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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설교'권'이라니?

by 【고동엽】 2008. 2. 29.
 

           설교'권'이라니?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행 2:9-11)

- 장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설교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 하고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한다.
- 목사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택함 받은 사자(使者)로서 설교와 교육으로써 복음을 증거하고 선포한다.
- 교회는 당회장이나 당회의 허락 없이는 설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장로교 교단의 헌법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들을 보면 설교는 목사에게 주어진 특별한 권리처럼 보입니다. 장로 중에도 설교를 하는 자와 하지 못하는 자의 구분이 있으니 다른 평신도들로서야 감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평신도가 설교한다는 일은 생소하고도 불경스러운(혹은 주제넘은) 짓이라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중심은 목사입니다. 당회, 제직회, 주일학교, 기타 교회의 각종 위원회 장 자리는 담임목사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어찌 보면 과다한 업무에 시달리는 형국입니다. 때로는 저 짐을 좀 덜어드려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목사들은 무거운 짐을 내놓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에 적극적으로 장 자리를 다른 이에게 맡기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혼자 각종 기관의 장을 떠맡고서 운영해 가는 모양새를 보노라면 목사는 슈퍼맨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목사에게 주어진 권한 중 중요한 것 하나는 아무래도 '설교권'이 아닐까 합니다. 주일마다 강대상에서 외치는 설교에는 절대적 권위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기에 함부로 토를 달 수도 없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말씀을 증거하는 자체가 - 내용 여부를 떠나서 - 권위 있는 행위로 받아들여집니다.

게다가 주일 설교가 행해지는 강대상을 신성시하여 함부로 올라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암묵적 금기도 있습니다. 그곳은 구약시대의 지성소에 해당하는 곳으로 구약 시대에는 오직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이미 구약시대는 갔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날 성전의 휘장이 두 쪽으로 갈라짐으로써 제사장만이 들어가던 지성소와 성소의 구분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여전히 강대상에 지성소의 의미를 부여하고 신성시한다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설령 상징적으로 지성소의 의미를 인정한다고 해도, 종교개혁 정신(만인제사장설)에 따른다면 교인은 누구나 거리낌없이 올라 다닐 수 있는 것입니다. 굳이 구별된 곳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다락방에 모여있던 제자들은 오순절에 이르러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온 집에 가득해지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 입으로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각각 자기들 지역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갈릴리 출신의 배운 거 없는 이들이 외국어를 한다는 것이 아마도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오순절의 성령 강림 하면 흔쾌히 방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 충만의 대표적인 증거로서 방언의 은사를 언급하는 사람들도 다수입니다. 또한 어떤 열정적인 집회에서는 의도적으로 방언을 하게끔 훈련(?)시키는 경우도 있는 듯합니다. 과연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있어서 방언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요소였을까요?

당시 예루살렘에는 명절을 지키기 위해 여러 곳으로부터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개중에는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으로 개종한 이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든 곳에서는 마땅히 그들과 소통할 언어가 필요한 법입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이 방언을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결코 성령 강림의 증거 혹은 결과로서 방언을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면,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방언은 아무 상관도 없었을 것입니다. 굳이 방언이라는 현상이 나타날 필요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핵심은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방언으로 말한 것은 단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런 것이지 성령의 강림의 나타내는 큰 역사로서 반드시 방언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방언으로 이어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증거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도 바리새인도 랍비도 아니었습니다. 어부로부터 시작해서 잡다한 직업을 가진 평신도였습니다. 비록 그들의 스승인 예수께서는 랍비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하셨지만, 그들은 짐작컨대 그런 호칭을 제대로 받아본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부어졌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성령의 임재입니다. 신학교 졸업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래도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장을 얻은 사람에게 마땅히 설교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잔꾀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공부한 사람이 나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 지식의 권위는 그 지식에 대한 연마(공부)의 정도가 권위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야 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목사에게 설교권이 있다는 우리의 교회 제도는 인간이 만든 권위에 의존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전혀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세상에서 우리가 만든 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기에),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절대화하는 순간 우리는 우상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대신에 '인간이 만든 제도'를 앞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회장 목사의 설교만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 오늘날 교회 분위기에서는 우상화의 위험을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홀로 설교권을 지닌 목사가 자기 생각대로 말씀을 증거해도 이에 대해 누구도 뭐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권은 목사라는 계급에 주어진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자들에게 열려 있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누가 진정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지는 들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뉘우쳤듯이 말입니다. 말하는 자에게 임한 성령이 듣는 자에게도 임하실 것을 믿기에 그러합니다. 따라서 설교에 '권'이라는 말을 붙여서는 안 됩니다. 마치 특정 계급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인 양 우상화될 소지가 많기 때문입니다.(유성오)

 

----뉴스앤죠이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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