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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설교[ 1월 1일]창조적 변화(창 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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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은총 안에 들어오면, 우리의 생애에 획기적인 일대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우리의 삶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시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혼돈’을 ‘질서’로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황폐하게 버려져 있는 우주를 질서 있게 변화시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을 알기 이전에는 분명하게 자아가 확립되지 못하고 영·혼·육이 황폐한 상태에 있었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영·혼·육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둘째, ‘공허’를 ‘충만’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이 땅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사건도 계획도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알기 이전에는 우리도 허무와 무의미와 절망 가운데서 아무런 목적이나 방향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운행하셔서 인생의 허무와 무의미와 절망이 사라지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깨닫게 되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흑암’에 ‘광명한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흑암 속에서는 색을 구별할 수 없으며,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는 죄악에 눈이 가리워서 흑암 가운데서 죄를 분별하지 못하며, 죄로 더러워진 자신의 모습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일시에 흑암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인임을 확연히 깨닫게 될 뿐 아니라,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새해 첫날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셔서 지금도 타락한 자들의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를 체험함으로 복된 한 해를 시작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65일 설교[ 1월 2일]영광스런 삶의 자리(창 3:1-21) |
역사 이래로 사람들은 인류의 기원과 목적을 알고자 애써 왔으나,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과연 우리 인간의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원래 인간의 자리는 하나님의 복과 부요가 가득한 복된 자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 복된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 영광을 찬양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인간의 삶의 목적이시고, 기쁨의 원천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여 이처럼 복된 자리에서 쫓겨나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은 죄악의 자리에서 절대 절망을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질병과 저주 가운데서 신음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죄악의 자리에 떨어진 인간은 아무리 겉모습을 치장하고, 환경을 아름답게 꾸며도 자신의 죄의 모습을 결코 감출 수 없습니다. 어떠한 고상한 학문과 이론으로 삶의 자리를 바꾸려고 해도 결코 죄인이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죄악의 자리에서 복된 자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복된 자리로 돌아오는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지은 모든 죄악의 짐을 홀로 다 짊어지시고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악의 자리에서의 방황을 마치고 복된 자리로 들어가 죄사함받고, 성령 충만받고, 치료와 복을 받고, 영생 천국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삶의 자리에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을 이 복된 자리에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복되게 살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을 열어 놓고 여러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이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복된 자리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365일 설교[ 1월 3일]회개의 참뜻(마 3:11,12) |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회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참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회개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단계별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회개의 첫 단계는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통회 자복하고 예수님을 삶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회개의 둘째 단계는 성결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고 해서 그 행위가 하루 아침에 성결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가 생각 날 때마다 즉시 그 죄를 자백하고 용서받아 성결함을 얻어야 합니다.
회개의 셋째 단계는 마음과 감정의 변화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결함이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사로잡아 영의 생각으로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성결의 영이신 성령과 교통하는 생각을 늘 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과 동행함으로 더욱 성별하고 권능 있는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질병을 치료해 주셨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주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는 나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힘써 기도해야 범사에 복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거룩함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서서 참된 회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며,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받게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1월4일 ] 생명의 양식(마4:4) |
우리가 온전히 건강하기 위해서는 육신의 양식뿐 아니라 영의 양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영의 양식이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읽고 지키면 우리 영혼에 큰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면 생명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와 지식을 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풍성히 얻게 되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을 줍니다. 모든 사실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믿음 역시 그에 대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믿음에 대한 분명한 근거를 갖게 되기 때문에, 환경에 좌우되지 아니하고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게 합니다. 에베소서 5장 26절에 보면,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같이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 우리의 영혼을 끊임없이 정결케 하고 우리의 행실을 삼가 경건히 지켜 나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여 주셔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줍니다. 인생을 살아가면 갈수록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은 인생의 허무와 고독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며, 영원한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 어느 것도 영원하고 참된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요, 참된 기쁨과 유익을 주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이 우리의 일생에 함께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1월 5일]복 있는 사람(마 5:1-12) |
예수님은 천국 시민의 도리인 ‘산상 수훈’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산상 수훈’ 중에서도 ‘8복’은 참된 복의 길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는, 가장 핵심이 되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8복’에 대한 교훈을 통해,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이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고 마음속에 심령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입니다. 이는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통회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셋째, ‘온유한 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갈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로 만족함을 얻게 됩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다. 이는 자원하는 심령으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마음을 낮은 곳에 두며, 형제들에게 선한 일을 베푸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받게 됩니다.
여섯째, ‘마음이 정결한 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받아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마지막 날 영광 중에 주님을 뵙게 됩니다.
일곱째,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고 이웃을 화목케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음을 받게 됩니다.
여덟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고난받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천국을 소유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8복’의 근본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우리 마음에 심령 천국이 이루어지면, 그에 따라 우리의 육신과 범사에도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천국 시민의 도리를 다하여 참으로 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65일 설교[ 1월 6일]바벨탑과 하나님의 나라(창 11:9) |
인간의 교만과 탐욕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더불어 살 수 없는 존재가 되게 합니다. 교만과 탐욕으로 일그러진 인간이 살아가는 삶은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인본주의적인 바벨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홍수 심판 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번성해진 노아의 후손들은 동방으로 옮겨가다가 시날 땅에서 마음을 합하여 큰 도시를 이루고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아서 ‘인본주의 사회의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올지라도 탑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으면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말고 인간 중심의 삶을 영위하자는 적극적인 반역 행위였습니다. 결국 바벨탑은 인간 교만의 상징이요, 탐욕의 징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자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리게 되었고, 그들의 바벨탑은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교만과 탐욕으로 쌓아 올린 수많은 바벨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쌓아 올린 바벨탑은 그 시작부터 파멸의 운명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초한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모든 영광과 주권을 버리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가장 낮고 비천한 고난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겸비함을 보이셨습니다. 이 겸비함이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터전입니다. 절대 겸비의 마음을 가진 개인, 사회, 국가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사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파멸치 않는 영원한 삶이 있는 곳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바탕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으시고 낮은 데 마음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아니하시고 섬기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활도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기초에 서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65일 설교[ 1월 7일]바라봄의 법칙(창 13:14-18)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땅을 바라보았고, 결국은 그 약속의 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볼 때 그 믿음대로 이루어 주시므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바라봄의 법칙’을 활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라봄의 법칙’에는 네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 단계들을 살펴봄으로써 여러분이 삶 가운데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데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바라볼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라볼 목표를 설정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였듯이 우리에게 올바른 목표를 지시해 주셔서 우리 마음속에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계획과 소원, 그리고 신념과 평화가 넘쳐나게 됩니다.
둘째, 목표에 대한 뜨거운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뜨거운 기대를 갖지 않고서는 어떠한 하나님의 응답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기도를 통해 올바른 목표를 설정하고 난 후에는 그 목표를 이루어야겠다는 뜨거운 소원과 기대를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 구체적인 환상을 가져야 합니다. 환상이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그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이미 그것이 이루어진 모습을 마음속에 환상으로 그려서 바라보면서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입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주야로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게 되면 인간의 역사와 운명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바라본 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바라봄의 법칙’을 활용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믿고 바라본 대로 이루어 주셔서, 아브라함과 같이 복된 삶을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365일 설교[ 1월 8일]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려면(마 6:31-34) |
낯선 도시에서 목적지를 찾아가려면 지도를 가지고도 길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확실한 지도와 안내서를 가지고 목표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신앙 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른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 복된 삶을 살 수 있지만, 잘못된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아 교회를 섬기고 전도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의란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자격을 말합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해 주심으로 인하여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구원의 은총에 감사해야 하며,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의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며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함으로 의와 진리와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33절 하반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차고 넘치게 채워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영혼이 잘 되는 복과, 범사가 잘 되는 복과, 육신이 강건케 되는 복을 충만히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월 9일]올바른 선택(마 7:13-29) |
오늘날 세계 각처에서 말세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세상 삶에 취해 정신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인생에 취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을 대비하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올바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간 순간 다가오는 세상사 속에서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해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먼저, 어느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의 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좁은 문이요, 다른 하나는 넓은 문입니다. 좁은 문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 영생하는 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 볼 때, 그 문은 좁고 가는 길이 협착하므로 찾는 이가 심히 적습니다. 반면에 넓은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을 버리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또한, 누가 참된 선지자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배후 세력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가장을 해도, 생각이 더럽고 언행이 더럽고 자신을 높이고 사욕을 채우는 것이 결국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 선지자의 교훈을 구별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을 얻기 위해 날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어디에 우리 인생의 집을 지을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다 가르치신 후,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자와 같고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자와 같다.”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여 반석 위에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오늘날 전세계는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깨어 기도하며 올바른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1월 10일]이런 믿음을 가집시다(마 8:5-13) |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수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에만 관심이 있을 뿐,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감탄하실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백부장의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먼저,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에 대해 듣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시인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종들은 주인에게 짐승 취급을 받으며 혹사당했습니다. 주인들은 종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재산의 일부로 여겨 함부로 대했으며, 종이 병이 들어 죽게 되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자기 하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청한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는 신앙은,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대로 말씀으로 기적을 행하셨으며,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은 이 백부장처럼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실천되고,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고, 놀라운 복을 넘치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365일 설교[ 1월 11일]야웨 이레의 축복(창 22:9-14) |
본문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아들, 더구나 나이 100세가 되어 얻은 외아들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이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슴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예비하신 큰 복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이삭과 같은 우상이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기 전에는 죽든지 살든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했었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귀한 아들을 얻고 보니, 이제는 아들 이삭을 주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오직 이삭만이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우상인 이삭을 깨뜨리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고 관심 있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깨뜨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삭이 자신의 우상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이삭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을 때, 그는 단호하게 하나님을 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우상인 이삭을 포기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이삭을 대신하여 제물이 될 수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을 위해서 예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도 준비하시는 ‘야웨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야웨 이레의 하나님’을 체험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우상들을 깨뜨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평생을 그의 준비하신 은혜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1월 12일]임무를 맡은 종의 자세(창 24:1-49) |
오늘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라는 임무를 받고 이를 수행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기 때문에 그의 행적이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그가 어떻게 임무를 수행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임무를 맡은 자는 어떤 자세로 일을 수행해야 하는지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그는 자신의 임무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일을 계획하여도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기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임무를 맡은 자는 먼저 기도로써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묵묵히 주목하며 살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로 초조하지 않습니다. 바쁘고 분주하게 설치지도 않습니다. 이미 기도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임무를 맡겼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마음이 평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하나님이 이루실 그 일을 묵묵히 바라볼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임무를 맡은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고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는 끝맺음을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33절에 보면, 그는 착수한 일이 끝나기 전에는 밥도 먹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임무를 마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의 책임감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일은 끝맺음이 중요합니다. 한번 시작한 일을 잘 마무리 짓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마무리 짓느냐에 따라 일의 성패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임무를 맡은 자는 자신의 임무를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잘 마무리지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무슨 임무가 맡겨지더라도 능히 감당해 내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의 성패는 그 임무를 잘 수행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마무리를 잘 함으로써 능력 있는 일꾼이요, 인생의 성공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65일 설교[ 1월 13일]예수 그리스도의 3대 사역(마 9:35) |
자녀는 부모가 하는 말과 행동을 표준으로 삼고 배우기 때문에 부모를 닮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예수님이 절대적인 표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삶은 어떤 것인지를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전파하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공생애 기간 내내 가시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복음을 전파하셨을 뿐 아니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성도와 교회는 마땅히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행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되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가르치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곳마다 천국 복음을 이해하기 쉽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려는 성도와 교회는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말씀을 모든 족속에게 가르쳐 그 말씀을 지키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병 고치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으며, 죽은 자들도 살려주셨습니다. 또한 승천하시기 전에는, 믿는 자들에게는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고 기도할 때 낫는 표적이 따를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막 16:18). 그러므로 우리는 치료의 사역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을 돌보시는 위대한 목자요, 그의 백성들을 가르치는 위대한 교사요, 우리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위대한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세 가지 사역은 우리에게 남겨 주신 부탁이자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세계를 가슴에 품고, 그들에게 나아가 천국 복음을 힘써 전파하고, 가르치며, 병든 자들을 고통에서 건져 주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월 14일]두 가지 십자가(마 10:34-39) |
성경은 두 종류의 십자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져 주신 ‘대속의 십자가’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십자가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어느 것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이고 어느 것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인지 살펴봄으로써, 불필요한 고난의 짐에서 벗어나고 성숙한 신앙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지신 ‘대속의 십자가’는 어떤 것일까요? 대속의 십자가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질병과 가난과 저주와 절망을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받으신 고통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들은 이러한 고통을 짊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통들이 다가올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를 단호히 물리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형통의 복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자기 십자가란 ‘나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며, 주님을 좇기 위해 자원해서 짊어지는 고난이며, 주님 때문에 당하는 핍박입니다. 이와 같은 ‘자기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잘 감당하는 자에게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며, 부활의 생명을 넘치게 부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위해 하나님 나라에 상급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며, 이를 기쁨으로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벗어 버려야 할 고난이 있고, 짊어져야 할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고난을 다 십자가로 받아들여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모든 고난을 다 배척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십자가를 짊어지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 그것을 잘 감당하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하여 기도의 응답을 받고, 부활의 생명을 받아 누리며,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65일 설교[ 1월 15일]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마 11:12) |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이 땅에서 시작된 천국은 지금도 계속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그냥 확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침노하는 자만이 천국을 빼앗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 말씀에 대해 상고해 봄으로써 여러분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천국을 침노하여 확장시키려면 천국의 은혜를 누리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바로 사단과 타락한 천사들, 곧 마귀들과 귀신들입니다. 천국의 은혜는 죄사함의 은혜, 성령 충만의 은혜, 치료의 은혜, 축복의 은혜, 그리고 영생 천국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마귀와 귀신들은 성도들이 이러한 은혜를 누리고 전파하는 것을 강력히 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천국과 하늘의 천국을 내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마귀를 결박하는 강력한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마 12:28,29).
그럼 어떻게 우리는 강력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기도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영적인 세력은 영적으로 대항해야 합니다. 마귀의 진을 무너뜨리는 힘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하되 마귀의 진이 무너질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귀의 세력을 반드시 결박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과연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정말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하는 의심을 가지고 기도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천국은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강력한 자만이 차지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가정과 교회는 확실히 천국을 이루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단이 틈타 사방에 시기와 분열과 질투와 미움으로 가득합니까? 지금 여러분은 시기와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을 대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배후에서 온갖 나쁜 일들을 꾸며대는 사단을 대적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한 것임을 잠시라도 잊지 말고 마귀를 대적하십시오(엡 6:12).
365일 설교[ 1월 16일]멍에 |
중동에서 소가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광경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멍에는 실제로 어미 소의 목에만 걸고, 새끼 소는 그 멍에 속에 목만 집어넣게 하고는 끌고 갑니다. 어미 소는 혼자 멍에를 멨기 때문에 힘들게 밭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새끼 소는 그냥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아마도 새끼 소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멍에라는 것이 이렇게 쉽고 가벼운데, 엄마는 괜히 땀만 흘리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새끼 소가 어미 소와 함께 무거운 멍에를 메고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미 소 혼자 멍에를 메고, 새끼 소는 그냥 따라 가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에 순종하여 그 멍에를 같이 메는 자들에게 짝이 되어주십니다. 우리는 새끼 송아지 마냥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은 예수님께서 다 끌고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들 때, 힘든 멍에를 친히 져 주시고 단지 따라오기만 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만이 참된 안식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1월 17일]최선을 다하는 삶(창 31:38-42) |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물면서 외삼촌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위하여 각각 7년씩 14년을, 그리고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6년을 머슴으로 봉사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이처럼 외삼촌의 집에서 20년 동안 머슴살이를 할 때 어떠한 자세로 일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40절을 보면,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서 머슴으로서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범사에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별다른 생각 없이 쉽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해 주시겠지.”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서 수수 방관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서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일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형통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20년간이나 성실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반드시 복주시고 고향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42절을 보면,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라고 야곱의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위치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그와 함께하시며, 그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비록 머슴으로 일했지만 최선을 다했고,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에 마침내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심히 풍부한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살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서 성실히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우리의 수고하는 손길에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1월 18일]풍성한 삶을 살기 위하여 (마 13:1-9) |
오늘날 자원 고갈의 문제는 전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자원이 부족하더라도 정신적 자원인 생각과 믿음을 계발하기만 하면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을 우리의 개인과 나라에 끌어올 수 있기 때문에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정신적 자원을 계발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우리는 그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생각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생각은 우리의 마음과 환경과, 또 영적인 근원에서 옵니다. 이 중 우리가 특별히 잘 분별해야 하는 것은 영적인 근원에서 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과 마귀가 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정확히 분별하여 악한 생각은 물리쳐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밭과 같아서 일단 생각을 심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리면 뽑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다가올 때, 긍정적이고 선한 생각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생각은 단호히 끊어 버려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마음속을 끊임없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성경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심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이 심겨진 다음에는 그 생각을 주야로 묵상하며 지속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러면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기적을 산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신적 자원의 믿음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위대한 삶이라는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기름진 생각의 밭과 말씀의 좋은 씨앗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한 분도 빠짐없이 마음의 밭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 영혼이 잘 되는 열매, 범사가 잘되는 열매, 강건한 열매,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365일 설교[ 1월 19일]알곡과 가라지(마 13:24-30) |
마태복음 13장 전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도 그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교회 안에 하나님의 자녀인 알곡과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씨 뿌리는 자는 말씀을 주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영생의 씨’를 뿌리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라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원수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가라지를 몰래 덧뿌려 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참된 성도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곡식과 가라지는 자라는 과정에서 식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라지는 곡식과 매우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 자라고 난 뒤에 열매를 보면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의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닮아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입술로는 예수님을 “주여, 주여”부르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기 때문에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가라지는 교회 안에서 믿음을 위장해서 자신의 유익만 도모하고, 이단 사설을 퍼뜨려 교회를 파괴하는 불의를 일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가라지를 그대로 놓아 두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가라지도 은혜의 날 동안에 회개하고 돌아와 알곡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할 때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원수 마귀가 사람이나 봉사처를 통해 훼방할지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賞)을 위하여 더욱 충성스런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원수 마귀는 불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할 뿐 아니라, 교회 안에 가라지를 심어 성도를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항상 깨어 기도하고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며, 넘어지는 자를 일으켜 세우고 약한 자를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365일 설교[ 1월 20일]천국의 비밀과 소망(마 13:44)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과학 문명이 발달하고 세상이 점점 편리해져 감으로 인해 죽음 이후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조차 무관심한 채 이 세상에 연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 오랫동안 다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천국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소망이 없이 살아가는 경우를 봅니다. 천국은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면 결코 알 수 없으나, 영적인 깨달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환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국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있으며, 또 장차 우리가 갈 영원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떤 나라일까요? 천국은 실제적인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임하는 것이며(눅 17:20-21), 심령이 가난한 자가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마 5:3). 우리가 죄에 대하여 애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점령하시고 우리 안에 천국을 건설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천국을 소유하고,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신령한 하늘의 기쁨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속에 천국을 체험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에서도 누릴 수 있지만, 궁극적이고 영원한 천국은 죽음 이후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이후에 하나님이 계신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천국 소망을 가지고, 어떠한 고난에 처해도 낙심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천하를 얻는다는 하더라도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 아무리 장수하고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 해도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소유하지 못하면 그 삶은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세상의 부귀 영화를 누리지 못하더라도, 마음에 심령 천국을 체험하며 영원한 천국 소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항상 기쁨이 넘치고 소망 찬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섬겨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하시는 천국의 능력을 가지고 날마다 승리하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월 21일]예수님을 바라보자(마 14:22-33) |
이 세상을 살면서 어두운 밤을 지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는 것이며, 가파른 인생길을 허덕이며 올라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처럼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두운 밤이 다가올 때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본문 3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람을 잠잠케 하심으로 갈릴리 호수의 거센 물결을 잔잔케 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바람을 잠재우고 파도를 잔잔케 하셨던 능력의 예수님은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며,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며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를 삼키려는 인생의 파도는 잔잔해지고 바람은 멈추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되 어떠한 경우에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베드로는 “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했을 때 물 위를 걷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눈을 돌려 환경을 바라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물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30절). 우리의 신앙 생활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가 한때 고통 가운데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힘을 얻어 그 어려움을 극복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눈이 다시 세상으로 향하게 되면 또 다른 어려움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만 맞추고 끊임없이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혹시 몰려드는 인생의 파도와 거친 비바람만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체념과 자포 자기에 빠져 패배적인 인생을 자초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지금 이 시간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능력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을 그분께 다 내어 맡기고, 그의 말씀만 의지하며, 필요한 것을 기도로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생애에는 위대한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1월 22일]만남과 회답(마 15:21-28) |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들린 딸로 인해 고통스럽게 지내던중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기의 딸이 고침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예수님께 나아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와 같이 ‘나와 그것’의 만남은 필요할 때만 이용하고 필요치 않은 때는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돌아서는 일시적이요 이기적인 만남이지만, ‘나와 너’의 만남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와 너’가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곳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만남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 그분의 만남’의 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1월 23일]진정한 성공의 비밀(창 41:39,40) |
요즘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성공만 부르짖는 ‘성공병’ 환자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물론 성공하려는 욕구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이 진정한 성공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요셉을 통해 진정한 성공의 비결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요셉은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꿈을 가진 사람들은 많아도 그것을 이룬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목표가 분명치 않고, 따라서 꿈을 행동으로 이어 주는 동기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꿈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과 하나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하셔서 반드시 그 꿈을 이루어 주신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요셉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고 끝까지 인내했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것은 자기를 팔아 버린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의 태도에서 잘 나타납니다(창 45:5-8참조). 즉, 그는 미움과 원한을 사랑으로 승화시켰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역경 가운데서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불퇴전의 인내로 그 어려움을 통과하는 사람은 진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요셉은 물질적인 면이나 윤리적인 면에서 매우 깨끗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성공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공자가 되려면 정결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요셉은 하나님의 신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지식이나 기술은 배우고 노력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공을 하려면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공자가 되기 원한다면 마음의 소원과 꿈을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인 말씀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갖고, 성령과 동행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진정한 성공자가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1월 24일]십자가를 따르는 삶(마 16:24) |
첫째, ‘수직적인 삶’이 있습니다. 수직적인 삶이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수직적인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에 두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며,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신앙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만으로는 온전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 ‘수평적인 삶’이 있습니다. 수평적인 삶이란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화목을 이루고 서로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수평적인 삶에 우선 순위를 둠으로써 수평 일변도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본주의적인 삶으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십자가의 삶’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삶은 ‘십자가를 따르는 삶’입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중심의 삶은, 바로 하늘에 속한 수직적인 삶이 되고 거기에 준하여 땅에 속한 수평적인 삶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목숨 바쳐 섬기고 사랑하며, 그 사랑을 가지고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십자가를 따르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된 삶을 살면서, 먼저 우리의 이웃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기 위해 본을 보여야 합니다. 먼저,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여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수평적으로는, 각자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며 구제와 선행을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올바른 신앙 자세는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금세뿐 아니라 내세에도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365일 설교[ 1월 25일]겨자씨만한 믿음(마 17:14-21) |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제자들은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하여 애쓰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탄식하시고, 그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찌하여 자기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러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지만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마 13:32). 겨자씨만한 믿음은, 매우 작고 보잘것없게 보이지만 무한한 능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미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생명력 있는 산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이 크든 작든, 이러한 살아 있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살아 있는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마서 10장 17절을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말씀으로 충만할 때, 살아 있는 믿음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한글 성경에는 본문 21절이 없지만, 영어 성경에는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금식하여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살아 있는 믿음이 있으면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 두지만 말고 선포해야 합니다. 입으로 시인함으로써 믿음을 풀어 놓을 때, 비로소 그 믿음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1월 26일]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삶(창 45:1-8) |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깨달음을 주실 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보적인 신앙 단계에 있는 사람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원망, 불평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고 성숙해질수록 원망과 불평은 점차 사라지고, 오히려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감사드리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요셉이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이 자신을 팔았던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화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본문 7절 이하에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요셉의 성숙한 신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셉이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기까지는 13년간의 연단 기간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 온 후 한동안은 자신이 비참한 삶을 살게 된 것이 전적으로 형들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역경과 절망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이 눈 앞에서 성취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기가 애굽에 팔려 온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요셉과 같이 뜻밖의 환난과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뜻밖의 사람들을 통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일평생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기에 좋은 일을 만날 때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며, 슬픈 일을 만날 때도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길을 지도해 주시는 것입니다(잠 3:6).
하나님께서는 모든 범사를 그의 때와 기한을 좇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탁하여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롬 8:28).
365일 설교[ 1월 27일]용서하는 생활(마 18:21-35) |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한 남에게서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예외없이 이런 일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남을 미워하여 밤잠을 설치거나, 증오와 원한에 사로잡혀 몸부림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올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남을 미워하고 원한을 품게 되면 상대방보다 자신이 먼저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에 보면,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값없이 용서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마땅히 남을 값없이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잘못한 것이 있을 때는 진심으로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결코 용서받을 수 없으며, 마음의 평강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용서하고 또 용서받아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과 24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을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남을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힙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고 허물을 감싸 주며 화목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이 열려서 우리의 예배가 열납되고,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고, 너희를 후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남을 용서함으로써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우리의 신앙을 진보시키며,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월 28일]성숙한 신앙(창 50:15-21) |
온실에서 자라난 화초보다 휘몰아치는 비바람과 찬 이슬을 맞고 자라난 야생화가 더욱 진한 향기를 내뿜듯이, 그리스도인의 신앙도 환난과 고초 가운데서 더욱 성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요셉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참으로 성숙한 신앙이란 어떤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성숙한 신앙의 첫 단계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스럽게 일하던 그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여기서 더욱 깨어지고 낮아져 온전히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이처럼 완전히 깨어져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시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숙한 신앙의 두번째 단계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셉은 어떤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절대로 낙심하지 않고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어떤 모진 시련과 고난도 하나님 안에서는 축복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의 세번째 단계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용서하고, 고향의 가족들을 애굽의 비옥한 고센 땅에 옮겨와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친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던 형제들을 위로해 주고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사람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을 풍성히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요셉과 같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65일 설교[ 1월 30일]하나님의 일꾼의 자격 조건(출 3:1-4:18) |
본문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이 갖추어야 할 자격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자신의 힘을 믿었을 때는 일꾼으로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출 2:11-15). 그러나 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한계와 무능함을 절실히 깨닫고 겸손해졌을 때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둘째,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3장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출애굽의 소명을 주시는 기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꾼으로 부르실 때, 우리의 마음에 뜨거운 소원을 주시고 말씀이나 사람이나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러한 확실한 소명을 받으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을 맡기실 때, 우리에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담대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자신의 무능함과 입이 둔함을 핑계로 하나님의 소명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용기란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대하 32:7).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으려면 겸손하고, 소명이 있으며, 능력을 받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네 가지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듯이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우리가 일꾼의 자격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반드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365일 설교[ 1월 31일]만왕의 왕 예수님(마 21:1-11) |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시각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종교가, 혹은 사회개혁가, 또는 철학자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잘못된 시각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예수님은 왕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광활한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시요 우주의 왕이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영원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를 구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왕이십니다.
그럼,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어떤 요건을 갖추고 계신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왕이 되려면 주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모든 주권과 지상의 모든 주권을 다 쥐고 계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또한, 왕이 되려면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백성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부르는 모든 성도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왕이 되려면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의 영토는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영토인 교회 가운데 운행하시며 교회를 확장시키시고 견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통치하실까요? 본문 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죄와 허물과 죽음에서 구원하신 우리를 공평과 지혜로 통치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모든 백성들은 놀라운 복과 풍성한 생명을 얻으며 살아갑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전지 전능, 무소 부재하신 분이십니다.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은 오늘도 절대적인 주권으로 그의 백성들을 통치하고 계시며, 지금도 길을 잃고 방황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 구원하고 그의 통치 아래로 이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든지 생명과 부요와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출처 : RED COMPASS 선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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