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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붙잡힌 사람(행 18:1~11)

by 【고동엽】 2024.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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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붙잡힌 사람

사도행전 18:1~11

 

 

 

 사도 바울이 아덴 선교에는, 적어도 그곳에 교회를 세우는 데 실패를 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도 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당장은 믿지 않더라도 복음을 전했으니까 바울로서는 책임을 다했다고도 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받은 바 복음 즉 전해지는 복음이 언젠가는 여러 모로 결실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마는, 그러나 다른 도시에서와 같이 당장 눈앞에 교회를 세우고 떠나는 성공은 이루어지지 아니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는 고린도로 가게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실패했습니다. 고린도에 와서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선교에 있어서 또 하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적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순수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께서 주신 방법대로만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는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고 인간적 방법으로 시도했습니다.또 하나는, 철학적 방법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종일 변론했고, 토론했고, 쟁론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사건으로 시작하여야 되는데 십자가 사건을 맨 마지막으로 두었습니다. 이야기 다 하고 끝에 가서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는 얘기를 조금 하고 말았습니다. 이래서 아덴전도에 실패하고 고린도에 왔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자녀들에게 기술을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입니다. 상당한 종교인입니다. 철학자입니다. 그런 그가 천막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은 사실 귀한 직업이 못되었습니다. 가죽을 기워서 천막을 만들거든요. 옛날에는 가죽을 이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가죽을 만져야 됩니다. 목자들이 쓰는 천막, 여행할 때에 쓰는 천막, 캐러밴들이 쓰는 천막, 그리고 군인들이 쓰는 천막들이 있는데, 옛날에는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임시 주택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만드는 기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고린도에서 무난히 살 수 있었지요. 그게 중요해요. 여기서 한번 생각할 것은 바울이 어느 사이에 대 사도에서 평신도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full time으로 전도하던 사람이, 전도에 프로이던 사람이 이제 와서는 아마추어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전심전력으로 온 시간을 다 바쳐서 전도하던 사람이 이제는 part time으로 전도했어요. 시간으로 잠깐잠깐, 개인전도 하는 정도로 머물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들어가 전도했다 합니다. 그건 아니치 못한 것이지요. 안식일은 지키게 되고, 회당은 간 것이고, 그러니 복음을 전했어요. 이 정도 가지고는 바울답지 못해요. 일주일 내내 자나깨나 하루종일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딱하게도 이렇게 되고 말았어요.

 

그가 좀더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에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라고까지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참 솔직합니다. 내적 고민을 합니다. 외적으로 누가 때리던가 누가 가두던가 하는 문제 가지고는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있는 동안에는 어쩐지 심히 떨었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심리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로 아덴에서 실패한 기억이 줄곧 그 마음에 아프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막 만드는 직업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그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16장 3, 4절에 보면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이 사람들은 참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도 바울을 위하여 일평생을 수고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로마로 간다고 할 때에 벌써 로마로 가 있어요. 그들은 본래 로마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을 다 추방할 때에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와 있다가 나중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로 갈 때에 에베소로 따라갔다가, 앞으로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간다고 하니까 벌써 로마에 가 있어요.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로마감옥에 수차 갇혀 고생을 할 때에 사뭇 시중을 들었고, 마침내는 사도 바울처럼 순교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참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이사 다니면서 바울을 뒤에서 support한 평신도 지도자라 할 수 있어요. 그 아굴라, 브리스가를 고린도에서 만나게 됩니다. 대단히 중요한 협력자입니다. 동역자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여러분이 눈여겨볼 말씀은 5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말씀에 붙잡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쉬네이게토 토 로고'라고 하는 이 "말씀에 붙잡혔다"는 것은 말씀에 포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긍휼을 베풀어주신 것도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지, 아니면 벌써 죽어야 할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나는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를 입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에게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붙들린 존재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일단 포로가 되고 말았으니 내게는 자유가 없어요. I have no choice. 선택권이 없어요. 가고, 오고, 먹고, 자고……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당신 필요하신 대로 나를 붙들어 쓰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얼마만큼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나를 이 세상에 두셨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내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내게 자유가 있습니까? 철학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명무실(有名無實)―자유란 이름만 있을 뿐이지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자유가 있었습니까? 오늘까지 산 것도 붙들려 산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시간을 사는 것도 주의 손에 붙들려 산 것입니다. 바울은 말씀에 붙들려 살고 있었어요. 말씀을 위하여 살았어요.

 

디모데후서 2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 하십니다. 어떤 정치적 억압이나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전해집니다. 누구를 통해서든 지 전해집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절대로 구속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사람들을 고용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제1호입니다. 가장 중요한 예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바울을 고용하고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자기를 포로하고 붙들어 자기를 통하여 역사하고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여러분, 가진 자유를 하나님께 다시 반납해버리세요. 내게는 자유가 없다고, 내게는 전혀 자유가 없다고 인정을 하세요. 그리고 출발하세요.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일을 아주 효과 있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내가 이렇게 저렇게 자유가 있다고 하기 때문에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붙들린 지 오래다―그렇게 생각하고 출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에 붙들렸다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들어가 좀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실패하고 고린도에 와서 지금 실의에 빠졌고, 울적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 심령이 어두운 가운데, 침체된 가운데 있는데 이제 동역자들을 만난 것입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아주 오묘한 뜻이 있지요. 사람이 혼자 있다는 것 좋지 않아요. 그러면 울적해지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해요. 그런데 실라와 디모데가 돌아와 합류하게 됨으로 불이 붙었어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요.

 

인간적으로 생각해도 디모데 앞에서, 믿음의 아들 앞에서 나약해서야 되겠어요? 실라 앞에 그래도 되겠습니까? 서로 격려가 되어서 용기를 내게 된 줄 압니다. 여러분도 믿음이 잘 자라려면 처음 믿는 사람을 항상 인도하고 있어야 돼요. 이를테면 수요예배에 나올까 말까 하다가도 처음에 믿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인도하던 중이라면 그분을 인도하기 위해서라도 나와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다 보면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돕는 것입니다. 서로 권면 하게 되고, 서로 격려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오늘도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 나오는 수도 있지마는 다른 사람의 권면으로 나오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권면하기 위해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구러 합해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바울에게 왔을 때에 합류하면서 용기를 얻었어요. 그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하니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 하실 때에 둘 씩 둘 씩 파송 하셨어요. 서로서로 격려함을 얻도록, 힘을 얻도록 말입니다. 그러니까 독처 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신앙 생활도 독처 하는 것이 좋지 않아요. 함께 한다는 데서, 공동체의식 속에서 큰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에 보니 사도 바울이 유대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 사람들이 또 역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반대하고, 핍박하고, 훼방하니까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합니다. 별로 좋은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내가 할 최선은 다했다는 것이지요. 내가 해야할 분야의 일은 다했다, 듣든지 안 듣든지 전해야 될 것은 전했다, 이제 남은 부분의 일은 당신 책임이다―그런 얘기가 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전해야 될 일, 수고해야 될 일에 대해서 한계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하는 예기가 됩니다. 에스겔 3장에 보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책임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이방사람들은 듣는데 왜 유대사람들이 믿지 않았는가―여러 번 말씀드립니다마는 역시 선지자의 고향 같은 마음, 이미 잘못된 편견, 지식이 바로 이 같은 일을 이루게 된 것이고, 또 시기 질투가 문제이며, 민족적 우월감이 문제입니다. 예수 믿는 것 좋지만 이방사람들하고 같이 믿는다는 것은 질색이에요. 예수를 믿어도 우대사람과 이방사람은 좀 달라야지요. 같아진다는 데 기분이 나빴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마음으로 인해서 복음마저 저버리는 불행을 사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도 교회에 나오던 사람이든 처음 믿는 사람이든 간에 자기우월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런 신앙생활은 항상 문제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9절 말씀입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결국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무슨 말씀이겠습니까? 복음전파 하는 데는 결과에 대해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나는 전하는 것뿐입니다. 전해서 효과가 있을까 이 사람이 믿을까 안 믿을까―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요.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씨를 뿌리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대상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아하면 나보다 조금 못한 사람에게는 전하는 것이 쉬워요.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것도 쉬워요. 그런데 고관들에게 전할 때에는 벌벌 떨어요. 나보다 지식이 많은 사람 앞에서는 '감히 내가 어떻게'하면서 뒤로 물러서요. 잘못된 일입니다. 복음 전파에는 남녀노소 지위 고하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야 되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다 죄인이므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어떤 이유로든 간에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 내게 돌아올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요. 이렇게 복음 전함으로써 내가 얼마나 손해를 입게 되나, 핍박을 받게 되나, 이런 것도 생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결과도 두려워하지 말고, 대상도 두려워하지 말고, 나 자신에게 오는 피해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 있게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으로 오늘의 본문에 강조된 말씀은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하심입니다. 대단히 귀한 말씀입니다. 깊이 새겨두어야 하겠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런 착각에 빠질 때가 있어요. 시원치 않은 사람이 뭘 안다고 다니며 예수를 전하노, 조용히 예수 믿는 사람의 본을 보이면 되는 거지―이런 벙어리 교인이 될 때가 있어요. 내가 행위로 전도 하겠다고요?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면 "너나 잘 믿어라"할지도 몰라요. 그런 말 들어도 좋아요. 그런 말들으면서도 복음을 전해야 돼요. "그래요. 나도 지금 애쓰는 중입니다. 좌우간 예수님을 믿읍시다"해야지 "날 따르라"한다면 나를 전하는 거지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까? 내가 거룩해진 다음에 입을 열겠다고 생각한다면 죽을 때까지 입 못 열고 말 것입니다. 전도 한 번도 못해볼 것입니다. "당신처럼 믿을 바에야 그만두겠어" "당신이나 제대로 믿어"―이런 말을 듣는 한이 있어도 복음을 전해야 돼요. 상관없어요. 잊지 말아야 됩니다. 벙어리 교인은 교인이 아닙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예수 믿고, 집사 장로 돼 가지고도 아직까지 누구보고 한번 "당신, 예수 믿으세요" 해보지 못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회개해야 됩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을 못해봤으면 진짜 교인이 아닙니다.그럴 수가 없어요. 오늘 분명히 말씀합니다.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Speak out." 말하라고 했어요. 말해야 됩니다. 이 길로 나가서 당장 한번 말하세요. 버스 타고 가다가 옆에 앉은 사람에게 한번 전도하세요. "예수 믿으세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어떤 때에는 자녀들에게도 그래요. 나도 제대로 못살면서 어떻게 믿음대로 살라고 말하나―그러다가는 한마디도 말을 못하고 말아요. 잘못된 일입니다. 부지런히 계속적으로 말을 해야 돼요.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말씀이 본문에 있습니다.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직은 믿지 않아도 구원받을 백성이 여기에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가 잠잠하면 구원을 받겠느냐?하나님 백성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는 중요한 사명이 수반한다는 것을, 경륜이 거기에 함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돼요. "내 백성이 많다"―그런고로 전도하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도성에 많습니다. 이 강남에 많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면 구원받을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도성에 내 백성이 많을 것이니라 그런고로 너는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주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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