 정치적인 맹종이 스코틀랜드 교회 전체에 만연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진리가 과거에 그랬던 것보다 더욱 순결하며 더욱 위엄있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결코 좌절에 빠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마지막에 결국 승리하게 될 그 대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신앙이 무너져 내린 것 같으나 그 폐허에서 그것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현재 짓눌려진 상태에 있다 해도 오히려 그런 현실로 인해서 우리는 기도에 힘쓰게 되며, 또한 곧바로 부흥이 있으리라는 소망으로 격려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끝으로, 최대한 기도를 사용하십시오. 기도는 모든 것을 이기는 무기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과 연결시켜 줍니다. 기도는 우리의 최고 의지(依支)입니다.
설교자의 능력,
그리고 그것을 얻는 조건
여러분에게 기억을 새롭게 하여 순결한 마음을 북돋게 되기를 바라며, 또한 여러분과 제 자신이 우리가 능력으로 감당해야 할 그 위대한 사명을 깊이 생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일을 올바르고 효과적으로 하기를 바라는데, 그렇게 하려면 능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목적이 우리의 손님들을 기쁘게 하는 것도, 시대에 맞도록 설교하는 것도, 현대의 발전과 어울리게 하는 것도, 교양 있는 몇몇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 니다. 여러분, 성경을 이 시대에 맞추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시대를 성경에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무오한 말씀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지침에 따라서 설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큰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진리를 아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 또한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자연적인 지식, 혹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자연적인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과, 그를 향한 영적인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선포할 만큼, 그리고 합당하게 말씀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그 진리를 철저하게 알고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진리의 체계 전체를 선포하고 그 각 부분을 균형 있게 다루는 일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각 교리를 믿음의 유비에 따라서 제시하고, 각 진리를 그 적절한 위치에 맞게 제시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리를 제대로 알고, 그것을 제대로 사랑하며, 그리고 올바른 자세로, 또한 균형을 맞추어서 그 진리를 선포한다는 것은 우리처럼 연약한 존재들로서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위대하면서도 아주 미묘한 일을 위하여, 우리는 해마다 계속해서 인내해야 합니다. 어떤 능력이 과연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하도록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옛 복음의 단조로움을 불평하면서 끊임없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긁적거리고 있지만, 이런 질병이 우리들의 마음에도 전염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존재 전체를 다하여 온 힘으로 싸워야 할 악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덤덤함과 메마름을 느낄 때에라도, 하나님의 진리가 그렇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좀 더 주의 말씀에게 가까이 돌아가서 신선함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최근의 증거가 우리의 첫 증거보다 더 깊고, 더 원숙하고, 더 확신이 넘치고, 더 열정적이 되었으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정확히 일치하도록 계속해서 진리 안에 견고히 서고자 하는 것, 바로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참된 증인들이 되고자 하신다면, 그런 여러분의 계획은 정말 영광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표는 여러분이 진리를 친히 증거함으로써 여러분이 그렇게도 확신하는 그 진리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납득하게 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닥치는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일에 열심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들 중에는 믿지 않고자 하는 마음의 바람을 지닌 자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진리의 어떤 부분은 듣습니다. 하지만 다른 부분들은 거부감이 가기 때문에 귀를 막고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입니다. 사정이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지혜롭게, 또 설득력 있게 말해도, 죄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죽어 있는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일은 기적 이외에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은혜라는 기적이 있어야만 사람이 자기의 본성과 정반대되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호랑이를 가르쳐서 채식주의자가 되게 만드는 따위의 일은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죄와 의와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계시하신 진리들을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소망을 갖고 시도할 것입니다. 이 신령한 진리들은 육신적인 사람들에게는 혐오스런 것들이요, 육신적인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일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복음 진리는 타락한 본성과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설득력이나 자연적인 해명 같은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능력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설득시키려 노력해도 그 일에서 반드시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주께서 위로부터 우리에게 능력을 덧입히지 않으시면, 우리의 수고는 헛된 것이 되고 우리의 소망은 실망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수고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의 거룩한 소유가 될 사람들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선택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풍성한 것들을 제공해 주는 세상적인 신앙을 선호합니다. 여러분, 그러니 여러분에게 정말 비범한 능력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사람들을 불러내어 세상과 진짜로 분리되게 하며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연합되게 하려는 시도 자체가 완전히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시작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을 불러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역을 도구로 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 더 있습니다. 사람들이 거듭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설교는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의 주일학교 학생 하나라도 회심하게 하거나 중생하게 하는 일을 여러분 스스로 과연 할 수 있는지, 우리의 설교를 듣는 이들의 중생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의 무능력을 의식하고서 주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강단에 다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고 가정하고서,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로 인도함 받는 사람들이 끝까지 지킴을 받고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목회 사역이 그들을 지키는 도구가 되어서 그들이 끝까지 넘어지지 않고 의의 길에서 견고하게 나아가게 되는 것이 여러분의 바람입니다. 하지만 그 일을 여러분 스스로 하려 하십니까? 이 얼마나 건방진 일인지 모릅니다! 자, 이 도시나 작은 마을, 부락을 오염시키는 저 유혹거리들을 보십시오. 젊은이들을 공격하는 서적들의 유혹을 보십시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흔들린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이 보존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갖가지 죽음을 낳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 교회들에 새는 구멍이 얼마나 큽니까? 아무리 신실한 목사라도, 겉으로는 잘 나가는 것 같으나 방해를 받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많은 영혼들이 있는 것에 대해서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쓰임을 받는 도구가 되어 그리스도의 양 떼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며, 또한 그들이 그 위대하신 목자와 더불어 하늘에서 먹기까지 그들을 계속 인도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담당한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들을 과연 어떻게 그리스도께 순전한 신부로 내어드리겠습니까? 주위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는 소돔의 오염으로부터 그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마지막에, “저와 또한 주께서 제게 주신 자녀들이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통해서, 그의 은혜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대여섯 명의 회심자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 대여섯 명을 옆에 끼고 안전하게 진주문을 통과한다면, 얼마나 힘차게 하나님을 찬송하겠습니까? 하지만 온갖 일들이 일어나고 그들이 멸망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면서 쓰라린 마음으로 실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풍성하게 쓰임을 받은 것처럼 보였는데, 갑자기 우리의 회심자들이 마치 구멍 뚫린 보자기 속에 넣어둔 돈처럼 새어나가 타락하여, 그들이 애초부터 주 예수님께로 진정으로 모여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참담한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누가 과연 이런 일들에 합당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 우리 자신을 맡겼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가까이 없다면, 이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면, 속히 집으로 돌아가 쟁기를 들고 밭을 갈거나 가게를 열거나 다른 사업을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수행할 능력이 없는 일을 대체 무엇 때문에 행하려 한단 말입니까? 초자연적인 일에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그런 능력이 없다면, 절대로 혼자서 그 일을 시도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힘의 근원이 사라진 삼손처럼 블레셋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것이니 말입니다. 이 초자연적인 힘이 바로 성령의 능력, 곧 여호와 자신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능력을 얻는 법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사환이 문간에 나가서 부르는 사람에게 대답할 때에, 그는 주인에게 무슨 말을 할지를 들은 다음, 그 말을 그대로 나가서 반복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집에서 부리는 사환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나가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영혼을 구원하는 메시지를 주시고, 그것을 능력으로 덧입히십니다.
이 조건들 가운데 첫째로 눈에 띄는 것은, 단순한 마음입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가장 비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부어주십니다. 자기들 자신의 것이 가장 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가장 많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어린아이처럼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인 체하는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합니다. 설교자들중 아주 수준이 높은 분들이 많은데,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서는 그것을 고치고, 자기들의 생각을 거기에 집어 놓습니다. 있는 내용을 삭제해 버립니다. 이 시대에는 옛 복음이 결코 적합할 수 없다고 상상하며, 특정한 진리들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케케묵은 것이 되어 버렸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께서 우리에게 마음의 큰 겸손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이 무한한 지혜 앞에 엎드릴 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얻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완전히 굴복하는 자들에게 그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메시지를 지닌 사람에게 임하면, 그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질 뿐 아니라 또한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귀를 쫑긋 세웁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정직하게 열심히 사모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받는 데에 모든 능력을 동원합니다. 거룩한 메시지에 잠기면서 영혼을 거기에 완전히 굴복시킬 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적 영적 능력을 집중시키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는 눈을 갖고서 그 메시지를 전파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면, 깊은 진지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설교 작성하는 일을 가볍게 만드는 모든 것을 다 피해야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내 설교 준비를 위해서 시간을 아주 조금만 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런 것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죄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아주 속히 설교를 작성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들인 수고의 결과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강단을 위한 준비를 하찮은 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거룩한 봉사를 위하여 열심히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분의 그 거룩한 임무로 성급하게 들어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을 여러분의 소명의 필수적인 일로 삼고, 또한 동시에 그 소명의 최고의 특권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의 주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즐거움과 존귀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이 메시지를 받으십시오. 시간이 지나도록 보관해 놓으면 만나라도 썩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늘로부터 항상 새로이 받으십시오. 그래야 그것이 하늘의 향기를 발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우리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그렇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이 능력은 하나님의 심정을 느낄 때에 비로소 임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함께 동정하는 일에 대해 많이 듣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거기에 동의합니다. 타락한 자들, 고통당하는 자들, 잃어버린 자들을 동정하는 일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주 하나님의 심정도 이해하고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와 심정이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을 사용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심정이 되는 자를 그의 가슴에 끌어안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라, 내 아들아. 내 이름으로 일하라. 내가 네 손에 내 복음을 맡길 수 있겠노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의를 품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메시지 자체를 전할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신적인 결과가 있으려면 성령께서 반드시 함께 역사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 임재하심이 그의 말씀과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으로부터 축복의 결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고귀한 축복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의 말씀으로 말씀하시며, 여러분은 기도와 찬양으로 그에게 응답하면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접촉함으로써, 그리고 순종하는 마음에 역사하는 진리의 신령한 효과를 수단으로 하여,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가장 절실하고 가장 충족한 능력은 영원토록 영광받기에 합당하신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긴밀하게 붙드는 것이 있어야 하고, 분명하고도 담대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그 진리를 선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뜻과 철저하게 일치하는 것에 목표를 두지 않는 목회 사역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거짓말에다 인(印)을 쳐주시리라고 보십니까? 그가 계시하지도 않으신 것에 복을 주시고, 진리가 아닌 것을 표증들로 확증해 주시리라 보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면 우리가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 갈수록 더욱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이 옛 믿음에서 벗어나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는 것이 거의 변함없는 철칙입니다. 목사들이 신자가 아니라 의심하는 자들이 되면, 그들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대해서는 메마르고 열매가 없어진다는 것이 과연 사실이 아닙니까?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게 하려면, 여러분이 성령과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고 구원할 능력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순전히 믿으십시오. 강단에 올라가 진리를 전하면서, “좋은 결과가 좀 나타나면 좋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 말씀이 결코 헛되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이룬다는 것을 확신을 갖고 믿으십시오. 마치 복음에 무언가 능력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이적을 행하는 일꾼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니, 가서 영적인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일어나 걸을 것입니다. 여러분, 담대히 전하십시오. 성령으로 말씀하시면, 결코 헛되이 말씀을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우리가 진정 믿으면서 전하는 것임을 교인들이 느끼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내가 믿으므로 내가 말하였노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을 순전하게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믿을 뿐 아니라, 진리의 능력까지도 믿어야 하겠습니다. 진리를 전하면 영광된 결과들이 생겨난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로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끈질긴 믿음으로 진리를 든든히 붙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주실 만한 상태에 있게 됩니다.
다음으로, 설교할 때에 우리가 전하는 그 일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에너지의 절반을 다른 것에다 쓰면 우리의 거룩한 소명을 절대로 올바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대여섯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사람은 모두 실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우리의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하여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할 때에 “나의 모든 것”이 거기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역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몰입시키지 않을 경우 우리가 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조금만 사려 깊은 사람이라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동네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보세요. 목이 터져라 “사세요! 사세요!”라고 외칩니다. 모든 사람을 물건 사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모든 근면함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거룩한 부르심에서 성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메시지를 전할 때에 주께서 함께 계시기를 원하면, 철저히 진지해야 하고 살아 있는 열정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설교 중에 진정한 본질과 순전한 은혜의 기미들이 새소리처럼 들리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이런 설교에는 인위적으로 만든 세련된 설교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꾸밈이 없이 전하는 것을 듣는 일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단순한 증거는 포도원에서 막 따온 포도송이와도 같습니다. 그것들 옆에 건포도더미를 가져다 놓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설교의 생명이 준비를 통해서 강화된다면,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준비 과정에서 설교의 생명이 증발해 버린다면, 그렇게 애쓰고 수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오히려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설교를 말려서 죽게 했으니, 여러분 스스로 일종의 살인 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저는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작성해 놓은 고전적인 설교문의 표현 하나하나를 일일이 상관하신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멋지게 내린다고 해서, 주께서 그것을 사용하셔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에 불이 있고,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으면, 거기에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함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없으면 절대로 성령의 역사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중용이 있는 법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위해 기도하고는 본문에 대해 전혀 준비하지도 않고 곧바로 강단에 올라가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생각과 표현들을 상세히 준비해 놓아서 그 정해진 틀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면, 그런 철저한 준비가 오히려 내 믿음을 방해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 준비를 하되, 자유로이 처신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설교하는 동안, 성령 하나님께서 바로 그때에 할 말을 여러분에게 주실 수 있고, 그리하여 전에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말씀을 하도록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준비한 그 어떠한 말씀보다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들어가 박힐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하는 일을 그저 책 속의 글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더욱더 사실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려면,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교제 바깥에 있어도 안전한 때가 언제일까요? 그런 때는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마치 어린 자녀가 사랑하는 아버지를 대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대하여 양자의 영이 항상 우리 속에 있고 사랑의 영이 우리에게서 언제나 흘러넘치게 된다면, 우리가 능력으로 설교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역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기 위해서는 거룩한 삶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높은 거룩이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지 못한 삶이라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것을 축복하시겠습니까? 영적인 지도자라면 적어도 성도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영혼을 맡기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주의 능력으로 덧입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또한 사람들의 구원을 강하게 사모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들을 우리에게 주셨어도, 그보다 천 배라도 더 많은 영혼들을 주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결과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발전을 위해서는 조종(弔鐘)이 될 것입니다. 더 나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현재의 거룩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거룩이 없는 것이요, 이만하면 충족히 쓰임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쓰임을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자라갈수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바람도 자라가야 합니다. 가장 거룩한 목사는 바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부르짖는 사람입니다. 보통 그리스도인은 그런 식으로 탄식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순결한 자에게만 죄가 그렇게 지극한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무덤덤한 사람들에게는 핀으로 찌르는 것만도 못하게 여겨지는 죄의 상처가 그 사람에게는 마치 단검으로 찌르는 상처처럼 아프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향한 큰 사랑이 있다면, 그리고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향한 큰 연민의 정이 있다면, 큰 성공을 거둔다 해도 결코 우쭐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회심하지 않은 수천 수만의 사람들에 대해 탄식하며 외칠 것입니다.
영혼들을 향한 사랑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목회 사역에서 작용합니다. 다른 것도 있지만, 우선 그것은 우리의 언어를 아주 평이하게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이 어릴 때, 여러분의 어머니는 여러분에게 어떤 언어를 사용하셨습니까? 어머니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일들은 아주 유치했고, 정말 어린아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지각이 있으신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이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방식은 언어의 모든 위엄과 세련된 멋들을 다 무시하고, 오로지 그 의미만을 전달하고, 거기에 축복을 주입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화려한 연설의 페인트로 장식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다른 사람의 마음에다 올바로 전달시키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죄인들을 중생시키고 그들을 성도로 세우는 능력이 충만히 발휘되는데 필요한 것들을 몇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주변의 환경을 세심히 살펴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 들어가면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움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회중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면, 대개는 아무리 설교자가 훌륭해도 그에게서 아무것도 얻지를 못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설교를 들을 준비를 갖추고 있으면, 대개는 그 설교를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큰 축복을 위해서는, 우리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서로 싸우는 겉모양의 신자들이 모인 곳에는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연합이 없는 것은 언제나 능력이 없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부터가 부드럽지 못하면, 교인들이 부드럽게 되기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들로서 우리는 많이 참아야 합니다. 가능한 만큼 참아서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똑같은 것을 다시 참는 일을 새로이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고전13:7)사랑에 강하여, 절대로 상처를 받지 않기로 조용히 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화가 지배하던 곳에 조화가 생겨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축복을 기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진리가 전파되고 죄인들이 회심하는 일을 위하여 우리 교인들 모두가 진지해지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주위에 진지한 사람들이 있는 목사는 얼마나 복된 사람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임하셔서 이런 환경들을 거룩하게 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기도하는 교인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도 느끼시리라 믿습니다. 교인들이 언제든지 기도를 하게 하여 그들에게서 기도의 샘물을 길어내십시오. 기도하는 교인들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군대는 승리하는 군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 중의 하나는 바로 열정적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배에서 함께 협력하는 것 이외에, 우리 교인들이 영혼들을 찾아다니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낯선 사람이 교회당에 들어오면 언제나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약간 감동을 받으면 그때마다 한 진지한 형제가 그를 돌보아야 합니다. 마음에 괴로움이 있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누군가가 따뜻한 음성으로 위로의 말씀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우리의 목회 사역은 네 배의 수고가 들여지게 되고, 결과도 네 배로 늘어납니다. 우리의 모든 교회들이 열정과 진지함으로 함께 협력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만이 아니라 교인들 하나하나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그런 교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립니다. 각 사람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생각하게 하십시오. 싫든 좋든 여러분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속히 오시는 일이 없으면,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일이 다음 세기들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단호하게 행하면, 영국(한국)의 미래가 복음으로 밝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지를 치고 저기서 교리를 무시하게 되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후대의 자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날 일어나는 일을 오늘의 일로만 보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은 영원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똑같이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때를 위한 것이 아닌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 교인들의 임종 장면을 기억하여 우리의 책임감을 드높이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했다면, 그들이 죽는 시각에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정말 괴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가령 우리 교인 중에 어떤 분이 뼈만 남은 팔을 뻗으면서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버림받았는데도, 목사님은 내게 한 번도 경고를 하지 않으셨고, 언제나 잠시 빙 돌아갈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저는 우리 앞에 놓인 복음 속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소망 대신 ‘더 큰 소망’을 갖고 빙 돌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어느 교인이 제게 마지막 임종의 자리에서 제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기보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제게 더 나을 것입니다.
저는 교인의 임종에 함께 했다가 믿음이 강건해서 돌아오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들의 영광된 확신을 보게 되면, 우리 주님의 복음에 대해 의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온 세상과 싸우면서 그것을 마치 축구공처럼 제 앞에서 차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은 아주 영광스럽게 임종을 맞이합니다.
지난 주 한 사랑하는 자매가 눈 바로 밑에 암이 걸렸습니다. 그 자매가 어떻게 했나요? 자기의 힘겨운 운명에 대해 애통해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자매는 그 찬란한 왕의 모습을 뵙게 될 것이라는 환한 기대 속에서 행복하고 고요하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얼마 전에 잠든 한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전혀 두려움이 없으신 것 같군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움이라고요? 어떻게 두려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갖도록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삼십 년 동안 하나님 나라의 단단한 고기를 먹고 지내왔는데, 어째서 죽기가 두렵겠습니까? 제가 믿는 분이 누구신지 저는 잘 알고 있답니다.” 저는 그분과 함께 정말 은혜로운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더 나은 세상으로 곧 가게 된다는 기대 속에서 거룩한 기쁨을 드러내 보였던 것입니다.
자, 여러분, 마지막 한 마디만 더 참고 들어주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곧 오시지 않으면, 여러분과 저는 곧 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임종의 자리에 누워 있을 때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정말 얼마나 큰 복이겠습니까? “오 주님, 어린 시절부터 주님을 알았사옵고, 지금까지 주의 놀라운 역사를 선포해 왔사온데, 이제 제가 떠나려 하옵니다. 저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선포하기를 피하지 않았나이다”라는 말을 덧붙일 수 있다면 세 배나 더 복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한, 저는 주님과 더불어 흰옷을 입고 다닐 그런 분들 중에 있기를 결심합니다. 거룩한 길을 참되이 걷고 절대로 타협으로 더럽히지 않는 양심이 양자의 축복을 특별히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점에서 여러분이 충성을 다하도록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신5:9)이라는 엄숙한 말씀을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저도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모여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서도들 이야기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그리고 그의 은혜의 교리에 충성을 다하십시오.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주께서 친히 여러분을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 시대의 목사
여러분, 저는 오늘 한 가지 주제만을 집중적으로 말씀드리기보다는 여기저기 두루 다니면서 폭넓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간단하게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 대하여 어떤 위치에 계신지를 생각해 봅시다. 천문학의 체계를 세울 때에, 태양을 어디에다 둡니까? 그 중대한 문제에 대해 분명치 않다면, 다른 행성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도 분명치 않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학 체계에서 그리스도를 어디에다 두십니까? 여러분의 사상에 그가 어디에 서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일과 여러분의 동료들과 관련해서 예수께서 어디에 계시느냐는 말입니다.
신적인 우리 주님을 여러 가지 면에서 보아야겠습니다만, 저는 언제나 우리의 희생 제물이시오 죄를 지시는 그리스도로서 그가 취하시는 구원자의 모습을 최우선으로 여깁니다. 이에 대해서 분명히 열정적으로 선포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 그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십자가의 깃발이 길을 인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贖罪)를 책장 위에 올려놓고 그저 당연한 진리로 여기고만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그것을 여러 가지 하찮은 신앙적인 호기심거리들 속에 내버려둘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마치 예배 의식의 언어를 되풀이하듯 무덤덤하게 사용할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 진리를 살아 있는 것으로 강렬하게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존재의 에너지를 충만히 발휘하여 그것을 힘있게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속죄의 그 중차대한 진리를 자주, 명확하게, 그리고 강조하여 전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올바로 배우지 못한 것이요, 따라서 그리스도를 올바로 가르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것은 입맞춤으로 그를 배반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19세기 이전에 골고다에서 행해진 일이 오늘날의 죄와 상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렇게 거칠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러면서도 우리의 죄를 주 예수께 지울 수 있다는 것이나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도덕적으로 불합리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집에서 만들어낸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엄숙한 증언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벧전2:24)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그것을 가리켜 부도덕한 일이라 부른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고후5:21)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사53:5-6)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셨고 그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셨으며, 그리하여 사람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덕적인 주권에 대해 저질러진 치욕에 대하여 보상이 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믿고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죄 사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대신 보상하셨기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고, 신자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1:6) 영접을 받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속죄를 제쳐두는 자들은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교리의 본질이 서로 공통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중에 어느 하나를 부인하면 다른 하나도 무너뜨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목회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을 명확하고도 단호하게 전하기를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째서 제가 그렇게 확신하는지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어떠한 곳에서도 구원의 소망의 그림자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개인적인 죄에 대한 의식 때문에 한 쪽 구석에 몰려져 왔고, 절망에 싸여 왔습니다. 그런데 완전한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제가 그것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제가 그를 처음 바라보고 빛을 받은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제가 얼마나 자주 죄인으로서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렸고, 그의 상처를 새롭게 바라보았고, 영생을 거듭거듭 믿었으며, 그리하여 처음에 가졌던 그 기쁨을 계속해서 누렸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여러분, 저는 다른 것은 전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을 아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분 중에 혹시 속죄를 설교하면서도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감히 그분에게 속죄를 설교하지 말라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분명히 확신하건대, 어떤 교리든 억지로 차가운 마음으로 전하는 설교자야말로 그 교리의 가장 나쁜 원수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서 십자가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그냥 내어버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참으로 말씀드리거니와, 저는 제 마음을 다하여 진정으로 속죄를 전합니다. 저는 제 임종 자리에서도, 제 생애의 마지막 오 분 동안에라도, 그리스도의 희생과 죄를 사하는 피의 역사를 증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비록 듣는 이들이 충격을 받는다 할지라도, 대속(代贖)의 진리를 가장 강조하는 말씀을 되풀이하고 싶습니다. 천국에서의 저의 첫 말이 제 구원을 주님의 피의 공로로 돌리는 것이 될 것이니, 이 땅에서의 제 마지막 말이 그 동일한 사실을 증거하여 주님의 원수들에게 충격을 준다 한들, 어떻게 제가 후회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다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중보자시오 대제사장이심을 붙듭니다. 이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미신의 주장들에 대해서 분노를 갖고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것이 영국에 아직 살아 있습니다. 즉, 옛 로마의 사제들이 만들어낸 복음이 그것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 주 예수님 자신은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중보자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쪽으로 어느 정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 쪽으로는 죄악된 인간과 주 그리스도 사이에 간격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간격은 사도직을 계승한 자들만이 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탐하는 존재들입니다. 또 어디를 가든지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높이 올려서 그들에게 축복을 받아야만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주장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의 길이 지정된 사제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이런 오류에 대해서 진지하게 저항하시기 바랍니다. 이것과 더불어 복음이 일정 부분 전해진다 해도, 그것은 치명적인 오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미신의 교묘한 것에 조금도 연루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사제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은 목사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단언하면서도, 여러분에게서 무언가 높은 계급에 속한 분위기가 풍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조장하는 의복 스타일이 있는데, 그것을 모방하는 일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런 것을 풍기는 언어 스타일이 있습니다만, 그것을 모방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우월감을 드러내 보이는 그런 풍모가 있습니다. 이런 거만한 태도는 정말 유치한 것입니다. 목사가 위엄 있는 존재라고 느끼게 만들어서 교회의 나머지 회원들이 감히 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의식적으로 처신하는 그런 특정한 성직자들의 모습을 피하십시오.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 제사장들이라는 인식을 갖고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도 자기들이 무언가 신비한 특별한 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헛된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목회자들로서 우리의 직분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고 정당하게 수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들의 직분 그 자체를 높이는 데에만 굉장한 관심을 쏟으며 자기들을 높이려고 애를 쓰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직분을 높이 올리는 만큼 그 사람은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목회자로 선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자기들이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자기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영감된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시는 오류가 없으신 스승으로 제시하기를 명심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께는 충성을 다한다고 하면서 그의 말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자신의 말씀과 그의 사도들의 말씀들을 그렇게 소홀히 대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높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리스도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요한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6). 그리스도를 길이요 생명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를 진리로 아는 것도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입법자시오 교회의 유일한 통치자이심을 더욱더 강조하여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사람이 만들어낸 신앙 체계들이 있는데, 우리 교회들에서는 모든 일에서 사도의 전례를 지키고 그리스도의 원리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권위는 바로 주의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미 알려져 있는 그리스도의 규례들 중에 무엇을 삭제한다면, 그것은 더욱더 나쁜 일입니다. 교회 안에 세례와 성찬에 대해 논란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논란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과 행위를 개정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의 위대한 머리이신 주님의 법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일에 대해 항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또한 우리 앞에 우리의 모범과 귀감으로 서 계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완전한 귀감으로 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그에게 일치하기를 사모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주님이시오 하나님이신 분으로 높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는 주님이시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가장 깊은 경외로 그분에 대해 말하고 또한 생각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일들을 가볍게 대하는 심령이야말로 거기서 나오는 행동보다 더 사악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을 최고로 높이고 그의 능력과 그의 궁극적인 승리를 확고하게 신뢰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키를 잡고 계신 주님의 손을 신뢰합시다. 그의 지혜와 권능이 결국 모든 일을 이루실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맙시다. 그러므로 가서 그의 이름으로 말씀하십시오. 교리를 진술하고 나면, 교인들에게 그것을 믿으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십시오. 담대히 그렇게 하십시오.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명하여 일어서게 하고, 죽은 사람을 명하여 살게까지 한 것처럼, 여러분도 죄인들에게 주님께로 돌아와 생명을 얻으라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시는 주님께서 그 자신의 말씀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주님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진지하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셨듯이 우리도 그를 대신하여 서 있다는 사실을 묵상해 보면, 우리의 위치가 정말 충격적으로 느껴집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보내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우리는 강단에 서서 죄와 의와 다가올 심판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수고한다는 것을 항상 느끼십니까?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전한다는 생각을 갖고서 설교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면, 부자들과 교양 있는 소수에게 모든 관심을 다 쏟지 않을 것이고, 예수께서 하셨듯이 많은 이들을 돌보아 줄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 국왕은 “가난한 사람의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민이라도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그를 알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가난한 자들의 설교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실 때에,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우리 양 떼들 중에 다른 사람보다 더 병들고 더 가난하며 더 무식한 자가 있으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사람을 가장 먼저 찾도록 합시다. 지체 높은 사람들과 동질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부랑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타락한 자들과 하나님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면, 우리는 거만을 떨지 않고 부드럽게 권유할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의 정을 갖게 될 것이요, 죄인들의 패망이 우리에게 화가 되고, 그들의 구원이 우리의 복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들에게 간청할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울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셨을 것이니까요. 그들을 참아 줄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으로 참으시니 말입니다. 기회를 살피고, 그것들을 인내로 사용할 것입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대하듯 그렇게 우리의 교인들을 대할 것입니다. 그들을 어깨에 메고 기쁨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절대로 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그리하셨으니 말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취하는 우리의 위치는 정말로 책임이 막중합니다. 그 무게를 견디려면 큰 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여러분, 조심해서 처신하십시오. 여러분이 위대한 이름을 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목사들이 교만하게도 자기 이름을 그리스도의 이름 대신 내세우다니, 이 얼마나 우리 주 예수님께 사악한 잘못입니까? 여러분이 진정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위치에 있다면,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신에 합당한 자들이 되게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교인들 가운데 다른 이유로는 도저히 사랑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모습대로라면 과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유 때문에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교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유들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셨습니다”(갈2:20).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내게,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네 자신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면 과연 그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화난 감정은 일일이 버려야 합니다. 타락한 자, 경박스러운 자, 헐뜯는 자, 무관심한 자, 심지어 사악한 자까지도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줄로 그들을 동여매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이 땅에 주님의 사랑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채우”도록(골1:24) 그리스도와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난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는 데에 들여지는 고난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를 위해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며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진리로 말미암아 지금도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나 비방이나 손해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견디는 고난을 당하는 자들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함께 모으는 데에, 또한 그의 택하신 교회를 세우는 데에 필요한 고난의 분량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저지르는 온갖 고난을 주께서 친히 어떻게 견디셨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깨달을 때에 주님을 향한 우리의 위치가 지극히 실질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축복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러니 현실로 처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체험하고 전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아브라함의 종이 그 주인의 부귀를 잘 전달하며 자기가 그의 집에서 가지고 온 보물들을 보여 주었듯이, 주님이 누구시며 그가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우리가 그 일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아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 줌으로써 우리의 위대하신 주님께로 영혼들을 인도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그리스도의 권능과 임재를 의식하는 자들로서 그를 향하여 든든히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사실은 그가 진정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요 또한 그가 진리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그의 진리를 전한다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라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그저 헛된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시고, 그 믿음에 합당하게 행합시다. 그리스도의 밝으심을 항상 느끼지 못한다 해도, 마치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향해서 항상 돌아섭시다.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라도 해바라기는 어느 쪽에 빛이 가장 많은지를 알고서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여러분, 참된 해바라기가 됩시다. 강단에 올라갈 때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쪽을 바라보며, 그 쪽으로 기댑시다.
설교자들 중에 주님이 그들의 복음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의 주목을 끌어서 구원시키기에는 자기들의 복음으로는 충분치 못하므로 그것에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들을 보충시키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방법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아서 복음이 실패로 끝나버린다면, 그것은 정말 한심한 일일 것입니다. 끈끈이 종이가 파리를 끌지 못해서 우리가 들고 다닌다면, 차라리 그 끈끈이 종이를 불태워 버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복음이 사람을 이끌지 못하고, 또한 사람들이 와도 그 복음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 회심케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을 포기해 버리십시오. 그리고 가서 커피숍을 열거나 술집을 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설교를 복된 복음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주의 말씀에 초자연적인 능력과 임재가 함께 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면,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자, 여러분, 여러분의 복음에 성령의 능력이 없다면, 확신을 갖고서 그것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의 위치에서 그를 향하여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복된 진리에 대해서 여러분이 과연 얼마나 뜨겁게 감동을 받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그것을 믿고,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 위대한 소망이 복음적 교리를 사랑하는 자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오실 것입니다. 때와 기한은 우리의 알 바가 아닙니다. 여러분, 용기를 가지시고, 마음을 일으키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를 높이 기리며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그의 언약하신 대로 임하셔서 그의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실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개인의 위치에 대해서 두세 마디만 말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온전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며 정신적 활력이 왕성한 분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복음을 알고, 복음의 능력을 실제로 체험했고, 진흙 용광로에서 은처럼 연단을 받았고 또한 복음의 진가를 드높이는 형제들이, 그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목숨을 던지는 그런 형제들이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폭풍우에 맞서고, 격류를 거슬러 헤엄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면 혼자서라도 결연하게 나아갈 그런 영웅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대장에게는 강철과도 같이 든든한 군사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 시기에 우리는 친분 관계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올바를 때에, 입장이 분명하지 못한 자들과 어울려서 우리 자신을 타협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물에 빠져 가는 배의 잔해를 붙잡아서 함께 물에 빠질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복음의 위대한 진리들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자들과 계속해서 교류한다는 것은 영원한 위험 속으로 달려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신령한 사람들에게는 추악한 친구일 뿐입니다. 새로운 생각과 느슨한 습관과 신령하지 못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과 사귀는 일은 정말 불편합니다. 특히 스스로 아주 정통 신앙을 가진 체하면서도 옛 믿음에 속한 것을 하나도 믿지 않을 경우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신실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온갖 연관들을 다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악한 것에서 분리한다고 이야기만 하고 계속해서 그 속에서 함께 뒹구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정결해야 하겠고, 또한 여러분의 친분 관계 역시 정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악이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여러분의 삶이 거룩해야 합니다. 이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로 여러분의 가슴에 못을 박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니 만큼 여러분이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최고의 것을 여러분의 주님께 드리십시오. 주님을 섬길 때마다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를 힘쓰십시오.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선행에서 여러분이 완전하게 만드시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여러분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십시오. 수요일 저녁, 대여섯 명이 모여 있어도, 여러분은 최선을 다하십시오. 절대로 차선(次善)의 것을 내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언제나 유지하십시오. 여러분의 삶 전체가 여러분에게 가능한 가장 고상한 수준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고, 가장 능력 있는 방식으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게으른 것입니다.
부지런히 행동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모든 쇳덩어리를 다 불 속에 집어 넣으십시오.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능력을 다 사용하십시오. 기회가 있는가를 항상 살펴서 그것을 속히 붙잡으십시오. 아무리 작은 기회라도 거기에 큰 일이 일어날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지극히 작은 마을에서도 무한한 결과들이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곳이 복음화 되면, 다른 곳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공유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처럼, 울타리를 조금씩 조금씩 항상 넓혀 가십시오. 소유해야 할 땅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현재 행하고 있는 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목회자들로서 여러분의 양 떼들을 먹이시고,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양 떼들을 늘여 가십시오! 이 점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십시오! 온 정력을 다 사용하며, 모험적이고 근면한 심령을 지녀서, 이 시대에 역사하는 어둠의 임금의 그 끊임없는 책략을 무력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심어 주기를 바라는 말은, 마음에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싸우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싸우게 되면, 우리와 싸우는 상대방을 동정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최소한 우리가 진리를 붙드는 동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누가 우리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대의가 어떻게 무너질 수 있습니까? 주님의 뜻에 따라, 회심자들이 바다의 모래처럼 무수하게 그의 진리에게로 몰려들 것입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110:3)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용기를 가지시고 다음과 같이 노래하며 여러분의 길을 계속 가시기 바랍니다.
“지옥의 바람이 불었고,
세상이 그 미움을 드러냈으나,
그래도 무너지지 아니하도다.
할렐루야 십자가를 찬양하라!
절대로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46:7).
스펄전 목회론1.hwp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말씀을사모하는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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