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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로마서 5:7-8
성경은 우리에게 왜 예수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는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것이 사람의 본분임을 가르쳐 주지요
그리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것과 빛의 열매를 맺을것(착함 의로움 진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것을(성령안에서 말씀으로 변화되는의미)말씀하십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사망의 길로 가게 된 아담
사람이 불행을 체험해 보지 않으면 행복에 대해서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겪고 불행을 체험해 보아야 참된 행복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고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중심에서 감사할 수 있지요.
이처럼 상대성을 알게 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두시고
아담에게 선악과가 사망을 주는 과일임을 알려 주시며 먹지 말라고 명하셨지요.
그러나 아담의 자유의지 가운데 두심으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셨는데 결국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고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담에게 악이 있으니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악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악이 성립되었고 이로 인해 악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죄악으로 물들어가는 과정을 보아도 아담에게 악이 들어온 과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꾸 남을 때리는 아이들도 처음부터 남을 때린 것이 아니지요.
물론 원죄를 타고났기에 죄성 자체는 있지만 실제로 때리는 악한 습관이 들기까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는 다른 사람이 때리는 것을 보고 자신도 따라 해보게
됩니다. 다른 아이를 때리니까 맞은 아이가 울지요. 그것이 재미있어 한 번, 두 번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남을 때리는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뱀의 미혹을 받아들이고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사망에 이르는 것이었지요. 곧 영이 죽어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고 원수 마귀 사단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로마서 6:16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말씀한 대로 아담은 죄에게 순종함으로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때 아담은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던(창 1:28) 자신의 권세까지도 원수 마귀에게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원수 마귀의 종이 됨으로 만물의 주관자로서 가졌던
모든 권세와 영광도 원수 마귀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누가복음 4:6에서도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원수 마귀가 예수님 앞에 천하만국을 보여 주면서 말하기를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했지요.
천하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처음부터 마귀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게 넘겨준 것" 곧 누군가에게서 넘겨받은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아담으로부터 넘겨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만물을 주관하는 권세를 넘겨받은 마귀는 아담의 범죄 이후 죄의 종이 된 인류를 점점 더 죄악으로 물들게 합니다. 세대가 지날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악해지고 이 세상에는
죄악이 관영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원수 마귀는 질병과 가난, 재앙, 눈물, 슬픔 등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결국은 영원한 사망인 지옥으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상대성을 체험하며 경작을 잘 받은 후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줄을 이미 아신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인간경작을 계획하실 때부터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길도 다 마련해 두셨지요. 그 길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른 인간 구원의 길
그러면 범죄하여 죄인이 된 인류는 어떻게 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면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영계의 법과 질서에 따라 정확하게 시행하시는 분이시므로 죄인들을 사하시고 구원하시는 것도 정확한 공의 가운데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의 가운데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지요.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대신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죄사함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사망의 형벌을 감당하심으로 죄인들의 죄값을 치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을 받습니다.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으므로 사망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고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원수 마귀가 주관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은 위인들과 많은 종교가 있는데 왜 꼭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가" 질문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말씀한 대로 예수님 외에는 세상 어떤 사람도 구세주가 될 수 없으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영계의 법칙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도 세상의 법이 있듯이 영의 세계에도 영계의 법칙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망으로 가는 것도, 죄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것도 이 영계의 법칙에 의한 것이지요.
아담이 범죄한 후 인류가 사망으로 가게 된 것도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 때문이었습니다.
범죄함으로 원수 마귀 사단의 종이 된 것도 "사람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된다"는 영계의 법칙에 의한 것이었지요.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망이라는 형벌에서
놓여 구원받을 수 있는 것도 영계의 법칙에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죄인인 인류는 어떤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바로 성경의 "토지 무르기의 법칙"을 통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레위기 25:23-25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했지요. 이는 이스라엘의 토지 거래에 관한 법으로서 단순히 토지에 대한
법이 아니라 흙으로 지음받은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영계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 지파와 가족에 따라 가나안 땅을 분배하셨는데 근본적으로 모든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토지를 분배받았다 해서 마음대로 팔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가난하여 토지를 팔게 될 때는 그 근족이 대신 토지의 값을 지불하면 반드시 그 땅을 돌려주도록 하셨지요. 이렇게 토지를 무르는 법칙 안에 죄인된 인류가 구원받을 길이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인 토지를 팔고 사는 법은 근본 흙으로 지음받은 사람에게도 직접 관계되는 법이기 때문이지요.
창세기 3:19을 보면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창세기 3:23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했지요.
이처럼 흙으로 지음받은 사람이 원수 마귀의 손에 넘어갔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법칙과 팔았던 토지를 다시 무르는 법칙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소유인 것처럼 아담과 그의 권세 또한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영영히 팔 수 없도록 규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였던 아담이 범죄하여 원수 마귀에게 넘겨질 때 하나님과 원수 마귀 사이에 계약된 법칙이므로 비록 아담이 원수 마귀의 종이 되고 아담에 대한 모든 권세를 넘겨주었다
해도 장차 토지 무르기의 법칙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면 원수 마귀는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구세주의 자격 조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토지 무르기 법에 따라 구세주에 합당한 분을 미리 예비해 두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토지 무르기의 법칙에 의한
구세주의 자격 조건이란 무엇인지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람이어야 합니다.
레위기 25:25에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하여 토지를 팔았을 때 되찾아 올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은 바로 "근족"이라야 한다 했습니다. 죄값으로 원수 마귀 사단에게 팔린 사람을 대속할 때도 반드시 아담의 근족이라야 합니다. 아담의 근족이라는 것은 아담과 같이 영과 혼과
육을 다 가진 존재 곧 사람을 말하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5:21-22에도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구세주이신 예수님도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신으로서의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가진 분이시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람의 근족이 될 수
있으실까요?
요한복음 1:14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는데 요한복음 1:1에는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곧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살과 뼈를 가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셨으며 사람처럼 성장하는 과정도 겪으셨지요. 사람이셨기 때문에 주무시기도 하시고 배고픔과 목마름, 기쁨과 슬픔을
느끼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피도 흘리시고 고통도 느끼셨지요.
역사적으로도,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하여 세계의 역사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세계사의 연대는 크게 비씨(B.C)와 에이디(A.D)로 나눠집니다. "비씨"는 비포 크라이스트(Before Christ), 곧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이전을 말합니다.
"에이디"는 애노우 도미나이(Anno Domini)인데, 이는 "주님의 연대"라는 뜻으로서 예수님 탄생 이후의 역사를 말하지요.
이처럼 역사적인 기준 자체가 예수님의 탄생 시점인 것만 보아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셨기에
구세주의 첫 번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구세주의 첫 번째 조건은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왜 아담의 후예인 사람은 구세주가 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담의 후손들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불순종한 아담의
죄를 물려받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의 씨 곧 정자와 난자를 주어 이를 통해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씨인 정자나 난자 안에는 부모의 기(氣)가 다 들어 있지요. 부모의 성품이나 성질, 본성, 외모, 심지어는 습관에 대한 내용까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정자와 난자로 잉태된 자녀들은 부모의 얼굴, 체형은 물론 성품이나 습관도 닮습니다. 부모가 혈기가 많으면 자녀들도 혈기가 많을 가능성이 크고 부모가 온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이면 자녀들도 온유한 편이지요.
그런데 조상으로부터 전해지는 부모의 기 속에는 죄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이 타락한 때부터 조상들의 죄성이 자손들에게도 전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로서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은 죄인이지요.
로마서 5:12에도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하여 한 사람, 곧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게 되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 하면 '갓난아이는 너무나 순수하고 깨끗하게 보이는데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나 가만히
관찰해 보면, 아주 어린 아이조차 이미 악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갓난아기는 배가 고파서 울 때, 젖을 좀 늦게 주면 얼굴이 새빨개지고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어댑니다. 그렇게 울고 있을 때는 엄마가 젖을 물려줘도 젖을 빨려고
하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울기만 합니다. "왜 배고프다는데 빨리 안 주느냐, 이제 화가 나서 먹기도 싫다"는 의미이지요. 아무도 그 아이에게 혈기와 짜증을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도
이미 부모로부터 그러한 죄성을 물려받고 태어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어린아이가 보는 앞에서 엄마가 다른 아기에게 젖을 먹이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싫어하면서 그 아이를 엄마에게서 떼어 내려고 합니다.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엄마에게 짜증을 내거나 때리기도 하며 그래도 안 되면 결국은 울음을 터뜨립니다. 이는 '우리 엄마의 젖이니까 나만 먹어야 한다'는 욕심과 시기 질투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시기
질투와 욕심, 짜증 등의 죄악도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아담 이후로 전해진 죄성을 물려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며 원죄를 갖고 태어났으니,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은 분명히 사람이시면서도 아담의 후손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은 사람이면서도 아담의 후손이 아닌 것일까요?
2.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으니 아담의 후예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요, 요셉과 마리아를 부모로 하여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20을 보면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했고 마태복음
1:23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원죄를 타고 나는 까닭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를 통해 부모의 죄성을 물려받기 때문인데 예수님은 요셉의 정자나 동정녀 마리아의 난자를 통해 잉태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지 않는다 해도 성령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예수님을 잉태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었을 뿐 성령의 능력을 통해 잉태되셨으므로 죄인들의 기를 전혀 물려받지 않으셨지요. 따라서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요, 원죄가
없으시니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있으신 것입니다.
3. 구세주의 세 번째 조건은 원수 마귀를 이길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혀간 동료를 구해내려고 해도 적군에게서 포로를 빼앗아 올 힘이 있어야 하지요. 영적으로도, 원수 마귀에게 속한 사람을 구원하려면 원수 마귀를 이기고 사람을
되찾아올 힘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체격이 좋고 힘이 센 장정이라고 해도 원수 마귀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원수 마귀를 이길 힘이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영적인 힘을 의미하지요.
영계에서의 힘은 죄가 없는 데서 옵니다. 빛이 임하면 어두움이 물러가야 하는 것처럼 죄가 없이 빛 가운데 온전히 거하는 사람은 어두움에 속한 악한 영들을 이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죄에는 원죄와 자범죄가 있습니다. 원죄는 앞서 설명한 대로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죄성을 말합니다.
자범죄란 태어나서 성장하면서 스스로 짓는 죄를 말하지요.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많은 죄들을 짓습니다.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만 죄인이 아니라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죄인입니다(약 2:10). 더구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아무리 악해도 행함으로 범죄하지 않으면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영적으로는 행위적으로 범죄하지 않았다 해도 마음에
죄를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인이지요.
요한일서 3:15을 보면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 했고 마태복음 5:28에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행함으로나 마음으로나 단 한 번이라도 범죄한 사람은 인류를 구원해 낼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은 원죄를 가진 죄인이고 또한 자범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므로 원죄가 없으시며 태어나서부터 온전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셨기에 자범죄도 전혀 없으십니다. 태어나신지 팔일 만에 율법대로 할례하신 것을 비롯하여, 마음으로나 행함으로나 결코 진리를 벗어나는 일이 없으셨지요.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히 7:26) 했고,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 2:22) 했지요. 오직 예수님만이 거룩하고 악이 없으시며 전혀 죄를 범치 않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원수 마귀 사단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힘이 있으셨으며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에도 매이지 않을 수 있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지라도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죄인들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영적인 권세로 천하 만물을 다스릴 수 있으셨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굴복할 뿐만 아니라 질병, 균, 약함도 예수님께 순종했지요. 악귀 들려 고통받는 자가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예수님께서 악귀에게 "나가라" 명하시면 악귀는
순종하고 나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시면 질병, 균도 떠났습니다.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앉은뱅이도 예수님께서 명하시면 온전한 몸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또한 죄 없으신 예수님의 권세 앞에서는 천하
만물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셨을 때 풍랑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졌던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러한 영계의 법칙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곧 하나님께로서 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곧 주님께서 지켜주시므로 악한 원수 마귀 사단이 해를 입힐 수가 없지요.
영적인 힘이 있어야만이 악한 영들이 감히 역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으며 여러 가지 직분이 있다 해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살면 영적인 힘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치는 기도를 해도 시험환난이
떠나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비록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영적인 힘이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치면 원수 마귀가 순종하여 떠나가는 것입니다.
정녕 진리 안에 살며 거룩한 마음과 행실을 이루게 되면 자신의 삶에서 어두움이 물러갈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때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지요.
4. 구세주의 네 번째 자격 조건 : 목숨까지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형제 중에 동생이 빚으로 인해 벌을 받게 되었을 때, 부유한 형이 동생의 빚을 갚아주면 동생이 벌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형이 아무리 부자라도 동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형이 동생을 사랑할 때라야 자신이 큰 손해를 보게 된다 해도 동생의 빚을 갚아줄 수 있는 것입니다.
토지 무르기의 법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토지를 팔게 되었을 때 부유한 근족이 있다 해도 그에게 사랑의 마음이 있어서 상대를 도와주려고 할 때라야 토지 무르기가
성립이 되는 것이지요.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구세주의 세 가지 조건을 다 갖추셨지만 만일 예수님께 사랑이 없으셨다면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세주가 되려면 죄인들을 대신하여 사망의 형벌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당해야 합니다. 더구나 가장 흉악한 죄인처럼 온갖 멸시 천대를 받으면서 나무 십자가에 못박히고 물과 피를 다
쏟으며 처형당해야 하지요.
세상에는 죄인들을 처형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영적으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할 구세주는 단지 대신해서 죽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요. 영계의 법칙에 따라서 반드시
"나무"에 달려야 하며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13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의 저주"란 로마서 6:23에 나온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을 의미합니다.
영계의 법칙에 의해 범죄한 사람에게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가 임하게 되었으니 구세주가 율법의 저주에서 인류를 해방시킬 방법도 영계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데 곧 저주받은
사람이 달려야 할 나무에 구세주가 대신 달려 주어야 하는 것이 바로 영계의 법칙인 것입니다.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 17:14을 보면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했습니다. 히브리서 9:22에도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했지요. 인류는 죄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물론 이 땅에 사는 동안은 호흡이 붙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히 살 수 있는 참 생명은
잃어버렸지요.
영적으로 피는 생명과 일체이므로 구세주의 피흘림이 있어야만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아무나 나무에 달려 피를 흘려준다고 해서 인류의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니지요. 이미 설명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죄값을 대속할 수 있는 피는 죄성이 전혀 없는, 흠도 점도 없는 깨끗한 피라야 합니다
그런데 죄없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이처럼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려고 하겠습니까? 자신의 생명보다 상대를 더 사랑할 때라야 그런 희생을 기꺼이 치를 수 있는
것이지요. 바로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 이런 사랑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처형은 고대의 처형법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참혹한 것으로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런 고난의 길을 묵묵히
가셨으며 참혹한 나무 십자가를 지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독생자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7-8에 보면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흠도 티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시므로 우리에 대한 너무나 큰
사랑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손에 붙잡혀 채찍에 맞으시고 나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독생자 아들을 내어주시고 모든 슬픔과 희생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죄인들을 위해 이러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드물기는 하지만 선한 사람을 위해, 혹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상대를 대신하여 생명까지 희생하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지는 경우는 있지요. 그러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흉악한 죄인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생명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은 세상에 없습니다.
더구나 나는 상대의 병을 고쳐주고 사랑하며 선으로만 대해 주는데도 나를 미워하고 욕하며 죽이고자 한다면, 그런 상대를 대신해서까지 참혹한 형벌을 받겠다 할 사람은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만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너무나 큰 사랑이 있으셨기에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셨으며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사랑은 세상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소유를 다 드린다 해도 그 은혜를 능히 갚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사랑을 안다면 세상 어떤 부귀와 명예를 얻는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핍박이 온다 해도 주님의 사랑을 저버릴 수는 없으며 부모 형제나 자녀, 혹은 남편이나 아내를 하나님과 주님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지요. 물론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이전보다 더 진실하고 더 깊은 영적인 사랑을 이루게 되지요.
세상의 사랑은 아무리 생명 다해 사랑한다 말해도 결국은 자기의 유익을 좇아 사랑하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는 것을 봅니다. 가령, 한창 연애할 때는 "내 생명보다 더
사랑합니다" 고백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랑이 식어지고 변질되어 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자녀들이 어릴 때는 부모님을 사랑하며 평생 효도하고 살 것 같은데 장성하여 배우자와 자녀가 생기면 부모님은 뒷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자녀를 위해 헌신하는 것 같지만 막상 자신의 유익에 맞지 않고 자신을 심히 서운케 하면 인연을 끊다시피 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질되는 사랑도 아니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적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이며, 자신들을 위해 오신 구세주를 조롱하고 못박아 죽이는 죄인들에 대해서도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간구하시면서 생명까지 다 내어주신 진실한 사랑이지요.
주 안에서 믿음의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는 영적인 사랑도 세월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더 아름답게 승화되는 사랑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상대를 위해 생명까지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해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자의 말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의 길로 나올 때라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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