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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 바른이해

by 【고동엽】 2010. 6. 6.
 
 

 

 예정에 대한 바른이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공동번역)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고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게 되었다.

 

여기의 (δωση (도세) 가 가정법 과거이기 때문에 "내게 주시는 그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게 하시기 위하여')이다.

 

주석 :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 -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자들에게 영생을 제공한다. 본 구절과 유사한 표현은 6절과 9절에도 나오는 데 이것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예수의 열 두 제자를 가리킨다(C.K. Barrett).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강조된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연합 관계가(15:1-10) 이 고별 설교에서 다시  설명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παν  )이 하나의 공동체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2) 우주적 교회(Universal Church)를 의미한다는 견해(Barnard). '판'(*παν )은 제자들 간의 소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롬 8:28)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모든 자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집단이라고  본다.

 

 예수는 6:39에서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라 말씀하신다.

 

 이들은 창세 전부터 미리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세상과 대립적 관계에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만민'(* πασης σαρκος ,  파세스 사르코스)과도 구분되는 자들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생명의 떡에 초대된 자들이다(6:35, 37, 44,  45,  65).

 

만일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점을 배제할 수는 없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 만민은 '모든 육체'(*πασης σαρκος   , 파세스 사르코스) 즉 모든 인류,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을 의미한다(Lenski). 

 

 이들을 다스리는 예수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는 세상 임금의 주권  행사와 구분되는 것으로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부여받은 권세이다(L. Morris). 즉 이 권세의 목적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며 반면에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3:35, 36).

 

예수는 마지막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지니고 계시며(5:27)  또 그의 권세는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마 28:18-20).  한편 십자가 수난을 앞둔 시점에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선포하신 것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의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위의 구절은   제한적 속죄론에 많이 인용되는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오직 구원 받기로 작정된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는 이론이다.  ''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 이 제한속죄의근거로서 요17;6-9에서는 4차례나 나온다.  

 

우리말의 ''주신(주셨다)'' 이라는 단어는 과거시제이지만 원문은  δεδωκαS (데도카스) 현제 완료시제이다.

즉 현재까지 진행중인 상태를 의미한다.

 

요6;37 에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시는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이다''.

 

여기 에서 ''내게 주시는''  이라고 할때 현재형인 διδωσιν(디도신)이 사용된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개념으로 생각할때 ''아들에게 주신자''가 예정에 의하여 선택받은자들이기 보다 현재 주님을 영접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되는 자들을 뜻한다고 보는것이 원뜻에 가깝다.

 

요 17;2절의 원문에는 ''주다''라는 뜻의 헬라어 διδωμι(디도미) 동사가 3번 사용되었는데 모두 다른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아들에게 권세를 주셨다라고 할 때엔  εδωκα (에도카) 과거형이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자''는  δεδωκαS(데도카스) 현재진행완료형이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게''는  δωση (도세) 가정법과게 시제가 사용되었다.

 

헬라어 가정법은 가정법외에도 명령법과 같은 권유에도 사용한다.

 이때 현재형은 계속적인 권유나 요청을 표현하는 반면에 과거형은 단회적인 권유나 요구를 표현한다.

 

이 구절에서는 가정법 과거이기 때문에 "내게 주시는 그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게 하시기 위하여"  가 바른 번역이다.

 

아래의 두 구절에서는

' 눅2: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

'요일2;2-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

 

예수는 세상의 구원을 목적으로 오셨으나,

 

그러나 구원의 유효적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는 자들에게만 한정한다고 볼수 있다.

'요 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그래서 요17장2절에 ''내게 주시는 자''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죽으심을 통한 구원의 효력으로 말하면 결과적으로 속죄가 제한됐다고 말할수 있으나, 주님의 죽으심과 구원의 목적으로 말하면 제한된 자들만을 위하여 라고 할 수만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엡 1;5절에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에서 ''예정'' 이라는 단어에 너무 포커스를 맞춘 나머지,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인간을 이미 택자와 비택자 라고 하는 두 부류로 정하여 놓으셨으며, 택자만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숙명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생각을 갖기도 한다. 우리는 성경을 균형있게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성경의 몇몇 구절도 예정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비 예정인  구절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많이 외우는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 '눅2;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또 '요일2;2-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이 말씀들은 택자만을 위함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더욱 포괄적인 뜻이 내포된 구절은 일반적인 진리이며 특정한 성격을 띄고 있는 구절은 특정한 뜻이 있는 것으로 봐야 바람직하다.

 

여기서 예정의 교리가 일반적 진리라고 할 수 없는 것은 포괄적인 개념이 아니고 특정한 의미를 가진 예외적인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들을 왜 창조 하셨는가부터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귀까지도 처음부터 악한 존재로 만드시지 않으시고 아름답게 창조 하셨으나 마귀가 자신의 특권을 오용함으로써 타락한 존재가 됐다는 것을 다 아는 바이다.

 

이 말은 마귀가 필연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반드시 버림 받도록 예정된 존재는 아니라는 말과 상통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마귀 창조전에 마귀가 타락할 것이라는 것을 예지 하셨음이 틀림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귀의 타락에 대한 예지 하심을 예정하신 것으로 말할 수 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두 종류나 나누시고 한 인간을 구원하여 자녀 삼기로 예정하시고 다른 한 인간을 타락하도록 유기하심으로 최종적으로 지옥벌을 예정하셨다고하는 것은 쉽게 납득할수가 없는것이다. 이 말에 정의를 둔다면 각인의 행위에 따라 심판

 

'롬 2;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하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공의는 크게 훼손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믿지 않음의 행위가 원인으로 최후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 자신도 이미 어쩔수 없는 하나님의 유기 하심이 원인이라면 하나님은 자신의 책임을 단지 각본대로 살아간  자들에게 돌리시는 분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 예정론은 운명론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불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생애가 정해진 각본에 따라 죄를 짓고 버림을 받도록 태어낳기 때문에 어찌 그 운명을 거역하여 신앙을 가질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 이론에 근거하면 우리가 어찌 전도 할 수 있겠는가? 택자인지 불택자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도를 전한다면 그 얼마나 시간 낭비만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더군다나 하나님게서는 그 불택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그의 인생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셔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라면 전도자는 택자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불택자로 여겨지는 자들은 빨리 포기해 버리고, 또 전도시 너무 어려운 장벽에 부딪치면 그 대상자가 아마 불택자여서 그러나 보다 하고 쉽게 단념해버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라도 구원 받어야할  존재로 확신하고 전하는 것이다.

혹시 택자일지도 몰라! 하면서 전도하는 것은 아주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비택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대 예정론자일수록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택자에 대해서도, 미리 정한 누군가를 통하여 복음을 듣도록 장치해 놓으셨기 때문에 택자가 버림받는일은 결코 없다고 함으로써 결국에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완전한 각본에 의하여 움직이고 계신다고 하는 생각으로까지 비약이 이뤄지게 하는 것이다.

 

또한  예정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선한 것만을 작정하셔서 그대로 되어지게 하시고 악은 우연으로 내 버려 두신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택자의 구원이 작정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일이 완벽한 각본에 의해 이뤄지게 않을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가장 무서운 악한 행위도 하나님게서 미리 정하신 일이 되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악의 조성자로 만드는 셈이 된다. 또한 악의 대가는 지옥형벌인데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유기하기로 정해진 운명에 따라 어쩔수 없이 죄를 짓는 자들에게 어찌 그처럼 극심한 형벌을 주시겠는가.

 

인간이 형벌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사후의 세계에서도 인격을 가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기된자로 정해진 자들이라면 쓰레기와 같은 존재들인데 무엇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의 대가로서 인격을 통하여 느낄 수 있는 형벌의 고통을 받도록 하시겠는가?  

 

'계 20장12절 -나는 또 죽은 자들이 인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 옥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많은 책들이 펼쳐져 있고 또 다른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다. 죽은 자들은 그 많은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적을 따라 심판을 받았다'.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다면 이곳에서는 다른책과 생명책에서 그들의 행동에 따라 심판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롬 14장11-12 -'정녕 나는 모든 무릎을 내 앞에 꿇게 하고 모든 입이 나를 하느님으로 찬미하게 하리라.'

 

라고 한 주님의 말씀이 있다. 그 때에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이다''. 또

 

'마 25장31-46, 롬 2장6절-'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등도 모든 인간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각자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 시켜주는 구절들이다.  주님의 십자가 피의 대속이 모든인간의 구원의길(눅2:31)이지 미리 정해진 소수만의 택자만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자들은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베플어도 스스로 멸시하며

 

'롬2장4절-'더구나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그 크신 자비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니 될 말인가?', 배척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불신앙의 행위(롬 2장6절-''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이다)''로 말미암아 결국 버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정론의 이론에 근거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로 받지 목하도록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계신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사람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결정되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장40절) 의 말씀대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셔도 가지 않기 때문이다.

 

'요일 2장2절 -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이다''.

 

'요 5장34절-''나에게는 사람의 증언이 소용없으나 다만 너희의 구원을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다''. 

 

 온 세상의 죄를 위해 오셨는데 만일 이들이 원래 구원을 받지 못할자로 창조된자들이라면 예수께서 그런 존재들이라는 것을 모르시고 구원을 얻게 함이라는 말씀을 하신 셈이 됨으로 그런일이 절대 있을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모든 인간에 대하여 어떤 차별도 두지 않으시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여러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이다.

 

'요 3장17-''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 1장29절-''다음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요일2장2절-''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이다''.

 

'롬11장32절-''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이다''.

 

'딤전 2장4절-''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

 

'*벧후 3장9절-''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이상의 말씀들에게서도 하나님의 피조인 어떤 사람도 그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행위와 무관하게 그 이전에 이미 버릴자로 정해져 있었다고 유기 예정의 논리는 근거없는것임을 알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원리는 렘 18장7-10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여기의 이 말씀도 인간들의 구원과 심판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선민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이유도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셨지만 완악하게도 하나님게 불순종한 결과로 버림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수없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께 오지 않는 이유는 마귀에게 미혹되어서 스스로 하나님과 예수를 저 버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롬1장28절에 ''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라고 하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 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하나님께 심판받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저 버리는 각 사람의 행위로 인한 것이다. 여기서 행위라 함은 불신앙과 불순종을 말한다.

 

'롬2장6-10에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또한

 

'애가 3장 39절에도 ''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각 사람은 자기의 행위대로 그 삯을 받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유기 하심으로 죄짓고 심판 받는다면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지옥의 형벌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만다. 구원이 믿음으로 얻어짐은 절대 진리인데 믿음이란 것이 지식이나 감정이 아니라 결국 믿는 행위임 것이다. 그래서

 

'야곱보는 2장 22절에서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또

 

'약2장 26에도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 말은 믿음과 행위가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흔이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말하지만 그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명확한 답은 어렵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알고 우리를 구원하신 사역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며 감정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께 속한자가 되기로 고백하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의 전 인격을 따 쏟아 주님을 따르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면서 주님의 말씀을 삶으로 순종을 의미한다.  

 

이럴때 주님은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며 진리의 영과 연합함으로서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지켜나갈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정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내포한다고 말하는가?

 

'엡 1장4-5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여기서 예정에 대하여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예정하다 말은 헬라어 프로오리즈(προοριζω)  인데 ''전'' 또는 ''앞'' 뜻의 전치사 프로(προ)  와 ''경계를 정하다'' 뜻의 호리조( οριζω) 라는 동사의 합성어이다. 위 문장에서는 과거분사의 형태의 프로오리사스(προορισαS) 가 사용됐으며 창세전에 하나님게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택하셨다고 하고 있다.

 

창세전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로 카테볼레스 코스므(προ προ καταβοληS κοσμου)인데 헬라인들은 창세 전을 먼 과거의 시제로 단순하게 표현 하였다. 그들의 시간 개념은 시간이라는 것이 영원전부터 계속 되어 오면서 앞으로도 영원히 흐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 하였으나 성경에서는  엔 아르케(εν  αρχη) 즉 ''태초에'' 라는 말로서 시간이 창조된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즉 시간은 어느 때 창조와 더불어 시작 되었으며 시작하였다는 본질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과거라고 하는 것은 흐르고 있는 시간에 대한 연속선상에서 현재를 기준으로 소급하여 존재하는 개념으로서 시간속에 창세 전이라는 말은 먼 과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시간이란 창조와 동시에 시작된 인간의 시간에 대한 흐름의 개념하에서 이해할 성질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영원한 현재로만 계시는 분이시므로 시간의 연속 선상에서 계속되고 있는 우주 만물의 운행과 진행이 하나님께는 동시에 현재로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인식 할 수 있어야 예정이냐 아니냐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고 하는 의미는 우리에게는 과거이고 미래인것들이 하나님게는 모두 현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므로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시는 것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만물의 측량치 못할 오묘함을 묵상해 본다면 감히 하나님을 인간차럼 시간의 흐름의 제약속에서 순서를 정하여 일을 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 모든 잘못생각들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하찮은 미물도 각각 종으로서는 각개의 고유한 모습과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것도 중복되지 않으며 서로를 구별하고 같은 종 개체간에도 완전한 구별 되고 혼동없이  이 세상에서 살기에 가장 적합하게 만들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들어 보면 수많은 조류 떼에서도 모래알처럼 많은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면서도 그 수많은 무리 가운데서 어미는 자신의 새끼를 정확히 찾아 돌보고 있는 것을 본다. 또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잘 살수 있도록 적당한 햇빛과 비와 바람 그리고 밤마다 헤아릴수 없는 별들, 만일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가깝거나 멀거나 한다면 육상의 동식물은 타죽거나 얼어죽고 말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안전히 살수 있도록 설계하고 만드신 하나님의 오묘한 창조 지식을 어찌 인간의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롬 1장20절에서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라고 하고 있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의 아시는 것을 인간이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빠짐없이 낱낱이 아시되 ''

 

사 40장26절-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 각각의 모든 삶과 무생물들의 생멸을 완전히 아시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과 규칙을 아실 뿐 아니라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를 아시며, 인간들의 모든 사상과 감정과 욕망과 모든 비밀을 아시고 땅과 하늘의 모든 보이는것들과 보이지 않은 것들일지라도 아주 구체적으로 아신다. 모든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과 모든 시간의 흐름을 아시되 분초까지라도 아시며 광대무변한 우주 공간의 구석구석을 아시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별들을 빠짐없이 아시므로 그 수효를 세신다

 

(시 147편4절-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게서는 창세 전 곧 하나님의 불변하는 현재에 창조되어질 모든 인간의 형질과 그들의 삶의 모습과 결국뿐만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개미 한 마리가 땅에 기어가는 것 까지도 다 아시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시간이라는 제한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 생각할 때에는 과거에 미리 아신 것으로 여겨지나 하나님게는 미리라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현재인 것이다.

 

롬 8장 29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게서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 라고 표현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예정이라는 특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말씀의 논리적 구조를 보면 미리 정하신 것은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이 성립된다. 물론 하나님의 불변하는 현재의 개념에서는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언어의 구조상 그렇다는 말이다.

 

불변하는 현재에 계신 하나님께서 예지 예정하신 모든 일들이 하나님게는 동시에 현재적인 것이지만 인간들이 이해하기 위한 논리적인 순서로 볼 때에 이는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되며, 이렇게 작정하신 일들이 그대로 이뤄지도록 하나님게서는 시간과 역사속에서 개입하셔야만 하는데 이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섭리란 미리 아심대로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활동하심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며 구원받고 후사가 될 자들을 하나님께서 불변하는 현재에 다 알고 계신데 이것을 두고 바을은 엡 1장4-5절에서 ''예정하셨다''  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시간속에 들어와 존재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시간 개념의 형성이 불가능하므로 태초라는 먼 과거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불변하는 현재에 계시므로 인간들이 창조되기 전인 과거나, 어떤 인간들이 지금 믿고 구원받는 현재의 사건이나, 앞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찬양하는 미래까지도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세계에서는 현재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난다고 하는 사건을 인간의 역사로 볼 때에는 미리 정해진 자들이 이제야 나타나는 것으로밖에는 볼 수 없겠지만 하나님의 불변하는 현재의 개념으로 보면 우리가 지금 믿고 구원 받은 것은 창조 전에 미리 아신 일과 동일한 시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정의 의미는 인간에게는 미래인 사건이 하나님께는 불변하는 현재에 존재함으로 당연한 예지의 결과로서 예정하시고 예정하신대로 섭리하신다고 하는 예지 예정이 성경적지지를 가지고 있으나, 인류를 택자와 불택자로 두 종류로 창조하셨다고 하는 절대 예정론은 성경이 지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다시 말해 선택의 예정에 짝을 이루는 유기의 예정이  선택의 예정이 성경에 언급되므로 자연히 상대적인 유기 예정의 논리를  추론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기 예정의 논리는 상대적인 선택예정의 논리 역시 포괄적 진리가 아닌 특정한 의미를 가진 뜻으로 봐야 한다는것이 성립된다.

 

즉 성경에 나타난 예정에 괸한 표현은 택자와 유기자를 구별하는 용도로 사용되어져서는 안되며 오직 성도에게 강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며 그들의 신앙이 자라게 하며 그들의 삶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려는 뜻이 숨어 있슴을 알아야 할것이다.    

 

선택과 예정 논리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좁게 해석 함으로써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깊이를 제한하는 한편,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는 신학과 결부되어  한 번 구원 받은 자는 선택의 논리에 의하여 절대로 구원이 떠나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자아내게 함으로서 그들의 실제의 삶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편으로 신앙으로 인도하기 보다는 때로는 인간의 약점을 스스로 합리화하여 죄 짓는 삶을 허용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속 잘못을 저지르면서 일평생 살더라도 하나님의 한번 선택하심에 의하여 앞으로 짓게될 모든 죄까지 이미 다 용서 받았기 때문에 그때마다 회개하기만 하면 자신들은 여전히 구원받은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대표적인 예로서 일평생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죄의 댓가에 대해 무감각하게 하는 무서운 생각들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그러한 약은 생각에 동조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선택 예정론에 입각하여 그런 믿음을 가진 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그것 하나 만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들인 것이다.

 

선택 예정론을 잘못 오해하게 될 때 개인적인 범죄보다 더 큰 문제는 국가적 차원의 죄악을 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과 르네쌍스를 통해 문화적 우위에 있던 유럽의 기독교 강대국들은 비기독교 약소국가들은 무자비하게 점령하여 착취함으로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한편 세력을 넓히는 일들을 자행했는데, 그들이 그와같은 일들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고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잠자고 있던 세계의 다른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하나님게 유기된 족속들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절대 예정론에 따르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알 수는 없으나 만일 구별해 낼수 있다면 어차피 멸망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누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시 서양의 기독교 강대국들은 그 판별을 지상에서 잘살고 못 사는 것을 가지고 기준을 삼았다. 잘 사는 것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것이고, 못 사는 것은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 이후에도 서양 사회를 지배 함으로써 노예무역이라든지 수 많은 인종 차별 정책 같은 것들이 기독교 국가에서 아무 죄책감 없이 자행되어 왔던 것이며, 그 뿌리는 아직도 잔존 되어 현대에도 종교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음은 부인 못할 사실인 것이다. 역사적인 종교이름으로 얼마나 살인만행을 절맀는가 한번 살펴보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에게는 악마 그 자체였다.  그를 수 차례 죽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원주민들에게 은혜를 오히려 원수로 갚았다.   이는 원주민들에게는 가혹한 중노동이었다.  노예 부부가 함께 거하면 아기의 출산으로 노동력이 저하될 것을 우려하여 서로 만나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들의 식사는 잡초였다.  그들은 동물로 취급되었는데, 아이가 태어나 산모의 영양부족으로 젖이 나오지 않아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콜럼버스 일행은 복음전파보다는 원주민들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살인강도집단으로 변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의 종교와 문화를 파괴하고 원주민 말살작전을 전개하였다.  또 살아남은 원주민들 가운데 건장한 사람들을 생포하여 노예로 팔아 돈을 챙겼다.

 

이러한 콜럼버스에게 신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일에 「성자」라는 칭호를 주자고  청원서를 보냈다니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하고 아이러니한가?

 

1,500년도 초기에 유럽에서 온 기독교인들은 남미 페루 지방 일대에서 840만~1,350만의 원주민을 학살하였다. 그것은 그 지방인구의 94%였다.  또 그들은 16세기 중에 중남미에서 6,000~8,000만의 원주민을 학살하였고 그 학살은 계속되었다.

 

기독교 침략자들은 가는 데마다 교회를 짓고 성경을 들고 기도하면서 선교하였다. 자기들의 침략 행위를 개척과 발전이라는 미명과 기독교 선교라는 명목으로 자화자찬하면서 약 350년 동안에 유럽의 네 배가 넘는 광대한 땅과 자원을 빼앗고, 1억 2천만의 원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북중남미를 정복하고 말았다.  

 

  더 많은 땅을 빼앗기 위하여 죄 없는 원주민을 학살하고 돌아온 살인마들을 축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 문화와 종교 말살을 선두 지휘하고 잉카나 마야문명의 자료를 불태워 버린 행위나 강제 개종시켜 온 기독교도들의 죄를 누가 물을 것인가?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의 출정을 역설했던 성 버나드의 설교를 소개한다.  "그리스도의 전투사로서 이교도들과 싸우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다. 그러므로 안심하고 싸우기 바란다. 악인을 처형하는 것은 살인이 아니고 악을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악한 일을 하는 자들에 대해 주님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에 종군하였던 프랑스의 한 성직자가 쓴 수기(授記)의 일부도 소개한다. 예루살렘의 큰 거리나 광장 등에는 사람의 머리나 팔, 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 병사나 기사들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성전이나 회당은 물론이요, 말 탄 기사가 잡은 고삐까지 피로 물들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모독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졌던 이 장소가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찬양할 만하다." 이것이 사랑과 자비와 희생정신으로 충만한 복음을 전파하는 성직자의 수기이다.

 

 기독교도들이 중남미 지역에서 원주민을 살상했다면 북미대륙에서는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교라는 미명하에 역시 1억여명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였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지금 사회의 최하층민으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콜럼버스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듯이 청교도들 역시 처음에 북미 대륙에 정착하여 어려웠던 당시 원주민들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그들의 세력이 커지자 도리어 원주민들을 무차별 살상하는 악마로 돌변하였으니 그 점에서도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사교로 생각했던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원주민을 단순히 이단으로 취급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나 영혼조차도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특히 성직자들이 그것을 강조하였으며 그런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지침이 그들의 신념이 되었으니 그들의 원주민들에 대한 태도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중남미 지역에서의 천주교들과 같이 북미지역 청교도들도 그러한 철저한 종교적인 독선을 유일 절대적인 것으로 북미대륙에 정착시켰다.

 

 

청교도들은 원주민 체로키 족이 살고있는 지역으로 침입하여  여자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음부를 찔러 죽였다고 전해주고 있다. 청교도(칼빈주의자)들은 체로키족들을 곡갱이와 도끼로 마구패고 찍어 죽였다. 더구나  그들이 곡갱이와 도끼로 죽인 체로키족들은  자신들이 전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청교도들의 형제 자매였다.기독교인(청교도)들의 침략에  반대하거나 종교적인 독재의 순종을  하지않는 원주민들은 가차없이 살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이와같은 행위가 복음적행위인가 질문하고싶다.사람들은 누구든지 무참하게 죽여도 그것을 정당화 될 수 있는 칼빈의 교리에 의거한 살상의 역사는 미국이라고 예외가 아니였다.

 

우리의  냉정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은 성경의 그리스도인데  과연 칼빈주의자들의 이러한 행위가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에서 나왔는가? 이와같은 논리가 어떻게 가능한것인지  이러한 만행을 가능케 하는 칼빈주의 사상체계의 허구는 반드시 밝혀지지 않으면 안된다. 분명 이렇한 행위를 할 때 이를 가능케 하는 칼빈신학의 특징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기때문이다.

 

청교도가 지배한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인구는 1.500만~1.800만명' 이였으나 300년후에 남은인원이 고작 25만명이라는것은 전염병이나 자연사를 감안한다고 할찌라도 얼마나 무차별적이고 잔인한 학살이 자행되었는가를 여실히 말해준다. 1600년대에 북미지역에  약 6002여개의 원주민족이 있었는데 현재는 279개 족 정도만 남아있다고한다.

 

미국내에 거주하는 현재 원주민의 인구는 약 180만 이라고하나 17세기부터 약 300년동안에 유럽인들에 의하여 적어도 수천만 많게는 1억 이상의 원주민이 억울하게 생명을 잃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청교도들이 도착한 날부터 원주민들은 자기나라에서 침략자들에 의하여서 짐승이하의 대우를 받게되었고 미국이 독립하던 날부터 그들은 영원한 망국실향민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순진무구한 인디언들은 하나님을 철저히 믿는다는 청교도(칼빈주의자)들을 만나면서 사탄의 자식으로 멸망 당해야 하는 존재로 전략하고 말았다. 칼빈의 교리야말로 자신들에게 권력만 주어진다면 상대방을 제거하기위해 어떤 해석 어떤정당화 도 가능하다는것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고있는것이다.

 

  이들이 학살한 원주민들은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보다 몇 십배가 되는 엄청난 숫자인데 양심적인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아무도 인정하지도 않고 문제삼지도 않는다.  히틀러나 스탈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국가 원수들까지 찾아가서 추모하고 학살자들을 비난하며 재판까지 하면서, 왜 북중남미에서 희생당한 원주민들을 위해서는 찾아가는 사람도 없고 학살자를 비난하는 사람도 없으며 그들의 한에 맺힌 억울한 영혼을 달래주는 추모행사도 없는가?  전지전능하신 우주의 심판자는 왜 아직까지 이 사건을 심판하지 않는 것일까?

 

종교재판소 중에서도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 스페인의 종교재판소였다. 종교재판소에서의 처형 결과 2,000만명이었던 스페인 인구가 200년 후에는 600만 명으로 감소되었다고 하니 종교재판소의 횡포가 가히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칼빈은 춤췄다고 투옥하고, 설교를 들을 때 웃었다고 투옥했으며, 부모를 구타한 소녀는 목잘라 처형하고, 귀신 쫓는 마법사도 사형시켰다.  이와같이 그가 종교법원에서 막강한 권세를 과시하던 4년 동안 그는 76명을 추방하거나 투옥하고 54명을 처형하였다. 한국의 인구 비례하면 원주시민을 통체로 죽여버린것이다.  

 

유명한 사건으로 스페인의 학자 세르베투스는 니케아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 교리와 칼케돈 회의에서 결정된 ''기독론''과 ''유아세례'' 교리가 교회를 부패시키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며, 칼뱅의 저서『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가  칼뱅에 의해 제네바 근교에서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칼뱅은 세르베투스가 산 채로 서서 참혹하게 불타 죽기까지 다섯 시간 정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칼에 의해 일순간에 죽는 것도 아니고, 이글 이글 서서히 타는 불에 죽는 처참한 광경을 상상해 볼 때, 신앙의 잔악성은 그 어느 전쟁의 잔악성보다 수백 배 더하다고 보아야 하고 보복적 수단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칼뱅의 살인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정통을 내세우기만 하면 살인을 해도 되는가?  정통은 살인 금지의 제5계명보다 더 크고 중요한가? 칼뱅은 그 자신이 절대시하던 성경을 무시하고 ''이단''이란 죄목으로 수없는 살인을 감행하였으니 결과적으로 그 자신이 성경의 절대성을 무시한 게 아닌가?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칼뱅은 정통이고 세르베투스는 이단인가?  살인자가 정통인가? 이단인가?   결과를 보면 살인자가 기독교인을 죽인 것이 아닌가?  

 

 나와 다른 교리나 성경해석 등의 신앙체계를 가진 자는 모두 ''이단''이라는 칼뱅식의 배타성과 독선의 결과로  오늘날 전 세계 개신교의 교파 수는 25,500개나 된다.   이 많은 교파가 ''나는 정통, 너는 이단''이란 논리 하에서 서로가 대립, 배척, 반목하면서 이단과는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도 같이 드릴 수 없다고 거부하여 분열을 계속해 왔다.   

 

기독교가 이와 같이 인류의 화합은 고사하고 기독교인들 자신들끼리도 끼리끼리 흩어지고 갈기갈기 쪼개져서 인류사회를 분열, 대립시키는 집단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은, 분열과 대립의 사회악을 조장할 뿐이다.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독선과 배타성이 없어지지 않는 한, 지구촌은 지금의 북아일랜드처럼 교파 전쟁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칼뱅은 개혁이란 업적은 남겼으나 동시에 교파분열이라는 씨를 뿌리고 배타적인 독선의 인습을 세운 과오를 범했다.

 

 예정론이라는 것은 이와같이 잘못 신봉하게 돌때 만 천하에 미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스스로 제한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중대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성도의 견인 교리는  ''예정'' 이라는 말처럼 성경에서 사용된 단어는 아니지만 개념적으로 성경에 나타나고 있으며 하나님의 성도를 사랑하시는 표현으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예정론이 특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듯이 성도 견인 교리 역시 특정 상황적 진리이지 포괄적 진리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한번 구원받은 자라고 하더라도 삶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최종안식을 얻지 못하고 구원에서 떨어질수 있다고 하는 경고의 말씀이 성경에는 많이 있기 때문이다.

 

'롬 11장17-22에서 바울 사도는  (''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이방인들로 구원받은 자들인 우리들을 향하여 경고 하고 있다.

 

고전 10장12절 에서도(''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여기도 경고하고 있다.

 

히 3장12-14절에도 (''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의  라고 함으로써 한번 구원 받은 자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질수 있으며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처음 믿을때의 확실한 것을 견고하게 붙둘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

 

히 4장9-11에도(''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

 

 이곳도 한번 구원으로 영원한 안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히 2장1-3에도(''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 4장1절에도(''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라고 하고 있다.

 

마 7장21절에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서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진실되 보이지 않고 입으로만 부르는 자들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바로 이어지는 22절에서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라는 말씀을 보면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보아도 상당한 믿음의 소유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아지며 또한 성령으로서가 아니고서는 주라 할 수 없으므로

 

(고전 12장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그들이 믿음 없는 자들이었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수가 없었다.  이는 한번 구원 받은 것이 영원한 안식을 보장 받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고전3장16-17절에도 (''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여기서 ''너희는'' 이미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으나 자신들의 실체를 잘 모르는 ''구원받은자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그 구원받은 자들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인 자신들의 몸으로 죄를 계속 지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신다는 뜻이다.

 

갈 3장3절(''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살전 5장 19절(''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즉 성령받은자가 육체로 마칠 수도 있기 때문에 성령받은 자에게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하고 있는 것이지   성령을 받지도 않은 불신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서신서의 많은 곳에서 구원을 견지하지 못하고 믿음을 버린예들을 보게 된다.

 

한편 구원받은자가 그 구원을 끝까지 견지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얻게 될 안식이 있음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히 4장9-11 (''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구원과 안식이 별도의 다른 사건임을 알게 하는 말씀이다.

 

히 9장28절에도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 말씀도 완전한 구원은 또 다시 예비되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롬 13장 11에서도 (''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벧전 1장5절(''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

 

빌 2장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같은 말씀들은 모두 앞으로 완성될 구원이 다시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즉 믿음은 구원의 시작이며, 구원의 완성은 주 예수 그리스의 날에 이루지는 것이다(고전-''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한번 받은 구원이 절대 떠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위의 살펴본 구절들은 어찌 해석해야 된다는 말인가.

 

절대 성도의 견인 교리를 주장하다보면 이러한 말씀들이 성경에 나올때 적당히 얼버무리고 그냥 넘어가는 도리밖에 없다. 교리를 신봉하다 보면 성경 말씀 일부분이 훼손되는 말씀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모든 자들에게 동일하게 미치고 있으며 모든 자를 향하여 구원에 초대를 하고 계시나 각인의 반응에 의하여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어떤 자들은 믿음으로 화합하여 구원을 얻고 최후의 안식을 얻기 위한 믿음의 길을 가게 되며, 또 어떤 자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는 받았지만 성령을 쫓아 살지 않다가 최후의 안식을 얻지 못하는 자들도 있고, 또 어떤 자들은 아예 믿지 않음으로써 구원의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한채 멸망의길을 가는 것이다.

 

절대 예정과 절대 성도의 견인 교리에 따르면 믿는 자는 창세 전에 선택 예정된 자들로서 한 번 받은 구원은 절대 떠날 수 없다고 함으로써 구원의 상실에 대한 불안을 말끔히 해소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 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책임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고 있는지 멸망으로 인도하고  있는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중세의 기독교는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인간의 공로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 함으로써 그것을 악용한 교회의 부패로 말미암아 종교 개혁을 일으키게 하였다.종교 개혁가들은 한결같이 중세 교회에 대한 심한 염증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개혁과 동시에 지금까지 유지돼 오던 신앙이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그런 나머지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을 강조하게 되었고 인간으로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완전히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교회 개혁가들의 저술속에는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 사전에 봉쇄 차단하기 위한 끊임없는 어휘들이 사용됨을 볼수 있는데, 교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당시 잘못된 신앙과 교권주의를 비판하는데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 죤 낙스등의 개혁가들은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나, 그러나 그들은 사도와 같은 권위가 있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의 현 시점에서 볼때엔 그들에게도 약간의 오류들이 발견을 볼수가 있는 것이 다.

 

특히 루터는 그의 3가지 이념인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와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e)''였으나 그러나 한가지 부족한 것은 ''오직 순종으로(Sola Obedientia)''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모든 자에게 주시고자 하시며 인간은 누구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지만 그것은 ''구원의 시작이며'' 그것으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최종 안식''을 얻을수 있음을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벧전 1장9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0% 확실하게 천국갈수 있는 길이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길이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 많은 자들이 약간 피해 갈수 있는 길을 택하여 가는 것이다.

 

눅 13장23-24 (''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우리는 항상 이 말씀에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에서 그 힘쓰라 헬라어 번역 ''아고니제스데(αγωνιζεσθ)''  는  ''싸움하다'' 라는 뜻의 ''아고니조마이 (αγωνιζομαι)''의 명령법으로써 ''사람들이 가지 않으려는 그 길로 싸움 하듯 힘쓰면서 가라'' 는 말씀이다. 구원을 향하여 가는 그 길이 누구나 쉽게 갈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이 그렇게 말씀 하신 것이다.

 

이 구절은 분명히 제자들이 ''구원받는 자가 적겠는지를'' 주님께 문의했을 때 그렇게 대답하셨던 것이다.  세상에서 구원받는 수가 반듯이 적다 하는 뜻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안에 있으면 무조건 구원받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잘못가르치고 잘못 배웠기 때문이다.

 

제한 속죄론이나 절대 예정론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만인 구원론을지지하는것과 동일시 하고 몰아 붙이는 것은 중세의 마녀 사냥과도 같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만인 구원론은 구원의 적용이 믿음으로 반응한 자들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모든 자가 결국은 구원에 이를수 있다고 하는 교리로서 제한 속죄론보다 더 잘못된 교리이다. 칼빈주의를 극히 일부를 지지 않는다고 해서 알미니우스 주의자나 요한 웨슬리의 감리교 파에 속하는 사람으로 속단하는 것도 금물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만을 유일한 근거로 삼아야 된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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