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서 돌을 놔야 하는 이유 요8:7
◑정말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까?
▲모두가 죄인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줄 알았어요.
지금도 여러분 중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교과서를 봐도, 소설책을 봐도, 영화를 봐도, 만화책을 봐도
항상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이 진리입니까?
본래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과자를 만나면 가까이 하기가 괜히 겁부터 나지만, 사실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싸울 때 보십시오.
또 교우들끼리 윷놀이할 때 보니까 똑같더라고요.
이기려고 눈이 벌개져 가지고 죽여라 잡아라 그러는데
거기에는 목사님도 장로님도 따로 없더라고요.
하여튼 이기면 그렇게 좋아하고, 지면 그렇게 분해하고. 똑같아요.
저는 좋은 나라, 나쁜 나라가 따로 있는 줄 알았어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그런데 실제로 전쟁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나라나 똑같이 악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적인 민족이라고 하는 독일 민족이 유대인을 학살한 것,
가장 민주주의가 꽃피웠다는 신사 나라 영국이 노예무역을 일삼았던 것.
그 부도덕함은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전쟁 중에는 좋은 나라 나쁜 나라가 없더라고요. 똑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착각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많고 적은 차이는 있어도, 똑같은 사과나무
저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나만큼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생각했습니다.
꽤 수준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진실로 만나고 난 다음에 실상을 보고 비명소리가 나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악한 사람이었는가?’ 저 자신은 죄 덩어리였습니다.
감추고, 꾸미고, 산 것이 더 가증했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한 것이 더 큰 죄였습니다.
사과가 많이 열리고 적게 열린 차이는 있어도
사과가 맺히면 사과나무인 것처럼,
죄가 많고 적어 보여도, 모두가 다 죄를 짓는 것을 보면
모두가 죄인인 점에서는 다 같은 것입니다.
▲인간 선행의 실상
한번은 영화를 보는데 갱 두목에게 부하가 와서 보고를 하는데,
부하 하나가 배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보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거칠게 담배를 질겅질겅 뱉으면서 말했습니다.
“나쁜 놈의 자식!”
그러는데 저는 그 장면을 보고 누가 누구 보고 그러는지 헷갈렸어요.
돈이라면 사람 목숨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갱 두목의 입에서
‘나쁜 놈의 자식’이라고 나오면 도대체 헷갈리지 않아요?
우리도 때때로 “저런 나쁜 놈이 있는가?” 한번은 해봤을 거예요.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도 헷갈리시지 않을까요?
‘너 지금 누가 누구 보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눈에는 다 똑같은 것이에요.
여러분, 갱 조직 안에도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의리도 강하고 청소도 잘하고 말도 잘 듣고.
그러나 그가 아무리 착해도 갱은 여전히 갱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행의 실상입니다. 우리 수준이 그런 수준인 거예요.
사람이 더 좋고/나쁘고,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죄인입니다. 우리는 똑같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아주 고상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어서
죄짓는 것이 적어 보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정말 막 사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죄를 짓고 사는 것을 보면 다 똑같지 않아요?
다 죄인인 것이지요.
▲그런데 평소에는 이 사실을 모르고 삽니다.
그래서 죄인이면서, 죄인에게 돌을 던지며 사는 것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이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우리는 할 말이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들을 때 “그래, 우리는 다 같은 죄인이지.”
라는 정도로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라는 것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이 여인처럼
돌에 맞아서 죽어야 할 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지만, 정말 그렇게 인정이 되십니까?
여러분 중에 혹 ‘나는 그럴 정도는 아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아직도 예수님을 정확하게 모르시는 것이에요. <위 단락 06.03.12. 인터넷 설교 펀 글
◑크리스천 실재주의 -아래 단락 출처-
▲영국 축구보다 미국 농구의 룰(규칙)이 더 복잡한 이유
영국 사람들은, 영국축구선수들이 모두 룰을 잘 지키는 신사들gentlemen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룰을 간단하게 만든 것이고,
반면에 미국 사람들은, 미국농구선수들이 모두 다 룰을 어길 악당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룰을 복잡하고 상세하게 만든 것이라고 누가 얘기했습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 입니다.(아래 설명 나옴)
▲니버의 크리스천 실재주의
라인홀드 니버 (Reihold Niebuhr)라는 신학자의 사상을 가리켜서
신학자들은 "크리스천 실재주의 (Christian realism)"라고 불렀습니다.
크리스천 실재주의란 한 마디로 말하면,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나라가 B라는 나를 공격하면서,
"우리는 세계 민주주의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너희를 공격한다"고 말합니다.
그때 크리스천 실재주의자 (Christian realist)는,
"과연 그 전쟁이 그렇게 순수한 의도로 시작되었나? 그게 진짜 이유인가?
다른 숨은 동기(hidden motivations)는 없었나?"하고 따져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실재주의 (Christian realism)란 겉으로 드러난 명분에서
숨은 의도를 식별해 보려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명분과 실제이유는 종종 다르다.
어떤 제국도 힘이 약한 나라를 침략할 때, "우리가 너희를 침략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우리가 중국을 혼내주려고 그러니까, 잠시 길 좀 비켜 달라!"고 그랬죠?
소련이 주변국가들을 공산화하기 위해 군대를 보낼 때,
"우리는 부르조아의 거짓된 자본주의 밑에서 속고 고통당하는 인민을
해방시키기 해방군을 보낸다" 그랬습니다.
이처럼 모든 싸움에는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 (an apparent cause)과
마음속에 감추어 둔 실제이유(hidden real reasons)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구분해 낼 줄 알고,
정말로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식별하고,
정말로 도와주어야 할 사람과 도와주어서는 안 될 사람을 가릴 줄 알아야,
좋은 크리스천이요, 분별력 있는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면을 꿰뚫어 보다(실재주의)
기독교 문화가 주도하는 미국사회와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는
이와 같은 크리스천 실재주의(Christian realism)가 깊게 깔려 있습니다.
초기 미국사회는, 유럽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며 기회를 찾아 이민 온 사람들로 인해,
온갖 무질서와 범죄로 가득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법을 제정해 놓으면 사람들이 잘 지킬 거다" 라는
순진한 환상을 일찌감치 버리고,
할 수만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법을 안 지키려고 하는 악당들의 입장에서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법이 훨씬 더 까다롭고 상세해지게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 생긴 농구 게임의 룰이, 영국에서 생긴 축구의 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상세한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이면을 꿰뚫어 보시다.
바리새인들은,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씀대로 살려 하고,
그래서 율법을 지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위선자다! 너희는 너희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다"
그러셨습니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훌륭한 행위와
인간의 마음속에 감추어진 악한 동기를 구분해낼 줄 아셨기에,
예수님은 그 시대의 경건한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세리와 창기와, 자신을 죄인이라 인정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미워하신 이유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창기, 세리, 죄인들보다
바리새인들이 외적 행위로 볼 때, 훨씬 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예수님이 그들을 극도로 싫어하고 미워하셨을까요?
한 마디로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자기가 죄인인줄’ 인정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죄인들이면서도 ‘자기를 의인으로’ 인정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 속의 내면적/이면적 동기를 들여다보신 예수님은, 그들을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선지자들의 무덤 (마23:29, 눅11:47)
성경에 재미있는 표현으로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민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선지자를 존경하며 그의 무덤을 예쁘게 단장해 주는데
속으로는, 뒤로 돌아서서는, 선지자를 죽이는데 가담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저)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신사적으로 온화한 표정과 말투로 A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은밀한 곳에서는, 사악한 표정과 말투로 A에 대해 말합니다.
기업에서는 종종 보스가 해외로 나갈 때, 몇 가지 지시를 하고 갑니다.
그래서 자기가 없을 때, 평소에 껄끄럽던 일들을 처리해 버립니다.
보스는 회사에 돌아와서.. 유감의 뜻을 표시합니다.
우리(저)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유혹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외식(겉과 속이 다름)을 잘 할수록
사회에서는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고 칭송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극도로 예민하게 그런 자들을 책망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외식하는 자들이여!’
▲딤전1:9절에 ‘불법한 자’ the lawless가 나옵니다.
희랍어로는 ‘아노모이 no-law’입니다.
우리말로는 ‘무법자 the lawless’란 뜻입니다.
서부영화에 특히 무법자가 많이 나옵니다만, 무법자는 법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법이 없는 사람은 정신병자지, 무법자가 아닙니다.
‘무법자’란 <자기가 법이 되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지극히 선하다고 보고,
다른 사람은 모두 죄인으로 보고,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있지 못하면,
<내가 모든 선의 기준>이 되어버립니다.
즉,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옳고, 네가 하는 일은 모두 잘못’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무법자’인 것입니다.
▲정리하면
겉으로 드러난 명분과, 이면에 감춰진 동기를
명확히 구분할 줄 아는 ‘실재주의’적 훈련을 쌓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나 자신을 <실재주의적 눈으로>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노력 없이, 10~20년 지나면...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을지 모르나
예수님께 엄중한 책망을 듣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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