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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치유설교 42편

분노의 원인, 결핍의식 시131:1~3

by 【고동엽】 2025. 1. 15.

분노의 원인, 결핍의식                        시131:1~3              

 

1.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이제 시작된 2019년 하루하루가

주님의 은혜안에 살아가는 나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신가요?

 

기대감이 혹시 있으십니까?

아니면 뭔가 불길한 조짐 때문에 묘한 알수 없는 불안감이 있으십니까?

혹은 아무 기대감 없이 무덤덤하게 새해를 맞이했습니까?

 

◑분노 사회

 

신문에 보니까 지난 한해 동안 SNS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가

‘혐오’ 그리고 ‘분노’였다고 합니다.

 

분노가 우리 사회의 기본 정서라는 것이죠.

이것은 갑자기 생겨난 정서가 아닙니다.

 

수년 전부터 사회학자들은 우리 사회를

‘분노 사회’ 혹은 ‘우울 사회’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최근에는 ‘파편 사회’라고도 하는 말도 등장했습니다.

 

문제는 왜, 무엇 때문에, 누구를 향해서

분노하고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본인 자신도 잘 모르고요,

그리고 그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도 잘 모릅니다.

그만큼 분노의 원인이 많고 복잡하다는 뜻이겠죠.

 

그렇기 때문에 분노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원인을 알면 해결되는데 원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분노를 마음에 꾹꾹 쌓아 놓고 삽니다.

마음에 쌓인 분노는 그 사람의 정서를 우울하게 만들지요.

 

굳이 우울증 진단을 안 받고 우울증 약을 안 먹는다 해도

일상이 늘 우울한 사람들 우리 주변에 참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또 다른 사람들은 분노를 아무에게나 표출합니다.

마치 ‘누구든 나를 건들이기만 해봐’ 라고 작심하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해 보이거나

혹은 아무런 저항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작은 트집을 잡아서 큰 분노를 쏟아 놓습니다.

그것을 요즈음 갑질이라고 부르지요

 

한동안 약자들 즉 乙들이 이 甲질을 그냥 참고 지냈는데요

최근에는 乙들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고 분노를 표출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힘을 어떻게 해서든지 사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乙질’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이렇게 서로의 분노가 충돌하다보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파편처럼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 분노의 감정을 파고들어 가면 결국 <결핍의식>에 닿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다 있는 것이 나에게만 없다싶으면

그런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살고 있는 것같은데

나만 가난하게 사는 것 같을 때

혹은 다른 사람들은 일이 척척되는 것 같은데

왜 나만 하는 일마다 안 되는 가 싶을 때,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나 혼자라면 하루 한 끼 먹어도 자족할만한데요

바로 옆에서 세 끼를 먹는 사람들이 있으면

무언가 빼앗긴 느낌이 드는 것이죠. *상대적 박탈감, 상대적 빈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빼앗길 만큼 잘못이 없단 말이에요.

그러면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요.

 

새해를 시작하는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신지요?

지금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 여러가직 감정이 뒤섞여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도 있겠고, 염려하는 마음도 있겠고

섭섭함도 있겠고, 분노도 있을 것입니다.

 

그 감정들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혹시 여러분의 마음에도 분노가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왜 분노가 여러분 마음에 똬리를 틀게 되었는지요?

 

 

◑하나님께는 ‘결핍’이 없습니다.

 

요즘 들어서 지난 주부터 창세기를 읽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과정을 큰 그림으로 그리고요

2장으로 가면 카메라에 포커스를 인간의 창조 과정에 맞추어서 작게 그리고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하루를 마칠 때 마다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바라보시면서 ‘좋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조의 6째날 인간의 창조를 마치고 모든 창조를 다 마쳤을 때는

‘참 좋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거기 ‘좋다 good’ 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는

모든 것이 온전한 상태가 되고

또 서로 어울려서 군형과 조화를 맞추고 있는

그런 평화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결핍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충족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 보아서 그렇다는 것이죠.

 

▲창조의 6일이 지난 후에 하나님은 쉬셨습니다.

하나님이 쉬셨다는 말을 우리가 쉬는 것처럼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일을 하다가 힘이 빠지면 쉬지요

 

일하기 싫어도 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하기 싫어서 혹은 피곤해서 쉬신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끝까지 창조하신 것이 그분은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일을 하다가 지치기도 하고 싫증을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지친 몸을 회복하기 위해 쉬실 필요가 없습니다.

 

7번째 날에 하나님이 쉬셨다는 말은

피곤해서 일을 안 했다는 것이 아니라

일을 다 마치고 완성된 피조 세계를 감상하고 축하하고 즐거워하셨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6일 동안 일하고

제 7일에는 안식하라고 말씀하셨지요.

이 ‘안식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안식을 모델로 삼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일손을 멈추고

하나님이 이미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을 바라보면서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으로 즐거워하며 나누고 축하하고 감사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주일 동안 일하면서

우리가 빠졌을지도 모르는 결핍의식을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그런 충족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합니다.

 

 

◑성도는 결핍의식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일주일 동안 혹은 어떤 분들은 주일까지 열심히

일하십니까?

지금 이 시간 좀 곰곰이 따져보십시다.

여러분이 일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필경 그 대답은 무언가 부족하다고

무언가 나에게 더 있어야 한다고

무언가 모자란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돈일수도 있고 권력일수도 있고 쾌락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고 싶은 칭찬과 인정일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좀 더 열심히 일하면 이 부족한 것들을 채울 수있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의 삶은 좀 더 행복해 질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진실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이 결핍되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게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이렇게 예배드리는 이유는

이 진실을 기억하고 축하하고 선포하고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내게 뭔가 부족해 라고 하는 결핍의식을

벗어나서 충족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언가 부족한 것을 끊임없이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채워진 것으로 감사하고 축복하고 나누라는 것이지요.

 

▲이 결핍의식이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오는지

우리는 창세기 3장과 4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 나무 열매를 먹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 많은 과일나무 중에 딱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허락되지 않은 것이지요.

 

수 천 수 만 가지의 열매가 다 허락되고 딱하나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결핍이 아니지요.

 

거대한 식품점에 진열대에 있는 그 모든 음식들이 손님들에게

다 허락되어있습니다.

딱 하나 카운터에 갖다놓은 주인의 도시락만큼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에 만족했습니다.

충족의식으로 살았습니다.

아무런 결핍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 마음에는

결핍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가게 안의 그 많은 음식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주인옆에 있는 도시락만 자기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일단 그것이 마음에 쓰이고 나니까

결핍의식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죄란 항상 이러합니다.

사탄은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기도를 통해서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런데 우리 마음에 죄를 향한 욕망이 아예 없으면

그 누구도 우리를 흔들 수가 없습니다.

충족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사탄은 절대로 흔들수가 없습니다.

 

▲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그는 동생 아벨의 제사를 제사는 받아들여지고 자신의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인해 분노합니다.

 

성경에 보면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졌다고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요.

분노가 그 사람의 얼굴을 얼마나 사납고 험상 굳게 만드는지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분노의 이유를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 빛이 달라지겠느냐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한다.’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여지고

가인의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성경은 분명이 말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 자신의 잘못은 아랑곳 하지 않고

하나님과 아벨에게 분노하지요

그것은 죄가 그의 문에 도사리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었습니다.

 

분노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정확해 표현할 수 있을까요?

분노를 품고 사는 것은 죄가 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서

문에 도사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분노를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죄를 다스리느냐 죄가 그 사람을 다스리냐가가 결정됩니다.

마음에 쌓아두지 말아야 할 것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분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얼굴을 악하게 만들고요

우리의 혀를 비수처럼 만들구요.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요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죄에 넘어지게 만듭니다.

 

가인은 결국 죄에 압도당하게 되지요.

동생 아벨을 죽여서 인류 최초 살인자가 되고

그리고 그 죄로 인해서 그의 후손이 두고두고 죄값을 치러야했습니다.

 

가인의 불행도 결국은 결핍의식이 낳은 것입니다.

성경은 가인의 제물에 무슨 결함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합리적인 추론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제물 자체에 결함이 있거나, 드리는 사람의 마음에 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왜 하나님께 받아들이지 못할 제사를 드렸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일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하는

그런 충족의식에서 살았더라면

그가 드리는 제물에 결함이 없었을 것이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기뻐하신다고 했고요

인색하지 않은 제물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가인은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가인이 보기엔 자기에게 부족한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는

마음에 중심을 드리지 못했고,

제물에도 마음을 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동생 아벨은

하나님으로 만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다고 믿었습니다.

 

때로는 부족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핍도 역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믿었기에 그는

하나님께 아낌 없이 정성을 다해

최선의 것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아벨의 마음과 아벨의 제물은

결핍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충족의식에서 나온 것이었죠.

 

◑충족의식, 결핍의식

 

이 세상 사람들은 결국 둘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이 세상과 우리 인생에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고 보고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과 우리 인생은

이미 필요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고 믿고 감사하며

나누고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결핍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매사에 비판적일 가능성이 크고,

충족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매사에 긍정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여러분은 둘 중에 어느 쪽에 속하십니까?

 

불행하게도 우리 대다수는

결핍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치열한 전투력, 치열한 생활력이 어디에서 옵니까?

결핍의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공한 이후에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그들의 가정생활이

일반적으로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뼛속 깊이 배인 결핍의식 때문에

충분히 성공한 이후에도, 여전히 결핍을 느끼기 때문인 것이죠.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라고해서

결핍의식에서 예외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본성이 있어서

이미 충분히 만족할 상황에 있음에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결핍을 느낍니다.

 

그래서 충분히 만족할 만큼 돈을 벌었는데도 여전히

돈에 메어있게 되고

충분히 행복한 가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바람을 피우는 것이고

충분히 여유가 생겼는데도 여전히 인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인생여정을 잠시 돌아보았습니다.

 

▲저는 40대까지 상당한 결핍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10대 때에는 도시로 유학 온 시골출신의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분투했고요,

 

20대 때에는 인류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30대에는 제가 목표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치열하게 분투했습니다.

그동안에도 저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의 믿음은 저의 결핍을 채워주는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그 치열한 분투로 인해서 어느 사이에 속도 광이 되었습니다.

제가 목표하는 것을 최단 시간에 이루기 위해서

부지런히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인해서 이룬 것도 많았고 얻은 것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삶의 총체적인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30대 후반에 건강에 문제가 생겼구요,

저의 영혼의 구름이 짖게 깔리는 것을 경험했구요

삶의 권태가 끼어들었습니다.

 

겉으로는 목사요, 신학교수로서 신실하고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고,

제가 맺은 관계가 좋게 보였고요 많은 일을 행했지만

제 안의 결핍의식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제가 그동안 노력해서 얻은 것들은

저의 결핍의식을 해소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강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동안 제가 즐기지 못했던 그 것들을 흘끔흘끔

곁눈질로 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들은 대개 일탈을 꿈꾸고 탈선을 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저는 그동안의 저의 믿음을 모두 부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저의 결핍의식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없어서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영국시인 프랜시스 톰슨은 ‘하늘의 사냥개’라고 하는 시의

한 구절에서 말했듯이

내가 하나님에게 만족하지 못하니

다른 모든 것에도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죠.

 

그동안 저는 분주하게 신앙생활을 했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추구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저의 관계가 지극히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진짜 결핍을 채우기 위한 씨름을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 영적 씨름을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함을

차츰차츰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저를 새롭게 발견을 했습니다.

 

그제야 지난 40년동안 저를 사로잡고 있던

결핍의식, 때를 따라서 일을 달리해가면서 끊임없이

저를 고통스럽게 하던 결핍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그 분안에 머물러 있다보니

그 분이 이미 다 이루신 것을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 안에 있으면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음을 알겠더라는 것이죠.

 

▲제가 오늘 읽은 시편 131편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저의 가장 애송하는 말씀으로 삼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의 시편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경험한 후에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를 시작합니다.

우리 첫 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주님 제가 이제 교만한 마음을 벗었습니다.

오만한 일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분에 넘치는 놀라는 일을 이루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교만은 자신의 분수의 넘치는 생각과 행동을 말합니다.

신이 아니면서 신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교만과 오만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도 아나무인격으로 행동하게 되죠.

너무 큰 것을 가지려는 것,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는 것은

모두 자신에게 있는 결핍을 채우려고 하는 몸부림을 말합니다.

 

▲다윗도 저처럼 결핍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지요.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그러한 분투를 멈추고 하나님의 품으로

향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몸에 생긴 질병 때문일 수도 있고요, 관계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결핍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분투했는데

그 결과로 인해서 자신의 인생이 총체적으로 손 쓸 수 없이

망가진 것을 발견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찌됐든 그는 그 결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만족과 안식을 얻고 나면 그동안 무엇인가가

결핍되어있다고 느끼면서 살아온 것이 실은 속은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제는 결핍된 것을 채우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채워진 것을 감사하고 축하하고 나누고

기뻐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전과 같이 열심히 일하지만

전과는 다른 목적으로 전과는 다른 태도로 일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를 이어갑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안합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안에 안겨있듯이 내 영혼도

젖 뗀 아이와 같습니다.

 

젖먹이 아이는 어머니 품에서 자주 보체고 울지요

하지만 젖 뗀 아이는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어머니의 따듯한 체온과 어머니 품에서만 나는 그 향기로운

향기를 느껴가면서 그 따듯한 품을 느껴가면서

그냥 있는 것으로 족하지요.

 

다윗은 하나님안에서 만족을 찾은 자신의 영혼이

바로 그렇다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시편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다윗이 체험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 하라는 말은

다른 일을 하지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고백을 한 후에도 다윗은 많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다만 전에는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제는 물질적인 것에 대해 자족하고

만족할 만한 영적인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더 이상 서두르거나 닥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길을 분별해 가면서

부족하지만 저도 저의 체험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있습니다.

 

제 인생의 전반 40년은 결핍을 채우기 위한 분투였구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한 후 지끔까지 20년은 하나님안에서

얻은 만족과 안식에 근거한 삶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그리워질 때 저도 여전히

어김없이 결핍의식이 살아나서 조급해지고 불안해지는

저 자신을 봅니다.

 

다행이 이제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압니다.

그렇기에 그런 것을 느낄 때마다 일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그 분 안에서 만족하고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안식의 마음으로 다시 일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살면서 체험한 진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십니다.

제가 신실하게 주님안에 머물러 있으면

필요한 일은 주님께서 다 하십니다.

반면, 제가 주님과 상관없이 허둥대면 제 스스로 분주하면

저만 피곤해지구요, 열매는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새해 첫 주일 저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에게

이 평안과 만족과 안식을 맛보시라고 권면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그것을 맛보고 계신 교우들이 많이 계십니다.

하지만 더 많은 분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결핍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계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결핍되었다고 하는 생각 속에서

그걸 채우려고 몸부림치는 한 우리는 분노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결국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에는 더욱더

하나님을 찾으십시다.

하나님의 품을 찾아 그 분안에서 만족하고 그 분안에서

안식하고 그 분안에 모든 것이 있다는 사실에 눈 뜨십시다.

 

하나님안에 있는 한 어떤 일이 나에게 찾아와도

그것은 재앙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십시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지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도무지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다 준비해 두셨습니다.

 

문제는 그분을 따라 우리 스스로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서

살아가려는 우리의 바람난 마음에 있습니다.

 

모든 것에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결핍을 느끼게 되고요, 그 결핍을 위해서

허덕이는 무한 허덕이는 그런 무한궤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시기

바랍니다.‘하나님 안에서 여러분을 새롭게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결핍의식으로 허덕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만족함을 얻은 사람으로 그 안식과 만족과

평강을 전염시키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간절이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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