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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기독교 강요

by 【고동엽】 2010.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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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개혁주의 기본정신



<기독교강요> 초판이 1536년 세상에 나왔을 때, 기독교계를 뒤흔들고 역사를 움직였다. 당시의 로마교회는 <기독교강요>를 두려워했다. 또한 개혁교회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체계가 잡히고, 당당하게 참 교회를 향한 길을 갈 수 있었다. 이 책으로 죤 칼빈은 일류 신학자로 인정받았다. 1559년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의 초판을 내놓았을 때, 주님께서 무한한 은혜로 그와같은 성공을 거두게하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내가 더 분발하도록 격려해주신 여러분들의 열렬한 평가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여 미력이나마 보답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큰 배은망덕이라고 생각한다..."('독자에게 드리는 글' 중에서).
종교개혁에 있어서 <기독교강요>는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가장 영향력있는 교의신학의 지침서가 되었다.


1. 기독교강요의 중요 판들과 저술 배경
<기독교강요>는 1536년의 초판 이후, 계속 조금씩 증보되었다. 중요한 판은 1536, 1539, 1543, 1559년도 판들이다.

(1) 1536년 초판
초판의 사상이 거의 변함없이 최종판에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초판은 칼빈 신학의 정수요 핵심이라고 불리운다. 초판은 학계에서 역사적 가치에 있어 최종판 이상으로 많이 읽혀지고 있다. <기독교강요> 초판은 교리문답서인가 혹은 변증서인가? 칼빈은 교리문답서를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는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서한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저술 의도를 밝히고 있다 :

"...오로지 본인의 목적은 종교적인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확실한 기본원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고 초보적인 교리의 형태로..."

칼빈은 박해받는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위하여 외국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려고 당시 공용어인 라틴어로 쓰기는 했으나, 불어판을 곧 속간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간단한 교리문답서를 만들려는 계획은 뜻대로 될 수 없었다. 당시에 칼빈과 그의 동포들은 프랑스의 정치 질서를 파괴하고자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프란시스 1세는 당시 프랑스에서 발흥하고 있던 모든 혁신적인 경향이 국가와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적인 것이라고 단정하는 소르본느 대학측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는 이단을 숙청함으로써 프랑스의 복음주의자들과 외국의 복음주의자들을 격리시키고자 했다. 이런 방안의 지지자들은 프랑스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을 재세례파로 몰아부치거나, 무식한 오합지졸로 보았다. 또한 그들의 운동을 국가의 내적 질서에 대항하는 무정부적 행동과 반란으로 정죄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독일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재세례파와 똑같아서 선동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칼빈은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기독교강요>를 펴냈다. 그는 신앙의 형제들을 위한 교리문답서의 필요성을 느꼈다. 동시에 박해의 중단을 위해 왕에게 탄원하고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동기가 <기독교강요>의 집필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기독교강요> 초판은 모두 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율법(십계명 해설 포함)
2. 믿음(사도신경 해설 포함)
3. 기도(주기도문 해설 포함)
4. 성례
5. 거짓 성례
6.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의 권능, 그리고 정치 조직

(2) 1539년 판
17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교부(특히 어거스틴)들의 글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또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성경 인용도 많아지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구약과 신약의 유사점과 차이점, 예정과 섭리 등의 장들이 추가되었다. 칼빈이 이 라틴어 판을 1541년 프랑스어로 옮겼다.

(3) 1543년 판
2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속 나타나는 명백한 목적은 가르침이다. 1539년 판에 비해서 이 판에 있어서의 개정이나 증보면은 훨씬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새로이 주요하게 다루는 문제는 수도 서약과 인간의 전통에 관한 것들이다.

(4) 1559년 판
이 <최종판>은 교리의 순서와 문맥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칼빈의 견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모두 8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436년도 초판의 교리문답 형식은 이제 사라졌다. 다음과 같이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 1 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제 2 부 그리스도 안에 계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
제 3 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제 4 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
<최종판>에서 예정 교리는 구원을 다루는 제3부에 자리잡고 있다. 섭리의 교리는 제1부에서 다루어 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것은 제3부에 배치되어 있다. 이 <최종판>은 기념비적인 걸작이다. 개혁교회의 신학적 총체라고 말할 수 있다. 칼빈 생존 당시에도 그 성공은 대단했으며, 그후에도 인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2. 칼빈의 경건주의와 칼빈의 주의 신학

칼빈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으로서 살면서 글을 썼다. 칼빈은 우리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그는 공동체와 이웃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관심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경건은 신학의 배경이며 목표이다. 따라서 그는 그의 책을 <경건대전, summa pietatis>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있어서 경건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선행조건이다. 신학은 단순히 하나님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칼빈에 의하면 신학은 마음의 문제이다. 신학은 신앙과 전적인 의탁 그리고 경건을 요구한다(faith, total commitment and piety).
신학이 단순히 머리의 학문(science of the head)이 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① 우리는 연구할 때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고있다.
② 우리는 전인격으로서 하나님을 대면한다. 따라서 지성뿐만 아니라 감정과 의지도 포함된다.
칼빈은 차갑고 지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열정과 따뜻한 마음으로 말한다.

최종판의 내용 가운데 주목할만한 내용을 살펴보면 매우 심오한 칼빈 신학을 만날 수 있다.

제1부는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고 있다. 칼빈이 말하는 지식은 정서적 따뜻함과 참여, 따라서 경건을 포함하고 있다(emotional warmth, involvement, piety). 그에 의하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의 현존에 의해 노출된 자기이해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 - 기독교적 전통에 입각한 자기이해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자가 이러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이 두 가지 지식은 경건(piety)과 종교(religion)에로 인도해 준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reverence)과 사랑이다. 종교는 신앙과 하나님 경외(the fear of God)이다. 경건은 섬김(봉사)으로 나타나고, 종교는 예배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중적이다.
a. 창조주와 섭리자 (1부) - 만인에게 관계된다.
b. 구속주 (제 2-4부) - 그리스도인과 관계된다.

하나님은 먼저 창조세계와 성경의 일반적 교훈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나타내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구속주(Redeemer)로 보여 주셨다. 특히, 칼빈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a. 우리에게 하나님 경외를 가르쳐주기 위해.
b.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모든 선한 것을 구하고 받도록 하기 위해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신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 안에 뿌리 박혀 있다. 즉 하나님에 관한 어떤 관념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다. 이것이 <종교의 씨>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상숭배도 이러한 관념에 대한 증거이다.

<종교의 씨>가 암시하는 것은 두 가지 사실이다.
a.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종교의 보편성).
b. 인간은 무지해서라기 보다 타락해서 죄를 범한다.

칼빈에 의하면 모든 종교의 기원은 <종교의 씨>에 있다. 실제적인 불신앙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무지에 의해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악의로 말미암아 질식 혹은 부패되었다.

종교의 씨와 관련된 두 가지 죄가 있다.
a. 미신 - 이 맹목은 거의 항상 거만한 허영 그리고 완고함과 결탁되어 있다.
b. 위선 - 이것은 악의와 완고함을 포함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우리 주위의 세계는 가장 아름다운 극장이다.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 인체의 구조의 정묘함도 창조주의 솜씨를 반영해 준다. 따라서 옛 철학자가 인간을 가리켜 '소우주'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현이다. 그러나 자연신학만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우리가 창조세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도 성경은 필요하다. 인간이 성경을 떠나서 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성경은 우리를 참 하나님께로 인도해 준다. 성경은 우선 하나님을 창조주로 계시하고 있다. 성경에는 창조와 재창조의 두개의 축이 있다. 성경에서의 구속은 <창조주의 회복>이다. 이것은 개혁신학에서의 독특한 강조이다.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교회에서 온 것이 아니다. 말씀과 성령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학교>에서 <성경의 제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수 있게 한다. 성경은 안경이다. 이 안경을 쓸때 우리는 창조세계와 하나님을 바르게 볼 수 있다.



3. 칼빈의 삼위 일체관 개혁주의 정통성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매우 중요하다.
칼빈에 의하면, 삼위(Three persons)는 그 자신 안에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다. 칼빈의 삼위일체론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무엇인가? 위격(Person)과 본질(essence) 사이의 뚜렷한 구별이다. 본질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은 숫적으로 하나이다. 위격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은 숫적으로 셋이다. 위격(person)이란 무엇인가? 칼빈은 위격이란 용어에 의해서 실재(subsistence)를 의미하고 있다. 실재는 삼위의 각 위격을 구별시켜주는 고유성이다.

칼빈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
어거스틴의 경우, 삼위일체의 논리적 순서는 성부, 성령, 성자이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 그 순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다.


칼빈은 성경을 떠난 하나님의 관한 사색을 계속 경고한다 !
관심을 선자에 두는 신학(바르트주의, 근본주의) 이나, 성령에 두는 신학(오순절주의) 과는 달리, 개혁신학의 전통은 삼위일체와 만물의 원천과 기원(fons et origo)이신 성부와 창조주에 대해 말한다. 따라서 개혁신학의 정통주의는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부류나 성부보다는 성령의 더 비중을 두는 오순절 개통은 정통 개혁신학주의라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개혁주의 정통성을 부르짖고 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우선주의가 무엇이냐는 진정 정통 개혁주의를 추구하고 있는지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는 단순히 앞 일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와 피조물을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성(the Fatherhood of God)은 섭리를 논의하는 배경이다. 섭리는 비인격적 능력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칼빈은 추상적 능력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에 따라 만사가 움직인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의 맹목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다. 태양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성적 은총을 새로이 기억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개개의 사건들을 지도하신다. 우연히 발생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개개의 사건들을 조정하시며 이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결정된 계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이 없이는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을 섭리로써 성취하신다. 섭리는 하나님이 그의 계획을 수행하시는 방편이다. 섭리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확신을 준다.

칼빈은 하나님이 죄의 저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죄인으로서 '필연적 결과로서'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가 하는 일을 한다. 그의 의지는 여전히 작용하지만, 이제 그것은 죄로 기울어진다.

(참고)
.칼빈- '필연적 결과' 을 강조한다. 의지가 속박되어 있다.
.요나단 에드워즈- '자발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속박된 의지는 자유롭다.

칼빈은 결정론이나 우연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칼빈의 섭리론에서의 주된 강조점은 경건에 대한 관심 가운데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우리는 비참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있는 자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부성적 관심은 칼빈의 섭리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섭리는 신앙을 요구한다. 믿음없이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 어떤사건들은 우연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다. 순탄한 삶이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는 아니다. 재난과 불행은 변장을 한 축복일수 있다. 섭리를 믿는 신자는 신령한 위로를 경험하고, 감사의 심정을 갖는다. 그는 염려로부터 벗어나고, 역경과 불행중에서 인내한다.



4. <기독교강요> 제2부는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을 다루고 있다.


1) 인간론과 원죄론
칼빈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를 알아야 한다. 먼저, 본래의 존귀한 상태에서의 그 자신을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 죄인으로서의 자기를 알아야 한다. 제2부는 우리의 현재의 위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교만이 일차적인 죄이다. 이 죄가 다른 모든 죄들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불신앙이 일차적인 죄이다. 불신앙이 교만과 배은망덕(감사치 않음)을 초래하였다.고 역설하고 있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가 모방가 환경에 의해서 전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아담의 타락 속에서 우리는 모두 범죄하였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칼빈은 말하기를 원죄는 영혼의 모든 부분에 만연되어 있다. 타락한 인간의 부패성은 계속해서 새로운 열매(육신의 일)를 맺는다. 이는 뜨거운 용광로에서 불꽃과 불똥이 튀어나오며,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는 것과 같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선이 결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악을 생산할 능력이 풍부하다.


따라서 인간의 죄는 인간 전체를 전복시킨다. 죄는 영혼과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 지성과 의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칼빈은 죄의 결과로서의 의지의 속박 상태를 말한다. 인간의 의지와 이해력은 죄에 의해 전적으로 파괴되었는가? 아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다. 인간의 이해력은 <땅의 일>에 대해 여전히 기능을 갖고있다. 일반은총이 사회생활의 공정성과 질서와 예술과 과학과 관련이 있다 (Ⅱ. 2. 14). 칼빈에 의하면, 어느 한 방면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의지는 여전히 작용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선한 것을 따르고 싶어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영원한 복락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성령의 역사 없이는 아무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의지는 죄의 속박을 받아 노예상태에 빠졌으므로 선을 향하여 움직일 수 없으며 또한 선을 위해 전력을 다할 수도 없다. 사람은 죄를 짓는 필연성에 예속되어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내가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수 있는가?>이다. 루터는 죄와 용서를 깊이 인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루터는 율법의 도덕법의 이중적 사용을 말한다.

a. 죄를 보여주는 거울(교육적 사용)
b. 세상에서의 죄의 억제(시민적. 정치적 사용 )
후자가 루터의 일차적 사용이고 주된 강조점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주요한 질문은 <어떻게 나는 나를 구원하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감사함으로 응답할 수 있는가 ?>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전체적 삶(total living of the Christian life)에 대해 강조한다. 또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일광성있게 강조한다.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승리(our victory in Christ)를 깊이 인식하고 있다. 율법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하여 계속 규범적이다. 원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은 이긴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작은 권투>가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머리(our Head)가 하늘에 있으며 우리가 그를 따를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칼빈의 도덕적 율법 3중적 사용과 그리스도론

a. 교육적 사용(죄를 깨닫게 함)
b. 시민적. 정치적 사용(세상에서의 죄의 억제)
c. 복음에 대한 감사(혹은 응답)의 규범. 이것이 칼빈의 일차적 사용이다(율법의 적극적 기능).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셨다.

루터는 영적 자유를 강조하고, 칼빈은 순종을 강조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순종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에 대한 감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과 결합되었다.

구약의 율법은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전조)였다. 그리스도는 새 율법을 가져오신 것이 아니라, 창조 이후로 있어왔던 율법을 명료하게 드러내셨다. 칼빈에 의하면 <율법>은 구약의 언약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이다.

개혁신학은 구약을 강조하고, 신구약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개혁신학에서 중요한 순간은 성육신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은혜언약 안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려고 오셨다(대속적 속죄). 그러나 그의 공로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존한다. 그리스도의 어떤 사역도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강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마치 우리 스스로 그 일을 한 것처럼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를 구속하시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직책을 다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셔야 했다. 이 은헤는 근본적으로 성부로부터 온다. 성부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강제되지 않으신다.



5. 제3부: 성령의 내적 사역(The Internal Work of the Spirit)

그리스도가 우리와 성부 사이에서 중보하신다. 믿음은 성령의 주된 사역이다. 믿음은 빈 그릇과 같은 도구적인 것이다. 믿음은 그 자체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가 이니다. 성령은 구원의 역사적 사역을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적용시킨다. 루터는 <전가된 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칼빈은 <관계>를 더 강조한다. 즉, 그는 신비적 연합을 강조한다. 완전히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결혼>과 같은 것이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가 앞뒤로 나란히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 점은 루터보다 두드러진 면이다. 루터는 성화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혜>에 대해 말했다. 칭의에서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처럼 완전하다. 성화는 현세에서 시작되기는 하지만 하늘에서 완성된다. 우리는 이 양자를 구별하지만, 그리스도는 자신안에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 이 양자는 서로 뗄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세 부분이 있다.
① 율법의 공포로 부터의 자유
② 율법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자유
③ 무해무익한 일에 관한 자유(예를 들면, 옷을 입는 문제, 육식의 문제등).

우리는 자유를 사랑 아래 두어야 한다. 또한 자유는 적극적이어야 한다. 칼빈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명백한 규칙은, 이웃의 덕을 새우는 결과가 될 때에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고, 이웃에 도움을 되지 않을 때에는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그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구속만 받는다. 엄격히 말해서 양심은 하나님만을 상대로 한다. 행동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과 같이, 양심은 하나님을 상대로 한다. 맑은 양심은 곧 심령의 내면적 성실성을 의미한다. 어떤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에 대해 아무 저항없이 그것을 허락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다른 사람이 나의 양심을 속박하도록 허락해서는 안된다.

칼빈은 기도에 관하여 실제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경건에 대한 강조와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다. 그는 기도의 유익과 위로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기도는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하늘 아버지 곁에 우리를 위하여 저장되어 있는 보물에 우리의 손이 닿으려면 기도의 힘을 빌러야 한다.

올바른 기도를 하려면 네 가지점을 기억해야 한다. 즉, 기도하는 자에게는
① 하나님 경외,
② 회계하는 마음(진심으로 부족을 느낌),
③ 겸손(모든 자기 신뢰를 버림),
④ 확신있는 소망(두려움 극복,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이 있어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목적이 있다. 사기도와 공기도는 모두 필요하다. 칼빈은 특히 공기도에서 조심할 점을 지적한다. 기도하는 자가 유창한 말로하나님께 아뢰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위선자들은 기도에서 호화찬란한 외식을 보인다. 기도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는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6. 칼빈의 선택의 교리
칼빈은 선택의 교리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칼빈은 선택(혹은 예정)의 교리가 다른 어떤 교리보다 많은 공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한다. 제1부에서 섭리가 중요한 교리이듯이, 제3부에서는 선택이 그러하다. 칼빈의 접근 방법은 경험적이고 실존적이다. 그는 현재의 위치에서 시작하고 관찰한다. 그는 이 교리의 유익에 대한 일반적 관심을 따라간다. 이 교리에는 세 가지 유익한 점이 있다 :


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찬양하게 한다.
②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③ 우리로 겸손케 한다.

칼빈은 두 기지 위험을 알고 있다:
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에 대한 억측과,
②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말을 삼가는 것이다.

칼빈은 성령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곳에서만 말하고자 한다.

"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히지 못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 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원하시는 사람을 거저 선택하시며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신다는 것이 이제 충분히 밝혀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의 영원하고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 주실 사람들을 오래 전에 확정하셨다고 말한다. 그들의 인간적인 가치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다."
선택하신 것은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지 거룩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신자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정만을 기초로 한 것이며, 이 은혜는 행위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부르심에 의한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말이다"
" 하늘의 은혜에 의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그의 양이 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버림을 받은 자들에 대해서도 공정하시다. " 주께서 사망으로 예정하시는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본성의 상태에 의해거 그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어떤 불공평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숨은 결정을 찾아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공손하게 찬탄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극히 위대해서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 나는 깊음 앞에서 떤다. 그대는 이론을 말하라. 나는 찬탄하겠다. 그대는 변론하라. 나는 믿겠다. 나는 깊음을 본다. 그러나 밑바닥에는 미치지 못한다."

악인들의 멸망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존하되, 그 원인과 기회는 그들 자신 안에 있다. " 첫 사람이 타락한 것은 주께서 그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판단하셨는지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일이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충분히 나타나리라고 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가 정한 대로 넘어지지만, 자기의 허물 때문에 넘어지는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 아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무식한 것이 유식한 것" 이라고 했다.
" 사탄이 신자들을 낙심시키려고 할 때에 사용하는 가장 중대하고 위험한 유혹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릇된 곳에서 선택을 탐구하겠다는 악한 소원을 일으킨다.

칼빈에 의하면,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다. 선택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구원과 생명과 천국의 영생을 구하려면, 그리수도 이외에는 다른 곳이 없다. 그만이 생명의 샘이며, 구원의 닻이며, 천곡의 상속자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보아야 하는거울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계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확고한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진정한 믿음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들이며, 그가 그들의 보호자와 목자가 되시므로,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요 3:16, 6:39 참조)"

성경은 맏는 자들을 위한 계시이다. 성경은 예정과 선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확실함 가운데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확신과 위로를 갖게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선택이 신비한 문제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계시된 진리에 속한다. 선택 교리는 복음의 일부이다. 선택 교리는 우리의 두려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위한 것이다. 의심이 아니라 위안과 찬송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선택 교리는 교회의 심장 (heart of the church)으로 불리어 왔다.

교회는 선택의 교리를 복음으로써 선포한다.
우리가 선택의 교리를 찬송할 때 우리는 그 교리를 바르게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에 의한 유기(reprobatidn) 를 말한다 (예. 롬 11:15). 이 하나님의 행위는 독단적인 것이 아니다. 그 행위를 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죄이다. 하나님의 유기는 인간 자신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과 별개의 일이 아니다.



7. 최후의 부활과 졸말론

최후의 부활에 관한 내용은 3부와 4부의 연결 부분이다.
최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완성한다. 영혼불멸을 말한 철학자는 많아도 육신의 부활을 인정한 사람은 적다.
"우리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눈앞에 그려야 한다. 그는 ... 우리의 장차 올 부활을 보증하신다."
칼빈에게 있어서 종말론 (eschatology)은 소망과 확신과 기대와 성취 그리고 기쁨과 관련이 있다. 그는 천년왕국론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칼빈은 부활을 믿지 않는 이단들을 논박한다. 그는 부활의 모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선 우리는... 본체로 보면 현재 가지고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나, 그 성질이 다르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물로 바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는데 다만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다른 특성에 있어서는 탁월하였다." "사람과 짐승의 육체는 본체가 같으나 성질이 다르며 (고전 15:39), 모든 별은 같은 재료로 되었으나 그 광채가 다른 것과 같이 (고전 15:41), 우리는 우리의 몸의 본체는 보유하겠지만 변화가 생겨서 (고전 15:51-52), 이 나중 상태는 훨씬 더 훌륭하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하기 위해서 우리의 썩을 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썩는 성질을 버리고 썩지 않는 성질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고전 15:53-54)."

칼빈은 불신자의 부활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생명의 부활이 있고 심판의 부활이 있다 (요 5:29). 그리스도께서는 양과 염소를 분별하러 오시리라는 것이다 (마 25:32). 악인이 심판주 앞에 끌려가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멸망하는 것은 가벼운 벌이 될 것이다. 그들이 심판주에게서 완악한 죄로 벌을 받을 것이며, 끝도 한도 없는 이 벌은 그들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칼빈은 영원한 복에 관하여 말하면서, "최고선과 행복의 모든 요소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해서는 안된다"라고 했다. 하나님 나라에는 광채와 기쁨과 행복과 영광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희미한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선물을 분배하실 때 모든 성도에게 꼭 같이 빛을 비추시지 않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실 때에도 그 영광의 정도가 꼭 같지 않으리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해다 한다."

칼빈은 버림받은 자들의 처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악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의 중대성은 적당하게 형언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물질적인 비유를 쓰게 된다... 우리가 특별히 명심해야 할 점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완전히 단적된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냐 하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지옥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 ' 이다.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



8. 외적인 은헤의 수단과 교회론

제4부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 교회 회의 들과 그 권위, 교회의 권징, 맹세, 성례, 세례, 성만찬, 카톨릭의 미사와 다른 다섯 가지 의식 (성례) 그리고 국가 통치에 광하여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제4부는 교회론이라 할 수 있으며, 끝 부분에 국가론이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교회의 본질과 기능, 교직, 성찬론 등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칼빈은 이러한 제목들을 논할 때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교리와 신학적 견해들을 논박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참된 교회는 믿는 자들의 어머니이다.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신앙 성장을 위해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따라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선택은 교회의 기초이다. 우리는 교회를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시다.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교회를 아신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다.

참된 교회에는 두 가지 표식이 있다 :
①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함.
② 성례가 정당하게 베풀어짐.

칼빈에게는 세번째 표식이 없다. 세번째 표식은 후에 어느 정도 성례와 관련하여 나타나게 된다. 교회 분열은 칼빈에게 있어서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교회의 분열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부인이다. 교회의 참된 예배와 말씀의 전파가 완전히 붕괴되었을 때만이 분열이 가능하다.

칼빈에 의하면, 바른 교리와 바른 예배에서 떠난 로마 교회는 참 교회라고 할 자격이 없다. "진정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요 또 그 기초라고 한다면(딤전 3:15) 거짓말과 허위가 지배하게 되는 곳에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로마 교회의 경우, 말씀 대신에 거짓말을 섞은 패악한 조직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주의 성만찬은 가장 추악한 모독 행위로 대체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참을 수 없는 각종 미신으로 더럽혀졌다. 기독교는 교리를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음에도 교리는 완전히 매장되고 제거되었다. 공중 집회는 우상 숭배와 불경건을 가르치는 곳이 되었다." 칼빈에 의하면, 교황은 '사악하고 가증스런 왕국의 수령'이다. 교황은 그 교회들을 그의 모독적인 불경건으로 더럽히며 잔인한 지배로 괴롭히고 독약과 같은 악하고 치명적인 교리로 부패시키며 거의 죽였다. 그 교회들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거의 파묻혀 숨겨졌으며 복음은 타도되었고 경건은 추방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거의 말살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역을 사용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 복음선포의 직책은 특히 중요하다. 칼빈은 로마 교회의 교황 중심의 성직 제도에 반대한다. 그는 임시직과 항존직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교회 정치를 주관하는 사람들을 바울은 첫째로 사도, 다음은 선지자, 세째는 복음 전하는 자, 네째는 목사, 끝으로 교사라고 부른다(엡 4:11). 이 중에서 끝에 있는 둘만이 교회내의 평상직이요, 처음 셋은 주께서 그의 나라의 초창기에 세우셨고 필요에 따라 가끔 부활시키신다."

교사직은 성경 해석의 책임을 맡고 있다. 사도의 경우, 목회의 대상이 온 세상이었으나, 목사의 경우는 지역교회를 맡고 있다. 목사는 공예배에서 말씀을 설교화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권면도 할 수 있으며 치리(권징)권을 갖는다.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는 일정한 질서가 필요하다. 즉 목사는 각각 모든 일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를 진다. 일정한 임지나 목적이 없이 돌아다니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보다 목사 자신들의 이익을 생각해서 마음대로 교회를 버리고 함부로 한 곳에 모이는 것은 혼란을 일으킨다. 따라서 목사는 각각 자기의 한계로 만족하며 다른 사람의 영역에 침입하지 않는다는 이 결정을 될 수 있는 대로 전체적으로 준수하여야 한다."

만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유익하다 할 때에도 자기의 개인적인 결정으로 할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인정을 기다려야 한다.

집사는 두 가지 직무를 수행한다. 하나는 구제 물자를 나누어 주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빈민, 병자 및 과부를 돌보는 일이다. "디아코니아(섬기는 일)라는 말에는 더 넓은 뜻이 있지만, 성경에서 집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교회가 구제 물자를 분배하며 빈민을 돌보고 빈민 구제금을 관리하는 일을 맡긴 사람들이다... 사도들의 교회에는 이런 종류의 집사들이 있었고 우리도 그것을 본받는 것이 마땅하다."

칼빈은 교회가 교역자를 투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선 하나님의 선택의 증거들을 보고 하나님의 선택된 성도의 높은 표준에 의하여 투표로 선출한다는 것이다. "적당한 듯한 사람들은 일반 신도의 합의와 승인을 얻어서 임명해야 한다."

제6장에서 칼빈은 교회의 왕권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주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황의 수위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대리나 후계자를 필요라 하지 않고 홀로 친히 그 권리를 지키시며, 따라서 아무에게도 이양하시지 않는다." 칼빈에 의하면,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머리이시며, 우리는 모두 그의 지배 하에서 그가 제정하신 질서와 조직에 따라 서로 연합된다. 교회에 머리가 없을 수 없다는 구실로 세계 교회 위에 한 사람을 앉히려고 하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현저히 모욕한다. 교회의 대리는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1) 로마교회(카톨릭) 교리성 비판
제8장에서 칼빈은 로마 교회의 교리 결정권을 비판하고 있다. 이 권한에 의하여 로마 교회는 교리의 순수성을 심하게 타락시켰다. 칼빈에 의하면, 사도들도 말씀을 능가할 자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실한 사역자들은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복종하도록 하신 그 교리를 단단히 붙잡아야 할 뿐이라고 가르친다."

"교회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어서는 안된다. 즉 주의 말씀에 계시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며 주장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교회회의 권위에 관하여
제9장에서 칼빈은 교회회의의 권위를 논박한다. 그는 어는 종교회의의 교리결정이든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며 그 회의가 언제, 어디에서 모였고, 무슨 문제로 모였으며, 누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무슨 말을 했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한다.

칼빈에 의하면 회의들도 인간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칼빈은 교리문제 혹은 성경해석의 문제로 교회가 싸울 때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결정하되 말씀과 성령을 따라 그렇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니케아 회의, 콘스탄티노플 회의, 에베소 회의 등의 존재의미와 존재이유를 인정하였고, 아다나시우스 등 많은 교부들의 역할을 칭찬하였다.


3) 권징의 필요성과 목적
제12장에서 칼빈은 권징의 필요성과 목적을 이야기하고 있다.
"권징을 싫어하고 말만 들어서 뒷걸음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런 사람들은 교회도 하나의 사회란 것을 알아야 한다. 조그마한 가족 같은 사회에서도 규율이 더욱 더 필요하다... 그러므로 권징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반대해서 날뛰는 사람들을 억제하며 길들이는 굴레와 같으며, 나태한 사람을 고무하는 박차와 같고, 더 중한 타락에 빠진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영의 유화함으로써 부드럽게 징벌하는 아버지의 매와 같다."

그러면 권징의 목적은 무엇인가?
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② 악한 사람들 때문에 선한 사람들이 타락하는 일이 없도록.
③ 악한 자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그러나 사소한 죄악이 아니라 큰 범죄에 대하여는 출교시켜야 한다.

칼빈에 의하면, 수도원주의자들은 은혜와 신앙으로서만의 구원을 무시하고 율법주의에 빠져 빛 잃은 빛과 맛 잃은 소금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특권의식과 분리주의 및 이중적 도덕표준으로 말미암아 교회 내에 분열을 야기시켰다. "현대 수도사들이 사적인 제단을 따로 설치한 것은 단결의 유대를 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은 교회 전체와의 교통을 끊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 사이에 평화와 사랑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제정하신 일반 성직 제도를 멸시한다. 현재 있는 수도원은 모두가 분파주의자들의 소굴로서, 교회의 질서를 교란하며 신자들의 사회에서 분리되었다. 이 분리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여러가지 종파명을 취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대신에 베네딕트파라고 자랑하며, 어떤 사람은 프란체스코파, 어떤 사람은 도미닉파라고 하면서 교만하게 이런 이름들을 자기들의 종파에 붙이고는 보통 그리스도인과 다른 체하니 이는 그리스도께 대한 불법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이 온갖 추악한 죄악으로 더럽혀진 계급도 없으며, 파쟁과 미움과 당파심과 음모가 맹렬한 곳도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정욕을 억제해서 노골적인 추태를 부리지 않는 것을 성적 정결이라고 부른다면, 그런 정결한 생활을 하는 수도원이 몇 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홍등가가 아니라 정결한 성역이라고 할만한 수도원은 열에 하나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또 그들의 음식은 얼마나 검소한가? 그들은 우리에 있는 돼지들같이 뚱뚱하다. 내가 그들을 너무 혹평한다는 불평이 생기지 않도록 그만 말하겠다... 이 비난이 모든 수도사들에게 예외 없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거룩한 생활의 원칙과 규율이 수도원에서 아무리 훌륭하게 시행됐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아주 다르게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언제든지 있었다. 그와 같이 현대 수도사들은 거룩했던 고대에 비하여 타락하기는 했으나 그 무리 가운데 소수의 선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악한 사람들의 큰 무리 가운데 여기저기 흩어져 숨어 있다."


4) 카톨릭의 미사와 행위와 성만찬 의식행위에 관하여
칼빈에 의하면, 로마 교회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것을 말살하는 모독행위이다.
"미사는 그리스도에게 큰 모욕을 가하고, 그의 십자가를 매장하고 은폐하며, 그의 죽으심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게 만들고, 그 죽으심에 대한 기억을 우리에게 전하는 성찬의 힘을 약화시키며 소멸시킨다."
미사는 성경에 없으며 원시교회에도 없었다. 미사는 더럽혀졌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신성모독이다.


9. 국가 통치론

제20장은 국가 통치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국가 통치에 지정된 목적은,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하며, 우리를 사회 생활에 적응시키며, 우리의 행위를 사회 정의와 일치하도록 인도하며, 우리가 서로 화해하게 하며, 전반적인 평화와 평온을 증진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 사회에서 정부가 하는 일은 빵과 물과 태양과 공기가 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사람들이 호흡하고 먹고 마시며 따뜻하도록 하는 이런 모든 활동을 포함한 생활 방도를 마련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한다"(우상숭배 억제, 치안 유지, 시민 재산 보호, 인간 상호간의 선한 교제를 가능하게 함).

정부에는 세 부분이 있다. 법의 수호자인 집권자와, 집권자가 통치할 때의 표준이 되는 법과, 법에 의한 통치를 받으며 집권자에게 복종하는 국민이 있다.(Ⅳ.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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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Ⅰ. 1536년 판 강요가 나오기까지(1532-35)

A. 기독교 강요 초판의 전주곡

1.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의 딜레마
기독교 강요가 쓰이게 된 이면에는 프란시르 1세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버티고 서 있다. 존 칼빈이 프란시스1세의 진노에 처음으로 직접 맞닥뜨리게 된 것은 1533년11월 1일 ‘모든 성자들의 날’(All Saint' Day)이후였다. 그 날 파리에서는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의 파리대학 총장 취임이 있었다. 그때 그가 행한 연설은 사실상 마태복음 5:1-12에 관한 강해 설교였다. 칼빈이 그 설교를 작성했는가 혹은 최소한 그것에 일익을 담당했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이다. 칼빈이 당국자들에 의해 그 설교문 작성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갑자기 파리에서 도망해 버렸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콥의 연설 말미쯤에 다음과 같은 복음에의 초청이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마5:11).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 진리를 담대히 말하지 않고 감춥니까?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몸은 죽이되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옳습니까?

 

몸은 죽이되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옳습니까?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피흘려 우리를 영원한 죽음과 사탄의 결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그분의 이름 때문에 가장 미미한 고난을 받는 것조차도 꺼려하는 인류의 배은망덕함이여! 세상과 사악한 자들은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으로 순수하고 진지하게 침투하려고 하는 자들을 이단, 미혹케 하는 자들, 악한 말을 하는 자들, 그리고 사기꾼이라고 불어 왔습니다...그러나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모든 것을 태연히 견디는 자들은 복 있는 자들입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이러한 연설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콥과 칼빈은 파리에서 도망쳤다. 12월 10일 프란시스는 이처럼 성동적인 멧세지의 장본인들인 이단 종파를 어떻게 체포하여 처벌할 것인가에 관한 교서를 파리 의회로 보냈다. 프란시스는 콥 사건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충성스러운 친구들이여!...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도시, 파리, 우리 왕국의 수도에서 일어난 사건에 의해 심히 불쾌하고 심기가 불편합니다. 우리 왕국의 최고의 대학에는 저 저주받을 루터파 이단들이 득실거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 하여 그것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든 대책을 강구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본보기로써 유감스러운 처벌이 행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짧은 서론에서 칼빈이 프란시스 1세에게 호소하는 글을 쓰게 된 배경이 되는 정치적 사건들과 교회와 국가 관계의 그 복잡한 역사를 상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단지 우리는 그 배경과 정치적 주역들의 성격을 대충 훑어 볼 수 있을 뿐이다.

프란시스 1세는 자신의 통치 기간 전체에 걸쳐 계속적인 공격을 당한 군주였다. 그는 자기 왕국의 총화를 위해 우유부단하고도 일관성 없는 방식으로 투쟁했다. 몇 안 되는 자신의 통치 기반들 가운데 하나인 교회체제에 대한 프로테스트가 자신의 왕국 한 가운데에서 점증하게 되었을 때 그와 그의 중요한 종교 자문관들은 그것을 선동으로 간주했다.

 

황제로 선출되지 못하는 바람에 좌절하고, 세 번씩이나 이탈리아 원정에 실패하고(그 중 한번은 로마시를 야만적으로 약탈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첫 번째 라이벌인 찰스 황제에 의해 한동안 마드리드에 투옥 당하기도 하고, 끊임없는 침략의 위협에 시달리고, 자신의 영토 일부를 잃어버리기도 하는 동안 프란시스 1세는 정말 처절한 정도로 도움을 필요로 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한편으로 자국 내에서는 “루터 잔당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1534년 1월에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군주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1515년 레오 10세와 종교 협약을 체결했으며 1533년 마르세유에서 클레멘트 7세와 협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 때문에 그는 한 때 자신과 찰스 사이의 결투에 의해 제국의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제안하기까지 했으며 자신의 기독교 대적들에 대항하여 술탄과 동맹을 맺기까지 했던 것이다. 프란시스 1세의 통치는 전반적으로 우유부단하고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종교정책이라고 해서 어떻게 자신의 성격을 반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프랑스의 복음주의자들이 다루어야할 했던 사람은 이처럼 불안정한 군주였다. 프랑스 왕의 집요한 외교활동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1534년이었다. 1월에 프란시스와 독일 프로테스탄트 군주들 사이에 은밀한 조약이 체결된 후 5월과 8월 사이에는 독일 스위스 신학자들과 교회의 재연합에 관한 협상이 있었다.

 

프란시스의 수행원인 길롬 뒤 벨라이(Guillaume du Bellay)가 협상했던 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도들 중에서 프랑스 왕의 거짓된 평화 제의에 의해 좀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것은 스위스 개신교도들이었다. 종교개혁은 이미 스위스 도시들로 전파되었고 드디어는 서부에 있는 불어권 지역에까지 파급되었다. 비록 아직 제네바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많은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고국에서의 죽음의 위협을 피하여 스위스로 가서 거기서 피난처를 찾았다.

이제 화체설의 발전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화체설은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실제로, 육체적으로 느껴지게 임재하신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화체설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Lateran Council)에서 최초로 공인되었다. 그것은 중세 교회, 특별히 프랑스 교회에 위협이 되고 있던 알비겐파들(Albigensians)의 반(反) 성직, 반(反) 성례 교리들에 대항하기 위해 공식 채택되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는데는 두 세대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는데 그것이 공식화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두 대전(Summae) 에서였다.

미사와 그것에 수반되는 사제들의 기적은 사방에 있어 모든 중세 교회 체제의 기둥이 되었다. 병제(Concomitance)의 교리에 따라 평신도들로부터 성찬시에 잔을 박탈하게 되자 교회와 국가의 미묘한 역학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떠한 도전도 받지 않고 견고히 서 있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것의 성경적 타당성과 그것에 수반되는 측면들-일곱 가지의 성례제도, 면죄부, 공덕사상, 성자들의 기도 등등-에 대해 의심을 픔게 되면 교회와 국가에 의해 벌 떼 같은 공격을 받게 되었다.

14세기 말 화체설에 대항한 위클리프의 용감한 반대 운동은 당시 교황권이 약화되고 분열된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저지를 받았다. 심지어 성만찬을 개혁하려는 후스의 온건한 노력조차도 정죄를 받아 후스는 1415년 콘스탄스에서 순교 당해야 했던 것이다.

1517년 루터의 논문들이 이 성역을 문제 삼게 되었을 때 그리고 1520년에 그가 「교회의 바빌론 유수」를 통해 중세의 교회 체제에 결정적인 일격을 날렸을 때 억압적이고 비성경적인 교회의 중심 교리에 대한 비평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비평에 있어 상당히 온건했다. 그것은 그의 동반자인 스위스의 쯔빙글리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견해는 벽보의 선언문에 부분적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개혁파들이 수행했던 가장 필요하고 가장 위험한 비평 행동은 미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점이라는 것이다. 이 인기 있는 문서가 급속도로 유포되는 중에 그것의 저자들은 당장 여러 곳으로부터 반격을 받기 되었다. 이를테면 로버트 세노 같은 소르본느의 신학자는 그것이 프랑스에 나타난 이후 줄곧 루터주의를 진압하려고 애를 썼다(그러나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했다). 또한 고위직에 있는 카톨릭 인본주의자들은 왕과 함께 경고의 깃발을 쳐들었다. 왕은 자신의 정치적 계획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민중들은 미신적인 정통적 신념에서였든지 혹은 교회의 개혁에 흥미가 있어서였든지 그것에 반응을 보였다.


2. 칼빈의 세네카 주석(1532)-프란시스 1세이게 보낸 최초의 변증서인가?


칼빈이 복음적 그리스도인으로 중생한 것은 프랑스 역사가 이처럼 소용돌이치고 있던 때였다. 이제 우리는 그의 처음 살펴보기로 하자. 1532년 4월에 그는 최초의 저서를 출간했는데 그것은 「세네카 주석」(the Commentary on Seneca's De Clementia)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그의 종교적 순례의 첫 번째 발걸음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 인본주의자 주석과 그리스도인인 칼빈의 관계에 관해 쓰인 글들이 많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 있게 그것을 그의 신앙과 관련시켰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실상 거기에는 종교적인 언급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한 가지 난점은 칼빈의 신학적 견해가 절대 변하지 않았으며 그가 1559년의 「기독교 강요」최종판에서 기록한 내용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구별 없이 적용된다는 오래 묵은 인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의 신앙을 표현한 문헌들 전반에 걸쳐 일관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의 사상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변화되고 재고되고 개조되었다. 그의 「강요」의 주요한 다섯 개 개정판들을 잠시만 비교해 보더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직접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의 칼빈을 회심하기 전의 칼빈, 즉 세네카 주석을 썼을 때의 칼빈과 비교해 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1536년 판 강요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켜서 그것의 빛 속에서 세네카 주석을 고찰한다면 색다른 면모가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강요」는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저 유명한 편지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칼빈이 프랑스에 있는 개혁주의 동포들을 대신해서 1535년의 격랑기에 왕에게 보낸 유창한 호소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편지와 그 뒤에 나오는 신학 논문, 특별히 마지막 장은 프란시스에게 그리스도인 군주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관원들을 위한 거울”, “그리스도인 군주를 위한 교훈”등을 위한 이러한 연구는 16세기에 가장 흔했던 문학 장르들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 치고 자신들의 학자적 탁월성과 정치적 혜안을 군주들에게 과시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프란시스 1세에게는 길롬 뷰데(Guillaume Bude)가 있었고 필립에게는 에라스무스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국내의 혁명적 기운들과 타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의 위협이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겁을 집어먹은 통치자들의 억압적 폭정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민감하고 온건한 사람들은 정치적 처신의 모델을 찾기 위해 고대의 문헌들을 샅샅이 뒤지게 되었다.

로마 제국 역사를 통해 네로보다 더 악한 폭군은 없었지만 그가 황제로 즉위할 때에 즈음하여 그 보다 더 훌륭한 정치적, 도덕적 교훈들을 소유했던 황제도 없었다. 칼빈이 인문주의자들 사이에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또한 어쩌면 프란시스1세에게 올바른 통치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옛날 스토아 학자들 가운데 네로의 자문역을 담당했던 사람의 저술에 손을 대 보려 했다는 것은 있을 법 한 일이 아니겠는가? 최소한 이미 상당한 윤리적 민감성을 소유했던 명목적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마도 칼빈은 자신의 온건하고도 박식한 작은 주석이 왕의 주의를 끌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3. 칼빈의 신학적 순례의 첫 단계


우리는 이미 칼빈의 세네카 주석에는 뚜렷이 종교적인 교훈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 초기의 저서를 가지고서 칼빈의 회심을 논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주제를 취급하는 것이 심히 주저된다. 왜냐하면 이 주제는 많은 위대한 학자들을 곤혹케 한 문제이면서도 아직까지 이렇다할 해답을 얻지 못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한 칼빈 자신의 침묵, 그 자신의 저술들 속에 직접적인 자료들이 빈곤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생애 가운데 이 결정적 시기에 있어 그의 행적에 관해 우리가 가진 정보들 속에 있는 신비한 차이들로 인하여 그의 회심 일자를 정확히 계산하는 것은 불가은한 일이다. 존 맥네일(John T. McNill)은 아마도 그것이 1534년 4월 5일과 1534년 5월 4알 사이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것은 칼빈이 자시에게 주어지던 성직록(benefice)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그것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추측이다. 그러나 가장 최근의 학자인 카노지(Ganoczy)는 그 보다 더 늦은 연대를 주장한다. 다행히도 연대 추정은 우리의 목적을 위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의 회심의 내용과 구조가 중요할 따름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견고한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그의 회심에 관한 우리 지식의 원천들을 공식적으로 검토하기 전에 그의 세네카 주석 속에 있는 종교적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근본적으로, 그가 회심하기 직전에 세 가지의 종교적 질문이 이 젊은이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첫째는, 이교와 기독교 사이의 차이점, 더 광범위하게 말한다면, 미신과 진정한 종교의 차이점이다. 둘째는, 인간 영혼의 기원과 성격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통치에 관한 질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섭리적 틀 속에서 인간 권위의 위치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B. 칼빈의 회심의 내용과 성격에 관한 고찰

1. 문헌에 나타난 그의 현실

칼빈은 어디서 자기 자신의 회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가? 다소 후대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가장 주요한 저술들 가운데 하나인 그의 시편 주석에서 아주 간단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회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 1539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있는 복음주의적 평신도들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회심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추기경 사돌레(Sadolet)가 제네바 시를 향해 진정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호소를 한 것에 대한 칼빈의 유창한 반론 속에 나타나 있다.

추기경 사돌레는 제네바 시민들에게 향한 자신의 호소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있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했는데 거기서 한 충성스러운 카톨릭 교도는 자신의 마지막 신앙고백을 하는 반면 한 프로테스탄트 교도는 헛되이 마지막 호소를 하고 있다. 칼빈은 그것을 교묘하게 역전시킨다.

 

사돌레에 의해 묘사된 분리주의자들의 입장에서 그는 자신을 회심 후에, 오류에 대항해 투쟁하는 성직자로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이상이 칼빈의 회심에 관한 자료로 흔히 인용되는 두 개의 문헌이다. 나는 여기에다가 내가 “칼빈 신앙의 핵심”이라 부르는 것을 첨가시키고 싶다. 그것은 1536년 판 강요의 제 1장 처음 몇 페이지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아마도 「삐에르 로버트의 신약에 대한 서문」을 전체적으로 첨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독교 역사에 기록된 많은 위대한 회심들 속에는 그 체험의 “계기가 된” 어떤 특별한 성귀가 있다. 그처럼 권능 있는 본문들의 긴 목록을 열거할 필요 없이 루터에게 그러한 작용을 했던 로마서 1장 17절만 생각해도 충분한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칼빈에게는 그처럼 분명한 기록이 없다. 어떤 특정 구절이 칼빈을 그처럼 움직였는가 어떤가를 논하는 것은 아마도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도 바울의 로마서가 그의 기독교 신앙을 형성하고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의 신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구절이나 혹은 최소한 한 본문을 뽑아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물론 로마서 1장리 그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롬1:18-25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한 구절만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롬1:18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히도 아니한다”는 구절인 것이다. 혹은 아마도 롬1:21을 제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하는 것이다.

왜냐고? 칼빈의 경건의 중심 되는 면모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중심 되는 지식이다. 그것은 1536년 판에 처음으로 언급되었지만 1559년에는 그것이 그의 사상의 조직 원리가 되다시피 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요약하여 칼빈을 하나님의 탁월성 혹은 능력들(“virtutes")을 열거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역동적인 것이여서 속성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1536년판 강요의 1장 서두에 나타난 이 목록은 로마서 주석(1540) 1장 21절에 나타난 것들과 거의 동일하다. 로마서에 있는 동일한 본문은 칼빈의 「추기경 사돌레에 대한 답변」(1539) 속에서도 암시되어 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진정한 신앙 고백을 제시함으로써 사돌레가 자신의 편지 속에서 칼빈의 고백이라고 모함했던 그 거짓 고백을 대체하고자 했던 것이다. 칼빈은 그가 반발했던 그 거짓 신앙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은...실로 그분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부르지만 그들은 당신께서 당신의 위엄에 합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셨던 그 영광을 다른 것들에게 돌리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자기들이 경배하는 성자들만큼이나 많은 신들을 상상했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것에 대한 강조 이야말로 칼빈의 경건에 있어서 중심 되는 주제들인 것이다.

칼빈의 회심을 가능하게 한 성경적 근거를 보다 광범위하게 살펴보자. 루터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칼빈에게 있어서도 그의 신앙의 비결을 지탱해준 것은 시편과 로마서의 주옥같은 글들이다. 루터가 쓴 최초의 주석은 시편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의 두 번째 주석은 로마서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1517년의 체험이 있기 수년 전에 쓰여진 것들이지만 그 체험의 준비 단계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이 쓴 최초의 수적은 로마서 주석이었다. 사실상 「기독교 강요」 그 자체가 로마서 주석을 확대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의 시편 주석은 그보다 훨씬 뒤에 쓴 것이지만 그것은 가장 뚜렷이 개인적인 주석이다(때로는 다윗의 입을 빌어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를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것은 소문에서 칼빈의 회심에 대한 명백한 언급을 하고 있는 유일한 문헌이기도 하다. 동시에, 통계적으로 말하자면, 단순한 양이 종교적 작품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건 간에 로마서와 시편은 「강요」속에 종교적 작품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건 간에 로마서와 시편은 「강요」속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성경이기도 하다.

라틴어 최종판에서 로마서는 최소한 598번, 시편은 580번 인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칼빈이 시편을 ”영혼의 모든 부분을 해부한 것“으로 표현할 때 우리는 그가 시편에 얼마나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시편을 개혁교회의 찬송가로 삼고 있다. 루이 구마(Louis Goumaz)는 「강요」의 신학을 그의 주석들의 해석과 상호 관련시키는 틀을 제시하면서 칼빈의 회심에 있어서의 성경의 결정적 역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성경은 칼빈의 회심을 위한 도구였다...그 속에서 자신의 종교적 성품을 형성한 양식과 그의 인문주의적이고 법률적 정신에 공감되는 문서를 발견했다.”

2. 신학적으로 재조명해 본 그의 회심-구원의 역사

부처와 파렐의 격려를 얻은 칼빈의 사촌 삐에르 로버트는 1535년 2월 12일에 신약 성경을 불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끝마쳤고 1535년 6월 4일에 노이샤텔에서 그것을 출판했다. 칼빈은 그 책을 위한 두 개의 서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하나는 라틴어로, 하나는 불어로 된 서문이었다.

 

우리가 그의 회심 체험에 대한 신학적 재조명의 초고라 부르는 것은 불어로 된 서문이다. 1535년 1월경에 칼빈은 바젤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늦게 잡더라도 그 서문은 그 해 초로 연대를 잡아야만 한다. 그때 그는 모든 정력을 「기독교 강요」초판을 저술하거나 완성하는데 쏟고 있었다(그것은 1535년 8월 23일에 완성되어 1536년 3월에 출판되었다).

신약에 대한 서문은 인간의 역사에 대한 바울-어거스틴의 요약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인간의 창조...양심(이방인들)과 율법(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자비...계속적인 배도...구주의 오심...복음의 부르심이 그것이다. 이 서문은 왕들과 관원들과 주교들과 목사들에 대한 호소로 끝을 맺는다. 그들이 복음의 올바른 전파와 교회의 건전성을 지지하라는 호소인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칼빈의 회심에 대한 신학적 재조명으로서 이 짧은 논문의 중심 되는 부분은 우리가 “복음의 요청”이라 이름 붙인 부분이다. 칼빈의 사고 방식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 즉 그를 이끌어 철학자들의 지혜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도록 만든 그 통찰은 인간의 타락이 차지한 결정적 위치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의 지혜를 찬양하고 영혼에 대해 명상하는 철학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타락(강요1, 15, 8)은 연약한 인간의 지혜가 그리스도의 신적인 지혜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칼빈은 다른 곳에서 후자를 그리스도의 철학(Philosophia Christi)이라 불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을 주어 핍박의 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한 추구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약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의 표상이 수렴된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바라는 모든 것, 우리가 표현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모든 성경은 우리를 불러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한다.”

이처럼 복음을 읽음으로 칼빈은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모든 구원의 역사를 묵상하는 대로 나아간다. 그것은 모두 이 간단한 서문, 즉 자신의 회심에 대한 칼빈의 최초의 신학적 반성 속에 포함되어 있다. 칼빈이 왜 인문주의자로서의 경력을 포기했는가 하는데 대한 이유를 자기 자신의 말로 들어보자.

그리하여 진정한 경건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감각을 가지게 된 이후, 나는 갑자기 진보에의 커다란 욕망으로 불붙게 되었다.그리하여 비록 내가 다른 공부들을 전적으로 버리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훨씬 느슨한 태도로 그것들에 임하게 되었다.
[칼빈의 경건, p. 8]

칼빈의 회심 전체에 대한 신학적 재조명의 “제2탄”은 1535년 상반기 중에 불과 몇 주 혹은 몇 달 간격으로 제1탄을 뒤따라 나왔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칼빈 신앙의 핵심”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1536년 판 「강요」 제1장의 처음 아홉 페이지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신약에 대한 서문」과 동일한 기반 위에 서 있지만 그 강조점에 있어 보다 덜 성경적인 첫 번째 문서보다 훨씬 더 신학적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두 종류의 지식들”로 시작되어 율법-성문이든 불문이든-으로 옮겨갔다고 “다른 길”, 즉, 그리스도로 결론을 맺는다.

칼빈의 회심을 요약함에 있어 그 후의 모든 칼빈주의를 위해 중요한 구절이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살펴보거나 혹은 내 눈을 당신에게로 향할 적마다...

인간 정신의 이 두 가지 움직임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대조적인 지식, 오직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연결할 수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타락한 죄인 사이의 간격을 일깨워 준다. 칼빈은 자신의 회심을 통해 그 사실을 깊이 깨닫고 율법에 관한 자신의 비평을 담은 장의 처음 몇 페이지에서 그것을 집중된 형태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후에 출간된 「강요」의 개정판들은 이러한 사상들이 중보될 강요의 전체에 확산되어 일종의 중심 원리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 오직 여기에 칼빈의 종교적 체험에 대한 일관성 있는 신학적 요약 속에 그것들이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자비로우시며, 진실하시며, 능하시며, 살아 계시는 분이다. 모든 것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분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그는 인자하시며 온유하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의 조상인 아담은 모든 덕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가 타락하여 죄에 빠짐으로 그 형상은 지워지고 말소되었다. 그는 모든 덕을 박탈당하고 대신에 그것에 상응하는 악들을 가지게 되었다. 아담에게서 태어난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어 그의 뜻을 행하기에 무력하며 영원한 죽음을 받기에 합당하다.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자비로우신 아버지는 율법을 가져다주신다. 기록되지 않은 율법을 양심에 주시고 다음에는 기록된 율법을 주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우리가 그분에게 빚지고 있는 것에 대한 증인을 주셨다. 그것은 양심인데 마음에 새겨진 율법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자기 사랑에 의해 눈이 가리워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의에 이르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기록된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는 고로 우리는 여전히 영원한 죽음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이와 같은 두 번째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한 자비로 또 다른 길을 제시하신다. 절망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영역에서 도움을 찾아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 힘으로 얻을 수 없는 선물들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선물을 받기 위해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아야만 한다. 그분은 통해서만 아버지 안에 있는 영원한 축복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약은 칼빈의 신선한 상경 연구의 결과일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통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바쳐진 깊은 신앙의 고백이 있으며 또한 여기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주석과 설교와 종교개혁을 위한 k방면의 활동들의 원천이 있는 것이다.

Ⅱ. 기독교 강요 초판(1536년)

A. 교리문답서인가 혹은 변증서인가?

1. 원래의 의도는 교리문답서

칼빈이 회심한 후 새로운 성경연구에 착수했을 때 즉시 그가 직면한 임무는 참된 신앙을 갈구하는 자들을 지도해야 하는 것이었다. 참 교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별반 경험 없는 자신에게로 모여들자, 그는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서도 나를 조용히 있도록 두지 않으신다”고 결론지었다.

프랑스에서 행한 그의 초기 설교에 대해서는 자료의 불충분 때문에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없으나, 그의 마음이 훌륭한 교리 문답서를 작성해야 할 필요성에 쏠려있었음은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1535년과 1536년 초기 사이 바젤에서의 짧은 체류 기간에 자신의 신학적 연구의 첫 결심을 저술했다. 책의 긴 부제가 그 내력을 나타내 준다: “기독교 강요, 구원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제반 사항과 경건의 개요를 거의 망라하였다. 경건에 열심히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저서이다... .”

칼빈이 고안한 교리문답서 중 어느 만큼을 문서화했는가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일치된 견해가 없으며, 또 이 문제는 여기서의 당면문제가 아니다.

프랑스의 개혁주의적 전통에서 교리문답서 저술가는 칼빈 이전에는 드물었다. 루터의 책을 번역한 것 이외에 불어로 된 것으로는 기욤 파렐(Guill aunme Farel)과 프란시스 랑베르(Francis Lambert)의 개요서들이 있었다. 파렐의 저서는 바젤의 개혁주의자 외코람파디우스(Oecolampadius)의 권유로 1525년 바젤에서 초판된 후, 재판을 거듭했다. 두 번째인 랑베르의 책은 1529년에 저술되었다.

그러나 파렐의 저서가 불어판 개혁신앙 문답서의 효시이며, 칼빈의 신학적 입장이나 관심을 도일하게 내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저작은 문체나 구성이나 내용 어느 것에서도 파렐의 것과 유사한 점이 없다. 칼빈은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서한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저술 의도를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오로지 본인의 목적은 종교적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확실한 기본원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간단하고 초보적인 교리의 형태로...

이것이 칼빈이 교리문답서를 만들려던 의도였다. 그가 박해받는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위하여 외국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려고 당시 공용어인 라틴어로 썼기는 했으나, 분명히 동포들에게 적합하도록 불어판을 속간할 작정이었다. 현존하는 기독교강요의 첫 불어판은 1541년에 출판되었다. 이것은 1539년의 라틴어 제2판을 번역한 것으로서, 제네바에서의 목회 경험을 살려서 저술한 질의. 응답식의 교리문답서였다.

2. 기독교강요가 변중서로 되다.

그러나 간단한 교리문답서를 만들려던 계획은 뜻대로 될 수 없었다. 이 의도를 변경시킨 학살사건의 중심에는 매우 기독교적인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기에는 기존의 교회 내에서 정화운동을 하려는 온건한 노력에서부터 사회의 전 구조를 공격하는 급진적인 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운동이 분출되었다. 그러나 온건과 과격을 엄밀히 분류하기란 사실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 1세는 당시 프랑스에서 발홍 하고 있었던 모든 혁신적인 경향이 국가와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적인 것이라고 단정하는 소르본으 대학 측의 견해에 동의했다. 이간을 숙청함으로써 자국 내에 거주하는 독일인 개신교도들에 대한 처리문제로 외교상의 난처함에 봉착하더라도, 정책적으로 모든 문제를 국가의 안전과 연관된 문제로 상정하고, 프랑스의 복음주의자들과 외국의 복음주의자들을 격리시키고자 했다.

이런 방안의 지지자들은 프랑스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을 재세례파로 몰아 부치거나, 무식한 오합지졸로 보았다. 또는 그들의 운동은 국가의 내적 질서에 대항하는 무정부적 행동과 반란으로 정죄 했는데, 이 관점은 프란시스 1세가 독일 개신교도 군주에게 보낸 각서에 잘 나타나 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독일 개신교도 군주에게 보낸 각서에 잘 나타나 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독일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재세례파와 똑같아서 선동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이 각서는 독일인들의 염려나 불안을 진정시키기보다는, 프랑스의 온전한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급진적 개혁가들로부터 신학적. 정치적으로 자진 이탈하여 여타의 동료들과 구분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면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은 더 급진적인 복음주의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해 칼빈은 두 가지 형태로 응답하였다. 먼저 그는 1534-5년에 써서 1542년에 출간한 <사이코파키니아, Psychopannychia>에서 가장 위험스런 국면의 신학적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 다음에 더욱 포괄적인 저술 작업을 하여 1536년에 기독교강요를 펴냈다. 이 두 저서를 차례로 살펴보자.

칼빈은 자신의 첫 신학적 논문인 <사이코파니키아>의 주제로서, 죽음으로 인해 야기되는 영혼과 육체의 문제를 택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죽음과 마지막 부활 사이에 영혼은 잠들어 있거나 죽는다고 하는 교리의 신봉자들이 많았다. 따라서 칼빈은 이 잘못된 교리로부터 동포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 프랑스의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은 이 이단적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카톨릭교도들에게 확증시키기 위하여 이 교리를 반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같은 카톨릭교리를 거부하는 것이 압제적인 면죄부제도를 극복하는 열쇠이듯이, 영혼불멸설을 표방하는 것은 영혼사멸설을 주장하는 광신적 경향으로부터 복음주의자들을 구별짓는 필수요건이었다. 그리고 칼빈은 영혼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이 영혼불멸교리의 신학적 전제로 삼았다. 하나님께서는 향존하시듯이, 그 형상인 영혼 역시 잠시라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이코파키니아> 자체는 몇 단계를 거쳐서 저술되었다.

 

초고는 1534년 오를레앙에서 익명의 친구에게 헌정한다는 서문을 담고 있다. 이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글이 교회의 통일성과 사랑을 교란시킨다는 오해를 받게 될 것임을 내다보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통일이 있으며, 사랑을 유지하는 관건은 신앙을 신성하고 순전하게 보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해에 그는 초고를 복사하여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개혁주의자 볼프강 카피토(Wolfgana Capito)에게 보내어 출판 여부를 문의했다.

 

1534년 말에 칼빈에게 보낸 답장에서 카피토는, 종교분쟁이 들끓고 있는 때인 만큼 이 논문은 접어두고 건설적인 성경 주석을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다고 제안했다. 칼빈은 <사이코파니키아>에 대한 카피토의 충고를 받아들였다(기독교강요를 완성한 후 1535년 바젤에서 이 논문을 개정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칼빈은 자신과 동포들이 프랑스의 정치 질서를 파괴하고자 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문인 프랑스 왕에게 보내는 헌사에서, 원래는 교리문답서를 작성할 의도였음을 시사한 후, 그는 제2의 목적을 추가하게 된 까닭을 직접적이고도 열정적으로 피력했다. 여기에서 그는 사악한 무리들의 횡포에 직면하여 그들에게 건전한 교리의 본질을 가르쳐 교훈 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시편 주석에서도 더욱 날카로운 어조로 동일한 내용을 서술했다. 그러므로 칼빈으로 하여금 그 유명한 기독교강요를 쓰게 한 동기는 두 가지였다. 즉 신앙의 형제들을 위한 교리문답서의 필요성과 박해를 중단하도록 하기 위해 형제들의 실상을 왕에게 탄원해 알려야 하는 필요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목적 때문에 칼빈은 이중의 신학적 대응자세를 취했다.

 

제도화된 로마 카톨릭을 거부함과 동시에 극단적 분파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칼빈의 향후 신학의 행로가 결정되었다. 그것은 좌단과 우단 사이의 중도를 견지하는 것으로써, 현명한 절충이 아니라 독자적인 성경연구에 근거한 확신이었다. 이후 그의 신학체계상의 발전은 이 초기의 경향을 확대하고 완성해 가는 것이었다.

B.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헌사

1. 기독교 변증들 가운데 하나

그 초창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와 유대인의 배척 그리고 이단의 위험에 부딪혔을 때, 교부들은 기독교를 위한 변증서들을 저술하여서 신학에 창조적 자극을 주었다. 또한 변증가들은 로마의 국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불복종은 정치적 반동심이나 전복의지가 아니라, 창요적 특색일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여야 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고대 철학의 모조품이라고 하는 비방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오히려 후대에 파생된 이교들의 원형임을 증명했다.

 

칼빈 역시 초대교회시대의 변증가들 처럼, 변증적 노력으로써 실제로 신앙을 새롭게 종합하였다. 자신이 체계화한 신앙을 신종(新種)이라고 하는 소르본느대학 신학자들의 악평에 대하여 그는 이것이 진정한 사도적 메시지이며, 그들의 신학이야말로 말기적 변종이하고 주장했다.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은 군주정체를 전복하고자 획책한다고 하는 트집에 대해서는 복음주의의 정치적 충절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프란시스Ⅰ세에게 보내는 서한은 저스틴과 터툴리안, 오리겐, 그리고 유세비우스의 변증서들과 나란히 둘 수 있는 것이다.

2. 헌사의 내용

서한의 구성을 살펴보자. 칼빈이 처음에는 단락을 나누지 않았으나, 1559년 판에 따라서 여덟 부분으로 나룰 수 있다.
(1) “본서를 쓰게 된 배경”으로서, 두 가지의 저술 목적을 기술한 후, 왕의 관심을 촉구한다.
(2) 박해받는 복음주의자들을 위하여 탄원한다.
(3) 카톨릭교도들이 개혁신앙을 비난하는 네 가지-새로운 것, 미지의 것, 불확실한 것, 기적에 의해 확증되지 않은 것- 반론에 대해 논박한다.
(5) 교회론에 대한 카톨릭의 오류들을 열거하고, 교회의 본질을 논증한다.
(6)그러면 교회는 어디서 발견되는가? 카톨릭교회가 자기들만이 참 교회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칼빈은 순수한 설교와 합법적 성례의 바울적 표지를 주장한다.
(7) 복음전파로 인해 소란과 변혁이 일어났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답변한다.
(8) 마지막으로 칼빈은 자신의 호소가 실제로 왕에게 전달되거나 왕을 움직일 가망성을 재어 본다.

기독교강요의 맨 끝에서도 세상의 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사람에게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이것이 기독교강요의 “정치적 뼈대”이다. 요컨대, 본서는 서로 대립되는 종교적 두 경향들, 즉 복음주의 신앙과 로마 카톨릭의 교리 및 관례 사이의 긴장, 그리고 복음주의자들과 극단주의자들 사이의 신장 가운데서 형성되었다. 이제 1536년 판에 실린 여섯 장들을 살펴보자.

C. “교리문답식” 장들(1-5장)의 분석

중세 말시의 문답식 문헌의 관례에 따라서 칼빈도 기독교강요를 십계명(1장), 사도신경(2장), 주기도문(3장), 성례(4장)의 순서로 구성하여 설명했다. 여기에 카톨릭의 미사에 대한 논박을 추가하고(4장 끝부분), 소위 다섯 가지 하는 “거짓 성례”를 부정했다(5장). 마지막 장에서는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의 권능, 그리고 정치적 권력에 관한 논문들을 실었다.

1. 1장: 율법에 관하여. 십계명을 해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제 3.4.5.10계명은 적용하거나 실례를 들어서 더 충분히 논의하고, 나머지 계명들은 간략하게 의역하고 있다. 결론부 에서는 율법의 효과와 칭의 문제로 연결시킨다.

2. 2장:믿음에 관하여. 이 장은 후속판들에서는 주로 빠졌는데, 믿음의 본질과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 논문, 사도신경의 해설,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의 관계에 관한 부분으로 짜여졌다. 로마 카톨릭교도들과 재세례파와 반(反)삼위일체론자들에 대한 강한 대비가 장 전체에 걸쳐 있다.

3. 3장:기도에 관하여. 이 장은 마틴 부쳐(Martrn Buccer)의 <복음서 주석, 1530>에 크게 힘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전체의 대조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수다한 인간 중재자 사이의 대조이다. 전반적으로 카톨릭 예배의 허구와 복음주의 예배의 순수성 사이에 있는 일반적인 대조 점들이 다루어졌다.

4. 4장:성례에 관하여. 이 장은 네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세 단락은 1559년 판의 성례장의 순서(4. 14-18)와 대개 일치한다. 먼저 성례를 개괄적으로 다루고, 세례와 성찬 그리고 결론부로서 두 가지 주(主)의 성례의 집행을 짤막하게 논의한다. 성례 전반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쯔빙글리와 카톨릭의 견해 중간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성례를 믿음의 증서에 찍힌 “봉인들”이라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박약한 이해력을 고려하셔서 조정하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세례에 관해서는 재세례파와 도나투스파적인 주장 킻 카톨릭의 견해를 모두 반박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상징이며 표식”이라고 하는 쯔빙글리식의 견해를 암시하고 있다. 한편 성찬에 관한 논의에서는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첫째로 그것은 성찬에 대해 그 때까지 있었던 무수한 논점들을 섭렵하여 나름대로 소화했음을 보여준다. 둘째로는, 미해결의 문제들을 오랫동안 토론해 온 것처럼 곧바로 논쟁에 들어간다. 셋째로, 칼빈은 다양한 분파들을 잘 알고 있으므로, 별도의 더 충분한 신학적 논쟁을 앞질러간다.

성찬에 대한 기존의 두 이견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성례의 존엄성을 지나치게 찬양하면 미신에 빠지기 쉬우며, 반대로 성례의 가치와 유익을 냉랭하고 시시하게 다루면 성례를 경멸하게 된다. 칼빈이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성찬에 대한 논쟁을 야기 시킨 주 원인은 사람들이 잘못된 관점으로 의문을 품은 데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가?”라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것으로 되는가?”라고 의문했어야 했다. 그는 미사숭배를 거부하며, 완전한 속죄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재세례파나 카톨릭식의 고행 또한 거부한다.

 

그리고 쯔빙글리의 합리적인 축소론(the rationalistic reductionosm)에는 반대하지만, 실제적 현현과는 달리 영화롭게된 몸의 축약이라는 의견에는 찬성한다. 칼빈은 천상과 지상 사이에 있는 무한한 심연을 기이하게 연결한 이 하나님의 능력의 편재를 “마치” 육체적 현현인 것 “처럼” 받아들인다. 성례는 단순히 믿음과는 별개인 표적도 아니며, 성례 자체가 믿음의 역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믿음과 성례는 협력한다. 이러한 논거는 칼빈 당대나 이전의 신학적 주장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의 근저에는 신학과 기독론상의 상이점이 내포되어 있다. 칼빈은 신자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어떤 신학적 견해나 예배의 관례를 거부하는 강한 목회적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올바른 성례의 집행에 관해 논의한다. 성례 신학과 관례상의 정오(正誤)를 갈기는 시금석은 성경의 권위인 것이다.

5. 5장: 다섯 거짓 성례에 관하여. 이 장은 후속판들에서도 거의 전부 수록되었다. 물론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성례론과 의식들을 비판하는 데 주력한다. 시헹 중인 각 “성사”의 전거를 조사한 후, 그것의 실제 내력과 올바른 지침을 가르쳐 준다. 견진례와 종부성사, 혼인성사에 관해서는 간략하게 논의하고, 고해성사와 신품성사는 길게 다룬다. 이 장과 6장의 중간부인 교회의 권능 편에서 칼빈은 중세 교회체계의 토대를 핵심적으로 상세하게 논파한다.

D. 6장: 프란시스Ⅰ세에게 보내는 서한의 결론인가?

1. 개괄적인 고찰

프란시스Ⅰ세에 대한 헌사와 1536년의 기독교강요의 최종 장을 비교해 보면, 이 장이 왕에 대한 탄원의 사실상의 결론임을 알 수 있다. 1-5장은 칼빈의 원래의 의도대로 근본적으로 교리문답서이나, 세 단락으로 구성된 6장은 특별히 왕에 대한 호소와 관련된 것이다. 첫 단락인 ‘기독교인의 자유’에서는, 이 자유가 세속적 영역이 아닌 영적 영역에 속한 것임을 성경의 근거를 들어서 설명한다. 둘째, ‘교회의 권능’부분에서 칼빈은, 인간이 고안한 교회법과 관습은 이 자유를 침해하므로 거부하며, 또 카톨릭의 제도가 세속 권력의 일부분까지 탈취하였다는 사실을 왕에게 논증해 보이고자 한다.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자기 영내를 다스리는 세상 군주라는 두 왕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권세와 관련된 세 번째 부분인 ‘세상정치’에서는,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충성, 그리고 재세례파의 잘못된 견해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전적인 거부를 왕에게 확신시키며, 궁극적인 영적 결정권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6장에서 칼빈은 특히 프란시스 왕에게 복음주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또 소르본느대학 신학자들의 악영향으로부터 왕을 분리시키기 위해 그들의 신학을 반박한다.

2. 세부적인 내용
A. 기독교인의 자유

자유의 문제는 6장의 중심적 주제라고도 할 수 있다. 전장에 걸쳐서 칼빈은 법률조항을 계속 늘려가는 것과 법은 모두 거부하는 것 사이의 중도적 방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불법적인 규제에 묶이지 않음과 동시에 무질서한 방종으로 치닫지도 않는 영적 자유를 변론한다. 기독교인의 자유는 세 가지를 의미한다. 법으로부터의 자유, 법의 강제가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양심의 자유, 그리고 “아무래도 좋은 것들”에 대해 처신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연약한 형제나 이웃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절제하며 사용해야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인습으로부터의 자유를 언급하는 가운데서 영적 통치와 세속적 정치적인 통치를 구분하였고, 이로써 ‘기독교인의 자유’부분은 두 왕국에 대한 논의의 서론 격이 되는 셈이다.
B. 교회의 권능

교회의 규율에 대한 칼빈의 관점은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급진적 재세례파나 무조건 수용하는 카톨릭교도들의 관점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 그는 주로 카톨릭의 주장에 대해 성경적. 역사적 반증들을 제시하면서 반박한다.

C. 세상정치

본서의 마지막 주제인 ‘세상정치’에서는 재세례파를 훨씬 더 현저하게 다룬다. 이 종결부를 보면, 칼빈은 프랑스의 충성스런 복음주의자들의 신앙이 어떤 것이며, 또 군주로서 직무상 처신하는 방법을 프랑스 왕에게 가르치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는 먼저 세상 정치의 필요성을 논의한다. 이미 언급하였던 영혼과 육체에 관한 재세례파의 오류는 정치적 영역의 구별은 모두 동일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칼빈이 참 신앙을 확립하고 보호하는 것이 세속 권위의 역할이라고 했을 때, 이는 모든 통치체제를 거부하는 재세례파와 또 이 역할을 횡령하는 카톨릭을 의식하고 기술한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 자신이나 제네바 시(市)의 문제에 있어서나 그는 정교하게 교회가 정부의 균형을 유지시켰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세상 정치를 다루는 둘째 항은 ‘관원’과 ‘법률’과 ‘백성’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가 관원들을 지칭하여 “신 같은” 지배자들이라고 한 것을 보면 놀라운 일이지만, 한편으로 관원에 대해 고도의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그에게 “통치하는 권위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성스런 소명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소명 가운데서도 가장 영예로운 것이다.” 기독교의 교리와 경건에 이반하여 이 거룩한 일꾼을 대적하는 혁명분자들은 바로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다. 칼빈은 재세례파의 잘못된 성경의 유추 및 적용을 분석하면서, 관원과 법률과 백성의 상호작용을 구별하는 근본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뒷부분을 채운다. 관원의 임무는 공공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임무 수행을 위해 합법적인 사형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올바르게 지도하려면, 과도하게 엄격하지도 않으며 관대함을 과장하지도 않아야 한다. 왕은 분노나 탐욕을 조절해야 하는데, 국고는 “대개가 바로 백성들의 피”이기 때문이다. 세상 정치와 법률 편에는 <세네카 주석 Seneca Commentary>의 내용과 유사한 것이 많다. 이것은 칼빈이 이 주제들에 대한 정통적 견해를 복음주의적 견지에서 재정립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법률 편에서는 먼저 일부의 과장된 견해를 논박한 후, 그 대안으로써 유명한 구분을 제시한다.

 

도덕법과 의식법, 그리고 재판법의 세 층이다. 도덕법은 자연법과 양심의 법을 천명한 것이며, 의식법은 1장, 5장, 6장 2부에서 이미 다루었기 때문에, 재판법을 주로 설명한다. 공정이 모든 법률의 목표요 한계이다. 최후의 주제는 백성인데, 관원과 법률은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의 지나친 소송욕과 재세례파의 재판 경시의 두 극단적 예를 든 후, 하나님께서 주신 관원과 법정을 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위하여 공정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라고 권면한다.

 

기독교강요의 말리에서 칼빈은 신민이 군주에게 어떻게 복종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언급한다. 여기서 그는 프란시스Ⅰ세와 자기 동포들에게 동시에 말하고 있다. 관원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므로, 그가 어떠하든지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사악하거나 압제하는 지배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보복하신다. 그러나 결국 칼빈은 프란시스Ⅰ세와 박해받고 있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진정한 왕은 오직 한 분뿐임을 상기시킨다. 지배자에 대한 복종 때문에 하나님께 불복종하게 되는 경우라면, 그 때 “우리는 마땅히 사람에게보다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 책의 마지막 몇 줄은 헌사의 종결부를 배반향시키고 증폭시키고 있다.

헌 사

지극히 위대하시고 지극히 영명하시며 지극히 기독교적인 프랑스의 왕 프란시tm 폐하에게 존 칼빈은 주안에서 평강과 문안을 드립니다.

1. 이 책이 쓰여진 배경

지극히 영광스런 왕이시여, 제가 처음 이 저술에 손을 댔을 때 폐하에게 바쳐질 어떤 것을 쓴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던 일이었습니다. 나의 목적은 단지 어떤 기초적인 사실들을 전달함으로 그것에 의해 종교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특별히 우리 프랑스 사람들을 위하여 이 일에 착수하였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제가 보기에 그리스도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리스도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라도 가지고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 책 자체도 그것이 나의 의도였다는 것을 증거하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가르침의 형태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악한 사람들의 격노가 당신의 영토에서 너무나 멀리 파급되었기 때문에 건전한 교리가 발붙일 장소가 없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만일 내가 가르치기에 착수한 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동시에 폐하 앞에 신앙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것으로부터 폐하는 오늘날 칼과 불로써 폐하의 영토를 교란시키는 저 미친 사람들이 불같은 성화로 반대하고 있는 교리의 속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저는 그들이 투옥, 추방, 재산 몰수, 그리고 화형에 처해야 하며 육지와 바다에서 박멸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바로 그 교리의 대부분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주저 없이 고백하는 바입니다.

정말이지 너는 그들이 우리의 명분을 당신에게 가능한 한 혐오스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끔찍한 보고서들로써 당신의 귀와 마음을 가득 채웠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자비하심에 합당하게, 만일 단순히 고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면 말로나 행위로나 무죄한 자가 남아 있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당신은 고려해야만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증소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이 교리 즉 제가 지금 당신에게 말씀드리려 하고 있는 내용이 오래 전부터 모든 계층의 표결에 의하여 결정되었으며 많은 법정의 판결에 의하여 대적들의 맹종과 능력에 의해 격렬한 배척을 받아 왔으며 부분적으로 그들의 허위, 트집, 중상에 의해 날치기로 또한 음흉하게 억압을 받아 왔다는 것을 말할 뿐일 것입니다. 한번 들어보지도 않고 기 교리에 대하여 피비린내 나는 선고를 내리는 것은 순전한 폭력인 것입니다. 부당하게도 그것을 반역과 악행으로 고발하는 것은 사기인 것입니다.

지극히 존귀한 왕이시여, 아무도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불평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중상 모략들이 매일 당신 앞에 고해지고 있는지 당신은 증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이 교리가 모든 질서와 시민의 정부를 전복하고 평화를 깨뜨리고 모든 법률을 폐기하고 모든 신분과 재산을 박탈하려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려는 것 외에 어떤 다른 목적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은 고발의 극히 적은 일부만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끔찍한 소문들이 널리 유포되고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그 교리와 그것을 만든 자들은 수천 번 화형과 십자가형을 당해 마땅하다고 세상은 판단할 것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사악한 비난들이 믿기워지고 있는 때에 그 교리에 대한 일반의 증오심이 일고 있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협력해서 우리와 우리의 교리를 정죄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재판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자기들이 집에서 가져온 편견들을 판결로서 선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신의 고백에 의해서나 혹은 확실한 증언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사람을 아무도 처벌하지 않는다면 자기들의 직무를 완전히 유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슨 죄에 대해서 입니까? 이 정죄된 교리에 대해서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무슨 권리고 그것이 정죄 되었습니까? 이제 그들의 변호의 핵심은 바로 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심지어 속삭일 수 있는 권리조차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2. 박해받는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탄원

이러한 이유로 인해, 무적의 왕이시여, 저는 정당하게 당신에게 이 송사를 충분히 심리해 주시기를 청원하는 바입니다. 이 송사는 지금까지 적법한 절차 없이, 사법적 엄숙함보다는 폭력적인 열기에 의해 취급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서 개인적인 변호를 함으로써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비록 제가 저의 조국을 지극히 사랑하는 인지상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 속에서는 추방되어 있는 것이 크게 유감스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모든 신자들의 공통된 주장, 즉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을 기꺼이 붙들고자 합니다.

 

이 주장은 현재 폐하의 왕국에서 완전히 짓밟히고 철저하게 버림받은 상태에 놓여 있는데 그것은 폐하의 승인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바리새인들의 폭정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주장이 수난을 받고 있다는 그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경건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크게 득세를 해서 그리스도의 진리가 추방되고 흩어져서 비록 소멸까지는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가려져 있고 묻혀져 있으며 빛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련한 교회는 잔인한 살육에 의해 피폐되거나 혹은 추방을 당해 유배 중에 있거나 혹은 협박과 공갈에 압도당하여 감히 입도 열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경건한 자들은 광분해서 이미 기울어 가고 있는 벽을 강타하고 그들이 악착같이 추구하고 있는 박멸 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무도 그러한 광분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키고자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무지한 자들의 오류와 경솔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온건한 사람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오류와 경솔을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진리라 부르고 있으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지혜의 신비를 부여해 주시지 못할 만큼 야비한 자들은 아니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현명하신 왕이시여, 그처럼 정당한 변론에 대해 당신의 귀나 마음을 닫아버리지 않는 것이 당신을 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아주 중요한 문제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땅위에서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진리가 어떻게 그 영예로운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왕국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에서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걸려 있을 때에는 말입니다. 실로 이 문제는 당신이 듣고 인지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당신의 왕관의 영광에 어울리는 일입니다. 정말이지 이러한 생각이 진정한 왕을 만드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왕국을 통치하는데 있어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식하는 것 말입니다(롬13:3).

만일 자기의 왕국을 통치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왕이 있다면 그는 왕의 법도를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산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왕국이 하나님의 홀, 즉 그의 거룩한 말씀에 의해 통치되고 있지 않는데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번영하기를 바라는 자는 스스로 속고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이 없으면 백성이 흩어진다”(잠29:18, 한글 성경에는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로 번역되어 있음: 역자주)고 선포하는 하늘의 음성은 거짓말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비천함에 대한 경멸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러한 노력을 단념하도록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천하고 낮은 미미한 존재들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물론 비참한 죄인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도 우리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고전4:13 참조)이거나 혹은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천한 것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는 그의 자비 외에 자랑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으며(고후10:17-18참조) 그것에 의해 우리는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공로는 전혀 없이 말입니다(딛3:5참조).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라고는 우리의 연약함뿐인데(고후11:30; 12:5, 9참조) 그들에세 있어서는 단지 고개짓으로 인정하는 것 조차도 커다란 불명예기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리는 기가 꺾임이 없이 세상의 모든 영광과 능력들 위에 우뚝 솟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왕으로 삼으셔서 “바다에서 바다까지 그리고 강들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시 72:8; 71:7, 벌게이트역) 그리하여 그는 그 철과 놋 같은 힘으로, 그 금은 같은 광채로 전세계를 쳐서 그 입의 막대기로 마치 토기를 부스러뜨리듯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그의 통치의 장엄함에 관해 예언했던 것처럼 말입니다(단2:32-35; 사11:4; 시2:9종합). 사실 우리의 대적들은 우리가 거짓되이 하나님의 말씀을 핑계삼아 사악하게도 그것을 더럽힌다고 소리칩니다. 폐하께서 소유하신 분별력을 발휘해서 우리의 고백을 읽어보시면 그것이 얼마나 악의에 찬 무고이며 파렴치한 말들인지를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당신의 열심과 주위를 끌기 위해, 혹은 최소한 당신께서 우리의 고백을 읽을 수 있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 어떤 것을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바울이 모든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롬12:6), 그는 성경의 모든 해석을 시험하는 아주 명백한 규칙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제 만일 우리의 해석이 이 믿음의 규칙에 의해 평가된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옷을 입기 위해 우리는 미덕이 전혀 없는 벌거숭이이며, 하나님에 의해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는 죄의 종들이며, 그분에 의해 비췸을 얻기 위해 눈먼 자이며 그분에 희애 교정을 받기 위해 절름발이이며, 그분에 의해 지탱되기 위해 약한 자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모든 영광 돌릴 기회를 제거하여 그분 홀로 영광스럽게 부각되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영화로워하는 것보다 더 잘 부합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고전1:31; 고후10:17 참조)? 우리가 이러한 것들이나 이와 유사한 것들을 말하면 우리의 대적들은 참견을 하면서 불평하기를 이런 식으로 우리가 자연의 맹목적인 빛과 가상의 준비들과 자유 의지와 영원한 구원을 받을 만한 공로가 있는 행위들, 심지어 그들의 적선을 통한 구원까지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찬송과 영광, 덕, 의, 그리고 지혜가 하나님에게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생수의 샘물을 너무 많이 마셨다고 책망 들었다는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요4:14). 오히려 “자신들을 위하여 웅덩이를 팠는데 물을 저장할 수 없는 터정 웅덩이를 판” 사람들이 심하게 책망 받았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입니다(렘2:13).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형제요 구속자로 인식되는 곳에서 하나님이 구속해 주시는 아버지가 되심을 확신하는 것보다도 더 믿음에 가깝고 좋은 것이 아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롬8:32) 그분으로부터 모든 행복하고 성공적인 것을 자신 있게 기대하는 것 보다 더 좋고 믿음에 가까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그들은 우리를 공격하면서 소리치기를 그러한 확실한 신뢰는 교만과 자만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자랑해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안에서 자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외에는 허세를 극복할 방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고후 10:17; 고전1:31; 렘9:23-24참조).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왕이시여, 우리가 주장을 전체적으로 간단히 검토해 보시고 만일 “우리가 수고하고 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두기”(딤전4:10) 때문이며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요17:3)임을 믿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분명히 발견하실 수 없거든 우리를 사악한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사악한 자들로 여기십시오.

 

이러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곤장을 맞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조롱을 당하면서 끌려 다니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추방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도망을 다녀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난에 찌들리고 무서운 저주를 받고 중상모략을 받기도 하고, 가장 치욕스러운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대적들을 보십시오(나는 사지들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시와 의도에 따라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적대적인 행위를 일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잠시동안 어떠한 열심히 그들은 움직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종교를 등한히 하고 멸시하도록 즉각 허용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에서 전수되어 내려오는 것이며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인정받는 자리를 차지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무슨 신념을 견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떤 신념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그가(그들이 일컫는 바) 맹목적 신앙으로 자기의 마음을 교회의 판단에 맡기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명백한 불경에 의해 더렵혀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도 그들에게는 별로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교황청의 수위성과 거룩한 어머니 되시는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여 손가락을 드는 자만 없다면 말입니다. 왜 그들은 미사, 연옥, 성지순례 따위의 시시한 문제들을 위해서 그토록 모질고 독하게 투쟁하는 것입니까?

 

아주 분명한 신앙이 없이는 그러한 것들 속에 참된 경건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말입니다. 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저희 신은 배요”(빌3:19) 저희 부엌이 저희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제거된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심지어 사람도 아니라고 믿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는 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겨우 부스러기만을 씹고 있다 할지라고 역시 그들 모두는 한 솥의 밥을 먹고 있으며 그 솥은 그러한 연료가 없으면 단지 식을 뿐 아니라 점점 얼어붙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자기 배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진 자가 자기 신앙을 위한 가장 열성적인 옹호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모든 사람이 한가지 목표를 향해 진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지배권을 보존하거나 혹은 자기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진지한 열심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3.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한 논박-새로운 것, 불확실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과 기적들의 가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의 교리를 공격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비난하며 거기에 온갖 이름을 붙여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그것이 증오와 의심의 대상이 되게 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새롭고” 또 “최근에 생성된” 것으로 부릅니다. 그들은 그것을 “의심스럽고 불확실한”것으로 비난합니다. 그들은 그것이 무슨 기적에 의해 뒷받침 되는가를 묻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그토록 많은 거룩한 교구들의 동의와 아주 오래된 전통에 대항하여 전통을 부정해 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고 묻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교회에 대항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종파 분리의 죄를 범하는 것임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도무지 그런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던 수세기 동안 교회가 죽어 있었던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인정하라고 우리를 몰아 칩니다. 드디어 그들은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것은 열매에 의해서 정체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 종파들과 아주 많은 불온한 소란들과 터다란 무질서를 낳았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실로 그들이 속기 잘하고 무지한 대중들 앞에서 버림받은 주장을 매도하기란 극히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도 말할 기회를 얻에 된다면 방종하고도 낯두껍게 거리낌없이 쏟아 붓는 이 비난들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먼저, 그것을 “새로운”것이라 부름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 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새로운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새롭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도 가의 복음도 다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는 바울의 설교가 고대의 것임을 나는 사람은 우리에게서 아무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알려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던 것은 인간의 불경건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우리가 그것을 되찾았으므로 그것이 오랜 약사를 가진 것이라는 주장이 마땅히 인정되어야 합니다. 동일한 무지가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으로 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께서 자기의 선지자를 통해 탄식하신 것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그것의 불확실성을 조롱할지라도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의 파로써, 또한 그들 자신의 생명의 대가로 그들의 교리를 인쳐야 한다면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적을 요구함으로써 부정직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복음을 날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확정해 주고 있는 진리의 복음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비교할 때 그들은 이상한 능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의 신앙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의 신앙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온했을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기적을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그것들이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호는 기적에 의해서든지 혹은 사물들의 자연적 질서에 의해서든지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는 안성마춤의 것입니다(살후2:9-10참조). 마술사와 요술쟁이들은 항상 기적으로 유명했습니다.

 

우상숭배도 놀라운 기적들 때문에 더욱 조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들에게 마술사들이나 요술쟁이들의 미신을 재가해 주지는 않습니다. 옛날의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파성수조 단순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즉, 그들도 기적에는 능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어거스틴이 그때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 대적들에게 대답합니다. 거짓 표적과 기사를 가진 거짓 선지자들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러 올 것임을 주께서 예언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기적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마24:24). 그리고 바울은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사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살후2:9).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이 기적들은 우상이나 마술사나 혹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 사탄의 궤계임을 모르기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고후11:14). 옛날 이집트인들은 예레미야를 경배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때 이집트에 장사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그에게 제사도 드리고 신적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를 오용한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처럼 그의 무덤을 숭배함으로써 뱀에게 물려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 “유혹을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살후2:11)하는 것이 지금까지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아주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대적들이 자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리키는 “기적들”은 순전한 사탄의 미혹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로부터 허망한 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신13:2이하).


4. 교부들이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반대한다는 부당한 주장들


게다가 그들은 부당하게도 고대의 교부들이 우리를 반대한다고 주장합니다(나는 보다 나았던 교회시대의 고대 저술가들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그들 자신의 불경건에 대한 지지자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일 교부적 권위에 의해 승부가 결정된다면 승리는 우리편에 있습니다. 이 교부들은 현명하고 우수한 글들을 많이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경우에는 그들에게도 일어났었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경건하다고 하는 그들의 후손들이 지혜와 판단력과 정신력을 총동원하여 교부들의 결함과 오류들만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부들이 썼던 훌륭한 글들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설명하거나 혹은 왜곡시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황금 가운데에서 쓰레기를 모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를 교부들의 대적이요 교부들을 멸시하는 자라고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부들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만일 그것이 우리의 현재 목적이라면, 나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있는 대부분일 교부들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만물이 우리의 것이며(고전3:21-22) 우리를 섬겨야 하며, 우리를 주관할 수 없으며(눅22:24-25) 우리는 모든 일에 예외 없이 순종해야 하는(골3:20참조) 그리스도 한 분에게 속해 있다(고정3:23)는 것을 항상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교부들의 저술에 정통해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을 준수하지 않는 자는 종교에 있어 어떤 확실한 것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거룩한 사람들도 많은 것을 몰랐으며, 종종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서로 의견이 대립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우리 조상들에 의해 설정된 경계를 범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하는 것은 공연히 한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합니다(잠22:28). 그러나 동일한 규칙이 전답의 경계와 신앙의 순종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시45:10)란 말로 기준을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풍유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왜 옮기면 불법인 지 계표를 설정한 “조상들”로서(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사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까(잠22:28)? 제롬은 이 구절들을 이렇게 해석했으며 그들은 그의 말들을 그들의 교회법전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대적들이 그들의 이해력에 따라 조상들이 설정한 한계를 보전하고 싶어한다면 왜 그들은 그것들을 그처럼 멋대로 범하는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마시지도 막지도 아니하시며 따라서 쟁반도 컵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교부는 신성한 의식에는 금이 필요 없으며 금으로 산 것이 아닌 것들은 금으로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그들이 의식을 행할 때 금이나 은이나, 상아나 대리석이나 귀한 돌이나 비단을 즐겨 씀으로써 이 한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모든 것을 사치스럽게 장식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기 먹는 것을 삼가는 날에 자기는 자유롭게 고기를 맛본 어떤 사람을 저주했을 때 그들은 경계를 범한 것입니다. 한 교부는 자기 손으로 일하지 않는 수도승은 살인 청부업자 같은 자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한 교부는 수도승들이 비록 명상과 기도와 공부에 열심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수도승들의 게으른 창자들이 매춘 굴 즉 수도원에 두고 다른 사람들의 물질을 포식하게 했을 때 그들은 또 경계를 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에서 새긴 형상을 보는 것은 몸서리칠 끔찍한 일이라고 말한 것은 한 교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교회 안에 형상이 없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을 때 그것은 그러한 한계 안에 머무르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일이었습니다. 또 어떤 교부는 말하기를 장례식에서 죽은 자에 대해 인간적 도리를 다한 후에는 그들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계속적인 염려를 부추김으로써 이 한계들을 범하고 있습니다.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은 말하기를 진짜 몸이 성찬식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몸의 신비가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말씀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것을 진짜의 실제로 간주할 때 그들은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은, 어떤 종류의 성찬에는 참석하고 다른 종류의 성찬에는 불참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찬으로부터 완전히 제외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교부는 강력히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고백함에 있어 자기들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강요를 받더라고 주의 보혈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앞의 교부가 출교의 벌을 내리고 뒤의 교부가 타당한 이유로 책망한 바로 그것을 불가침의 법률로 권장했을 때 그들은 이 지계표를 옮겨 버린 것입니다. 어떤 애매한 문제를 판단한 때 분명하고도 명백한 성경의 증거 없이 이편이나 저편을 드는 것은 경거망동이라고 단정한 분도 교부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없이 수많은 제도들, 교회법들, 그리고 교리적 결정들을 제정했을 때 그들은 이 한계를 망각한 것입니다. 다른 이단들 가운데서 모타누스가 최초로 금식법을 강요했다고 해서 몬타누스를 꾸짖은 것도 교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주 엄격한 법률로 금식을 명령함으로 그러한 한계를 훨씬 지나쳤던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고서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 순결이라고 선언한 것도 교부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다른 교부들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제들에게 독신을 심하게 강요함으로써 이 한계를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성경이 “그를 들으라”(마17:5)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만 귀를 기울여야 하며 우리 앞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거나 행한 것에는 신경 쓸 필요 없이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에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 것도 교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 위에 그리스도 외에 어떤 주인들을 세움으로써 자기 자신들이 이 경예안에 머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도들은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궤변론자들의 궤사에 의해 더럽혀지고 변론자들의 언쟁에 말려드는 것을 혐오했습니다.

 

궤변론자들의 변론보다 더 악하고 끝없는 논쟁으로써 성경의 단순성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외에 평생을 아무 하는 일없이 보내는 그들은 이 경계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교부들이 다시 살아나서 이러한 자들이 사변적 신학이라 부르는 그러한 논쟁을 듣는다면 그들은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들이 얼마나 제멋대로 교부들의 멍에를 거부해 버렸는지를 일일이 열거하려 한다면 내 이야기는 끝이 없어질 것입니다. 비록 그들은 자신들이 교부들에게 잘 순종하는 자녀들로 보이기 바라지만 말입니다. 정말이지 몇 달 몇 년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너무나 비겁하고도 썩어빠진 뻔뻔함으로 감히 우리를 책망하기를 우리가 옛날의 경계를 침범해 나아갔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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