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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교회, 멋진 성도(고린도전서 1장 10-17절)

by 【고동엽】 2022. 12. 9.

고린도전서 1장 10-17절

< 고린도 교회의 파당 문제 >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축복의 샘터이고, 최고의 축복의 원천입니다. 마귀는 그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의 발걸음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 사단의 전략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사고를 만나고 실패를 했다고 교회에 안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녀에게 주어진 작은 사고는 큰 사고를 예방하고, 작은 실패는 큰 실패를 면제하기 위한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외에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이유를 보면 참으로 다앙햡니다. 요새는 자동차 문제가 심각합니다. 교회 오는데 주차장이 없고 몇 번 뱅글뱅글 돌게 되면 교회에 가는 일이 짜증이 나서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고, 교회 오다가 신호위반해서 딱지 끊기면 자기 잘못으로 딱지 끊긴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면서 교회에 안나오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처럼 영혼의 가치를 딱지 한 장과 바꾸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 묘한 갈등기류가 있거나 싸움이 있는 경우에는 그런 모습을 보면 너무 실망스러워서 교회에 나가기 싫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는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예수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갈등이 불씨는 바울파와 아볼로파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에, 아마 바울파는 개척당시 개척멤버일 가능성이 큽니다. 작은 공동체에서는 리더십 다툼이 적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가 신약성경의 교회 중에서 가장 컸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리더십에 매력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파가 기득권을 포기하려고 하겠습니까?

바울파는 바울을 내세워 보수적 입장을 취합니다. 본문 13-17절 말씀을 보면 바울파는 시비가 일면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훈장삼아 활용하여 반대파들의 기를 꺾으려고 하는 수구적 모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반대파는 감정이 생겨 나중에는 바울까지 반대하고, 바울의 사도권까지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몇 사람밖에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고백합니다.

아볼로파는 바울파에 대한 대응으로 생겨났습니다. 아볼로는 바울의 후임 목회자입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생으로 좋은 교육을 받았고, 설교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바울과 다른 목회 스타일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는 이론적, 합리적, 논리적, 그리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신진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로 새로 입교한 사람들이 그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묘한 갈등 기류가 흘렀습니다.

물론 바울과 아볼로는 서로를 이해하고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3장 6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아볼로를 인정하는 발언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파와 아볼로파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처럼 개인은 선하지만 ‘파’가 되면 이상한 최면에 걸려 나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둘의 싸움 속에 중간 입장을 취한 사람들이 바로 게바파(베드로파)입니다. 또한 싸움 자체를 싫어하고 영성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또 그룹을 형성했는데, 이들이 그리스도파입니다. 그들이 내세운 그리스도파라는 이름은 가장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교회 일에 가장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분들이 이런 분들입니다.

그리스도파가 모든 파를 싫어하면서 자신들도 역시 파당을 형성하는 모습은 진정한 의미의 화합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도 자기 나름대로의 고집이 있는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을 내세우면 교회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그리스도 중심적 신앙을 내세우지만 가장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타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멋진 교회, 멋진 성도가 되는 길 >

이런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도 앞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에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하여 멋진 교회, 멋진 성도가 될 수 있을까요? 이 시간에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몇 가지 원리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남의 허물보다 나의 허물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죄를 따지고 허물을 따진다고 하면 죄 없고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유독 남의 죄, 남의 허물에 관심을 가지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문제가 없으려면 나의 허물과 나의 죄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나 자신에게 얼마나 허물이 많이 보입니까?

자신의 허물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남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함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서로 허물을 덮어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해 안 되는 일을 목격해도 항상 이해할만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덮어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 이기심을 제거하고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불평과 불만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교회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불평과 불만을 가지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불평과 불만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심이 문제입니다. 대개 보면 자신의 이기심이 불평과 불만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소외된다고 불평하는 분들이 있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에게 편리한 시간이 아니라고, 자신과 관계없는 프로그램이라고 협조 안하고 팔짱 끼고 있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런 모습이 있으면 참 교회의 모습이 사라지게 됩니다. 진짜 교인은 자신이 나타나지 않을 때 더욱 인내하고, 그럴 때일수록 더욱 협조하려고 하는 모습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특히 교회생활에서는 공동책임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일이 어떤 한 사람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교회 섬기는 일은 모두 같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누구는 책임을 지고, 누구는 권리를 주장하지 말고 모든 성도들이 책임은 최대한 지고 권리는 최소한으로 주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3. 양보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모든 것을 인간에게 위임하시면서 한 가지 선악과만은 양보하도록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그것 하나까지 차지하려다가 인간은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처럼 무엇인가 하나 더 차지하려다가 모든 것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그것 하나’까지 더 차지하려고 하지 말고 ‘그것 하나’는 양보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가 어느 규모 이상 되면 가끔 직분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교회에 오래 나온 사람과 교회에 헌신하는 사람의 갈등입니다. 그때 어느 분이 장로가 되어야 할지 난감합니다. 교회에 오래 나온 분들은 초창기부터 교회를 지킨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헌신하는 분들은 자기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한 횟수로 따지면 훨씬 많고 교회에 공헌한 것이 많은데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소중한 분들은 교회가 어려울 때, 교회가 약할 때 처음 개척 때부터 함께 있었던 오래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장로라는 직분 자체에는 교회에 헌신하는 분들이 알맞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양보하는 자세입니다. 오래된 분들은 “나는 자격 없어. 헌신하는 사람이 해야지. 성도들이 본받는데...” 헌신하는 분들은 “그래도 오래 교회를 지킨 분들이 해야지. 그게 순서야.” 이런 양보하는 마음은 멋진 교회를 만들 것이다.

4.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고유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양성을 만들어냅니다. 그 다양성이 생활에 활기와 풍족함을 줍니다. 그러나 다양성은 좋은 것이지만 다양성을 앞세운 개개인의 고집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만 고집스러우면 문제는 커지지 않지만 고집과 고집이 충돌하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교회를 멋진 교회로 만들어가려면 때로 나 개인의 경험과 지식을 겸허히 하나님 앞에 포기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다양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아픔과 상처 있었다고 교회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끔 교회에 상처와 갈등의 씨앗이 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것을 현실로 인정하고 그 상처와 갈등을 극복함으로 멋진 교회의 멋진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글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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