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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씁쓸한 임직문화

by 【고동엽】 2008. 2. 19.
 

                                              씁쓸한 임직문화

교계의 신문에는 많은날에 임직식에 관한 광고가 난다. 목사 위임, 장로 안수, 집사 안수, 권사 취임 등 교회의 일꾼들을 계속 세워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임직문화는 개선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우선 선출 방식에 납득이 가지 않는 경우가 있다. 뽑기로 한 수가 그날 회의에서 다 안 뽑히면, 그 다음 주에 다시 선거를 한다. 끝이 없다. 원하는 수가 다 뽑힐 때까지 투표를 계속한다. 교인들은 지치고 선거는 계속 연기되고 후보자들은 몇 차례의 낙방(?)을 거쳐 억지로 선출된다. 득표율도 낮을 수밖에 없다. 예정한 수만큼 선출되지 않는다면, 그 결과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텐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 세 명의 일꾼을 선출하기로 하고는, 후보자를 세 명만 세우는 선거 방식도 있다.큰 교회에서는 당회가 뽑을 만큼의 후보자를 작성하여, 그걸 단체로 제출해서 편법으로 결정하거나, 선거 없이 당회가 일방적으로 임명을 하기도 한다. 공정하지 못한 선거도 볼 수 있다. 선거가 있는 날 집회에서 특정한 후보에게 사람들의 눈에 띄는 순서를 맡긴다든지, 설교나 광고를 통해 특정 후보를 보이지 않게 지원하는 사례도 있다.

사회적으로는 유력하지만, 교회 일꾼으로는 결격 사유가 있는 사람을 억지로 일꾼으로 세우기 위해 교회가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있다.후보자가 사전 선거 운동을 하는 사례도 있다. 교사나 성가대원, 선교회원들을 음식점에 초대하여 식사 대접을 하기도 한다. 어떤 교회에서는 선거철만 되면 큼직한 명찰을 달고 주차장에서 안내를 하는 이들도 있다. 안내위원도 아니면서 주보를 들고 교회 입구에서 교인들을 친절히 맞이하는 이들도 있고 또한 몰표가 나올만한 부서로 와서 봉사하라는 책임담당자의 이해관계에 얽히기도 한다.

요즘 세상 정치는 사전 선거 운동을 일체 못하도록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아직도 사전 선거 운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교회의 일꾼들을 반드시 민주주의 식으로 선출해야 하느냐는 점은, 논란의 대상이 되지만 민주주의 방식으로 교회의 일꾼들을 뽑다 보니, 교회 정치가 세상 정치의 축소판이 되어 많은 아쉬움을 남기기도한다.그래서 교회의 일꾼 선출에 다수결 투표 방식을 채택하지 말고, 초대 교회 때의 제비 뽑기 방식을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제비 뽑기 방식을 택한다 해도, 한계는 있다.

이왕 민주주의 방식을 택하기로 했으면 그 방식에 철저해져야 후유증이 없다. 객관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선출 방식은 반드시 후유증을 남기게 마련이다.문제는 교회의 직분을 명예나 계급으로 잘못 인식하는 데 있다. 교회의 임직문화를 오염시키는 인물, 직분을 명예직으로 인식하는 인물은 교회의 일꾼으로 뽑아 세워도, 결국 교회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임직식에 참석을 해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많다. 대형 화환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고, 부조금을 받는 접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도대체 결혼식장인지 회갑연인지, 칠순 잔치인지 알 수가 없다.

또 지나치게 순서가 많다. 외부에서 온 여러 사람들이 나가서 한 순서씩 진행하다 보니 지루하다. 비디오와 사진 촬영으로 경건한 분위기는 사라져 버리고 임직식은 예배 중심의 경건한 제자 파송식이어야 할 텐데, 축사가 줄을 잇고 상패와 기념품을 주고받는 형식적인 의식으로 변질되고 만다.정말 더욱 부끄러운 것은 임직식에 참석하여 한 순서를 맡은 이들에게 촌지를 주고, 임직식이 끝난 후 피로연을 갖는 일이다.임직식은 어디까지나 개교회의 내부 행사이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 시간을 이용하여 상급 기관의 감독자가 입회한 가운데 교인들끼리 내실 있게 치러야 할 일이다.

직분 받는 날은 십자가 지는 날인만큼 길거리에 플래카드가 나붙고, 화환이 전시되고, 음식점에서 피로연을 베풀고, 부조금을 접수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런 세속적인 임직식 문화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또 임직을 받았다해도 걱정이 많다. 그것은 돈때문이다.

대학교수가 되는데 뒷돈이 거래된다고 하여 자정을 결의하는 교수들의 모임이 생겨났다는 보도도 있다.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입학하는 데도 부정이 있었다고 한다.세상 사람들은 교회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라며 입방아를 찧고있는데 예를 들면, 장로가 되려면 얼마를 교회에 내야 되고 심지어는 얼마를 내면 장로가 된다는 얘기조차 들린다.교회 내의 형편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은, 교회 내부에 그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중세의 성직매매의 병폐를 연상케한다. 거액을 헌금한 사람, 부유한 사람에게 중직을 주고 있다. 교회 건축을 앞두고 건축비를 부담시키기 위해 임직을 하는 것이 오늘교회의 다반사다. 어느 큰 교회는 당회가 일방적으로 안수집사와 권사를 임명하고는 헌금 액수를 일방적으로 통보하여 반발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 직분별로 액수를 정하여 헌금을 한 사람에 한하여 임직을 시키는 교회도 있다.직분을 돈과 연결시키는 풍토는 뭔가를 기대하고 교회 뜰을 밟은 초신자들에게 큰 실망을 주게 된다.

더구나 가난한 임직자에게는 평생 봉사라는 큰 짐과 함께 이중적인 부담을 준다. 예를 들어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나이 많은 여성 교인이나 비신자 남편 둔 부인들에게는 임직 때 내는 헌금이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적금을 해약하여 헌금을 낸다고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거액을 내놓아 동료 임직자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임직자도 있다. 그래서 00교회는 아예 부담이 가지 않는 액수를 정해 놓고 그 이상 내지 않도록 당회가 지도를 하는 교회를 볼수도 있다. 임직자들이 해마다 액수를 올려 달라고 하지만, 당회는 상징적인 선을 넘지 않도록 잘 유지해 오고 있다.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일은 헌신의 의식인데 돈을 내야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준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일다.직분을 돈과 연결시키는 발상, 성경이나 교단 헌법에도 근거가 없는 헌금을 강요하는 관습은 교회 내에서 분명히 사라져야 한다.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냉정히 생각해 봐야 하겠다.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참으로 엄격하고도 권위 있는 절차를 통하여 일꾼들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일꾼들이 교회 일을 엄격하고도 권위 있게 처리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교회내의 직분받은 자들의 보이지 않는 계급의식이다.계급이 존재할 수 없는 교회 안에서도 직분 때문에 상처받고 서로 갈등하는 경우가 적잖다. 교회 직분은 흔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다양한 지체(肢體)로 비유된다. 지체는 그 하는 일에 구별은 있을 수 있으나 차별은 없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0-21)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마음속에 낀 앙금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교회 직분을 대하는 우리들의 의식은 이미 오래 전에 층이 나있다.

장로로 임직되는 순간부터 신분상의 변화가 교회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많은 교회의 경우 교회 주보에 목회자와 함께 나란히 장로의 이름을 올린다. 시무장로 뿐만이 아니다. 원로장로, 협동장로, 심지어 은퇴 장로의 이름까지 빠트리지 않는다. 마치 회사 등기부 등본에 이사 이름을 등재하듯 한다.

기록상 변화는 곧 행동으로 이어 진다. 다 같은 교인인데 누구는 교회 문 앞에 서서 주인이 손님을 맞듯 교인을 영접한다. 도열해 있는 장로의 순서에도 대부분 서열이 매겨진다. 목회자 옆에서 내미는 그들의 손을 잡을 때 마다 나는 그 교회의 영원한 손님임을 실감한다.

특히 대형교회에서 흔한 일이다. 직분이 사회적 신분상승의 기회로 왜곡되는 경우가 적잖다. 그래서인지 직분을 놓고 벌이는 다툼도 그 정도를 넘어 선다. 평등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지체임을 들먹이면서도 교회 직분에는 상승의 길만 있을 뿐이다. 직분 간 이동이나 순환은 없다. 이것 역시 직분의 층을 우리 스스로가 돋우는 또 하나의 제도적 모순이다.

안식일교에서는 목사가 은퇴 후에 장로로 봉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신선한 충격이다. 직분은 봉사다. 장로, 집사 직분을 맡는데 특별한 전문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교회 안에서는 직분 간 이동이나 순환이 불가능한지 모르겠다. 직분의 성(性)간 차별이 사라져가면서 교회 안의 직분은 오히려 세분화되었다. 직분이 늘어난 것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에 따른 명분과 이유만큼 임무의 한계도 분명하여야 한다.

초대교회에는 분명한 목적에 따라 직분을 세분하였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어떤 사람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엡4:11-12)이제 교회 주인의 자리는 주님께 돌려 드리고 우리 모두 성문 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비록 교회 안의 직분이지만 이웃을 위한 봉사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대사회적 사명임을 새롭게 인식하여야 한다.

그리고 또 교회내의 직분받은 자들의 보이지 않는 계급의식이다.계급이 존재할 수 없는 교회 안에서도 직분 때문에 상처받고 서로 갈등하는 경우가 적잖다. 교회 직분은 흔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다양한 지체(肢體)로 비유된다. 지체는 그 하는 일에 구별은 있을 수 있으나 차별은 없다.“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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