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말씀에 매료된 사람
시편 19:7-14
이러한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자신을 대한민국에 국보라고 자처했던 양주동 박사님을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사실로 천재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늘 자기 자신은 국보라고 늘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에 그는 바다건너 멀리 일본 땅에 가있었지만은 유학하고 있으면서도 실은 서울에 기독교 계통에 어느 여학교에, 공부하고 있는 여학생을 열렬히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탁월한 문학 재능이 있었고, 그리고 시적인 문장력이 대단합니다. 그의 실력을 다해서 연애편지를 여러 번 썼습니다. 여학생의 마음을 휙 잡아 쥘 만큼 좋은 문장을 골라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마는 여전히 회답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기독교 학교, 기숙사에 그 독수리 같은 기숙사 사감선생님이 이 편지를 전부 읽어보고 연애편지를 본인에게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양주동 박사님이 아무리 편지를 해도 본인에게 전달되지 않는 데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 이게 연애가 안되는 걸 알고, 점점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제 그는 대단히 지혜로운 방법을 택했습니다.
"내가 이제 성경구절을 많이 써서 보낼 거다. 그리고 그 성경말씀 속에다가 자기 사랑을 담아서 전달하면, 아 이 성경구절을 써 놓은 거야 사감님이 전하지 않을 수 없겠지."
이렇게 해서 성공했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성경을 썼느냐, 이제 한번 들어보세요. 요한일서 4장 7 절, 로마서 12장 9절, 요한일서 4장 18절, 마가복음 10장 7 - 8절.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죠? 궁금할 겁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 번째 성경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여기서 감동이 됩니다. 두 번째는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세 번째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이제 마지막 성경은 이렇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아멘.' 이래서 끝난 거예요. 이래서 연애가 됐답니다.
사랑이 뭡니까? 칼 바르트는 사랑이라는게 별거 아니다. 보고 싶은게 사랑이다. 보고 또 보고 싶은 거, 보면서도 또 보고싶고, 멀리 있으면 한없이 보고 싶고, 또 하 나는 듣고싶고……, 그의 말이라면 얼마든지 듣고 싶은 것. 들은 얘기 또 들어도 좋아요. 듣던 얘기 또 들어도, 음성만 들어도 좋아요.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고, 사랑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는 마주보는 것이다. 나는 열렬히 쳐다보는데 그 사람은 딴 사람을 본다면 이건 짝사랑이요. 고통스러운 겁니다. 서로 마주보는 것. 눈과 눈이 마주치는 것이, 그리고 행복한 것이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다 주는 것이다. 주고 행복한 것이다. 주고 기쁜 것이다. 뭐 간 단하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설명 드리면 사랑이라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에요. 생각 속에 있습니다. 그 생각이 곧 기쁨으로 바꾸어집니다. 빌립보 1장 3절에 보면 '내가 너희 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간구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한다.' 그랬어요. 생각할 때마다 감사,생각할 때 마다 기쁨. 이게 바뀌면 어떻게 되겠어요. 사랑이 식어지면 생각할 때마다 분하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고. 이건 사랑이 식은 거예요. 사랑이 병든 거예요.
또한 사랑은 듣는 것이에요. 들으며 감동됩니다. 긍정됩니다. 전적으로 수긍이 됩니다. 아무 반론이 없어요. 그의 말은 다 옳아요. 그대로 받아들여져요.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이 뭐라고 할 때
"그건 말도 안돼."
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오. 그의 말은 다 좋아요. 내 생각보다 훨씬 좋은 생각이요. 이래서 그의 말을 다 들어요.
또 하나는 그를 위해서 헌신합니 다. 수고하고, 헌신하고, 희생하고. 그리고 기쁘고 자랑스러워요. 이것 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단순히 그 리워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것 체험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 보세요. 한참 사랑할 때는 전화소 리만 들어도 온 몸이 '찌릿'하는 거 예요. 온 몸이 달아오르는 거야. 몸으로 체험하는 거야. 이게 사랑이요. 그러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전화소리만 들려와 도 젊은 사람들 말을 빌리면은 닭살이 돋아요. 몸서리가 쳐요. 이거는 무서운 거 아닙니까? 사랑은 보고 싶고, 그의 음성이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어요. 그것을 체험하고, 매 일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기 쁘다. 나는 행복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간증을 합니다.
"I am so happy because of you.",
"나는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이것 아니면 사랑이 아닙니다. 오직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게 뭡니까?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에 집에 갔을 때 때가 아마 식사 때였던 것 같은 데 언니 되는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부엌에서 부지런히 음식을 준비하는데 그 동 생 되는 마리아는 예수님 무릎 앞에 앉아서 조용히 말씀을 청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아주 기뻤습니다. 그 듣는 자세, 그 사랑 하는 얼굴을 보면서 마음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옆에서 화 가 났어요.
"내 동생이 나를 혼자 일하게 내버려두는 것을 그냥 보고 계십니까?"
모름지기 그의 기대는
"마리아야, 네 언니 좀 도와줘라."
뭐 그럴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그 렇지 않았습니다.
"마르다야, 뭐 여 러 가지 준비할 것 없다. 몇 가지 만 해도 되는데, 한 가지도 되 고…….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 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이 말 은 마르다에게는 고통스로운 말이 고, 마리아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 쁨이었을 거예요. 좋은 편. 그게 뭡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어떻게 대접합니까?
좀 미안하지만 제가 심방을 가던 가 하면, 혹 음식을 대접할 때도 있 거든요? 그 음식을 준비하고 그 주 부가 왔다갔다하고, 부엌에 들락날 락 하면서 우리 심방간 사람들보고
"찬송 부르세요. 설교하세요."
자기는 왔다갔다하고. 내 그럴 때에 제일 한심스러워요. 내가 이거 배고파서 얻어먹으러 왔나? 정말로 상대방을 행복하게 하는게 뭡니까? 내가 내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의 말을 들어주는 거예요. 그의 말을 계속 들어주는 거예요. 또 듣고 싶은 거예요. 들으면서 행복한 거예요. 이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이 사랑을 뭔가 착각을 하고 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한 그 사랑하는 사람의 시원한 간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료되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요.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체험하고 있어요.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듯이 달게 체험하고, 또 그렇게 말씀을 사랑하고 보니깐 말씀을 지켜 행합니다. 그 지키는 건 쉽죠. 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거 쉽죠.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따라서 행동으로 옮기는 건 아주 쉬운 일이요. 이건 조금도 무리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고백입니다.
여러분 건강이 뭡니까? 요새 가 끔 보면 건강을 진단하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들이고 병원에 입원까지 해 가면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뭐 조사한다고 그렇게 합디다. 건강진단을 하는데, 좀 죄송하지만 제가 건강진단 해본지가 꽤 오래됐어요. 안 합니다. 왜 그러냐? 건강 진단은 간단해요. 입맛 좋으면 되는 거요. 입맛 없어지면 안돼는 거예요. 이름을 대서 죄송합니다만 우리교회 류태영장로님. 아 같이 식사를 해보면 식사할 때에 아시는 대로 같이 앉은 사람들이 보조를 맞 춰야되거든. 천천히 같이 먹어서 더구나 이 초대한 분이나 그 어른들과 같이 이렇게 박자를 맞춰야지, 저 혼자서 홀랑 먹으면 안되거든요. 근데 이 양반은 남 반도 먹기 전에 다 먹었거든. 그래 내가
"류장로님, 아 이거 국제 신사가 이 꼴이 뭐요? 좀 천천히 박자를 맞추고 잡숴야지 그렇게 빨리 먹으면 되느냐?"고. 장로님이
"나도 그래야 될 줄 알지요. 그러나 입에 넣고 몇 번 씹으니깐 너무 맛이 있어 가지고 쏙 넘어가는 데 어떡합니까? 어 빨리 들어가고 들어오라는데 그래 항상 빨리 먹었어요.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래 그럽니다.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입맛 좋은 것처럼 행복한 게 어디 있어요? 돈 많이 벌면 뭘 해요? 입맛가면 간 거지. 그 무슨 재미요? 먹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 건데 그걸 잃어버리고 산다는 건 사는게 아니지 요, 그게. 자 우리 아이들하고 한번 짜장면 을 잡숴보세요. 어른들은 짜장면 먹으면 그 짜장면은 국물이 없으니까 이 먹으면서 잘 안 넘어가서 물을 마시면서 이렇게 하지만, 아이들은 보면 한 반쯤 먹으면 벌써 짜장면 그릇이 흥건하게 물이 고였어요. 이게 무슨 물입니까, 이게? 아이들 입에서 나온 침이에요. 침. 너무 맛이 있어 가지고 침이 쫙쫙 나오니 까 벌써 이게 고였는데, 어른들은 이게 안 넘어가 가지고 물 마시고……. 좌우간 음식 먹을 때 물 마시기 시작하면 반은 간 거예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 이 건 강하면 입맛이 있는 거예요. 영적 으로도 건강한 사람은 말씀의 맛이 그렇게 맛이 있는 거예요. 또, 소화 가 잘돼요. 뭘 먹든지 이건 찬 거, 더운 거, 굳은 거, 무른 거 뭐든지 먹는 대로 소화가 돼요. 어느 나라 가든지 그 음식 다 먹고, 소화 잘 돼요. 소화능력이 좋아요. 말씀도 소화능력이 좋은 사람이 있고, 밤낮 체증 걸리는 사람이 좀 있더라고요. 또 하나는 그렇게 먹고 힘이 솟아오 릅니다. 먹자마자 힘이 나오고요. 그리고 피곤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이 있어요. 온전한 건강이 어디 있습니까? 건강한 사람은 먹고 나서 그 몸에 느끼는 것은 오직 곧 배고픈 것밖에 없어요. 먹자마자 곧 배고파져요. 이 사람이 건강한거요. 그런데 보세요. 가령 여러분이 느끼는 것이 있습니까? 심장을 느낍니까? 심장이 있다고 느껴요? 그 사람은 심장 아픈 사람이에요. 눈이 있다고 느껴집니까? 그는 눈이 아픈 사람이오. 머리가 있다고 느껴요? 머리가 지긋지긋 한 사람이오. 허리가 있다고 느껴요? 허리가 아픈 사람이에요. 건강한 사람은 누구냐? 아무 것도 안 느껴요. 배고픈 것만 느껴요. 그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오. 아무 것도 안 느끼는 사람. 그리고, 배고픈 거야. 항상 배고파요. 먹어도먹 어도 배고파요. 먹을 때마다 맛이 있어요. 이것이 건강한 사람이에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맛을 느낍니다. 아주 달게 느낍니다. 들을 때마다, 읽을 때마 다 너무너무 좋아요. 그리고, 이 하 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습 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소화능 력이 좋아서, 어느어느 말씀을 들어 도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져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내게 주시는 말 씀이에요. 성령 안에서 내게 주시 는 귀한 말씀으로 깨닫게 되고, 그렇게 입맛이 좋아지고, 그렇게 해석 을 해요. 또 그런가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어느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읽는 동안 하나님이 나를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고 느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느낍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사랑합니다. 이것을 '십자가 중심적 복음'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중심적으로 온 성경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랑의 말씀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제 기억에 아마 열네살 때같이 생각이 듭니다. 성경을 어머니의 권고로 어려운 말이요, 다 이해가 잘 안되지만은 성경을 읽었는데, 제가 읽을 때마다 마태복음 일장은 건너 갔습니다. 왜냐하면 척 보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 을 낳고, 야곱이 요셉을 낳고,낳고, 낳고……, 많이도 낳았다. 넘어가. 이장부터 보았거든요. 언젠가 열네 살 때 생각하기를 '성경말씀인데, 이 해가 안되더라도 읽어야지. 읽어야 어느 땐가는 이해될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정신을 차려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차근차근 내려가는 데 깜짝 놀란 게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거기서 저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다윗이 솔로몬을 낳았어요. 지혜의 왕 솔로몬이 그 요사스러운 밧세바의 아들이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용서했으면 밧세바의 몸에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이 태어나는 겁니까? 이 복음이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성경 구절구절, 어디어디 할 것 없어요. 다 소중한, 소중한 말씀이에요. 귀한 복음이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의 고백입니다. 오늘 다윗은 본문에서 다시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은 나를 소성케하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야 영혼이 시들었습니다. 저주의식으로 인하야 그 영혼은 병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가는 동안 말씀 속에서 죄 사함을 받고, 영혼이 소생함을 얻었어요. 소생함을 얻어 생기를 얻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사랑합니다.
또, 성경은 나를 지혜롭게 합니다. 오늘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보니까 IMF를 당해서 어려운 사건이 지만 그런데 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교회에 나오면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지혜를 얻어 가지고 이 어려운 일을 잘 처리합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말씀이 준 지혜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구원도 받고, 사업도 하고, 성공도 하고……. 말씀의 지혜, 말씀이 나를 지혜롭게 합니다.' 너무 좋아하는 걸 봤어요.
또한 말씀을 기쁘게 합니다. 말씀이 내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신바람 나게 합니다. 말씀이 나로 하여금 소생의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 아주 우스운 얘기입니다만은 8.15 해방 직후에는요 종이가 없었어요. 뭐 종이 공장 다 없어졌으니까, 종이가 없는데 심지어는 이 신문도 귀했습니다. 그런데 담배 많이 피우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종이가 있어야지. 그 때 잎담배를 말아서 피워야겠는데, 그래서, 그거 참 안됐지만, 아내가 교회를 나가는데 성경책을 찢어 가지고 담배를 말아 피우니까 아 거 종이가 얇고 좋단 말이에요. 아 이걸 말아 피우니까 그 부인이 "여보, 어찌 그 럴 수가 있소. 당신이 교회 안 나 가는 것까지는 좋지만은 어떻게 성 경을 찢어서 담배를 피운단 말이요." "여보, 그 종이가 아주 좋아."
그래가지고 피웠는데 어쩌다가 한 번 찢어가지고 말아 피울려고 하다가 성경을 읽었어요. 고 몇 절을 읽었는데 여기서 깨지고 구원받은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성경 담배 말아 피우다가 구원받았어요. 이 말씀을 읽을 때, 마음에 큰 변화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누구나 읽으면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이보다 더 귀한 일이 없어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내 눈을 밝게 합니다. 그래서 나를 보고, 세상을 보고, 내 운명을 보고, 미래를 봅니다. 영원한 미래세계를 바라봅 니다. 답답한 세상에서 살지만 소망의 세계를 성경을 통해서 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요 얼마 전에 김진경 박사님께서 북한에 가서, 저와 같이 갔다가 저 는 나오고 못나오고 한 40일동안 억 류되어 있었는데, 빈방에 혼자 계시는데, 아무 책도 읽지 못하게 하고, 성경책도 다 빼앗겼습니다. 텅 빈 방에 혼자 있으니까 그저 생각나고 그리운 것은 성경책이에요. 성경 외우는 말씀이 있나해서 외워볼라니까 몇 절이 안되더랍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성경을 좀 많이 외워둘 걸……, 찬송을 부를려고 생각해보니깐 '예수 사랑하심' 밖에 생각이 안 나더랍니다. 어쨌던 고 몇 가지, 찬송 몇 가지, 성경만 계속 외우고 그렇게 지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자기가 사랑하는 성경 을 select 해서, 선발해 가지고 그거를 노트에 써 가지고 자꾸 읽고 읽고 외워요. 왜 당신은 성경을 그렇 게 외울려고 애를 쓰느냐?
"언젠가 는 눈이 어두워져서 성경을 못 볼 테니까 미리 외워둔다. 또 하나는 내가 세상 떠날 때에 다른 생각 다 치매와 함께 잃어버려도 내 기억 속에 성경말씀은 있어야 되니까, 그래 서 이 몇 절의 성경을 깊숙히 깊숙 히 머리 속에 넣어 둘려고 한다다."
얼마나 실제적인 말씀입니까?
우리는 성경을 사랑합니다. 그러기에 행복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잘 지켜서 여기서 용기를 얻고, 지 혜를 얻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 증거를 받아들이므로 구원에 이릅니 다.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 님의 약속을 확인합니다. 그런고로 성경은 권능입니다. 능력입니다.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오늘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성경 안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의 유명한 말입니다.
"Word of God waits for us in the Bible",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안에 서 우리를 기다린다."
여러분, 이 성경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거기에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세아 6장 1~6절) (0) | 2024.05.21 |
---|---|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마 7:9-11) (0) | 2024.05.21 |
말씀에 붙잡힌 사람(행 18:1~11) (0) | 2024.05.21 |
이 말씀의 능력 (행 10장 44절 ∼ 48절) (0) | 2024.05.21 |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로마서 8장 26절~30절) (0) | 2024.05.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