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혐오자의 신앙고백
갈 1:6-10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기독교의 이미지에는 “독선적”이라는 평이 들어 있습니다. 독선적이라는 이미지는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장단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한 자기중심과 철학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이 분명한 자기중심이 반드시 있어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 이상에는 나에게 분명한 신앙고백과 신앙신조와 자기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 신앙을 지탱하고 유지하고 발전시키고 전파하는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독선적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독선적이라는 말을 무서워 말아야 합니다. 일반적인 삶에는 되도록 유연하게 살아갈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신앙신조에는 고집과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의 확신에 찬 신앙고백문이 나옵니다. 여기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은 너무나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고백이 너무 강하고 독선적이기도 합니다. 그는 한 때 예수와 십자가를 혐오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제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이번에는 예수의 전도자가 되어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 유대인들이 갈라디아교회를 중심으로 집요하게 십자가의 도를 훼방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들이 예수에 대해서 잘못된 오류로 유혹받고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빨리 시정해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 생각하여 갈라디아서를 쓰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6).”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의 죽음을 곡해해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유혹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함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조하기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라(8)”고 말합니다. 여기 “저주“는 헬라어 ”아나데마“(anadema) 라는 말로 두 가지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일”이고 또 하나는 “결국 우상과 같이 파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기 “누구든지”라는 말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 또는 “하늘로부터 온 천사“ 그리고 심지어 사도바울 자신도 포함하여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서 결단을 촉구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 당시 갈라디아교회를 중심하여 뭉쳐있던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적인 배경을 무시하면 예수의 십자가도 헛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녔습니다. 고로 예수의 십자가만을 강조하는 바울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는 행동이고 자신의 추종세력을 얻으려는 술책이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내가 그런 야욕을 가지고 십자가를 말하였다면 나는 예수의 종이 아니라”고 반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전에는 내가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열심자였으나 이제는 그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의 종”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소 로마서라고도 부릅니다. 로마서에서 강조하는 이신득의 즉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말씀이 갈라디아에서도 그대로 강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고 의로워지고 죄 사함 받음은 율법으로가 아니고 순전히 예수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누구든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의 독선적 신앙고백을 봅니다. 그래서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이 때로 독선적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내용이 독특하고 유일 신앙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이해할 때 몇 가지 먼저 이해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육신의 교리
성육신이라는 말은 인카네이션이라는 말로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옷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교리를 일컬어 “인카네이션” 즉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고 나를 믿는 자는 곧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 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을 우리는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의 문제 해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를 사하시고 악을 이기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흘린 피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이 점도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교리와 차별화 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사함이나 씻음 받을 방법이 전무합니다. 마치 검은 피부를 희게 할 방법이 전무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검은 피부는 아무리 씻어도 희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흑인 지도자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그는 이 땅의 많은 젊은 흑인들에게 꿈을 주었고 희망을 준 사람입니다. 또 한사람은 말콤 엑스라는 흑인입니다. 그는 후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젊어서 자신의 피부가 검은 것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삶을 저주하였고 왜 하필 나에게 검은 피부가 주어졌는가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세제를 풀어 검은 피부를 하루 종일 닦아냈다고 합니다. 세제로 닦아 낸다고 검은 피부가 희어지겠습니까. 그래서 한때 방탕하고 타락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검은 피부가 주어진 이유를 발견하고 자신의 값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백한 말이 “블랙 이스 뷰티풀”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죄를 해결했을 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죄의 멍에입니다. 이 죄의 멍에는 사람을 사정없이 옥죄여 옵니다. 부자유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죄인은 누가 잡으러 오지 않아도 피하고 숨고 뒷길을 좋아하고 어둠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것이 구속이고 속박이고 무거운 멍에입니다. 그 죄를 해결할 때 비로소 무거운 멍에를 벗고 자유함이 주어지게 됩니다. 예수는 그 죄를 해결하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를 자신이 다 뒤집어쓰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고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도 변천합니다. 6세기 교황청이 발표한 7대 죄는 정욕, 탐식, 탐욕, 나태, 분노, 시기, 교만 순이었습니다. 이상의 죄의 공통점은 마음의 죄였고 또 개인의 죄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2008년도에 발표한 7대 죄를 보면 환경파괴, 윤리적 논란의 과학실험, 유전자 조작, 마약거래 및 투약, 개인의 과도한 부 축적, 낙태, 아동성범죄 등입니다. 오늘의 죄는 공동체를 훼손하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외면의 죄이고 진정으로 무서운 죄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원죄의 굴레입니다. 이 원죄는 피를 통해서 전수되는 죄성의 죄입니다. 이 죄성은 씻을 길이 없는 죄입니다. 이 죄성이 우리를 옥조여 옵니다. 억압합니다. 죄책감을 갖게 합니다. 이 죄성이 자꾸만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고 벽을 만들고 불신하게 만들고 대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죄책감속에 살아가게 만듭니다. 여기로부터 자유케되고 해방되게 하는 것이 곧 믿음이고 복음입니다.
신학자 몰트만은 “신앙은 속박이 아닌 해방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다음의 6가지 죄로부터 자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죄와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 죄의 형벌로부터의 해방, 죄의 힘으로부터의 해방, 율법의 요구로부터의 해방, 불의한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육신의 삶으로부터의 해방 등입니다. 여기서 해방될 때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자유를 위해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13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자유인은 “예수 안에서 구속받고 율법에서 해방되고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종교입니다. 죄는 씻어낸다고 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불태운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덮는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의 피로만이 씻어지고 해결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죽음 이긴 교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죽음을 이기는 종교입니다.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보는 종교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가장 심각한 문제에 해당합니다. 죽음은 말만 해도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잘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누구나 두려워하는 종말입니다. 어렸을 때 뒷동산 너머에 큰 저수지가 있었는데 그 저수지에 동네 처녀 하나가 뛰어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조용하던 동네가 날이 조금만 어두워도 모든 발걸음이 멈추고 모두들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이 있는 곳에 꽃으로 장식을 해 놓습니다. 밝은 등불로 불을 밝히고 동네사람들이 함께 모여 밤을 새워줍니다. 죽음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죽음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이후부터 이 죽음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그때부터 죽음 다음에는 부활이 주어진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날 밤 온 예루살렘 시내는 적막했고 온갖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모두 긴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마침내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의 아침에 예루살렘은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었고 온갖 소망으로 희망으로 밝은 아침으로 변신을 했습니다. 죽음이 정복되고 사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시 시작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이나 죽음을 알리는 음악들은 한결같이 침울하고 우울하고 으스스하고 음침하지만 부활을 알리는 음악은 한결같이 경쾌하고 밝고 활기가 넘치고 따뜻합니다. 부활이 죽음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때부터 죽음은 종말이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고 또 다른 은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곧 부활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그 후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경각심도, 삶을 바로잡아 주기도, 참 안식도, 또 깊이 생각도 하게 만들었습니다.
중국의 루화난이라는 분이 “마음을 다스리는 인생철학“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 책을 보면 병원에 두 사람이 몸에 종양이 발견되어 정밀진단차 왔습니다. 두 사람은 진단받기 전에 암이라고 판정되면 모든 일 다 내려놓고 여행을 하면서 삶을 정리해 보기로 약속했습니다. 검사결과 A는 암이었고 B는 단순 혹이라고 판정이 났습니다. 그래서 B는 치료하기 위해서 병원에 남았고 A는 약속대로 모든 것 내려놓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인생을 마무리하기 여행계획표를 짰습니다. “먼저 티베트로 가서 구경하고, 양자강 상류에서 하류까지 배타고 유람하고 해남 해변에서 즐기고 할빈에서 겨울을 지낸 다음 대련에서 배타고 바닷길로 남부로 가서 천안문에 올라가고 섹스피어 작품을 읽고 책을 한권 쓴다.” 이 사람이 계획표 그대로 다 실행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늘이 주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후회 없이 이 세상을 떠나기 위해 순간을 소중히 보냈습니다. 그 아픔 중에도 시를 썼고 책도 썼고 산문도 썼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신문에 산문이 발표되었고 B가 그 신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B는 A의 병세를 물으려 전화를 걸었습니다. “요즘 병세가 어떠냐”고 물으니 A가 대답했습니다. “만일 암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내 삶이 얼마나 엉망이었을지 정말 끔찍하네, 암은 나를 일깨워 줘서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하였고 꿈이 현실이 되게 하였어, 나는 이제야 무엇이 진정한 삶과 인생인지 느끼게 되었어, 자네도 잘 지내고 있지?” 그때 B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자신도 암이면 여행을 떠나겠다고 하던 그가 암이 아니라는 바람에 넓은 세상을 보기로 계획하였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하였습니다. “암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나는 다 잃고 말았네.”
암이, 죽음이, 오늘 사람들을 얼마나 성숙하게 만들고 깊이 생각하게 하고 삶을 얼마나 바로잡게 해 주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병중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해서 인생의 또 다른 눈을 뜨게 해 주는 축복도 누리게 됩니다. 예수 부활이후 죽음은 새롭게 이해되고 죽음은 새 길을, 새 출발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이 죽음을 통해서 부활을 이루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하심
기독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분이나 환경이나 나이나 민족이나 피부나 문화를 따지지 않고 누구든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신앙인들은 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셨고 “내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요 14:16)”고 하셨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 것이라(살후3:16)”고 하셨습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고백하고 믿고 확신하게 되면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곡해하고 전도자들을 박해했던 사람이며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 진두지휘를 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부활의 예수를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구세주였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지금까지 율법이 제일인줄 알고 살아왔는데 알고 보니 더 신비한 부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죄 사함의 진리는 율법이 아니고 예수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때부터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복음과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고 예수를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회에 남아있는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을 희석시키려 할 때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기독교는 독선”이라고 말한다면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때문에 기꺼이 독선 자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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