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준비된 사역 (3)
눅 9:51-56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예수님은 33년의 짧은 인생을 보내셨습니다. 금방 지나갈 시간입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예수님은 아주 규모 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시간을 운영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규모 있게 준비하셔서 사역하고 제자들을 훈련하신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서 발생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가시는 길입니다. 이제는 33년의 시간을 정리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마지막 길에도 여러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동네를 지나갑니다. 그곳에서 하루 저녁을 유숙하려고 했지만 가는 곳 마다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있었던 오랜 원한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체면도 자존심도 상했을 것입니다. 내심으로는 “우리가 누군데 감히“ 라는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형제가 “불을 내려 이 마을을 쓸어버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아합 때에 엘리야가 불을 내리게 해서 사람들을 죽인 사건을 염두에 둔 발언일 것입니다. 있을 수도 없는 발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크게 꾸짖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옮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철없고 설익은 제자들을 남겨둔 채 이제는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아직 여물지 않은 그런 제자들을 남겨놓고 죽으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고 고백하며 만족하게 사역을 끝내셨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성공적으로 사역을 끝내셨다는 고백입니다. 예수께서 성공적인 사역을 마치기까지 몇 가지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함께 더불어“
하나님은 혼자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들과 예언자들과 사사들과 사역자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일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불완전한 그 인간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불러 훈련하셨는데 그 제자들도 실수투성이였고 아주 불완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이 제자들이 얼마나 철이 없습니까. 자기들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불을 내려 이 동내를 태워버리자고 제안합니다. 이런 덜 성숙한 제자들을 예수님은 신뢰하고 믿고 복음을 전하라고 맡겨 놓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대단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완벽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더불어 지혜를 모아 사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똑똑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묘하게도 하나님의 일은 똑똑한 사람들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똑똑한 사람이 독불장군처럼 하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더불어 힘과 지혜를 모아 하는 사역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미약하던 제자들이 예수님 사후에 얼마나 열심히 사역합니까. 실수투성이였던 제자들이 마침내 완벽하게 사역을 다 해 내고 마지막에는 한결같이 순교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고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할 때 먼저 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서툴게 살아가는 사람이 남에게 일을 맡기지 못하고 혼자 일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함께 더불어 지혜를 모아 일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전도 보낼 때 둘씩 짝 지워 보내셨습니다. 가서 함께 지혜와 힘을 모아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연합에는 놀라운 신비함이 들어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함께 더불어 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섭리이고 원리입니다. 그래서 연합은 사람만이 아니고 동물들도 식물도 오히려 인간보다 더 잘하며 살아갑니다. 식물들도 군락을 형성해서 집단으로 서식하며 살아갑니다. 날짐승들도 함께 모여 살고 함께 날아갑니다. 기러기는 혼자 날면 자신의 능력에 70%밖에 날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꼭 함께 날아다닙니다. 함께 날아가면 시베리아를 횡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철새들은 한곳에 모여 먹이를 먹고 철따라 함께 이동합니다. 한곳에 모여 먹이 먹을 때 그냥 무질서하게 먹이를 먹는 것이 아니고 보초를 세워놓고 안심하고 먹이를 먹습니다. 그 보초가 위험이 오면 꽥꽥거리며 신속하게 신호를 보내 위험에 대처하게 합니다. 얼마나 협동적이고 지혜롭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든 생명체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도 협력자가 필요했고 함께 사역할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일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불러 훈련하여 그들로 사역하게 하신 것입니다.
준비된 사역
본문은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시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기회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불가불 다른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가던 길에서 한 젊은이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젊은이에게 복음의 긴박성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를 믿게 하고 따르게 해서 제자를 삼으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짧은 시간을 아주 규모 있게 시간계획을 짜서 사역하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을 계획을 가지고 교육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요사안이 있을 때는 제자 중에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따로 데리고 가서 그들에게 직접 체험 시키셨습니다. 그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셔서 변화산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낼 때도 세 제자를 데리고 가서 체험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집중적인 훈련하실 때도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송곳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이제야 나를 믿느냐”, “고기를 많이 잡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만찬 때는 “어디서 만찬을 준비할까요” 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아무개 집으로 가 보라” 고 해서 가보니 이미 다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공생애 3년을 무작정 보내지 않고 계획을 가지고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처음을 보면 갈릴리로부터 사역을 시작하여 제자를 선택하고 그 제자들을 초보부터 교육해서 이론교육을, 현장교육을 시키시고 중반부터는 그들을 데리고 다니며 실전교육으로 풍랑교육을, 귀신 내쫒는 교육을, 병자 고치는 교육을, 마지막에는 전도하는 교육을 실시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지금 살아가는 것이 너무 계획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계획적으로 무질서 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그 날이 오면 모두 겁나고 두려워서 이게 아닌데 하고 후회하며 종말의 시간을 맞이합니다. 모두 준비가 없고 계획 없이 살아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그런 중에도 예수님은 자신의 죽을 시간 계획을 자신이 계획을 세우고 그 짧은 시간을 아주 효과 있게 계획을 가지고 사용하여 결국 다 이루었다는 고백을 남기게 됩니다.
현명한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치는 방법도 특이했습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가르침 중 하이라이트는 산상수훈입니다. 그 내용은 간단명료하면서도 함축적입니다. 또 복음서를 보면 가르침의 내용이 아주 간단명료함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이 여인을 돌로 칠까요? 말까요?” 입에 거품을 물고 모두 손에 돌을 들고 여차하면 죽일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치라”고 했습니다. 그 대답은 누구도 상상 못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스스로 돌을 놓고 물러갔습니다. 사람들이 세금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세금을 바치는 것 옳습니까? 틀립니까?” 세금을 바치라 하면 유대인들을 모욕하는 것이 되고 거역하라 하면 로마에 반란을 충동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제는 꼼짝없이 걸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라는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그 대답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완벽한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우물가에 앉았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물을 길으려 왔습니다. “물 좀 달라”고 하자 주었습니다. 그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고 하자 그 여인은 그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없다는 그 여인의 말에 “네 말이 맞다, 지금 남편이 다섯이나 되지만 지금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 여인은 순간 마음을 꼭 짚어 말씀하심에 움찔했을 것입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는 대화였습니다.
삭개오는 정에 굶주린 사람이었습니다. 친구가 없고 이웃이 없어 외롭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동네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위로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길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걸어오시던 주님은 삭개오를 올려다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려오라, 오늘 밤 네 집에 갈꺼야.” 그 말 한마디에 삭개오의 문제는 순간적으로 완전 해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두말도 안하셨습니다. “내려와, 오늘 네 집에 갈꺼야”. 그 짤막한 말 한마디가 삭개오의 모든 굶주림과 피곤한 영혼과 외로움 그리고 갈증을 한꺼번에 풀어버린 것입니다. 말이 길다고 효력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짧지만 폐부를 찌르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삭개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무에서 내려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떼먹은 것은 4배를 갚겠습니다, 그리고 전 재산의 절반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고 회개하였습니다. 그 돈은 수사기관에 발각되어서 1조원을 내 놓겠다는 돈과 차원이 다릅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내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내 놓은 회개의 열매입니다.
요약해서 내 의사를 효과 있게 전달하는 것은 기술입니다. 요약해서 명료하게 설교하는 것도 기술입니다. 상대방에게 명료하게 짧게 말해도 내 의사가 다 전달되는 것도 기술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야기가 길지만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재미없는 설교가 길고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설교시간에 잠을 잡니다. 설교시간에 잠자면 설교자가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옆에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졸고 있는 옆 사람을 좀 깨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이 “잠은 자기가 재워놓고 날보고 깨우라”고 한다고 투덜거렸다고 합니다. 언어전달은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요약해서 말씀했는데 그 말씀에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가 있어 모두 놀랐고”(마 7:28) “사람들이 놀라 이 사람이 이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마 13:54)고 말했습니다.
한 번에 한 단계씩 오르심
예수님에게는 신적 권위와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실력을 남용하지 않고 한 단계씩 올라 실현해 나갔습니다. 본문을 보면 야고보 형제가 사마리아 마을에서 영접하지 않는다고 분노하였습니다. 영접하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가면 될 것을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기를 원하십니까?”하고 제안하였습니다. 그 말은 “이 마을을 불을 내려 태워버리자”는 말입니다. 사람은 힘이 생기면 과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없는 것이 축복입니다. 예수님 얼마든지 불을 내려 태워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모두 33년이었습니다. 그 33년 중에서 공생애 시간은 단 3년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할 일은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한꺼번에 많이 일하려 하지 않으시고 능력을 남용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씩 한 단계씩 사역하셨습니다. 오늘 할 일 오늘 하시고 내일 할 일 내일로 미루셨습니다. 그리고 밤이면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훈련하시고 차근차근 오늘은 기본 교육을, 내일은 영적 훈련을, 모레는 전도 훈련을, 다음날은 실전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유월절 명절을 기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척결하고 바리새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세상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얼마나 규모 있는 진행입니까. 차근차근 일을 진행하시고 마지막에는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급하다고 하루에 많은 기적을 베풀은 것도 아니고 하루에 많은 병자들을 다 고치신 것도 아니고 능력을 다 발휘하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너무 급합니다. 급성장을 좋아하고 빨리 빨리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룬 것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빨리 빨리 정신으로 경제성장도 이루고 국력 신장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빨리 빨리 때문에 병든 것도 잃어버린 것도 많습니다. 절차를 무시하고 과정을 무시하고 성과 위주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만 하면 알아주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가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급성장의 미련을 못 버리고 사람들이 지름길을 좋아합니다. 부정과 뇌물과 편법이 얼마나 만연되어 있습니까. 편법은 당장은 빨라서 좋고 일이 신속하고 결과가 빨라서 좋긴 한데 그런데 좀 멀리 보면 그 길이 가까운 것 같아도 가장 먼 길일 수가 있습니다. 어느 스승이 제자들에게 “급하다고 지름길을 가지 말라.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충고해 주었다고 합니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금번 올림픽에서도 약물 중독 선수들이 발생했습니다. 약물을 복용하면 정신이 집중되고 마음이 진정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수들이 약물을 복용하고 메달을 따기도 하는데 그 방법이 때로 결과가 좋을 수도 있는데 그런데 그 방법이 가장 먼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의 사격 선수가 은메달을 땄지만 약물을 복용해서 메달을 박탈당하고 영구적인 자격박탈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말 그대로 그 길이 가장 먼 길입니다.
역설이지만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33년 생존하시고 그중 3년 동안 사역하기 위해서 인간이 가는 모든 과정을 다 거치셨습니다. 인간의 몸에서 잉태한 후 태어나시고 유아시절, 어린 시절을, 소년 시절을, 청년 시절을 보내시고 그리고 성장하여 3년 동안 공생애 기간을 활동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할 일을 다 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공생애 기간 중 한 번도 부작용이 없는 사역을 완벽하게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예수님의 성공적인 삶과 사역의 내용을 본받아야 하고 모방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어진 시간을 효과 있게 활용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제자의 삶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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