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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예수사랑이란 무엇인가 6

by 【고동엽】 2013. 3. 9.
예수사랑이란 무엇인가 6
7. 묵자(BC 479-381) 의 사랑
묵자가 인류 최초로 사랑을 설파한 사람이기때문에, 최근에 이 사람에 대한 강연이 활발합니다. 심지어 예수가 묵자의 사랑을 배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기세춘, 예수와 묵자) 시대와 장소가 너무 멀기 때문에 적절한 주장이 아닙니다.
필자는 묵자의 사랑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예수사랑이 어떻게 다른가를 규명하려는 의도에서 묵자 사랑을 살펴봅니다.
안회가 공자(BC 551- 479)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인仁이라는 말이 너무 어려우니 한 마디로 말씀해 주세요.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仁이란 예禮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禮는 공경하다는 뜻이 있어서 기본으로 서열이 강조됩니다. 이번에는 번지가 물었습니다. 인仁이란 무엇 입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愛人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공자가 말하는 사랑이란 체애體愛로서 사람을 나누어서 특별한 사람만 사랑한다는 뜻 입니다.
묵자는 겸애겸리兼愛兼利를 주창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이롭게 하라는 뜻 입니다.
묵자는 유가의 지독한 차별을 없애려고 사랑을 주창합니다. 묵자는 공자의 유가들이 친척들과 친하게 지내는데도 차등이 있고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데도 등급이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유가의 허례를 비난합니다. (박재범, 묵자 홍익출판사 250p)
그러나 묵자는 천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사회에 불필요 하다고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현명한 사람은 등용하여 높은 자리에 앉혀주고 부유하고 귀하게 해주며 관청의 우두머리로 삼고, 못난 사람은 파면시켜 가난하고 천하게 만들어서 노복奴僕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같은 책 34)
묵자는 효용과 이로움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여 차별과 차등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또한 묵자의 사랑은 국가와 사회의 평화를 기도하기 때문에 인류애와 같은 박애주의 이고 공리주의 사랑 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게 분명하지만 다음과 같은 한계가 있습니다.
차별과 증오를 극복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하는 박애주의는 공리公利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한 개인의 존엄이 지켜지지 않으며,
사회적 개혁에 필요한 강인한 실행력이 없고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하며, 자기만족으로 자신의 포만감을 즐길뿐 입니다.(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1 열린책들 560 - 562)
예수는 효용과 이로움에 치중하면 정작 사람이 존중받지 못함을 가르칩니다.(마르다와 마리아 누가복음10: 38-42)
8. 왜 예수사랑인가 ?
지금은 기독교의 위기 입니다. 교회가 사회의 대안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 입니다.
1. 오늘의 사회는 모든 가치가 경제에 집중되는 경제중심사회 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재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되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경쟁에 지쳐 절망하는 젊은이들이 양산 됩니다. 교회와 성당이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장서서 부를 축적하고 각종 사업에 나서며 끝없이 확장을 추구하여 사회로부터 질시받고 있습니다.
2. 현대는 다원주의 사회로서 어느 한 부분의 독점적 권력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검찰권력의 횡포에 분노하는 것도 이때문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성당이 사회를 섬기는 낮은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위용을 자랑하고 권세를 행사하여 힘의 집단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10 여년 동안 이러한 문제를 일으킨 근본 원인을 탐구해왔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사랑임에도불구하고 2 천 년이 지나도록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2천 년 동안 되지 않았으면 이제 그 방법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마녀사냥, 알비파 그리스도인 5 백만 명 학살,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 교황 알렉산드로 6 세의 사생아인 교황국 사령관 체사라 보르자와 그 병사들의 약탈과 방화, 살인과 강간이 있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배교자 유스티스누스 황제 때, 당국과 하나가 되어 성서를 불태웠던 사제들이 새 정부에서 다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의 해임을 요구하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던 도나투스파에 대한 당국의 학살을 승인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용 신학자 입니다.
종교개혁시에 칼빈은 삼위일체신론을 반대하는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습니다. 정작 본인도 삼위일체신론을 좋아 하지 않습니다. 또 유아세례는 무효이고 성인이 되면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재세례파 그리스도인 13,000 명 을 공개 처형했습니다. 루터는 농민 반란군 10 만 명 학살에 책임이 있습니다.
열거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시대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5 백년 전(종교개혁신학), 1,900 년 전 신학(교부신학부터 스콜라신학)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가 안정되어서 살인하지는 않지만(가능하다면 살인하고도 남습니다)
차별하고 배제하며 증오하는 신앙인이 다수 입니다. 신앙적으로 고대와 중세의 광기보다 결코 나아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광기의 증오 역사를 끊어 내려면 이러한 행위가 나오게 한 신학자들을 버려야 합니다.
기독교는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 등을 버려야 사랑의 기독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예수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더 가깝습니다.(필자 계정에 있는 글들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가 성취한 구원과 관계된 종교 입니다.(슐라이어마허)
그럼에도불구하고
평신도들은 믿기지 않겠지만 그동안 기독교에서 예수가 철저히 외면되어 왔습니다. 지금도 설교에서 예수 사역과 가르침이 별로 설교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입니다.
그동안 위에 열거한 신학자들을 위시해서 모든 신학자들이 구원론을 탐구할 때 예수 사역과 그분의 가르침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구원에 관한 철학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를 탐구했습니다.(한국조직신학회, 구원론 황돈형「바르트의 구원론」 대한기독교서회 206p 참조)
오늘의 기독교의 위기는 전적으로 신학자와 성직자로부터 발생했습니다. 신학이 잘못되었으니 바뀌어야 한다는 말 입니다. 신학이란 자기시대에서 신앙하기 위한 고백 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대와 중세 신학을 답습하며, 세계관과 문화가 다른 서구신학을 따라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예수 십자가와 부활, 그분의 사역과 가르침을 신앙하는 길이 예수사랑을 회복하는 길 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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