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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예수의 개혁적 사역

by 【고동엽】 2024. 11. 20.

예수의 개혁적 사역          

 

 

 

 

                                        13: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어느 정권이든지 시작하면 개혁부터 시작합니다. 개혁은 그만큼 어느 시대나 필요한 것이고 그 시대가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조직이나 적절한 개혁이나 쇄신이나 변화나 갱신이 있어야 합니다. 없으면 모든 조직은 구태의연해지게 되고 조직이 병들게 되어 마침내 도태되게 됩니다. 30년 전 우리나라의 100대 기업들 중 오늘까지 살아남은 기업은 30여개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동안 모두 도산되고 사라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갱신하고 개혁하고 쇄신하지 못해서 자연 도태된 것입니다. 40년 전 잘 살던 국가도 오늘 낙후된 나라가 있습니다. 모두 구태의연하게 살았기 때문에 주어진 결과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개혁 작업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공적으로 사역을 마치시고 “다 이루었다”는 고백을 남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룬데는 여러 내용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조건은 개혁적인 사역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행동을 하셨습니다. 이방인들과 세리들과 사마리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당시 금기로 되어 있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을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혁명적인 발언 가운데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가장 극적인 내용입니다. 본문은 일명 “감람산 강화“라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1장에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여 성전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동안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하시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입니다. 먼저 성전에 들어가 타락된 모습을 발견합니다. 성전 안에 장사꾼들과 짐승 떼가 우굴 거렸습니다. 성전이 시장과 같이 변해 버렸습니다. 그 시대 신앙인들이 얼마나 타락하였으면 성전이 시장화 되었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분노하여 다 내쫓고 제사장들을 질책하셨습니다. 그 분노를 무화과나무에 쏟아 저주받아 말라 죽게 하십니다. 그 뜻은 이제 이 성에 심판이 가까웠다는 경고이고 이 성이 멸망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제자들은 성전 방문 시에 성전의 위용과 웅장함에 감탄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감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의 내면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성전의 위용을 바라본 제자들은 “장차 이 성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1)하고 물었습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제 1성전이 무너지고 스룹바벨이 다시 수축한 성전이 또 무너지고 헤롯이 세 번째로 80년 걸려 재건한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예루살렘 성의 1/6에 해당되는 큰 성전이었습니다. 유월절 명절 때 유대인들이 모두 모이게 하기 위해서 가로 길이가 360m 세로가 460m 이었고 주춧돌 하나의 크기가 길이 11.4m, 높이 3.7m, 폭이 5.8m 나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위용에 감탄할 수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성전을 자부심을 가졌고 마침내는 이 성전을 섬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다 오늘은 그 성전 뜰에 까지 뇌물을 받고 장사꾼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포장을 화려하게 합니다.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2)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건물의 화려함이나 웅장함을 보신 것 아니고 성전 안에 있는 온갖 형식주의, 교권주의, 위선과 탐욕과 치졸한 명예욕이 가득함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셨습니다. 개혁을 안 하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당시 지도자들은 꿈쩍도 안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은 선지자 예례미야가 BC 586년에 이 성전과 예루살렘이 멸망을 예고한대로 또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예고하신 그대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주후 70년에 있었던 로마군의 침략으로 성전의 부속건물까지 완전히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로마군인들에게 모든 보물은 돌 틈에 숨겨놓았다는 풍문이 나돌아 돌 틈까지 뒤지는 바람에 예수께서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 하신 말씀이 철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개혁, 갱신,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신앙이 변화해야 합니다. 아니면 신앙도 굳어버립니다. 신앙이 굳어버리면 무감각 해 집니다. 그래서 영혼의 잠을 자게 되고 안일하게 되고 그러다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고 탈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변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무섭게 변화하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는데 교회는 여전히 무감각하고 매사 권위적이면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면 교회는 미래가 없는 교회로 전락해 버립니다. 어느 전통 있는 교회에 젊은 목회자가 새로 부임했습니다. 설교하는데 피아노가 바로 강대상 밑에 있었고 반주자가 앞자리에 앉아있어 설교하기가 불편해서 피아노를 옆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당회 허락도 없이 임의로 피아노를 옮겨놓았다고 사직 압력을 받고 그 담임목사가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또 새 담임목사가 부임하였습니다. 다음 목사님도 피아노 때문에 설교하기가 불편했지만 전례가 있어 임의로 옮길 수가 하루에 1cm 씩 옮겼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년말 쯤 되니까 피아노가 저 옆으로 옮겨지게 되더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 숨 막힐 정도의 권위로 가득 찬 그 교회에 젊은이들이 모여들겠습니까.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처럼 도태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흐름이라는 원리가 있습니다. 물이 산맥 따라 흐르고 바람과 공기와 세월이 질서정연하게 흐릅니다. 몸에도 이 흐름이 있습니다. 식도와 위와 장을 따라 음식물이 흐르고 기도와 기관지와 폐를 따라 공기가 흐릅니다. 몸의 생명활동은 흐름에 의해서 일어나고 흐름이 막히면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흐름과 막힘이 왜 생기는가 하면 낡은 관성 때문입니다. 형식화, 구태의연함과 같은 낡은 생각이 변화와 갱신과 개혁의 흐름을 막습니다. 막히면 곧 병이 발생합니다. 암이, 혈관이 막히는 병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터지는 것입니다. 막히면 뚝도 터집니다. 땜도 터집니다. 그래서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막힌 곳을 뚫어 줍니다. 예수님은 이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변화하라고, 개혁하라고 외치셨습니다.

 

 

 

 

 

형식주의 질타

 

 

 

 

형식주의는 몸속의 노폐물과 같습니다. 몸속의 각종 노폐물은 몸속에서 흐르는 피를 막히게 합니다. 그래서 터지게 하고 병을 유발시킵니다. 이 형식주의가 교회의, 신앙의, 영적생활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습니다. 그래서 결국 형식주의는 영적 생명력을 소멸시킵니다. 어느 교회는 전통에 깊숙이 빠져있는 권위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찬양대가 의자가 부족하여 의자를 몇 개 더 놓는 일을 의논하는데 3년 걸렸다고 합니다. 그 문제를 놓고 매일 밤새워 논의 하였고 때로 다투기도 갈등도 하였습니다. 그것이 밤새워 의논할 일입니까. 그러니까 원활한 흐름을 막는 노폐물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전의 눈에 보이는 위용을 보고 감탄 하였지만 예수님은 성전의 내면을 보시고 그 안에 있는 형식주의가 가득함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촉구하셨습니다. 아니면 무너지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편견 극복

 

 

 

 

어느 사회나 이 편견이 문제입니다. 이 편견 중에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여성들이 많은 불이익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성들에게 동등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먼저 여성이 해방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첫머리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여성들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흠이 있는 여성들이 들어갔습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여 제자들의 역할이 12제자들 보다 훨씬 능가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예수께 부은 것은 제자들 보다 영적인 안목이 훨씬 앞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여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을 끝까지 따라가고 죽음의 장소까지, 무덤까지 따라가고 부활 후 첫날 아침에 무덤으로 달려가 예수님의 부활의 첫 목격자들이 모두 여 제자들입니다. 오늘도 복음 불모지에서는 여전히 여성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쿠웨이트에서 선교했습니다. 쿠웨이트는 전통사상에 빠져 여성은 언제나 남성의 뒤를 따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걸프전 이후 다시 쿠웨이트를 방문해 보니 여성들이 남성들 앞에서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더라고 합니다. 속으로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왜 갑자기 이렇게 변했느냐”고 물으니 “왜는요, 지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가 모든 지역에 지뢰를 매설하였기 때문에 위험해서 먼저 여성들을 앞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가 여성해방운동입니다. 한국에도 복음이 들어오면서 여성 해방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남녀가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복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여기셨습니다. 최고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대우를 받는 일입니다. 그것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에서, 사마리아 지역에서 활동하시고 창녀와 깊은 대화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리 마태와 삭게오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셨고 사마리아를 무대로 전도하셨습니다. 이것도 당시로서는 파격적 행동이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양반 상인 백정이라는 엄연한 계급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세리, 이방인, 사미리아, 창녀는 짐승처럼 대하였습니다. 이 같은 제도와 계급과 편견이 그 사회의 흐름을 막는 원인입니다. 그리고 원성과 차별과 증오심을 유발시킵니다. 예수님은 대화로, 만남으로, 교제로 서로를 인정하였고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곧 흐름의 막힘을 뚫고 원활하게 흐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복음은 참 좋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이 복음이 들어 왔습니다. 그 결과 편견을 가진 남녀가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양반과 백정이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만남은 막혀있던 세상을 원활하게 흐르게 하는 동력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이 막힘을 만들고 있는 점입니다. 우리는 오늘 나 자신도 모르게 이 사라진 계급을 다시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파 만들기이고, 교회에서 직분을 추구하는 일이고, 교권과 교파의 싸움입니다. 이것들이 오늘 다시 이 흐름을 막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배반을 감수

 

 

 

 

예수님도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아닌 가장 가까운 핵심 측근 제자들로부터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권위적이었다면 “네가 감히 나를 배반하는가”하고 곧 바로 저주를 내렸을 것입니다. 충격도 컷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배반을 당하셨을 때 예수님은 다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유다의 배반은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지적해 주셨을 때 유다는 얼굴이 빨개져야 했고 아주 부끄러워하고 무릎을 꿇고 참회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 유다는 “그게 내니이까”하고 얼굴을 쳐들고 대답을 했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이 다녀가셨다“는 말을 듣고 아쉬워하고 서운해 하고 안타까워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내 손가락을 창 자국에 넣어 보아야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철두철미 불신행위입니다. 제자들로부터 그런 고백을 듣고 주님은 온 몸에서 힘이 쪽 빠지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 배반이 상존합니다. 원래 배반은 가까운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반이고 충격적인 것입니다. 오늘도 집안에서 자식이 부모를 배반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충격을 받고 자살하는 부모들도 발생합니다. 너무 충격이 크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는 노사간에 배반이 일어납니다. 노조가 뜻대로 안 해준다고 사장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목에 줄을 매 끌고 다니며 화형 시켰습니다. 그리고 직장 건물을 부수기도 합니다. 어느 사장은 그런 모습에 너무 배반감을 느껴 충격을 받고 회사를 패업했다고 합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배반은 어디에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집안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아주 초연하였습니다. 눈앞에서 아금박스럽게 배반하였던 베드로에게 부활 후 나타나셔서 “이제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철두철미 부활을 부정하던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이제는 나를 믿겠느냐”고 다가가셨습니다. 하나님 일에도 배반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 일로 절망을 했었다면 사역을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일에는 언제나 이 시험이 상존합니다. 그런데 이 시험이 결국을 보면 한결같이 더 다지고 더 분발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더 큰 위로받는 기회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3년 공생애는 짤막한 시간이었지만 꾸준히 갱신하고 변화시키고 개혁을 이루십니다. 변화와 개혁은 신앙의 명제입니다. 개혁이 안 되면 망합니다. 기업도 국가도 교회도 신앙도 여지없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년 동안 꾸준히 개혁을 이루셨습니다.  

 

 

 어느 기업이 40주년 기념을 맞아 제 2창업을 위한 고강도 혁신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묵은 찌꺼기를 다 털어내자는 혁신적 프로그램이 “솔개론”이었습니다. 솔개는 보통 40년을 장수하는 새입니다. 그리고 어느 솔개는 70년을 생존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장수하려면 고통스런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고 합니다. 보통 40년을 살면 발톱이 노화되어 사냥을 못하고 부리가 길게 자라 먹이를 잡지 못하고 깃털이 길게 자라 무거워져서 날지 못하게 되어 이대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 태어날 것인가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된다고 합니다. 30년을 더 살기로 결단을 내려서 새로 태어나려면 6개월간의 수행 길을 걸어야 합니다. 높은 산위 절벽에 둥지를 틀고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첫 번째 수행은 길게 자란 부리를 바위에 갈아서 빠지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아니면 다시 사냥이 불가능해서 죽어야 합니다. 바위에 갈아 빠진 부리는 몇 달이 지나면 다시 솟아나온다고 합니다. 다음에는 그 날카로운 부리로 묵은 발톱을 쪼아서 빼내는 일입니다. 그러면 며칠이 지나면 날카로운 발톱도 다시 솟아나옵니다. 그렇게 새로 태어난 부리와 발톱으로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모두 뽑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솟아나는 가벼운 털로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데 6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 후에 비로소 이 솔개는 완전히 다시 태어나서 하늘로 비상하여 30년을 더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솔개는 그렇게 재탄생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습니다. 그것이 갱신이고 변화이고 개혁입니다.

 

 주님은 당시 제사장들에게 바리새인들에게 그렇게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웅장한 성전과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경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구태의연하게 살고 형식적인 신앙으로 무감각하게 살아가면 우리들도 예외 없이 영적으로 탈락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꾸준히 변화의 신앙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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