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는 두려움, 거짓 평안 요14:25~31
◑1. 속이는 두려움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실 때마다
계속하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축복하셨습니다.
오늘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가장 큰 증거는.. ‘평안’입니다.
평안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나와 함께 하시는지’ 알고 싶은 분들은
지금 여러분 마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평안하십니까?” “두려움과 근심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이 놀라운 평안은 어떻게 임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시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성령의 역사로 임하는데,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심으로써
내 마음에 평안이 넘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이는 두려움’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 때때로 극한 두려움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속지 말아야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인간적인 외로움, 두려운 일이 닥칠 때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으로 판단하고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즉각 성령님에게 “성령님, 제게 말씀을 주십시오.”하고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 때 꼭 합당한 말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것이 두려워할 일이 아니구나!
이것이 오히려 기뻐할 일이구나.’ 하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게 두려움과 근심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딤후1:7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두려움과 근심 속에서도
능히 일어날 수 있는 말씀을 이미 다 주셨습니다.
다만 그것이 제때에 생각이 나야 되는데,
그 생각나게 하시는 역사는, 성령님이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14:26 ↑
두려우십니까?
성경을 펴십시오.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내게 임하면, 두려움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미리 미리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전에 말입니다.
▲요14: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십자가)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먼저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이 일어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14: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기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면,
내게 지금 두려움이 닥치는 그 일도, 오히려 결국 나에게 좋은 일이 될 것임을
믿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위 말씀처럼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을수록 더욱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요14: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
잠시 마귀가 승리한 것 같은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달리실 때 ‘만왕의 왕’이 악한 자들에게 뺨을 맞았습니다.
채찍에 맞고, 가시관을 쓰시고, 옷을 벗기우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찌 이리 무능하십니까?
마귀가 춤추는 것을 보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이것은 말씀을 모르기에, 그렇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나와 상관이 없다.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예수님께서 스스로 마귀에게 자신을 내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이지, 마귀에게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마귀가 능력이 커서 된 일이 아닙니다.
마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시험에 던져도, 욥처럼 말입니다.
결국 그 시험의 한계와 범위는, 하나님이 정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나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잠시 ‘마귀가 나를 짓누르는 자기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도, 결국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나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니 연단과 징계 후에, 더 아름답고 귀한 그릇으로 성숙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처럼, 나도 결국에는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단단히 붙어있는 동안에는.. 말입니다.
▲요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미리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알아야 십자가를 보고 시험이 들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이 <무슨 두려운 일이 있기 전에> 분명히 말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어떤 순간이 와도, 어떤 문제가 닥쳐오든지,
내 마음에 두려움과 근심이 있을 때
즉각 이것이 ‘속이는 것이 아닌가?’ 물으셔야 합니다.
‘성령님, 이 때 제가 어떻게 판단해야 되며
제가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붙잡으면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매우 두려운 삶의 환경을,
오늘날 내가 당할 때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알면,
두려운 가운데서도.. 믿음과 확신이 생깁니다.
그러나 ‘속이는 두려움’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 두려워할 일이 아닌데.., 내가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 제자들에게 되어 질 일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깨어있으면, 되어 질 일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실체가 무엇이며, 거품이 무엇인지.. 대강 알게 됩니다.
그래서 대처를 올바르게 하게 됩니다. 요14:29참조.
▲저는 지난 ‘교역자 기도모임’에서 우리 교회 부교역자들에게 2가지를 회개했습니다.
그 동안 제가 정확하게 말씀대로 부교역자들을 대하지 못했던
2가지를 회개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가 더 이상
<두려움에 속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제 힘으로 부교역자들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주님께서 부교역자들을 친히 가르치고 이끄신다는 것을 제가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제 안에 속이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제가 안하면 안 될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주님 대신 자꾸 제가 말로 가르치려 애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속이는 두려움’이 제게서 떠나갔습니다.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제는 부교역자들을 주님께 맡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회개한 것은, 부교역자를 능력으로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능력이 있다 없다 하고
제가 교역자들을 판단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목회하는 것이 아닌데, 저는 자꾸 능력이 있고/없고를 따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역자들에게, 저의 존재는 부담스런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 역시 제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속이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목회를 사람 힘으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어려워지면 어떻게 하나. 부흥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것인데,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줄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심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준으로 사람을 보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제게 다시 한 번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인가를 찾으셨습니다.
목회는 예수님이 직접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 목회, 여러분의 삶, 가정. 다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처럼 속는 것은
직접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속이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제는 교역자들에게 “사역을 잘하시오. 설교를 잘하시오.”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보여달라고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충분합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그 동안 저 자신이 진정으로 주님이 함께 하시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은혜의 역사는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를 끼치려고 하니 더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내 죽음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약한 것이 더 좋습니다. (고전1:27-29)
◑2. 거짓 평안
▲‘거짓 평안’을 아시나요?
우리가 속이는 두려움을 조심해야 하지만, 또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 평안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 지금 마음이 편안해요. 두려운 것도 근심도 없어요.”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마음이 평안하다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오는 평안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주는 평안이 아닌 것은,
즉, 세상이 주는 평화는.. ‘거짓 평화’인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거짓) 평화도 있습니다.
돈을 많이 가지게 되면 평안하다고 느낍니다.
통장에 돈이 두둑하신 분들은 평안하시지요?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말씀 앞에서 점검받아야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말씀 앞에서 평안해야 합니다.
눅12장에, 풍년이 들어 많은 곡식을 창고에 저장한 농부가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며 흡족해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때 그 부자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임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부자의 평안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평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불안해지고,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세상 평안에 속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 말씀 앞에 서보아야 됩니다.
▲히스기야의 거짓 평화
왕은 군사가 많고 무기가 많으면 평안하다고 느낍니다.
히스기야 왕이 그랬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서 기도로 고침 받고 나라가 강성해지니
마음이 오랜만에 평안했습니다.
마침 신흥 제국 바벨론에서 사신이 왔을 때
히스기야 왕은 무기고를 다 보여주며 자랑했습니다.
그는 어느듯, 하나님보다 자기 무기고를 더 의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이사야39:6~7절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소서.” 하며 왕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평안한 줄 알았더니.. 하나님 말씀 앞에 서니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오늘날 우리 각자가,
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이제 좀 두 다리 쫙 펴게 되었다고 안심할 때,
그 때도 조심하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런 때 마치 내 능력으로 모두 이룬 것처럼 교만하고, 자랑하다가..
히스기야처럼.. 망하는 것입니다.
▲교회적으로 임하는 ‘거짓 평화’
계3:17절에,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르기를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마음이 평안할지라도,
이것이 정말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거짓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속으면, 두려운 날이 도적같이 임합니다.
지난 주간에, <교단 인턴 전도사 수련회>에서 말씀 전하기 위하여 기도할 때
성령께서 제게 책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첫 시간에는, 죄로 인하여 속으로 무너진 전도사님들에 대하여 말씀을 전했습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말고 주의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시간에는
성도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사역도 잘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전도사님들에 대하여 (성령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위하여 목회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자랑과 교만한 마음을 (성령께서) 책망하셨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실력이 있고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이 평안하지요.
다른 사람보다 내 사역에 열매가 많다고 생각할 때.. 큰 자부심도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거짓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존 하이드의 일화
존 하이드의 전기「기도로 매일 기적을 체험한 사람」을 추천합니다.
이 책 속에 존 하이드가 거짓 평안에서 돌이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인도 선교사로 헌신하여, 인도로 가는 배를 타고 갈 때였습니다.
그 순간까지 그는 마음이 뿌듯하였습니다. 스스로가 대견하였습니다.
아버지도 목사였고,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선교사로 헌신했고. 그것도 아주 훌륭한 선교사,
위대한 선배 선교사들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인도어를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위대한 선교사가 되는데 장애가 될 만한 것들은 무엇이든 용인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그의 야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 같았지만
밑바닥에는 흉물스러운 자아의 자랑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존하이드 선교사가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은, 편지 한 통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배에 오르자, ‘아버지의 친구 목사님’이 보내신 편지가, 선실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즉시 뜯어서 읽었는데, 편지 내용은 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짤막한 몇 마디 말 때문에,
그의 자존심은 잿더미가 되었고, 맹렬한 분노가 마음에서 일어났습니다.
편지에는 단지
“사랑하는 존, 네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까지, 너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을 거야!"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화가 치밀어, 편지를 구깃구깃 구겨 선실 바닥에 던져버리고,
분을 주체 할 수 없어서 갑판 위로 올라갔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까지!’ .. 이 말은
그가 지금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갑판을 거닐면서 혼잣말로 말했습니다.
‘나는 선교사로 지금 인도에 가고 있어.
그런 저런 선교사가 아니라, 최고의 선교사가 되기 위해 가고 있는 중이라고!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아니겠어?
그런데도 내가 아직 성령 충만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니...
정말 어처구니없고 주제넘은 말이잖아!’
그렇게 한동안 갑판 위를 하염없이 오락가락했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마음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는 맹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 친구 분을 정말로 사랑했고,
또 그 분이 평생 신령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다시 선실로 내려가,
구깃구깃 구겨 던져버린 편지를, 다시 집어 편지지를 곧게 펴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괴로웠지만,
아버님 친구 목사님이 옳다는 것과
자신이 선교사 사명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절망의 구렁텅이에 내려가, 자신을 성령으로 채워달라고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순간 모든 것 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가 품었던 것이 이기적인 야망이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배가 항구에 당도하기 전에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말리라 결심하고, 더욱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제가 인도에서 보게 될 언어 시험에서 낙방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봉사하는 무명의 선교사가 되어도 좋으니
다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구했습니다.
이 영적 몸부림은 항해가 끝날 무렵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순간, 존 하이드 선교사의 마음의 평안은 깨어졌지만,
위대한 선교사가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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