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닮음 (2)
빌 2: 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그리스도인의 최종의 목표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몇 가지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첫째 자질은 “세상을 거스려 살아가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때로 세상을 거스려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자질은 예수님을 닮는 일입니다. 이 닮는 다는 것이 참 좋은 모습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조부모를 닮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소설에서 부모를 닮지 않은 아이가 자꾸 주워왔다고 하니까 고민을 하다가 아버지 몸을 수색하여 결국 발가락이 닮았다고 외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부부도 오래 함께 살면 서로 닮는다고 합니다. 서로 같은 분위기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서로 오래 바라보는 생활을 하니까 닮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닮아야 합니다. 닮을 내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예수의 마음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마음은 겸손의 마음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겸손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할 때 예루살렘 대학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파격적인 일입니다. 그 시대 엘리트나 지성인 그리고 수재들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겸손한 자를 선택하고자 하신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엘리트나 수재 그리고 지성인은 대부분 이기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을 던져 헌신하고 희생하려는 의지가 적습니다. 오늘 직장에서 사원을 뽑고 배우자를 선택할 때 대부분 조건이 좋은 사람, 수재들, 엘리트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속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한 후 고된 훈련을 하시면서 “너희 십자가는 너희가 지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출신 제자들은 처음에는 실수도 하였고 무지할 만큼 시행착오도 겪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놓아두고 예수님은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 제자들은 모두 주어진 일을 감당하였고 끝내는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마음은 겸손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마침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이 마음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의 마음은 곧 겸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도 창조주로 하나님과 동등 됨의 위를 가진 분이었지만 예수님은 절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마음이 겸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정신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섬김의 정신입니다. 섬김의 상징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모습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매사에 섬기는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시고 죄인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사람이 높아지면 섬기기가 어려워집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부터 들어갑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겸손이고 섬김의 정신입니다. 섬기려면 먼저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자기를 비우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25절을 보면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를, 처자를, 형제를, 자매를 버리고 목숨까지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비움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 버리고 따라나섰습니다. 배도, 아버지도, 그물도 다 버려두고 따라나섰습니다. 대단한 결단이고 자기부정이고 자기 비움입니다. 그러니까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와서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밭 갈던 쟁기를 부수고 소를 잡고 잔치를 베푼 후에 따라나섭니다. 대단한 결단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제자들은 다 도망간 상태에서 지금까지 숨어 있다가 자신을 만인 앞에 공개하고 나타나 빌라도에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인수하여 자기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앞날에 상당한 불이익이 주어질 것을 알았지만 그는 그 점들을 모두 각오하고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자신을 송두리째 비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 교부 폴리캅은 화형장에 끌려 나갔습니다. 로마 황제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고발되어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에 화형에 처해질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로마 황제는 폴리캅의 친구를 시켜 마지막이라도 순종하면 화형이 면제되니 순간만 모면하라고 회유하였지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켜보고 숨을 죽이고 있는 그 순간에 그때 폴리캅은 주님은 지금까지 나에게 서운한 말씀 한마디도 하신 일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주님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하고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해서 그는 의연하게 화형에 처해집니다.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의 겸손의 자질이 필요합니다. 겸손은 마침내 나 자신을 다 비우게 만듭니다. 그리고 순종하게 하여 결국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다. 자신을 비우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닮으려면 다 가지면 못합니다. 움켜쥐면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은 다 버리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구간으로, 인간의 옷을 입고, 목수의 아들로, 시골 처녀의 몸을 통하여 오셨습니다. 오셔서 수모를 당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얼마든지 죽음을 모면하고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 포기하고 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다 비웠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이 비우는 모습부터 닮아야 합니다. 거기서 겸손이 나오고 순종이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너무 부자들입니다. 너무 약고 똑똑합니다. 우리는 너무 살아있어 죽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그대로 살아있어 때로 우리 자신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진정한 제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비워야 한다는 말은 내 안에 있는 자아를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체면이나 자존심 그리고 주장까지도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내가 예수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입니다. 그래서 제자의 삶은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이 비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으려면 죽어야 합니다. 부활도 죽어야 가능합니다.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욕망을 죽여야 자유가 주어집니다. 옛날 궁중에서 내시를 뽑을 때 먼저 남성 기능부터 죽였습니다. 그러면 주변에 여성들이 많아도 유혹이 없습니다. 죽으면 유혹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참 제자가 되면 먼저 비워야 합니다. 그러면 유혹이 없어집니다. 온갖 유혹으로부터, 시험으로부터, 돈으로부터,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김익두 목사입니다. 그는 희대의 난봉꾼이요 술주정뱅이요 깡패였습니다. 그 말은 그에게 자아와 타락한 본성과 속에 욕망의 뼈가 살아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어느 날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변화를 받습니다. 그가 변화를 받았다는 말은 그의 그릇된 자아와 타락한 본성과 살아있는 뼈가 다 녹아내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전도를 위해 산길을 넘다가 산등성이에 앉아 땀을 닦고 있는데 누군가 술 취한 사람이 올라오더니 김익두에게 주먹질을 하였습니다. 그 술꾼의 주먹을 다 얻어맞고 왜 주먹질이냐고 물으니 왜 기분 나쁘게 먼저 올라와 있느냐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매는 내가 맞고 은혜는 네가 받았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김익두라고 밝히자 그 술꾼이 순간 무릎을 꿇고 빌더라는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가능한 이유는 이미 김익두가 다 비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을 닮은 제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뜻
예수님의 제자는 또 예수님의 뜻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펼친 뜻은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이고 오래 참으심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참 제물 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참 사랑과 참으심의 삶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능력으로 십자가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자신이 세상을 위해 제물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당장 말 한마디면 천사들을 동원해서 얼마든지 능력을 발휘하고 십자가에서 보란 듯이 뛰어내릴 수도 원수들을 무찌를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최후까지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시고 그리고 끝내 조용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힘이 없어서 얻어맞는 것은 인내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힘이 있는데도 얻어맞음 그것이 사랑이고 오래 참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조롱을 다 받으셨고 마침내 참 제물이 되어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렇게 참으시며 끝까지 강조하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에서는 용서가 불가능한 사람도 주님은 누구든지 오면 다 용남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주신 분부도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뜻을 헤아리고 따라야 합니다. 전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사명입니다. 그 전도 과정에서 주어지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과 힘든 일들도 다 감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의 모습은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집트의 박물관에 가 보면 2천 년 전보다 훨씬 전의 것들도 보관되어 있는 것이 많은데 예수님에 대한 어떤 자료도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가끔 예수님의 옷이다, 신발이다, 홍포라고 내 놓는 경우도 있기는 한데 그것은 모두 상혼입니다. 그 제자들의 것들도 전무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입니다. 오늘 그 자료 중 일부가 실재한다면 큰일 날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사람들은 본질인 예수는 간데없고 그 자료를 보고 믿고 절하고 야단 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속물근성을 아시기에 아예 남기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제의 모습은 없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엄숙하고 경건한 모습을 마음에 그려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도 정신도 뜻도 닮아야 하지만 우리는 그 엄숙하고 경건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그 내면의 엄숙함과 경건함은 마침내 외적 경건의 모습을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모습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용도는 어느 날 존 번연의 “하늘가는 밝은 길이”라는 책 읽고 감화를 받아 나도 이제부터 예수를 모방하여 살기로 작정하자 하고 그때부터 평생 두루마기를 입고 휜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전도하였다고 합니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의 마음을 닮고 정신도 닮고 모습도 닮아야 그것이 제자입니다. 경건의 힘은 위력이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는 물론 타인에게 더 큰 위력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잘 익은 고상한 모습의 경건한 신자들의 모습에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가서 병원을 건립합니다. 어느 날 중병환자가 입원했는데 이 환자가 아침 일찍 창 너머 보리밭에 어느 노인이 밭을 밟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 모습이 너무 경건하게 보였습니다. 그 경건의 모습은 그에게 상당한 믿음과 신뢰감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 노인은 누구인가 하고 자세히 보니 자기 병을 치료하고 있는 원장 슈바이처였습니다. 그 순간 그 환자의 마음에 저 분이라면 내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믿음이 결국 자신의 병을 고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전파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나실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속에 물들어 하나님을 잊고 살아갈 때 그때 나실인이 지팡이 들고 수염과 머리를 길게 하고 거리를 지나갑니다. 나실인은 그것으로 나실인의 할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지금까지 잊었던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몰골을 보며 영적 온도를 재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오늘의 제자의 삶은 능력을 발휘하고 기적을 행하고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동네에서, 생활 터전에서 나실인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경건한 모습을 보이고 나타내고 표현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이 오늘의 제자의 삶이고 나실인의 삶입니다. 본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과 뜻과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우리들이 세속에 묻혀 살지만 예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상당히 많이 닮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세파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술에 찌들어 살아가는 사람들 옆에 서 보시면 현재 여러분들이 얼마나 고상하고 경건하게 만들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압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여 바로잡고 고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의미”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배만 부르다고 살아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의미 때문에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의미요법(logotherapy)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의미요법으로 유명한 빅터 프랭클이라는 정신과 의사에게 새벽 2시에 어느 여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당신이 그 유명한 정신과 의사 프랭클이냐, 밤늦게 죄송하다, 난 지금 살 힘이 없다, 지금 내 손안에 약이 한줌 쥐어있다, 먹고 죽으려고 한다.” 그래서 프랭클이 설득하며 “죽지 말라, 죽을힘이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장시간 설득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참 듣고 있던 여인이 “그러면 지금 당장 죽는 것은 유보하겠다, 지금까지 당신이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는 말이 없다, 다만 당신이 자살하려는 것을 멈추게 한 것은 생판 모르는 여자가 밤늦게 전화해 죽겠다고 넋두리를 하는데도 싫은 기색 없이 다 들어줘서 이런 사람이 있는 세상이라면 아직은 살아볼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의미요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나실인을 두신 것입니다. 나실인이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냥 가끔씩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세상 거리를 한 번씩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나실인의 모습을 보고 의미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잊었던 하나님을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고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탈한 길에서 되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 역할을 누가 해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인 여러분들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내면의 세계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수놓아진다면 얼마나 성숙한 예수의 제자들이 다 되겠습니까. 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이 제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고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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