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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내 영혼이 받는 복

by 【고동엽】 2023. 1. 12.

내 영혼이 받는 복

 

 

 

 

 

 

 

 

                                    6:32-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라.

 

 

 

 

 

 

 

 

오늘은 전도주일입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생전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동안 쉬었다 다시 나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억지로 끌려 나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 나오려고 했는데 이 기회에 인도를 받고 나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오늘이 여러분들 인생에 가장 행복하고 최고로 복된 발걸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처음 신앙생활 할 때 어떻게 시작했는지 동기가 궁금합니다. 아마 순순히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공통된 몇 가지 동기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교회에 구경 갔다가 신앙생활 시작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과론이지만 참 좋은 구경을 간 셈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연 같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성봉 목사님이 부흥회를 하실 때 얼마나 재미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구경꾼이 많이 몰려왔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구경하려 와서 회개하고 목사가 된 분들이 여러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부흥회를 방해하려고 야릇한 옷을 입고 갔다가 회개하고 후에 목사가 되어 총회장 까지 된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경도 그런 구경은 참 소중한 구경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 주변에도 언제나 구경꾼들이 몰려 다녔습니다. 중풍병자가 들것에 실려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뚫고 내려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거의 다 구경꾼들입니다. 또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그곳에 5천명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여자 아이 노인들을 포함하면 만 오천 명도 넘을 것입니다. 그들은 왜 모두 굶은 채 광야까지 따라 나갔습니까. 그것은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경꾼들이었습니다. 구경으로 나왔어도 좋습니다. 그래서 믿게 되었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동기가 참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크면 부모에게 어떻게 만나서 결혼했느냐고 물어옵니다. 그때 부모가 결혼하게 된 동기를 대답해 주어야 하는데 말하기 곤란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다가다 만나서 결혼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동기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 한 달간 기도한 후에 하나님이 보내주셔서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당당한 대답입니까. 거기에 경건함이 있고 엄숙함이 있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크면 또 묻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 태어나게 되었습니까.” 그때 대답도 “어떻게 하다 보니까 네가 생기게 되었단다.”하고 대답한다면 동기가 참 애매모호 합니다. 그런데 “너를 낳기 위해서 한 달간 기도로 준비한 후에 네가 태어났단다.”하고 말해 줄 수 있다면 그 또한 얼마나 엄숙한 대답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구경 갔다가 믿게 되었다면 믿음의 동기가 신선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내 마음이 강하게 끌려 스스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동기야 말로 참 강렬한 인상을 주게 됩니다.

 

 

 

 

 

 

 

 

또 “얻어먹는 재미로 교회가 나가게 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옛날 교회는 주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얻어먹는 재미로 교회에 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선교사들이 구제품을 가져와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탄 때가 되면 먹을 것을 주었고 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주어서 오게하는 전도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는 것은 효과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지극히 일시적인 방법입니다. 그 생명이 길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구제사업이나 하는 자선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목적에 충실해야 합니다. 영혼구원은 구제로 자선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얼마 후 이 방법이 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중단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 주변에 구경꾼들이 많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할 때 그곳에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고 떡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같은 기적을 보고 떡을 얻어먹고 나서 잘 믿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어느 누구도 나타나서 예수께 힘이 되어주질 못했습니다. 각종 병자들이 기적같이 예수께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침 받는 기적을 곁에서 구경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기적을 보았으니 얼마나 잘 믿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 누구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나서서 도움이 되어 준 사람들이 없습니다. 오히려 기적이나 먹을 것과는 거리가 먼 가난했던 여인들은 언제나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고 따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의 길과 십자가의 길에서 끝까지 예수께 힘이 되어주고 함께 했습니다. 얻어먹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또 “사람을 보고 믿는 믿음”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인간 예수를 보고 믿었습니다. 그에게 감추어 있는 신성은 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행하고 호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인간 예수께 기대를 갖고 미련을 갖게되었습니다. 이 예수께서 출세하고 호령하는 자리에 앉게 되는 날에 대해서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죽게 되므로 기대가 무너지게 되자 배신행위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인간 예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예수로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를 볼 때 어딘지 권위가 있고 권세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혹시 하고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빌라도 앞에 서 있는 그 무력한 모습을 보고는 어제의 그 예수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모두 사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고 믿는 신앙은 신앙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도 사람을 보고 신앙생활 하다가 실족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오늘도 목사를 보고 믿다가 실망하고 신앙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목사가 완전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럴 줄 몰랐다고 실망하고 신앙에서 낙오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장로보고 천사인줄 알았다가 실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을 보고 실망해서 신앙에서 떨어져 나간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실망했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의 기준, 푯대, 목적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고 믿는 신앙은 가장 취약한 믿음입니다. 사람을 보고 믿으면 반드시 상처받고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무엇보다도 목적이 분명” 해야 생명이 길고 영적인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나는 영적인 양식을 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게 오는 자는 누구든지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얼마나 분명합니까. 이 목적이 분명하면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고 낙오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신앙인들이 이 본질이 애매한 채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사람들 때문에 흔들립니다. 생활이 어렵다고 흔들립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보기 싫기만 해도 교회에 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신앙이 무슨 깊이가 있고 내용이 있고 무게가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에서 주어지는 시험의 요인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때문에 시험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완전할 수도 없지만 신앙의 대상에서 중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신앙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또 너무 가난한 것입니다. 생활이 너무 가난하면 영적 생활에 무관심해집니다. 사람이 먹고 살기에 급급하면 영적생활에 관심가질 여유가 없어집니다. 또 너무 배부른 것도 문제입니다. 사람이 너무 배가 부르면 아쉬운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영적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육신의 삶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적 타락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생활이 좀 나아지니까 늘어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적타락입니다. 성한 곳이 없습니다. 사람이 생활이 나아지면 이렇게 생각과 관심이 몸에 집중되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현실주의입니다. 현재의 삶에 너무 집착하게 됩니다. 사람이 너무 현실에 집착하게 되면 저 높은 곳에 관심이 없어집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직 땅 아래에 집중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현대인들의 결점이라면 영적 세계에 무관심하고 아래에 관심을 집중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것이 너무 지나칩니다. 건강이 우상입니다. 몸에 좋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살 빼는 일에 생명을 겁니다. 물질 모으는 일에 집중합니다. 그만하면 살만도 한데 더 가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니까 영적세계에는 자연 둔감해지고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바닷가를 거닐다가 요술 램프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몸에 문질러 보니까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거인이 나타났습니다. “주인님 무엇을 도와드릴 까요, 소원이 무엇입니까,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요구하십시오.” 구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1년 후 신문을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1년 후 신문을 보면 주식상황이 나타날 것이니 그것을 보고 미리 투자해서 많은 돈을 벌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년 후 신문이 왔습니다. 신문에 나타난 주식시세표를 보면서 값이 오른 것을 열심히 적고 있다가 얼핏 보니까 부고란 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그곳에 자신이 죽었다고 부고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오늘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은 관심을 갖는데 영적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모두 허상을 좇고 사느라고 정신이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좀더 대우가 좋은 곳이 나타나면 미련 없이 일터를 버리고 사람을 배반하고 떠나버립니다. 모두 약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를 씁니다. 이익이 되는 일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쟁취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말에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둡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실족하고 실패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옥을 여행했습니다. 지옥하면 언뜻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처참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입니다. 그런데 지옥에 여행을 가 보니까 아주 좋았습니다. 잘 먹고 편안하게 지내고 세상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그래서 돌아가 곧 바로 지옥에 이민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지옥에 다시 가서 보니까 또 딴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의했습니다. “지난번 왔을 때는 그렇게 좋았는데 지금은 왜 이러냐!” 그랬더니 대답하기를 “지난번 왔던 곳은 관광코스였다.”고 하더랍니다. 무엇이나 약게 살겠다는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내 영혼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때 거기서 힘이 주어지고 능력이 주어지고 용기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믿음을 강하게 가져야 합니다. 예수가 내 중심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믿음들은 대부분 형식적인 믿음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오랜 역사는 있는데도 깊이가 없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내게 힘이 되어주질 못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신앙인들을 보면 말로는 믿는 다고 합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사실 자신을 과신하고 믿고 살아갑니다. 젊음을 믿고 건강을 믿고 재물을 믿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것에서 무엇을 믿을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자신의 믿음이 좋은 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의 그 믿음이 허상을 좇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느 날 큰 사고를 당합니다. 사업에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암에 걸렸습니다. 그때 그 믿음이 산산이 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믿음이 이 순간에 아무런 작용이 안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순간 그 허상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되뇌는 말이 “나는 그동안 무엇을 믿었단 말인가”하는 자조의 물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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