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 주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 사6:1~8
◑서론/ 역사적 안목
제가 신학교에서 강의를 시작 할 때 언제나 강조해서 하는 말이 있는데
<역사적 안목> 입니다.
왜 강의를 하느냐? 왜 배우느냐? 왜 성경을 배우고 역사를 배우냐?
어떤 지식을 얻기 위해서 일까?
연대기적(chronological)지식과 같이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시간에 누가 살았는지, 그런 Chronological knowledge
즉 연대기적인 지식을 얻는데 있는 것인가? 저는 No라고 합니다!
그럼 왜 역사를 배우고 성경을 배우냐,
저는 늘 그 목적은, 역사적 안목을 습득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역사적 안목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에게 <역사적 안목>에 중요성을 가르쳐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1902~2000)께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목사님을 찾아가서
‘제가 앞으로 목사가 되려면 뭐를 전공해야 됩니까?’
‘역사를 전공해라!’라고 지도를 받았습니다.
제가 서울대 문리대에 들어가서 <역사>를 전공했지만
공부하고 나니 매우 불만족스러웠습니다.
그저 지식 전달적인 그런 강의들었였습니다.
그러다가 신학교에서 한철하 박사님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는 연구하고 발표하고 생각하고 research 중심으로 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저에게 가장 갚은 역사적 통찰력을 가르쳐 준 분은
어거스틴 (354~430)인데, 기독교 역사철학을 완성한 분입니다.
그 분이 세상을 보는 눈, 교회를 보는 눈,
현재와 미래 과거를 보는 눈이 보통 사람과 달랐습니다.
제가 쓴 책 <초대 교회사 형성> 첫 머리에 이렇게 썼습니다.
교회사를 연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교회사를 연구하는 목적은, 사건에 대한 연대기적 지식을 습득하는데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사를 연구하는 목적은 역사적 안목을 습득하는데 있다.
즉 과거 역사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과거 역사에서 내 문제를 발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삶이 지혜와 용기와 통찰력을 얻는데 있다.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건은 우리에게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사건을 통해서 과거의 인물을 통해서, 역사적 통찰력과 안목을 얻는데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사49:6절 ‘네가 나의 종이 되어...앞으로 이렇게 하리라.’
사49:6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사도행전 13장에서 사도바울이 그대로 인용합니다.
행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누가 이사야인지, 누가 사도바울인지 모르겠어요.
자기가 이사야가 되고, 이사야가 바울 자기가 됩니다.
역사적 통찰력을 얻으면
과거의 모든 사건이 오늘날 사건으로 바꿔집니다.
내가 과거에 살고, 과거가 오늘에 삽니다.
한 마디로 설명하면
역사적 안목을 얻는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역사적 안목을 습득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과거가 현재가 되고, 과거 인물이 오늘 인물이 됩니다.
◑본론/ 초기의 이사야
그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사람이었어요.
▲1. 슬픔과 분노의 사람 이사야
이사야는 어두운 시대에 살면서
시대의 정치/경제/정서가 뒤흔들리는 체험을 하셨습니다.
자기의 후원자 웃시아 왕이 죽으면서 정치적인 기반과 재정적인 기반이 무너졌고
심리적으로 슬픔과 절망에 휩싸였습니다.
사랑하는 후원자가 죽었을 때 사람은 흔들리게 됩니다.
그 당시 웃시야 왕이 죽던 주전 758년 그해는
로마 제국의 창립자 로물루스가 출생한 해라고 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은 해부터 유다의 국세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흔들림의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떠나거나, 재정이 무너지거나, 정권이 바꿔서
정치적인 후원자가 없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나라를 보면서
슬픔과 좌절 그리고 분노를 느꼈습니다.
사1장, 2장, 3장, 4장, 5장에서 이사야의 분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일수도 있지만, 이사야의 분노가 나타납니다)
사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이와 같은 슬픔이 1장 2장 3장에 나타나다가
하나님의 진노가 선포됩니다.
“주께서 그들의 장식한 발목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장식과
귀고리와 팔목고리와 면박과 화환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걸이와 예복와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라” 요즘보다 패션이 앞섰습니다.
▲5장에 오면 이사야의 <분노>가 터집니다.
5:8, 11, 18, 20, 21, 22절에 ‘그들은 화 있을진저’
저주 섞인 분노가 6번이나 반복해서 터져 나옵니다.
요즘 우리 사회도 분노로 가득합니다.
일본에 대한 분노, 북한에 대한 분노, 정권에 대한 분노
또 한편으로는 패권주의로 가고 있는 나라들에 대한 분노
극보수나 극진보에 대한 분노.. 각각 다 있습니다.
아마 우리도 이사야가 경험했던
뒤흔들림과 분노를, 오늘 우리 각자가 경험하고 있지 않을까요?
신학교를 졸업한 설교자였지만, 뒤흔들림과 분노에 쌓여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바뀝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니까요.
아니, 하나님이 그를 만나게 해 주셨겠지요.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 항복한 사람 이사야
뒤흔들림과 분노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 지쳐서 쓰러져있던 엘리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슬픔과 분노에 빠져있던 이사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셨어요.
이사야가 만나 뵌 하나님의 4가지 모습은
▲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내가 보니’ 그랬지만, 주님이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6:1
뒤흔들림과 분노와 좌절에 빠져있던 이사야로하여금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위를 바라보는데서 옵니다.
뒤흔들림의 사건을 바라보면 더 분노만 생기죠.
팰리컨 교수가 말했고, 그 이전에 어거스틴이 말했어요.
‘하늘을 바라보면 낙관주의자가 되고, 땅을 바라보면 비관주의자가 된다.’
The core of Christianity is pessimism about man and optimism about God.
즉 자기를 바라보면 절망과 비관이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소망과 낙관이 됩니다!
이사야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사실 1907년 그때 완전한 절망적 상황속에서
길선주 목사님과 젊은이들은 하늘을 바라보았어요.
블레어 William Blaire 선교사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1904년 한국 선교사로 파송 / 저서 : Gold on Korea
‘망국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건장한 조선의 남자들이 내게 와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 같이 가난하고 비참한 민족이 또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려 있는 것을 의미했다.
하늘을 바라보는 처참한 조선민족 위에
하나님이 당신의 축복의 손을 펴신 것이었다.’
하늘을 바라볼 때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뒤흔들림과 분노와 좌절에 빠져있던 이사야로 하여금
하나님이 자기 보좌를 보게 해 주셨습니다.
9백년 후에 밧모 섬에 갇혔던 요한에게도 같은 은혜를 보셨죠.
사도요한도 이사야처럼 ‘내가 보니, 내가 보니’ 계속 그랬습니다.
이사야에게
하늘을 보게 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뒤흔들릴 때, 그 사건 자체를 바라보지 마시고
위를 바라보십시오. 위를 바라보십시오. Look Up! Look Up!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 개인이나 나라에 뒤흔들리는 일이 일어나게도 합니다.
그 이유는, 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최근에 노무현 대통령도 위를 바라보시는 것 같아요.
기도를 요청 하셨습니다.
감사한 것은, 지도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저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같이 호텔에서 손잡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여당 야당 막론하고요
위를 바라보면 됩니다.
그때 주님이 보였습니다.
그때 보좌에 않으신 주님을 보게 하셨다
6:1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신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높이 들린 보좌..
주님보다 더 높이 들리신 분은 우주에 없습니다.
로마 황제보다도, 어떤 세상 강대국 대통령 보다 높으십니다.
▲2.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성전에 주님의 영광이 가득한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사6:2~4
사6:3 (스랍천사들이)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성전에 임하셔서 천사들의 찬양을 받으시는 분
그리고 이사야는 온 땅이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국회가 찬양할 때, 대통령이 찬양할 때, 국민들이 찬양할 때
성령의 역사로 (좋은 의미로) 이 땅이 흔들릴 것입니다.
▲3.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자기를 바라 볼 수 없어요.
베드로도 하나님이 보여 주셨기 때문에 스스로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도 주님이 보여 주셨기에
‘나는 죄인 중의 괴수 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사야 스스로가 자기를 보았습니다.
6:5절에 ‘화로다 나여 woe to me’
5장에서 그는 6번이나 ‘그들은 화 있을진저! woe to them’ 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뵈오니, 자기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며 고백합니다.
거룩하신 주님 앞에 설 때,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들’이 아니라 ‘나여’입니다.
‘그들이여’가 아닙니다. 이 체험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들이여’가 나오면 아직 주님을 못 만난 겁니다.
자기의 절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망하게 되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다’라고 시인하는데요,
‘나는 망하게 되었다’는 말은, 여러 사람이 똑같이 고백했어요.
어거스틴이 똑같이 고백했고요,
칼빈이,
또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사한 존 뉴턴도
‘a wretched like me(나 같이 파선한 죄인)’이라고 고백했지요.
‘화로다 너여, 너는 망하게 되었도다’하면
아직 하나님을 못 만난 사람입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
이사야는, ‘나는 설교 할 자격이 없고, 부정한 백성들과 나는 다름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설교자의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라는 고백이기도 하죠.
‘내가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6:5
저들이 패역한 줄 알았는데, 나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동일시였습니다. 부정한 백성들과 내가 다른 게 하나도 없습니다.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자만심을 모두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죄를 회개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자기를 바라보게 됩니다. 직시하게 되죠.
이 처절한 고백으로부터, 제2기(완전히 회심한 후)의 이사야가 시작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이사야의 전통에 따라서,
-어거스틴의 전통에 따라서
-길선주 목사님의 전통에 따라서 (그 역사를 본받아서)
길선주 목사님은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로소이다’며 회개했죠.
그 전통에 따라서
(자발이 안 되면) 억지로라도 회개를 해야하고
울지 못하면, 우는 사람 옆에 가서 흉내라도 내야 합니다.
처음에는 억지인데
시간이 가면 자기 속에서 자발성이 유도되게 되어 있습니다.
‘억지로 회개하냐?’
‘억지로라도 해야되죠, 처음에는.’
이때 하나님은 이사야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사6:6~7 “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물론 이것은 고통과 아픔의 경험입니다.
주님이 만지실 때 우리는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어떤 아픔이 없이는, 어떤 의미로 죄사함이 없습니다.
그저 다 편안해서 좋다.. 이것은 망하는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의 회개..를 거쳐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죄사함 받는 길입니다.
▲4.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들립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 6:8
하나님의 안타까운 탄식과 부르짖음을 듣고
이사야는 마음이 녹고 완전히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모기소리와 같은 작은 목소리로
사6:8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응답했습니다.
아마 그리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탄식과 분노에 차 있었던 것을 아시죠?
그런데 하나님이 제 눈을 열어서 주님의 보좌를 보게 하셨죠.
주님의 모습을 보게 하셨죠.
제가 입술이 부정한, 설교할 자격이 없는
부정한 입술을 가진 죄인인 것도,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이 제단 숯불로 제 입술을 태워주셨죠.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저같은 것을 쓰신다면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아마 그러고는 통곡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 축복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죄사함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이든지
일곱 귀신 들렸던 자이든지
살인자이든지 누구든지..
의인이면 오히려 불행합니다.
‘나는 망할 죄인입니다.’가 오히려 안전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이때 사명이 주어집니다.
이사야 같은 회개와 체험이 없으니, 사명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위대한, 겸허한 사명자로 태어납니다.
그 이후로는 ‘너희’라고 하지 않고 ‘우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같거늘“
‘너희’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다 담당시키셨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남의 생애를 하나님 말씀 전하는데 모두 바치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살던 그 누구보다도
예수그리스도의 오심과 탄생과 사역과 죽으심과 부활을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예언하셨습니다.
이사야가 겸허한 사명자로 태어난 후에, 제일 먼저 전한 말씀입니다.
사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8백년 후에 천사가 전한
천사가 요셉과 마리아, 목자들에게 전한 그 말을
이사야가 먼저 전했습니다.
▲마치는 말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는 하나님 말씀 전하다가 붙잡혀서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로
뒤흔들리는 사람, 분노의 사람, 저주를 품은 사람을
겸허한 사명자로
눈물이 있고, 영성이 있는, 사명에 불타오르는 사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분노에 찬 사람, 자기 삶이 현재 뒤흔들린 사람은
이사야 같은 은혜를 받으십시오.
이사야를 통해서 우리는
1) 하늘을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2)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고.. 이때 치유하심과 사유하심이 임합니다.
그 다음에는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립니다.
3) 그리고 주님의 빛에 비추인 내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4)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음성을 듣고, 사명자로 달려 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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