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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성도(2) (고린도전서 9장 17-23절)

by 【고동엽】 2022. 12. 19.

자랑스러운 성도(2) (고린도전서 9장 17-23절) 3. 주는 삶을 실천하는 성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을 뿐만 아니라 사람 관계에서도 종처럼 자신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19절). 주는 삶처럼 복된 삶은 없습니다. 주고자 하면 감사가 충만해지지만 받고자 하면 불평이 충만해집니다. 어떤 성도는 자기도 어려운데 힘써 남을 돕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간절히 눈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경제적으로 축복해 주시고 저의 앞날과 가정을 지켜주소서!”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내가 나눈 사랑의 씨앗은 언젠가 신비한 축복의 열매가 되어 내게 돌아올 것입니다.

 저는 1984년에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꽤 많은 월급을 받았지만 대부분 교회를 위해 썼고 결혼 대비를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돈 한 푼 없었어도 결혼은 매주 잘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미래의 대책이 없는 삶은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도는 저축도 하고 모으는 재미도 느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베풀며 사는 것입니다. 아껴야 할 곳에서는 최대한 아끼고 써야 할 곳에서는 최대한 쓰십시오.

 물질 생활할 때 꼭 지켜야 할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열의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 써야 합니다. 둘째, 한 달에 하루 버는 몫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써야 합니다(신 14:28-29). 즉 하나님을 위해 10분의 1을 쓰고 선교와 구제를 위해 30분의 1을 쓰라는 것이 성경의 기준입니다. 선교사님들의 기도요청 편지를 받으면 재정적인 문제로 인한 기도제목들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기도제목들에 잘 반응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능력도 구하고 좋은 일을 위해 늘 앞서 나서려고 하십시오.

  선교사님들이 전방 선교지에서 고통을 식탁을 대할 때 후방에 있는 우리만 맛있는 음식을 사먹으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대중들이 먹었던 것은 음식 이전에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기적도 있습니다. 좋은 일을 위해 좋은 것을 함께 나눌 때 각종 문제와 장벽들이 무너지고 자기 영혼이 소생한다는 의미에서 선교는 봉사가 아닙니다. 선교는 자신의 생존과 축복을 위한 마땅한 행위입니다. 남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잘 살기 위해서도 선교해야 합니다.

4. 평화를 위해 애쓰는 성도

 사도 바울은 거룩한 변신의 천재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본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아도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되었습니다. 또한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되었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들처럼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마음을 얻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어디에서든지 누구와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평화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삶이 힘든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에 있지 않고 인간관계의 불화 때문입니다. 왜 인간관계에 불화가 생깁니까? 높은 마음을 가지고 대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낮아지고 약해지겠다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참된 권위는 권위주의를 버릴 때 주어집니다. 잘난 체 하는 자는 반드시 낮아지지만 겸손한 자는 반드시 높아집니다.

 또한 평화를 위해서는 “내가 이 원수를 꼭 갚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원한은 하나님이 다 갚아주십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손대기 시작하면 문제는 커집니다. 원수 갚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더 나아가 성경은 “원수를 축복하라!”고 합니다. 원수 갚지 않는 것도 힘든데 원수를 축복하라니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사람에게는 원수를 축복할 능력이 없지만 그 능력을 구해보십시오.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그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축복하는 능력을 구해보십시오. 원수를 축복하라는 것은 원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만약 원수에게 원한을 품으면 누가 잠을 못 잡니까? 원수는 그 시간에 잠을 잘 자도 자신이 오히려 잠을 못 잡니다. 원수에게 원한을 품으면 원수는 소화도 잘 되어도 자신은 소화가 안 됩니다. 그러면 잘못은 원수가 했는데 축복하는 마음이 없어서 벌을 자신이 받는 꼴입니다.

 하나님은 잠 잘 자고 밥 잘 먹게 원수를 축복하라고 합니다. 사실상 진짜 원수는 사람이 아니라 사탄입니다. 사람은 불쌍히 여기고 이해해야 할 대상입니다. 자신이 원수의 입장이었다면 자신도 그렇게 행동했을지 모릅니다. 남의 입장이 되어보면 원수를 축복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인간관계에 갈등과 아픔이 있을 때마다 늘 남의 입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마다 얼마나 다릅니까? 다른 성격, 다른 처지, 다른 상황을 이해하면 됩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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