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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우상과 예수신앙

by 【고동엽】 2008. 2. 27.
 

       우상과 예수신앙       
그래서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이오. 이 사람들에게서 손을 떼고,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시오. 이 사람들의 이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망할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버릴 수 없소. 도리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봐 두렵소." 그들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행 5:38~39)

 

언젠가 어떤 지역에서 학교 안에 단군상을 세웠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주변의 교회에서 이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물리력을 동원하여 학교 안에 있는 단군상을 파괴해버렸습니다. 우상숭배야말로 가장 큰 죄라는 기독교적 가르침에 충실히(?)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단군상이 있던 장소가 교회 안도 아니었고, 또한 그 학교가 교회의 교리를 준수해야 할 의무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로 인해 지역사회와 교회 사이에 한바탕 격론이 붙었고, 교회는 막가파 기독교라는 비난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이제 한국에서도 기독교가 권력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매 맞고 쫓겨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예수 믿더니 조상도 모르는 패륜아가 되었다고 뒤지게 욕을 먹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이제 기독교의 교리와 배치되는 일을 지역사회가 했다고 해서 이를 파괴할 정도가 되었으니 대단한 기세의 역전이지 않습니까. 예전 같으면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는 단군상을 학교나 공원에 세우건 말건 감히 교회가 나서서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친족들로부터 박해받는 일만이라도 없었으면 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이와 비슷한 현상들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서울시장이 서울의 발전과 순결을 위한 대회라는 기독청년들의 행사에 참석해서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발언을 하여 시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서울시장이라는 자리가 기독교 포교를 하라고 맡긴 자리가 아니라는 비기독교인들의 상식과 충돌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런저런 말들이 많기는 하였지만 서울시장이 이 때문에 심각한 핍박이나 곤경을 겪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흔히 그러하듯이 지지하는 여론과 비판하는 여론 간에 설전이 있었을 뿐입니다.

 

어떤 집단이든 권력이 되는 순간 그 집단 구성원에게는 부와 특혜가 따릅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교회는 카타콤 교회와 결별하고 폼 나는 건축물 속에 안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와 성직자가 땅을 소유하게 되고 로마황제가 베푸는 갖가지 특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권력화는 교회의 타락으로 이어져갔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섬김의 자세를 취할 이유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권력화한 교회는 자신들의 삶이 신앙적인가를 성찰하는 대신, 남이 내 기준에 적합한지를 점검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반성과 점검을 소홀히 한 채 남을 판단하는 데 더 열심을 내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배경으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자들을 제압하고 처단하는 전쟁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말이 전쟁이지 실제로는 일종의 사냥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이미 권력의 핵심이 되어버린 기독교가 일방적으로 그들을 공격하는 사냥놀이라는 얘기입니다. 권력화한 기독교가 우상을 처단하겠다고 물리력을 내세우는 순간 이는 폭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상과의 전쟁이 세력 다툼 내지는 우월감 경쟁으로 변질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교만함이 가장 위험한 우상이 되는 시대

사실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할 우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나 자신만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교만함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우상입니다. 다른 이의 입장이 자신의 입장과 다르므로 백퍼센트 틀렸다는 확신이야말로 위험하고도 오만한 믿음입니다. 어차피 인간인 이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장로교가 떠받드는 칼빈의 교리도 결국 한 신학자의 관점일 뿐입니다. 감리교의 기둥인 웨슬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보면 두 사람의 신학적 해석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어찌 인간이 다 헤아려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자신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자신이 직면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 노력할 따름입니다.

 

그러니 칼빈주의에 심취해 칼빈의 신학을 우상화할 일도 아니요, 웨슬레에 빠져 웨슬레의 해석만 맞다고 주장할 일도 아닙니다. 모두 각각 진리의 한 단면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좀더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칼빈이 다 맞는 것도 아니고 웨슬러가 다 맞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선택한 입장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고 신봉한다면 위험한 지경(좀더 과격하게 말해서 우상숭배)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유대 제사장 무리들이 보기에 사도들의 가르침이란 것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예수가 메시야라느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느니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얘기들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유대교의 율법을 국법처럼 여기고 있는 예루살렘이란 지역에서 말입니다. 다른 종교적 가르침이라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정교일치의 나라에서 감히 유대교 우두머리이자 주류인 제사장들의 입장에 거스르는 사상을 전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이는 극형에 처해도 마땅한 행동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제사장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정말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갈릴리의 미천한 무리들이 성전과 제사장을 제쳐둔 채, 예수라는 인물을 내세워 새로운 종파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닙니까. 이는 명백히 하나님과 성전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교집단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제사장 그룹은 권력화된 종교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성찰하는 데 무기력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을 쥔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종교적 잣대로 볼 때, 예수의 처신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세리와 창녀들과 어울리며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속에 있다고 외쳤습니다.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 치켜세우고, 유대 사회가 떠받드는 종교지도자들을 위선자로 몰아붙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지키고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인정받는 부자 청년을 향해 ‘영생을 얻으려면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며,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가난한 백성들은 얼마나 신이 나고 통쾌했을까요.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데, 이보다 더 어렵다니 결국 부자는 천국 갈 수 없다는 소리나 매한가지입니다. 당시 부자의 그룹에 속했던 제사장들로서는 몹시 듣기가 거북한 얘기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제사장들이 지닌 상식과 소견으로 볼 때 예수와 그 제자들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단과 우상을 제거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의 주장을 입막음하기 위해 그들을 제거하려 마음먹은 것입니다. 저들의 외침이 하나님의 계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부족한 면이 있어 이를 깨우치고자 하나님께서 저들을 내세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자신의 욕망에 순종하려 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불신앙과의 싸움

기독교의 권력화는 기독교 내에 많은 병폐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과는 먼 길로 나아가도록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단이요 우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통해 우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단지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 하나님의 의도를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말리엘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망할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그것을 없애버릴 수 없으며 도리어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없애고 부수려 할 게 아니라, 그들을 통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으로 무장하게 될 때 그들은 자연스레 도태될 것입니다.

 

그들과의 전쟁은 사실 우리 안에 있는 불신앙과의 싸움이어야 합니다. 교리와 이론 다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백성에 적합한 삶이었는지를 따지고 회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불상과 단군상을 부수고,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외치고, 영화 <다빈치 코드>를 상영 금지시키고, 유다복음을 없애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이 철저히 회개하고 바뀜으로써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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