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란 무엇인가? 기도의 가능성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신을 오직 탄식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구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45주일)
본 글은 C. Bouwman 목사의 기도에 관한 일련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본문은 1996년에서 1997년 까지의 “Una Sancta”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기도의 가능성
C. Bouwman
trans. by Tae-il Noh
우리는 너무 많은 괴롭고 좌절하는 중의 기도를 보게 된다. 우리가 느끼는 바로는, 우리 기도가 천장에 부딪혀 반사되는 것 같이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움직이시고 악과 싸우시는데 너무 바쁘셔서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실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다른 수많은 기도가 동시에 이뤄지는데 하나님께서 들으셔야만 하는 죄로 가득한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천장에서 반사된다고 확신한다....
이 글에서 나는 왜 기도가 가능한지에 관한 질문을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나는 우리가 낙원에서 깨뜨린 하나님과의 유대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셨고, 그로인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개략해 보기를 원한다.
언 약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자존하셨다. 결코 외롭지는 않지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게 세상을 창조하는 일은 기쁜 일이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절정은 인간을 만드는 것 이었다. 전능한 창조주께서는 피조물과 함께, 그리고 이 피조물과만 언약하셨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인간과 맺으신 언약은 이제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에 의해-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에 교제관계와 서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예를 들어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왜 존재하는지와 같은 특별한 일들을 말씀해주셨다. 실로, 이것이야말로 “날이 서늘할 때에” 그들의 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방문하신 실례이다(창3:8).
하지만 하나님께서만 인간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도 하나님께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그가 만드신 것에 관하여 그들의 방문자를 찬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함께, 그것을 찬양하며 하루를 보냈고, 그래서 그의 영광을 직면할 수 있었다(시19편). 하나님께서 방문하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과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가 만드신 것에 대한 생각을 그에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이 그 하루 동안에 그의 세계에서 무엇을 했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렇다, 그들이 동산을 돌보면서 어떤 일을 만날 때 정보에 관하여 하나님께 여쭤볼 수도 있었다. 요점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창조주도 피조물인 인간과 대화할 수 있었고, 피조물도 그의 창조주와 이야기할 수 있었다. 창조주께서는 피조물인 사람의 사고와 관심, 그리고 인생의 부침(浮沈, ups and downs)에 진실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자신의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이며, 스스로 그들의 아버지가 되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피조물로부터 창조주에게 이르는, 아이로부터 아버지에게 이르는 그 열려진 대화, 그것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타 락
기도를 할 때 우리의 문제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바로 우리의 죄로 인한 타락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죄로 인한 우리의 타락으로 인해, 사탄과의 유대의 형성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고,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스스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오셨지만, 성경은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3:8)고 말한다.
타락 후에 아담과 하와가 원치 않았던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대화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써 그들의 아버지의 면전을 마주하기 창피해했다. 즉, 그를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분을 만날 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가?! 아니다, 그들의 죄악된 본성이 그 만남을 가로막는다. 그들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었다. 기도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구 속
바로 여기에 놀라운 점이 있다: 피조물인 인간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은혜로 형성하신 주권자 창조주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부르신(called to)” 것이다(창3:9). 비록 사람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대화하기를 원하셨다. “벨직 신앙고백서”는 교회에 관하여 이렇게 요약하기를, “[사람]이 그로부터 떨며 달아날지라도”,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의 놀라운 지혜와 선하심으로 사람을 찾는 것을 놓치지 않으신다.”(17조).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깨진 관계의 회복을 원하시고, 인간과 대화하길 원하시며, 인간이 주님께 말하길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깨진 언약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성실한 언약의 파트너를 찾으셨다. 그분은 아담과 하와에게 은혜의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여기에 구원의 복음이 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을 상하게 하고, 그 구속의 복된 결과는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시킬 것이다. 그로 인해 최초의 온전한 관계로서의 화목이 회복되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다시 말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결 과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여자의 후손인 예수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마귀와 싸우셨고 그를 물리치셨으며, 마귀의 권세로부터 잃어버린 백성들을 되찾으셨다. 그 잃어버린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목되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완전이란 이 구속받은 죄인들이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대화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허락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획득하신 회복이다.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이 두렵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두려움도 느낄 필요가 없다. 아담과 하와에게 금지된 것이 없었고, -죄로부터 자유하여- 하나님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이 가능했듯이,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된 우리는 하나님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고,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을 주님께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우리의 죄는 사라졌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에는 그 어떤 것도 방해도 없는 것이다(에베소서 2:18). 히브리서에서 사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10:19).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곧 하나님 자신을 말한다. 구세주의 보혈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를 두고 사도들은 계속해서 “우리가 가까이 나아가자”(22절)고 말한다. 사도들은 우리에게 주저하지 않고 말하기를, 그로인해 우리가 그와 대화하고 기도하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그분 스스로 우리 편에 서서 천국에서 중재하고 계신다. 이러한 내용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제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기를” 명령받은 것이다(벨직 신앙고백서 26조항). 우리의 창조주와 대화하는 것이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을 특징지우는 것이 되도록 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감사드린다.
응 답
그리고 약속이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에게 말하기 원하는 것을 들으신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유일한 아들을 우리를 위해 포기하시기까지 각별한 관심을 가지셨다. 그 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포기할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어찌 그분이 우리가 말할 때에 듣지 않으시겠는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구하는 모든 이마다 얻을 것이요,,, 또한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7 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요14:13 이하)고도 하신다. 바울서신에서는 ”그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로마서 8:32)고 하였다.
만족(content)
우리 기도의 수납자께서 기도가 가능케 되도록 역사하신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 하나님께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우리의 습관은 다소 보편적인 기도를 유지하려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음식을 위해, 직장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우리 클럽 모임에 복이 임하도록, 교회와 직분자들을 축복하며 기도할 것이다. 우리는 병자들과 선교와 학교와 핍박받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다. 모두 좋다. 하지만 잠깐 생각해 보자: 이러한 것들이 정말 당신에게 중요한 것인가? 물론 먹는 것과 일, 교회, 선교들은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우리의 대화에서 확실히 한 지위를 받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다른 것들이 이런 것들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간절하게 하는 때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우리는 늦잠을 자서 모임에 늦기도 하고, 잠을 못자서 힘들기도 하고, 토스트를 태워 먹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이런 너무 많고 자잘한 것들은 매일의 삶에 필수적인 것들이고 우리의 마음과 시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들이란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이런 종류의 사소한 일들에는 관심이 없으셔! 전능하신 하나님께 그런 일들을 상술하거나, 대처할 힘을 구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야!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마10:30).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심지어 이러한 작은 것들도 가장 확실하게 관심을 가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과 자녀, 교회와 선교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토스트와 늦잠,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있는 무엇이든 그분께 말하도록 하자. 그리고 상황에서 필요로 하는 힘을 위해서도 요청하자.
기억하라: 성경은 두 부분-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는 부분과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부분-으로 나눠져 있지 않다. 교리문답은 이것을 이러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께 “우리의 몸과 영혼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요청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포괄적인 것이다. 여기서 제외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 론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마치 천장에 반사되는 것처럼 느끼는 때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누구인지 방향을 잡을 필요가 있다.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마음에 있는 무엇이건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께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우리 또한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은 들으신다-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에 개의치 않으시고 말이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대화에 언급되기에 너무 큰 것이란 없고, 또한 너무 작은 것 역시 없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자녀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듣기를 원하신다.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태복음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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