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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내려 놓음

by 【고동엽】 2024. 11. 20.

내려 놓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라.    

 

 

 

 

 한국에 와 있던 어떤 선교사가 시골교회를 방문하기 위하여 차를 타고 시골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할머니가 무거운 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시냐”고 물으니 선교사가 가는 같은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차에 태워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할머니가 머리에 이고 있는 짐을 그대로 이고 있습니다. 내려놓으라고 하니까 괜찮다고 합니다. 또 내려놓으라고 하자 한사코 괜찮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 한 몸 타는 것도 미안한데 짐까지 내려놓으면 미안해서 안 된다”고 끝까지 그 짐 보따리를 이고 갔다고 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다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다 내려놓으라고 하시는데도 굳이 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고달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읽은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이고 축복의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그들이 지고 있는 짐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 짐은 전통적인 짐이었고 율법의 짐이었고 유전의 짐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 그 전통의 짐, 유전의 짐, 율법의 짐을 지라고 강요했습니다. 거기에 백성들은 각자의 생활에서 주어지는 짐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죄의 짐, 운명의 짐, 질병의 짐, 죽음의 짐까지 포함되었습니다. 또 당시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로마의 지배아래 있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무소망의 짐이 가장 무거웠습니다. 그러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짐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내가 영적 해방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마음의 고통에서 자유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죄의 속박에서, 율법의 구속에서, 정신의 모든 불안에서 해방을 얻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이 말씀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공개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온유와 겸손의 대명사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칭호였습니다. 그리고 “내게 배우라”는 말씀은 “내가 곧 길이고 방법이고 모든 구속에서 헤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메고 있던 멍에의 짐, 두려움의 짐을 다 벗어 던지고 내가 주는 멍에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주는 멍에는 “사랑의 멍에”입니다. 그 멍에는 구원과 해방과 영생을 가져오는 멍에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멍에는 “새의 깃털보다 더 가벼워 창공을 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멍에”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모두 짐을 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멍에서부터 운명의 멍에, 삶의 멍에에까지 수다한 멍에를 메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피곤한 것입니다. 그 원인은 짐을 내려놓지 않고 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일상의 짐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나타나는 일상의 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짐을 잠자리까지 가져갑니다. 그래서 잠이 평안치 못합니다. 어떤 분들은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잠자리에 갈 때는 놓아야 합니다. 놓으면 순간 몸과 마음이 평안해지고 포근해져서 곧 잠이 옵니다. 그런데 포기를 못하고 내려놓지를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머릿속이 복잡하면 온몸이 경직되어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습니다. 놓아야 합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생각은 오늘 이렇게 고민해도 별 수가 없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운명의 짐

 

 

 

 

운명의 짐, 이것도 참 무거운 짐입니다. 오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암”이라는 말입니다. 이 한마디 말에 모두 초죽음이 됩니다. 왜냐하면 암은 우리에게 가장 무거운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암이 무서운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내려놓고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평안히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운명할 때가 되었는데도 계속 괴로워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데 본인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왜 그러냐 하면 놓지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때 놓으면 그 영혼이 평안해 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름에 평안하게 응답하게 됩니다. 무거운 짐은 내려놓을 때 안식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욕망의 짐

 

 

 

 

사람의 욕망은 한이 없습니다. 사람의 욕망은 가장 큰 바다와 같습니다. 이 바다가 큰 사람일수록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지난 2009. 1. 10 SBS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700회 특집을 내 보냈습니다. 미국 일리노이대학 심리학 교수 에드 디너(E. Diener) 교수가 미국에서 400위 안에 드는 부자들의 만족도를 조사했습니다. 그들의 만족도는 아프리카 케냐의 원주민과 비슷하게 나타났습니다. 연평균 소득 일만 달러에 들어서면 그때부터는 수입이 더 늘어나도 삶의 만족도는 더 높아지지 않는다고 조사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을 조사했습니다. 10억 원 이상 돈을 준다면 당신은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전체에서 53% 가 예스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관계의 법을 무시하면서까지 돈 버는 것만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를 중시하는 삶입니다. 돈은 언제 사라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금통장에 예금하지 말고 인간통장에 예금해야 하는 것을 오늘 너무 소홀히 하고 살아갑니다. 이제는 은행에 투자하지 말고 더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하는 일에 투자해야 할 때입니다. 이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지 않으면 결국 부모도 형제도 배반하게 됩니다. 가족갈등이나 형제 갈등 그리고 배반 등이 거의 모두가 이 돈 때문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른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어린 아이는 꼭지가 좁은 병속에 들어있는 사탕을 손에 가득 집고 손을 빼려고 하는데 빠지지 않는다고 앙앙 울고 있었습니다. 곁에 있던 엄마가 손을 놓으라고 했지만 아이는 손을 놓지 않고 손이 안 빠진다고 앙앙거리고 울고 있습니다. 쪼그만 것이 벌써부터 이 욕망에 빠져있으니 커서도 그 인생이 피곤한 것입니다. 손해를 보지 않고 그 손을 빼려고 골똘히 생각하니까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욕망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비록 이것만은 아닙니다.

 

 입시 때가 되면 아이들과 부모가 모두 원수가 됩니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자기입장에서 뭔가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 요구가 그 아이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수준을 막무가내로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싫은 아이에게 계속 공부를 강요하면 그 아이는 때로 비행청소년이 될 수 있습니다. 대신 공부안하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공부안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개성이고. 은사이고 달란트일 수 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공부하지 말라고 하면 아이는 미칩니다. 가출하고 자살합니다. 왜냐하면 그 학생에게는 공부하는 것이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꿀도 단팥죽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게가 얼마나 맛이 있고 비쌉니까. 그런데 그것이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싫은 공부 평생 안하겠다.” 이런 사람이 성공합니다. 억지로 공부하는 사람은 안하는 사람보다 낙오될 확률이 더 높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예를 들면 노래방은 노래잘하는 사람이나 좋은 곳입니다. 노래 못하는 사람은 가기 싫은 곳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노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자꾸 시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두곡 시키는 것이 훨씬 분위기가 업 될 수 있고 노래 좋아하는 사람은 두곡 불러 좋고 노래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평안해 좋지 않습니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은 생각들입니다. 왜 아이에게 내가 못간 길을 강요합니까. 그 아이는 그 아이가 갈 길이 따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 길을 가야 그 아이가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그 욕망을 놓지를 못합니다. 포기를 못합니다. 그 욕망을 포기하기 전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불화가 끝나지 않습니다. 빨리 내려놓아야 합니다. 조금 손해보고 내려놓으면 모두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게 와서 배우라 그리고 내 멍에를 메라“고 부르십니다.  

 

 

 

 

 

 관계의 불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은혜는 화목입니다.  22:21절에서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고 했습니다.  21:9절에서 “다투는 여인과 큰 집에서 사는 것 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좋다”고 했고 잠 17:1절에서 “제육이 가득한 집에서 다투는 것 보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화목한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짐 중에서 또 무거운 짐은 이 관계에서 오는 갈등의 짐입니다. 부부는 참 좋은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이고 이웃이고 동반자이고 평생 동행자입니다. 그런데 관계가 이렇게 좋지만 그것도 관계가 좋을 때 좋은 것입니다. 서로 관계가 악화되면 이 관계처럼 무거운 관계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혼 사유 중에 가장 많은 사유가 성격 차이입니다. 관계가 안 좋아지면 그때부터 사사건건 충돌하게 됩니다.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부부의 불화의 이유를 보면 대부분 “내 기준대도 하라“는 요구 때문입니다. 서로 상대방을 이기려 하고 길들이려 하고 내 방식대로 따라오라는 요구가 많습니다. 아주 서툰 삶의 방식입니다. 어떻게 내가 기준이 될 수 있습니까. 서로 맞추려고 해야 합니다. 조종하다가 한사람이 빨리 양보하고 포기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두 사람 중 한사람은 깨끗하고 또 한 사람은 지저분하다면 싸움과 갈등에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빨리 한쪽이 상대방에게 다가 가서 남편이 좀 깨끗해 주던지 아내가 함께 인내해 주던지 해야 해결됩니다. 부부는 서로 비슷해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서로 내 기준에 맞추라고 강요하면 파국을 맞습니다.  

 

 어떤 부흥사가 부흥회를 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찬 바다는 썰렁해 이고 가장 뜨거운 바다는 사랑해”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생각한 어느 부인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찬바다는 썰렁해 인데 가장 뜨거운 바다는 무슨 바다인줄 아느냐” 그랬더니 남편이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오늘 내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나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없느냐” 하고 묻자 남편이 “열바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평생 걸어가야 할 그 두 사람의 짐이 너무 무겁게 됩니다. 이 짐은 삶을 더 무겁게 하고 힘들게 하고 더 고달프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게로 와서 쉬라,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사랑의 멍에를 메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의 멍에는 새털처럼 가벼워서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벼운 짐도 있는데 우리는 지금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죄의 짐

 

 

 

 

 

짐 중에서 이 죄의 짐이 인생을 가장 고뇌스럽게 합니다. 이 죄의 짐은 보이지는 않으나 마음을 사정없이 짓누르고 생각을 억압하고 온몸을 짓누릅니다. 그리고 이 죄의 짐은 다 뺏어갑니다. 기쁨도, 즐거움도, 행복감도, 재미도, 평안도 다 뺏어갑니다. 16세기에 면죄부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어 지옥 불에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무거운 죄들이 면죄부 한 장만 사면 용서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면죄부는 처음에는 선행자에게만 주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도 면죄부를 주었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짓는데 돈이 부족하니까 앞으로 지을 죄에 대해서도 미리 앞당겨 면죄부를 발급하였습니다. 이 면죄부만 사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면죄부를 사 갔습니다. 이 죄의 문제는 이렇게 누구에게는 심각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숨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어디 가서 숨겠습니까. 세상에서 살인죄를 지으면 어디 가서 숨어 살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 어디라고 숨어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시 139편에서 시인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위로 날아가 숨어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바다 끝에 가서 숨을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내가 음부와 흑암에 거할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나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다 약화되고 다 빼앗아가는 가장 무거운 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와서 쉬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열 번 백번이라도 찾아가야 합니다. 염치는 없지만 또 찾아가야 합니다. 그때 내 무거운 짐이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 걱정할 것을 위해서 걱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걱정할 것은 “나는 천국에 갈 것인가” 하는 걱정입니다. 이런 걱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가려면 잘 믿어야 할 텐데“ 라는 걱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야 틀림없이 천국 간다” 이런 사람이 위험한 사람입니다. 이 자만이 가장 위험한 요소입니다.

 

 내 안에는 두 마음이 존재합니다. 한 마음은 나의 본성의 나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내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둘이 언제나 서로 싸웁니다. 본성인 내 마음은 자꾸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죄를 짓게 하고 타락하게 하고 향락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또 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고 죄와 싸우고 향락으로 달려가려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려고 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이기려면 내안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내 마음의 결심이나 다짐이나 각오는 아주 보잘 것이 없습니다. 내 안의 본성의 나는 참으로 끈질깁니다. 예전에 있던 죄의 근성이 죽지 않고 기회만 되면 고개를 들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옛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네게로 와서 다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타향살이에 지친 사람은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 품에 안기는 순간 모든 짐은 내려집니다. 그래서 탕자는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 집에 가서 그 아버지의 품에 안길 때 모든 고민이 해결되었습니다. 인생은 모두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 짐은 주님께로 돌아갈 때만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 짐을 주님께로 가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더 내려 놓아야 합니다. 더 할 수 있으면 모든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영적 평온을 얻을 수 있고 마음의 쉼을 얻을 수 있고 우리는 자유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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