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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헌신설교 36편

베드로의 착각 요13:36~38

by 【고동엽】 2023. 3. 24.

베드로의 착각            요13:36~38            

 

요13:36~38,

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의 일을 하기 전에,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요.

자기 주제를 모른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죽은 자로 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은 자로 보지 않고, 산 자로 보아요.

 

이게 착각이에요.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면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한다고 나섭니다.

 

인간은 ‘자기 가능성’을 버린 적이 없어요.

이건 죽을 때까지 안 되어요.

 

그러므로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 옳음을 정당성으로 가지고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겁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그래도 난 착하게 살았으니 천당에 간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기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든지, 자기중심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살고자 합니다.

 

이러한 본능이

누군가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간섭하면, 반발하고 적개심을 품게 됩니다.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외부로부터 간섭 받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부모가 간섭하면 울어 버려요.

이는 울음으로서 ‘왜 날 간섭하느냐?’ 라고 자기 주권을 사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늘 위에서나 하늘 아래서나 자기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즉 나 이외 다른 신(神)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날 간섭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모두는 죄가 자기중심으로, 독자적으로 살도록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뒷조사를 하는 배후에는

  자기는 (절대)선이고, 자기는 옳고 정당하며,

  다른 사람은 악이고, 정당하지 못하다는.. <자기중심주의>가.. 그 근본적 악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죄인 것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왕(하나님, 신)이 되었어요.

죄가 모든 인간을 왕(신, 神)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사람들은 스스로 왕이라고 생각하므로, 모두가 자신에 대하여 가치를 가집니다.

타인과 비교하여서 자신이 낫다고 여겨요.

 

상대적 비교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요.

신앙생활도 자신이 잘하고!

믿음도 더 좋고!

 

복음도 자신이 더 많이 잘 알고!

인간성도 자신이 낫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분이 웃으십니다.

‘어이구~ 저 교만 덩어리들!’

 

자기 주제도 모른 체, 잘난 척 날뛰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을 일컬어, 목이 곧다고 하고 교만하다고 하는 겁니다.

 

모세는 성령의 감동으로 인간의 본질을 알려 줍니다.

너희 인간은 흙이라고 합니다.

 

그 흙으로 사는 인생도 기껏해야 ‘7~80년’이라고 합니다.

그 7~80년 사는 것도,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어떤 자인지 아는,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가 자신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가 가려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이 깨닫게 해주셔야지만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자기 본질을 알고 나면 화들짝 놀랍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 보니, 자기가 불타 버릴 쓰레기라는 것을 안 겁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왜 불 가운데로’ 강림 하십니까?

이는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쓰레기로 보아요.

그럼에도 죄인들은 이런 사실을 몰라요.

자기 주제도 모른 채 하나님을 돕겠다고 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자신이 쓰레기인줄 알았어요.

자기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배설물임을 알았어요.

배설물이란.. 무가치 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의인(義人)인줄 알았는데

막상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의인이 아니라

저주 받아야 할 죄인(罪人)이라는 사실을 안 겁니다.

 

그러니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배설물이라고 토해내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선 분명히 존귀한 것임에도

예수 안에서 보니 한낱 쓰레기라는 것을 안 겁니다.

 

베냐민 지파로서 왕 족이라는 자신의 가문도 배설물이고!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자신의 학벌도 쓰레기이고!

바리새인으로서의 종교적인 열심과 충성도 죽은 몸짓이었고!

하나님께 대한 열정도 다 하나님 앞에 의(義)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돕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보니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마귀의 일을 한 것임을 안 겁니다.

 

자신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해(害)가 됨을 알았어요.

이게 하나님을 바로 만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엘리야처럼, 자신의 열심과 특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설치는 신자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엘리야처럼 ‘왜 내 특심을 몰라주느냐’고 아우성입니다.

 

저도 과거에 울산 복음화를 한다고 “주여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밤이슬 맞아 가면서 산 기도를 엄청 많이 했어요.

교인들을 구름떼 같이 벌떼 같이 많이 보내달라고 했어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참으로 가관이었어요.

다행히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을 해 주지 않았기 망정이지

 

혹시 응답이라도 해 주셨으면

 

지금은 저는 거짓 선지자로서, 거짓 신자들을 추수하는 추수 꾼으로

나름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 기도를 안 들어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는 하나님이 제가 아직 미숙할 때 기도한 것을, 안 들어주신 것을 너무도 감사해요.

 

우린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한 기도대로 우리 인생이 펼쳐졌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여잡고 있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을 겁니다.

사단의 종노릇하고 있을 거에요.

 

우린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설쳐 댔습니까?

열심과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동분서주했잖아요.

 

새벽부터 밤 잠 안자고 철야하면서 주의 일꾼이 되겠다고 기도했잖아요.

‘하나님은 왜 내 정성을 안 들어주느냐’고 원망을 했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미성숙한) 열정이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란 것을 몰랐어요.

 

우린 호세아 시대처럼, 우리의 인간적 열심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노를 더 쌓게 되는 일을 하기 십상입니다. 주1)

 

이 시대 버전으로 하면, 아직 미숙한 신자들이 모여서 열심히 도모할수록

자기들 말로, ‘열심이 특심할수록’ 오히려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과 충성이라는 종교적인 성과(成果)를

허무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고 계신다는 겁니다.

 

이게 많을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괜찮은 인간으로 만들지 않고 못난 인간임을 폭로시킵니다.

죄인임을 깊이 알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얼굴을 못 들도록 만들고 할 말이 없게

유구무언(有口無言)으로 만들어 버려요.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럼 왜, 인간의 열심과 정성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죄가 되는지를 살펴볼까 합니다.

 

옛말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주제를 모르면 무식하게 용감해 집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주제 꼬라지 를 아는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기 이전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기 주제 파악이 부족했던 베드로,  그래서 호언장담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고 하니

베드로가 같이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만찬을 하시고,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아니 가기를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저는 주님이 어디로 가든지 가겠습니다.

자신은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니다! 내가 가는 길엔 너희들이 따라 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넌 날 위해 목숨을 버릴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모든 제자들의 고백이고,

또한 우리 모든 성도들이 고백이기도 해요.

 

하나님은, 베드로를 대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누가복음 22장에서 더 소상하게 나와 있으니

누가복음을 참고해 봅시다.

 

눅22:31~34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이제 유월절이 되면, 예수님은 작정대로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하나님이, 사단에게, ‘예수를 죽이는 일을 진행하도록’ 허락을 하십니다.

 

그러자 마귀가 가룟유다로부터 시작해서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과 군병들을 충동질하기 시작을 합니다.

 

온 백성들의 마음도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한 거대한 물결이, 온 세상에 출렁거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제자들에게 이제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알립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니, 제자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

서로 의기투합해서, 예수님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베드로가 ‘나는 주님과 함께 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데도 같이 가겠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보호해 준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일사각오를 다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제자들)의 진심어린 충정도..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너희가 날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희는 나를 부인하고 저주 할 것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장담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를 합니다.

너는 사단의 권세 아래 있다고 합니다.

‘사단이 지금 널 밀 까부르듯이 갖고 논다’고 합니다.

 

그래서 넌 날 배신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넘어지고 난 후에 내가 일으켜 세워주면

그 때 사람들에게

‘아~ 신앙은 장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힘으로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해 주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희는 사단의 권세를 이길 수 없다고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각오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붙잡아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로보건데 우린 예수조차도

우리 마음대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지 않으시면.. 언제 꽈당 넘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인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린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실존이에요.

 

물론 인간들은, 착각해서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기 머리털 하나 검거나 희게 할 수가 없어요.

우리 인생사를, 우리가 좌지우지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어요.

그래서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네 정성은 고맙지만 받을 순 없구나!

오늘 밤에 넌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물론 베드로는 아니라고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였지만 말이에요.

 

베드로의 장담대로, 우리의 믿음을 우리가 지킬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럼 우린 전부 순교해서 천당 맨 앞자리에 앉아 일을 것입니다.

 

암튼 우리도 베드로처럼 신앙을 장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만 뜨면 각오를 다지곤 하잖아요.

 

그러나 단 한 번도 우리가 각오를 다지고 작심을 하여도

그 각오와 작심 대로 살아오지를 못했어요.

이게 우리의 한계이고 자기 주제를 모르는 착각이에요.

 

우리를 둘러싼 마귀의 세력이 우리보다 강해요.

그러니 장담하면 안 되어요.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담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베드로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여도, 섭섭해 하지 않은 겁니다.

 

이미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체질을 아신다는 이것이, 우리에겐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구원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이, 그래서 복음인 겁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우린 이런 면죄부를 받았어요.

이걸 얼마나 깨닫느냐에 따라서, 감사의 농도와 깊이가 달라집니다.

 

베드로의 호언장담(착각)을 통하여서, 우리 신자들은, 자기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주제

마귀가 어떻게 미혹하고,

죄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서 나타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힘이 예수님의 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는 길을 자신도 따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지금은 따라 올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까지 되어 있었어요.

진심이에요.

 

베드로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각오를 다지고 장담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매정하게 거부합니다.

넌 아직 너를 몰라서 그런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인간(肉)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결단이 아니고, 호언장담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 가능성으로 접근해요.

 

그래서 뭐든지 시켜만 주시면 다 하겠다고 다짐을 해요.

이게 죄에요. 죄는 교만으로 나타나요.

 

성경에서 죄인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날 뛴다는 말입니다. 이걸 교만이라고 해요.

 

이 설교문 제목이, '베드로의 착각'인데, 그건 '착각'입니다.

착각하니까, 호언장담이 나오는 겁니다.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 중 하나는,

    죄인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율법을 통해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신들은 선민이라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못 섬겨도, 자신들은 섬길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고 알려 주시려고, 시내 산에서 율법을 준 겁니다.

율법으로 인간의 악함을 드러내기 시작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어겼어요.

하나님께 너희는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어디 말을 들어서 고분고분 이해하는가요?

그래서 하나님이 두들겨 패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죄란.. 항상 자기 가능성을 앞세우고 나아와요.

이걸 자기 의(義)라고 합니다.

 

베드로도 지금 자기 가능성으로 나아오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게요! (같이 죽을게요)’ 라고 나아오는 겁니다.

 

베드로는 지금, 자기 자신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넌 믿을 자가 아니야!

넌 안 돼!

내가 널 지켜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마음만 먹으면, 결단하고, 결심하면,

예수님을 잘 믿을 수가 있다고 생각(착각)해요.

 

목회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가르쳐요.

교인들에게 마음을 단단히 하고!

각오를 굳게 하고!

결단을 하라고 하잖아요.

 

다 열심이 부족하고, 의지가 약해서, 그렇다고 하잖아요.

그런 것도 일면 맞겠지만, 그보다 더 큰 그림은,

 

1) 먼저 인간은, 결단하고 충성하기 이전에, 자기 진면목을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큰 소리 치고, 호언장담할 재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구원 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2) 그래서 늘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주권적으로 이끄심 가운데, 내가 결심하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이지,

   주님이 이끌지 않으시고, 나를 붙들지 않으시는 가운데,

   내가 내 결단으로 뛰어들다가는, 베드로처럼 꽈당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란.. 성도들이 마음먹는다고, 결단한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지만

믿음을 지켜내는 것도 우리 뜻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가 지금 요만큼이라도 믿는 것은, 다 예수님의 기도 덕분이에요.

예수님의 공로가 아닌 것이 없어요. 다 예수님 공로에요...  (다음 호에 계속)

 

※물론, 신앙생활에 (자유의지적) 결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경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위 그림은 (칼빈주의적)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신앙을 지켜주셔야.. 내가 올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이지요.

후자가 큰 그림이고, 전자가 작은 그림으로.. 저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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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우리는 호세아 시대처럼, 우리의 인간적 열심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노를 더 쌓게 되는 일을 하기 십상입니다.

 

호10:1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2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보세요. 이스라엘은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고,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고 하지요.

한마디로 열심을 낼수록 우상숭배만 더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인간들 열심만 들고 나온 겁니다.

그러니 제사보다 긍휼을 배우라고 소리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제단을 무너뜨리고 그 주상을 깨트리는 일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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