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장할 것인가 화장할 것인가?
C. Van Dam
trans. by Seok-Jun Yun
C. Van Dam 박사는 온타리오 주 해밀턴에 있는 캐나다 개혁교회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이다.
본 글은 클라리온 Volume 56, No.22 (October 26, 2007)에 실렸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혹은 그녀를 매장하는 편이 더 나은가, 화장하는 편이 더 나은가? 장례를 준비한다면 화장도 고려해야 하는가? 매장을 할 것인지 화장을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단지 취향의 문제이거나 비용과 같은 요소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문제인가? 이런 내용들과, 또한 관련된 문제들이 점점 더 많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우리 교회들에서도 그러한데, 클라리온이 이 주제와 관련된 글을 요청받았다는 사실이 또한 그것을 증거해준다.
일반적인 방법
성경이 무덤에 사망한 사람을 매장하는 것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예는 많이 있다. 몇 가지 경우만 기술해 보자. 아브라함이 소유했던 최초이면서 유일한 소유지는 그의 아내를 위한, 그리고 후에는 그 자신을 위한 묘지였다(창23장;25:9-10). 다른 족장들도 또한 거기에 묻혔다(창49:29-33;50:13). 모세가 느보산에서 죽었을 때 그를 묻은 것은 하나님 자신이셨고, 이것은 죽은 사람을 다루는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신34:6). 실로 그의 율법에서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사형에 처할 죄를 지은 사람조차도 적절히 매장될 수 있도록 명령하셨다(신21:22-23, 해당 본문은 십자가형을 받아 죽은 죄인조차도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라는 본문이다-역자주). 신약성경으로 가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는 매장되었고(요11:17) 화장되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 시체를 다루는 로마와 헬라의 방식이 화장이었음에도 말이다. 결정적으로 주 예수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가 묻히셨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마27:59-60). 이는 그분의 기대에 따른 것이다. 한 여자가 베다니에서 그에게 비싼 향유로 기름 부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반대를 직면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마26:10,12).
이렇듯 매장은 통상적인 방법이다. 이는 주 하나님께서 첫 번째 사람을 땅의 티끌(dust)로부터 지으셨다는 점을 기억할 때(창2:7)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죄로 인한 타락은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는 선고를 가져왔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반복될 유형이다. 매장이 이 유형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심판으로서의 화장
비록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것이 기본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또한 성경에서 어떤 상황에서는 사람을 화장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서 “누구든지 아내와 그 장모를 아울러 취하면 악행인즉 그와 그들을 함께 불사를지니 이는 너희 중에 악행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레20:14)고 말씀하신 것을 읽는다. 유사한 것으로 “아무 제사장의 딸이든지 행음하여 스스로 더럽히면 그 아비를 욕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지니라”(레21:9; cf.창38:24)고 한 것도 들 수 있다. 화장하여 재가 되게 하는 것이 가증한 죄악에 대한 극렬한 심판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는 몸이 제대로 묻히움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저주받았다는 것을 표시한다. 유사하게 아이성에서 이스라엘이 패퇴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수7:15)고 명령하신다. 아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천명하신 여리고의 전리품을 훔쳤고, 그로 인해 그와 그의 가족들은 불에 태워지게 되었다(수7:26). 다시 한번 이 극렬한 형벌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화장에 대한 다른 예도 있지만 이러한 것들은 정황상 예외적인 것이거나 하나님에 의해 명령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예는 사울왕과 그의 아들이 블레셋인에 의해 더 모욕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장된 것이다(삼상31:10-12). 이것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특별한 행동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 장사하고 칠 일을 금식하였더라”(삼상31:13)고 한 것은 생각해 볼 만한 점이다. 여기에는 매장이 나타난다. 뼈는 매장된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또한 직접 사람들을 불살라 죽게 하시는 벌을 내리기도 하신다. 그로 인해 그들은 일반적인 매장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답과 아비후는 여기에 해당한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고라, 다단, 아비람과, 제사장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그들을 따르던 무리들을 불로서 징벌하셨다.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인을 소멸하였더라”(민16:35).
위의 관점에서 볼 때, 구약의 신자들이 죽은 후에 다루어지기를 원한 방식이 화장이 아니었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화장되지 않고 매장되는 것은 영예로운 방식이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앞에서 살펴본 것에 덧붙여 우리는 매장에서의 몸이 차지하는 위치를 중요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매장되어 있는 몸
매장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시신은 유물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단지 땅에 삽입된 이름 없는 물질 조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묻히운 특별한 사람의 몸이다. 실로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를 묻는다. 비록 영혼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나(빌1:23), 몸은 여전히 묻혀있는 그 사람의 몸이다. 우리 주님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을 때에, 죽은 몸을 향하여 “시체야 일어나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것은 단지 그의 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분 자체가 묻히신 것이다. 생명으로 다시 나아오신 것도 단지 시체가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으로 올리우신 것이다(마28:6;고전15:4).
몸은 우리 정체성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만드시고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고 말씀하셨다. 몸이 먼저 지어지고, 그 후에 생명이 주어졌다. 몸과 영혼은 서로 속해 있다. 몸 없는 영혼이란 통상적이지 않다. 천국에서 영혼은 벌거벗은 것과 같은 채로, 몸이 다시 천상의 영광스러운 것으로 주어지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고후5:1-10). 하지만 이 영화롭게 된 몸은 산자의 첫 열매로서 무덤으로부터 일으킴을 받으신 그리스도처럼, 무덤으로부터 일으켜질 부활체이다.
몸의 부활을 고백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매장시에 몸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비록 주님께서 곧 오신다 하더라도, 몸은 이미 티끌로 돌아가 있겠지만, 우리는 부활의 날을 기대하며 그것을 심는 것이다! 화장하는 것과 몸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은 부활의 소망과 일치하지 않는다. 죽음은 극복되는 것이며 새로운 몸은 불멸이다!
화 장
화장을 특징지우는 사고방식은 전적으로 다르다. 역사적으로 화장은 이교적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사고방식이란 몸을 불태우는 것이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널리 전파되었을 때, 당시 일반적인 방식이었던 화장이 유력한 선택권에서 밀려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8세기 샤를마뉴 대제는 거룩한 로마 제국 내에서의 화장을 금지하였다. 이후 역사에서 화장은 중세 시대에 유럽의 많은 부분을 황폐화시킨 치명적인 전염병의 시기 등과 같은 예외적인 환경에서만 시행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우리 사회가 일그러지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고, 세속주의자들과 신 이교도적 사고방식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 때에, 화장은 대중적으로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실로 시대의 풍조는 캐나다에서 사망자의 약 50퍼센트의 사람들이 현재 화장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도심지역에서는 그 비율이 60에서 80퍼센트까지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장례식이 어떻게 시행될지를 결정할 때 세속적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저 위대한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저 위대한 날에, 죽은 사람들 모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타날 것이다. 심지어 바다도 그 죽은 자를 내어 줄 것이다(계20:13). 들리움 받은 자들은 나무에 달려 박해의 불꽃 가운데 소멸된 순교자들 역시 포함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재 사고로 죽은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포함될 것이다. 그들의 몸은 재가 되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신자들은 모두 저 위대한 날에 불멸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들리움을 받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망에, 몸의 낮아짐에 훼방받지 않으신다.
성경은 특별하게 매장에 있어 어떠한 방식을 명령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성경은 화장을 죄로 힐난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몸의 매장에 대해, 그리고 화장은 안 된다는 것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이것은 성경적 관점과 부합된다. 몸은 하나님에 의해 땅의 티끌로부터 주의깊게 만들어졌다. 이제 그 몸은 그리스도로 인해 구속되었고, 그에 의해 성령의 전으로 사용된다. 이 전은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이 몸은 부활의 날을 위하여 경의와 존엄 가운데 조심스럽게 안식에 놓여 있다. 성경이 이토록 우리에게 아름답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라.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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