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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내안에 성육신 하신 예수

by 【고동엽】 2024. 11. 20.

내안에 성육신 하신 예수

 

 

 

                                         8:4-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세상에는 달력이 있듯이 기독교에는 교회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일 년 12달을 정리해서 교리화해 놓은 것을 교회력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 기독교가 이 교회력에 의해서 일 년 동안 목회계획을 짜고 설교계획을 세우고 신앙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 교회력에 나오는 첫 번째 절기가 대강절입니다. 오늘이 그 대강절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기간을 말합니다. 대강절 기간은 오늘부터 앞으로 4주간을 일컫는데 이 4주간이 지나면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성탄절은 고대하던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날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4주 동안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밭에 씨를 뿌리는 비유“입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렸습니다. 씨가 가시밭에 떨어지기도 했고 돌밭에, 길가 밭에 또는 옥토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옥토에 떨어진 씨만 결실하여 60 100배의 결실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농부

 

 

 

 

여기 농부는 전도자이고 일꾼이고 사역자를 말합니다. 이 전도 사역자들이 열심히 세상에 씨를 뿌립니다. 전도하는 모습이 씨를 뿌리는 모습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이 이 씨를 뿌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주신 말씀 그대로를 세상에 전하였습니다. 성경은 주님은 전도할 일꾼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복음전도자들을 일꾼이라고 부릅니다.  123절을 보면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937절을 보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다”고 했습니다.  136절에는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일꾼들은 모두 씨를 뿌리는 농부들이고 전도자들입니다.  

 

 

 

 

 

 

 

 

 

여기 밭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밭만 해도 돌짝밭, 가시밭, 길가밭, 옥토 등 네 종류나 됩니다. 여기 밭은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말합니다. 본문은 사람의 마음의 밭도 길가밭, 돌짝밭, 가시밭, 옥토 같은 여러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밭에 씨를 뿌리면 다 100배로 결실하는 것은 아닙니다. 길가밭, 돌짝밭, 가시밭은 씨를 뿌려도 자라지 못하고 죽어버립니다. 다만 옥토에 떨어진 씨만 잘 자라서 100배의 결실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면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마디로 거부합니다. 받는가 했는데 곧 변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 믿음을 갖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씨를 뿌려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밭은 길가밭, 돌짝밭, 가시밭과 같이 완악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지적하시기 위해서 본 비유를 사용하시기도 했습니다. 마음밭을 옥토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밭이 옥토가 되어 그 씨를 받아들이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것도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전도하다 보면 믿고 싶으나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덮어놓고 믿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말이 참 묘한 말입니다. 성경을 열어놓고 믿어야지 어떻게 덮어놓고 믿습니까. 그래서 내 마음밭이 가시밭, 돌짝밭, 길가밭과 같은 사람들은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어느 신학대학 캠퍼스에서 한 학생이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할렐루야 하고 소리쳤습니다. 지나가던 신학자 한분이 “무슨 대목을 읽었기에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가르고 지나가는 대목을 읽었는데 참 신나는 대목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신학자는 “이 사람아 그 홍해는 깊은 강이 아니고 발목까지 차는 물이야, 홍해는 red sea가 아니고 갈대밭인 reed sea 야” 하고 참 어리석다고 혀를 차고 갔습니다. 조금 후에 이 학생이 더 크게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가던 신학자가 발걸음을 돌려 “또 무슨 일인가”하고 물었습니다. “글쎄 여기 보니까 발목까지 찬 물에서 애굽군대가 모두 물에 빠져 죽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우스개 소리지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홍해를 홍해로 그냥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진 것이 축복인 줄로 믿으십시오. 그 믿음을 주신 분은 분명 성령님이십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 마음에 뿌려진 말씀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옥토가 되는 일입니다.    

 

 

 

 

 

 

 

 

 

여기 씨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보면 “씨는 하나님의 말씀(11)”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떨어지면 곧 바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 밭이 옥토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말씀인 씨를 받아서 내 마음에서 싹을 내기까지에는 두 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첫째 과정은 내가 전도를 받아 말씀이 내 마음에 떨어지면 먼저 내 머리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부지런히 계산하게 됩니다. 내 이해와 지식을 통해서 이 씨를 받을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를 놓고 계산을 하게 됩니다. 계산해서 어떤 사람은 거부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밭이 돌짝밭이거나 가시밭이거나 길가밭입니다. 씨가 땅에 떨어졌지만 그 땅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산해서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게 되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두 번째 단계는 그 씨가 내 머리에서 마음으로 옮겨지는 과정입니다. 내 마음으로 옮겨지면 말씀이 내 안에 심겨지게 됩니다. 그 과정이 말씀이 내안에 비로소 거하시게 되는 과정입니다. 문제는 내 머리에서 내 마음으로 옮겨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 참으로 어려운 과정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다리는 이 머리와 마음 사이의 다리입니다. 이 다리의 거리가 참 멀고 길고 까다롭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다리가 너무 쉽게, 신속하게, 빨리 연결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 전도하면 금방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분들은 이 다리 연결이 평생 좁혀지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머리로 알기는 많이 아는데 마음으로 연결이 되지 않아 믿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억지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갈등을 많이 겪게 되는데 그 갈등이 이 거리가 멀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쉽게 마음으로 믿어지는 사람은 이 거리가 아주 빨리 연결된 상태입니다. 예수는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이 거리가 아주 잘 연결된 상태를 말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옥토에 떨어진 씨는 곧 이 다리가 잘 연결된 사람을 말합니다.

 

 

 

 

 - 예수

 

 

 

 

이 씨는 말씀을 일컫고 그 말씀은 곧 예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씨로,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1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 예수”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말씀이 되시고 씨가 되시는 예수를 마리아 안에 심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마리아가 하나님의 씨를 받아서 잉태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몸에서 예수가 태어나셨습니다. 성령은 그 예수의 영이 오늘 우리 안에도 심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내 안에 예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진 사란을 그리스도인이라 하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157절을 보면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거한다”는 말은 “내안에 심겨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성경말씀을 많이 외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 말씀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잠기는 일입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흠뻑 받아들이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에 내가 깊이 잠기고 그 말씀에 내가 깊숙이 흠뻑 적셔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내가 주의 말씀에 흠뻑 적셔질 때 비로소 내 안에서 점진적으로 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생각이 새로워지는 변화를, 감정이 치유 받는 은혜를, 의지가 곧아지고 공허한 마음이 평화로 가득 채워지게 됩니다. 그것이 내 안에 말씀 즉 예수를 받아들일 때 얻어지는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그것을 아직도 느끼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말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10년을 믿어도 변화나 실감이나 눈물이 나오질 않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 말씀이 깊숙이 심겨져 있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안에 깊숙이 심겨져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말씀 받아들이기

 

 

 

 

이 씨 즉 말씀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겸손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겸손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핵심적인 덕목입니다. 예수님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다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겸손은 “가난한 마음으로 주께 나아가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머리를 깊숙이 숙이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주님께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때 나는 내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갈 때 주님은 주님의 뜻대로 나를 사용하십니다. 그때 성령이 나에게 할 일을 주시고 나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것이 겸손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능력자이십니다. 창조자이십니다. 그래도 그 하나님은 내가 내 마음에 들어오시는 것을 거부하면 못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내가 거부하면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야고보 121절을 보면 “너희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온유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그 온유를 마 1128-9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겸손과 온유의 성품입니다. 내가 주님을 받아들일 때 주님은 내게 이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말씀 안에서 온유와 겸손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사랑의 힘, 온유의 마음, 겸손의 자질을 주십니다. 그렇게 주어진 사랑과 온유와 순종의 자질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애급에 가서 네 동족을 구하라고 말씀하실 때 순종하여 갔습니다. “왜 내가 가야 합니까?”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가면 위험한데 가기 싫습니다”하고 핑계대지 않았습니다. 가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내서 출애굽을 시켰습니다. 이것이 순종이고 겸손이고 사랑이고 온유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리라 했을 때 “나는 당신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다”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면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할 것인데도 그냥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겸손이고 온유입니다. 요셉은 사랑하는 정혼자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그 잉태가 사람의 아이가 아니고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겸손이고 온유입니다. 그러니까 그 온유의 바탕에서 예수가 태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모세의 온유가 마침내 민족을 출애굽 시키는 기적이 일으켰습니다. 마리아의 순종과 온유함이 마침내 예수가 잉태되어 이 세상에 메시야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그렇게 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성육신해 다가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는 일을 바로 내가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칼든 사람, 주먹 든 사람이 무섭지 않습니다. 총든 사람에게는 칼든 사람이 무섭지 않듯이, 대포를 가진 사람도 칼을 든 사람이 결코 두렵거나 무섭지 않습니다. 더구나 핵폭탄을 가진 사람은 대포를 가진 사람도 무섭지 않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겁나는 것이 없습니다.

 

 

 어느 한 암환자가 “죽는 날까지 걸어서 예배에 참석하리라“ 하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갈 때는 남편이 산소마스크를 들고 따라 왔습니다. 머리는 다 빠지고 얼굴을 창백하였고 그런데도 찬송할 때는 손을 들고 찬양했습니다. 힘들게 들린 팔은 떨렸습니다. 흔들렸습니다. 강단에서는 목사가 설교를 했고 단 아래에서는 암환자가 손을 들고 찬양했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입니까. 그때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성도들이 환자의 무언의 설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말씀이 주시는 신앙의 힘은 이렇게 강할 수 있습니다. 대강절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것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기간을 말합니다. 우리는 온유한 마음으로 이 말씀되시고 씨가 되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맞아들여야 합니다. 마치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때 내안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영광이 임하고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 기적이 내 안에 말씀을 사모하게 하는 본능의 힘을 주십니다. 본능이라는 말은 참 신비한 언어입니다. 연어는 3년마다 태어난 곳으로 회귀합니다. 30m가 넘는 폭포의 물줄기를 치고 올라갑니다. 그것이 본능의 힘입니다. 그 본능은 과학으로 증명이 안 됩니다. 배고프면 먹고 싶은 것이 본능입니다. 졸리면 잠자고 싶고 목마르면 물을 사모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 본능을 잃어버리는 것이 생의 마지막이고 죽음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연어처럼 말씀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인 씨를 내안에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내게 본능을 강하게 하십니다. 그 본능이 말씀을 사모하는 힘으로, 능력으로, 간절함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사모하는 본능은 마침내 나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고 온유하게 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그릇으로 활용되며 전도자로 혹은 사역자로 그리고 온유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마음밭이 먼저 옥토로 변하는 일입니다. 돌짝밭이나 가시밭 그리고 길가 밭은 아무리 크고 넓고 많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과 예수께서 그리고 성령께서 아무리 외치고 타 이르고 피를 흘려도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변화의 기미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전통에 매여 있었고 율법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밭은 이미 돌짝밭이었고 가시밭이었고 길가 밭이었기 때문에 구태의연했습니다. 내 마음 밭이 옥토인 것이 축복입니다. 은혜입니다. 성령의 감화 속에서 말씀으로 흠뻑 젖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 마음은 내가 만든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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