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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헌신설교 36편

주님께 맡길 때, 주님이 역사하신다 행14:19~28

by 【고동엽】 2023. 3. 24.

주님께 맡길 때, 주님이 역사하신다                행14:19~28          

 

 

◑본문 설명

 

▲돌에 맞아 죽은 바울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참 많이 슬펐습니다.

사도 바울이 겪은 고생이.. 가슴 깊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루스드라에서 사도 바울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신’이라는 칭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즉각 자기 옷을 찢는 자기부인이 있었습니다만,

 

바울을 ‘신’으로 칭송하던 군중들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충동되어, 태도가 180도 돌변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죽게 될 정도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내다버릴 정도로,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 고통과 비통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저는 본문을 묵상하다가 울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는 바울이 고통, 마음의 애통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때 상황을, 아마 고후1:8~9절에서 이렇게 언급하였습니다.

힘이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으니.. 

 

▲여러분, 돌에 한 번 직접 맞아보셨나요?

어릴 때 어떤 아이는, 옆집 친구랑 야구공 던지고/받기를 하면서 자주 놀았는데,

그날따라 집에 야구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야구공이 귀하던 시절 얘기죠.

 

그래서 그냥 길에 굴러다니는, 주먹만한 돌맹이 하나를 주워서

야구글러브를 끼고, 친구랑 그것을 서로 던지고/받고 하면서 놀았습니다.

그러다가 돌맹이가 너무 빠르게 날아오는 바람에, 그냥 머리에 맞아버렸습니다.

결과는.. 야구공보다 더 큰 혹이 머리에 생긴 것입니다. 물론 피도 났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애들이 던진 돌에 맞은 것이 아니라,

장성한 어른들이 ‘맞아 죽어라고 힘껏 던진 돌’이었습니다.

아마 초자연적인 역사가 아니었더라면, 바울은 그날 틀림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아니,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는, 아직 오지 말라고 해서,

그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후 바울은 믿어지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그 다음 날 깨어나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250리가 떨어진 더베로 가서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행14:20

 

정말 사도 바울이 무엇에 사로잡혔나 봅니다.

그렇게 죽도록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는데, 그것도 전도하다가 그랬는데,

또 다시 전도할 마음이 어떻게 생기느냐 말입니다!

그것도, 쉬지도 못하고, 하루 밤만 지나고,

어떻게 다시 250리길을 더 가서 전도를 할 수 있었나요?

 

그 뿐 아니라 얼마 전에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할 뻔한 루스드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21

바울이 당한 환란으로 인하여, 혹시 마음이 흔들리고 시험 들었을지 모르는

제자들을 권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해주는 전도자가 돌에 맞아서 죽어갑니다.

그것을 보고 예수 믿을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시 루스드라에 다시 와야 됐습니다.

와서 예수 믿는 제자들을 불러다가 믿음에 굳게 서있으라고 권면하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이렇게 환란 당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을 격려했다는 것입니다.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해석 

 

▲1. 이런 사도바울의 모습에서, 앞서 순교한 스데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에게서, 무엇엔가 사로잡힌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돌에 맞아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

스데반 집사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자신이 주동이 되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바울은 돌에 맞으면서 아파서도 울었을 것이고,

스데반 집사에게 너무 미안해서도 울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다시 전도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은 아파서 누워있을 자격도 없다는.. 그런 마음이겠지요.

 

▲2. 또한 사도바울이 이렇게 초인적인 전도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은 시작부터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사도행전 13:2~5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 여행을 떠나보내라고 하신 분이 성령님이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서 그들을 선교사로 보내라고

성령님이 직접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도 여행은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개인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사도바울의 전도여행 중에, 성령님은 계속 역사해 주셨습니다.

 

말씀도.. 성령님이 하게 하셨고

기사와 이적도.. 성령님이 역사하여 일으키시고

이방인들도 성령님이 마음의 문을 열어 그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것도..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사도바울은 놀랍게 경험하였습니다.

 

두 사도가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 보고한 내용을 주목해 보십시오.

행14: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전도여행 중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절대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성령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돌에 맞아서 거의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어도, 마음에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전도.. 된다! 교회.. 세워진다! 이방인들..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역사하신 예수님을 너무 분명하게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확신을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빌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사도 바울에게는 이런 충만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적용1.  <힘들지만 행복한 사명자의 길>

 

▲힘들지만.. 분명히 행복한 길

사명의 길, 분명히 힘듭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명의 길이 단순히 어렵기만 했다면.. 사도 바울도 그 길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명의 길이 어렵고 힘들지만

사명의 길을 가는 자만이 누리는 엄청난 복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어려운 길,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또 전도자로 나가는 것입니다.

 

죽도록 돌에 맞는 일이 끔찍하지만

성령님의 역사는 더 놀랍고 더 뜨겁고 더 좋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해주시는 역사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처럼 행복하게 살아간 사람도 없습니다.

그의 인생 마지막 때, 그는 고백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켰다”

 

우리 중에 이렇게 고백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죽는다면 그런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사명자의 길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계속 나타나고, 동행합니다.

사명의 길이 힘들다, 나는 그런 길 못 가! 먹고 사는 것이 너무 바빠서.

그래서 지금까지 행복하게 잘 사셨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두면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산 것 밖에 생각이 나지 않은지...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 그렇게 고생 많이 하고 살았는데도

인생은 허무해, 하나님 앞에 가서 보고드릴 것이 없어!’

그런 아쉬움 밖에 남지 않는 삶을 대부분 사람들이 삽니다.

 

그런데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던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고 떳떳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삶이.. 단순히 고난의 삶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명의 길이 고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고생만 하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지.

그래서 사명자들이 사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계속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 성령의 역사가.. 사명자의 길을 계속 걸어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사도 바울처럼,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 충만하고 놀라운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 예수님을 믿지만, 내가 어떻게 사도 바울처럼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 부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비밀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고 살았습니다.>

 

 

◑적용2. 주님께 다 맡기십시오!

 

▲1. <교회>를 주님께 다 맡겨버리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 이고니온 등에서 떠나 안디옥으로 돌아올 때,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장로들에게 교회를 맡으라는 것입니다.

 

장로라 해도 우리가 보기에는 새신자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믿은 그 사람들 중에서

지도자가 될 만한 분들을 뽑아서 장로로 세운 것입니다.

 

장로라는 말은 이제 교회를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핍박당하는 교회입니다.

순교 1순위가 바로 장로입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교회를 맡깁니까?

사도 바울이 끝까지 돌보고 있어야지, 어떻게 장로들에게 맡기고 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연약한 사람을 장로로 세워서

그들에게 핍박당하는 교회를 맡긴 것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사도 바울이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던 이유는

그 사람들이 무엇인가 제대로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연약한 믿음을 가진 초신자에 불과한 사람들입니다.

 

핍박은 점점 더 세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정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분명하고, 예수님이 정말 마음에 계신 것을 알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이 분명하면..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 교회에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 교회를 책임질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곳에 계속 있었으면 좋겠지만, 복음을 전해야 될 곳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이제 이 사람들에게 교회를 맡기고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같이 계시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책임져 주세요.

이 사람들을 써주세요.” 그렇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정말 연약한 사람을 장로로 세워 교회를 맡겼지만

실상은 예수님께 맡겼다는 말입니다.

 

▲2. 사도바울은 <자신>이 이미 주님께 다 맡겨진 사람!

사도바울이 이 일에 무모할 정도로 과감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바울 자신이 그렇게 예수님께 맡겨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할 때,

교인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는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14: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당시 복음을 전하려고 떠나는 선교 여행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앞으로 어떤 일을 겪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먹을 것 잠잘 곳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기적인 재정지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힘으로 이들을 파송합니까?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그들을 오직 주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보내라고 하시니 우리가 보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슨 선교비를 제대로 줄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따라다니면서 보호할 수도 없습니다.

 

앞으로 이 두 사람이 소 아시아 지역을 돌아다닐 때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함께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지켜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을 책임져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주님께 맡기고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받고 사도 바울이 떠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매 순간 경험한 것입니다.

 

설교를 해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능력을 행하여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교회를 세워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그 교회에 장로들을 세우고

“예수님이시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다 가르치실 것입니다.

무슨 말을 전할지 걱정하지 마세요. 예수님만 바라보세요.”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골1:29,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것이 사도 바울의 간증입니다. 사도 바울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을 세울 때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사람은 연약하여도, 주님께 다 맡기면

주님이 반드시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벼랑 끝에 서게 되면

    주님께 맡긴 사람은, 주님을 믿고, 벼랑 아래로 계속 발을 내디디는 거지요.

    물론 자유낙하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안아서 받아주십니다. 

    이것이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벼랑 끝/여리고 성/홍해/요단강 앞에서 멈춥니다. 더 전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직 '다 맡기지 않은 것'입니다. 버려도 아까울 게 없는 몇 가지만 맡긴 사람입니다.

 

 

▲3. <환란>을 주님께 다 맡기시라!

사도 바울이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된 것을 보고

루스드라의 교인들이 시험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 돌에 맞아 죽을 일도 생깁니까?’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전도하던 바울이

돌에 맞아서 죽도록 된 것을 보고.. 예수 믿을 마음이 다 없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시 루스드라에 돌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명자에게 환란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14:22,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환란이 있는 것은, 마귀가 복음전파를 방해하려고 발악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을 때 어려움이 생기고, 전도자에게 특별히 환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제자들에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환란보다 더 크신 분임을 확신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온 사도바울은 보고,

루스드라의 제자들은 '주님의 영광/복음의 영광'을 크게 느꼈을 것입니다. 

복음의 영광은.. 환란 때에 특히 잘 나타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직 임마누엘하시는 주님을 믿고, 기도하고 다 맡기면 됩니다.

 

<환란>도 주님께 다 맡겨버리고, 그냥 눈 딱 감고

믿음의 롤러코스트(청룡열차)를 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돌에 맞아 죽는 것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목사님, 제 심정이 꼭 그와 같습니다. 정말 돌에 맞아 죽는 것 같아요. 소망이 다 끊어졌어요.”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하지 말고, 한 가지만 확인하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님이신 것이 사실입니까?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 것을 정말 믿습니까?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 예수로 삽니다. 아멘입니까?

 

이 믿음이 분명하면.. 여러분 인생을 예수님에게 다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만 분명히 하십시오.

 

그러면 사도 바울도 돌에 맞아 죽을 지경까지 갔지만

그를 통해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복음의 영광이 나타났듯이

여러분에게도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환란이 큰 만큼, 믿음의 열매도 클 것입니다. 복음의 광채도 크게 사방에 드러날 것입니다.

 

여러분, ‘돌에 맞아 죽을 지경’처럼 지금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4. <목숨>을 주님께 진짜로 맡긴 로렌 커닝햄

선교 단체 YWAM(국제 예수전도단) 설립자 로렌 커닝햄 박사가 쓴

「네 신을 벗으라」는 책에서

처음 예수 전도단 선교 단체를 설립하려는 부름에 순종할 때,

자신이 속한 교단(A/G)에서는, 목사직을 내어놓아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 앞에서

좋은 교회의 청빙도 포기하고

친척이 제안하는 수백만 달러 규모의 사업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교단 본부에 가서 목사직을 내어놓고, 아내 달린과 함께 돌아오는데

고속도로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깨어나서보니 자기의 온 몸에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의식을 찾고 보니,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아내 달린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아내 쪽으로 기어가서 보니, 달린은 이미 호흡이 멎어 있었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제 모든 것을 다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로렌, 이래도 여전히 나를 섬기겠느냐?’ (네 생명/네 아내 목숨을 버려서라도 나를 섬기겠느냐?)

 

로렌은 사막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도했습니다.

"예 주님, 그래도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이제 제 인생에 남은 것이라고는 제 목숨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드릴 수 있습니다."

 

잠시 후 주님의 말씀이 다시 들려 왔습니다.

‘달린을 위하여 기도하라!’

 

자기는 달린이 죽었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달린이 숨을 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마침 지나가던 차가, 기적적으로 이 사고를 발견하고,

마을로 가서 의사와 구급차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내는 여러 날 수술을 받고, 지금 완전히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로렌은 그 날 이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맡겨버렸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소관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며 세계적인 선교회를 이룩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선교사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자기와 아내의 목숨을,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을

그 날 그 사막에서 하나님께 다 내어드린/내어버린/맡겨버린 로렌 부부에게

이제 남은 생애에.. 그들에게 무엇이 겁나겠습니까?

(사도바울도 돌에 맞을 때, 자기 생명을 주님께 맡겨버렸던 것입니다.)

 

자기의 가장 소중한 목숨마저, 그 사막에서

주님께 다 맡겼기 때문에/버렸기 때문에/드렸기 때문에

로렌 커닝햄은.. 마치 사도바울처럼

왕성하게 주님을 위해서 죽도록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나는 주님께, 과연 무엇을 맡겼습니까?

     주님을 위해, 내 소중한 무엇을 버렸습니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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