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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2,922편)〓/치유 설교

제 목 : 내 속이 상할 때

by 【고동엽】 2021.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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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내 속이 상할 때
본 문 : 시143:1-6
요 절 : 시143:4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이 행사를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셀라)”


짧은 인생 길에 왜 이렇게도 고난이 많은가? 그저 눈만 뜨면 근심과 걱정이 밀려옵니다. 내가 잘못해서 생기는 고통,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억울하게 당하는 괴로움, 태산 같은 근심 걱정, 한가지 문제를 겨우 해결하고 한숨을 돌리는가 싶은데 해결된 문제 보다 더 큰 문제들, 마치 바다에 파도가 밀려오듯 쉴새없이 고난과 고통의 문제가 밀려오는 게 인생살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도무지 고생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아깝고 소중한 인생살이가 어려운 문제를 피해 가고 도망쳐 가는데 모두 희비가 되는 것 같습니다. 평탄한 길같이 보였는데 갑자기 절벽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갈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뒤돌아 갈 수도 없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자니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실망과 좌절감으로 인하여 얼마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학생들의 입시, 사업하는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 가장이 받는 긴장, 가정 주부들이 만나는 허무감------ 아무도 인생의 고민과 고통과 괴로움에서 피할 자가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 상하는 일만 생각하고 산다면 조금도 살맛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생의 의욕마저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백성들이 존경하였던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의인으로서 의와 선을 힘써 행하였던 욥도 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셨던 베드로도 바울도 숫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나만 이렇게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가? 왜 나만 이런 고통 때문에 속이 상해 울고 있어야 하는가? 반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류가 다를 뿐이지 어려움과 고통은 누구나 다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속상하는 일이 조금도 없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최근 모 잡지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일상 생활에서 오는 나뿐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묻는 의견 조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즉 ‘속이 상할 때 어떻게 하는가?’하는 질문입니다.
20대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잔뜩 취하게 술을 마신다.
2) 디스코텍에 가서 진땀날 때까지 흔든다.
3) 노래 방에 가서 목이 쉬도록 소리지른다.
4) 문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한다.
5) 친구들에게 전화 걸어 만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30대나 40대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술을 마신다.
2) 무조건 집을 뛰쳐나간다.
3) 드라이브를 한다.
4) 책을 본다.
5) 친구를 만난다.
6) 노래 방에 간다는 것 등입니다.
20대나 40대가 노래 방에 가서 주로 불렀다는 노래는 ‘소양강 처녀’가 제일 많았습니다.


그 다음 질문은 ‘당신이 선택한 그 방법으로 속상한 게 풀렸느냐’는 것입니다.
단 한 명도 속이 풀렸다든지 상한 감정이 그런 방법으로 치유됐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밤새도록 술 마시고 속 쓰려 죽을 뻔했다’
‘밤새도록 술 마시고 그 다음날 해장국 먹느라고 돈만 들어갔다’
‘차 몰고 집 나갔다 교통사고로 돈만 손해봤다’
‘노래 방가서 소리지르고 노래부르다가 이비인후과 신세졌다’는 등 자신들의 선택한 방법들이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응답했습니다.


그 다음 질문은 ‘당신이 선택한 방법 가운데 어느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를 만나서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질문은 ‘당신은 그런 친구를 가지고 있느냐 있다면 몇이나 있느냐’라는 것이었는데 92.5%가 그런 친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더욱 속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들, 입시 문제, 직장 문제, 배우자, 자녀들의 문제, 병, 상대적인 박탈 감, 경쟁에서 뒤쳐지는 것 같은 기분, 다른 사람은 벤쳐 기업에 투자를 해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데---- 생활 문제든 속상하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문제를 풀어 가십니까?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 나오는 시인의 대답이 우리들이 어떻게 인생이 문제를 풀어야 할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주님을 바라보고 거기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들 보면 밖에 나가서 놀다 항상 얻어맞고 들어오는 애가 있습니다. 이 어린아이의 사정을 생각해 보면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싸울 용기도 없고 힘도 없고 해보자니 도저히 안됩니다. 속이 상해 견딜 수 없습니다. 견디다 못해 한번 용기를 내어서 해봤는데 진탕 얻어맞고 말았습니다.
돌아오면서 그저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악을 쓰며 온 동네가 떠나가라는 듯이 울면서 돌아옵니다. ‘엄마, 엄마’부르는 그 소리에는 한과 억울함과 갈망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한이 맺혀 돌아오는 그 아이의 어머는 그 속이 오죽하겠습니까? 이때 보면 어머니의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떤 어머니는 ‘야 이 녀석아! 어쩌자고 그렇게 항상 얻어맞고만 들어오냐....이 못난 새끼야, 너도 이제는 이렇게 두들겨 패 주란 말이다“하고 속이 상해서 죄없는 자기 새끼만 두들겨 팹니다. 이 어린것은 자기가 누구 새끼 인줄도 알지 못하고 얻어맞습니다. 동네 애들한테 매맞은 것도 분한데 엄마까지 야단입니다. 어린것의 속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이는 울고 돌아오는 아이를 꼭 안아 주고 치마 자락으로 눈물 콧물을 닦아주시면서 위로해 줍니다. ‘같이 때리는 것은 나쁜 일이지. 남을 때리는 것은 못된 짓이란다. 우리 예수 님은 왼쪽 뺨을 때리거든 오른 쪽 뺨을 내밀라고 하셨지.....내 아들 참 잘 했어, 그렇게 울고 나니 시원하겠다’ 그 때 어린것은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속상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시편 기자와 같이 하나님 앞에 찾아 나와야 합니다. 다른데 찾아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찬송가 474장에 보면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오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이 세상에 죄악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내 주 예수 날 건져 주시 오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 찾아 나와 우리의 사정을 아뢸 때에 참 평안과 위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4절에 보면 다윗은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속상할 때에 어떻게 하였는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하나님께 아룁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임을 먼저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어려움과 고통이 다 자신의 부족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부족을 먼저 시인 할 때에 억울함이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속 상한 일이 생기면 “나는 이렇게 속 상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는 사람인데 왜 이런 일이 내게만 생기는 것일까? 억울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속상한 일에 더 속이 상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보통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당하는 고통은 마땅히 당해야 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윗의 생각이 2절에 있습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고 자기도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인이 고통을 당하고 사는 것은 당연한데 그걸 억울하다고 기분 나빠하고 속 상하면 더욱 더 나빠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증권에 투자를 했다가 엄청난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는 너무 화가 나 식사도 안하고 고민을 하다가 견디지를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을 해 버렸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의 병원 비를 벌려고 동분서주하던 두 딸아이가 여의치 않자 아파트 옥상에서 나란히 떨어져 자살을 해 버렸습니다. 얼마 전 우리 나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병 치료가 문제가 아닙니다. 속이 상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손해를 보았다고 이런 식으로 일을 벌리면 잃어버린 것을 찾기커녕 더 큰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남은 가족들까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원한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문제를 이런 막가파식으로 해결하려 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국 무술 소설에서 복수가 복수를 낫고 또 다른 복수 극이 벌어지는 것을 봅니다. 아까운 일생을 오로지 원수 갚는데 다 써 버리고 원수 갚음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통쾌감을 느끼고 정의감을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심리에도 이런 어리석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은 그런 식으로 자기의 억울함과 고난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합니다. ‘주여, 심판을 행치 마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룁니다. 3-4절에서 그는 원수들로 인하여 죽은지 오래된 자 같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자기 힘으로는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자가 되었다고 진술합니다.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심령은 멍들대로 멍들고 상할 대로 상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세상에 그 무엇으로도 치료받을 수 없는 참담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 고합니다.
이 기도들은 다윗이 지금 자기가 당하고 있는 정신적인 고통과 심리적인 괴로움과 육체적인 어려움과 환경의 난관들을 하나님께 자세히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왜 이런 태도를 취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억울함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 있으심을 믿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형편이 좋을 때는 잘 믿는 것 같은데 어려워지면 언제 하나님을 믿었느냐는 식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무지 어쩌자는 것인지-----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 있으심을 믿었습니다.


어려울 때 기도합시다. 기도하되 자세히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몸 아프다는 말을 하게 되고, 속이 상한 사람은 속 상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걸 사람에게 하지 말고, 아니 사람에게 하듯 하나님께 하자는 것입니다. 내 속 상한 이야기를 속에 두고 참으면 병이 됩니다. 중권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본 것을 사람들에게 자꾸 말하고 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경계하고 멀리합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 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결국 때가 되면 “그 때 돈 잃어버린 것이 참 잘된 일이야”라고 말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걸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괜히 우리 아버지입니까?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손해 본 것도 보상해 주시고 얻어맞은 것도 위로해 주시고 죄도 용서해 주시고 약한 것도 강하게 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복음 송에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기도할 때에 위로와 사랑의 빛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주님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5절에 보면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깊이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난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언제나 복되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신 일들을 생각합니다.


애급의 노예 생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신 일이며, 깊은 홍해를 가르시고,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복지로 인도해 주신 일과 그리고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행사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상한 마음과 곤경을 다 해결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또 과거에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속상할 때 떠들고 폭음하고 설치지 않고 ‘묵상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출14장에 보면 애급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바로가 보낸 기병대의 추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황한 이스라엘 백성이 소란을 버리며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모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에게 행하신 구원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이 모세의 말 한마디가 모세의 인간 됨됨이 즉 위대한 인 간됨을 너무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사람이 달랐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다른 사람 보다 달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랑하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말 보다 침묵이 무섭습니다. 이것은 명상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생각하고 그 행하신 능력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국의 ‘화이 클락’이란 이가 크롬웰의 특사로 스웨덴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는 도중에 조국의 불안을 생각하고 불면증에 걸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사환이 그 옆방에 있다가 ‘화이 클락’경이여 당신이 이 세상에 나시기 전에도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잘 다스렸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물론이지....”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잘 다스리시겠지요?” “물론이지..”.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잘 다스리실 줄로 믿습니까?” “물론이고 말고..”.그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행하신 역사를 묵상하는 동안 마음에 평안히 깃들이며 조용히 잠들었다고 합니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나, 기쁠 때나 속할 때, 그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이 상한 영혼이 치유 받는 비결입니다.


3. 주를 향하여 손을 폈습니다.
6절에 보면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생각하고 묵상했다고 하는 것은 내적 행동이며, 정신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나 6절에서 손을 폈다는 것은 외적 행동이며 결단을 무엇을 결단했다는 말입니다.


손을 폈다는 것은 자신의 무능력을 의미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도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가진 것도 없고, 저는 힘도 없습니다’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세상에 태여 날 때 주먹을 쥐고 한갓 힘을 쓰며 울며 태여 납니다. 살기 위한 힘이 넘치며 생존을 위한 의욕이 넘칩니다. 그 힘으로 엄마의 젓을 얼마나 힘껏 빨아 대는지 실험을 해 보니 가는 빨대로 3미터 정도되는 물을 빨아올리는 힘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는 반드시 손을 쫙 폅니다. 이제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도 스스로 주체를 못합니다. 전적으로 다른 사람이 그를 처리해 주어야 합니다. 죽었습니다.
다윗이 손을 펐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전적인 의탁, 전적인 의존, 절대적인 신뢰 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심리학들은 말하기를 ‘못난 척하고 사는 사람, 없는 척하고 사는 사람, 모르는 체 하고 사는 사람보다 잘난 체 하고, 있는 체 하고, 아는 체 하는 사람이 10배 이상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나는 믿음이 부족해, 나는 믿음이 모자라’하며 사는 사람보다 ‘나는 믿음이 좋아, 나는 신앙이 제일이야’라며 사는 사람이 훨씬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손을 펴 보인 것입니다.


현대인은 자신의 손으로 과학 문명이라는 거대한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분수를 알지 못하고 생각한 대로 다 될 것으로 착각하고 살면 무슨 일이 안될 때마다 좌절과 공허에 빠지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은 점점 상하고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사모하며 손을 펼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울고 돌아오는 아들을 엄마가 품에 안고 위로해 주시듯이 진정한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얻게 해 주실 것입니다.


속상한 사람들, 참담한 아픔으로 한숨 짓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번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아픔이나 상한 심정을 노출시키지 못한 채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탕자처럼 살지 마십시오. 사랑과, 은혜와 용서와 위로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성한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아버지 집에 종이라고 해도 그걸 인정하시지 않고 아들이라고만 우기시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할 짓이 없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기 와 앉아 있는 것입니까? 정말 잘 믿어 봅시다. 진짜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난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까?
은혜를 받은 일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 노점에서 장사를 아줌마들을 복 오십시오. 종합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제활 원에서 좋아 벙싯 거리며 작은 선물에도 눈물 나리만큼 고마워하는 장애인들을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주님을 향하여 손을 폈던 시편 기자처럼 나의 필요를 채우시고 내 마음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기도하며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할 것입니다.
349장에 보면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찬송하는 심령을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위로하시며 치료하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음 상할 때마다 겸손히 나의 모든 형편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며, 주님을 생각하고, 특히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주님을 향하여 손을 펴고 ‘주님을 사모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나에게 긍휼을 베푸시옵소서’하고 기도하며 찬송하십시오. 뭐가 문제가 됩니까?


여러분 심령 속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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