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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보다 나은 순종(사무엘상 15장 17절~27절)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며 찢어진지라
우리가 교회에서 읽고 있는 성경은 정경입니다. 캐논(Canon)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정경 외에 외경(外經)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당대의 문서입니다 마는 정경적 가치가 없어서 편집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밖에도 위경(僞經)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뒷바침하는 데 여러 모로 자료가 되기는 하나 정경적 가치는 없다고 보아 편집 밖으로 물러난 책입니다. 그 위경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아주 피곤에 지친 제자들을 데리고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저 높은 산으로 올라가자." 그리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커다란 돌을 두 개씩 들고 올라가자"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는 저마다 돌을 가지고 올라갔는데 이 위경에서는 가룟 유다와 베드로에 관해서만 거론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역시 가룟 유다입니다. 힘든데 왜 산은 올라가자고 하시며, 게다가 왜 돌은 두 개씩 가지고 올라가자시는 건가, 참 이상하다 -- 못마땅하게 여긴 유다는 조그마한 자갈돌 둘을 골라서 주머니에 넣고 올라갔어요. 그러나 베드로는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해서 이유야 어떻든 말씀하시니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큰 돌 둘을 어깨에 메고 땀을 흘리면서 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앉혀놓으시고, 각자 가지고 온 돌들을 자기 앞에 놓으라 이르시고 "자, 다같이 기도하자"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고, 축사하시고 나니 돌들이 떡으로 변해 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큰 떡을 얻게 됐습니다. 가룟 유다는 작은 떡을 얻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세 단계로 구분합니다.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본능적 자아가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 본능입니다. 이것은 충동적입니다. 이대로 두어 가지고는 안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라는 아이들을 보세요. 저 생긴 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두 발로 서지도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 젓가락질하는 것도 다 배운 것입니다. 말 들어가면서 매맞아가면서 배운 것입니다. 우리의 충동대로 만은 살 수 없어요. 어떻게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겠습니까? 안될 일입니다.
그 위에 합리적 자아가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해나가면서 보면 이치에 맞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합리적이게, 과학적이게 지시하는 이성의 자아가 있습니다. 충동적 자아는 이성적 자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밖에도 또 이상적 자아가 있습니다. 이상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Idealistic Ego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 양심이 말하고, 성경이 말하고, 성령이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르는 이상적 자아가 높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 우리의 합리적인 자아는 다시 이상적 자아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 같은 질서--이 위계 질서가 분명해질 때에 건전한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순종의 덕을 몸에 익히지 못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순종의 아름다움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순종의 평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더욱 불행합니다. 순종함으로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내가 자유 자제하면 좋을 것 같지만 한번 거역하고 나면 마음속에 어두움이 깔립니다. 점점 불안해지고 괴로워집니다. 순종할 때에 순종케 하는 자에게 모든 책임을 돌립니다. 그러나 거역하고 나서 내 마음대로 하는 일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이 중압감이 점점 무거워져서 그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순종에서 평화를 얻습니다. 행복을 얻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순종이 주는 자유를 모르는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순종하고 나면 양심이 자유롭습니다. 내 마음이 편합니다. 내 영혼이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는 불행합니다. 현대인이 불행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성인이 불행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순종을 모릅니다. 순종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순종하면 죽는 줄로 압니다. 순종하면 내가 없어지는 줄로 압니다. 자아가 모멸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거절하고 봅니다. 예스(Yes)하면 못사는 줄 알아요. 노우(No)라고 해야만 내가 사는 줄로 착각합니다. 구제불능입니다. 일생동안 노우, 노우만 합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살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노예적 순종을 합니다. 가라 하면 가기는 가면서도 속으로는 노우입니다. 하라 하면 하기는 하면서도 죽지 못해 합니다. 이렇게 평생을 사는 사람, 참으로 불쌍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개성시대라고 합니다마는 현대인은 순종을 모릅니다.
어렸을 때에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 순종하고, 교회에서는 교역자에게 순종하고, 직장에서는 상관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순종을 굴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 그 사람은 체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거역이 자유라고 생각하고, 불순종에서 존재가 살아난다고 착각하고 있는, 철저하게 역설적으로, 역행적으로 산다면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학자 본훼퍼는 말합니다. "믿는 자들만이 순종할 것이며, 순종하는 자만이 믿게 될 것이다"라고요. 순종하면서 믿음을 배워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시인 괴테의 말입니다. "내 영혼은 언제나 순종함에 따라 점점 더 훌륭한 자유를 맛보았노라." 순종하면서 무한한 자유를 경험했다는 것이 그의 고백입니다. 순종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실천이요, 믿음의 증거입니다. 나를 순종케 하는 자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믿기에 안심하고 순종합니다. 그리고 평안합니다. 순종은 겸손입니다. 나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순종을 통하여 믿음을 얻고, 순종을 통하여 배우고, 순종을 통하여 더 높은 차원의 자유를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사울 왕은 본래 유달리 키가 컸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에 잘 순종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에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라 하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사흘길을 헤매는, 아주 순종의 사람입니다. 그는 스스로 작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왕이 된다는 말을 듣자, 뒤주 뒤에 가서 숨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높임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아말렉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승리하고나서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본문에 진멸하라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는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너는 남의 것을 취하라, 마음대로 죽여라--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악한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사울이 심판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다만 집행관일 뿐입니다. 여기에 나 또는 내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몸소 유황불로 멸하시지 않고 사울을 통해 진멸하라고 했느냐 하면 그것은 "너도 우상을 섬기면 이와 같이 되느니라. 너도 악을 행하면 이렇게 진멸당할 것이니라"하는, 생활을 통한 강한 교훈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능력이 있어서 진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멸하라시면 진멸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금이라도 내 생각이 따라서는 안됩니다. 순종하기는 했습니다. 외적으로, 형식적으로는 순종한 것 같으나, 내면적으로는 자기 명예를 높였고, 욕심이 많았고, 그래서 갈취하는 마음으로 진멸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울의 실수입니다.
사울이 사무엘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세요. 왜 순종하지 않았느냐고 하니까 순종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왜 저기에 소와 양의 소리가 들리는지, 다 진멸하라고 했으니 이제는 고요해야 되겠는데 왜 소와 양의 소리가 들리느냐고 하니까 그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좋은 소가 있고, 살찐 양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고자 남겨놓았다고 대답합니다. 이건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께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3장 8절로 돌아가 보면 사울이 자기 능력 밖의 일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블레셋 군 수만 명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쪽에도 군사를 모아놓았습니다. 이렇게 대결하고 있는데 군사들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저쪽은 군사가 많고, 이쪽은 수가 적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선지자가 와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나가 싸워라 하시면 싸울 수 있는 것인데 선지자가 오지를 않습니다. 이레를 기다려도 오지를 않습니다. 군사들의 마음은 흐트러집니다. 그러자 그는 참다못해서 제사 드리는 것 별로 어렵지 않더라, 나도 하면 되지, 하고 그만 제사장이 할 일을 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이제 선지자가 왔습니다. 크게 책망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순종이 무엇입니까? 너는 왕이면 왕의 일만 할 것이다, 다른 일은 생각하지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너는 기다리라면 기다려, 일주일이든 백 일이든, 천 년이라도 기다려--그것이 순종입니다. 편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조급한 마음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취하시는 일에 조바심을 내서는 안돼요.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도 안됩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까, 기다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방법입니까, 그것이 옳습니다" 해야 그것이 순종입니다. 사울은 불 신앙에 빠졌습니다. 자기교만에 빠졌습니다.
인간적 지혜에 빠졌습니다. 거듭거듭 그는 변명합니다. 핑계를 합니다. 백성들이 두려워서, 흩어지는 백성이 두렵고 백성의 원망이 두려워서 이렇게 했습니다.--이게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지 백성의 말을 들을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핑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세요. 왜 진실하게 회개하지 못하고 엉뚱한 핑계를 대고 있는 것입니까? "부득이하여 이렇게 하였나이다"--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울은 회개의 마지막 기회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무엘 선지자가 아주 중요한 교훈을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가르침입니다. 순종 없는 제사에 의미 없습니다. 들려지는 말씀을 거역하면서 제사가 무슨 의미 있습니까? 그 많은 종교 의식이 무슨 의미 있습니까? 그 많은 봉사가 무슨 의미 있다는 말입니까? 희생이 소용없어요. 제사란 곧 희생을 의미합니다. 장례식에 가보면 여러 자식들이 와서 웁니다. 몸부림을 치며 웁니다. 그 가운데서 제일 많이 우는 자식이 불효자식입니다. 노래가사에도 있잖아요?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불효자는 울어 마땅하지요. 또 하나 있어요. 불효자는 제사를 많이 드려요. 요란스러운 제사. 살아생전에도 거역하고 못되게 굴다가 제사는 남달리 굉장하게 하겠다고 떠들어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한마디의 순종이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는 것이지, 죽은 다음에 그 많은 제사가 무슨 의미 있어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순종이 없는 제사, 정말로 소용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하나님께 욕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1장 13, 14절에 보면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라고 말씀합니다. 헛된 짐입니다. 순종 없는 제사, 희생, 헌신, 봉사는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께 대한 욕입니다. 미가 6장 7절에 보면 "내 맏아들을 드릴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소와 양과 재산을 바치다가 마지막에 가장 귀한 제물이 뭘까, 내 맏아들일까---아닙니다. 그것도 소용없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오직 순종입니다. 자기 지혜로 나가는 행위, 자기 뜻대로 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샤마'입니다. '듣는다'라는 뜻입니다. to hear입니다. '사무엘'이 '샤마엘'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하는 뜻입니다. 또 '휘파쿠오'라는 말은 '아쿠오'가 "듣는다"는 말이요, 휘파쿠오는 "엎드려 듣는다" "밑에서 듣는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말과 히브리말이 개념상으로 통합니다. 듣는다는 말과 순종이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부모 말을 듣는다--곧 부모에게 순종함입니다.
결국은 잘 들어야 합니다. 일단 듣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듣는 것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고 듣는 것입니다. 내 의견을 포기하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습니다. "악인은 두려워서 순종하고, 선인은 사랑으로 순종한다." 악한 사람은 꼭 매를 맞고야 순종해요. 그러나 그건 순종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은 그 뜻을 알기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뻐하는 마음으로 순종합니다. 거기에 선인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수도원에서 어느 날 농사일을 하고 있는데, 젊은 두 사람이 수도사가 되겠다고 왔습니다. 본디 아주 엄격히 선발해서 수도생을 삼는 법인데, 그 때에는 마침 배추 모종을 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그들에게 모종을 주면서 "이 배추를 거꾸로 심어라"합니다. 뿌리를 하늘로 하고 그 줄기를 땅으로 하여 심으라 하고는 들어가 버렸어요. 한 후보생은 '아, 이거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니 그렇게 해야지'하고 거꾸로 심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한참 심다말고, 배추 뿌리를 하늘로 해서 심다니 말도 안 된다 생각하고 뿌리를 땅으로 해서 심었어요.
프란체스코는 저녁에 나와 보고 거꾸로 심은 사람은 수도사로 뽑고, 합리적으로 하겠다고 바로 심은 사람은 돌려보냈습니다. 왜요? 일이 합리적이냐 불합리적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결과가 어떠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말씀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가 말했느냐---그에게 순종할 따름입니다. 말씀한 분에게 순종하는 그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순종도 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큰 일을 맡긴다 하셨습니다. 작은 일에 순종해버릇해야 합니다. 순종, 순종, 순종 하다보면 엄청난 일에도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작은 일에 순종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결정적인 일에도 순종할 수 없습니다. "소금 섬을 물로 끓이라 해도 끓여라"--어릴 적에 아버지한테서 귀가 닳도록 들어온 말입니다. 소금 섬을 물로 끓이라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소금 섬을 물로 끓이면 다 녹아 없어지지요. 그러나 상관할 것 없어요. 끓이라면 끓이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두 번 말씀한 일이 없어요. 가라 하면 가요. 왜도 없고, 결과도 뭐냐고 묻지 않아요. "꿇어"하시면 꿇어야 해요.
모름지기 순종을 배워야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순종을 배워야 됩니다. 순종 체질이 되어야 본인이 자유할 수 있습니다. 능력의 사람도 될 수 있습니다. R.A. 토레이 박사의 말입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했는데, 우리가 그 권능을 받는 데는 오직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절대 순종이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까? 전적으로 순종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회개하세요.
너무나 오랫동안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제는 말씀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다시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이제 어떤 말씀이든지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다시 헌신하게 되면 주께서 세밀하게 일마다 때마다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순종해 나가느라면 더욱더 확실하게 주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순종과 함께 엄청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제사보다 나은 순종(사무엘상 15장 17절~27절)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며 찢어진지라
우리가 교회에서 읽고 있는 성경은 정경입니다. 캐논(Canon)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정경 외에 외경(外經)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당대의 문서입니다 마는 정경적 가치가 없어서 편집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밖에도 위경(僞經)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뒷바침하는 데 여러 모로 자료가 되기는 하나 정경적 가치는 없다고 보아 편집 밖으로 물러난 책입니다. 그 위경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아주 피곤에 지친 제자들을 데리고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저 높은 산으로 올라가자." 그리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커다란 돌을 두 개씩 들고 올라가자"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는 저마다 돌을 가지고 올라갔는데 이 위경에서는 가룟 유다와 베드로에 관해서만 거론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역시 가룟 유다입니다. 힘든데 왜 산은 올라가자고 하시며, 게다가 왜 돌은 두 개씩 가지고 올라가자시는 건가, 참 이상하다 -- 못마땅하게 여긴 유다는 조그마한 자갈돌 둘을 골라서 주머니에 넣고 올라갔어요. 그러나 베드로는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해서 이유야 어떻든 말씀하시니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큰 돌 둘을 어깨에 메고 땀을 흘리면서 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앉혀놓으시고, 각자 가지고 온 돌들을 자기 앞에 놓으라 이르시고 "자, 다같이 기도하자"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고, 축사하시고 나니 돌들이 떡으로 변해 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큰 떡을 얻게 됐습니다. 가룟 유다는 작은 떡을 얻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세 단계로 구분합니다.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본능적 자아가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 본능입니다. 이것은 충동적입니다. 이대로 두어 가지고는 안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라는 아이들을 보세요. 저 생긴 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두 발로 서지도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 젓가락질하는 것도 다 배운 것입니다. 말 들어가면서 매맞아가면서 배운 것입니다. 우리의 충동대로 만은 살 수 없어요. 어떻게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겠습니까? 안될 일입니다.
그 위에 합리적 자아가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해나가면서 보면 이치에 맞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합리적이게, 과학적이게 지시하는 이성의 자아가 있습니다. 충동적 자아는 이성적 자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밖에도 또 이상적 자아가 있습니다. 이상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Idealistic Ego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 양심이 말하고, 성경이 말하고, 성령이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르는 이상적 자아가 높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 우리의 합리적인 자아는 다시 이상적 자아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 같은 질서--이 위계 질서가 분명해질 때에 건전한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순종의 덕을 몸에 익히지 못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순종의 아름다움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순종의 평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더욱 불행합니다. 순종함으로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내가 자유 자제하면 좋을 것 같지만 한번 거역하고 나면 마음속에 어두움이 깔립니다. 점점 불안해지고 괴로워집니다. 순종할 때에 순종케 하는 자에게 모든 책임을 돌립니다. 그러나 거역하고 나서 내 마음대로 하는 일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이 중압감이 점점 무거워져서 그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순종에서 평화를 얻습니다. 행복을 얻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순종이 주는 자유를 모르는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순종하고 나면 양심이 자유롭습니다. 내 마음이 편합니다. 내 영혼이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는 불행합니다. 현대인이 불행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성인이 불행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순종을 모릅니다. 순종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순종하면 죽는 줄로 압니다. 순종하면 내가 없어지는 줄로 압니다. 자아가 모멸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거절하고 봅니다. 예스(Yes)하면 못사는 줄 알아요. 노우(No)라고 해야만 내가 사는 줄로 착각합니다. 구제불능입니다. 일생동안 노우, 노우만 합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살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노예적 순종을 합니다. 가라 하면 가기는 가면서도 속으로는 노우입니다. 하라 하면 하기는 하면서도 죽지 못해 합니다. 이렇게 평생을 사는 사람, 참으로 불쌍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개성시대라고 합니다마는 현대인은 순종을 모릅니다.
어렸을 때에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 순종하고, 교회에서는 교역자에게 순종하고, 직장에서는 상관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순종을 굴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 그 사람은 체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거역이 자유라고 생각하고, 불순종에서 존재가 살아난다고 착각하고 있는, 철저하게 역설적으로, 역행적으로 산다면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학자 본훼퍼는 말합니다. "믿는 자들만이 순종할 것이며, 순종하는 자만이 믿게 될 것이다"라고요. 순종하면서 믿음을 배워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시인 괴테의 말입니다. "내 영혼은 언제나 순종함에 따라 점점 더 훌륭한 자유를 맛보았노라." 순종하면서 무한한 자유를 경험했다는 것이 그의 고백입니다. 순종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실천이요, 믿음의 증거입니다. 나를 순종케 하는 자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믿기에 안심하고 순종합니다. 그리고 평안합니다. 순종은 겸손입니다. 나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순종을 통하여 믿음을 얻고, 순종을 통하여 배우고, 순종을 통하여 더 높은 차원의 자유를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사울 왕은 본래 유달리 키가 컸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에 잘 순종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에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라 하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사흘길을 헤매는, 아주 순종의 사람입니다. 그는 스스로 작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왕이 된다는 말을 듣자, 뒤주 뒤에 가서 숨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높임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아말렉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승리하고나서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본문에 진멸하라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는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너는 남의 것을 취하라, 마음대로 죽여라--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악한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사울이 심판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다만 집행관일 뿐입니다. 여기에 나 또는 내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몸소 유황불로 멸하시지 않고 사울을 통해 진멸하라고 했느냐 하면 그것은 "너도 우상을 섬기면 이와 같이 되느니라. 너도 악을 행하면 이렇게 진멸당할 것이니라"하는, 생활을 통한 강한 교훈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능력이 있어서 진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멸하라시면 진멸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금이라도 내 생각이 따라서는 안됩니다. 순종하기는 했습니다. 외적으로, 형식적으로는 순종한 것 같으나, 내면적으로는 자기 명예를 높였고, 욕심이 많았고, 그래서 갈취하는 마음으로 진멸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울의 실수입니다.
사울이 사무엘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세요. 왜 순종하지 않았느냐고 하니까 순종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왜 저기에 소와 양의 소리가 들리는지, 다 진멸하라고 했으니 이제는 고요해야 되겠는데 왜 소와 양의 소리가 들리느냐고 하니까 그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좋은 소가 있고, 살찐 양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고자 남겨놓았다고 대답합니다. 이건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께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3장 8절로 돌아가 보면 사울이 자기 능력 밖의 일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블레셋 군 수만 명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쪽에도 군사를 모아놓았습니다. 이렇게 대결하고 있는데 군사들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저쪽은 군사가 많고, 이쪽은 수가 적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선지자가 와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나가 싸워라 하시면 싸울 수 있는 것인데 선지자가 오지를 않습니다. 이레를 기다려도 오지를 않습니다. 군사들의 마음은 흐트러집니다. 그러자 그는 참다못해서 제사 드리는 것 별로 어렵지 않더라, 나도 하면 되지, 하고 그만 제사장이 할 일을 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이제 선지자가 왔습니다. 크게 책망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순종이 무엇입니까? 너는 왕이면 왕의 일만 할 것이다, 다른 일은 생각하지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너는 기다리라면 기다려, 일주일이든 백 일이든, 천 년이라도 기다려--그것이 순종입니다. 편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조급한 마음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취하시는 일에 조바심을 내서는 안돼요.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도 안됩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까, 기다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방법입니까, 그것이 옳습니다" 해야 그것이 순종입니다. 사울은 불 신앙에 빠졌습니다. 자기교만에 빠졌습니다.
인간적 지혜에 빠졌습니다. 거듭거듭 그는 변명합니다. 핑계를 합니다. 백성들이 두려워서, 흩어지는 백성이 두렵고 백성의 원망이 두려워서 이렇게 했습니다.--이게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지 백성의 말을 들을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핑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세요. 왜 진실하게 회개하지 못하고 엉뚱한 핑계를 대고 있는 것입니까? "부득이하여 이렇게 하였나이다"--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울은 회개의 마지막 기회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무엘 선지자가 아주 중요한 교훈을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가르침입니다. 순종 없는 제사에 의미 없습니다. 들려지는 말씀을 거역하면서 제사가 무슨 의미 있습니까? 그 많은 종교 의식이 무슨 의미 있습니까? 그 많은 봉사가 무슨 의미 있다는 말입니까? 희생이 소용없어요. 제사란 곧 희생을 의미합니다. 장례식에 가보면 여러 자식들이 와서 웁니다. 몸부림을 치며 웁니다. 그 가운데서 제일 많이 우는 자식이 불효자식입니다. 노래가사에도 있잖아요?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불효자는 울어 마땅하지요. 또 하나 있어요. 불효자는 제사를 많이 드려요. 요란스러운 제사. 살아생전에도 거역하고 못되게 굴다가 제사는 남달리 굉장하게 하겠다고 떠들어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한마디의 순종이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는 것이지, 죽은 다음에 그 많은 제사가 무슨 의미 있어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순종이 없는 제사, 정말로 소용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하나님께 욕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1장 13, 14절에 보면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라고 말씀합니다. 헛된 짐입니다. 순종 없는 제사, 희생, 헌신, 봉사는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께 대한 욕입니다. 미가 6장 7절에 보면 "내 맏아들을 드릴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소와 양과 재산을 바치다가 마지막에 가장 귀한 제물이 뭘까, 내 맏아들일까---아닙니다. 그것도 소용없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오직 순종입니다. 자기 지혜로 나가는 행위, 자기 뜻대로 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샤마'입니다. '듣는다'라는 뜻입니다. to hear입니다. '사무엘'이 '샤마엘'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하는 뜻입니다. 또 '휘파쿠오'라는 말은 '아쿠오'가 "듣는다"는 말이요, 휘파쿠오는 "엎드려 듣는다" "밑에서 듣는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말과 히브리말이 개념상으로 통합니다. 듣는다는 말과 순종이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부모 말을 듣는다--곧 부모에게 순종함입니다.
결국은 잘 들어야 합니다. 일단 듣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듣는 것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고 듣는 것입니다. 내 의견을 포기하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습니다. "악인은 두려워서 순종하고, 선인은 사랑으로 순종한다." 악한 사람은 꼭 매를 맞고야 순종해요. 그러나 그건 순종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은 그 뜻을 알기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뻐하는 마음으로 순종합니다. 거기에 선인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수도원에서 어느 날 농사일을 하고 있는데, 젊은 두 사람이 수도사가 되겠다고 왔습니다. 본디 아주 엄격히 선발해서 수도생을 삼는 법인데, 그 때에는 마침 배추 모종을 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그들에게 모종을 주면서 "이 배추를 거꾸로 심어라"합니다. 뿌리를 하늘로 하고 그 줄기를 땅으로 하여 심으라 하고는 들어가 버렸어요. 한 후보생은 '아, 이거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니 그렇게 해야지'하고 거꾸로 심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한참 심다말고, 배추 뿌리를 하늘로 해서 심다니 말도 안 된다 생각하고 뿌리를 땅으로 해서 심었어요.
프란체스코는 저녁에 나와 보고 거꾸로 심은 사람은 수도사로 뽑고, 합리적으로 하겠다고 바로 심은 사람은 돌려보냈습니다. 왜요? 일이 합리적이냐 불합리적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결과가 어떠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말씀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가 말했느냐---그에게 순종할 따름입니다. 말씀한 분에게 순종하는 그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순종도 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큰 일을 맡긴다 하셨습니다. 작은 일에 순종해버릇해야 합니다. 순종, 순종, 순종 하다보면 엄청난 일에도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작은 일에 순종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결정적인 일에도 순종할 수 없습니다. "소금 섬을 물로 끓이라 해도 끓여라"--어릴 적에 아버지한테서 귀가 닳도록 들어온 말입니다. 소금 섬을 물로 끓이라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소금 섬을 물로 끓이면 다 녹아 없어지지요. 그러나 상관할 것 없어요. 끓이라면 끓이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두 번 말씀한 일이 없어요. 가라 하면 가요. 왜도 없고, 결과도 뭐냐고 묻지 않아요. "꿇어"하시면 꿇어야 해요.
모름지기 순종을 배워야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순종을 배워야 됩니다. 순종 체질이 되어야 본인이 자유할 수 있습니다. 능력의 사람도 될 수 있습니다. R.A. 토레이 박사의 말입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했는데, 우리가 그 권능을 받는 데는 오직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절대 순종이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까? 전적으로 순종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회개하세요.
너무나 오랫동안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제는 말씀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다시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이제 어떤 말씀이든지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다시 헌신하게 되면 주께서 세밀하게 일마다 때마다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순종해 나가느라면 더욱더 확실하게 주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순종과 함께 엄청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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