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광조 장로님 간증 출처보기
▶일본의 신사참배가 가장 심했던 것이 지금 북한의 수도인 평양 교회였어요.
아마 여러분,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을 겁니다.
‘한국의 예루살렘’ 또는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 교회’
우리가 지금 1천2백만 성도를 가지고 있다고 여러분들 자랑을 합니다만,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에 남북한 통틀어 예수 믿는 사람이 불과 50만도 안 되었어요.
그 중에 과반수가 넘는 28만이 바로 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양남북도에 살고 있었습니다.
평양은 그래서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명예스러운 별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이 우리 한국 교회에 대한 공격의 목표는
당연히 평양의 교회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양의 교회를 굴복시키는 것이
곧 전체 우리 한국 교회를 장악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평양 교회에 대한 핍박을 가장 심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 역사를 통해서 잘 아시겠지만
한국 교회는 다 쓰러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절박한 처지에 빠져있던 한국 교회는
이런 시련과 환난을 이겨 내고,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 이겨줄 수 있는
영적 지도자가, 당시에 절실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당시 평양 산정현 교회의 수석 장로님으로 계셨던 조만식 장로님은
한때 자신이 오산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있을 때
자기의 가장 사랑했던 제자 주기철이, 목사가 되어서
부산과 마산에서 신사참배 항거 운동에 앞장서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몸소 자신이 마산까지 내려와서
자기 제자였던 주목사를, 자신이 섬기고 있던 평양 산정현교회에 청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1년 전에 주목사와 조만식 교장선생님과 맺어졌던 인연으로 인해서
주기철 목사는 자신이 피 흘려 죽을 수밖에 없는 평양으로
1936년 입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사참배는 십계명에 대한 제1계명과 제 2계명에 대한 범죄요.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입니다.”
이 말씀은, 그가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가 되어서
첫 번째 강단에 올라서자마자 외쳤던, 설교의 첫 구절이었습니다.
“내가 배운 바도 많지 않고, 신학적으로 아는 지식이 많지 않지만,
그러나 한국 교회가, 평양이, 이 신사참배의 문제로 인해서
만약 나의 피를 요구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앞장 서서 흘릴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그 날 이렇게 쓰러져가는 한국 교회에,
마지막 횃불을 밝혔던 것이었습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에 담임 목사가 된지 1년 6개월 후에
교회를 새로 5층 건물로 크게 신축하고, 그 헌당 예배를 보기 직전에
그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인해서, 첫 번째 구속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해 1938년 가을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 27차 총회가 평양에서 개최되기 직전에
그는 두 번째로 잡혀가게 됩니다.
일본은 이 조선 기독교의 본산인 평양에서
총회로 하여금 신사참배에 찬성 결의를 공식적으로 하도록 계획을 세우고
그 일을 원활하게 진행하자면,
신사참배 찬성 안에, 결사적으로 반대할 것으로 믿어지는 주기철 목사님을
사전에 미리 제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938년 9월, 전국 27개 노회에서 목사 장로 선교사 등 총대 193명이
이 날 총회에 참석하고, 그 (총회 대표) 사이 사이에 97명의 일본 형사가 자리 잡고 감시하는 가운데서
마침내 신사참배 찬성 결의안은 가결되고
한국 교회는 일본 신 앞에 굴복을 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27개 노회장 목사 27명이
우리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고, 제 발로 직접 걸어서
평양 신사에까지 가서, 일본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큰 절을 하는
한국 교회의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남겼던 것이었습니다.
총회에서 신사참배 찬성 결의가 가결되었다는 소식을
그 날 밤 주기철 목사님은, 감옥 안에서 듣게 됩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 통곡하며, 이렇게 기도했다고
훗날 자신의 성도님들이 증언을 했어요.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져버리고 말았구나.
평양아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내게서 떠나가 버리고 말았구나.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나와 같이 울자.
드리리이다. 드리리이다. 이 목숨이나마 우리 주님께 드리리이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내가 그 칼날을 향해서 나아가리라.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끊으리요.
나에게는 오직 일사각오일 뿐이리라.”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의 문제로 자신의 믿음의 절개를 버리며
이렇게 소용돌이치고 있는 이 와중에,
주 목사님은 갑자기 평양에서, 경상북도 의성 경찰서로 압송당하는 사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1938년 12월 내내, 주 목사님은 (의성?)경찰서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갖은 고문으로 몸이 찟기고, 손톱 발톱이 다 빠지고
하루에도 기절하기를 여러 번. 추위와 배고픔과 육신의 고통을 더해서
죽음의 고비를 몇 번씩 넘겨야 했습니다.
훗날 주 목사님이 평양으로 돌아오셔서 (잠깐 출옥)
자신이 받았던 고통을 성도들에게 이런 표현으로 설교를 했어요.
여러 성도님들의 기도가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그 어려운 지옥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하룻밤 자고 나면, 동지 목사가 죽어서 들것에 실려 나가 버리고
며칠 후에 한 젊은 목사님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미쳐서
입었던 옷을 다 버리고 알몸으로 뛰쳐나가고
7개월이 지난 사이에, 70여명의 모든 동지가
혹은 죽어서, 혹은 불구가 되어, 혹은 병자가 되어
나머지는 다 일본에 항복하고 옥문을 나서는데
끝까지 혼자 남아서 그들과 투쟁했을 때
받았던 정신적인 고독과 외로움,
그것은 정말 견디기가 어려웠다고..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어쨌든 7개월간에 이 고통을 이겨내고 무혐의로 석방을 받아서
1939년 6월,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평양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그 날이 마침 주일날이었어요. 바로 교회로 차를 몰았고요.
그리고 11시 대예배 시간이 가까워오자, 그는 감옥에서 입었던 옷 그대로 걸치신 채
산정현교회 강단 위로 바로 올라섰던 것입니다.
주 목사님의 석방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던 평양의 성도님들 2000여명.
그리고 평양의 3개 경찰서의 고등계 형사 수 십 명이 주위를 포위한 채,
7개월 만에 돌아온 주기철 목사님의 첫 번째 말씀이 무엇인지
모두가 다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날에 주기철 목사님의 설교가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의 말씀이었습니다.
▶평양으로 돌아오셔서 약 7개월간 집에 머물렀습니다.
주 목사님은 총회의 신사참배 찬성 결의가 불법이라고 외치며
동료 교역자의 부끄러운 배신에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면서, 일본 제국과 투쟁을 하셨습니다.
일본 경찰은, 산정현 교회 제직들에게
주 목사를 강제 해임할 것을 강요했지만
장로님들에 의해서 이것이 거부당하자
그들은 그 해 (1939년) 9월 주기철 목사님을 다시 네 번째로 구속하고
평양 노회로 하여금 강제로 소집을 하게 해서
주 목사를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에서 파면처분 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항거하는 산정현 교회의 성도들을 수 없이 잡아가고
결국 교회가 너무 저항을 하니까
산정현교회에 들어오는 입구에다가 큰 못을 쳐가지고
교회 문을 완전히 폐쇄 처분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5년 동안 8.15 해방이 있을 때까지
산정현 교회 문은 다시는 열리지 못했고요.
온 교인들은 지하 교외, 갖은 교회로 숨어 들어가서
주일날만 되면 멀리서 교회 건물을 쳐다보고 눈물짓거나
새벽녘에 교회 처마 밑에 와서, 안에는 못 들어가니까,
밖에서 붉은 벽돌을 붙잡고 이슬을 맞으며
눈물을 흘리며 새벽기도를 드려야 했던 5년간에 환난이
그 이후에 지속되었던 것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되기 전까지 5년)
▶교회 문을 폐쇄한지 며칠 후에, 형사들이 목사관 사택으로 쳐들어왔어요.
그때 어머님이, 아버님과 더불어 감옥에 들어가 계시고
늙은 할머니이 저희와 함께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형사들이 뛰어 들어오더니,
있는 살림 다 끄집어내서, 자기들이 끌고 온 손수레에 전부 다 옮겨 싣고
목사관 사택에서 저희들을 추방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얻어놨던 조그만 방, 한 칸짜리 방에
저희와 할머니 할아버지를 강제로 이주를 시켰어요.
할머님이 안방 문고리를 붙잡고
‘하나님이 주신 집인데 내 아들 주 목사 올 때까지 나는 이 집을 지켜야 한다’고 막 버티니까
형사 하나가 오더니, 할머니를 안고 대문 밖으로 나와서
그 진흙길 위에 그대로 굴려버리고 말더라고요.
이로부터 저희 자녀들도 5년간 8.15 해방이 될 때까지
이 집, 저 집에 유랑 생활을 하면서 쫓겨 다니면서,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그 후로 5년 동안 지속되게 되었습니다.
▶1940년 4월 목사관 사택에서 추방되고 난 다음에
아버님이 처음으로 가석방이 돼서, 목사관 사택이 아닌 허름한 셋방으로
아버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회유는 계속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도 폐쇄되고, 당시 목사직에서 파면 처분 당해서, 이제 목사도 아니에요.
그러니 당신이 설 강단은 없어요. 또 들어줄 성도들도 없어요.'
‘주목사, 이제 설교로 외칠 자리도 없고, 외쳐 봤자 이제는 별 수 없지 않냐.
당신만 신사참배 안 하는 것, 우리가 보고도 모른 척 묵인을 할게.
그게 죄라고 남에게 선동만 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가족과 더불어 남쪽 고향(마산)으로 보내줘서 편안하게 살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주목사님은 자신의 평안, 그리고 가족의 행복마저 거부했습니다.
예배당을 빼앗겼던 성도들이, 아버님의 석방 소식을 귀담아듣고선
그때부터 저희 집으로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결국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방도 너무 비좁고 마당도 너무 비좁아서
하루에도 열 번씩 교대로 성도님과 더불어, 아버님이 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목사님은 그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외치셨습니다.
“우리 주님 나를 위해 십자가 고초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셨는데
내가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내 주님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는 오직 일사 각오일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그 향기가 남아있습니다.
이 몸도 더 늙기 전에, 더 시들기 전에
우리 주님 제단에 바쳐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당신의 늙은 어머님과, 병든 아내와, 어린 자식이
주목사님의 가슴에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버님의 설교는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고, 철썩 같은 마음이 무너지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에 그만 순교의 길에서 뒤돌아서는 자도 많이 있습니다.
이 육신에 얽힌 정에서부터 저를 좀 벗겨주시옵소서.”
주목사님의 순교의 뒤안 길에는, 이런 인정에 대한 애환이 잔잔히 깔려있습니다.
▶금년(2004년)이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꼭 60년 되는 해입니다.
오늘 같은 날, 그리고 주일 날.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를 할 때
주기철 목사님을 예로 인용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그 분들은 주목사님이 얼마나 의지가 강한 믿음의 용사요,
하나님에 대한 절기를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가족의 행복마저 거부했던
그런 순교자로 불리우고, 또 그렇게 설교의 예로 인용한 줄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알고 있는 저의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은
오히려 너무나 인간적인 평범한 성격이었고
너무나 인정에 약했고, 그는 너무나 눈물이 많았던 그런 분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닥치는 그 고문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도, 물론 견디기 힘들어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이 굶주림에 쫓겨 다니는 모습에,
남의 처마 밑에 가마니를 깔아놓고, 거기서 주무시고 있는 자기 어머니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시던 주 목사님(저희 아버님).
아버님이 잠시 출소해서 집에 계시는 동안
새벽녘에 종마루 마당에서 기도를 하고 나오시던 저희 아버님의 눈은, 그래서 퉁퉁 부어있었고,
불안한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막내둥이 저(주광조 장로, 설교자)를 껴안으시고
몸을 좌우로 흔들어대시면서(아이를 안아주시며) 엉엉 소리 내어 우시던 저희 아버님.
저는 그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막내 아들인 제가 기억하고 있던 아버님 주기철 목사님.
평범한 여자의 한 성실한 남편이었고
아이 넷을 두었던 자애로운 저의 아버님 이었습니다.
늙은 할머니를 모셨던, 효성이 지극한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다만, 다만..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이,
예수님을 향했던 그의 믿음이.. 이 모든 것에 우선했을 뿐이었습니다.
▶1939년 9월, 아버님은 네 번째로 잡혀가던 날 아침이었어요.
주목사님은 어머니하고 겸상으로 식사를 하시고
저와, 바로 위에 형님(3남)하고, 할머니하고는, 옆에서 둥근 상에서 밥을 먹었어요.
그날따라 어머님이, 아버님한테 아주 맛있는 밥을 해서 드렸는데
아버님이 제 숟가락을 입에 넣더니, 무릎을 탁 치시면서
‘이 밥이 이렇게 맛있는지 몰랐다’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안방 문이 와장창 열리면서, 고등계 형사 두 명이 구둣발을 신은 채로 안방으로 뛰쳐 들어와서
오랏줄(포승줄)을 뱅뱅 돌리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주목사 지금 밥 먹는 것 중단하라, 그건 네가 먹을 밥이 아니고
네가 먹을 밥은 우리가 준비해 놓았으니 가서 먹으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아버님은 한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계셨어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그래서 벌떡 일어나서 그대로 그들 앞으로 뛰쳐나가시며
‘나는 이왕에 하나님 앞에 바친 몸’이라고 하면서, 담대하게 손을 내미시는 (날 묶어서 가라고)
그런 주기철 목사님을 여러분들이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한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있던 아버님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평양에는 부엌하고 안방 사이에 쪽문이 있어요.
그 쪽문으로 뒤로 내빼더라고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버님이 그 때 도망을 가기 위해서 거기로 뛰었는지,
기도하던 동쪽 마루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거기로 기도하기 위해서 갔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 길로 뒤로 내빼버렸어요.
그날 자신이 어디 갈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아버지가
동쪽 마루에 들어와서, 가운데 기둥이 하나 있었어요.
기둥을 껴안으시고 그대로 쓰러지신 채
마치 어린아이가 울듯,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어요.
뒤 따라가던 저희 어머님이, 뒤에서 아버지를 끌어안으시고
두 내외가 같이 쓰러지셔서 우셨는데
저는 그 때 저희 아버지가 우시면서 하시던 그 기도의 모습이
도저히, 평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더는 이 육신으로 제가 못 이겨내겠습니다.
당신의 나라로 저를 빨리 좀 데려가 주십시오”
라고 엉엉 소리 내어 우시던 저희 아버님.
그 아버님을 뒤에서 껴안으시고, 같이 흐느껴 울부짖었던 저희 어머님의 모습은 이랬습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 전 성도님들이 목사님 한 분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가고 있는데
목사님이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시면 교인들은 다 어쩌라는 것입니까.'
두 내외가 기둥하나 붙잡고 쓰러지시면서 그렇게 우셨는데
그때 제가 보았던 저희 아버님의 발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적인 주기철 목사님의 진정한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아버님이 다섯 번째 마지막으로 연행되어 가던 날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 길이 자신의 마지막 길이라는 어떤 예감이 들었던가 봐요.
형사한테 양해를 구하고, 다시 안방으로 와서 늙은 할머니 앞에
엎드려 큰 절을 했습니다.
그때 할머니께 하셨던 마지막 작별 인사는 딱 이 한 마디였습니다.
“어머니, 하나님께 어머님을 맡겼습니다.”
그리곤 할머니의 손을 붙잡으시고는,
‘우리가 다 할머니를 위해서 통성기도를 하자’고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 불효한 자식은 제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합니다.
오, 주님 제 어머니를 주님께 의탁 드립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는
자비하신 주님의 보호하심이 더 나을 줄 믿고,
내 주님께 내 어머니를 의탁하옵고
이 몸은 주님이 주신 이 십자가를 들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겠습니다.’
그날 아침 우연하게 저희 집에 산정현 교회 성도님들 한 20여명이
아마 새벽 아침 일찍 예배 보러 찾아 왔던 것 같아요.
잡혀가시는 아버님의 모습에, 마당에 서서 고개를 다 푹 숙이고 있었어요.
목사님이 거기를 지나가려고 하는데,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노인 성도님 한 분이
앞으로 나와서 주 목사님 나가는 길을 막아버리고, 그 손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떨리는 음성이었습니다. 아주 더듬더듬 하는 목소리였습니다.
세상의 어쩔 수 없는 이 흐름을 탓하면서
‘목사님 현실이 이러니까, 그저 조금만 양보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목사님이 조금만 양보하면, 그저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될 텐데.
이제는 목사님 건강도 생각 하셔야지요. 가족들도 돌봐야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인들도 좀 보살펴주셔야지요.
밤낮 감옥 안에만 들어가 있으면, 우리 성도들은 다 어쩌란 이야기입니까.
목사님 그저 조금만 양보를 해주십시오.’
아버님은 그 성도들 앞에서 고개를 양쪽으로 흔들며
‘아니요.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인데, 이 길을 이렇게 막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 다 같이 예배나 봅시다.’
교인들 다 앞으로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제일 좋아했던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그 찬송가를 1절부터 5절까지 다 같이 불렀습니다.
제 기억에는 제가 이 세상에 나와서, 아버님 등에 엎혀서
제일 처음으로 배워서 불렀던 찬송가 같기도 해요.
그만큼 아버지가 이 찬송가를 좋아했어요.
이십 몇 년 전에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가 영화로 제작 되었을 때
제가 그래서 영화의 제목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고 그렇게 붙였습니다.
그 찬송가 1절에서 5절까지 다 부른 다음에,
목사님이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성경 한 구절을 찾아 읽어주었습니다.
아모스 8장 11~13절 말씀이었어요.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라’
이 성경을 읽어주신 다음에, 아주 짧게 그가 이 세상에 남겼던 마지막 설교를
불과 20여명의 산정현 교회 성도들을 앞에다 놓고
그것도 바깥마당에서, 마지막으로 해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이제 당하는 이 수욕을, 이 고난을 내가 이제 피했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이로움과 내 평안과 내 즐거움,
그리고 내 영광까지 다 받아 누리고
내가 준 그 고난의 잔은 어디에다가 두고 왔냐고 물으시면
내가 훗날 주 앞에서 뭐라고 대답을 해야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져야할, 주님이 주신 이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했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내가 준 내 유일한 유산인 내 십자가를
너는 어디다가 두고 왔냐고 물으신다면
내가 훗날 주 앞에 부끄러워 뭐라고 대답을 해야겠습니까.
나에게는 오직 일사각오일 뿐입니다.
주님은 골고다의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나에게 오는 자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의 생명보다 더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며
누구든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오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산정현 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면 끝나버릴 이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 봉양 누린다면, 그 아니 또한 즐겁습니까.
이 주목사가 죽는다고 슬퍼들 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비겁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을 향한 나의 정절을 지키고자 합니다.”
▶1940년 여름,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잡혀가서
일본 경찰은 최후의 발악으로 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 갖은 고문을 다했습니다.
인간적으로 견디기 어려웠던 지옥의 고통이
그의 피를 말리고 그의 뼈를 으스러뜨리고
그의 육신이 때는 지날 대로 지났습니다.
이 무렵에 이르러서는, 일경이 저희 가정에 대한 핍박이 아주 심해졌어요.
교인들이 저희 집에 출입하는 것을 전부 다 막기 시작하고
쌀 배급 나오는 것을 중단하다보니까, 그만 먹을 것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님은 ‘그대로 가만히 앉아서 굶느니, 차라리 우리 금식기도 하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한 달에 한 서 너 번씩, 삼일 금식기도.
주일마다 매일 하루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그때 너무나 배가 고팠어요.
그러나 아버님이 그러한 사람이거니 해서
'언젠가는 우리나라도 좋은 때가 오지 않겠느냐'. 어머님은 늘 그랬거든요.
'광복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걸 기다리며,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며, 허리를 졸라매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에 저희 어머님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아버님 면회를 가고는 했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저를 빼놓고 혼자서 자꾸 숨어서 가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아버님의 그 고문당한 비참한 모습을
불과 일곱, 여덟살난 꼬마인 저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어머님이 면회 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대문에서 어머님 들어오면, 어머님에게 삿대질을 하고 대들어서
‘어머니 왜 혼자 면회가. 나도 아버지 보고 싶은데, 왜 어머니 혼자 면회 가냐고,
나도 아버지 보고 싶으니 데리고 가라고’ 막 소리를 지르고서는
어떨 때는 제 발로 막 어머니 정강이를 차면서 막 떼를 쓰고 그랬어요.
물론 아버님을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만
제가 아버지를 꼭 만나야 했던 목적은, 전혀 엉뚱한데 사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들의 명분이 하도 당당하니까
결국 어머님이 어쩔 수 없이, 막내인 저를 데리고 가고는 했습니다.
면회를 갈 때마다 어디다가 숨겨놨는지 하여간
아버님에게 드릴 양식은 꼭 준비해 놓았더라구요.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국을 끓이고, 행여 식을까봐 보자기에 싸고, 타월에 감고 가슴에 품고
그렇게 하고 가지고 갔어요.
그러나 아버님은 늘 그 음식을 드시다 마시고 남겨서
옆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막내둥이 저를 쳐다보시면서
결국 숟가락을 놓으시고, 음식 그릇을 제 앞으로 밀어주시면서
‘광조야 너 이거 먹으라’고 밀어주시고는 했습니다.
아버님에게 한 술 한 점이라도 더 드시게 하고 싶었던 저희 어머님.
얼굴에 오만 인상을 다 짓고요. 눈알을 굴리면서 저보고
그 음식 받아먹지 못하도록 계속 신호를 보내주었습니다.
저는 어머니 얼굴 쳐다 볼 생각도 안 하고
아버님이 내밀어주시는 음식을, 그냥 다 낼름낼름 받아먹었습니다.
제가 아버님을 만나러 가야했던 진짜 이유가, 물론 아버지를 보고 싶기도 했지만은
아버님이 내밀어주시는 그 음식이 정말 탐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저도 너무너무 견디기 어려워서요.
먹을 것을 보며 침을 삼키는 아들의 애절한 눈망울에, 그만 수저를 놓으시고
그것을 제 앞으로 밀어 주시는 분이, 제 아버님 주기철 목사님입니다.
▶면회 때마다 아버님이 정상적인 몸으로 제 발로 걸어 나올 때는 극히 드물었어요.
남이 엎어오거나, 부축을 받고 나오실 때가 훨씬 많았어요.
꼭 한 번 제 기억에는 제 아버지를 누가 잡아주는 분이 없어서
삼층 계단으로 벌벌 기어오시다가, 면회실 문을 열고 네 발로 벌벌 기어들어왔어요.
어머님은 냉정하게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가서 아버지를 잡아 일으켜서, 의자에 앉히시고 면회를 다 마쳤는데
그 날따라 어머님이 면회를 빨리 끝냈어요.
그리고 아버님을 들여보내고 난 다음에
그 삼층 계단에서부터, 그렇게 정말 넘어질듯이 빨리 뛰어내려오더니
경찰서 문 밖을 나서서, 길가에 가로수를 껴안으시고
그 다음에 쓰러지시면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아마도 아버님이 네 발로 기어들어오는 그 모습에, 너무나 마음이 상해가지고
그러나 형사나, 자기 남편 앞에서 눈물을 피하고 있다가
면회 끝나고 난 다음에 밖에 나와서, 그렇게 통곡을 하셨던 저희 어머님을
저는 아직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면회 끝나고 난 다음에 옷을 갈아입히고, 헌 옷을 찾아서 나오지요.
그 헌 옷의 솜에 묻었던 피와 고름과 그 악취,
그것을 볼 때마다 할머니는 가슴을 치시며 우셨고
어머님은 뒤 돌아 앉아 눈물을 닦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고는 했었습니다.
▶1941년 어느 날, 일본 경찰이 어린 저(막내, 주광조)하고, 할머니하고,
어머님 셋을 아버님 면회하러 오라고 불렀습니다.
80세가 넘은 저희 늙은 할머니에게는, 절대로 면회를 안 시켰어요.
혹시 무슨 충격을 받을까봐요.
그런데 그 날은 할머니까지 모시고 오라고 해서, 저희들이 무척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날 갔더니, 그 유부장이라는 형사 부장이, 저희 어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잘 오셨습니다. 오늘 주 목사님을 풀어줄 테니까 모시고 나가세요.’
우리는 깜짝 놀랐어요. 갑자기 풀어준다고 하니까.
‘아 그래서 할머니까지 오시라고 했구나.’
그는 뒤돌아 웃으면서
그런데 저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고요.
‘뭐 주목사가 이뻐서 풀어주는 게 아니에요. 보기가 싫어서 풀어주는 것이니까, 그런 줄 아세요.’
이렇게 농담도 한 마디 하더니, 그 다음 말이 재미가 있었어요.
‘우리가 이렇게 풀어주면 고맙다는 표시는 해야 할 것 아니냐.
그 표시는, 지금 택시를 불러서 주목사를 태워서 보내 줄테니까
모시고 가다가, 경창리라는 동네에 잠깐 차를 세우고,
주 목사님이 차에서 수고스럽게 내릴 필요도 없어요.
차 안에 앉은 채, 창문만 열고,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고, 가족들만 함께 가는 것이니까.
그 창문 밖으로 바라보이는 평양 신사를 향해서,
그저 고맙다는 표시로, 그저 고개만 한 번 숙이고 가라’고 말이죠.
물론 어머님도 그런 조건으로는 모시고 안 가겠습니다.
물론 아버님도 그런 조건으로 내가 나가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자 지하 삼층 고문실로 저희들 세 사람을 안내를 해서 내려갔습니다.
조금 이따가 저희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왔더라고요.
저희를 보는데서 공중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네뛰기 고문이라는 건데요.
형사 몇이 나오더니 그 방에 있던 몽둥이, 칼, 그런 기구들을 들고서 두드려 패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치면 저기로 날아가고, 그렇게 두들겨 패더라고요.
뭐 경황이 없어, 아버님이 몇 대 맞았는지 기억이 안나요.
그러다가 한 스무대 정도 더 맞았을까요?
아버님이 축 늘어지더니, 공중에 매달린 채 그렇게 기절해버리고 말더라고요.
그런데 아버님이 기절하기 훨씬 전부터
제 옆에 있던 할머니가 고문 시작할 무렵에, 벌써 뒤로 휙 나가자빠지면서 기절해버리고
그 옆에 있던 저희 어머니는 고개 돌리더니, 정말 정신없이 기도만 하시더라고요.
아버님이 공중에 매달리니까, 형사들이 끈을 풀어서 땅에다 뉘여 놓고
찬물 몇 바가지 끼얹고 일으켜 세워서
조그마한 책상 위에 아버님을 딱 뉘여 놓고,
그리고는 책상을 우리 있는 데로 막 밀어놓더라고요. 아마도 쳐다보라는 뜻인가봐요.
형사 하나가 노란 주전자에다가, 검은 호스로 물을 받아서 가지고 오더라고요.
한 형사는 새빨간 고춧가루를 두 대접을 주전자에 넣어서
그것을 이제 아버님 입에다가 부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버님이 조금 저항하시는 것 같았는데
거즈 수건으로 코랑 입을 막아놓으니까, 숨을 쉬기 위해서 결국 코가 막히니까
입으로 숨을 쉬는데, 그러니까 물이 다 들어가더라고요.
얼마 있으니까 배가 불어오르고, 조금 있다가 축 쳐지면서
아버님이 그대로 기절하시더라고요.
배 위에다가 형사 둘이 웃으면서, 하나는 올라타고 하나는 짓누르는데
처음에는 입에서 코에서 귀에서 하여간 구멍을 통해서
그 빨간 물을 다 토해내게 하는데 일으켜, 세워서 저희를 쳐다보게 했어요.
옆으로 자꾸 넘어지시니까, 형사 하나가 받쳐서 저희들을 쳐다보게 하고.
그렇게 하고 형사 둘이 이쪽으로 오더니
그때까지 열심히 기도하고 있던 저희 어머님한테 달라붙었습니다.
1941년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 대동하 전쟁을 일으켰던 그 해였습니다.
평양 경찰소 지하실 고문실에서 그들이 여자한테 하는 고문이 어떤 고문인지
제가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여러분에게 설명드릴 길은 없습니다만
어쩌면 열 살난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처참했던,
사실 저희 어머님 볼 그럴 용기도 없었어요. 반대로 저희 아버님 쪽을 보았습니다.
'뭔가 아빠는 해줄 것이다. 엄마가 저렇게 당하고 있을 때, 아빠가 뭔가 해줄 것이다.'
자신의 아내가 당하고 있는 그것을 그대로
아버지는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눈과 눈 사이로 아버님하고 어머님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제가 보기에는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고
아버님이 너무나 야속해서, 그리고 아버님의 그 무심한 표정에
저는 오히려 제 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
절망의 증오와 슬픔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으로 하여금 이 처참한 광경을 서로에게 보여줌으로써
견딜 수 없는 정신적인 고통으로, 결국은 주 목사님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하는
그들의 술책이였습니다만
아버님이나 어머님이나 심지어 늙으신 저희 할머니까지, 그 고통을 잘 이겨냈습니다.
▶할머니는 집에 돌아와서 한 2주간 식음을 전패하셨고
정신이 나가서,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동네 밖으로 뛰쳐나가서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우리 주목사 살려내라’고 막 소리를 지르고,
어머님은 ‘저 어머니 정신 나갔는데 길 잃으면 큰일 난다’고
모시고 들어오라고.. 그래서 저희들은, 하루에도 열 번씩
집을 나서면서, 짜증을 내면서, 저희 할머니를 집으로 데리고 오곤 했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고문당하는 충격을 보았을 때, 제 나이 불과 10살이었습니다.
그날 면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더니, 집에서 일 도와주시는 여 집사님 두 분이 계셨는데
오늘 무슨 일 있었냐고 자꾸 묻더라고요.
그걸 뭐라고 설명을 하고 대답을 해야겠습니까. 그래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어요.
하룻밤 자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서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실어증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찾아오더라고요.
제가 한 3개월 고생을 했고, 그 이후에 아주 심한 말더듬이가 되어서
첫 마디 하려면 1분간 덜덜 떨어야, 겨우 한 마디씩 하고는 했습니다.
8.15 해방된 후에 한 2개월 지나서야, 제가 정상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늙으신 저희 할머니의 혼절에도 불구하고
주목사님이 그렇게 끝끝내 버텨야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아버님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아내의 처절한 고문을 지켜보면서도 무릎을 꿇지 않고
어린 자식의 울부짖음 속에서,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게 했던 것일까요.
과연 무엇이 주기철 목사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인정 없는 모습으로 변하게 했던 것이었을까요?
그까짓 말 한 마디만 잘 해주었다면, 온 가족이 얼마나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당신도 그렇게 힘든 고문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고,
할머님이 매일 밤 그렇게 흐느껴 울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저희 형님들, 우리는 아들이 4형제였어요.
▶첫째 아들 주영진
장남 주영진은, 이 당시에 아버님의 뒤를 이을 준비로
일본 동경에서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감옥에 들어간지 다음 다음 날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당했어요.
평양에 돌아와 일본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주영진 전도사님, 김덕성 사모님 순교사
20일만에 잠깐 풀려나왔을 때, 저희 어머님이 새벽기도에 안수기도를 해주더니
도망을 시키더라고요.
‘너는 다시는 평양에 돌아오지 말아라. 너희 아버님의 죽음만 족하지 너까지 죽을 필요가 없다.
우린 반드시 광복을 찾고 다시 독립되는 날이 오겠지만
그 날이 언젠지 모르니, 그때까지 너는 숨어서 살며 이 고비를 넘겨라.’
그로부터 5년간 8.15 해방이 될 때까지
큰 형은 팔도강산 안 간 곳이 없었고,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8.15 해방 이후, 이 형님은 경상남도 기장에 조그마한 어촌에서
열심히 고기 잡는 어부가 그의 직업이었습니다.
8.15 해방 이후에 평양에 돌아오셔서, 아버님의 뒤를 이어 목회를 했습니다만
6.25 때 끝내 평양을 지키다가, 아버님의 뒤를 이어 또한 순교를 했습니다.
형님이 순교하고 난 20년 후에, 1974년 1월 저희 형수도 복음을 전하다가 총살을 당했고요.
그 형님의 아들과 딸, 즉 제 조카가 둘이 있는데
평양에서 추방당해서, 지금 함경북도 산골짜기에 수용소에서
아주 힘든 삶을 지금 살고 있다는 소식을.. 최근에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든 큰 형님은, 그렇게 아버님의 뒤를 이어서 순교했습니다.
▶둘째 아들, 주영만
아버님이 다니고 있던 오산학교에 그대로 다니고 계시다가
역시나 퇴학처분을 당하셨고요.
8.15 해방 될 때는 일본으로 숨어들어가서 구두닦이와 배달(택배) 일을 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셋째 아들, 주영해
서울 한 교회에 장로님으로 계시다가 12년 전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이 분도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퇴학처분을 당했습니다.
16살 때 어머님이, 고향(마산)에 가까운 부산에 가서,
너 혼자 삶을 개척하라고 내보냈습니다. 부산 애린원이라는 고아원이 지금도 부산에 있습니다.
그 고아원에 3년 동안 살면서, 낮에는 나무로 통을 만드는 공장의 직공으로 있다가
8.15 해방을 맞이해서 불행하게도 해방이 된 다음에
이 형님은 연령이 초과가 돼서, 다시 학교로 복귀를 못했어요.
그것이 평생 한이 되어서, 아주 힘들게 어렵게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마 이 형님을 제일 예쁘게 봤던가 봐요.
이 분의 아들이 지금 목사(주승중)가 되어서, 할아버지 주기철 목사님과
큰 아버지 주영진 전도사의 뒤를 이어가고 있고
셋째 형님의 딸 셋이 전부 다 목사 사모가 되었습니다.
▲넷째 아들 주광조 장조 (설교자)
오늘 여러분 앞에 간증을 하고 있는 저는
아버님이, 제가 7살 때 감옥에 들어가셔서, 13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 기간이 저한테는 초등학교에 다닐 기간이었습니다만
세 형님들이 다 학교에서 줄줄이 퇴학 처분을 받아서
아예 저는 처음부터 학교 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문턱을 두들겨 본 것은, 8.15 해방이 된 다음
14살 때에야 비로소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던 13살 때, 제 직업이 평양 어느 치과의 급사.
그 넓은 마루에 걸레질을 하면서, 치과 기공소에 심부름을 다니며,
한 달에 27원씩 월급을 받아서, 늙은 할머니와 어머님의 입에 풀칠을 해 드렸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에 가졌던 갈등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남들 다 하는 것 처럼요.
그 날 아버님이, 물 흐르듯이 위에서부터 밑으로 내려가듯이
저희 형제들에게 그렇게만 (타협) 해주었더라도
우리 형제가 하늘 아래 고아가 되어서
이렇게 세상을 방황하여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왜 우리 아버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힘겨운 삶을 남겨주고
자신조차 이렇게 어려운 가시밭길 같은, 고난의 길을 외롭게 걸어가야만 했던 것일까요.’
제가 젊은 시절에, 이런 질문과 이런 방황이 끝없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변화된 것은, 그로부터 아주 먼 훗날 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주 목사님)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으로
제가 다시 하나님을 받아들이면서
이 힘들고 어려운 질문의 해답을 얻기는 했습니다.
▶그 처참한 고문 장면이 있고 난 한 달 후에
1941년 8월 25일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 경찰서에서 평양 형무소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리고 형무소에서 3년 동안 일본과 투쟁을 하시면서, 자신의 믿음을 그대로 지킵니다.
형무소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하는 것은
혹시 여러분 안이숙 여사가 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감옥살이 7년. 마침내 주목사님에게 마지막 순교의 날이 찾아옵니다.
1944년 4월 21일 이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다섯 시간 전에, 형무소 소장의 특별 주선에 의해서
저희 어머님과의 단 둘이 마지막 면회가 이루어졌습니다.
면회 직전에 형무소 소장이, 저희 어머님에게
면회 끝나고 난 다음에 곧 병보석으로 풀어 줄테니,
모시고 나가서 평양 기독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하면 곧 회복될 것이라고
비로소 선심을 썼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이미 주 목사님에게 해놓았으니까
두 분이 잘 면회하면서 의논에서 결정하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간수의 등에 업혀 나왔던 주기철 목사님.
한 간수가 저희 아버님을 업고, 두 간수가 양 쪽에서 엉덩이를 받치고 나왔는데
그 아버님을 맞이했던 저희 어머님 오정모 사모의 첫마디는 이랬습니다.
“주 목사님,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목사님의 승리가 바로 우리 한국 교회의 승리가 됩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이겨내도록 2천여 온 성도님들이
오늘도 밤을 지새워가며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그 말에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렇소,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오.
늙은 어머니와 내 어린 자식들을 당신에게 부탁하겠소.
내 하늘나라에 가서 산정현 교회와 조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소.
내 이 죽음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서, 조선 교회와 조선을 구해주기를 바랄 뿐이오.”
그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아무 미련이 없다는 듯이
다시 간수의 등에 업혀 뒤돌아서서
어머님이 그때야 비로소 ‘형무소에서 내 보낼터이니, 의논해라’는 말이 기억이 나서
그게 미련이 있어서, 아버님의 등 뒤를 향해서 외쳤습니다.
‘목사님 마지막으로 무슨 다른 부탁할 말씀은 없으십니까?’
간수의 등에 업히신 아버님은,
그때 고개를 뒤로 돌리면서, 저희 어머님을 쳐다보시더래요.
그리고는 손을 한 번 흔들어 주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사발 좀 먹어 보았으면."
이것이 그가 살아서 하셨던, 마지막 말씀이 되었습니다.
면회를 입회했던 형무소 소장이, 자기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 면회 장면과
그리고 그 부부간의 대화에 너무도 감동을 느꼈어요.
그래서 저희 어머님보고, 빨리 좀 모시고 나가라고,
빨리 가서 병원에 입원시키라고 사정을 했는데,
‘안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안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실 뿐입니다.’ 한 마디로 거절을 했습니다.
8.15 해방되기 1년 4개월 전, 아버님과 어머님의 면회가 있고 난 5시간 후에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주기철 목사님은, 7년간에 감옥살이 끝에 평양 형무소 차디찬 감옥 안에서
한 사발의 따뜻한 숭늉을 그리워하시며.. 이렇게 순교 하셨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 여덟이었습니다.
▶그 다음 토요일 날, 사과 궤짝을 임시로 엮어 만든 관에다가
아버님을 모시고 리어카에 태워서, 상수리에 있는 저희 셋방으로 돌아와서
시신을 방 한 가운데에 뉘여놓고, 어머님이 알콜 한 병을 약솜에다가 적셔서
상처 난 얼굴에서부터 발끝까지 씻어내려 가면서, 시신을 씻고 수의를 갈아입히시더라고요.
온 교인이 방에 꽉 차고, 마루에 꽉 차고, 마당에 꽉 차고,
들어오는 골목에도 꽉 찼어요.
입관 예배를 보려고 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늙은 할머니는 아버님의 가슴을 껴안고 있었고
저는 아버님의 발을 붙잡고 있었어요.
제가 당신의 육신이 보고 싶어서,
푸른 죄수 옷을 슬쩍 들어 올려서 저희 아버님의 발을 보았는데
발톱이 전부 빠져 뭉그러져 울퉁불퉁한, 시커먼, 세상에 그렇게 보기 싫은,
그렇게 흉한 발은 처음이에요.
저는 너무나 당황해서, 바로 그 죄수옷으로 아버님의 발을 확 덮어버렸어요.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조금 있다가 이 발을 씻기 위해서,
이 발을 씻을 때, 온 교인들이 그 아버님의 시커먼 발을 다 볼 것 같더라고요.
그게 어떻게 그렇게 부끄럽고 창피했던지 말이죠.
이것을 보여주면 안 되는데.. 하면서, 그것을 꽉 붙잡고 있었어요.
어머님이 위로부터 시신을 다 닦고, 마지막에 발을 씻을 차례가 되어서
‘광조야 손 치워라’ 하는데, 제가 손을 치울 수가 없었어요.
치우지 못하는 이유를 어머님께 설명을 해드려야 하는데
3년 전에 아버님, 어머님이 고문당한 그 충격 때문에, 제가 실어증으로 말을 제대로 못해서,
그 날도 말이 안 나와서 말을 못했어요.
어머님은 사정도 모르고 제가 발만 자꾸 붙잡고 있으니까
‘광조야 손 치우라니까 왜 그래?’ 나무라면서 제 손을 확 밀어버렸는데
아버님의 발이 보이는데, 어머님이 이렇게 보시더라고요.
그리고 그때 비로소 13살난 꼬마의 제 마음을 읽어서 제 귀에다 대고
‘광조야, 미안해’ 하셨습니다. 다시 가리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교인들이 보지 못하도록 발을 조금 올려서 아버지의 발을 씻기시고
흰 버선을 신겼습니다.
늙은 할머님은 아버님의 가슴을 껴안고 그대로 있었는데,
이제 입관해서 입관예배를 봐야 한다고
교인들이 저희 할머니에게 사정을 해서 좀 풀어주세요 그러는데
‘내일 아침까지 내 아들하고 오래간만에 같이 잘란다’ 그러면서
그대로 껴안으시면서 놓지를 않으세요.
시간이 너무 흘러서, 결국 어머님이 어쩔 수 없이
할머님하고 아버님 사이를 강제로 띄어 놓았는데
늙은 할머님이 며느리한테 그만 아들을 빼앗겼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그때부터 갑자기 가슴을 치시면서 대성통곡을 하시더라고요.
‘당장 죽은 주목사 살려내 놔라’면서.
온 교인들이 저희 어머님 때문에 울음을 삼키고 울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늙은 할머님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니까
그때부터 전 교인들이 그만 다 울음바다가 되어버렸어요.
울음소리가 너무 커지고 너무 오래 계속 되니까
시신 한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저희 어머님,
방을 쾅쾅 때리고 관을 쾅쾅 치면서, 교인들을 책망하는 거예요.
조용하지만 아주 엄숙한 모습이었어요.
“장로님, 집사님,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에요.
주목사는 결코 나약해서, 무식해서, 힘이 모자라서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 될 수 없어서,
당연히 가야할 길을, 피하거나 도망칠 수가 없어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 할 이 시간에, 살아남을 수 없어서 죽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당한 자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장례식 날, 저는 바깥 변소 간에 들어가서요.
안에서부터 문고리를 잠그고, 변소 안에서 혼자 하늘을 향해서 주먹질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 뭐냐고, 하나님이 살아있으면 이렇게 될 수가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어요.
우리 어머님, 저희에게는 늘 이렇게 이야기 했거든요.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금식 기도하고 철야 기도하고 새벽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주신다’고요.
저는 하늘을 향해서 주먹질을 하면서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이, 7년 동안 그 힘들었던 그 금식 기도의 응답이,
뼈하고 가죽 밖에 남지 않은 저 아버지의 모습이냐고.
내 아버지는 진짜 바보라고,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있냐고,
다른 목사님들 다 잘 먹고 잘 사는데,
다른 목사님의 아들 딸들, 다 잘 먹고, 잘 살고, 잘 입고, 학교도 잘 다니는데
내 아버지 오죽 못났으면
자기 자식들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놓고, 자기는 저렇게 죽어가느냐고'
저는 하늘을 향해서 주먹질을 했어요.
그러나 하마터면 끊어질 뻔 했던 한국 교회의 믿음의 전통을, 단절 없이 이어지게 하고
60년 이후에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내다보며,
또한 오늘날 이 교회의 젊은 청년들 여러분들의 이 예배 드리는 이 모습을 위해서
바라보며 기대하고 기대하며, 그는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찢기는 아픔에 신음하며, 붉은 벽돌(감옥) 너머로 가족을 너무너무 그리워했던, 그런 분이었어요.
아마도 당신의 긴 세월 동안 당했던 육체적 고통과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야 했던 그 아픔과
목사로서 노회에서 파면 처분을 당하고, 친구 목사들에게는 왕따를 당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양들과는 오랫동안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런 모든 괴로움이
아마도 주목사님을 몹시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생각해봅니다. 그러면 주목사님은 다른 사람과 무엇이 달랐던 것인가?
왜 아버지로 하여금 그 어렵고 힘든 가시밭길을
그는 혼자 외롭게 걸어갔던 것이었을까?
아마도 반드시 지켜야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단호한 그의 믿음 때문이겠지요.
이는 설교 중에 ‘일사각오’라는 그런 표현을 썼습니다.
주목사는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지켰어요.
거기에 이런 저런 상황윤리나, 시대의 형편을 접목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모보다, 처자식보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했기에,
그것을 위해서 그 나머지를 포기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뒤돌아보고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주 단순하게 하나님 말씀을 지킨 것뿐인데
그로 인해서 그의 인생은 가시덤불이 되었고
그의 몸은 찢길 대로 찢겼고, 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그냥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했고요.
하나님이 하지 말란 것은 하지 않은, 그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어찌 보면 저희 아버님이 너무너무 미련해 보였던, 그런 아버님같이 보이기도 했어요.
조금만 머리를 굴려서 조금 적당히 (타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아버님은 그런 적당한 것을 용납하지 못했고,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스럽게 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저 4남 주광조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질문에 해답을 얻었고요.
아버지의 그 고난의 선택의 정신과 사랑에,
감사와 긍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두 아들의 아비가 된 후에야
어린 자식을 뒤로 하고 홀로 죽음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아버님의 그 고민, 고뇌를
이해하게 되었고요.
제가 한 여인의 남편이 된 후에야
병든 아내를 뒤로 하고, 홀로 죽음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님의 그 마음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이제 제 나이 일흔 세 살입니다. (주광조 장로님, 2011년 소천)
이제 와서 60년 전에 저희 아버님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것은
옛 추억이 아프기 때문이 아니에요.
가정에 등을 돌렸던 내 아버님의 원망 때문만도 아닙니다.
아버님이라는 이름이 내게 주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아버님의 대한 사랑과 존경이 제 눈가를 적시는 거예요.
저는 주기철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해요.
자신의 믿음을 세상의 명예와 평안으로 바꾸지 않았던,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말로써 예수 사랑을 주장하지 않고
행동으로 예수 사랑을 보여주었던 당신을,
말없이 죽음에 이르는 투쟁을 통해서 후배인 우리들에게
‘죽음에 이르도록 믿음을 지키라’는 가장 큰 교훈을 주셨던 주기철 목사님,
<예수 사랑, 나라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자기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그것을 실천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주기철 목사님,
그런 믿음의 선배를, 오늘 저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존경합니다.
▶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순교는 누구나 다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이, 전부 다 그렇게 순교 할 수도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내린 큰 축복이라고, 저는 지금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 오늘 우리의 시대에 볼 것 같으면
우리는 <순교적인 정신>은 꼭 가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이 되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면서
우리는, 앞서가신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그 순교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가서
정말 내 자신 하나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나라를 구하고, 우리 교회를 구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일을 해야겠다는 그런 각오를, 그런 결단을,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이,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의 그 믿음의 간 길을
다시 한 번 뒤따라가면서, 깊이 결단하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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