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세금내야
현행 소득세법에서는 종교인이 세금을 내지 않을 법적 근거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세청은 관행이라는 이유로, 종교인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괜히 건드렸다가 시끄러워질까봐 눈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자신들이 받는 봉급(사례비)이, 한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용돈 주듯이 혹은 자식이 부모에게 용돈 드리듯이 주는 것이기에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 믿는 듯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목사가 그 교회 일꾼으로서 사역하고 있기 때문에 매달 봉급(사례비)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수천만 원, 수억 원, 수십 억 원씩을 매해 연봉으로 준다면, 설령 법이 인정한 가족 간이라 하더라도 세무 당국에 양도세를 내야 하는 것이 정도(正道) 아닐까요.
대다수의 목사들은 이런 특혜를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아니 결코 특혜라고 생각지도 않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성직자라는 것이지요. 성직은 노동이 아니기에 노동의 대가로 받는 봉급이 없고 아무리 수입이 많아도 세금을 낼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직은 국가 세금에 관한 법을 가지고 재단할 수 없는 성역이나 치외법권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목사는 성직이므로 세상 법을 가지고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아무리 교회가 외쳐도, 대부분의 국민들은-여론 조사에 따르면 86%-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회나 국가가 법으로 목사를 성직이라 정해준 적도 없고 면세해주겠다고 공포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성직이라는 우쭐거림은 목사들의 자화자찬에 불과합니다. 성경 어디에 목사는 성직이라고 가르친 구절이 있습니까. 그래서 남들 다 내는 세금 내지 말라고 한 구절이 어디 있습니까.
성직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였습니다. 그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서 한 일이 바로 성직자들에게 면세 혜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교의 제사장들이 전통적으로 받아왔던 혜택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공공 및 사회적 의무에서도 성직자들을 면제시켜주었습니다. 군복무도 면제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성직자들에게 고정된 급여(사역 수당)를 주라고 명령하였습니다(프랑크 바이올라가 지은 <교회가 없다>(대장간) 중에서). 성직자라는 개념과 이에 따르는 면세의 혜택은 로마 이방 종교로부터 받아들인 유산이었지 초대 교회의 전통과 가르침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누구보다도 교회가 속해 있는 국가 공동체가 요구하는 기본적 의무를 정직하게 그리고 솔선해서 수행해야 합니다. 세상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이 의도하는 바도 바로 그러한 점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는 안 하면서 자기 권리만 주장한다면, 어느 누가 기독교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러한 행태는 결코 선교에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초대 교회가 사람들 사이에서 칭송을 얻은 것은 자기 이익을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제 것을 나누며 희생하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 중에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당시 천막은 바울의 출신지인 길리기아의 다소 근방에서 산출되었던 염소의 피륙이나 기타 가죽으로 제조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식들에게 기술을 한 가지씩 가르쳐주어 차후에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런 기술을 어떻게 익히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아무튼 그는 자신의 기술을 이용하여 여비를 충당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천막 만드는 사람이나 가죽 기술자들과 접촉하여야 했습니다. 그런 계기를 통해 천막 제조와 가죽 수공업을 하고 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만났을 것입니다.
성직이라는 말은 구별되는 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구별이 교회에서 사역한 대가로 돈을 받으면서, 국가에 세금은 안 내는 것을 의미해서는 정말 곤란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직은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사역함으로써 주어지는 명칭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누구나 다 자기가 일한 노동에 대해 어떤 명목으로든 간에 삯을 요구합니다. 사례비로 불리든 봉급으로 불리든 그 명칭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떤 명칭으로 불리든 일의 대가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다를 게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이 받고자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대형 교회 목사일수록 수입이 많아지는 것도 세상적인 모습이지 성경적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자기의 생활을 위해 돈을 스스로 벌고, 물질적 보상이나 사례를 받지 않으며, 희생하는 모습을 보고 성직이라 불러야 마땅합니다.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통해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말씀을 증거했듯이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들에게 주어지는 사례비는 더 이상 목사를 교회 내에서조차 성직이라 부를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교회에서는 교인들의 평균 수입과 비교해볼 때 더 많은 쪽에 속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눈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 할 수 있는 차선은 교회 밖의 누구보다도 더 성실하게 납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금을 안 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 해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향기를 조금이나마 세상에 드러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뉴조유성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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