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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목양 단상[1,073]〓/교회 회복과부흥

목사와 윤리

by 【고동엽】 2008. 3. 2.
 

                       윤리적 기준과 적용의 허구

 

1959년 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분열을 경험한다. 통합측은 WCC와, 고신측과 합동측은 화란의 개혁주의 에큐메니컬(RES)과 연대한 것이다. 당시 합동측은, WCC가 공산주의와 대화함으로써 좌경화되었다고 판단했다. 대신 RES가 신학적, 윤리적 모범을 갖춘 대안으로써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합동측은 가입 이후 총회 차원에서 대표단을 파견한다. 당시에는 1970년에 있을 RES 세계대회를 서울에 유치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던 것이다. 그러나 1969년 총회이후 RES와의 관계는 틀어진다. 여자 장로제도 문제의 도입과 당시 카이터트 박사를 중심으로 한 화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논란이 매개가 된 것이다. 결국 몇 해 후 RES와의 단절을 총회 차원에서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합동측이 화란 개혁교회와의 단절을 결정하게 된 배경은 따로 있다. 1968년 RES 세계대회에 참석한 한국교단의 대표들이 겪은 ‘황당한 일’ 때문이었다. 당시 대회에서 여러 나라의 총대들은 예배와 공동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테이블에 포도주를 올리는가 하면, 갖가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노출했다. 한국교회가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던 ‘주초 금지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 보수교단과 화란 개혁교회의 인연은 악연으로 바뀐다.


사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고백과 주초문제가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이것을 보수 교단 대표들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 문제는 신앙의 본질 이상으로 주요했다.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구원의 조건 이상으로 판단한 것이다. 결국 그것은 스스로를 얽어매는 족쇄가 되었다.

비신자들은 종종 ‘술기운으로 버틴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한국 보수교단은 주초문제로부터의 결백을 지켜내는 일이 천국까지 들고 갈 순결의 상징으로 믿고 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의 퇴행성 악습이 주초문제와 문란한 성 윤리에 있다고 보고 이를 금지해 온 선례가 있다. 성결 실천의 갱생운동이 신학과 교리의 금기 1조가 되고 만 셈이다. 주초문제는 그렇게 해서, 십계명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닌 채 보이지 않는 신앙고백의 기독교 강요 요체가 되었다.

교회, 여권운동의 사각지대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이 많았다. 당시 총회신학교에는 외국에서 선교사 형태로 파송되어 온 교수 가운데 못 말리는 골초 한 분이 계셨다. 나중 미국의 명문 보수 신학교로 돌아 가셨지만 그분의 끽연은 교단 지도자들의 천덕꾸러기 같은 짐이 되었다. 한 가지 아이러니 한 것은 주초문제와 결부하여 화란 개혁교회와의 단절을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증경 총회장 같은 경우 여자 문제 때문에 여리고 성처럼 쉽게 무너져 버렸다는 점이다. 비슷한 시기에 총신 동문회 회장 역시 20년 이상의 축첩 사실을 시인하고 물러나는 일이 발생했다.

평소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의 비리와 실수에 한 치의 용서가 없는 것이 기독교인의 보편적 진리관인데 어찌된 셈인지 교단과 교회는 이러한 치부에 진실로 관대하게 넘어갔다. 속된 말로 배꼽 아래의 추문은 증거가 없기에 치리하기가 어려워서일까? 자신의 성(性)은 거룩한 성역이 되고 문화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화란 개혁주의 교회의 관행은 한계를 넘어선 하나님 모독이 되었다.

우리는 요즘 영적 지도력이 넘치는 교계 지도자의 입에서 ‘여신자의 팬티 무용론’까지 회자되는 세태에 살고 있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교회가 여성 인권운동의 사각 지대가 아닌가 싶다. 세상에서 일어난 일 같으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인권 운동 시민 단체가 진상 규명에 나선다 하며 수선을 떨 일 아닌가?

나는 교회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시민단체에서 이런 갱생운동에 관심을 갖고 교회 내 기복신앙으로 상처받은 순진한 교인들과 목회자의 윤리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주었으면 싶다.

남이 저지르면 불륜이 되고 내가 저지르면 로맨스그레이가 되는 탓일까? 교회가 이래서 좋은 곳인가 보다. 윤리 문제에 관한 모범이 없다. 그리고 마땅한 규범이 보이지 않는다. 불륜을 저지르다 호텔 난간에 매달려 추락사한 목사님의 사인이 ‘과로사’였다. 하기야 죽기 아니면 살기로 에어컨 실외기에 매달렸다니 과로도 하셨겠지. 결국 믿음의 사표가 될 만한 어른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이들이 세상 법보다 엄격히 적용해야 할 것이 말씀 아니던가? 그런데 그 말씀 들고 나간 선교 현장에서 선교사와 다른 선교사 아내가 간음을 벌인다니 기막힐 노릇이다. 선교사의 ‘어카운트 크레디트’ 다음으로 무서운 일이 윤리적으로 발생하는 성적 타락 문제와 그 가정의 파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변질된 한국 교회의 자화상이 선교지의 영혼에게 어떻게 투영될 것인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어떤 이들은 왜 목사나 선교사의 문제만 부각시키느냐고 힐난한다. 물론 평신도에게도 엄격히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많이 가진 자, 많이 누린 자, 특히 백성의 지도자로 군림하는 장로들과 치리 자에게 엄격한 기준과 적용을 가르치고 있다. 책임을 많이 맡은 분들이 올바로 서야 소망이 있다.

율법적 정죄가 만연한 장로교, 특히 이 교단 목회자들에게는 보다 엄격한 윤리적 규제와 적용이 가해져야 한다. 나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티끌만 봐서는 안된다.

평양부흥 운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2007년, 한국교회는 평양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영적 부흥운동의 100년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별별 기획들이 선교 단체는 선교 단체대로, 교단은 교단대로, 각급 교회는 교회대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한국 장로 교단의 양대 산맥 합동과 통합은 서로 자신이 ‘장자 교단’이라며, 그 정통성을 선점하려는 듯 경쟁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아마 봉수교회 재건을 위해 이미 50억 원을 투자하기로 한 통합 측의 카드가 보다 실속 있고 화려해 보인다. 너도 나도 봉수교회 헌당을 기념한답시고 점보 비행기를 전세 내어, 이 것 저 것 실어 나를 것이 분명하다.  마포삼열 박사를 중심으로 명맥이 이어져온 평양 신학의 정통성을 누가 차지하느냐도 교단의 세력 못지않게 중요한 관심사항이 될 것이다.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난 모 교계방송이 북한 도처의 골목마다 인공위성 수신기를 달아 줄 날이 머지않았다. 모를 일이다. 그동안 반북 통일 집회의 단골 대표 주자였던 여의도의 모 교회마저 포기할 수 없는 이 사업에 목을 바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북한의 복음화가 우리 손에 달렸다’고. 그리고 ‘그 기회가 우리에게 먼저 주어졌다’고. 아마 이제는 숨 넘기기도 어려운 1세대 어른 가운데 평양신학 출신 인사들의 터진 입으로 축복을 빌며 열변을 토할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학자들이 온갖 미사여구로 길선주를 노래하며 최권능을 부활시킬 것이다.

죽은 이는 말이 없고 산 자만이 요란한 변죽 울릴 2007년, 대부흥 운동의 산실, 빈 무덤 같은 평양을 방문하는 일로 날 새며 북한의 기쁨조만 되고 말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가슴 찢고 회개의 영을 불러일으킬 죄의 고백이 한국 교회의 지형을 변화 시킬지 이제부터 또 다른 100년을 향한 역사의 괴정이 시작될 것이다.뉴스앤죠이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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