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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12장1-7 /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by 【고동엽】 2023. 1. 18.

누가복음 12장)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묵상/눅 12:1-7)

 

◆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님의 사역 3년 차에는 이미 유대에서 예수님을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예수님을 보고자 무리 수만 명이 모여서 서로 밟힐 정도로 밀집해서 모였다. 제자들도 지지자가 이 정도가 되면 흥분되고 설레는 일일 수 있다. 무언가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조용히 타이르셨다.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외식'이란 사전적인 의미가 '바깥쪽을 장식함'이다. 즉 면치레다.  헬라어 '휘포크리시스'는 조작된 모습으로 행하다는 뜻을 포함한다. 이 단어를 공동번역이나 킹제임스 성경은 '외식'보다는 '위선'이란 말로 번역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외식과 위선은 조금 다른 의미라고 생각한다. 위선은 '선한 체'하는 것이라면 외식은 '악한 체'하는 것도 포함한다. 인간들이 사람들에게 실체와 다르게 인식해주길 바라는 모든 시도를 포함한다.

 

한 예로, 베드로가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유대인 성도들이 온다고 하자, 식사한 것을 들키지 않게 하려고 벌떡 일어나서 식사자리를 피했다. 그러자 바울이 일어나서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사용한 단어가 '휘포크리시스'다(갈 2:12-14).

 

주님께서는 외식을 주의하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의 삶은 온통 외식이다. 늘 사람들을 의식하며, 칭찬에 목말라 있는 한 우리의 삶이 외식을 떨칠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이 외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외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면 더욱더 외식에 빠지는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 외식에서 벗어나는 법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께서는 우리가 외식을 벗어나는 방법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자는 결국 함정에 빠진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외식에서 벗어나려면 지나치게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심약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매일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자가 외식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또한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가 외식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면 결국 인간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짜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우신다. 인간이 나를 죽일 수는 있지만, 나를 지옥에 던져넣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죽인 후에 지옥에 영원히 던져넣으시는 권세를 가진 분이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옥을 만드셨느냐나 백 년도 아니고 천 년도 아닌, 영원히 던져넣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등의 토론은 하나님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헛된 철학으로 배부른 사람들의 말이다. 당장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사람에게 토론은 사치다. 끔찍한 지옥이 실재하고, 정말 거기에 영원히 던져넣는 분이 계신 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지옥에는 가지 않을 방안을 찾아야 한다. 

 

오늘날 신학이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왜곡되어 인간 위주로 성경을 해석하다 보니 오염된 부분이 많다. 가장 많이 상실된 부분이 '하나님을 경외함'이다. 하나님을 토론 대상으로 삼을 뿐, 그 분이 우리의 예배와 섬김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해버렸다.

 

하나님을 경외하자. 경외함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외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마태복음에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고 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으로 했다. 마태가 직역을 했다면 누가는 의역을 했다고 본다. 한 앗사리온으로 두 마리를 살 수 있는 참새가 두 앗사리온에는 다섯 마리를 살 수 있다니, 당시 길거리에서 매매하던 상황이 오늘날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렇게 한 마리 더 끼워서 줄 수 있는 하찮게 취급되는 참새 목숨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일일이 다 관여하신단다.

 

그렇다면 택함을 받은 우리는 어떨까?

하나님께서 우리 머리 터럭까지 세시고 계신다고 하신다. 단순히 내 머리터럭 숫자를 아시는 정도가 아니라, 머리 터럭 하나가 떨어지는 것까지 체크하고 계신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과장된 덕담이 아니라 명확한 사실이다. 다만 유한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일 뿐이다.

 

오, 유한한 인간들이여, 무한을 유한으로 가늠하지 말라.

무한은 거대한 유한이 아니다. 아예 속성이 다르다. 내 머릿속에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재 수학자 칸토어도 절대 무한을 연구하다가 우울증에 걸려서 병원에서 죽을 정도였다.

 

무한하신 하나님, 광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께서 우리가 머리 터럭까지 다 세신다면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로마서 8장 28절과 같은 너무나 멋진 결론이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아멘.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결말로 가는 과정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자.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자.

 

제 머리 터럭의 숫자까지 아시는 전능하신 아버지,

지나치게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이 심약함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게 해주십시오.

종의 마음이 아닌 아들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됨으로써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피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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