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 마5:13-16
※소금(헬. 할라스)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
그것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불변하는 언약에도 비유되었죠(민 18:19).
본문에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는 뜻은,
고대 세계에서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말라버린 호수, 산에서 추출된 것이기 소위 암염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죠.
양질의 소금은 쉽게 녹기 때문에, 물에 금방 용해되지만,
어떤 소금은, 흙이 대부분이고 소금 함유량이 아주 낮으면.. 버려지게 되죠.
또한 암염을 물에 녹여서 쓰고, 남은 나머지는 흙은 거의 쓸모가 없어지죠.
그래서 그 흙(맛을 잃은 소금)을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리곤 했다고 합니다.
소금흙 때문에, 지붕의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았다고 하죠.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쓰이기 때문에
버려진 소금은 사람에게 밟히는 것입니다.
......................
◑13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본문 13절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곧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천국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소금은 어떤 역할, 어떤 기능을 합니까?
소금의 제일 중요한 역할, 제일 기본적인 기능은 맛을 내는 것입니다.
물론 방부제, 전기 배터리의 전해질, 또는 제설제 대신에 사용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기능은 역시 맛을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맛의 원조는 뭐니 뭐니 해도 소금입니다. 옛날부터 소금은 조미료로 사용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음식에 소금이 들어갑니다.
소금의 주성분인 나트륨은 인체의 혈액 농도를 조절하고 신진대사를 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나트륨과 칼륨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세포에 영양분을 공급하기도 하고
노폐물을 빼내기도 하고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소금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입니다.
그래서 다른 반찬은 없어도 소금은 꼭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나트륨을 너무 많이 섭취한다고 합니다.
대신에 갈륨 섭취를 늘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일을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소금은 중요하고 맛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소금 하면 맛, 맛 하면 소금입니다.
이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소금이란 존재의 핵심, 본질은 맛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3절에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엌 찬장에 하얀 게 있어서 소금인 줄 알고 국 끓일 때 넣었는데
맛을 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 짠맛도 내지 않고 그냥 닝닝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설렁탕에 소금을 안 쳐서 싱거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처럼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쓸모없습니다. 찬장만 복잡하고 헷갈립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히고 맙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것은 맛 잃은 소금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특히 개신교가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일부 교회가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멸시를 당하고 천대를 당합니다.
그래서 전도가 잘 안 됩니다. 전도하면 도로 욕을 얻어먹습니다.
“네나 잘하쇼!” 그럽니다. 요즘은 아예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무반응입니다.
전에는 그래도 반대를 하고 욕을 했는데, 그러면 뭐라고 말을 붙이고 대화를 할 수 있는데,
요즘은 아예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콜 센터에서 전화가 와서 “고객님, 카드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쩌구 저쩌구” 하면,
그냥 끊어버립니다. 말없이 끊어버립니다.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습니다.
(전체는 아니더라도) 한국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교회가 본질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사명을 잃어버려서
마치 맛 잃은 소금처럼 되어서 밖에 버리워져서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됩니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바 고난 받는 종 한 분뿐이시죠(사42:6, 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 빛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엡5:8, 9, 빌2:15).
그러므로 ‘너희가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너희는 빛이다!’ 라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함을 통해서.. ‘빛이 되어라’가 아니랴, *율법주의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 .. 그러니 자기 정체성에 맞게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라’이죠. *복음
‘산 위에 있는 동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
이 말씀은 우리는 세상을 비추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밝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어둡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어둡습니다. 왜 그럴까요? 전기가 없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요즘 좋은 전등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어둡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상의 빛으로 두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두신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명동 R호텔에서
어떤 형제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참 감동적인 결혼식이었습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지체들이 하는 말....
“우리 지체들이 명동에 나오니깐 명동이 (환하게) 빛이 나더군!”
(듣는 즉시 잠깐 난감 @$#%^$&^???)
‘웬 자신감?
아니...강남에 밀려 명동이 옛날 명동이 아니라 해도...
토요일 저녁에 얼마나 많은 멋쟁이들이 명동에 몰려드는데...’
‘아하! 그렇구나! 우리가 빛이니깐,
지체들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빛이 날 수 밖에...?’
“주, 예수여! 나도 더 많이 당신을 누림으로....
더 많은 빛을 발하게 하소서”
▲착한 등대지기의 문제
임금님께서 등대지기에게, 항구에 들어오는 배들의 안전을 위해서
등대의 불빛을 밝힐 수 있는 기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등대지기는, 든든한 마음으로 흐뭇해하고 있는데
옆집 아줌마가 와서 땔감이 없다고 울상이 되었습니다.
이 마음씨 착한 등대지기가, 이 아주머니에게
나라에서 등대의 불빛을 밝히기 위하여 받게 된 그 기름을 내줍니다.
또 옆집 아저씨가 와서 울상이 돼서 돈이 없다고 합니다.
기름을 팔아서 보태 쓰라고 기름을 나눠줍니다.
온 동네에 이렇게.. 등대 불빛에 사용하게 될 기름을.. 다 나눠줍니다.
마음씨가 착해서.. 눈앞에서 동네사람들이 울상을 짓고 나면..
도저히 그냥 마음으로 흘릴 수가 없어서..
그렇게 기름을 다 빌려주고 나누어줘 버렸습니다.
등대가 빛을 비추어야
어두운 밤 뱃길을 가는 배에게, 항로를 바로잡게 해주는 것 아닙니까?
위험을 알리고 하는 것이 등대인데
정작 밤이 되어서 불을 밝혀야 될 때는 땔 기름이 없어서..
등대불이 까맣게 꺼져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고가 많이 났겠지요?
착한 등대지기... 그 착함이 문제였다는 것이에요.
우리도 기름을 엉뚱한데 태울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마음은 쓰는 것입니다.
일종의 에너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강한 스트레스가 지속되고, 사람이 탈진해버렸을 때
burn-out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마음의 에너지가 다 타버렸어요.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더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난다』
생명의 에너지가 마음의 샘을 통해서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마음의 에너지를 어떻게 써야 됩니까?
등대의 불빛을 밝히는데.. 써야 됩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과, 그 나라를 드러내는데 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에너지를 너무 다른 ‘좋은’데 써 버리면, *the good
정말 꼭 필요한 ‘최고로 중요한’데.. 쓸 에너지가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the best
우리가 마음의 에너지를 어디다 써야 되냐?
그 하나님 나라의 불빛이 비춰지게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착해서 다 어디다 쓰냐?
눈에 자식의 문제가 들어오면 그 자식의 문제에 같이 빠져들어 갑니다.
이웃에 문제가 생기고, 사회에 문제가 생기면
눈에 보이는 대로 그것에 마음을 다 써버리고 맙니다.
정작 하늘의 불빛을 밝혀야 되는 데는.. 내 마음이 전혀 사용되지를 않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그 말이 바로 그 말이 아니겠습니까?)
내 마음의 에너지를.. 다른 ‘좋은 일’에 다 써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의 에너지, 내 마음의 여유를.. 아낌없이 다 써버리지 말고, 선한 일을 위해 아껴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여기서 ‘말’은 곡식을 담는 그릇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열 되가 한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좀 작은데 약 8리터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의 절반 정도 용량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등불을 켜면 말 아래에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 아래에 두면 막혀서 빛이 비취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두느냐? 등경 위에 둡니다.
등불을 얹어 놓는 등경 위에, 곧 스탠드 위에 둡니다.
그 목적은 집안 모든 사람에게 두루 잘 비취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도 교회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빛을 가두어 두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위에 두루 비취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밝히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 세상을 비추는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지역교회가 이기적인 단체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들만 위하고, 자기들끼리만 쑥덕거리고, 이웃을 돌볼 줄 모르고, 함께 나눌 줄 모르고 ...
남을 생각할 줄 모르고, 무례하고 공격적이고 .... 하여튼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잘못해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원래 세상 사람들 중에는 비판이 습관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 모두를 비판합니다.
또 교회가 부러워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죠. 비판에는 여러 경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어도 교회 안 간다. 간다면 차라리 성당에 가겠다. 아니면 절에 가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가 세상에 빛을 비추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빛을 가두어 두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빛이 비취지 못하게 꽁꽁 틀어막고 있습니다.
우리끼리 즐기고 놀자고 합니다. 교회당을 크게 지어서 우리끼리 편하게 예배드리고,
식당을 잘 지어서 맛있게 밥해 먹고, 또 교회당 안에 커피샵을 만들어서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커피 마시며 재미있게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또 좋은 악기들을 가지고 신나게 찬양하고 춤추자고 합니다. 전부 자기들뿐입니다.
‘우리끼리’ 잘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게 몸에 익숙하고 편하니까요.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이웃이 없고 지역 주민들이 없고, 사회가 없고
민족이 없고 나라가 없다는 일각의 자성이 있습니다.
‘더불어’가 없습니다. ‘두레 정신’이 없습니다. 콩 한 개라도 나눠먹는 정신이 없습니다.
우리는 미국 교회를 무조건 따라 하면 안 됩니다.
물론 미국 교회에 좋은 점도 있지만, 미국은 근본적으로 개인주의, 자본주의입니다.
부르주와들(성 안에 사는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나라입니다.
근대 부르주와들은 기본적으로 상인 계급입니다. 그러니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입니다.
자기가 열심히 돈 벌어서 대궐 같은 집을 지어놓고 자기 혼자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입니다.
요즘은 농사짓는 사람이 적지만 우리나라는 반만년 동안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사는 같이 짓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못 짓습니다.
모내기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합니다. 먼저 이웃집 모내기를 해 주고 나서
나중에 우리집 모내기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두레 문화입니다.
공동체 문화입니다. 콩 한 알이라도 나눠먹는 문화입니다.
요즘 농사는 안 지어도, 그런 DNA가 내려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교회가 이런 문화를 무시하고
예배당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쿵덕거리고 즐기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비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비춰야 할 빛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16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16절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이방인들, 세상 사람들에게 비취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비추어야 하는 이 빛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착한 행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
‘착한 행실’은 좋은 일들, 선행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선한 일들을 해서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한 일들’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또 ‘전도’라고 생각하겠지만
‘선한 일들’은 넓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한 일들, 선한 행위들이 다 포함됩니다.
영어로는 good works(선한 일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구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
예를 들면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이 다 선한 일입니다.
소년소녀 가장들을 찾아서 돕는 것, 무의탁 노인들을 돕는 것,
나이 드신 어르신들을 돌보고 식사 대접하고 효도관광 해 드리는 것 참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동네 청소 하는 것도 선한 일이고, 쓰레기 줍기도 선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런 선한 일들을 하여서 사람들이 보게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라고 합니다.
“저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니까 참 좋아.
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우리에게 도움이 돼.
저 사람들이 하는 일들을 보니까 저 사람들이 믿는 신은 진짜 같아. 나도 믿고 싶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연히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하여 정지적으로 무료 음악회를 개최합니다.
지역 주민들이 구청이나 홀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한 일들, 곧 착한 행실을 ‘사람들 앞에’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선한 일은 은밀하게 해야지, 사람들에 보이게 하면 되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지..’
그러나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 마5:16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추어야 하고,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제할 때에 ‘은밀하게 하라’는 말은,
사람들 앞에 우리가 착한 일 한다고 떠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나팔을 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마라,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칭찬을 바라보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할 때 사람들 앞에서 행하되,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하지 말고, 요란스럽게 떠들지 말고,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꼭 밤중에 몰래 쌀자루를 담장 너머로 던져 넣어야만 은밀하게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 나눠주더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면,
그것이 곧 은밀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 무슨 완장 차고 하지 말고, 프랭카드 들고 하지 말고,
진실한 마음으로 겸손히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슨 교회에서 나왔다고 쪽지 돌리지 말고,
묵묵히 선한 일을 반복해서 꾸준히 행하면 나중에는 주민들이 알게 되고,
어느 교회에서 나와서 하는지 다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 세상이 어두울수록 더 빛이 절실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둡습니다. 참 어둡습니다.
죄가 많고 부정부패가 많고, 게다가 소망이 없습니다. 믿을 데가 없습니다.
전도가 안 되고, 도리어 욕을 얻어먹고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요즘은 아예 욕도 안 하고 손가락질도 안 합니다. 무관심한 사회입니다.
그러나 이럴수록 교회의 사명은 더욱 중요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중요하고 의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이 빛은 더욱 밝게 빛날 것입니다. 이 빛은 곧 우리의 착한 행실입니다.
선한 일들입니다. 모든 종류의 선행입니다. 곧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게 아닙니다. 말로만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짜증납니다. 사랑은 실제로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로 행해야 하고, 또 물질이 함께 가야 합니다.
옛날에 한국 선교 초기에 서양 선교사들이 와서 병원을 지어서
가난하고 병든 우리 민족을 돌보고, 또 학교를 세워서
무지한 우리 민족을 깨우쳐 준 것처럼 우리도 나라를 위해, 지역사회를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재정이 지역사회로 나가야 합니다.
빛이 비취는 방향과 재정이 흐르는 방향은 일치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교회에 빚 debt 이 없어야 합니다. 빚이 있으면 이자가 나갑니다.
은행에 이자가 나가는데, 그것은 참 아까운 돈입니다. 아까운 정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웃을 위해, 지역사회를 위해 나가야 할 돈인데
은행으로 흘러 들어가고 맙니다. 구제와 선교를 위해 써야 할 돈이 은행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빛을 모아서
은행에 갖다 바친 꼴이 됩니다. 도로 빛을 빨아들여서 은행에 갖다 넣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빛을 비추지 않고 가두어 두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주변의 빛을 흡수해서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세상의 빛’이 아니라 ‘세상의 블랙홀’이 되고 맙니다.
‘블랙홀’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주위의 모든 물체를 다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중력(重力)이 엄청나게 커서 주위의 모든 별들을 빨아들이고, 모든 물체를 다 빨아들입니다.
심지어 빛도 흡수하기 때문에 볼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기는커녕 블랙홀이 된 게 아닌가 염려됩니다.
물론 교회당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고 예배드릴 공간도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빚을 내서 짓는 것은, 이제는 주의를 요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연민과 동정이 있는 어리숙한 사람이 더 좋다
거리에서 만나는 노숙인은 대부분 ‘불쾌한’ 모습입니다.
잔뜩 술에 취해 아무 곳에나 드러누워 자거나 불결한 손을 내밀며
적선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행패를 부리고 욕설을 하는 노숙인을 마주친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신앙인의 선행에 대한 ‘의무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느 교우가, 노숙인 사역을 하는 저를 의식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걸을 하는 노숙인을 돕고 싶은데, 구걸한 돈으로 술을 사서 마신다고 하니
돕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냉정하게 뿌리쳤지만,
죄를 지은 것 같고, 마음 한구석이 여간 찜찜한 것이 아니네요.”
저는 그분에게 말했습니다.
“돕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면..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돕는 것이 좋습니다.
세상은 알코올 중독자 노숙인이 술 한 잔을 마실 수 있을 만큼
어수룩한 구석도 있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구걸한 돈으로 술을 마시는 노숙인에 대해
마음이 단단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냉정해도 됩니다.
그것도 그 사람을 위한 것이니까요.
중요한 것은
노숙인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 속에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는 ‘연민’과 ‘동정’에서 출발합니다.
연민과 동정이 없는 사회를 어떻게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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