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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안에 있는 생명
본 문:골3:1-4
요 절:골3:2-3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
옛날부터 지금까지 생명에 관해서 많은 질문을 해 왔습니다.
첫째는 생명은 누구냐? 생명의 정체는 무어냐? 는 생물학적인 질문이요, 분류학적인 질문입니다.
둘째는 생명이 왜 존재하느냐?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입니다.
셋째는 생명이 무엇인가? 삶이 무엇인가? 하는 특성과 성격과 질에 대한 질문입니다.
넷째는 생명은 어디 있느냐?
다섯째는 생명은 언제부터 존재하느냐? 또한 얼마나 살아갈 거냐?
여섯째는 생명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는 존재 양식을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의 여섯 가지 질문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Whose of life'--생명은 누구의 것이냐?, 어디에 속한 것이냐는 속성을 묻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속해 있습니까? 돈과 함께 있다가 돈과 함께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가치 없는 존재도 있습니다.
약4:13절 이하에 보면 돈버는 것이 생의 목적이 되어 사는 사람을 향해서 말하기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요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안개처럼 가치 없는 존재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돈 때문에 살고 돈 때문에 죽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변변치 않은 지위에 목을 매달고 있다가 그것 떨어져 나갔다고 죽을상을 하고 다닙니다. 이런 사람은 도대체 무엇에 속한 사람일까요? 그리고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에 속하여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숙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기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희한한 꿈을 꾸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꿈입니다. 그가 하늘 나라에 갔는데 천국 문에서 천사가 그를 심문합니다. ‘너는 누구냐?’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답합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자 천사가 그를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그러더니 ‘아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이야. 너의 머리와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으로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 키케로의 사상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구나.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는 통곡을 하면서 철저하게 회개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으로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움으로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무슨 생각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존재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철학자 데칼트는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카지토 에르로 섬’--I think, therefore I a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존재의 가치를 부여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지만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 안에 존재하느냐 누구의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속한 존재냐’에 따라서 생각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나의 생명의 정체와 그 속성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합니까? 나는 도대체 누구의 소속이냐, 누구의 것이냐고 물어야 하겠습니다. 땅에 속한 생명은 땅의 것만을 생각할 것이고 하늘에 속한 생명은 하늘의 것을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라면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 그리스도에게 속한 생명은 땅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위엣 것을 생각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3절 이하에서는 그리스도의 생명 정체를 본질적으로 설명해 주는 아주 기본적 평가 기준이 있습니다.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꼭 알아야 합니다. 아주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오묘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한 순간도 여기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에 대한 중요한 설명입니다.
1. 죽음에서부터 시작하는 생명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생명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서도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일 죽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 죽었다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걱정, 근심이 많습니다. 복잡한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별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가지, 내가 죽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욕심이 죽지 않고, 내 자랑이 죽지 않고, 자존심이 죽지 않고, 성질이 죽지 않고, 정욕과 이성의 자랑과 허영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고 생긴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아직도 덜 죽어서 버둥거립니다. 아직도 설죽어서 그렇게 생각도 복잡하고 문제도 많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이미 죽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웃지 못할 이야기야 있습니다. 어떤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신부가 옛 애인을 잊지 못하고 몰래 전화를 걸다가 들켜 가지고 얻어맞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과 동시에 이제는 옛 생활, 옛 친구를 다 잊어야 합니다. 남자 친구, 여자 친구 할 것 없이 딱 끊어 버려야 됩니다.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남아 있어서는 절대로 안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죽음은 회개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모든 죄를 완전히 십자가 밑에 묻어 버리고 죄악된 과거와 관련을 아주 끊고,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자는 율법 앞에서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도 죽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적어지고 마지막에는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고맙고, 은혜가 너무 고마운 나머지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 크고, 너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내가 감격하는 순간 내 모든 것, 내 욕심, 나 중심적인 교만, 세속적인 욕망과 고집은 다 사라지고 맙니다. 봄날에 눈 녹듯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느 날 홍수가 나서 물이 많이 불었는데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 하나가 빠져서 허우적 그리면서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수영을 잘하는 구조 대원 두 사람이 그쪽으로 헤엄을 쳐갔습니다. 그런데 건질 생각은 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간 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기진맥진해서 버둥거리지를 않습니다. 두 구조 대원은 그제 손을 써서 그 사람을 건져냅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왜 빨리 건지지 않고 기다렸느냐고 물으니까 그들은 대답합니다. ‘저 사람이 힘이 남아 있어서 버둥거릴 때에 손을 잡았다가는 내 목까지 끊어 안아서 둘 다 죽게 됩니다. 살겠다는 생각을 아주 버리고 손을 들어야 안심하고 건져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율법 앞에 죽고, 은혜 앞에 죽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한번은 성 마카리우스에게 제자가 묻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성자는 아주 실질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너 오늘밤에 저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보고 ‘이 나쁜 놈들아, 이 위선자들아, 이 부자 놈들아, 이 천하고 고약한 놈들아’하고 욕이란 욕은 있는 대로 다하고 돌아오너라” 제자는 성자가 시키는 대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를 보고 성자가 묻습니다. “어떻더냐?” 제자가 보고합니다. ‘아무 반응이 없던데요’ “그렇더냐?” 그러면 내일 아침 다시 가서 이번에는 칭찬을 해보아라. “아, 훌륭하고 위대한 분들이여 하고 돌아오너라.” 제자는 아침이 되자 다시 묘지로 가서 성자가 식히는 대로 무덤들을 향하여 잔뜩 칭찬의 소리를 늘어놓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어떻더냐?” “역시 아무 반응이 없습디다.” 비로소 성자는 말합니다. “그게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그리스 도안에 죽은 사람은 반응이 없습니다. 칭찬해도 교만할 것도 없고, 모략 중상을 당해도 말이 없습니다. 사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십시오. 온갖 중상 모략을 당해도 말씀이 없으십니다. 왜요? 대답할 가치도 없으니까요. 세상에 대해서 이미 죽었습니다. 깨끗이 죽었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란 말씀입니다.
갈2:19-20절에“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 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5:24절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내 정과 욕심도 십자가에 다 못박아 버렸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생명입니다.
율법 앞에 죽고 이제는 은혜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나의 나 된 의미, 나의 나 된 목적 전부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제 내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고후5:15절에 보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나로 위하여 죽으신 바로 그분을 위하여 사는 것이 내 생애의 목적인 것입니다.
빌3:12절에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이제는 이것이 내 이상입니다. 내 기쁨도 그리스도요, 내 영광도 그리스도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전에는 자신을 위해서, 썩어질 것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잠깐 되는 쾌락은 그를 고통 속으로 몰아 놓고 말았습니다.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가련하고 처절한 모습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참된 생명을 잃고, 껍데기만 남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품에 돌아온 탕자는 과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오직 은혜로 살게 되었습니다.
다시 태어났습니다. 다시 살아난 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이제는 아버지를 위해서 삽니다. 여기에 감사가 있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슨 일이 있든지 오직 돌아온 감격과 감사, 그것으로만 살아갑니다.
아버지의 복이 나의 복이요, 아버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요, 아버지의 것이 나의 것이 됨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복과 기쁨이 돈에 있고, 이 세상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께 있음을 깨닫고 이제야 진정으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왜 탕자 이야기를 하신 줄 아십니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죽은 것입니다. 죽어 버리면 편합니다. 걱정에 매이고 근심에 매일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든 신비로운 생명을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마치 광부가 노다지를 찾아낸 그 기쁨과 수고의 보람, 그 이상의 것입니다. 씨 안에 감추어져 있는 생명은 설명으로 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 도안에 감추어진 생명도 그렇습니다.
어떤 생물학자가 세미나에서 강연을 하는데 조그마한 씨를 집어들고 ‘이 씨앗 하나가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든지 그 성분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질소, 수소, 탄소로 합성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성분대로 씨앗을 말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든 것은 땅에 심으면 죽어 버립니다. 그러나 여기 내 손에 있는 이 조그마한 씨앗은 땅에 심으면 싹이 납니다. 그리고 똑 같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이유는 이 안에 감추어진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의 손에 있는 씨는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 안에 있는 씨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적 존재입니다. 그러한 생명의 신비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이 오묘한 신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 오실 때에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생을 돌아볼 때에, 지난날에 왜 내가 고독해야 했던가, 이제 돌아보니 그것도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그때 왜 실패해야 했던가, 비참한 자신을 보고 버려진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에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셨고 바로 그것이 은혜였던 것이었습니다. 내가 병들어 슬퍼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은혜입니다.
왜 남편이 먼저 갔는지, 내 사랑하는 자녀가 왜 먼저 세상을 떠났는지, 왜 세상에서 이렇게 모순이 많았는지, 답답하고 괴로웠는데, 감추어진 신비로운 세계에서 보니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생명을 아는 사람은 오늘 이 땅에 살면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은 엄청나게도 돌에 맞아 죽는 순교를 하면서도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왜요? 이 생명의 신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이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된 삶을 이 땅에서도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이제는 땅엣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위엣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 오늘을 사는 성도들은 잠깐 있다 없어질 것보다는 영원하고, 복된 하늘나라의 것을 생각하고 사모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몸은 땅에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신비로운 천국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바로 그 영광의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생명을 거듭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많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를 그리스 도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씨는 땅 속에서 썩어 버리지만, 생명이 있는 씨는 오히려 땅 속에서 신비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 도안에서 새롭게 변화되는 신비하고도 놀라운 생명의 역사요, 구원의 역사입입니다.
슬퍼하든 자가 기뻐하는 자가 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든 자가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됩니다. 실망하고 낙심하던 자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담대하고 용기 있는 자가 됩니다. 미워하든 자가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받기만을 좋아하든 자가 주기를 기뻐하는 자가 됩니다. 섬김 받기를 좋아하든 자가 섬기기를 기뻐합니다. 이것이 위엣 것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새 생명을 소유한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장 소중한 것은 영원한 생명뿐입니다. 그리 중요치도 않은 문제들을 너무 많이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피곤하고 지친 우리 심령들입니다.
우리가 주안에 감추어진 신비로운 생명을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에,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확인하고 체험하며 살아가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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