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울 때 천국이 임한다/ 마5:3, 눅6:20
현대인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가운데 가난이라는 것이 들어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느 유명한 사상가가 이렇게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난해지지 않도록 결심하십시오. 가난은 행복의 적입니다.' 아마 이 한 마디가 현대인들의 그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가난은 악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갖가지 사회악을 키우는 온상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난이라는 용어를 서슴지 않고 사용하고 계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라는 말을 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돈이나 부나 향락을 우상처럼 생각하고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정말 매력 없는 말씀처럼 들릴 것입니다.
더욱이 이 '가난'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원래의 의미를 알게 되면 더더욱 이 말씀은 복이 될 수가 없다고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헬라어로 '프토코스'(ptokos) 입니다. 이 말은 재물을 적당히 가지고 살면서 약간 아쉽게 느낄 정도의 그런 가난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굽실거리면서 동냥을 하는 거지의 형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자집 대문 밖에서 죽을 때까지 평생 구걸하면서 살다가 간 나사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프토코스'라고 말합니다. 이 '프토코스'라는 단어가 바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난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신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슨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저주스러운 것이지요. 어떻게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셔도 그것은 마치 정가표를 바꿔 달아 놓은 상품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오천만원 짜리 밍크코트에 붙어있던 정가표를 떼어다가 십만원 짜리 티셔츠에 옮겨 붙였다고 해서 티셔츠가 밍크코트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난은 가난이고, 부한 것은 부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도록 말씀하려고 하셨다면 '심령이 부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셔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말씀을 접할 때의 느낌이고 반응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가난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선언하시는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들에게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무지함과 어리석음과 어두움에 쌓여 있는 인간들에게 빛과 진리와 거룩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언하는 진리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느니라.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느니라.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는 주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 말씀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선입견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선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심령의 가난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될 마음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사람 앞에서 심령이 가난하거나 부한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그저 있는 대로 대하면 됩니다. 그러나 만유의 주가 되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는 우리 마음이 어떠해야 된다는 것입니까? 바로 심령이 가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표현하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심령의 가난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낮아 지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마음을 비우면 낮아지게 됩니다. 낮아진 사람은 마음이 비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빈 자와 마음을 비우지 못한 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아주 짤막한 에피소드로 잘 설명하신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과 세리가 어떻게 시간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성전에 기도하기 위해서 같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남들 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흠 잡힐 것이 없을 만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거룩한 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 세리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매국노요, 모리배 같은 인간이요, 양심을 떼어 놓고 살아서 사람들로부터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돈이 많은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만만하게 성전 저 깊숙한 앞 자리까지 들어가더니 두 손을 번쩍 들고 하늘을 향해 머리를 치켜들고 눈을 뜨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이 되는 사람입니다. 토색하는 사람, 간음하는 사람, 또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과 저는 다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하고 구별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기도를 합니다. 저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냅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마음이 부한 자라고 하십니다. 심령이 부한 자, 심령에 무엇을 가득히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자꾸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고 내 놓고 싶은 것입니다. C.S. 루이스라고 하는 유명한 기독교 변증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좀더 선하다, 좀더 낫다, 좀더 거룩하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고 악마의 지배를 받고서 행동하는 사람이다. 이것을 꼭 기억하라. 왜냐하면 그런 마음의 태도는 영적으로 교만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고, 그런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대적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교만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인간의 악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마음의 상태가 교만이요, 마음에 무엇인가 가득히 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세가 교만입니다. 바로 바리새인이 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세리는 어떠했습니까? 성전 앞자리까지 가지도 못했습니다. 뒷구석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그저 이 말 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 내 놓을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하게 자기를 비하시켰고 철저하게 자기를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비우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자를 두고 하시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안타깝게도 심령이 가난하지 못한 분들을 가끔 봅니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앉아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왜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깊이 만지지 못합니까? 왜 우리의 심령에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습니까? 한번 밖에 없는 이 한 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 드리고 싶은 마음이 왜 생기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음이 가득해서 그렇습니다. 아쉬운 것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기댈 데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불행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출신 성분을 들고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나의 가문이 좋은 것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전혀 통하지 않을 이야기입니다. 지위가 아무리 높고 세상 사람 보기에 능력 있고 성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들을 들고 나와 하나님 앞에 자랑하려는 심리를 가지면 안됩니다. 사람에게는 대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좀더 선하게 살고 있고, 양심적으로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무슨 특별한 죄를 범한 일이 있는가? 이만하면 하나님도 인정해 주실 것이다.' 케케묵은 생각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마음에 담고 나오면 그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 있는 자, 행복한 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나 재산 때문에 마음이 든든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든든한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장애물입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소용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자기가 대단한 것을 갖고 있는 줄 알고 교만하여 상당한 긍지를 가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 모든 것들을 다 저 화장실에서 물 속에다 흘려 보내는 배설물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다 쓸어 버리고 마음을 완전히 비웠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자 지금까지 너무나 귀하게 여겨서 꼭 쥐고 놓지 않았던 것들이 다 소용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모두가 다 신기루 같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싹 쓸어 버렸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이 이러해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천국으로 채워 주신다고 했습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영생을 값없이 얻은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천국이 너희 것이 되었다.'라는 한 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구원을 주신 하나님 앞에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참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입니까? 이 시간에 주님이 이 자리에 계셔서 가르치십니다. 이 시간에 주님께서 이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여 어두운 데 있는 심령을 영생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그 생명의 출생이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이 이 자리에서 우리의 영과 육이 병든 것을 치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 가운데 계십니다. 왜 우리가 이와 같이 예배할 수 있습니까?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참 감사합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이렇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을 온통 다스리시는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을 보면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이 기쁨과 행복으로 얼마나 충만해지는지 모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잘 먹고 마시고 편안하게 살아도, 즐기고 싶은 것 다 즐겨도 거기에는 천국이 없습니다. 진수성찬을 차려 놓은 밥상에 천국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는 것은 다 갖다 쌓아 놓은 집에도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은 그런 데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심령에 임합니다. 그 천국이 임하면 의를 사랑합니다. 의를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악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사탄의 불행이 있지만 의를 사랑하는 자의 마음에는 하나님 자신의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다스리시는 천국이 임하면 내 안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이 있습니다. 남편에게 기댈 때도 느끼지 못했던 평강, 쌓아 놓은 돈에 기댈 때도 느끼지 못했던 평강,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참한 자식들에게 기댈 때도 느끼지 못했던 평강, 내 건강을 의지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평강을 주님이 내 안에 계심으로써 느끼게 만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천국이요, 희락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기뻐할 일이 없지만 마음에는 예수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천국이 있습니까?
어느 예배 시간에는 반드시 그 자리에 늘 같은 분이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찬송을 부를 때, 기도할 때, 말씀을 들을 때 그 얼굴이 완전히 어린 아이의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지금 연애 중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연애 할 나이는 벌써 지난 50대입니다. 그런데 그 얼굴에 행복의 꽃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제가 예배 시간마다 그분을 가끔 보면서 저보다 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가 그렇게 행복해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아는데 그분은 그렇게 잘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행복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에 천국이 있습니다. 의와 희락과 평강이 넘치는 예수님의 나라가 그 마음에 있습니다. 누가 그것을 빼앗아 가겠습니까? 누가 그 나라를 파괴하겠습니까?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비워 주시고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이 천국의 행복을 안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침체된 기분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을지 모르지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복입니까? 그 마음이 천국을 소유하는 복입니다. 이 복을 여러분이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두 번째로 누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심령이라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6:20) 틀림없이 이 본문은 영적으로 가난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실제로 없는 빈자(貧者)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치 가난이 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거꾸로 뒤집으면 부(副)는 복이 아니고 저주요, 부자는 천국과 거리가 멀다고 하는 말씀을 이면에 깔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가복음의 이 구절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이것은 실제로 돈이 없어 가난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려는 듯한 인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가난한 생활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을 그렇게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도 자꾸 그런 식으로 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가난을 선(善)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가난을 미화하거나 가난을 구원 받는 공로로 말씀하신 일도 없습니다. 가난한 자를 의롭다고 아부하신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부자들을 의롭지 못하다고 면전박대를 하신 일도 없습니다. 가난을 선이라고 하고, 부를 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금욕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느 때는 잘 마시고 잘 먹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해석하기에 따라서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 실제로 돈이 없고 어렵게 사는 가난한 자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보고 누가가 기록했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안에 실제적으로 돈이 없어 가난한 자까지 다 포함된다는 것을 누가는 특별히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부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성경 구절은 하나도 없습니다. 산상수훈을 듣기 위해서 지금 구름 떼와 같이 예수님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않았습니까? 집도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직업도 버리고, 다 내 버려서 빈털터리가 되어 주님을 따라가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 안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로 '아니'(ahni)라고 하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때도 지금과 똑 같이 돈을 벌고 부유한 생활을 하고 싶으면 반드시 어떤 불의와 타협을 해야만 하는 사회적, 구조적인 악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경건한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불의와 짝하면서 부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불의와 결별하고 대신 가난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경건한 생활을 할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했습니다. '아니'라고 하는 이 경건한 사람들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차라리 가난하게 살면서 하나님과 더 깊은 영교를 맺는 의인이 되기로 결심한 자들입니다. 요셉, 나사로, 사가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영접했던 소수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다 그랬습니다. 다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집안에 태어나서 평생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 날 수 없는 팔자를 타고난 사람들이 수두룩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난한 사람들은 안중에 두지 않고 영적으로 가난한 것만 말씀하셨다고 본다면 성경을 완전히 뒤집어서 해석하는 격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실제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는 부자보다도 예수님을 쉽게 믿을 수 있습니다. 이 현실입니다. 일본에 갈 때마다 일본 목사님들이 저더러 한국교회가 어떻게 그렇게 부흥하고 성장하는가 자꾸 묻습니다. 일본교회는 왜 이처럼 부흥이 안 되는가고 탄식을 합니다. 지난 여름에도 그런 질문을 받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일본은 우리와 국제관계가 단순하지 않기에 직접적으로 일본 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이유를 말할 수 없어서 한국교회를 빗대어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흥하는 이유는 그 배후에 가난이 있었기 때문에, 그 배후에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정확한 대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자는 예수님을 믿기가 쉽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가난한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사랑의교회같이 서초동에 자리 잡은 교회의 성도들은 누가 가난한지 누가 부자인지 금방 식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 비슷비슷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변두리로 나가면 거의 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과거에 귀족집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돈 걱정 하지 아니하고 원하는 공부를 다 할 수 있었더라면 예수 안 믿었을 것입니다. 목사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가난 때문에 예수 믿은 사람입니다. 만약 가난 때문에 예수 믿었다면 이 가난만큼 나를 팔자 좋은 사람으로 만든 조건이 어디 있습니까? 마태복음 19장 23절, 24절에서는 예수님이 노골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여기서 부자가 영적인 부자입니까? 아닙니다. 실제로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를 말합니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바꾸어 말하면 가난한 사람은 약대가 다리 밑을 지나 가는 것처럼 천국 들어가기가 쉽다는 말과 같습니다. 가난한 자가 구원 받기가 훨씬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가운데 저처럼 태어날 때부터 지지리 가난해서 예수 안 믿으면 살 맛이 없어 예수 믿게 된 분들이 계시다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가난해서 예수 믿은 사람은 감사해야 합니다.
동시에 가난한 자는 부자보다 마음을 쉽게 비울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심령의 가난을 쉽게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들고 나올 게 없지 않습니까? 잘 났다고 할 거리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가난 때문에 실제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생명을 걸고 믿습니다. 예수 믿는 생활이 사치품이 아닙니다. 교양이 아닙니다. 생존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이렇게 고생하며 서글프게 사는데 예수까지 믿지 못해서 구원 받지 못한다면 억울해서 어떻게 삽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을 생사의 문제로 생각하고 달려 듭니다. 그렇다면 그 가난은 복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비우면 주님이 그 마음에 임재하셔서 다스리십니다. 자비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넉넉하지 못해 늘 얼굴에 주름살이 지고 어떤 때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는 그 심령을 포근히 안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이 모르는 행복이 가슴에 있습니다.
6년 전 사랑의교회에서 발간하는 우리지에 나온 한 기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딸 애 하고 셋이서 15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어느 부인이 쓴 것입니다. 10여년 정도 사용하던 냉장고가 이제는 도무지 더 쓸 수가 없어서 조금 큰 것으로 교체했는데 그 냉장고를 들여 놓으니 집안이 가득합니다. 게다가 부인이 피아노 레슨을 조금씩 하기 때문에 자그마한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있습니다. 집안에 들어가면 숨이 막힙니다. 책상 하나 놓을 자리가 없어서 호마이카 밥상을 필요할 때는 펴 놓고 쓰다가 다 쓴 후에는 접어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인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감사하신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쁘게 노래했던 하박국 선지자처럼 이 좁은 공간에서도 끊이지 않는 웃음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비록 지위와 명예와 부가 없을지라도 잠잘 때 코 끝이 시려워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잘지라도 제게 믿음 주시고 하나님을 믿는 남편과 건강하고 기도 잘하는 딸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평생 지금의 마음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이곳은 아버지가 함께 하시기에 바로 천국입니다.' 가난하다고 다 불행한 줄 아십니까? 돈이 없어서 아이들 학비도 제대로 못 주고 밤새 그저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처량한 줄 아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겉으로는 울지 모르지만 속은 다릅니다. 그 정도의 깊이 있고 차원 높은 행복을 모르면서 예수 믿는다고 남에게 어떻게 말을 합니까?
며칠 전에 아내와 함께 저는 30년 전에 살던 아파트를 30년 만에 가 보았습니다. 그 때 제가 서울 시내에 있는 어느 교회 부교역자로 있었는데 교회 사택이라고 주는 것이 그렇게 좁은 아파트였습니다. 8평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화장실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은 공동 화장실을 사용합니다. 30년 만에 그곳을 찾아가면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 아파트가 재건축되지는 않았을까?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진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30년 전의 여닫이 현관문이 많이 낡기는 했지만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감개무량했습니다. 저희가 살았던 4층 505호실을 찾아 갔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연탄을 때던 집이 도시 가스로 바뀌었다는 것 하나 뿐이었습니다. 창문이 열려 있어서 안을 들여다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아내에게 이런 곳에도 행복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는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아침이면 줄을 서서 기다리던 공동 화장실에도 가보았습니다. '그 때는 여기서도,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았지.' 하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아파트를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저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 보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이 행복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음만 비우면 천국을 받아 들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다스리도록 내 마음을 내어 놓기만 하면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돈 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에 속지 마십시오. 천하의 영광을 다 보여 주면서 여기에 행복이 있다고 하던 사탄의 말에 속지 마십시오. 돈은 그 자체로서는 악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 아닙니다. 그러나 부와 돈이 주님 앞에 가는데 장애물이 된다면, 부와 돈이 내 마음을 비우는데 장애가 된다면, 부와 돈이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내 마음에 소유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돈은 적당히 가지면 됩니다. 그 이상 가질 필요가 없어요. 성경에는 일용할 양식이면 족하다고 말씀했는데 그것은 조금 너무 한 것 같습니다. 자식들 공부도 시켜야 하는데 사람이 어떻게 입에 풀칠만 하고 살 수 있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유지하는 수준을 어느 정도 따라가야지 그것을 전혀 무시해 버리고 일용할 양식만 채워지면 다 된다는 식은 조금 지나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만 가지면 됩니다. 그 이상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중산층인지 그보다 조금 못한지 모르지만 그런대로 살만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에 50억 짜리 다이아몬드 팔찌를 끼고 다니는 얼빠진 졸부는 하나도 없습니다. 돈을 더 모으는데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 정도면 족하다는 생각을 하십시오. 행복은 재산이 늘어나면서 함께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로버트 우스터 교수가 발표한 자료를 언젠가 한번 소개한 것 같습니다. 그가 아주 중요한 데이터를 제공했습니다. 전 세계 54개국을 대상으로 어느 나라 사람들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지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제일 못 사는 나라, 제일 천재지변이 많은 나라,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1위였습니다. 그들이 제일 행복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결과였습니다. 그러면 54개국 중에서 미국은 몇 번째인지 아십니까? 46번째입니다. 한국은 23번째입니다. 이 자료는 잘 사는 것과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스터 교수가 내린 결론이 중요합니다. '선진국의 경우 물질적 포만도가 일정수준을 지나면 소득상승이 더 이상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 적당한 수준의 부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수준 이상으로 돈을 벌어도, 재물을 쌓아도 행복하고는 관계가 별로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50평 짜리 집에서 살던 사람이 120평 짜리 집을 사서 옮기면 며칠 동안은 기분이 좋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행복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어떤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은 행복하고는 아무 영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스터 교수의 말 중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후진국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경우는 소폭의 소득증가에도, 조금만 생활이 나아져도 그것이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20만원 밖에 월급을 못 타던 아빠가 회사가 잘 되어 30만원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면 그 10만원 더 많아진 것 때문에 그렇게 행복해 질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방글라데시 사람이 더 행복을 많이 느끼는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진리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부자가 행복한 것 아닙니다. 차라리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행복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부를 쌓아 놓고 계시다면 하나님 앞에 내 놓고 놓으십시오. 이 세상 떠날 때 가지고 갈 것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십시오. 그 대신 여러분의 마음에 천국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행복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계시는 모든 분들, 물질적으로 부하든 가난하든 큰 문제가 안됩니다. 물질이 많아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사랑의교회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여러분이 돈 때문에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그런 불행을 안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 돈을 쓰고 마음에 천국을 소유하는 쪽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위해 아름답게 한 생을 드린다면 그 행복은 영원한 저 나라에까지 이어질 줄 믿습니다.
'두손들고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왕 여호와께/ 오직 주만이 나를 다스리네/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라.' 바로 이런 간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빈 마음을 가진 사람이예요.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라.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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