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신학연구소 강좌 9-성경을 어떻게 묵상할 것인가? 성경 묵상의 과정과 결과를 글로 정리하는 일 -어그러지고 패역한 종말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 공부의 의미- 읽을 본문: 시편 119편, 막 1:35, 시편 19편, 이사야 50:4-9, 마태복음 16:3-24(28), 디모데후서 3:15-4:4 제자란 배우는 사람이다. 히브리어에서는 림무드, 림무딤이라고 불리고 헬라어에서 제자는 '마데테스라'고 불리웁니다. 헬라어 마데테스란 단어는 본래 만다노 즉 '배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만다노는 신약성경에서 모두 25회 나타나는데, 공관복음 가운데 누가복음에서는 한 번도 없고, 마가복음에서는 한 번(13.28),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세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마 9:13; 11:29; 24:32). 마태복음은 제자도의 복음이라고 불릴 정도로 배움 즉 교육이 제자도의 한 특징임을 잘 가르쳐주고 있는 복음입니다. 그레서 마태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들의 무지(無知)가 깨우쳐지며 주님 말씀의 이해(理解)에 도달하고 있는 모습이 다른 복음서들보다는 더욱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마 13:51; 16:12; 17:13). 마태복음의 제자도 중심적 특징은 28:19-20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 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두 파송구절에서 사실 본동사는 “제자삼으라"”이고, 나머지 동사들은 분사와 부정사로 되어있습니다(가서/ ; 세례를 주고/ ; 가르쳐 지키게 하라/ ..... ).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자삼는 행위이고, 그밖의 나머지 행위들은 이를 돕는 보조적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이번 강의에서 말씀을 읽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기 위하여 글로 정리하는 훈련에 대하여 강의하고자 합니다. 딤후 3:15-17은 “성경공부”와 “묵상”에서 무엇을 기대하여야 할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시편 1편; 19편; 119편). 성경 안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어떤 종류의 구원이건 상관없이, 절대적인 구원의 길이 있음)가 있습니다. 이 지혜는 믿음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하나님의 숨결이 불어넣어져 있기 때문에) 교훈, 책망, 의로 교육하기,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처럼 땅을 비옥하게 하고 식물들을 결실케 합니다(사 55:10-11). 말씀은 불이요 듣는 백성들은 나무입니다. 말씀은 바위를 부수는 망치입니다(렘 23:29). 말씀은 양날 가진 칼보다 더 날카로운 칼입니다(히 4:12). 성령의 검입니다(엡 6:17). 이 모든 구절들은 한결같이 말씀이 "변화와 변혁의 주체"라고 말하며 말씀이 인격과 공동체와 역사를 변혁시키는 권능을 발산한다고 증거합니다. 스펄젼이 자신이 밤에 설교할 강당의 음향시설을 점검하려고 다음과 같은 말을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 음향상태가 좋은 것을 확인하고 만족해 한 나머지 스펄젼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런 그 강당의 서까래 위에서 일하던 두 인부가 그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스펄젼의 외침에 의하여 양심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 날 그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적절하게 적시에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폐부와 심장을 찌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고 양심의 찔림을 받아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그립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폐부와 심장을 찌르는 말씀의 위력에 자주 노출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의 영적 권능을 맛본 사람들은 말씀을 존중하며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습관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묵상하고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기분에 좌우되지 말고 읽고 읽으면 하나님의 예기치 않은 인도와 조명과 계시를 경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그리고 깨달은 바를 글로 적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설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딤후 4:2은 딤후 3:16을 이어 받아 말씀사역의 목표들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침마다 묵상하는 말씀이 영감되었다는 믿음의 위력을 음미해 보기 위해, 영감의 가치와 목적에 대하여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영감의 가치와 목적 첫째, 성경 말씀은 가르치기(디다스칼리아)에 유익합니다(오펠리무스, ophelimus). 디다스칼리아(didaskalia)는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검증되고 선포된 사도적 가르침을 의미한다. 목회서신에서 바울은 이런 의미로 사용합니다(딤전 4:13, 17; 딤후 3:10). 그것은 이미 가르쳐진 바른 교리나 가르침을 지칭하는 수동태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참조. 딤전 1:10; 4:6, 16; 6:1, 3; 딤후 4:3; 딛 1:9; 2:1; 2:7, 10). 둘째, 책망(reproof)하기에 적합합니다(pros ’elegmon). 책망이라는 말의 헬라어 엘레그모스(’elegmos)는 엘렉소(’elegkso)에 유래합니다. mos로 끝나는 단어는 어떤 동작이나 행동의 결과를 나타낼 때 씁니다. 엘레그모스는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을 확신시키는 사역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을 진리에 노출시켜 개인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떤 잘못을 범하는가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데 유익합니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양심의 정죄와 가책을 당할 때는 중대한 결정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바로 잡는 사역과 의로 교육하는 일에 긍정적으로 응답할 것인가? 아니면 가책을 받고도 계속하여 저항하거나 반역하는 선택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셋째, 교정 사역(epanorqwsis)입니다. 이것은 독자의 발걸음을 바른 궤적으로 회복시키는 사역입니다. 넷째, 의로 훈육하는(paidia) 사역입니다. 이것은 어떤 성품이나 능력이나 기술을 숙달시키거나 내면화시키는 훈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목적은 보다 더 큰 하나의 목표에 봉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을 하도록 구비시키고 충족시키는 사역입니다(딤후 3:17; 엡 2:10). “충족(adequate)”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아르티오스(artios)다. “구비시킨다”는 말은 에자르티조(ezartizo)입니다. 어떤 전쟁이나 장도를 위하여 모든 필요한 자원들과 도구들을 갖추게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파선된 배를 구조하고 예인하는 구조선에게 모든 장비를 갖추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디모데 후서 3:16-17이 영감의 사실성, 영감의 범위, 영감의 목적이나 가치에 대하여 말한다면 베드로 후서 1:20-21은 영감의 방법에 대하여 말합니다. 벧후 1:20에 따르면 어떤 성경의 예언도 예언자 자신의 해석에 의하여 발생된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적는 기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야 했습니다. 기록되거나 선포된 말씀이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반영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의 감동이 필수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에 의하여 감동되었다고 할 때 “감동되다”는 말은 헬라어로 페르메노이(feromenoi)입니다. 이것은 “끌려가다,” “실려가다,” “태워져가다”(carried, borne along)를 의미합니다. 바람에 의하여 배가 끌려가는 것을 표현하는 동사입니다(행 27:15, 17). 인간 저자는 바람의 방향을 감지하고 그 방향으로 항해합니다. 인간 저자는 바람에 따라 항해하는 항해사 같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고전 2:12-13은 영감의 폭(breadth of inspiration)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절들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성령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알게 하는 사역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계시는 단지 개념이나 사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말들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영감은 개념이나 사상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까지 확장됩니다. 벧후 1:3-4은 계시의 내용(substance)을 말합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계시의 내용이자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노출하시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지식이 계시의 내용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은 계시의 대상에서 제외하십니다. 왜 바벨론 포로살이가 70년간 계속되어야 하는가? 왜 하필 그 때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유다가 망하게 되었는가? 등에 관한 질문은 계시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입니다(신 29:29).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글로 기록할 때의 유익 1. 말씀으로 자신의 잘못 기초된 삶의 오류를 발견하는 것이 경책받고 교정받을 수 있습니다(elegcho).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읽고 노트에 적을 때에 우리는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현재 나의 삶의 그릇된 부분을 고칠 수 있습니다. 말씀은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들의 결핍과 오류들을 정직하게 직면(대면)하도록 이끌기 때문에 다소 거북하고 괴로울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캘빈이 지적한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착한 주인공이나 하나님/예수님의 자리에 있지 말고 책망받고 경고받고 훈계받는 하나님의 대적자의 자리에 자신을 두어야 합니다. 깊이 묵상되고 노트에 정리되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며 의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그 길에 저항할 것인가를 결정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소크라테스 시대에 아테네에 알시비아데스(Alcibiades)(플라톤의 대화록에 나오는 부주인공 정도의 약간 비열한 철학자)라는 영리하고 그러나 도덕적으로 망가진 철학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만날 때마다 늘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 나는 자네를 증오하네. 왜냐하면 나는 자네를 만날 때마다, 자네는 내 자신이 진면목과 마주치게 하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대면하게 합니다. 우리의 영적 도덕적 결핍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로부터 도움얻기를 원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결핍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도움을 얻기를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진면목을 돌아보게 만드는 말씀의 경책사역에 자주 노출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날 수록 복된 삶입니다. 2. 말씀 묵상을 하되 노트에 정리하여 기록하면 자신에게 설교하는 사역이 되며 그것은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밀하고 온유한 경계(책망)에 우리 자신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됩니다(epitimao). 책망하는 행위는 어떤 쟁점에 대하여 진지하게 말하는 것 혹은 어떤 행동이나 사태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하여 경고하는 사역입니다. “경계”는 "경책한다"는 말보다 더 강도 높은 경고입니다(마 8:33; 눅 17:3). “드러내 놓고 하는 책망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 친구의 상처주는 말이 신실함의 표현이며 원수의 입맞춤은 속임수의 표현이다”(잠 27:5, 6). 우리가 중대한 잘못을 행할 때나 중대한 판단착오를 할 때 성경말씀의 경계기능에 기대어 회복되어야 합니다. 꾸준히 시간과 조용한 장소를 확보하여 말씀과 대면하는 삶이 체질화된 교우들일수록 말씀의 경계사역의 덕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잡다단한 세상 삶을 살아가면서 말씀의 경계를 받지 못하면 너무나 많은 실수와 판단착오를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말씀을 읽고 소화하여 기록할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온유한 경고와 책망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3. 말씀 묵상의 내용을 글로 정리할 때 우리는 성령의 격려사역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셈입니다(parakaleo). 격려하는 사역은 다른 사람들 속에-도전함으로든지 혹은 위로함으로든지-거룩함을 증진시키고 자극하시는 말씀과 성령의 사역입니다. 말씀 묵상은 경책하고 책망하는 사역을 하여야 할뿐만 아니라 격려하는 사역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 마디 격려의 말이 천 마디 책망의 말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유쾌한 말들은 꿀처럼 달고 영혼에 감미로운 자양분이며 뼈를 견고케 하는 건강영양분이다”(잠 16:24). 우리가 우울증에 빠질 만큼 무기력할 때 말씀은 우리를 격려하고 지지하고 지탱하는 힘을 줍니다. 바울이 로마의 지하감옥에서 깊은 고독 속에 방치되어 있을 때 그는 가죽으로 된 성경을 읽기를 그토록 소망하여 긴 겨울을 맞기 전에 말씀으로 자신을 단련하기를 희망하였습니다(딤후 4장).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은 영혼을 북돋우는 신비한 약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모든 우울증을 치료하는 약입니다. 말세의 특징은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여 자신의 사욕을 만족시키는 사유화된 설교자들을 가지려고 합니다. 가정주치의 수준의 목회자를 더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른 가르침을 견딜 수없는 때가 바로 말세입니다. 여기서 견디는 행위는 자신들에게 겨냥된 불평이나 책망을 접수하는 행위입니다(일종의 법률행위). 건강한 가르침(hugiaino), 유익한 가르침을 견디지 못하는 것 자체가 영적으로 병든 상태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른 가르침은 경책, 경계, 그리고 격려 사역으로 가르쳐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어성경(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은 한글성경에 비하여 헬라어 원문의 뜻을 더 잘 드러냅니다.“견디다”(put up with)라는 말을 잘 부각시킵니다. 바른 가르침은 우리의 양심을 찌릅니다. 그래서 견디지 못하면 바른 교훈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딛 2:1). 설교를 듣는 일에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잠언서 1:23-33은 말씀을 경청하는 것과 거부하는 태도가 인생을 얼마나 다르게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31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32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33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23-32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만홀히 여기는 사람들의 파국적 실패와 파멸을 말하고 오로지 33절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의 아름다운 결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도 멸시하면 두려움, 폭풍같은 재앙, 근심, 슬픔이 임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대답하지 않는 인생은 이 폭풍같은 환난의 때에 하나님을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고 자기 꾀에 배부르다가 퇴보하고 멸망할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경책과 경계를 받는 사람은 실제 현실에서는 재앙의 두려움이 임하지 않을 것이며 절대 안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락용 만담이 아니라 우리의 어그러진 인생궤적을 바른 궤도 위에 올려놓은 고통스럽고 진지한 교정자요 수술의입니다. 쩌렁쩌렁하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리지날 사운드 트랙으로 듣는 것 그것이 말씀묵상 훈련입니다. 이렇게 훈련된 묵상을 통해 포착되는 하나님의 음성은 우주적 울림을 가지며 우리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이렇게 포착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에 인생을 위탁하는 것은 오염된 양심을 하나님의 수술실에 위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을 진단하도록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 속생각을 훤히 꿰뚫어 봅니다. 우리의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곳에서 시작되는 불안이나 염려나 신음을 포착해 냅니다.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유화된 설교-결국 우리의 욕망을 확대재생산, 강화하는 사역-는 우리의 영혼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아득히 멀어지게 만듭니다. 바른 가르침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거짓 가르침으로 그들의 영혼을 사냥하는 이단 교사들과 지도자들의 올무에 빠집니다. 말씀 묵상 훈련이 안 되어 거짓 선지자들과 교사들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은 엄청납니다. 우리는 이 말세지말에 묵상훈련을 통한 제자도를 습득함으로써 멸망의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을 건져내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묵상훈련을 통해 제자도의 삶을 체질화시키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첫째, 바른 가르침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사유화된 영적 지도자들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많은 스승들을 쌓아놓습니다(episoreuo). 이 스승 저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낫가리처럼 스승들을 쌓아 놓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스승들에 대한 끝없는 추구의 목적은 그들 자신(그들 자신의 욕망)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자아를 신처럼 받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스승 찾기를 결정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만드는 두 가지 사악하고 왜곡된 행태(行態)들을 제시합니다. 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교사들에 희생물이 됩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다가 자신들보다 몇 배 더 악한 사악한 설교자들, 음탕하고 타락한 설교자들에게 희생당합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세속적 욕망들, 잘못된 욕심들을 정당화하고 옹호하며 그것들을 성취하는 것을 아주 강조하고 축복하는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결국 사욕을 좇아 스승들을 찾아나선 사람들의 결국은 도덕적 타락입니다. 나. 지적으로 왜곡된 스승에 의하여 지적으로 왜곡됩니다. 도덕적 왜곡은 반드시 지적 왜곡을 가져옵니다(반대로 사실). 바른 교훈을 보고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영구적으로 잃어버리게 됩니다(행 17:21). 이 사유화된 스승들의 특징은 전혀 비위협적인 설교가들입니다. 그들은 교우들에게 어떤 도전과 책망의 설교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짖지 못하는 개들입니다(사 56:10). 둘째,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진리의 길에서 이탈합니다. 허구로 착색된 거짓말들을 진리로 믿는 영적 파탄으로 끌려갑니다(4절). 하나님의 자녀들은 경계, 경책, 격려를 베푸는 영적 지도력을 신뢰함으로써 성장합니다. 참된 말씀사역자의 길은 근신, 고난, 자기절제의 길입니다. 우리가 근신, 고난, 자기절제의 삶의 원리를 체질화시키지 아니하면, 우리는 말씀의 경계, 경책, 격려 사역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딤후 4:5에서 디모데는 가짜 영적 지도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일에 근신하며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직무를 완수하라는 당부를 받습니다. “그러나 너는”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길, 고독한 길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가짜들이 가는 길을 가지 말아야 합니다(3:10,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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