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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믿으라

by 【고동엽】 202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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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믿으라

(행16장25-34)
<총동원전도주일설교>


5월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전도의 달입니다. 말을 바꿔 말하자면 5월은 전도의 달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 예수를 믿으라” 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세상에는 종교도 많이 있고 교주도 많이 있습니다. 때문에 공자를 믿으라 고 외치기도 하고 또한 석가모니도 믿으라고 말하기도 하며, 마호멧트를 믿으라고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박태선을 믿으라 하기도하고 문선명을 믿으라며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성경을 빌어 ”주 예수를 믿으라고” 간곡히 외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것일까요?


첫째, 예수는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예수님을 전하다가 빌립보 옥에 갇히게 되는데 본문 25절을 보게 되면”밤중쯤 되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즉 그 밤이 바울에게 고통의 밤이 되었고, 괴로움과 역경의 시험의 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고독의 밤이 있고, 역경의 밤이 있으며, 질병의 밤, 실패의 밤, 재난의 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격언 중에 ”깊은 밤은 좋은 생각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으며 ”깊은 밤에 대부분의 인생들은 시인이 되어간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파스칼은 병상에서 프란시스는 죽음의 위기에서 밀턴은 소경이 된 후에 베토벤은 귀머거리가 된 후에 모두 세상의 걸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본문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최악의 장소를 최선의 장소로 바꾸어 놓은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두 사람이 합심하여 감옥을 성전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전은 기도하고 찬송하는 하나님의 집이며, 기도하고 찬송하는 곳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요 성전이 됩니다.


주경 신학자 뱅겔이 ”진실된 성도 가령 남편과 아내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이면 교회가 형성된다”고 하였듯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미하더니 성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옥중이 변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찬송하고 기도할 때에 죄수들이 듣게 되었고 마침내 이적이 일어났으며 죽을 수밖에 없었던 간수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실의와 낙담 가운데 있는 옥중 인생들에게 그들은 선교사가 되어 그 옥중을 선교지로 만들었습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간수가 ”등불을 다오!”라고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깜깜하고 볼 수가 없는 밤중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영적 교훈을 찾아보자면, 세상은 밤중 같은 곳, 즉 도덕이 빛을 잃고, 정치가 빛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학원의 가로등에 불이 꺼져가고 있었고, 예술의 광장에 불이 희미해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하더니 깜깜한 밤과 같은 옥중을 대낮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떠한 빛이기에 어두움이 물러가게 하며 대낮이 되게 할 수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8:12절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 빛은 바로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한 곳은 어두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시면은 어두움이 물러가게 되고 흑암이 태양처럼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옥중의 빛도 되시지만 가정의 빛도 되십니다. 죄악세상 인생에게 속죄의 빛이 되어 주시고 죽음의 인생에게 생명의 빛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셔서 천지가 밝아지게 하셨는데, 이러한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신 것을 실물교수 하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시고 계실 때에 소경거지 바디매오가 꿇어앉아 있다가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불쌍한 소경은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구원을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머무르시사 저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바디매오는 소경임에도 불구하고 겉옷을 던지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로 달려갔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소경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십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물으시고 계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사랑하는 성도여! 밤중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여야 할 것인가요? 바디메오는 대답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밤중 같은 세상에 참으로 적절한 요구를 하였던 것입니다. 소경의 간절한 욕구는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아니고 바로 보기를 원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선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눈이 소경과 같이 밝아지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우리는 마음이 밝아져야 하며 우리의 생활이 밝아져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불투명해서는 안됩니다. 주님 앞에서 오픈 되어져 있는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하며 성도들의 가정이 되길 바랍니다. 왜 예수를 믿으라고 하였을까요?


둘째, 예수는 이적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에 ”홀현히 큰 지진이 나서…”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홀현히’라는 말은 갑자기, 느닷없이, 생각밖에 등 여러 가지의 뜻을 가집니다. 생각해 보면 이적은 갑자기 일어나며 축복도 갑자기 받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모두는 기도하고 찬송하며 설교 말씀을 듣다가 갑자기 축복을 받을 수 있으며 질병이 물러나는 이적 또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 있습니다. 빌립보 옥중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이 모두 다 쇠고랑에서 벗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이적을 행한 이는 누구일까요?


이 이적의 장본인은 바울도 실라도 아니며 바울과 실라가 기도 할 때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성경에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소경아 눈을 떠라!” 말씀하셔서 소경을 보게 하신 예수님은 ”쇠고랑아 벗어져라” 말씀하셔서 많은 죄수들의 쇠고랑을 벗어지게 하신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이 모든 것들을 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이 시간 예배하는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홀연히 이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그러한 복입니다. 그 주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을 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적을 만나기를 염원하신다면 바울과 실라처럼 기도해야 하며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적을 기다리는 것만큼 성도는 성도의 본분을 최선을 다하여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장 11절에 ”예수께서 이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여기에서 처음 표적이란 가나 혼인잔치에서 행하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행하신 이적을 말하는 것인데 이 이적에서 기억할 것이 있다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한 항아리도 아닌 여섯 항아리나 되는 곳에 물을 아구까지 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행히도 곁에 우물이 있었서 하인들은 여섯 개나 되는 항아리에 맹물로는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일 하인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혼인잔치는 낭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내 기도의 항아리가 비어있지는 않는가? 내 찬송의 항아리가 비어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1년을 두고 한번쯤 내 헌금의 항아리를 들여다 볼 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생일감사 헌금의 항아리엔 바닥나지는 않았는가? 십일조헌금의 항아리가 구멍 뚫리지는 않았는가? 건축헌금의 항아리가 마르지는 않았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오게 됩니다. 그 밤이 오기 전에 힘써서 일하십시다. 일하지도 아니하면서 이적을 기다리는 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건강할 때 열심히 봉사해야 하며 내가 가진 재물이 날아가기 전에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나의 삶 가운데 이적을 행하실 것이며,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듯이 옛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고 죄인 괴수가 변하여 성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앞에 나의 모든 것, 나의 염려까지도 맡겨야 하며 두려워도 말고 겁을 내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적을 행하시는 우리 주님 앞에 헌신 다짐하며 찬양하는 우리가 되십시다.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합시다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예수님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예수님 찬양합시다~♬


왜 예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일까요?


셋째, 예수는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1절을 보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에서 구원이란 헬라어로 소테리아라고 하는데 여기엔 다양한 의미들이 있습니다.


우선 육체의 질병으로부터의 고침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9장 21절에 간질병에 걸린 아들이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는데 이것은 구원을 나타냅니다. 누가복음 8장 36절에 거라사 지방에 귀신 들린 사람이 고침을 받는 구원, 누가복음 5장 34절에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고침을 받는 구원입니다.


또한 위험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마태복음 8장 25절에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위험을 만났을 때에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태복음 24장 30절에 보면 베드로가 물에 빠져 들어가면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하며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또한 구원은 패역한 세대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데 사도행전 2장 40절에 보면 ”너희가 이 패역한 이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패역한 세대란 하나님을 향한 반항과 불순종으로 어그러진 영적 정신적 사상적 질병을 뜻하며 또한 무실론, 유물론, 불가지론, 자연신론, 범신론, 진화론, 우상숭배, 배금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 현실주의 등 온갖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대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해방 받는다는 것은 곧 구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무엇입니까?
죄로부터의 사죄를 의미하는데...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말하는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또 구원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이며 영원한 건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얻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는 부활의 세계를 향하여 가고 있다는 사실이 구원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망의 세상에서 영생 있는 천국을 향하여 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세상에 오셨을까요?
우리 함께 누가복음 19장 10절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나와 같은 죄인을 살리시려고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절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 세상에 임하셨도다”


요한복음 3장 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래서 기독교란 ”주 예수를 믿으라!”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누구에게 전해야 할 것인가요? 물론 옥에 수감된 죄수에게 예수님을 전해야 하며 죄수를 지키는 간수에게도 예수님을 전해야 될 것입니다. 예수는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이며 인생의 구주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이들에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에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녀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먼저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말만은 기피해서는 안될 것이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꿈속에서라도 주 예수를 전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미래에 주인이며 꿈나무이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살아야 미래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바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어린이들, 즉 내 자녀들 내 청소년들입니다. 그들이 만일 예수님을 믿지 않게 된다면 모두 모두가 잃어버린 자들일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잃어버린 자요, 예수 믿지 아니하고 있다면 어머니가 잃어버린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려고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오셨는데 누가복음 15장의 내용이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처럼 찾아 오셨습니다.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찾을 때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골짜기를 헤매면서 진땀을 흘리면서 찾더니 잃은 양을 어깨에 매고 기쁨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
주님은 이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와 같은 모습으로 전도하고 있는지요? 5월 한달이 내 믿음생활에 있어서 부끄럽지 아니하는 한 달이 되도록 하고 있는지요? 또한 주님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자처럼 찾아오셨습니다. 여기에서는 교회를 상징하는데 지금 우리 교회가 5월을 전도의 달로 지키면서 오늘은 어린이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또한 장년부를 중심으로 해서 전도 집회와 간증집회를 하고 바울과 실라처럼 기도하며 찬송하면서 심야 기도와 철야기도를 하면서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과연 동참하고 계신지요? 우리 주님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곁을 멀리 떠나 탕자가 되었는데 그 아버지는 날마다 아들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돌아와! 돌아와!” 하며 고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다리는 종교이며 참 구원을 주실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길이 열리고 기쁨이 생기며 변화를 받고, 탕자 여인이 현모양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가정이 복을 받고 예수 믿는 나라가 부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양하겠네
저 죄인 어서 주께 와 죄 사하심을 받아라~♬


출처: 설교: 변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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