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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회개설교 100편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 3 연약함 막14:43~52

by 【고동엽】 2024. 12. 29.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 3 연약함         막14:43~52

 

◑서론

 

지난 2주에 걸쳐서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살펴보고 있는데,

십자가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면

십자가 앞에 서는 사람, 또는 십자가를 맞이하는 사람 안에 있는

죄의 민낯들을 다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숨겨져 있고, 나도 잘 모르고 있고,

어떨 땐 눌려 있는.. 그런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다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능력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 드러내는 능력이 십자가 안에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처리하셨는지를 정확히 우리에게 알려 주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그 죄의 모습들,

우리 안에 있는 타락한 현실들,

우리 안에 있는 무기력함들.. 그런 것들을 드러내시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리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알게 하시는 것을 넘어서,

실제로 그것을 처리하셨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죄들,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함들,

그것들을 실제로 다 처리하셔서

더 이상 그 죄의 영향과, 그 연약함 아래 살지 않을 수 있도록

해방 하셨다는 거예요.

 

롬8장에 보면, 복음안에서 우리가 해방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음이라..'

십자가에서 드러내는 것들은 그래서 축복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맞이할 때 드러나는 것들이 있는데

그 드러나는 것들은 사실 아주 당황스러운 것들입니다.

 

'아니 내 안에 이런 게 있었어?'

그 죄의 모습들, 타락한 현실들,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이고 추악한 모습들

막 이런 모습들이 드러나면 당황스럽죠.

 

당황스러워서 어떻게든지 무마하려고

막 이리저리 당황해서 뛰어다니게 되는데,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드러내는 것들은 감사한 거에요.

드러내신다고 하는 것은, 그부분들을 처리하신다는 뜻이에요.

 

물론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다 처리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특별히 우리 내면 안에 있는, 깊은 내적이고 영적인 문제들은

내가 인식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처리했어도, 내가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처리 된 것들을 우리가 다 누리고

더 이상 죄에 종된 것이 아니라, 해방된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해방시키기 위해서, 우리 죄와 연약함들을 드러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안에 십자가로 인해서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면

당황하지 마시고, 그것들을 오히려 축복으로 취하십시오.

 

그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저와 여러분을 해방 하신 것이 십자가에 능력이고,

은혜인줄 믿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를 잡으러 온 부류, 대제사장의 종들과 유다.

-예수를 따르면서 지키려고 하는 부류, 물론 제자들이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뭐냐면, 십자가가 다가오게 되자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드러내는 민낯은 동일하다는 거예요.

 

무슨 얘기냐면,

-예수를 대적하고 잡으러 왔던 사람들에게서는 죄가 드러나고,

-예수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두 부류 다 죄와 연약함이.. 비슷하게 똑같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현실이에요.

인간 안에는 어떤 의로움도 나올 수 없다는 거예요.

 

비록 우리가 예수 편에 선다고 할지라도

'예수가 옳은 것 같아, 나는 예수께서 하신 말에 동의해'

이렇게 우리가 지적으로 동의하고, 예수 편에 선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와 추악함 들이 있다는 거예요.

 

많은 경우에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편에 서 있으면, 의로운 존재가 된다고 생각을 해요.

 

네, 신분상으로 의로운 존재가 되는 거는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는' 거지요.

 

신분상 의로운 존재가 되고, 의로움의 옷을 입혀 준다 그랬어요.

그 말은 '옷 안에 있는 존재는 여전히 추한 나'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를 의롭게 봐 주시고, 옷 입혀 주시는 거죠.

의롭게 칭해 주시는 거지, 완전한 의에 이른 것은 아직 아니죠.

 

저와 여러분은, 심지어 거듭났다고 해도

우리 안의 죄가 다 해결된 게 아닙니다. 그렇죠?

거듭났다고 갑자기 의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죠.

 

우리 안에는 여전히 그런 죄와 타락과 더러운 현실들이 그대로 존재하지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거듭난 후에도

깊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십자가를 대면하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보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이러잖아요.

 

그렇지 않다면, 회개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한 번에 끝나는 거라면!

그것을 성경에서는 '성화 과정'이라 그러죠.

 

우리의 신분이 의롭게 되는 건 한 번에 이루어져요. 칭의로.

그렇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의 현실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루어지는 것은, 한꺼번에 되는 게 아니에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어쩌면 우리가 이 땅에 삶을 다 마치고 영화롭게 될 때까지 끝나지 않아요.

 

이땅을 살아가는 우리 안에는, 여전히 십자가를 대면하게 되면

뭐가 올라온다는 거예요? 죄와 추악함들이 올라온다는 거예요.

 

우리는 의롭게 된 존재들이 아니고, 의롭다고 칭해주신 존재들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예수께서 매일매일 날마다 날마다.

우리가 대면하는 우리 안에 있는 죄악들을

십자가에서 실질적으로 처리하심으로 말미암아

조금씩 조금씩 죄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가시는 거지요.

 

조금씩 조금씩 죄의 권능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점점점 예수께서 원하시는 그 온전함으로 하루하루 나아가는 과정가운데 있는 거죠.

 

그래서 어쨌거나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한 쪽은 죄고,

-또 한 쪽은 의로움이고..

이런 것이 아니라, 두 부류 다 죄와 부족함이라는

타락한 죄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게 참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지요.

인간은 비록 예수 편에 서려고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안에 의로움으로 충만케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와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대적하는 편에 서 있던,

-아니면 예수를 지지하는 편에 서 있던,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드러나게 되는 타락한 인간의 민낯은 뭐냐면

죄와 연약함 입니다. 오늘 살펴볼 주제죠.

 

사실은 근데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똑같지는 않아요.

여전히 죄와 타락이긴 하지만, 조금 다른 종류의 죄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연약함도 죄입니다

 

죄와 연약함,

사실 이 둘은 같은 말이에요.

 

사람들은 '연약함'은 죄와는 다른 거라고 생각합니다.

연약한 것은 그냥 연약해서 못 한 거지

악의적으로 죄를 지은 건 아니라고 생각하죠.

연약하고 좀 능력이 부족한 것 뿐이지.. 그렇게 정당화시키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인간의 죄와 연약함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리고 오늘 등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을 보면

 

1) 첫 번째, 예수를 대적했던 사람들에게서 드러나는 죄는

대부분 '하지 말라'는 것을 어기는 죄에요.

악의적이고 반역적으로 범하는 죄입니다.

 

2) 두 번째, 반대로 예수를 지키려고 했던 제자들에게 드러나는 죄는

악의적 죄는 아니에요.

대신에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연약함'의 죄였어요.

 

이런 두 종류의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둘 다 같은 죄라는 거죠.

 

인간의, 제자들의 '연약함'이 죄인 이유는

그런데 성경에서 얘기하는 '죄'가 무슨 뜻입니까?

히브리어로 죄는 '하타' 인데, '표적에서 벗어나다,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성경이 원래 얘기하는 죄는 뭐냐면

막 악의적인 의도로 거짓말하고, 살인하고..

그건 죄의 결과이고,

 

성경에서 얘기하는 죄의 본질은 뭐냐면

'기준에서 벗어난 것, 표적에서 벗어난 것, 기준에 미치지 못한 것'

그것이 성경이 얘기하는 죄라는 거예요.

 

그래서 원래 성경이 얘기하는 죄는 뭐냐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원형이 있죠.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죄로 말미암아 거기에 미치지 못 하게 된 거에요.

원래 우리를 창조하신 그 온전한 모습, 기준에 미치지 못 하게 된 거죠.

그것을 죄라고 얘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함'이라는 것은, 당연히 죄요, 죄의 결과, 죄악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롬3: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게 정확히 그 얘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인간의 온전한 모습이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온전한 모습, 즉 그 '영광'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서,

누구도 그 영광에 이르지 못 했다는 거에요. 기준에 미치지 못 했다는 거에요.

그게 죄입니다.

 

그래서 죄는, 구체적으로 두 종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죄가 있고,

-둘째는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못하는 죄가 있죠.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연약함의 죄)

 

십계명도 보면 죄가 크게 두 개로 분류됩니다.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

 

-반면 마땅히 해야 될 것들이 있어요.

부모를 공경하라, 안식일을 지켜라.. 마땅히 해야 될 일이 있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경우.. 이것도 죄입니다. (연약함의 죄)

 

1) '하지 말라' 계열의 죄를 범하는 것은

보다 적극적이고 악의를 가지고 범하는 죄에요.

 

분명히 '하지 말라' 그러셨는데, '싫어, 나는 할 거야!'

그 마음에는, 반항하는 마음, 악의가 있는 거죠. 이것은 악의적인 죄입니다.

 

2) 그런데 '하라' 계열의 죄는, 물론 악의적으로 짓는 경우도 있지만,

연약해서 죄를 짓는 경우가 많아요.

 

마땅히 해야 될 바가 있는데, 어떻게 살다 보니까 놓쳤어요.

마땅히 우리가 그렇게 해야 되는 건 아는데

너무 연약해서, 막 정신이 없어서, 몸이 아파서

그래서 못 할 수도 있잖아요.

 

근데 어찌되었던 간에, 이 둘은

원래 창조하신 원형의 모습에 미치지 못하는 거에요.

원래는 이렇게 지으시지 않으셨다는 거죠.

 

그런데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로 인한, 죄의 결과, 죄악된 상태 (원죄)이기 때문에 2가지 죄를 짓는다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는 죄의 모습을 보면

이 두 종류의 죄가 다 같이 드러납니다.

 

'죄'라면.. 자꾸 우리는 우리 컨셉의 '죄'를 생각하지만

성경적인 죄의 컨셉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악의적인 죄도 드러났지만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죄, 즉 우리의 연약성도 함께 드러난다는 거죠.

 

◑본론 /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의 죄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던 사람들의 죄

 

▲1. 불법

이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죄는, 악의적이고 적극적인 죄인데요.

 

배신한 유다가 검과 몽치(몽둥이)를 가지고 예수를 찾아옵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또는 십자가가 드러내는

이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의 죄악은, 연약함이라는 소극적인 죄가 아니에요.

 

악의를 가지고 예수를 해치려고 하는 적극적이고 악의적인 죄입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불법'입니다.

 

이들이 지금 예수를 잡으러 왔는데

잡는 것 자체가, 잡는 프로세스 전체가 다 불법이었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로마 군인도 아니고, 대제사장의 부하들입니다. *성전경비병

그들이 종교적인 이슈를 가지고,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어요.

이것은 당연히 불법입니다.

 

이것만 불법이었던 것이 아니라

이 재판 과정 전체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모든 프로세스가 다 불법이었어요.

 

얼마나 불법이냐면, 새벽에 체포 되셨거든요.

그리고 십자가 돌아가신게 그날 12시 정오였거든요.

여러분 말이 됩니까? 이렇게 진행되는 재판과 처형을 보셨나요?

 

그러니까 재판다운 재판이 없었다는 거예요.

재판을 하려면 적어도 증인들 얘기도 들어 봐야 되고,

진짠지 아닌지 판단도 해야 되고,

아무튼 몇 개월씩 걸리잖아요...

 

당시가 아무리 고대사회 였다고 해도,

아니 몇 시간 만에 어떻게 재판을 끝내고 십자가에서 사형을 집행합니까?

이것은 전체가 다 불법인 거예요.

 

이게 종교재판 이라고 해도, 모세의 율법에 의해도

적어도 3명 이상의 증인을 취해야 되고,

모세의 율법에 의한 재판과정도 하나도 따르지 않았어요.

 

그리고 나온 증언들을 보면, 사실은 예수를 죽여야만 할 중죄인이라는

증인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냥 바로 즉결 처분해서, 십자가에 매달게 했습니다.

 

완전 날치기 졸속 재판을 한 거죠.

뭐 군사독재 재판에서 찾아보기 힘든, 그런 날치기 재판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이 십자가앞에서 드러나는 죄의 민낯 중 하나는 '불법'이라는 거죠.

우리 안에도 이런 불법이 행해진다는 거예요.

 

이런 '불법'은 세상에 나쁜 사람들만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수많은 불법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은, 힘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불법을 행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이 '나는 그래도 불법을 행하지 않아' .. 그 이유는 뭐냐면

힘이 없어서 그래요. 착각하지 마세요. 힘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는 말이 있죠.

그래서 권력을 가져야 되는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나는데

권력이 없었으면 너무 착하고 온순하던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게 되면, 자꾸 슬금슬금 불법을 행하게 되요.

원래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건데.. 막 그렇게 하고 하지요.

 

그런 기간이 오래 지나다 보면, 그걸 또 당연하게 생각하게 돼죠.

그래서 요즘 가장 유행하는 말이 '내로남불' 이죠.

 

아니 딴 사람들이 했을 때는 그게 중죄라 그러다가,

자기들이 그런 힘을 갖게 되어서 행하는 것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에요.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라는 거죠.

 

인간이 불법을 행하지 않는 이유는, 힘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여러분들 착한 이유는, 힘이 없어서 불법을 행한 만만 힘이 없으니까, 착해 보이는 거죠.

 

아무리 위대하고, 아무리 착하고, 아무리 인성이 성숙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절대 권력을 갖게 되면, 100% 다 타락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힘을 가지면,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면 인간은 할 수만 있다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일로 인해서,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피해를 입게 되고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빠지고... 그런 것보다

내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고자 하는 욕망이 훨씬 큰 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인간 안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다'는

제어할 수 없는 그 욕망을 그대로 놔두면.. 사회가 엉망이 되니까

그렇게 못 하도록 누르는 게.. 법질서죠.

 

그렇지 않다면 뭐하러 법질서를 만들겠어요?

사람이 다 각자 그냥 알아서 한다면,

자기 욕망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산다면.. 법이 필요없지요.

 

법을 만들어 놓은 이유는, 사람이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힘을 빼앗아서

자기 마음대로 못 하도록 하는 게 법질서죠.

 

그래서 법질서가 존재한다는 거 자체가 뭐예요?

인간은 그냥 두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법이 없이 사회가 온전하게 돌아가는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없지요.

한 번도 없어요. 그렇게 돌아간 역사가 없어요.

 

그것은, 인간은 힘이 있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존재라는 거죠.

 

그래서 그 힘을 제어하기 위해서, 법을 만들어서, 그 욕망을 눌러놓는 거죠.

그렇게 하게 되면, 벌금 내야 되고, 감옥 가야 되고...

그러니까 그걸 안 하는 게 아니고, 못 하는 거죠.

그게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불법'의 본질이고, 사실은 성경이 얘기하는 죄의 본질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구 하려는 것!' *불법의 정의

 

요한일서에 죄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일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이게 죄의 본질이라는 거예요.

성경이 이야기 하는 선악과, 그 원죄가 뭐에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게.. 바로 죄, 불법이라는 거예요.

'죄는 불법이라' 요일3:4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 이게 선악과잖아요.

아무리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해도,

내가 따먹고 싶어.. 그러면 하겠다는 거죠. 이게 불법인 거죠.

 

'아무리 하나님이 금하셨어도, 내가 하고 싶은 거니까 나는 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금하셔도,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합니다. 그게 죄요, 불법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넘어서는 거에요.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무엇이 법이고, 무엇이 불법 인지도 아예 내가 정해요.

그게 선악과의 의미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는 내가 결정 하겠어!'

그래서 그냥 선을 넘어가는 불법 정도가 아니라,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불법인지 자체를 내가 결정하겠다...

이게 여러본, 죄의 본질이고

저와 여러분의 깊은 뿌리 속에 다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거예요.

저와 여러분 안에도, 겉은 멀쩡해 보여도

안에 들여다 보면 이게 다 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고,

내가 내가 원하는 대로 기준을 정하고 싶고,

내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결정하고 싶고'

 

그래서 요즘 가장 많이 유행하는 게 '내로남불' 입니다.

기준을 내가 정하는 거에요.

 

내로남불이, 저는 성경의 죄를 가장 잘 묘사하는 단어라고 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그 기준을 그냥 내 스스로 정하는 거죠.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거죠.

그게 죄의 가장 뿌리입니다.

인간은 '다 자기는 의롭고, 다른 사람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해결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거에요.

그래서 선과 악 자체를, 나를 중심으로 결정하던 인간의 죄를 드러내시고,

회개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기준은 하나님 한 분이신데

그걸 다 무시하고, 내가 마음대로

'나는 의로운 존재고, 저 놈은 나쁜 놈이다'

'나는 옳고, 저 놈은 틀렸다' .. 이게 불법의 본질입니다.

 

'죄는 불법이라' .. 그 기준을 자기가 정한다는 거죠.

 

▲2. 폭력

십자가에서 두 번째로 들어가는 죄는 폭력입니다.

 

막14:47~48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칼, 검, 몽치.. 다 폭력입니다.

예수를 잡으러 온 자나, 예수를 지키려 온 자나.. 다 폭력을 사용합니다.

 

불법의 결과는, 많은 경우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데, 저들이 안 따라주죠.

그러면 힘을 쓰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안 따라주면

요즘에는 폭력을 함부로 쓰지 못하니까,

SNS 등에 올리거나, 악성 댓글을 다는 거죠. 인격적 폭력을 사용하는 거죠.

 

본문에 보면, 예수를 지키는 자도 그랬고

예수를 잡으러 온 자도 똑같았어요.

그들은 검과 몽치를 가져오고, 베드로는 칼을 빼서 대항하고..

 

불법과 폭력은 모두 자기중심성의 악의적 표현입니다.

물론 다른 모든 죄들도, 역시 근본은 자기 중심성 이지만

특히 불법과 폭력은, 자기중심성이 거의 아무 여과없이 그대로 표현되는

죄의 날 것, 생생한 모습입니다.

 

내 안에 있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라는 선악과에 유아적인 민낯을

비열하고, 악의적이고, 비인격적으로 표출하는게.. 폭력이에요.

 

이 '폭력'이라는 죄는, 죄 중에서도

가장 유아적인 죄고, 비열한, 비인격적인 죄에요.

 

왜 유아적이냐면, 힘자랑 하는 거잖아요?

'내 힘이 세잖야!'

오죽 못났으면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겠어요?

딴 걸로 안 되니까 폭력을 쓴다는 거죠. 가진 게 그것 밖에 없으니까.

비열하고, 비인격적인 죄입니다.

 

▲3. 위선

세번 째로 드러내는 죄는 '위선'입니다.

 

45절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참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지금 예수를 배신하고 팔아넘기는 상황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고 인사했다는 거에요.

이게 위선이죠.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는 죄의 민낯 중 하나는 위선입니다.

위선이란 뭐냐면, 꾸며내는 선이라는 것이죠.

 

사람들은 배신하고, 폭력과 불법을 행하면서도.. 겉으로는 선한 척 보이고 싶어해요.

이게 죄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거죠.

 

내 속으로는 미워하고, 욕하고, 배신하고 이러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안 그런 척 하는 거죠. 아주 고상한 척..

 

그래서 폭력이 유아적이고 비열하고 비인격적인 죄라면

위선은 역겨운 죄입니다.

 

위선은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겉행동이 다른 거예요. 그래서 역겹죠.

그만큼 위선은 더럽고 추한 거예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위선할 수 있어요.

우리 본 모습을 그대로 다 까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면

쪽팔려서 어디 숨어 있지, 여기에 이렇게 나와서 앉아 있을 수도 없어요.

우리가 어느 정도 위선의 옷을 입고서 여기 나오는 거죠.

 

그래서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그래서 내 위선이 드러난다면

민망해요. 당황스러워요.

그렇지만 우리는 대면해야 돼요.

십자가는 우리를, 그 위선의 사슬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십자가가 드러내는 죄의 두번째는 "제자들의 죄"입니다.

 

이들은 연약해서 '하라' 그랬는데, '하지 못하는' 죄를 짓습니다.

이들은 꼭 악의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아니에요.

 

근데 우리 안에 "연약함" 때문에, 그렇게 하게 되죠.

이런 종류의 죄가 있다는 거예요.

 

마땅히 해야 될 것을, 연약함으로 하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 제자들의 연약함의 죄의 첫 번째는

'마음은 원하지만, 하지 못하는 연약함' 입니다.

 

38절에 보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타락한 인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마음이 원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그 마음에 원하는 것 조차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분명히 예수께서 굉장히 힘들어 하시는 걸 제자들이 알았어요.

'야,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데?'

 

이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때 우리가 깨어서 기도해야 되겠다. 우리가 기도로 주님을 도와야지..'

분명히 마음은 그런 마음이었어요.

그러나 현실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 했습니다.

 

마음만은 확실했습니다. 기도할 마음은 분명히 있었어요.

그런데 몸은 안 따라가요.

 

여러분, 이게 바로 타락한 인간, 하나님을 떠난 인간,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자기 삶의 통제권을 잃어버린 인간..

 

죄의 한 가지 결과는, '자기 삶의 통제권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연약함을 묘사하는 가장 정확한 표현 중의 하나예요.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어요?

천하 만물을 다스리도록 창조하셨어요.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땅과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위대한 존재로

만드셨어요. 이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이었어요.

 

그런 영광과 위대함으로 인간을 만드셨는데

그런 위대한 존재가, 만물은 고사하고

자기 삶의 통제권도 제대로 발휘를 못 해요... 타락한 결과죠.

 

만물은 고사하고, 자기 육체 하나 통제를 못 해요.

만물은 고사하고, 자기 삶의 통제권 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기 삶의 통제권을 계속 유지하고 계십니까?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삶이 움직여 지십니까?

마음이 원하면, 행동이 따라주십니까? 안 돼지요.

 

'이번 주부터 내가 매일 새벽에 1시간씩 기도할꺼야!'

그 진심을 제가 믿습니다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거죠.

 

'오늘부터 내가 절대로 화를 내지 않을 거야'

그 진심은 제가 알아요. 그런데 안 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도다'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연약함도 죄죠.

 

그런데 더욱 더 심각한 것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통제되지 않는 삶이 너무 오래 되니까.. 익숙해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그게 그냥 당연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원래 인간은 그런 거야'

'인간이 어떻게 원한다고, 원하는 대로 다 되겠어? 원래 안 되는 거야..'

더 이상의 기대도, 더 이상의 소망도, 더 이상의 변화에 대한 노력도 없게 되죠.

 

이 패배감이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면, 패배가 당연한 게 되어버리죠.

통제가 안 되는 게,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면,

통제가 안 되는게 당연하게 되어버리죠.

 

그래서 심지어 예수 믿고 거듭난 후에도,

실패는 당연한 거고, 삶이 통제되지 않는 것도 원래 그런 거고..

결심해도 결심한 대로 안 되는 것은 뭐 당연한 거고...

예수 믿고 나서도 그렇다는 거죠.

 

죄의 결과에 굴복한 채, 패배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면서 살아갑니다.

여러분, 이거 당연한 게 아니지요.

이건 여러분의 운명도 아니에요.

 

원래 여러분의 데스티니가 뭐예요?

만물을 다스리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게 데스티니 입니다.

 

내 삶 하나 통제가 안 돼 가지고..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이게 우리 데스티니가 아니라는 거에요.

 

그건 여러분, 죄입니다.

왜 죄인가 하면..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 하는 거거든요.

원래 여러분을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거든요.

 

원래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을 때는,

내 삶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만물을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된 모습으로 만드셨다 말이에요.

 

이게 저와 여러분의 운명, 데스티니 인데

거기에 훨씬 못 미쳐서, 내 마음대로 삶이 통제되지 않는 이 비참한 현실,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이 비참한 현실,

이 무기력한 현실이 죄의 결과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삶이 통제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에요.

삶이 통제되지 않는 것은 '내 의지가 원래 그런 거야' 그런 게 아니에요.

 

죄의 결과예요. 기억하십시오.

성경에 뭐라고 했냐면, 성령의 열매 중에 self-control 이 있어요.

절제입니다.

 

절제란, 내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삶을 다스리는 것이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절제'가 있다니까요.

 

즉 예수 믿는 자들에게는 원래의 데스티니가 회복되어서

우리 삶이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거예요.

 

삶이 허물어진 사람들, 계속 그 허물어진 채로 살아가면 안 돼요.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도 안 돼요. 삶이 세워질 수 있어요.

성령 안에서 열매 맺어 가면, 삶이 세워질 수 있어요.

우리 삶이 변화될 수 있어요.

 

그 기대와 소망을 다시 붙잡아야 되는 거예요.

 

삶이 컨트롤 안 된다고 '아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하면 안 됩니다.

예수 안에 새 생명 얻는 성도는.. 하루 아침에 되지는 않아도

점점 자기 삶을 컨트롤 해서, 창조의 원형을 회복해 나갑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삶의 통제권을 되찾아 올 수 있어요. 셀프 컨트롤!

내 삶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주 안에서 거룩한 소원들을 이루어 갈 수 있고,

주 안에서 거룩한 열방들을 섬기며 살 수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예요.

다시 여러분 소망을 붙잡으셔야 돼요.

 

물론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라고 했는데,

열매를 거두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씨를 심었다고 그 다음날 즉시 열매를 먹는 건 아니지요.

과일 나무는, 묘목을 심은 후에 5년씩 걸려야 열매가 자라는 거죠...

 

▲2. 두 번째로 나타나게 되는 제자들의 연약함의 죄는

'무기력함과 그로 인한 비참함' 입니다.

 

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위기 앞에서의 무기력함 입니다.

삶을 파괴하고 망가뜨리는 위기가 닥쳤는데

제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리고 이 무기력함은 비참함을 동반합니다.

바로 조금 전에 뭐라 그랬어요. '제가 죽는다고 해도, 도망 가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단언해 놓고도,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는 거에요.

이 제자들의 마음이 복잡하지 않았겠어요?

 

먼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있었을 거고,

또 도망가고 나서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내가 도대체 뭘 한 거지?' 하는 자책감, 비참함..

 

이렇게 연약함에서 오는 무기력함은, 항상 비참함을 동반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기 이전에, 스스로 비참해져요.

내가 스스로 혐오스럽고, 내가 싫어지죠.

 

이것이 십자가가 드러내고 있는 인간의 연약함의 죄입니다.

 

감사한 것은, 주님이 이것을 드러내셨다는 거죠. 왜요?

십자가에서 (십자가를 통해서) 처리하시기 위해서!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안에 죄가 드러날 때,

그것이 적극적인 죄(악함, 불법 등)이든, 소극적인 죄(연약함)이든

그게 드러날 때,

그걸 피하고 도망가면 안 돼요. 감사하셔야 돼요.

 

왜요? 그걸 처리하시려고 드러내시는 거죠.

 

그런데 막상 나에게 이런 순간이 오면

우리는 계속 방향을 잘못 잡아요.

그래서 계속 자책하고, 비하하고, 절망하고...

그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자책한다는 것은 교만한 자세입니다.

'내가 안 그럴 줄 알았다'는 거죠.

'다른 사람은 다 그래도, 나는 안 그럴 줄 알았다'는 거죠.

이것은 '자기 의'라는 교만입니다.

 

이런 연약함 들이 드러날 때, 사람들은 막 난리를 칩니다.

아니면 굴로 들어가서 숨거나, 어디로 없어지거나...

뭔가 좌절이 오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잠수를 타 버리죠...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함 때문에..

삶이 무기력해지고,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이때 보면, 또 표출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사방을 비난합니다.

 

예수께서는 그걸 해결하시려고, 드러내시는 거예요.

그거 안 드러내셨으면, 내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았겠어요?

그러므로 드러났을 때 감사하시고, 회개하고 변화되면 되는 것입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좋아지죠!

 

▲3. 제자들의 연약함의 죄로 인해서 드러나는 세 번째 모습은

"회피, 도피" 입니다.

 

52절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우리의 연약함은, 어떤 것을 대면해서 돌파(해결)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피하고 싶고, 도피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그 상황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상황을 아예 피해 버립니다.

 

물리적인 상황에서 도피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 결과를 대면하는 것이 두렵고 싫어서

대면해서 돌파하는 것을 피하기도 하고...

 

그것은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또 자녀들과 관계에서도 이게 나타납니다.

분명히 어떤 것은 대면해야 될 게 있거든요.

그걸 대면해서 돌파해야 될 게 있는데.. 두려운 거예요.

귀찮고, 두렵고, 싫고... 그래서 그냥 회피해 버립니다.

대충 좋게 좋게 마무리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이것도 일종의 도피지요.

 

또 스스로의 문제도 그래요.

가장 심각한 거는, 나 자신과의 대면이에요.

 

내 안에 보면, 대면하기 싫고, 인정 하기 싫어하는.. 그런 내가 있어요.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사건과 상황들을 통해서

내 모습을 적나라하게 대면하게 하시거든요.

 

그럼 대면해야 되는데, 대면하기 싫어요.

두렵고.. 그래서 피하는 거죠.

계속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는 거죠.

 

여러분, 타락한 인간은, 자기 연약함으로 인해서

대면하여 돌파하는 것 대신에, 끊임없이 도피하는 회피본능을 나타냅니다.

 

대면하고 인정해야.. 그래야 문제가 해결되는데...

도피하면 해결이 안 되지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이 지금 도망갔습니다.

만약 도망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다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을 것 같아요? 천만에요.

그건 예수님의 계획이 아니었어요.

 

십자가는 예수님만 달리는 것이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뜻을 쭉 이어서 사역할 사람들인 것을

예수님은 처음부터 계획하고 가셨을 거예요.

그래서 도망가지 않았다 할지라도, 절대 잡혀서 죽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어떤 방법이라도 제자들을 지켜주셨을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은 왜 도망갔나요? 믿음이 없으니까 도망간 거죠.

 

우리도.. 왜 회피합니까?

믿음이 없으니까, 도망가고 회피하는 거죠.

예수께서 이 상황을 해결하실 거라는 믿음이 없는 거죠.

 

제가 사역하면서 보니까, 도망다니는 사람이 제일 어려워요.

대면을 해야.. 우리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기도도 하고, 씨름도 하고.. 그러면서 변화가 되는데

 

대면을 안 해요. 숨기고만 있어요. 꺼내놓지를 않아요.

계속 '아니라'고만 말하면서 부인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그에게 두려움이 보여요.

어떤 사건 때문에 굉장히 마음이 힘들면서도

자기는 늘 괜찮다고만 말합니다. 그러면 할 수 있는 게 없지요.

이게 사역하면서 어려운 점이에요.

 

실제로 자기 안에 있는 문제들을, 인정 하고, 대면을 하면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 문제로 두려움이 있으면, '우리 같이 기도하고, 한 번 믿음으로 대처해보자'

또 다음 주에 만나 보면 '두려움이 여전히 있는데요?'

'그럼 원인이 뭘까? 더 믿음으로 대처하자' 이렇게 하면 되는데...

 

드러내야 치유와 회복의 가능성이 있어요.

드러나야 소망이 있는 거예요.

 

드러내시는 이유는, 저주하시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십자가는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처리하시기 위해서 지신 거예요.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서 드러내십시오.

계속 도망다녀서는 여러분, 해답이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왜 십자가가 이런 인간의 비참하고 쓰라린 연약함을 드러낼까요?

십자가에서 무엇을 해결하셨는지를 알게 하시고,

실질적으로 (그 죄를, 그 연약함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께서 계속 병을 고치시고, 연약한 자들을 도우셨어요.

그런데 그냥 질병을 고치셨다고만 얘기하지 않고,

꼭 이 표현이 같이 나와요.

'병을 고치시고, 약한 것을' *이 설교의 주제인 '연약함'

이렇게 계속 같이 붙어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냐면

'이는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신 거예요.

어디서? 십자가에서!

 

이게 여러분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

여러분을 죄뿐만 아니라, 연약함에서도 해방하신 줄 믿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주위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우리들)의 죄악들을

한 가지, 한 가지씩 우리가 발견해 내고, 회개하게 되고,

주님의 용서를 믿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스스로 개선해 나가려 할 때,

진정 성화의 길을 가게 되며, 즉 구원의 완성의 길로 향해 나아가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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