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달려간다
빌 3:10-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지금 아시안게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4년마다 올림픽이 열리고 4년마다 아시안게임이 열립니다. 모든 경기의 이상은 세가지입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입니다. 거기다 요즘에는 한가지 더 추가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더 정확하냐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선수들이 쉬지 않고 땀을 흘리며 연습을 합니다. 그래서 연습을 잘한 선수들은 금메달을 따냅니다. 이를 위해서 선수들이 얼마나 고된 훈련을 감내 해냅니까. 어느 태권도 선수는 금메달을 따고 소감을 말하기를 “남들이 놀 때 나는 땀을 흘리며 연습을 했고 남들이 잠을 잘 때 나는 고된 훈련을 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 결실을 얻은 것 같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한가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신앙생활도 이 경기의 법칙과 참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경에서 신앙생활을 경주하는 것과 비유를 참 많이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께서 우리에게 권고하시기를 “신앙의 길을 갈 때 도중에서 쉬지 말고 계속 뛰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경주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달리기 경주하는 사람은 법 제 1조가 쉬지 말고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다가 쉬면 말이 안됩니다. 달리는 선수가 도중에 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신앙인이 신앙의 길을 가다가 쉬면 안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쉬지 말고 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뛰어야 하는 이유를 성경에서 몇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 때문” 입니다.
12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것”은 소명을 말합니다. 소명이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부름은 이 세상의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고 선택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곰곰이 되씹어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 떨리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을 지날 때 예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소명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마침내 사도가 됩니다. 그 후 바울은 주께로부터 부름 받고 소명 받은 것에 대해서 그토록 감격해 했고 행복해 하였습니다. 아마도 바울처럼 사도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감격해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서간문 첫머리를 보면 반드시 “주께로부터 부름 받아 사도된 나 바울은” 이라고 써 놓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것을 늘 감사했고 감격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만난 후로 바울은 한시도 쉬지 않고 전도자가 가야할 길을 충실하게 걸었습니다. 바울이 일생동안 얼마나 분주하게 돌아다녔습니까. 오늘은 갈라디아로, 내일은 고린도로, 모레는 에베소로, 또 다음날은 골로새로, 안디옥으로, 빌립보로, 마지막에는 로마로 다니다가 끝내는 순교해서 일생을 마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죽기 얼마 전에는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하고 아주 만족하고 시원하게 인생의 마침을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이 소명이 참 무서운 힘을 발휘합니다. 신앙인은 항상 신선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을 신선하게 유지하려면 언제나 이 소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이다”. 이 소명의식이 언제나 내 신앙을 새롭게 만들고 신선하게 만들어줍니다. 요한 웨슬레는 1628. 5. 24. 저녁 8.45분에 성령 체험을 했다고 했습니다. 평생 한번 그때 경험한 성령체험의 은혜가 힘이 되어 웨슬레는 평생 40만 km의 전도여행을 다녔다고 고백했습니다. 참 무서운 힘입니다. 이 40만km이면 도대체 얼마나 되는 길이 입니까. 그 길을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소명의 힘 때문입니다.
오늘 신앙인들이 이 소명의식이 없으니까 신앙생활 유지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 소명의식이 없으면 매사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없으면 신앙의 달리기를 계속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빠도 신앙의 길을 가다가 포기해 버립니다. 사람이 싫어져도 일이 귀찮아도 신앙의 침체기로 빠져 들어가 버립니다. 이것은 어쩌면 목회자들이 더 심각하게 느끼는 점일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을 자주 확인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목회하다가 때에 따라 침체기가 찾아옵니다. 그때는 만사가 귀찮아집니다. 언제 그런 때가 오는가 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인 관계가 모호해지거나 흐려지면 찾아옵니다. 그 말은 처음 부름 받았을 때의 그 감격이 흐려지고 메말라지면 목회에 대한 회의가 찾아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 받을 때의 그 감격을 되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소명의식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이 신앙의 경주를 중단하지 못하고 계속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미래 때문” 입니다.
13절을 보면 “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일생동안 줄기차게 앞만 보고 달려갔던 사람입니다. 자신을 돌볼 틈이 없었습니다. 안일을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살았습니다. 가정을 꾸릴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오직 전도하는 일로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미래와 천국을 소중히 여겼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기를 “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이전에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바울은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그리고 더 소중한 미래, 소망, 천국을 향해서 뛰어갔습니다. 이 태도가 참 부럽습니다. 소명감이 아주 분명하고 확신이 있고 목적이 아주 뚜렷합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적으로 미래지향적입니다.
사람은 세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과거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잊지못하고 가슴에 안고 살아갑니다. 사람은 과거의 좋았던 일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대부분 보면 지난날의 아픔, 고난의 경험, 뼈저린 고통들을 잊지못하고 마음에 안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이 참 많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면 삶에서 밝은 부분이 없어지고 늘 어둡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기쁨도 즐거움도 다 뺏기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과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지극히 오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깊이 파묻혀서 골똘하게 세상에 집착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오늘뿐입니다. 내일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그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사람은 한가지 일에 몰두하고 집착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에 집착해서 살면 내일이 안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안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속에 내일이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세상에 집착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미래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뭔가 이루고 성취해 보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 인내하고 땀을 흘리고 저축을 하고 꿈을 꾸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아주 건강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피력한 인생관이고 신앙관입니다.
13절을 보면 “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위하여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과거는 아무리 좋아도 현재만 못합니다. 그리고 현재가 아무리 좋아도 미래만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희망을 먹고살고 미래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미래가 있으니까 오늘 열심히 뛸 수 있는 것입니다. 미래, 장래, 희망 얼마나 신선한 단어들입니까. 생각만 해도 온몸이 전율되는 단어들 아닙니까. 오늘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약혼할 때 보면 싱글벙글합니다. 반지를 끼워줄 때는 행복에 겨워합니다. 결혼식 때도 웃음이 가득합니다. 엊그제 결혼주례를 하는데 신랑신부가 싱글벙글 합니다. 그때 손님 중에 어느 할머니가 그만 웃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시대와 비교를 해 보면 신랑신부의 태도가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싱글벌글 하는 신랑신부의 태도는 참 좋은 태도입니다. 행복에 겨워 웃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장차 주어질 행복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미래와 장래는 이렇게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쉬지 말고 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미래의 가장 큰 희망인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미래입니까. 사도바울은 천국을 참 중요시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기를 “우리에게 만일 천국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쉬지 말고 뛰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상 때문”입니다.
이 상이 참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세상을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 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는 학생에게도 이 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도 이 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학사출신, 평범한 직장인인 올해 43세난 다나카 고이치라는 사람이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말하는 일류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인식되어온 것 처럼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일류회사인 소니회사 입사시험에서 낙방하여 지방의 조그만 기계제작소 연구주임으로 근무하던 중 분자크기 측정법을 발견했는데 그것도 연구하다 실수하는 바람에 이것이 지금까지 발견하려던 일과 맞아떨어지면서 손쉽게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이 그렇지 얼마나 음지에서 수고하고 골몰하면서 연구에 몰두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마침내 상이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상은 그렇게 수고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상을 타는 선수들 보십시오. 그들이 상을 타는 것을 그냥 보면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얼마나 수고의 땀을 흘렸겠습니까. 마라톤은 42.195km를 뛰어야 하는 경기입니다. 그 거리를 완주해야 하고 누구보다도 더 빨리 뛰어야 하고 반칙이 없어야 상을 탑니다. 그런 사람에게 아주 큰상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남들이 잠을 자는 시간에도 스스로 알아서 연습을 하고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이 약속되어 있으니까 사람들이 수고하고 인내하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운동경기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알고 보면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14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나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신앙에도 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인들이 수고하고 고난받고 순교까지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평생 달려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도 쉴 날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힘이 빠지고 기운이 진해오고 한계가 느껴지던 날 그는 순교의 날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왜 그토록 힘에 진하게 달려갔습니까. 그것은 사도바울이 그토록 말했듯이 하늘에서 얻을 상 때문입니다.
손양원목사는 일본시대때 감옥에서 순교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런데 시간만 끌지 죽여주지를 않습니다. 4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는데 참 지루합니다, 이러다 순교는커녕 지쳐서 실패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 이대로 날 더 놔두시면 저는 순교를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분이 왜 그렇게 순교하려고 했느냐 하면 이 상 때문입니다. 사도바울도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이 상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수고가 없는 사람은 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가을이 좋은 계절이지만 모두가 다 좋은 계절은 아닙니다. 여름 내내 수고하지 않은 사람은 가을이 와도 거둘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즐거울 것도 없습니다. 어느 인색한 사람이 죽어서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베드로가 그 사람의 기록을 보니까 세상에서 심은 것도 없고 선행이라는 것도 하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무슨 선을 베푼 것 하나라도 있으면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죽기 몇 일 전에 길을 가다가 동전 500원짜리를 주었는데 그때 옆에 있던 거지가 빤히 쳐다보고 있기에 그에게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나도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미가엘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그랬더니 미가엘 천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 500원을 돌려주고 지옥으로 보냅시다”. 그 나라는 철저하게 심은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심은 것이 있는 사람만이 심은 만큼 상을 받는 그런 나라입니다.
정종수라는 분이 “길가의 돌”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그는 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설 때 세상에서 한일이 무엇이냐고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물으시면 나는 맨 끝줄에 가서 설 꺼야
내 차례가 오면 나는 슬그머니 다시 끝줄로 돌아가 설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세상에서 한일이 없어
끝줄로 가 서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내 차례가 되면 나는 울면서 말할 거야
세상에서 나는 정말 한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그래도 무엇인가 한일을 생각해 보라 하시면 마지못해 울면서 대답할거야
하나님, 길가의 돌 하나 주워 신작로 끝에 옮겨놓은 것 밖에 한일이 없습니다“
언젠가 이런 때가 올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앞에 이렇게 질문 받을 때가 올 것이고 그렇게 대답해야 할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때를 알았습니다. 주께로부터 부름 받던 그 날, 그리고 삼층 천에 올라가 그 나라를 보았을 때 바울은 이 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는 아직도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오늘 말씀에서 권고하십니다. “당신들도 쉬지 말고 달려가라”. 면류관은 수고하지 않고 고난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쉬지 말고 달려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세상에서 많이 심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장차, 미래에서, 그리고 천국에서 찾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오늘도 달려간다” 이것이 가장 건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렇게 달려가고 있습니까. 현재 여러분의 모습을 한번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걸어가는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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