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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성전이라는 우상

by 【고동엽】 2008. 2. 26.
 

        성전이라는 우상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므로, 야곱의 집안을 위하여 하나님의 거처를 마련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집안을 위하여 집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말하기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 한 것과 같습니다. (행 6:46~50)

 

오래 전의 일입니다. 낡은 포니차를 끌고 다니던 친구가 갑자기 그랜저로 차를 바꿨습니다. 그 당시는 자가용차를 모는 게 그리 흔할 때가 아니었기에, 젊은 나이에 포니를 끌고 다니던 것만 해도 그럴 듯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랜저라니. 젊은 녀석이 너무 허세 부리는 것 아니냐고 구박을 했더니 친구는 이런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호텔에 일이 있어서 갔는데 마침 입구 쪽에 빈자리가 있어서 차를 대려 했더니 호텔 안내원이 뛰어와서는 여기다 대면 안 된다고 정색을 하더랍니다. 그리고서는 저 아래쪽에다 대라고 자리를 지정해줘서 그곳은 차를 대며 안 되는 자리인가보다 생각을 하고, 아래쪽으로 다시 내려가서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올라왔더니, 자기 뒤를 따라 왔던 비싼 차가 호텔 안내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자기가 처음 차를 대려 했던 곳에다 주차를 하더랍니다. 그 일을 겪고 난 뒤 열 받아서 그 길로 차를 바꿨다는 얘깁니다.

 

그 친구가 차를 바꾼 이유는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호텔 직원의 푸대접이 자신이 차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는 호텔 직원(세상 사람들)의 환대를 받기 위해서는 비싼 차로 바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대접(자신의 가치)은 자신이 몰고 있는 차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에게는 차가 우상입니다. 자신의 가치가 차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사물에 의해 자신의 가치가 결정되어지고, 또한 그것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좌우한다고 믿는 순간 그것은 바로 그의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전을 지었을까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집이 너무 초라해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윗 왕국의 성전이 고작 그 정도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것은 아닐까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하느라 빈약할 때에야 그 정도의 성막도 감지덕지였겠지만, 이제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어느덧 다윗 왕국의 위세도 커져 가고 있는 마당에 광야시대의 빛바랜 성막이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 궁전의 화려함에 어울리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왕국의 체면을 위해서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설명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스데반이 고백했듯이, 하나님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화려한 종교 사원은 항상 그 시대의 번영과 연관지어지곤 하였습니다. 즉 그 시대를 다스렸던 왕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는 말입니다. 종교 사원의 화려함은 그 시대를 다스렸던 왕권의 가치와 위상을 가늠하는 척도였습니다. 사원은 왕권의 우상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나마 때가 덜 묻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전 짓기를 포기했기에 그러합니다. 솔로몬의 시대는 왕의 부귀와 명성을 인근에 떨치며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의 호사를 누리던 시대였습니다. 숱한 외국의 공주들과 정략 결혼을 하고, 그들을 위해 궁과 사원을 지어주며, 온갖 사치스런 외국산 물품들로 도배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주변 나라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왕실이 호사하는 덕택에, 백성들은 그 뒷감당을 하느라 고달픈 노역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힘겨워하는 백성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왕권의 안정과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종교적 우상이 필요하였습니다. 온갖 호사스런 물품으로 치장한 성전이 화려함은 백성들 앞에서 솔로몬 왕권의 정당성을 대변해주고, 왕의 나라가 위대함을 주변 나라에 과시해주는 기능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정표라는 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별의 순간에 변함없는 사랑을 약속하면서 건네주는 물건입니다. 사랑의 확약으로서 주어지는 정표는 굳이 비싼 것일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체취가 묻어 있는 것이면 족합니다. 정표의 중요성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이 주었다는 사실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약속으로 주어진 정표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이 담겨있으며,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그의 약속이 녹아 있습니다.

 

정표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손에 쥐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으면 됩니다. 정표란 그가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데 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쓸데없이 그 정표를 비싸게 장식하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값비싼 장식으로 정표를 꾸민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약속이 더 잘 지켜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러합니다. 그저 가슴 깊숙이 받은 그대로 넣어두고, 항상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으면 그만입니다. 오히려 그가 내게 사랑을 확인해 주었던 그때의 상태 그대로 잘 보존하여 갖고 있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부귀영화를 자랑하려는 성전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광야시대의 성막은 임마누엘하시는 하나님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보잘것없는 인생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불쌍한 백성들을 압제의 상황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정표였습니다. 그 보잘것없는 백성들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늘 성막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하나님이 그들의 삶 가운데에 항상 임재하고 계심을 철저하게 믿고 느끼는 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 성막을 어떻게 값진 것으로 치장할 것이냐는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막은 내가 간직하기 위한 것이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런 삶의 현장에 나홀로 버려진 것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심을, 나의 고통 속에서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계심을 믿고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 성막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밈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성막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늘상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성전 건축 의도에는 과시의 욕구가 숨어 있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성전 건축에 대해 NO 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손에 묻힌 피는 땅에 대한 지배와 정복을 상징합니다. 이를 통해 다윗왕국은 부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손에 묻은 피는 다윗의 욕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전은 결코 지배와 정복의 손으로 지을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변 나라를 정복했던 다윗의 손은 화려한 성전의 건축을 통해 여전히 다윗왕국의 부귀와 영화를 자랑하려 할 것이기에 하나님은 성전 건축을 반대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은 왕국의 번영을 선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아름답고 값비싼 재료로 지어진 성전을 보며 감탄하는 사람들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감격이 아니라, 그 성전의 화려함을 가능하게 한 왕의 부귀와 권세에 대한 감탄이 있을 뿐입니다. 그 성전을 통해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지은 왕의 위대함을 칭송하게 되기에 성전은 우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벽돌집이 좋습니까, 대리석 집이 좋습니까? 대리석 집이 더 좋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집은 치장하면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치장할 줄 모르는 오만과 불신앙을 회개하십시오.”

 

하나님 대신에 성전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데 더 열심인 거짓 목자들이 즐겨 외치는 대사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자신의 가치를 유지해오던 대제사장 무리들에게 '성전을 헐라'는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불경스런 선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두고 이를 빌미로 자신들의 부귀와 영광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성전을 떠나시는 순간 알거지로 전락해버린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수백억 수천억씩 하는 예배당을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소명에 충실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화려한 성전을 마다하시는 하나님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뉴조유성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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