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을 하나님께 드린다?
많은 신도가 다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행4: 32~35)
우리 옛말 중에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돈을 벌 때는 일의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벌어도, 쓸 때는 보람있고 빛이 나게 쓴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돈을 쓰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버는 것은 그 결과가 자기 눈에 확인이 됩니다. 늘어나는 부에 대한 뿌듯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쓰는 것은 그 쓰임의 결과가 부의 감소로 나타납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투자는 쓰는 것의 범주에서 제외됩니다.) 물론 돈을 쓰는 행위 자체가 어렵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잘 쓰는 것이 쉽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개처럼 번다는 것은 아마도 편한 잠자리, 맛있는 먹거리, 좋은 옷 등을 마다하고 정말 궂은 일도 가리지 않으며 악착같이 버는 것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정승같이 쓴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돈을 흥청망청 많이 써댄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될 듯하고, 돈을 정승 자리만큼이나 값이 나게 의미 있게 쓴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게 적절할 듯합니다.
돈과 관련해서 언급되는 인간의 가치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사실 돈을 버는 능력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돈을 쓰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얼마나 벌었느냐가 그 인간의 가치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어떻게 썼느냐가 그 인간의 가치를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로지 돈을 버는 데만 신경 쓰는 사람은 반쪽 인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의 진정한 가치는 쓰는 행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따라서 돈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얼마를 벌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썼느냐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정말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앞선 주자였던 카톨릭이 부러워 할 정도로 재정 면에서는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우리도 다시 개신교처럼 십일조와 헌금을 강조해야만 개신교의 성장 속도를 따라 갈 수 있다고 어느 신부가 얘기했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있듯이 말입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구역헌금, 남녀전도회비, 주일헌금, 각종 절기 헌금 등 갖가지 항목의 헌금 목록에 맞춰서 한국 교회 성도들은 정말 열심히 헌금을 하였습니다.
십일조를 떼어먹으면 벼락 맞을지도 모른다는 믿음 앞에 경외하는 심정으로, 주실 줄을 믿고 빚을 내서라도 드리면 하나님이 몇 배로 갚아 주신다는 은혜(?)로운 설교 앞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은 성심껏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앙의 성숙 정도는 헌금에 대한 자세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로는 아니라고들 하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충분히 느끼며 그런 분위기에 알게 모르게 길들여져 왔습니다. 안수 집사나 권사나 장로나 모두가 봉사하고 희생하는 힘든 자리라고 말들 하지만, 그 자리에 앉으려면 헌금 얼마를 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이 동시에 마음에 새겨짐을 경험하여 왔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교회에 드려진 헌금은 다 하나님의 돈이 되는 것인가요?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일까요? 이사야서에서는 오히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을 역겨워하며 내치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 순간 하나님은 미소를 지으며 받으실까요, 아니면 분노하시면서 이게 다 무엇이냐 내게는 필요 없다 라고 호통을 치시며 거절하실까요. 대부분의, 아니 모든 성도들이 헌금을 하면서, 자신이 바치는 헌금에 대해 하나님이 분노하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절대 없을 것입니다. 혹시 좀 더 할 수 있는데도 믿음이 부족해 그것만 했느냐고 아쉬워 하실 수는 있어도, 하나님이 헌금 자체를 다 팽개치며 거부하실 것이라는 상상을 하는 사람은 거의 백퍼센트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또 자신이 드린 헌금이 전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성도도 좀처럼 없을 듯합니다. 물론 비즈니스적 차원에서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이란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 바치기 이전부터 이미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눈앞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쓰여진 돈과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쓰여진 돈이 있을 뿐입니다. 돈을 교회에 헌금하는 순간 그 돈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에 드린 헌금은 그냥 교회라는 공동체에 내놓은 돈일 뿐입니다. 내가 씀씀이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결정하게끔 맡겼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는 교회 공동체가 그 돈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써야만 비로소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을 따르자면) 하나님께 드려진 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내가 내놓은 돈을 가지고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에 적합하지 않게 사용하였다면, 나는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게 됩니다. 그래도 일단 교회에 바쳤으니까 어떻게 면피는 되겠지 하는 미신적 믿음에 호소해봐야, 이는 그저 무의미한 자기 변명에 불과할 뿐입니다.
교회에 드려진 헌금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서는 그 헌금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쓰여져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낸 헌금이라도, 그 돈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교회에 헌금하지 않더라도 내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였다면 이것이 곧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교회에 드렸느냐 안 드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쓰여졌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밭과 집을 팔아 교회 공동체에 내놓았습니다. 사도들은 이를 가지고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초대 교회 공동체에는 가난한 이가 없어졌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마, 초대 교회 성도들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 가난을 구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마음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내 것을 강조하는 사회입니다. 개인의 사유재산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내세우는 체제입니다. 특히나 한국 사회는 사유재산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무지막지하게 강조하는 사회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조차도 그러한 입장에 동의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하나님의 사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계명) 안에서는 재물이 절대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일 수 없습니다. 재물은 언제든지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그것을 혼자서 누리려 할 때,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진정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안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것을 제 혼자 독식하겠다고 주장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당연히 필요한 자들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믿지 않는 자만이 재물에 대해 나만의 것이라 호언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 바깥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교회 공동체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이를 거두어 교회당 치장을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궁핍한 자들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는 가난한 이가 하나도 없었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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