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동원 전도 주일 설교 모음
1.예수 안에서의 새생명(요 3:1-16)
우리 주변을 보면 일회용품들을 많이 있습니다. 인간이 편리함을 추구하다 보니 사용 후에 닦거나 빨아서 다시 사용하기보다는 한번 쓰고 버리는 물건이 많아졌습니다. 샴퓨와 세제, 치약 칫솔, 아기 기저귀, 심지어는 일회용 옷까지 생겨 났습니다. 이렇듯 자주 접하는 일회용품들을 보면서 인간은 스스로가 일회용임을 알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인간은 일회용입니다. 一生입니다. 장수와 영생은 인간의 소망이요, 과학과 의학을 통한 재생까지 꿈꾸고 있으나 하나님은 인간의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확약하셨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죄가 인간 가운데 들어오게 되었고, 그 죄의 결과는 온 인류에게 미쳤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볼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 이래로 시작된 인류의 죽음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죽고, 셋이 죽고, 역사 이래로 가장 오래 969살을 살았던 므두셀라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은 누가 얼마만큼 살았다는데 주안점을 두지 않고, 누구나 다 죽는다는데 중점을 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죽습니다.
영생을 꿈꾸고 발버둥치는 인류에게 이 선언만큼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인이나 역사에 종말을 선언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나은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한 사랑의 배려입니다. 죄악 가운데서 영원토록 사는 것보다 그 삶을 끝내고 죄와 사망이 없는 천국에서 영원한 새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의 섭리를 깨달으시고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인간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절대적으로 구원을 받아야할 존재입니다. 저희가 전도를 하다보면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예수를 믿습니까?”하고 반문하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아픈 곳도 없고, 배울만큼 배웠고, 재물도 남부럽지 않게 있고, 자녀나 남편이 속을 썩이는 것도 아닌데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예수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육적인 인생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는 큰 죄인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그 어떤 부족함이나 연약함을 보충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수치를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사함받고 가리워질 때만이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죄를 이야기할 때, 윤리적인 죄, 법정적인 죄를 말하고 있지만 성경은 더 근원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죄란 한마디로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죄의 값은 죽음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네가지 죄가 있습니다.
첫째는 원죄입니다. 원죄는 하나님이 금한 나무의 실과를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다는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겠는가 반문하실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경계였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동일하게 하셨고 유일한 경계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두셨던 것입니다. 그 약속을 지킴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자신은 피조물로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실과를 먹음으로 뱀의 유혹을 받아 그 경계를 넘어선 것입니다.
뱀은 인간에게 실과를 따먹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범죄는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겠다는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영적인 죽음과 육체의 죽음과 지옥의 영원한 사망이 인간에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원죄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범한 대표적, 법정적 죄로 전 인류에게 가져다 준 죄의 품성을 말합니다. 부모가 흑인이면 그의 후손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토록 흑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기에 그의 후손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둘째는 동기의 죄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자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한 자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마음 속에 간직한 죄의 성품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죄인이라 선언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미달의 죄입니다. 죄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는 ‘하마르티아’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빗나갔다는 뜻과 미달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선행과 자기 수련의 노력도 하나님의 뜻에는 빗나가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요구에는 미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과 분량에는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이를 수 없습니다.
넷째는 결정적인 죄로 불신앙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값으로 죽어야할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그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은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놓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은 스스로 구원을 포기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결정적인 죄입니다.
2.인간의 죄는 용서받아야 합니다.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고통스러워 하는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출생은 이러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정숙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날 아버지의 친구분이 집에 놀러 왔습니다. 그날 어머니는 아버지의 친구와 눈이 맞아 불륜을 저질러 불행의 씨앗을 잉태케 되었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수술하여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느날 아버지의 친구가 찾아와 네 아내가 낳은 아들은 내 자식이니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친구는 딸만 다섯을 두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내 자식이니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버지는 친구에게 자식을 주지않고 기르면서 어머니에 대한 미움, 친구에 대한 저주를 그 자식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그가 커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았을 때부터 그는 자신을 저주하면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몸속에 더러운 피가 흐르고 있음에 몸서리치며 자학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속에 있는 모든 피를 뽑아내고 수혈을 받아 다른 사람이 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악에 대한 용서는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인간이 아담의 후손이요 유전적인 원죄는 어떤 노력과 방법으로도 사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잭슨이라는 가수가 흑인으로 인기를 얻자, 그 인기를 계속 유지하려고 얼굴을 성형수술을 23회에 걸쳐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얼굴 피부는 지금 백인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형을 바꾸고 피부를 이식해도 그의 몸에는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는 흑인이고 그를 통하여 태어나는 자녀도 검은 피부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존재자체를 바꿀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인간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의 인간의 그 어떤 노력도 결코 죄를 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3.영생의 삶을 찾으십시오.
세상에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옳은 사람입니까?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스스로 죄없다 하는 자가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들과는 예수님이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시고 죄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에 있어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들에게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가치기준과 성경의 관점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악은 과거보다 더욱 악해져 감에도 불구하고 본인 스스로는 나는 결코 죄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구원문제가 사람에게 달리지 않았다는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요한복음 3장과 4장은 구원의 문제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3장에서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요, 선생이요 당시에 꽤나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에게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세상에서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도 결코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장에 가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섯번 결혼하고 지금은 남편 아닌 남자와 살고 있는 여자를 찾아가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는 니고데모가 구원받고 수가성 여인은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정반대입니다. 왜입니까? 구원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중 몇가지를 살펴 봅시다. 유교, 불교, 선교 등이 우리나라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종교입니다. 儒佛仙. 이 세가지 종교는 각각의 이름 앞에 ‘人’변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성경은 천하 인간에게 구원얻을 만한 이름을 예수 외에 주신 일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자타가 의인으로 인정하는 사람도 자신의 의를 통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반대로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 같이 추악한 죄인도 찾아오신 예수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재봉을 아십니까? 1963년 10월 19일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에서 병기 대대장이었던 이중령 일가 6명을 도끼로 살해했던 그가 구원받고 천국에 갔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자타가 의인이라고 인정했던 사람이 자신의 죄를 지고 지옥에 가고, 세상이 살려둘 수 없었던 죄인이 용서받고 천국에 갔다면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세상에 살려둘 수 없어 사형시킨 죄인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지만, 스스로 아무리 의롭다고 주장하는 인간도 하나님의 거룩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으로 보시는 공의도 함께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당신을 정결케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의를 버리십시오. 당신은 절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당신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새생명을 얻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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