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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고전 2:12-16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고백과 선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구원 받았다'
는 것과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것과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
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구원받았다'는 것과 '나는 그리스도인
이다'라는 고백이나 선언은 자주 쉽게 합니다만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고백은 흔한 고백이 아닐뿐만 아니라 쉬운 선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인이란 구원받은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내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
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끝에서 바울의 당당한 고백과 선언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했습니다만 사실은 바울 자신
의 개인적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이며 그 삶은 어떤 것인가를 찾을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로서 온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12절을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영이란 마귀의 영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2:2을 보면 마귀를 가리켜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불순종의 아들
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마귀영을 받으면 마귀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마귀의 속성이 밝혀져 있습니다.
1) 마귀는 거짓말쟁이 입니다.
요한복음 8:44을 보면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오도합니다. 진리를 부정하고 침을 퇴핵시킵니다. 마귀가 사상 속에 들어가
태어난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참말처럼 꾸며댑니다. 거짓
말은 마귀의 영이 사주하는 것입니다.
2) 간교합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그 간교성에 아담도 하와도 넘어졌습니다. 간교한 마귀
는 오늘도 많은 사라을 넘어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3) 헐뜯습니다.
욥기 1:9을 보면 사탄이 욥을 헐뜯고 중상모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귀
는 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인색합니다. 비난하고 부정하고 공격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4) 난폭합니다.
쇠사슬을 끊는가하면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자해행위를 일삼습니다.
5) 위장합니다.
심지어 광명의 천사로까지 자신을 위장합니다. 마귀는 변장술의 명수입니
다. 성자로, 애국자로, 위인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위장합니다.
6) 교만합니다.
본래 천사였던 마귀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으로 타락해 마귀가 되었
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시험할 때도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꼬였습니다. 인간은 인간일 때 행복합니다. 인간은 신이 되어
도 안되고 짐승이 되어도 안됩니다.
7) 범죄를 유발합니다.
마귀의 영이 운행하는 곳엔 온갖 사건과 범죄가 꼬리를 뭅니다. 한숨 쉴
겨를도 없습니다. 살인, 폭력, 마약, 뉴에이즈운동,성폭행, 강도, 절도 등
범죄사건들은 마귀의 영이 역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토록 잔인하고 무서운 마귀의 영을 받으면 어떻게 되
겠습니까?
바울은 선언 합니다. "우리는 마귀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인 성령
을 받았다"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서영은 마귀의 영을 물리치고 교체하는 유일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의 영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
다.
마귀의 영은 수양이나 요가나, 의학적 방법으로 추방할 수 없습니다. 성령
받고 그 능력으로만 이길 수 있고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귀신이 들렸던 사건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일국의 왕이 악신들려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다윗소년을 데려다가 수금을 타며 찬송을 연주하게
했습니다. 사무엘상 16:23을 보면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
이 상쾌하게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고 했습니다.
현대의학에서는 음악이 환자치료요법으로 응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만 그
러나 단순한 세속음악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는 없습니다.
더우기 귀신을 자극하는 무당음악이나 록음악은 귀신을 흥붕시키기 때문에
덜 날뛰고 달라붙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13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게 감동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소년시설부터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이었던 것이빈다.
그가 받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울의 악신을 내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도처에서 악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악령의 세력을
이기려면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내가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마귀는
혼절하여 도망칠 것입니다.
2. 은혜를 알게 됩니다.
12절 끝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헤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를 셀 수 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
고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냐 가지지 못했느냐로
결정됩니다.
은혜를 모르거나 잊어버리는 사람을 배은망덕자라고 부릅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산다면 어떻게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왜 은혜를 잊어 버립니까?
첫째 스스로 됐다(섰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둘째 악한 건망증 때문입니다.
셋째 사탄의 방해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예로 들겠습니다.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사는 동안 온갖
박해와 고통을 겪던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받아 애굽을 떠나게 되
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왕 바로는 그들을 그냥 포기하지 않고 추격대를 동원
해 추격을 감행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여 있고,뒤에서는 추격대가
뒤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
고 육지처럼 건너게 해주셨습니다. 이 홍해도하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서는 잊을 수 없는 기적이었고 감격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사흘뒤 마라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마실 물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
님을 원망하고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그들은 사흘전의 기적과 은혜를 기
억 못하는 배신자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원망을 일삼는
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우리들이야말로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은혜를 그토
록 쉽게 저버리거나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 크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
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3.신령한 것을 분별합니다.
13절 끝을 보면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거의가 신비롭고 신령한 사건들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사건, 홍해가 갈라져 건
넜다는 사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이 먹었다는 사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사건 등 모두가 신비롭고 신령한
사건들입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받고 구원받았다는 것도
신령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검들은 신령한 이해력과 판단력이 아니면 이해하거나 수
용하기가 어려운 것들입니다.
메이어(Meyer)는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과 결합된"고 했고, 벵겔(Bengel)
dms " 신령한 일은 신령한 사람들에게 해석된다"고 해석했습니다.
신령한 세계는 신령한 눈으로봐야 볼 수 있고, 신령한 말씀은 신령한 귀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라야 분별할 수 있는 것입
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면 신령한 것을 깨닫고 분별하고 실천하
는 힘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신령한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4. 판단받을 일이 없게 됩니다.
15절을 보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신령한 사람이라야 판단능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는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사람은 영분별 능력을 갖기 때문에 판단이나 분별이 가능하
다는 것입니다.
둘째 신령한 삶을 사는 사람은 판단받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에 묻혀사는 사람이나 믿음을 떠나 사는 사람은 판단받고 정죄
받을 일이 많습니다만 신령한 사람은 그럴 까닭이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신령한 사람은 함부로 남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
다.
판단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긍정적 판단과 부정
적 판단입니다. 운동경기에서 이긴 사람에게 이겼다고 판단해주는 것은 긍
정적 판단입니다. 그러나 진 사람에게 이겼다고 판단해주는 것은 부정적 판
단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판단을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3을 보면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
는 매우 작은 일이다"고 했고, 4절을 보면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
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판단은 뒷
전으로 미루어 놓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의 판단만 신경쓰고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나를 의롭다, 깨끗하다. 정당하다고 판단해도 주님이 아니라면 아
닌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정죄하고 손가락질해도 주님이 나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시고
의롭다고 판단하시면 그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바울의 고백이 자랑스럽고 부럽습니
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로마서 8:9을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 뜻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와 깊은 교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 가진 사람이 됩시다.
그래야 참그리스도인이라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행일 : 940911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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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풍요로우신 하나님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창 27:27-29
창세기 27장은 야곱이 자기 아버지인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해 별미를 준
비한 일과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본문
은 이삭이 야곱에게 내린 축복의 구체적 내용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삭 자신이 복을 주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
면 "내가 너에게 복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게서 너에게 복을 주신다
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밝힙니다. 복의 근원도 주체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삭은 복을 비는 사람일뿐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주목해
야 합니다.
본문이 밝히는 하나님의 축복은 한마디로 풍요롭습니다. 이유는 하나님 자
신이 풍요롭고 풍성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빈틈이 있다든지 모자라는 것
은 풍요도 풍성도 아닙니다.
히브리어 가운데 '마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흘러 넘치다, 만족
시키다, 온전히 가지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어 가운데 '플루토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여분으로 남
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풍성하다든지 풍요롭다는 것은 흘러넘치고 만족하게 가지는 것입
니다. 그리고도 여분이 남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풍요가 없습니다. 소비를 미덕으로 치며 세우던 미국도
지금은 불경기와 재정적자로 허덕이고 있는가 하면, 떵떵거리고 큰소리 치
던 일본도 도산하는 회사가 늘어나는가 하면 불황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
다.
세게의 지상낙원이는 샹그릴라를 찾아간 어느 언론인은 깜짝 놀랐다고 합
니다 .들꼿으로 레이스를 만들어 걸어주는가 하면 쓰지도 못하는 전화기와
소리도 안나는 피아노를 국보급 유물이라며 자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샹
그릴라도 풍요의 세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5:7을 보면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풍성하다고 했고 에베소서
3:6을 보면 영광이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시편 86:15을 보면 '진실이 풍성
하다"고 했고, 로마서 2;4을 보면 참으심이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7을 보면 "그 은혜의 풍성함을 오는 여러세대에 나타내려 하심
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이사야 30:23을 보면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
소산의 곡식으로 살찌고 풍성케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너의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디도서 3:6을 보면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신다고 했습니
다.
이상의 구절들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어느 정도인가를 설명해 줍니다. 그
리고 하나님은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과 물질적인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
시는 분이심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그토록 풍성하신 분
이라는 사실이 감격스럽습니다. 우리는 이삭이 자기 아들에게 빈 복 속에서
하나님의 복이 어떤 것이며 그 복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1. 향기롭습니다.
27절을 보면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주신 밭의 향취로다"라고 했습
니다. 눈이 어두워진 이삭이 야곱의 몸을 어루만지며 아들의 체취를 맡아보
았습니다. 그리고나서 내 아들의 몸에서 나는 향취는 하나님이 복으로 주신
밭에서 나는 향취라고 한 것이빈다.
일찌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고 이삭이 그 땅
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땅의 상속권은 큰 아들인 에서가 차
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에서는 장라든지 상속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둘
째 아들인 야곱은 달랐습니다. 그의 꿈은 장자가 받는 축복과 재산을 상속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목소리를 흉내내고 아버지를 속인 후 축
복을 받게된 것입니다.
27절이 말하는 여호와의 주신 발의 향취라는 것은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흙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에서보다는 야곱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
시 말하면 하나님의 복을 향기롭게 인정하고 갈망하는 태도가 야곱에게 있
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에서는 세상 것들이 향기롭다고 여기는 사람이었고,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이 더 소중하고 향기롭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것들을 높이고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면서 하나님이 주신 일을 소홀히 한다
든지 하나님의 시간을 업신여긴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향기롭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들과 사명들은 향취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소중히 다르고 받들어야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
니다.
2. 기름지고 풍성합니다.
28절을 보면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
도주로 내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이슬이 내려야 땅이 기름지고 땅이 기름져야 곡식이 풍성하게 됩
니다. 그리고 곡식이 풍성해야 창고가 차고 포두주가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
다. 바로 그 축복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일생동안 가난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난
리가 났을 때도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셔서 편히 먹고 살 수 있
었습니다.
야곱이 젊은 날 빈손으로 하란에 들어갔습니다만 나이들어 고향으로 돌아
올 때는 갑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때문이었스니다.
이스라엘은 땅이 메마릅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
람이 수분을 안고 불어옵니다. 그 수분이 밤의 냉기와 만나면 많은 이슬이
되어 내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 이슬은 곡식이 자라고 영글게 해주는 것입
니다.
본래 이스라엘 땅은 지금처럼 건조하고 메마른 땅이 아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였습니다. 그런데 계속된 범죄와 타락으로 땅에 함께 저주
를 받아 건조한 땅이 된 것이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땅에도 이슬을 내리시고 풍성한 곡식이 영글게 해 주
셨습니다.
인공으로 주는 물만 먹고 자란 과일과 이슬을 맞고 자란 과일은 맛이 다르
다고 합니다. 이슬맞고 익은 과일이 더 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현재 내가 누리는 복이 크다고 해도 하나님의 이슬이 끊어지면
안됩니다.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와 계속적인 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
혜는 이슬처럼 기름지고 풍성합니다.
3. 영적입니다.
29절을 보면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내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내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삭이 애곱을 위해 빈 축복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
은 야곱 개인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받을 복을 예
언난 것입니다.
야곱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서 영광과 존귀를 받게될 것을 암
시적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돈을 물려주는 것은 3대 넘기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신적 유산이
나 신앙적 유산은 천년만년 지속되는 것입니다.
저는 영국 런던을 들를 때마다 일부러 틈을 내 대영박물관을 찾곤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찾는 전시관이 있습니다. 그곳은 미이라 전시관입니다. 관
리자의 말에 의하면 관람객 수가 제일 많은 곳이 미이라 전시관이라고 합니
다.
미이라 전시관은 BC 2천년경 사람들이 시체를 썩지 않도록 처리하여 그대
로 보존하고 있는 사체전시관입니다.
그러니까 전시관에 누워있는 시체들은 적어도 4000여년 전에 살던 사람들
입니다. 딱딱한 석고처럼 누워있는 그들, 어쩌면 4000여년 전 최고권력과
최고의 부를 누리며 살던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고 당대 최고의 미를 뽑내
던 미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시관에 누워있는 사체들은 흉물스럽고 소름끼치는 썩지
못하는 시체일 뿐입니다.
미이라를 들여다 볼 때마다 느끼는게 있습니다. 그것은 죽으면 썩어야 된
다는 것, 죽으면 똑같다는 것, 나도 죽으면 저 꼴이 되겠구나라는 것, 그래
서 사는 동안 뜻있고 가치있게 살아야겠다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온갖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
다.
물론 개인적으로 생활이 어렵고 사업이 힘들고 직장이 고달픈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하루 3천명씩 굶어죽고 콜레라로 죽어가는 르완다에 비
기면 우리는 영육간에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무리입니다.
에서는 좋은 조건 속에서 태어나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만 그
는 그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기회를 붙잎바고 하나님의 풍요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누리고 갈무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연 조건을 고루 갖춘 에덴동산을 제대로 갈무리못한 아담과 하와는 거기
서 쫓겨났습니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물려받은 우리도 금수가산 갈무리에 실패하고 금수강
산을 쓰게리 강산, 썩은 강산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그것이 자연이든, 돈이든, 건강이든, 명예든 그리고 신앙이건간에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풍요와 풍성을 제대로 갈무리하 못하
면 그것은 순식간에 남의 것이 되고마는 것이빈다.
독일 함부르크 대학의 바이얼린 교수였던 골드슈타인(Goldstein)은 소련으
로부터 망명온 음악인이었습니다. 그의 동생도 피아노 교수였습니다.
그는 위암으로 두번 수술을 받았는데 마취를 거절한 채 수술을 받았습니
다. 이유는 마취를 하게되면 암기해둔 악보가 망각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
다. 장기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 그는 자기 손으로 부고를
만들어 화제를 남겼습니다.
부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조화를 가져오지 마시오.
둘째 조화대신 부의금으로 해주시오.
셋째 부의금은 현금으로 해주시오.
넷째 모아진 부의금은 전액 장애자 시설을 위해 써주시오.
다섯째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은행구좌로 부의금을 송금해주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골드슈타인은 생전에 그가 연주했던 음악보다 더 멋지게 아름답게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했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누리며 소유하고 있는 복은 개인차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
이 작은 사람도 있고 , 보다 많은 사람도 있을 것이빈다.
문제는 마무리입니다.
내가 누리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이빈다.
내가 내 손이 쥐고 있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돈이든 직분이든 직장이든 정성껏 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
라는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풍요가 나의 풍요임을 감사합니다.
발행일 : 940904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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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예정에서 영화까지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롬 8:26-30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들이 미리 정하셨다는 교리를 [예정론] 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8:26-30과 에베소 1:3-14은 예정교리를 성경적으로 증언하
고 있습니다.
흔히 예정교리를 신학적으로 어렵게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나
예정교리란 하나님의 인격적 행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할 일과 앞으로의 계획을
미리 정합니다.
10년, 5년, 1년 그리고 하루동안 할 일을 계획하고 준비합니다.
예를들어 갑자기 자고난 다음날 러시아를 가겠다든지, 사무실에서 일하다
가 갑자기 일어나 미국을 갈 수는 없습니다. 미리 여행계획을 세우고 비행
기편을 예약해야 합니다.
결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길가다가 처음 만난 사람끼리 즉석에서 결혼
을 할 수는 없습니다. 만남과 교제, 확인과 점검을 거쳐서 사랑과 조건이
성립됐을 때 결혼하게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르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구원하시는
그 위대한 계획과 섭리를 미리 예정하시고 진행하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
한 사건인 것입니다.
왜 예정하시는가?
첫째 인간구원이 너무나 큰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시골교회에서 전 교인이 수양회를 가
졌습니다. 수양회가 계속되던 어느날 오후 더위를 식히기 위해 아이들과 젊
은이들이 강에서 수영을 하고 있습니다. 깊은 곳과 급류가 흐르는 곳은 들
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잠깐 사이 두 아이가 깊은 곳에 들어갔다
가 급류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언덕에서 지켜보고
있던 목사님이 옷을 입은 채로 뛰어들어 두 아이를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헤엄쳐 두 아이를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헤엄쳐 나오려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분은 장로회 신학대학을 졸업한 분이셨
기 때문에 금년 2월 장로회 신학대학교 동문회에서 그분을 장한 동문으로
표창하고 그 유족을 위로했습니다.
이 사건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분의 희생을 칭찬하고 평가하고 있습
니다.
두 아이를 구한 목사님의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작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 세계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
스도의 희생은 다음 몇가지로 요약됩니다.
(1)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이 밝히는대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수 있는 분, 하나님이
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고 낮춰 종이 되셨습니다.
(2)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종이 되시고 낮아지신 그 분은 한평생 남을 위해 사셨습니다. 자신의 소
유, 행복은 전혀 외면한 채 남을 위해 사셨습니다.
(3) 죽으셨습니다.
사람은 다 죽습니다. 그러나 자기 삶을 살다가 죽는 사람도 있고, 남을 위
해 살다가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위해 살다가 죽으셨습니
다.
(4)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희생은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죄를 속죄하는 희생은 예수님의 경우만
가능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저가 상하고 찔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고침을 받고 사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점에 우리네의 죽음과 다른 점입니다. 성경을 보면 [죄 값은 사
망] 이라고 했습니다. 죄인은 심판받고 지옥갑니다. 그러나 죄사함 받으면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
니다. 이토록 귀하고 큰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미리 작정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둘째, 사람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이 귀한가?
(1) 생긴 모습이 짐승보다 귀하게 생겼습니다.
동물 가운데 가장 사람과 유사한 것이 원숭이입니다. 그러나 원숭이 노는
꼴을 보면 진화론이 정떨어집니다. 사람은 의젓하고 잘 생겼습니다.
(2) 하는 일이 귀합니다.
희생, 가치창조, 문화창조, 교육, 역사발전 등 짐승은 흉내도 못냅니다.
(3) 창조가 귀합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천지만물과 짐승은 말씀으로,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
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그 코에다가 생기를
불어 넣으시매 성령에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까.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다는 뜻이며.
다. 영적 존재라는 뜻이며.
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습니다. 인간만 영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
간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깁니다. 만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것을 숭배하거나 섬긴다면 그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토록 귀하게 창조한 인간이 죄짓고 타락하고 멸망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
은 그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예정의 발전과정은 어떤 것인가, 로마서 8장과 에베소서 1장을 보면 그 단
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미리 정하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자세하게 언급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귀한 일일수록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부르십니다.
하나 하나, 한사람 한사람 부르십니다. 성경을 보면 부르신 이야기가 수없
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노아를 부르셨고, 모세를 부
르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실 대 사용하신 호칭이 있습니다.그것은 "내 아들,
내 종, 내 사랑하는 벗, 내 백성" 이라는 것 등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의정부에서 부모잃은 소년이 울고 있었습니다. 미
군이 그를 차에 싣고 부대로 들어가 돌보아 주었고 그 소년은 그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후 그 미군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그 소년을 데리고 갔고
자기 호적에 정식으로 올리면서 자기 이름인 Donald Smith를 따서 Donald
Lee Smith라고 했습니다. 그 소년은 미국에서 국민학교,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Chicago 에 있는 Illinois 주립대학을 졸업한 후 지금은 큰
Computer 회사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들로 인정해 주는 것, 죄사함 받았다고 인정해 주는 것, 죄없다고 인정
해 주는 것을 칭의(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라고 합니다.
넷째, 영화롭게 해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옥도 아닙니다. 이유는 천국은 일
본이나 미국보다 훨썬 더 좋기 때문이고, 지옥은 일본이나 미국이나 한국보
다 훨씬 더 뜨겁고 나쁜 곳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특성은
(1) 하나님이 준비한 나라.
(2) 영원한 나라.
(3) 세상의 나쁜 것들이 없는 나라.
(4)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사는 나라입니다.
다.그 영광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한문 속담에 [권력은 10년 못가고 꽃은 1일 동안 계속 피지 못한다]는 말
이 있습니다. 그 뜻은 권력, 영광,아름다움이라는 것들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리고 세상 영광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고 결정됩니다. 제아무리 집이 좋고 돈이 많
아도 원수와 함께 산다면 하루하루가 힘들고 지겨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조건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면 그야말로 그곳이 낙원처럼 될 것
입니다.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영화는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결론은 누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를 누리며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로마서 8:28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르리 영접하는 자 곧 그 이유를 부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가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발행일 : 940831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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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이 성에 유하라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눅 24:44-49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
건과 거기서 주신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본문 속에서 세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45절을 보면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했습니
다. 구약성경 도처에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
습니다. 특히 죽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기사도 여러군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말씀을 반신반의 하는가
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시고
깨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닫게 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45절을 보면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면 먼저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천사의 소리를
들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도 마음이 열려있지 않으면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튼튼하고 견고한 열쇠는 이스라엘,독일,미국 것들이라고 합니다. 아무나
함부로 열지 못하는 것이 견고한 열쇠입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간단한 쇠
꼬챙이 하나로 모든 열쇠를 다 열수 있다고 합니다. 자동차, 아파트, 사무
실, 심지어 금고까지도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 그 누구도 열지 못하는 자물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
간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쇠꼬챙이로도 열지 못하고 이스라엘 열쇠로도 열
리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3:20을 보면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노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이 문을 열고 들어올 만한 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
나 내가 나의 의지로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교회를 들락거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예수를 안믿고 지옥
가기로 작정하고 악을 행한다면 그는 지옥으로 굴러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말합니다.
남녀관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마음이 열려야 만나는 것도 가능하고 대
화도 가능하고 결혼도 가능한 것입니다. 제아무리 외적 조건이 화려하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맞질 않으면 결혼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경직되고 굳게 닫힌 제자들의 마음을 먼저 열고 그후에
성경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문이 닫힌 상태에서는
성경도, 설교도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며 졸고 있는 사람 성경을 읽으며 하품만 연속하는 사람, 천날
만날 듣고 읽어도 감동이 없는 사람은 마음이 그 무엇인가로 막혀있는 사람
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나 설교를 깨닫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나, 나와 너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을
모조리 차단해 버립니다. 마음 속에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도 않고 깨달음이 없게 됩니다. 내 영혼이 죽지않고 영생을 얻으려면 빨리
숨겨놓은 죄,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둘째, 교만입니다.
교만은 경험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 보다는 중학생이 더
아는 척합니다. 경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중학생 보다는 대학생이 더 아는
척 합니다. 다양한 경험과 지식의 축적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인들의 성향도 비슷하빈다. 초신자 보다는 오래된 사람이 교
만합니다. 직분 안가진 사람 보다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 더 교만합니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 보다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성경을 배웠거나,
귀담아 들은 사람들이 훨씬 더 교만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 안다. 이미 알고 있다. 이미 들었다는 잘못된 경험 때문
에 마음의 문을 닫고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큰 병입니다.
이 중병을 빨리 고쳐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가 "우리는 넉넉하다, 부족한 것이 없
다. 부유하다"면서 실상은 거지였던 것처럼 영적 가난뱅이가 될 것이기 때
문에 그 고질병을 빨리 고쳐야 합니다.
셋째, 잡념 때문입니다.
잡념이란 여러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에 생각
을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빈다. 몸은 교회에 앉아 있지만 그 마음은 동네방
네 동서남북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있는 사람, 찬송부르고 기도를 하고 설
교를 들어도 예수는 떠오르지 않고 다른 것들만 오락가락 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잡념에 빠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대학입시를 앞에 두고, 공부하는 학생이 잡념에 사로잡히면 공부가 되질
않습니다. 공부가 안되면 그 사람은 대학에 진학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잡념이 많으면 말씀은 제대로 듣질 않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강단을 바라보는 눈동자의 촛점이 흐려있기 마련입니다. 말
씀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그 영혼이 고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을 모셔드립시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 드립시다.
본문을 보면 성경은 무엇이 죄이며 누가 죄인인 것을 가그쳐 줍니다. 마음
을 열고 성경을 깨닫고 회개하면 영원한 생명이 내 것이 되는 것이빈다. 지
금 마음의 문을 엽시다.
2.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49절을 보면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
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능력은 위로부터 임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힘은 땅에서 생겨납니다. 음식을 잘 먹고 영양식을 한다든지,보약
을 먹고 강장제를 먹는다면 육체의 힘은 생겨납니다. 그리고 운동으로 체력
을 단련하면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영혼의 힘은 그런 것들로 생기는게 아닙니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영혼의 힘이 솟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힘은 위에서
임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받
으면 힘이 솟구칩니다. 삶의 새로운 활력이 솟아납니다. 세상사는 재미가있
고 일하는 맛이 달라집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찬송소리가 달라지고 기
도시간이 달라지고, 교회나오는 발걸음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위로부
터 임하는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그 능력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좋은 옷도 입지 않으면 내것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
도 먹지않으면 내것이 안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뜨겁고 강한 성령의 능력이 위로부터 임할 때 그 능력을
내가 입어야 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입는다]는 말
과 [입힌다]는 말은 다릅니다. 입는 것은 내가 입히는 것을 말하고 [입힌
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입혀 주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은 "위로부터 능력
을 입히울 때까지"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내가 입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입혀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사함 받는 것도,능력 입는 것도 내가 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능력을 입기위해 해야할 일이 있습니
다. 그것은,
3. 이 성에 유하라는 것입니다.
49절 끝을 보면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서 말하는 [이 성]은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대부분의 제자들은 거칠고 삭막한 수도 예
루살렘을 떠나 그들의 고향이었던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예루
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120명만 성령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을 듣고 순종한 사람만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줍니다.
첫째, 익숙하지 않더라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갈릴리지방 사람인 제자들로서는 예루살렘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바다를 벗하며 배의 노를 젓던 그들에게 딱딱한 돌집이며, 거리는 전혀 생
소한 곳입니다. 분위기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제도, 법, 관행을 따지는 예
루살렘 보다는 바닷바람이 속시원하게 부는 갈릴리 바다가 훨씬 더 친근하
고 익숙합니다.
더구나 예수없는 예루살렘에는 한시간도 머물고 싶지 않은 것이 그들의 마
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준미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4을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벗하며 살다가 교회를 처음 나왓다든지, 교회를 옮긴 사람들은 모
든게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낯설고 생소한 것들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교회를 떠나거나,예수를 떠나면 안됩니다. 낯이 설고 익숙하지 않더라
도 이 성에 유해야 합니다.
둘째, 싫더라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등학생 1천명을 대상으로 물었습니다. 공부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가? 1
천명중 128명만 재미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왜 공부를 하는가라는 물음에 제일 많은 대답은 거쳐야할 과정이니까, 대
학에 들어가야 하니까, 안하면 사람구실 못하니까 등 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경우도 그 진가를 알기전 까지는 멋도 맛도 모르기 마련입니
다. 그러나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은 주목해야 합니다.
싫더라도 안하면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공부하는 것, 일하는
것 등입니다.
예수믿고 능력받아 힘있게 사는 것은 귀찮고, 힘겹고, 싫더라도 해야합니
다. 싫더라도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싫더라도 이 성을 떠나면 안됩니다. 밥을 먹기 싫다고 해서 한달동안 밥을
먹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양실조로 굶어 죽고 말 것입니다.
싫더라도 교회 나오고, 저녁예배 나오고, 새벽에 나오고, 수요일에 나와야
그 영혼이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에 유하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의 의미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넓게는 예수의 품이
며, 교회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떠나지 말라 이 성에 유하라. 주님과 교회를 떠나지 맙시다.
그래야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힘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발행일 : 940828
분 류 : 설교
40
제 목 : 그를 힘입어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골 3:15-17
바울 서신을 보면 벗으라는 말과 입으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벗고 입
는 행위는 인간세계에서만 가능합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입고 벗는 행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털갈이나, 허물갈이는 있습니다만 사람처럼 옷을 벗거
나 입는 일은 없습니다.
창세기 3:21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가죽 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은 인간이 벗고 입
는 일에 관여하셨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은 벗어버리라"고 했고, "하
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에베소서 4:22-23에서 말씀했습니다.
성경이 지시하는 벗으라,입으라는 행위는 단순한 의상착용에 관한 교훈은
아닙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옷을 벗고 입는 패션의 발달은 인간만이 누려온 문화
특권이기 하지만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벗고 입는 문제는 영적 사건인 것입
니다.
다시 말하면 죄에 물든 영혼의 옷은 벗어 버리고 예수를 옷입듯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고, [그리스도를 힘입으라]고 한
것입니다.
1. 우리가 벗을 것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에베소서 4:22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
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옛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해산용어 가운데 [유산][난산][사산][순산] 이라는 있
습니다.
유산이란 임신도중 임산부가 받은 물리적, 외적 충격이나 정신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난산이란 해산과정이 순조롭지 못해 임산부가 태어나는 아기가 고통받는
것을 말합니다.
사산이란 문자 그대로 태어나는 아기가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순산은 고
통과 긴장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생명이 순조롭게 태어나 고고성을 터트리
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인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도 흡사합니다.
믿는 척하다가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산과 같습니다.
믿긴 믿는데 남을 괴롭히고,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자신도 고통스럽게
살면서 가까스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난산과 같
습니다.
가롯 유다 처럼 예수 따라다니고 직분도 받고 집회참석도 하는 사람이 있
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 속에 예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영혼이
멸망하고 맙니다. 이런 사람은 사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시험과 연단을 잘 견디고 그리스도와 교회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잘 참으면서 마침내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순산]한 사람인 것입니다.
교회다니고 교인행세 하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유산,난산,사산 신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벗어 버리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단순히 [벗으라]가 아닙니다.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 뜻은 벗는 것만으론 안된다는 것입니다. 벗
은 것을 멀리 버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생가치가 없기 때문에 폐
기처분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을 보면 그것은 썩어져가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썩어져 가
는 것은 도려내고 수술을 해야 새살이 돋아납니다. 썩어져 가는 것을 아깝
다든지 아쉽다고 해서 그대로 놔두면 생명이 위험하게 됩니다.
나의 옛사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욕심,방탕,시기, 질투,음란,도
적질하는 것,훼방, 분쟁, 고집 등 이루 헤아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빨리 벗어버려야 합니다.
가롯유다도 옷벗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벗질 않고 고집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감했습니다.
골로새서 3:5을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 부정,
사욕, 정욕, 탐심이라"고 했고 3:6을 보면 "이런 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걸치고 있던 누더기를 빨리 벗어 버립시다. 누더기에 묻어있는
세균이 내 몸을 온통 썬게 만들기 전에 지금 벗어 던집시다.
2.무엇을 입어야 합니까?
에베소서 4:24에서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고, 골로새서3:17에서는 "그
를 힘으라"고 했습니다.
낡고 더러운 옷을 훌훌 벗고나면 알몸이 됩니다.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
는 것은 나체주의자나 정신착란증 환자일 것입니다.
벗었으면 다른 것을 입어야 합니다. 벗어 놓은 것을 다시 입으면 안됩니
다. 바울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를 힘읍으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고약한 마음을 고쳐보기 위해 어느날 속옷,와이셔츠,
넥타이, 벧트, 양복, 양말까지 새 것으로 갈아입고 출근을 했습니다. 기분
도 상쾌했고 발걸음도 가벼웠습니다. 그리고 그 기분이라면 화를 내거나 신
경질을 부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가
100만원을 빌려간 뒤 석달째 종적을 감추었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침에
갈아입고 , 나온 새 옷 때문에 그 사람의 감정이 흔들리지 않을까요?
옷말 갈아입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한 새 사람이란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예수의 소유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형의학의 발달로 신체의 모든 부분의 성형이 가능해졌습니다. 쌓꺼풀수
술도 가능하고, 코도 높였다 낮추었다 하는 것이 가능해 졌고, 가슴 크기도
마음대로 조정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형으로 안되는 것도 많습니다. 작은 키를 10CM정도 크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은 성형의학으로 교정하지 못하빈다.
인간의 영혼을 교정하고 바로 잡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국가가 예수를 힘입으면 선진국가가 됩니다.
교회가 예수를 힘입으면 은혜로운 교회가 됩니다.
가정이 예수를 힘입으면 평안한 가정이 됩니다.
중국에는 기공술이라는 치료법이 있습니다. 220보트의 전기를 자기몸에 흐
르게 한 뒤 그 전류가 흐르고 있는 손으로 다른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입니
다. 전류가 흐르고 있는 손으로 전구를 잡으면 그 전구에 불이 들어옵니다.
전류가 흐르는 손으로 제 손과 목덜미를 만질 때마다 강한 전기가 감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힙입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힘을 내가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전류가 내 몸에 흐르는 것처럼 그리고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예수님의 힘을
내가 받고 예수의 힘을 옷갈아입듯 입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힘이 없지만 예수를 힙입으면 나도 힘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빈
다. 나는 쓸모가 없지만 예수를 옷입으면 쓸모있고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망서리고 미룰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누더기는 벗어 버리고 예수를
힘입어야 합니다.
3. 그를 힘입고 난 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됩니다(15).
예수를 힘입고 새 사람이 되면 평강이 우리 삶 속에 임합니다. 그리고 그
평강은 세상에서 얻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세상 평강은 기분이나 조건에
좌우됩니다. 그 길이도 짤막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
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기분이나 조건이 좌위되지 못합니다. 그
길이 또한 영원하빈다. 그리고 사람도 마귀도 빼앗아 가지 못하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대통령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
어느 날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으로 재직할 동안 보람도
있었고 일도 많았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일들도 많았다.그러나 고향으로 돌
아와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진정한 평안과 위
로였다"고 평강은 예수 믿는 사람이 받는 축복 가운데 가장 큰 선물입니다.
2) 감사하게 됩니다(15).
일반 회사와 교회의 다른 점이 여러가지 입니다만 그 가운데 하나가 용어
입니다. 교회는 은혜, 감사, 사랑, 믿음 등 세상에서 흔치 않은 용어를 많
이 사용하곤 합니다. 특히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용어입니다.
정말로 거듭나고 예수를 힘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감사가 차고 넘쳐야 합
니다.
감사하는 방법은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둘째는 말로 표현해야 합니다.
셋째는 물질로 표시해야 합니다.
3) 신령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삶은 16-17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는 말씀이 풍성합니다.다시 말하면 말씀이 넉넉하기 때문에 그 영혼
이 배고프지 않다는 것입니다.배고프면 시끄럽고 불평이 많지만 배가 부르
면 온갖 불평이 잠잠해지고 열심히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새
활이 짜증스럽고 교회생활이 불평스런 사람은 [내가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프구나]라고 진단하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둘째는 신령한 노래를 부릅니다. 찬송은 감사, 고백, 경배를 한데 묶어 드
리는 곡조붙은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중병을 앓고 있거나 탈진상태에 빠진
사람은 소리가 작습니다.
찬송소리가 작은 사람, 찬송부르며 딴 잡념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영적 건
강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를 힘입으면 찬송의 크기가 달라지고 태도가 달
라지게 됩니다.
셋째는 모든 일에 예수의 이르으로 합니다. 기도도 예수 이름으로 찬송도
예수님께, 봉사도 예수이름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옷입으면 나는 감
춰지고 예수가 드러납니다. 더럽고 추한 내 모습은 예수로 감싸지고 예수가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예수 이름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입은 바 된 에수의 그옷과 힘을 다시 벗어던져선 안된다
는 것입니다.
시편 31:10에서 시인은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인하여 약하며 나의 뼈
가 쇠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힘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블레셋 여
자 들릴라의 유혹에 빠져 주색에 몸과 영혼을 망쳤습니다. 그의 힘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리고 개처럼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 40:31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힘있는 자는 살아남고, 힘없는 자는 마귀 밥
이 될 것입니다.
예수를 힘입고 새 사람이 되면 영적인 세계에서 당당한 승자가 될 것입니
다. 예수를 힘입고 승리합시다.
발행일 : 940821
분 류 : 설교
41
제 목 : 해방된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롬 8:1-2
로마서 8:1-2은 바울의 해방선언문입니다. 특히 2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
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
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본에는 "나를 해방하였다"로 되어 있습니다.
해방은 한마디로 자유로워 지는 것입니다.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이고, 정신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경제적 속박으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해방입니다.
다시 말하면 억압과 속박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사는 것을 해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네 이념투쟁을 걸핏하면 해방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남조선 인민을 해방시킨다며 6.25 전쟁을 일으켰고, 월남을 해방시킨다면
오랜 세월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해방은 피를 부르고 가난을 자초한 해방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된 날입니다. 그러
니까 해방된지 어언 반시기가 지난 셈입니다. 김일성 사망이후 중단된 남.
북대화,제네바에서 열린 미국과 북한의 핵대화,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외교
정상화를 개시하게 될 것이라는 것 등이 맞물린 정세 속에서 8월 15일 해방
기념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저는 해방기념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몇가지 감사의 조건이 생각났습니다.
첫째, 해방된 주권국가가 되게 하신 것.
둘째, 잘 사는 나라가 되게 하신 것.
셋째, 자유롭게 살게 해 주신 것.
넷째, 천만 넘는 기독교인을 주신 것.
다섯째, 전쟁을 막아 주신 것.
여섯째, 가뭄과 태풍을 막아 주신 것 등 감사의 조건이 너무나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면서 참된 해방이란
어떤 것이며 우리는 어떤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졌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8:2 끝을 보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니라"고 했습니다. 위
에서 말씀드린대로 어떤 다른 사본에는 "나를 해방하였다"로 되어 있습니
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와 너" 우리 모두를 죄와 죽음에서 자유
롭게 해주셨습니다. 죄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죄값으로 죽게 됩니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죄를 없애거나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짐승을 사람 대신 잡아 제사드림으로 죄를 사함받았습니
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죄를 사해 주
셨고 누구든지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
는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죄와 죽음에서 나를 해방하였다"고 했습니
다.
출애굽기 21장을 보면 6년 동안 주인을 섬기던 종이 7년 되는 해에는 아무
조건없이 주인을 떠나 자유롭게 되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안시년 제도
라고 합니다.
레위기 25장을 보면 안식년을 일곱번 지나서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합니다. 희년이 되면 땅도 쉬고 종도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것을
희년제도라고 하빈다.
종이 제멋대로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그 법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와 죽음의 종으로부터 해방받는 것도 내멋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밝힌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 자
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법으
로 내가 자유를 얻고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내멋대로 사는 것은 육신의 생각이지 성령의 생각은 아닙
니다. 8:5를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
을 생각한다"고 했고 8:6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
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고, 13절을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
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르고 육신에 속한 일을 하고 살면서 생명을 얻는 것은 불
가능합니다. 그러나 11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
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이상의 말씀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라 제멋대로 죄짓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를 믿고 성령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고 살면 죄와 죽음에서 해방받고 15절에
서 밝힌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
다.
결단은 내가 해야 합니다. 죄의 종노릇 하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릇 하다가 영생을 얻을 것인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맺고 살면
서 행복하고 잘 살수가 있겠습니까? 죄와 죽음에서 해방받으려면 예수깨로
돌아와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감동을 거역하면 안됩니다. 죄
에서 자유함을 받은 감격을 안고 살아 갑시다.
2.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법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표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법
을 시행령과 금령으로 구분됩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 무엇을 어떻게 하라가
시행령입니다. 금령이란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 하면 어떤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시행령은 적극적인 법이고, 금령은 소극적인 법입니다.율법 속에
는 이상의 두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법은 없을수록 좋습니다. 이유는 다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율법조항이 너무 많고 세분화 되면서 법을 다 지키기
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법은 있는데 지키지 못하면 사람들은 거짓말을 시작
하게 되고 위선으로 자기를 감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주일에 반드시 한번씩 금식을 해야 하고, 구제를 해야 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법을 지키지 못하는 어떤 종
교지도자가 있습니다. 만일 그가 그 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공개되면 그
의 지도력이나 출세에 지장이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법을 지키는
양 하게 되고, 자기를 위선의 천으로 포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
다.
바울은 선언합니다. "율법의 의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고, 로마서 7:7을
보면 "율법이 없이는 죄를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법이 죄를 사하
지는 못하빈다.
율법은 내가 죄인임을 알게 해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를 죄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인 것입니다.
미국에서 겪은 일입니다.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이 저를 데려가기 위해 호
텔 앞에 잠깐 차를 세워놓고 제 방에 전화를 걸고 있는 사이 교통순경이 기
다리고 있었습니다. 불법주차를 했다는 것입니다. 차주인이 교통순경에게
나는 교회 목사인데 오늘 아침 설교할 목사님을 모시러 왔다가 잠깐 차를세
운 것이라며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교통순경은 "목사
님이 법을 어기면 되느냐"면서 티켓을 끊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
도 저도 할말이 없었습니다. 얼마짜리나겨 했더니 20불 짜리라고 했습니다.
언젠가 하와이에서 주일 아침에 불법주차를 했습니다. 시간은 제가 불법주
차를 했습니다. 시간은 제가 내려오는 시간을 합해 5분 정도였습니다.교통
순경에게 한국에서 온 목사님을 모시러 왔다가 잠깐 주차를 했노라고 했더
니 자기도 기독교인이라며 좋은 하루 되라고 인사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벌금 티켓도 떼지 않았습니다.
간단한 두 사건을 놓고 생각해 보십시다.불법주차는 벌금을 내야 한다는
것은 도로교통법입니다. 그러나 그 법을 집행하는 교통순경의 재량에 따라
법집행의 방법이나 결과는 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방법이나 결과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법은 좋고 나쁜 것과 바른 것과 바르지 못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만, 그 법
은 내 죄를 도말하거나 속죄해 주진 못합니다.
그러나 에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은 내가 비록 죄를 범했더라도 그 죄르
리 용서하시고 새사람이 되게 해주십니다. 이것을 바울은 율법으로부터 해
방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에서 해방되고, 죽음에서 해방되고,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3. 마귀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죄를 만들어 냅니다. 악을 만들고 이 세상이 온통 죄로
썩어 냄새가 나게 합니다.
마귀의 별명 가운데 바알세불이라는게 있습니다. 그 뜻은 [똥무더기의 주
인]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신선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을 싫어합니다.
마귀는 자신의 세력확장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합니다. 전쟁,
분열, 술수,사상, 음란,퇴폐,불신앙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합
니다.
그리고 한번 마귀에게 사로 잡히면 내 힘으로 빠져 나오는 것이 불가능합
니다. 속박하는 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0:2를 보면 마귀를 옛뱀이라고 했습니다.
뱀의 여러가지 특성 가운데 공격목표를 한번 감으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그만큼 휘감는 힘이 강합니다.
마귀에게 잡히면 해방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가능합니다. 예수는 마귀의 머리를 깨뜨렸기 때문
입니다. 뱀은 머리에 치명타를 입으면 전신의 힘이 풀린다고 합니다.
창세기 3:15을 보면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의 머리에 치명타를 입히게 된다는 예언입
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리
고 그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부터 마귀는 우리 곁을 떠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포기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자유,죽음으로부터 자유, 율법으로부터 자유,마귀로부터 자유,이
사람들을 바울은 해방된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바울의 경고를 주목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기 서
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유는 그 자체로서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가 내 것이 되었다는
것은 감격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잘못쓰면 무질서, 혼란, 방종, 타락, 자멸의 무기가 됩
니다. 비록 자유를 얻고 해방받는 사람이라도 날마다 그 자유가 방종이 되
지 않도록 자기와 싸워야 합니다.
바울은 자유인이었습니다. 단 예수를 위해 그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위하여 나의 자유와 해방을 써야 합니다.나는 하나님의 자
녀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맬 수가 없습니다.
발행일 : 940814
분 류 : 설교
42
제 목 : 선택받은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합동
구 절 : 골 3:12-14
본문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사상은 구약과 신약 전편에 흐르고 있는 하나의 일관
된 사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해 하
시고자 하는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중심으로 다음의
사실들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1. 왜 선택하셨는가
1) 수가 작기 때문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그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작기 때
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효가 적다는 것은 숫자가 적다는 뜻도 있고 약소민족이라
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크기가 작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약한 것은 아닙니다. 재래식 폭탄은
큽니다만 핵폭탄은 작습니다. 그러나 그 위력은 작은 것이 더 큽니다. 반도
체의 경우도 작을수록 그 가치와 효용성이 높아집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들을 선택하십니다. 큰 사람은 오만합니다. 큰 나라도 오
만합니다. 그러나 작은 자들은 자기 실체를 알기 때문에 오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주변에 흩어져 있는 폐품들을 모아 짜맞추는 예술행위가 있습
니다. 일명 전위예술이라고도 합니다만 쓸모없이 버려진 것들을 모아 하나
의 조각작품을 만드는 것을 어셈블리지(aSSEMBLAGE)라고 부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여기저기 쓸모없이 버려진 폐품조각과 같은 존재들이
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주워모아 쓸모있는 작품을 만드시고 거기다가
존재의 의미까지 부여해 주신 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가르쳐 주
고 있습니다.
피카소의 작품 가운데 [황소의 머리]라는 조각작품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
전거의 손잡이와 자석으로 만든 것입니다. 만일 무명의 작가가 자전거 손잡
이와 좌석을 모아놓고 [황소머리]라는 작품명을 부쳤다면 놀림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이
라고 했습니다. 작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선택하셨다는 것은 선택받은
우리에겐 감격적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은 찬송케 하기위해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들 가운데 의미없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
늘의 해와 달과 별들, 땅과 바다와 거기있는 모든 생명체들, 풀 한포기에서
하루살이까지 필요없는 것은 없습니다. 인체에 돋아난 솜털까지도 필요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호주 어느 목장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독수리가 양떼를 채가는 바
람에 목장주가 화가나서 산탄총을 쏘아 독소리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랬더
니 그 후로는 양떼들이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원인을 알아
봤더니 독수리가 채간 양은 거의가 다 병든 양들이더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 이야기기 속에서 두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병든 양을 독수리가 채간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양도 독소리도 존
재와 필요가치가 다로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쓸모없는 폐품같은 나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을 찬송케 하려
는 것이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악기는 다 제 소리가 있습니다. 관악기는 관을 통해 소리를 내고, 현
악기는 현을 통해 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타악기는 두드려서 소리를 냅니
다. 모든 악기는 크기와 생김을 따라 소리가 각각 다릅니다. 그리고 다른
소리가 한데 어우려져 화음을 이룰 때 음악예술의 극치가 이루어지는 것입
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악기입니다. 각각 제소리를 내면 됩니다.
큰 소리도 있고 작은 소리도 있습니다. 높은 소리도 있고 낮은 소리도 있습
니다. 강한 소리가 있고 약한 소리도 있습니다.
모두가 다 필요한 소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북한은 하루 아침에 김일성 찬가를 김정일 찬가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찬송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찬송을 위해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3) 사랑하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다.
물론 이 사랑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을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
습니다.
일시적인 만남은 사랑이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그 만남의 시간이 길수록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이 차 한잔을 나누는데는 사라
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친구가 되려한다든지 부부가 되어 일생을 함께 살기로 한다면 반드
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선택하셨습
니다.
사랑은 늘 함께 가까이 하고 싶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늘 까이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하나님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기도도 찬송도, 감사도
늘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4)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결정적 이유는 구원입니다. 죄에서 건져내시고 영생을 선
물로 주시기 위해 버려진 폐품같은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모 일간지 실렸던 기사가 생각납니다. 로스앤젤스에 [리언 그레이브스]라
는 흑인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1981년 어느날 그 노인이 살고 있는 아파
트 옆방에서 사흘간이나 아기 우는 소리가 그치지 않아 들어가 보았더니 출
생증명서 한장과 포대기에 쌓인 아기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고아원에 보낼
생을 했으나 그 아기가 천사철머 보여 기르기로 작정하고 지금까지 키웠는
데 그 아이가 금년 13살난 [정로이]이군 이라는 기사였습니다. 흑인 노인
[그레이브스]씨가 아니었더라면 그 아이는 울다가 질식해서 죽었을지 모릅
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죄
에서 건져내지 않으셨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미 내 영혼은
죄에 눌려 죽었을 것이고 천하의 개망나니로 살다가 제명에 살지도 못한채
지옥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웬 사랑입니까?웬 축복입니까? 왜 이토록 날 사랑하
셨습니까? 복음성가 가사가 생각납니다.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갈보리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예수님 갈보리 가야했네, 왜 날 사랑하나. " 아멘.
2. 선택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선택받은 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선택하신 후 아브라함의 후손을 그곳에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 가나안은 지금의 성지 이스라엘 땅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
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고 그 아들 이삭도 살기 편한 그랄로 이민갔다
가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애굽에서 430년간 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의 대장정 끝에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고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
역시 모압 땅으로 이민 갔다가 가나안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지금도 유대인은 그 전통 그대로 성지를 지키며 그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주 넓은 땅을 다 빼앗긴 것처럼 저들도 넓은 땅 다 빼앗기고 지금
은 비록 강원도 크기의 땅을 차지하고 있지만 세계 민족 가운데 자기네 땅
을 성지(HOLY LAND)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유대인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의 경우는 어느 곳이 택한 곳입니까?
첫째는 주님의 품입니다.
그곳을 떠나면 안됩니다. 시인은 "내가 주의 날개 그늘아래 피하리이다"라
고 노래했습니다. 주님이 품은 나의 영원한 처소이며 성지입니다.주님의 품
밖으로 벗어나면 죽게 됩니다.
둘째 교회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교회를 버리고 등지고 외면하면 안됩니다. 구약의 성전은
오늘의 교회입니다. 유대민족이 성전중심으로 살았던 것처럼 우리는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간혹 교회가 병들었다느니 썩었다느니 라며 공격하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교회자체가 병든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 모인 사람이 병든 것입
니다. 그리고 설사 교회가 병들었다 손치더라도 버리면 안됩니다.
병원만큼 병자가 많고 병균이 많은 곳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병원을 외
면한다면 병을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충신교회 교인은 충신교회가 하나님이 택해주신 성소인 것을 믿으시기 바
랍니다.
충신교회 교인들은 다음 몇가지를 믿어야 합니다.
첫째 충신교회가 주님이 계신다.
둘째 충신교회가 제일이다.
셋째 충신교사가 내 교회다.
넷째 충신교회를 끝까지 섬긴다.
2) 택하신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법을 지키고 살아야
했습니다만 오늘 우리에게는 사랑의 법인 성경을 주셨습니다 택한 백성은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법을 민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잘잘못을 가리고 결정하는 법을 형법이라고 합니다. 입법부인 국회
는 법을 만들고 사법부는 그 법을 진행합니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정하신 법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택하신 자들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을 옷입고 협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
하신 것 같이 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 하라"고 했습니다. 우린 이
구절 속에서 택함받은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부관계를 예로 들겠습니다. 부부는 일종의 계약관계입니다. 계약조건을
따지면 살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법
아래 있으면 문제될게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참으로 귀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
다. 율법은 정죄가 있습니다만 사랑은 정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
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3) 택하신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한 남자가 남과 북 경계선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군이나 북군을 다 지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이 가열되자 그는
고민끝에 바지는 남군이 입는 것을 입고, 저고리는 북군의 것을 입기로 했
습니다. 그렇게 하면 남군이나 북군이 자기를 살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
다. 전쟁이 치열하던 어느날 그는 밖에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북군은 그의
남군바지를 향해 초을 쏘아대고 남군은 그의 북군 저고리를 향해 총을 쏘아
대더라는 것입니다. 많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택함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세가지라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이 그것을 설명합니다. 서로 사랑
합시다. 화목하고 위해주고 도우며 삽시다.
둘째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 앞에 서는 시간까지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해야 합니다. 때
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해야 합니다.
셋째는 교회를 받드는 일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몸을 반드는 것은 주님을 받드는 것입니다. 교회
를 섬기고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들이 할 일인
것입니다.
택함받은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택한 곳에서 살고 택한 법을 지키
고 택한 일을 하는 사람은 이 지상에서 가장 멋지고 복된 사람들입니다.
택함받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발행일 : 940807
분 류 : 설교
43
제 목 : 피조물의 탄식소리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합동
구 절 : 롬 8:22-25
KBS 방송의 모 기상캐스터는 계속된 가뭄을 가리켜 "과거의 기상기록을 휴
지로 만들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기상이변이라는 것입니다.
전같으면 일본 규슈지방에서 이동 중인 태풍이 동해안으로 이동 중 앞으로
3일이면 제주도와 동해안을 강타할 것이라는 기상예보가 있게 되면 제발 태
풍이 멀리 달아나 주기를 바라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그런에 이번의 경우는 태풍을 학수고대 했습니다. 6천여개의 저수지가 바
닥을 드러냈고, 선풍기 에어컨은 3년전 재고가지 다 팔렸다고 합니다.
대청호에서는 수십만 마리의 빙어떼가 때죽음을 당했고, 농작물은 선 채로
메말라 죽어 버렸습니다. 닭장에선 닭들이 늘어진 채 죽었고, 길바닥엔 더
위를 견디지 못한 자들이 수십대씩 시동이 꺼진 채 서있었습니다.
금년 여름 더위는 한국만의 경우는 아니었습니다.
뉴욕은 50년만에 찾아온 더위로 찜통을 이뤘고 네바다 주는 섭씨 52도를
기록하는가 하면 캘리포니아 남부지역에서는 얼음공장에 얼음이 떨어질 정
도였습니다.
중국의 북경, 상해, 연변, 도문 역시 불볕 더위로 찜통을 이뤘고, 홍콩이
나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피조물의 탄식이라는 본문이 생각났습니
다. 사람도 신음하고, 짐승도 신음하고 초목도 신음하고 있는 것 바로 이것
이 피조물의 탄식소리인 것입니다.
1. 왜 피조물이 탄식하게 되었을까요.
22절을 보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
리가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함께 다 탄식하며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피조물인 인간이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
다.주목할 것은 하루하루 창조사역이 끝날 때마다 "여호와 보시기에 좋았더
라"는 말씀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을 보면 에덴동산을 만드신 후 아담과 하와의 주거지로
주신 기사가 나옵니다.
2:9를 보면 '보시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다"고 했고
2:10을 보면 강이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 발원한 비손강, 하윌라강, 기혼강,
핫데겔강이 굽이쳐 흘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각종 지하자원이 풍성하게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3:18을 보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컹퀴를 낼 것이라"고 했습니
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아름다운 자연이 3장으로 넘어오면서 박토로 변해
버립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창세기 3:19입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
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긴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자연이
파괴되기 시작했고, 인간 자신도 죽음을 겪는 비극적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피조물의 탄식소리는 인간의 탄식소리이며, 인간의 탄식소리는
그가 저지른 죄값이라는 것입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이 썩어 악취가 나고, 깊은 산 개울가 할 것
없이 쓰레기로 가득차 돗자리 펴고 앉을 자리가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강이 저절로 썩고 개울이 저혼자 더러워집니까? 아닙니다. 사람이 먼저
썩고 그들이 버린 썩은 것들이 산과 강과 개천과 땅을 썩게 만들고 있는 것
입니다.
저는 7월 21일 중국 도문시를 방문했습니다.도문시는 두만강을 경계로 함
경도와 인접한 국경도시입니다. 도문시 직원들의 안내로 국경 초소에 올라
가 북녁땅과 두만강을 바라보았습니다. 걸어서 10분정도면 건너 갈 수 있는
다리가 있었습니다만 아무나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다리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두만강물 역시 탁류였습니다. 그리고 김정구씨가 노래한 노젓
는 뱃사공도 거기엔 없었습니다.
두만강물이 오염되는 것은 아오지 탄광에서 쏟아져 내리는 폐기물과 폐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 그리고 그 심성이 타락한 사람들이 사는 곳일수록 자연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버리는 라면 비닐봉지는 땅속에서 50년 동안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무 젓가락은 2560년이 되어도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버리는 건전지들은 이땅을 수은중독증에 걸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상이변도 따져보면 자업자득입니다.
겨울이면 시베리아에서 형성된 차고 건조한 공기가 찾아오고 가을이면 동
북쪽의 오호츠크해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 때문에 청명한 가을이 이뤄집
니다.
봄이면 중국 양자강에서 훈풍이 불어오고,
여름이면 북태평양으로부터 무더운 바람이 불어옴으로 4계절의 순환이 이
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계절의 순환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습
니다.
그 원인 역시 사람입니다.
열대림 남벌로 인한 사막화 현상, 오존층의 파괴, 대기오염, 바닷물 온도
의 상승 등이 주원인인데 그 원인 제공자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린 흔히 선진국으리 GNP로 측정합니다. GNP가 높은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선진국은 대부분 자연보존이 잘된 나라들입니다. 그 나라
들은 강이나 개천에서 비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쓰레기를 버리지 않습니
다. 물고기도 싹쓸이 해서 잡지 않습니다. 살인적 매연을 내뿜는 차를 몰고
다니지 않습니다.
본문 22절 말씀대로 피조물이 함께 고통하고 탄식하는 것은 피조물 가운데
으뜸으로 창조한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오존병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오존병이라 자동차 매연에서 다량
배출되는 질소화합물이 강한 햇볕이 내리쬐면 자외선과 반응해 새로운 오염
물질을 생성시킨다는 것입니다.
오존병은 식물을 말라 죽게하고 눈병, 피부병,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며 플
라크톤도 소멸시킨다고 합니다.
미국의 [샌드라 포스텔 월드위치 연구소]의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70년대
세계가 오일쇼크로 흔들렸던 것처럼 90년대에는 물부족 현상이 일어날 것이
라고 했습니다.
물부족 현상은 중동평화를 깨드릴 것이며, 세계식량 안보를 위협할 것이
며, 산업시설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물부족 현상은 자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활
동에 의해서 초래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원인은 사람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이 죄와 타락
입니다. 그 문제가 해결될 때 탄식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2. 해결방법은 무엇입니까?
23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몸이 구속받은 것이라"고 했
고, 24절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고 했습니다. 해결의
방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을 받
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선진국은 자연환경 보존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자
연을 그대로 보존하는 나라들은 대부분이 기독교 국가들입니다. 미국,영국,
스코틀랜드,스웨덴,스위스, 독일,덴마크,노르웨이,호주,뉴질랜드 등.
사람이 살면서도 자연보존이 가능한 나라들은 대부분 보존합니까? 그것은
가진 나라들입니다.
왜 기독교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을 사랑하고 보존합니까? 그것은 하
나님의 맡겨주신 선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8을 보면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
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과 피조물들을 제대로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
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과 피조물들을 제대로 관리하고 다스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함부로 관리할 수가 없는 것
입니다.
자연이 바뀌려면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담배 꽁초나, 씹던 껌, 코를 훔친 휴지를 길바닥에 함부로 버리지 않는 시
민정신이 확립됐을 때 민주주의나 민주화는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 저 개인
의 소신입니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덴마크는 바이킹들이 지배하던 나라들입니다. 바이킹
은 해적들입니다. 바다를 주름잡고 약탈을 일삼으며 폭력과 야만적 행동을
일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주후 1080년 기독교의 복음을 받
아 들였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저들의 마음을 순화시켰고 문화민족으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행동과 가치와 삶이 변했습니다. 그리
고 일등국가가 되었고 일등국민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유교나 불교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민족계몽이나 선진도약에 끼친
영향이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전래된 역사는 짧습니다만 이 민족 역사와 국가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앞으로 더욱 기독교의 할 일은 많고 무겁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는 모든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그치게 합니
다. 그리고 찬송 소리로 바꾸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탄식소
리를 그치게 해주십니다.
첫째 개인의 탄식소리를 그치개 해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신음하던 사람들과 슬피울던 사람들과 가슴에 맺힌 응어리 때
문에 고통받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고침받고 문제를 해결한 이야
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죄로 죽어가던 영혼들이 죄사함받고 새사람된 이야기가 수도
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둘째, 가정의 탄식소리를 그치게 해주십니다.
부부관계 때문에 자녀문제 때문에, 동기간의 갈등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탄식하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그 탄식소리가 그치려면 예수 그리스
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 모신 가정은 탄식소리가 노랫소리로 바뀝니다.
셋째, 자연의 탄식소리를 그치게 해주십니다.
제아무리 최첨단 과학의 힘이 위대하다고 해도 그 힘만으로 자연을 정복
하거나 통치하진 못합니다. 인간의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나고 새롭
게 되기만 한다면 그래서 우리 모두가 자연의 청지기들이 된다면 병들고 죽
어가는 자연을 다시 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넷째 역사의 탄식소리를 그치게 해줍니다.
찬송가 79장 가사가 생각납니다.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
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만유 주 여호와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에 난
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데 없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는 탄식하는 역사가 아닙니다.
러시아는 70년 동안 하나님 몰아내고 공산주의만으로 잘 살아 본다며 버티
다가 망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도 하나님 없애고 자기가 신노릇하며 지상낙원 만든다고 떵
떵거리다가 북한을 저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은 죽었습니다.
역사의 신음소리는 하나님없는 신음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민족 그 역사가
하나님을 영접하면 탄식소리가 그치게 됩니다.
지금도 탄식하는 사람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크신 이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탄식소리가 기도와 찬송과 감사소리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발행일 : 940731
분 류 : 설교
43
제 목 :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합동
구 절 : 고전 2:12-16
마음은 생각을 만들어 내고 생각은 행동을 결정하고 동기를 부여합니다.
사람은 마음의 생각을 따라 행동하게 되기 때문에 그가 어떤 마음을 품느냐
에 따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가 좌우됩니다.
바울은 본문 16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했습니
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신령한 마음 즉 성령
께서 주시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 마음을 가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본문이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12절을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으
리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는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평생을 살아가느라면 실로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은혜를 입고 살
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모든 사람이 다 기억하거나 갚으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은혜나 도움을 잊고 사는 사람도 있고 기억은 하지만 갚지 못하는 사람
도 있습니다. 그리고 갚기는 커녕 삶은 산수화처럼 곱고 아름답습니다. 하
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은 그 어느 아름다움에서
도 비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로서 온 영인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
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록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낱낱이 기억
하고 감격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시대는 하나님의 은혜는 물론 부모, 형제, 이웃들
에게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사는 불감증 중병에 걸려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용어가 점차 퇴화해 가고 있습니다.
정신분석 학자들은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표출되는 집단심리 현상 가운데
[집단 히스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 전체
가 히스테리 환자처럼 발작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경기침체, 계속되는 무더위,부정적인 사회현상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다
보면 우리들 역시 집단 히스테리에 걸릴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원아들에게 역할극을 시키고 그 아이들의 교육환경이나
가정환경을 연구확인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를 한쌍
으로 묶어 부부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사이좋고 오손 도손 얘기를 나누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앓는 소리를 내며
누워있는 부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고 싸움을 벌리는 부부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의 역할은 가정에서 본 그대로를 연출한 것입니다. 오손도손 사
이좋게 사는 것을 지켜보는 아이들은 그 모습을 흉내냈습니다.
부모가 입원해 있거나 병을 앓고 있는 집의 아이들은 그 흉내를 낸 것입니
다. 그런가 하면 이틀이 멀다하고 싸우고 소리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는가
하면 히스테리 발작을 일삼는 부모 밑에 있는 아이들은 역할극도 그런 것
을 해낼 수 밖에 없고, 그림을 그려도 그런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는 것입
니다.
우리가 영적 불감증을 고치고 집단적 히스테리를 치료하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신령한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
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
느니라"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진행된 월드컴 축구경기를 보려면 미국엘 가야 합니다. 그러나
텔레비젼 중계를 통해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늘의 별을 눈으로 관찰하고 세는 것은 어렵습다만 천체를 보는 망원경이
나 첨단 장비로 볼 수 있습니다.
육안으로 내장이나 위장을 들여다 볼 수는 없습다만 내시경으로는 샅샅이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신령한 세계 역시 육신의 눈이나,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볼 수도 없고, 이
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라고 했고, "신령한 일로 분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작은 먼지만 들어가도 쑤시고 아픈 눈으로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변덕스런 인간의 경험으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가 없
습니다. 돋보기 안경을 껴도 글씨를 보지 못하는 눈으로 영원하시고 영존하
시고 신령하신 하나님의 보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눈으로 봅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신령한 지식으로
분별합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을 보면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별한다"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세상 지식과 신령한 지식이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알곡과 가라지처럼 전혀 다른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 밀밭에 나가보면 밀과 가라지가 동시에 섞여 자라고 있습
니다 .그런데 색깔이나,크기나,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가라지를 골라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추수때가 되면 가라지는 분별이 쉬워집니다.
이유는 가라지는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라지는 엘러지의 원인
이 되기 때문에 사람에 손해를 줍니다.
세상 지식과 신령한 지식의 경우 비슷합니다.처음엔 오히려 세상 지식이
더 중요하다고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만 세월이 지날수록 신령한 지식이
사람을 만들어, 역사를 만들고, 가치를 만드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동남아에서 가장 좋은 비싼 차가 많은 나라 그리고 돈이 흔하고 흥청거리
기 좋은 나라를 홍콩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홍콩은 10대들의 자살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급속한 경제성장과 정신적 공백, 이혼율의 급증으로
오는 가정 붕괴와 갈등, 1997년 중국으로 통치권이 이양되는 국가사회 심리
의 불안, 상급학교 진학문제가 주는 정신적 압박감, 메마른 고층아파트 문
화의 단조로움, 부부 맞벌이로 인한 대화의 단절 등으로 분석하고 있습니
다.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적 조건이나 문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제 아무리 좋은 환경이나 조건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
지 않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으로 신령한 것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
러나 신령한 것으로는 신령한 것과 세속적인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
다.
만일 우리가 영적인 존재임을 망각하고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문제를 세상
지식과 경험만으로 풀어가려고 한다든지 해결하려고 한다면 엄청난 장벽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
조했다는 것이나 에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신령한 사건입니
다. 그 신령한 사건을 세상 지식으로 믿으려고 한다면 죽을 때까지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신령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면 그
어느 것 하나도 고개를 갸우뚱 거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들락거리고 감동도 감격도 없이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의 존재를 시
인도 부인도 못하는 어중간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지금 이시간 신령한 믿
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믿고 풀어야 합니다.
3. 판단받을 일이 없게 됩니다.
15절을 보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신령한 판단력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 가운데 영분별의 은사가 나옵니다. 본문도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전공이 신학이기 때문에 다른 분야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제 서가에
는 주로 신학분야의 책이 많이 꽂혀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철학을 전공했
고, 일반대학원에서는 사회학 분야를 공부했습니다만, 가장 오랫동안 그리
고 지금도 계속 접하고 공부하는 분야는 신학분야입니다. 그래서 세상 돌아
가는 것이나 정세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느라면 세상일의 옳고 그릇됨이 선하
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나 행동의 옳고 그릇됨이
훤하게 드러납니다. 저는 그것을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 판단력, 혹은 분별
능력이라고 봅니다.
성령충만하고 말씀이 충만하면 영분별과 판단력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
다.
2) 다른 사람으로부터 판단을 받지 않게 됩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신령한 자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령충만하고 신령한 삶을 사는 사람은 남의 눈에
거슬리거나 지탄받을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남에
게 유익을 줄지언정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덕을 세울지언정 깨뜨리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감싸고 덮어주고 일으켜 세워주기 때문에 어
느 곳에서나 누구든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쉿 쉿' 바람 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성령충만하다고 떠들지 않더라도 그
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나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사단이 그를 판단하지 못합니다.
사단은 계속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도전합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소망이 없다. 너는 죽는다. 너는 패배자다. 너는 교회
를 다녀도 구원받기 힘들다"라면서 괴롭히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
한 사람은 그런 것들이 겁나지 않습니다. 이유는 내가 예수님의 은혜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을 확증해 주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을 보면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시
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사함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다. 너는 소망이 있다. 너는 영생을
얻었다."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마귀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4) 주님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16절을 보면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자녀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면 그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습
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있고 기대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면 내가
신령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눈짓만 해도 알아 차리는 것을 마음
이 통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주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순종하려면 주님의 마
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 마음은 성령충만할 때 성립되는 것입니다.
음식을 즐기는 각 나라 사람들의 방법이 각각 다릅니다. 블란서 사람들은
향을 즐깁니다. 그들의 음식은 향기가 나야 합니다. 불란서는 세계에서 가
장 향수문화가 발달된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태리 사람들은 맛을 즐깁니다.
그래서 그들은 각종 소스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색깔을 중요
시 합니다. 음식담는 그릇도 각양각색이고 음식도 색깔의 변화를 중요시하
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양을 중요시합니다. 세계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곱배기] 를 주문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그리고 밥주걱으
로 밥을 풀때도 꾹꾹 눌러푸고 산더미처럼 쌓아올려 푸는 것는 우리네 뿐입
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마음을 즐기고 중요시합니다. 예수
가 멋있고 맛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이 살 맛이
고, 살멋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습니까?
오 주님, 나는 지금 주님의 마음 갖기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지금 내 마음 속에 성령으로 임재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아멘.
발행일 : 940724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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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내 생각을 너희 생각과 다르며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사 55:8-9
만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인간과 비슷한 조건을 가진 분이라면 친구는
될 수 있어도 신앙의 대상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처럼 늙고, 병들고, 죽는다든지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유치하
다면 우리의 하나님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8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라고 했습니다. 이 한구절 말씀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같은 존재가 아님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 가운
데 가장 하나님과 비슷한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
간은 하나님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 행세를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격화했던 세계 유일의 독재자 김일성의 죽음은 여러가지 면에서
충격적 사건이었고 다양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김일성이 일생동안
저지른 몇 가지 잘못을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그는 한국전쟁을 일으킨 전범입니다.
김일성의 남침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고 있는 요즈음도 북침아라고 우기
는 정신병 환자들이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김일성이 일으킨 6.25
동란의 상처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이산가족, 전쟁 미망
인, 상이군인의 한과 슬픔을 만든 장본인이며, 주전범인 것입니다.
둘째 반세기 동안 자신의 권력과 체제유지를 위해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보
기 힘든 독재정치와 폐쇄정치로 북한을 도탄에 빠뜨렸습니다.
그는 북한 주민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상과 체제의 노예로 세
뇌시켰고 속박시켰습니다.
셋째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살기 힘든 가난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나 소말리아, 모잠비크와 같은 나라처럼 천연자연이
나 기후가 악조건이어서 굶어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치더라도
북한 주민이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가 하면 망명을 쵸
청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가 다 김일성 정치의 실패 때문인 것입
니다.
러시아 모처에서 비밀리에 만난 북한 사람에게 밥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밥을 보자 그는 숨도 쉬지않고 밥을 움켜 먹었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사
람이 그렇게 빨리 밥을 먹으면 체하게 된다며 천천히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굶어죽으나 먹다가 죽으나 죽는건 마찬가지라며 게속 밥을 정
신없이 먹더라는 것입니다.
경제는 정치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백성을 굶어죽게 만드는 정치라면
무슨 소리를 해도 잘못한 정치인 것입니다.
넷째, 자신의 우상화입니다.
김일성 뺏지와 동상을 비롯해 그는 자신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데 전심
전력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진노하시고 용서치 않으시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이
스라엘은 일찌기 바알, 아스다롯, 몰렉 등 이방우상을 끌어 들여 숭배했습
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았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아합 왕은 이방여인
이세벧과 결혼하면서 그녀가 섬기던 바알우상을 함께 끌어 들였습니다. 그
리고 그 죄값으로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스빈
다. 그뿐입니까? 아합왕조 자체가 무너져 버렸고 아합과 이세벧은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습니다.
그 누구라도 우상을 숭배하거나 자신을 우상화하면 지옥갑니다.
요한계시혹 22:15을 보면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
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라고"했습니
다.
여기서 말하는 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을, 술객들은 무당 점쟁이
를 말합니다. 행음자란 우상숭배를 했거나 우상종교를 지지하거나, 방조하
는 자들을 말합니다. 살인자들은 체제, 정권, 사상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자들을 말하고, 거짓말하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
신을 위하고 남을 해롭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만들고 퍼뜨리는 사람들을 의
미합니다.
세상 떠난 김일성은 요한계시록 22:15절 전체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그
가 간 곳은 뻔한 것입니다.
다섯째 무신론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속단했고,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지도자들은 숙청했으며, 교회를 모조리 없애버렸습니다.
봉수 교회나 그의 고향에 지었다는 교회는 그이 선전용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그 교회가 선전용이 아니고 진정한 교회였다면 교인이 수천 수만명으
로 매주일 불어나고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이었고, 하나님을 부인한 무신론자였습니다.
유신론과 무신론은 협상 테이블이 없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절충
이나 접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유신론과 무신론을 둘 중에 하나가 무릎을
꿇거나 손을 들거나 죽어야 합니다.
남한에 가면 하나님이 있는 것으로 하고 북한에 가면 하나님이 없는 것으
로 하자는 식의 절충이 불가능합니다.
무신론자가 유신론자가 되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만 그러나 유신론
자가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멸망과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는 첩경이 되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유신론자라면서 무신론의 괴수를 위대한 수령 어쩌고.. 하는 것
은 도무지 무신론자라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우상종교와 손잡
거나, 방조하거나, 야합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를 진노하실 것입니다.
김일성, 그는 이제 영원히 악명만을 남긴 채 역사의 지평에서 사라졌습니
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의 악역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남북정상회담, 북미회담 거기에 거는 기대, 세계의 관심과 함께 그는 숨수
지 못하는 미이라가 되어 관속에 누워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지켜 보면서 본문이 생각났습니다.
독재자 김일성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김일성을 협상 파트너로 생각했던 정부나 미국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는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세습적 절차로 정권을 승계한 김정일의 생각과 하나님
이 생각도 전혀 다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다른 점 두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1) 생각이 다릅니다.
8절을 보면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라고 했습니다.
몇가지 다른 점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생각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속되고 추합니다.
마가복음 7:21-23을 보면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목록이 열
거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음란,도덕질,살인,간음,탐욕,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 등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온다"고 했습
니다.
온갖 추잡한 것들로 가득찬 사람의 생각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비교
할 수가 있겠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의 생각도 변하지 않습니다.
조건이나, 환경을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변합니다.
40년대 50년대 사람의 생각은 아침 저녁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70년대 80년대 사람의 생각은 오전 오후로 변했다고 합니다. 90년대 사람들
의 생각은 시간마다 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즘 소위 신세대, X세대의
생각은 종잡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마음이 변했니"라고 물으면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변덕스럽고, 경망스럽고, 방정맞은 태도나 생각이 정상처럼 보이는 세상입
니다만 하나님이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생각은 늘 따뜻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범죄지향적이며 냉소적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구원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
러나 인간의 생각 속에는 시기,분노,질투, 미움, 등이 가득차 있습니다. 하
나님의 생각에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 존 홉킨즈 대학교의 사회학과 교수가 자기반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
었습니다. 그것은 볼티모어의 시내 빈민가에 사는 200명의 청소년을 만나서
그들의 희망이 무엇이며 장래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90%가 훗날 교도소에 갇혀 있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는 점입니다. 그로부터 2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교수가 자기 연구실
의 서류들을 정리하다가 그때 그 설문조사 자료를 발견했습니다.그는 그때
그 청소년 200명이 궁금했습니다. 그는 자기 과의 제자들을 동원해 그때 그
청소년 200명을 찾아 확인하는 작업을 지시했습니다. 그 결과 180명을 확인
했고 그 중 놀랍게도 4명만 교도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왜 그들이 교도소에 들어가지 않고 변화받아 당당한 사회인이 되었는가를
알기 위해 그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 100여명
이 고등학교 시절 교사였던 [오로크]라는 여자 선생님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오로크] 선생님은 은퇴한 후 양로원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를 찾아가
어떻게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가르쳤는가를 물었습니다. 그 할머니
교사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저는 그들을 모두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저는 그들을 사랑했
습니다"라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생각 때문에 죄사함 받고, 영
생얻고, 오늘도 따뜻한 은총 속에서 살고 잇는 것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 길이 다릅니다.
8절을 보면 "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라고 했습니다.
길은 계획, 목적, 가고자 하는 길, 하고자 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내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 내 목적과 하나님의 목적은 다릅니다. 내가 하
고 싶고, 내가 가고 깊은 길도 하나님과의 길과는 다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따르면 삶이 편하고 길이 형통하
지만, 하나님이 뜻이나 계획을 외면하고 내 길을 고집하고 주장하면 그 길
이 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안내하시고 인도하십니
다. 그리고 철저하게 보호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1791년 11월 4일 조지 위싱턴이 이끄는 군대가 세인트 클레어에서 대패했
습니다. 부하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각하 이 패배가 장군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라고 그러자
워싱턴은 '이겨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져도 하나님의 품안에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태도인 것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아멘.
46
제 목 : 건강한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잠 4:20-23
건강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육체적인 건강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
의 건강을 위한 일이라면 안하는 것이 없고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육체보다 더 소중한 것이 영혼이라는 사실과 영혼의 건강이 육
체의 건강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
니다. 본문의 교훈 역시 영혼의 건강 관리에 관한 것입니다. 몇 가지 교훈
을 살펴 보겠습니다.
1.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20절을 보면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
이라"고 했고, 21절을 보면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환자가 병원에 가면 의사의 처방과 지시가 있기 마련입니다. 병을 고치러
면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대로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짜고 맵고, 자극성 있는 음식을 먹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환자
가 소금이나 고춧가루를 퍼 마신다든지 줄담배에 말술을 마신다면 병을 고
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바드 의과대학의 [윌리엄 크리슨]과 [수전 행킨슨] 두 사람이 미국 의학
협회 저널에 발표한 연구보고에 의하면 하루 20개비 이상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백내장과 폐암에 걸릴 위
험성이 두배 이상 높다는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사람은 병치료를 외면하고, 거역하고 살
면서 그 영혼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본문을 주목해 보면 " 내 말에 주의하라, 귀를 기울이라, 눈에서 떠나게
말라, 마음속에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생명과 건강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눈으
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 건강유지의 비결인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 집없는 사람, 외로운 사람 그들 모두가 불쌍한 사람들입다만
그러나 병든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병들면 산해진미도 높은 지
위도, 그리고 고급문화 주택도 아무런 의미가없습니다.
영혼이 병들면 제아무리 화려한 조건을 골고루 갖췄다고 해도 결국은 멸망
하고 지옥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의 중심 교훈은 그 영혼이 건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의사이며 근대 임상의학의 창시자였던 [부르하페]교수가 세상
을 떠난 뒤에 그의 유물이 경매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유물 가운데 [의학상 다시 없는 비밀]이라고 쓴 두툼한 노트 한
권이 있었습니다. 그 노트는 노끈으로 단단히 묶어 놓았기 때문에 아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부르하페]가 유명한 의사였기 때문에 그 노
트 속에는 건강과 장수에 관한 엄청난 비결이 적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
니다. 그 노트가 경매에 붙여지자 값은 치솟기 시작하여 엄청난 값에 낙찰
이 되었습니다. 그 노트를 산 사람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채 집으로 돌
아가 노트를 개봉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백지 노트 맨 마지막
장에 한줄로 큰 글귀가 써있었습니다. "머리는 차갑게, 발은 따뜻하게, 몸
은 거북스럽지 않게 하라,그리하면 당신은 모든 의사들을 비웃을 수 있을
것이다...."
머리는 차갑게, 발은 따뜻하게, 몸은 거북스럽지 않게 하라는 것은 하나님
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월여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체내에 골고르 퍼져있는 열이 머리로 치밀어 오르면 쓰러지거나 터집니다.
발의 체운이 식어져서 싸늘해지면 사체가 됩니다. 전체 몸의 기능이 거북
스럽지 않고 편안하도록 유지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는 것이 [부르하페]
의 지론이었던 것입니다.
영혼의 건강유지 비결도 장황하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혼을 위한담녀서 이곳 저곳을 찾아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영혼이 성장해야 한다면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립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다운 믿음을 갖고 싶다면서 이사람 저사람을 다라 다닙
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영혼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대로 살아야 영혼이 거듭나고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약학박사 1호인 홍문화박사는 현대인의 병을 세가지로 풀이했습
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트레스로 인한 성격병, 나쁜 생활 습과 때문에 생기는 습관병, 식사패턴
의 잘못으로 오는 식원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 병을 고치려면
자기 성격 고치고, 생활습관 고치고, 식사패턴을 바꾸면 된다는 것입니다.
놀만 빈센 필 박사의 건강비결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육신과 영혼의 완치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을 것.
둘째, 육체는 영혼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소중하게 취급할 것.
셋째 모든 복수심을 버릴 것.
넷째 담당의사를 위해 기도할 것.
다섯째, 매일 성경을 읽고 운동을 할 것.
여섯째 자신이나 남에게 대해 악한 마음을 품지 말것.
일곱째 의사는 치료하고 하나님은 완치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것...
육신이 병든 사람은 불쌍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병든 사람은 불쌍한 단계
를 넘어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 병을 빨리 고치지 않으면 소망이 없어지게
됩니다.
2. 나쁜 것을 버려야 합니다.
24절을 보면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고
했고, 25절을 보면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피라
"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영혼의 건강을 해치는 통로가 두 가지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입과 눈입니다.
입은 모든 음식물을 통과시키는 문과 같습니다. 너무 뜨거운 것을 통과시
켜도 안되고 너무 찬 것을 통과시켜도 안됩니다. 너무 맵고,짜고, 독한 것
들을 통과시켜도 안됩니다. 극약이나 독약을 통과시켜도 안됩니다. 입은 몸
속에서 생성되는 분비물을 내보내는 관문입니다. 그러나 계속 침을 흘린다
든지 가래를 내뱉는다면, 먹은 음식물을 입으로 내보내면 안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계속 침을 뱉거나 가랠르 내뱉지 않습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그 입으로 궤휼이나 사악하고 굽고 독한 말을 내밸
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눈으로 못된 것, 나쁜 것을 보기위해 방황하지 않는 것이빈다.
그러나 영혼이 병들면 그 입으로 계속 더러운 말과 남을 괴롭히는 말이 쉴
새없이 마치 가리챔을 뱉는 것처럼 터져 나옵니다. 그리고 그 눈 역시 좋은
것을 보지 않고 나쁜 점만 보게됩니다.
미국에 이민가서 살고있는 사람가운데 22년 동안 108번이 교회를 옮긴 장
로가 있었습니다. 이민교회의 특성은 이합집단이 심하기 때문에 한 교회를
오래동안 다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 사람은 특별한 경우였습
니다. 1년에 약 5번 정도 교회를 옮긴 셈이고 평균 두달에 한번 정도의 교
호를 바꾼 셈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108번 교회를 대하는 그의 태도였
습니다. 단 한번도 그 어느 교회에 대해 만족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교호
를 옮기는 날로부터 그 교회의 단점을 찾기 시작합니다. 목사의 허물을 맨
먼저 찾아냅니다. 그리고 마치 예언자나 된 것처럼 자기 눈에 드러난 허물
을 떠벌리고 얘기합니다. 교회주보, 성가대, 주방 교인들의 태도등 씹지 않
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108 교회의 단점을 낱낱이 노트에 적어서 마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가 병으로 죽게되자 어느 교회도, 어느 목사도, 그의 장례식을 해줄 수
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그가 섬긴 교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 108
번째 옮겨왔던 교회 목사님이 불쌍히 여겨 그의 장례식을 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108번째 옮겼던 그 교회 목사님이 저에게 들려준 이야기였으니까
진실한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은 장례식날 관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빈
다. "이 분의 유랑과 번뇌가 108번째로 끝나서 천만다행이다"라고.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천당에 올라가 주님 앞에 108번 교회를 거치면서 잡아낸
허물을 기록한 두툼한 노트를 펴놓는다면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과연 그런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신앙생활은 했을까요?
과연 주님 앞에 설 수는 있었을까? 만일 섰다면 주님은 그 사람의 허물이
적힌 수십권의 노트를 던져주며 읽어보라고 하시지는 않았을까?
제가 보기에 그는 정의의 사람도 아니었고 신앙인도 아니었고 더구나 장로
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의 후손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 못지않게 불행하게 되었
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만 그 내용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내 영혼이 건강하려면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점을 따르고, 좋은 점을 입으
로 말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남의 흉만을 찾고 입을 놀려대거나 나쁜 것만을 찾아 탐닉하는
사람은 그 영혼이 병든 사람입니다. 멀리 하는 것이 좋습니다.
3. 바로서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27절을 보면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
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도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건거를 타려면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줄을 타는 사람도 중심만 잡으면
줄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잡지 못하면 넘어지고 떨어집니
다.
그것은 인생살이나 신앙생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줄에서 떨어
지지 않는 비결은 두가지입니다. 중심잡고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중심잡고 앞을 바라보아야 타락하지 않고 건강하게 됩니다.
예수 중심잡고, 예수 바라보는 사람은 미국을 가든 소련을 가든,중국을 가
든 휴가를 가든, 여행을 가든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중심에서 떠나고 다른 것들을 바라보면 그 순간부터 악을 향
해 굴러 떨어지게 됩니다.
내 영혼이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 지속하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십자가 높
이 달리신 에수님 바라보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면 영혼의 전염병이 만연된
세상에 살아도 전염되거나 쓰러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중심으로 살고, 예수 바라보면서 건강하게 살아갑시다.
발행일 : 940710
분 류 : 설교
47
제 목 : 단비를 주소서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슥 10:1
필요할때 필요한 만큼 오는 비를 단비라고 합니다. 여러 날 동안 계속 내
리면 장마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비가 흔하고 강우량도 넉넉한
편입니다. 그리고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농사를 짓는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려야 할 때 내리지 않으면 강도 바닥이 드러나고
저수지도 바닥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비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 전혀 다릅니다. 그나
라는 두 차례 비가 내립니다. 파종할 때 내리는 비를 이른비라고 하고, 결
실할 때 내리는 비를 늦은 비라고 합니다. 만일 이른 비가 내리지 않으면
씨를 뿌려도 싹이 나지 않게 되고 늦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결실을 못하게
됩니다.
알맞은 때에 비가 내리는 것은 그해 농사를 결정하는 원인이 됩니다.
제 아무리 수리시설이 잘된 나라의 경우라도 비가오지 않으면 농사는 물론
식수도 문제가 됩니다.
최첨단의 과학문명을 자랑하는 미국도 비가 오지 않으면 난리가 납니다.
잔디에 물을 주지 말것, 물을 아껴서 쓸 것 등 주정부나 시에서 비상이 걸
립니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흡족하게 내리는 비가 단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비를 구하라는 본문의 말씀은 지금까지 설명한 식수나 농
사에 필요한 비를 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시편 72편 6절을 보면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
이 임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사는사람에게 임
하는 은혜를 비로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 10:12를 보면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단비처럼 우리네 삶을 구석구석 큰데서 작은 데까지
골고루 돌보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비는 바람과,초목과, 동물들에게도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 역시 모
든 피조물에게는 절대로 필요합니다.
돈이나 과학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비는 땅에서 분수처
럼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 시대에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비가 내리지 않은 원인입니다.
그것은 아합왕이 바알 우상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바알신이나 그 당시
이교도들이 섬기는 신이었습니다.
바알 신도들은 남신과 여신이 있는데 남신과 여신이 만나 접촉할 때 비가
내린다고 믿는 해괴하고 부도덕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비와 이슬을 주
장하신다고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을 저버리고 소위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왕이라는 사람이
바울 신에게 절을 하는가 하면 도처에 바알 신전을 건축하도록 국고 지원을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엘리야 선지자를 죽여 없애겠다고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이교도들도 하늘의 뜻을 거역하면 재앙이 임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
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우상의 전을 건축하고 우상앞
에 합장배례하고 추파를 던진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하거나 떠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물고기가 아스팔트 위에서 사는 기적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사
는 기적은 없습니다.
2. 성령을 의미합니다.
단비가 사람과, 짐승과 초목 등 모든 피조물에게 생기와 활력을 준다는 면
에서 성령으로 비유되곤 합니다.
성령충만한 삶은 활기와 생기가 넘칩니다.
석회와 물이 합하면 뜨거운 열이 생깁니다.
녹슨 쇳가루와 알루미늄에 열을 가하면 2,000도 이상의 열을 냅니다.
[나]라는 존재는 약하고 무력합니다. 그러나 내가 성령을 받으면 내게서
폭발적 힘이 발산됩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
다. 부흥회 도중 어떤 사람이 과부의 유산을 처리해 주면서 100원을 착복한
것을 회개하고 그것을 변상하겠다고 나선 것을 필두로 3만명이 회개하고 예
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4천명이 세례를 받았습니
다.
이 불길은 선천, 재령,개성, 서울, 대구로 퍼져나갔습니다. 성령의 역사였
던 것입니다.
길선주의 그 당시 설교 속에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남의 물
건을 도둑질한 사람은 잡을 수 있으나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는 누
구도 포박해낼 수가 없다. 죄가 엎드려 있는 마음은 지옥이요 회개한 마음
은 천당이니...."
교회에 죄인들이 모여 죄를 자복하고 회개한다는 소문일 들은 경찰관 방은
덕이 죄인 몇놈 잡아다가 실적을 올리겠다며 장댓재 교회를 찾아와 구경하
다가 그날 성령받고 회개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방은덕은 체면도 불구하고 데굴데굴 구르면서 "선생님 나를 살려 주세요"
라며 소리지르며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성령이 행하신 능력이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인간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 속
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희미한 숯불을 산소 속에 집어 넣으면 강한 빛을 발하면서 불꽃을 튀기며
타게됩니다.
유황 역시 공기속에서는 힘없이 타지만 일단 그것을 산소 속에 집어 넣으
면 강렬한 푸른 불꽃을 튀기며 타게 됩니다.
내가 성령을 받고 나를 성령의 도구로 맡길 때 나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
이 되는 것입니다.
무디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교만과 이기심과 욕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들의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해질 것이
다. 만일 우리들의 마음이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을 때 성령이 계실 자
리가 전혀 없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성
령이 단비로 충만하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그러면 단비를 구하는 자세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
니다. 구하면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가뭄으로 나무가 말라죽고 수도물이 중단되는 비상사태가 벌어지자 그 지
역 교회협의회가 모여 기도하기로 결정하고 기도의 날을 선포했습니다.
각 교회별로 기도의 날 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기도모임
에 참석한 연인원이 2,800명이나 되어는데 그 중에 비 올줄로 믿고 우산을
가지고 나온 사람은 통틀어 13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것이 우리네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비오게 해달라면서
우산을 준비하지 못하는 우리의 믿음 쪽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믿고 단
비를 구합시다.
둘째 너넉하게 구해야 합니다.
가뭄으로 갈라진 땅에 내리는 비는 넉넉하고 흡족해야 합니다. 먼 가뭄으
로 가라앉을 정도라면 해갈도 되지 않습니다.
은혜도, 축복도, 성령도 차고 넘쳐야 합니다.
사람들이 작은 규모의 구멍가게 보다는 대형 슈퍼마겟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양한 물건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라한 인생살이를 마감하고 풍요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성령을 충만히 받
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넉넉하게 구해야 합니다.
셋째, 나눌줄 알아야 합니다.
소양댐이나 팔당댐에 일정량의 담수량이 초과되면 수문을 열어 물을 내 보
냅니다. 그것이 위험을 막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나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건전하고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하
려면 내가 받은 은혜나 능력을 다른사람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말
하면 "주시옵소서"만으로 끝나는 신앙이 돼선 안되는 것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있는 콜드워터스 어느 은행에 6월 6일 새벽 폭발물이
터져 금고가 박살이 났습니다. 은행털이범들이 금고 안에 있는 돈을 털어가
기 위해 폭발물을 설치했고, 금고가 폭발하면서 돈을 길거리로 흩날라지 주
민들이 달려들어 너도나도 돈을 주워 담는 바람에 정작 범인들은 몇푼 밖에
챙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정상적으로 믿고, 벌고, 살고, 쓰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리
고 성령충만과 은헤를 구하는 태도 역시 정당해야 합니다.
명예나, 출세나, 치부의 수단으로 은혜와 성령을 구해선 안됩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3년 가뭄처럼 모든 것이 메마르고 갈증나 있습니다. 남
북한의 첨예한 갈등, 핵전쟁의 위협, 도덕성의 몰락, 윤리기강의 붕괴, 청
소년의 탈선, 우상종교의 창궐 등 먼지 풀석거리는 메마른 황야와 같습니
다.
시원한 단비가 한바탕 쏟아졌으면 하는 바램이 일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내 영혼의 갈증 역시 심각하빈다. 뭔가 텅빈 것 같은 공허감,
소유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허무감, 무엇인가 막혀있는 것같은 답답함, 기
쁨보다는 짜증스럽고 원망스런 속마음,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
니까? "봄비 때,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
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는 본문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게 비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심령, 내 가정, 이 나라에 단비를 주소서, 은혜의 단비를 주
소서, 성령의 단비를 주소서. 아멘,
발행일 : 940626
분 류 : 설교
48
제 목 :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딛 2:11-15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입니다. 분단
국가였던 독일도 서독이 동독을 흡수함으로 통일국가가 되었고 예멘 역시
남과 북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서독은 당초 동독을 흡수통일 하는데 소용되는 비용을 1조 마르크 정도로
잡았지만, 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고, 약 2조마르크(약 9백50조원)가 넘어서
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북한을 흡수통일 하는데 얼마의 비용이 들 것인가에 대하
여 [일본 장기신용은행 종합연구소]는 2천억달러(약 160조원)로 추산했고
국내 경제학자들은 40조원에서 많기는 6백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통일을 위한 비용이 천문학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도 엄청난 생명 유지비가 들아갑니다. 마
시는 물,산소, 심장이 뛰고, 위가 수축작용을 하고, 세포가 생성되고, 먹은
음식물이 소화되고,그것이 열량으로 변해 각 기관에 보급되고, 자동으로
손, 발가락이 움직이고, 듣고, 보고 걷는 것 등,
돈으로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면 하루에 1000만원 정도의 시설비와 유지비
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달이면 30억이 되고, 1년이면 360억원이 됩니
다.
그런데 우리는 병들면 돈내고 병을 고치면서도 매일 1천만원 정도의 생명
유지비를 공짜로 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전혀 관심도 없고 감사도 없습
니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남북한 통일의 경우 1인당 비용을 산출하면 890만원 꼴이 된다고 합니다.
죽을 내 생명이 죄사함 받고 다시 살기 위해서는 얼마의 돈이 필요하리라
생각하십니까?
본문은 그것을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돈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은
혜란 조건부가 아닙니다. 조건없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이 주는 몇가지 교훈을 찾겠습니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주십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흔히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은혜라든지 거저 주신다든지 하면서 싸구려인
양 치부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받는 나는 은혜였고, 거저 받은 선물이었습니다만 그 은혜와 선물을 주시
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면 죽게 하
시고 그 공로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결코 값싼 은혜도 아니고 싸구려 상
품이 아닌 것입니다.
고층 빌딩마다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가지 돈을 내고 엘리베이
터를 타본 일이 없습니다. 미국의 경우 무역센타빌딩이나, 엠파이어스테이
트빌딩은 관광객들에게서 돈을 받습니다만 그러나 대부분의 빌딩은 공짜로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베이터 자체가 공짜인 것은 아닙
니다.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당 5천만원 1억 혹은 2억 하는 것들도 있
습니다. 내가 그 엘리베이터를 공짜로 탄다고 해서 엘리베이터가 공짜인 것
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기까지에는 예수님의 희생과 십
자가에서의 피흘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보내셨고, 죽게하신
슬픔을 겪으셨습니다.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고"고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은 인종과,
지역과, 계급과, 성분과,출신을 포괄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십니다. 단, 예수를 믿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어느날 밤 관장이 야순을 돌다가 도둑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관가로 데려
다가 엎드려 놓고 볼기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둑이 갑자기 "아이
구 태조대왕 등뼈 부러진다"고 고함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볼
기를 치자 도둑 역시 계속하여 "태조대왕 등뼈 부러진다"며 자기가 태조대
왕의 후손임을 암시하는 바람에 풀어 주었습니다.
그 기발한 소문을 듣게 된 어떤 도둑이 밤에 도둑질을 하다가 야순관리에
게 붙잡혀 관가로 끌려가 볼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볼기를 내려치기 시작하
자 그 도둑은 "아이구 염라대왕 등뼈 부러진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제딴에
는 아무려면 태조보다야 염라대왕이 더 높겠거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
니다. 그런데 그를 때리던 관리는 염라대왕이라면 이를 가는 사람이었습니
다. 그날 그 도둑은 염라대왕 덕택에 반쯤 죽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로마서 10:13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
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고, 사랑받
고, 복을 받게 됩니다.
2. 우리를 양육해 주십니다.
12절을 보면 "우리를 양육하시된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
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영적으로 출생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태
어난 생명은 양육과 보호가 필요합니다.
부산 일신병원에 갔다가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라고 있는 신생아실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미숙아로 태어난 생명이 인큐베이터안에서 보호받으
며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일정기간 동안으로 끝나야 합니
다. 제일 바람직한 것은 태어난 새 생명은 엄마의 품 속에서 고동소리를 들
으며 사랑받고, 보호받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자라고 신앙이 자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양육되는 것이 제일 행복한 것입니다. 그
런데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
입니까?
내가 누구의 보호를 받고 양육받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
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대통령은 경호원들의 철통같은 경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는 간수의 경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지키는 사람
은 마귀의 소유인 것입니다.
1800년대 미국의 시인이었던 롱펠러(Henry Wadsworth Longfellow) 는 보통
종이 위에 그의 시를 써내려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그의 시는 6천 달
러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10불 미만의 종이 위에 그렸던 모나리자나 만종은 지금 수십만 달러의 명
화가 되었습니다.
누구의 것이 되느냐, 누구의 보호를 받느냐, 누가 나를 키워주느냐가 중요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키워주시고 이끌오 주신다는 것이 본문의 강조입니
다.
3. 바르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양육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르게 살라는 것입
니다.
12절을 보면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
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경건하게 살고 세상 정욕을 버리고
근신하고 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호화여객선 [아틀랜틱호]가 핼리팍스 해안에서 조난당해 수백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다행히 살아남은 생존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우체국을 찾아가
가족들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내용은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
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그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길이 간직
하기 위해 전보용지를 액자에 넣어 사무실 벽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리
고 그는 날마다 "구원 받았다"는 전보내용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의 채찍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청년들의 모임에서 바로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묵
은적이 있었습니다.
참석했던 젊은이 90%가 잘 사는 것보다는 바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했습니
다. 그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잘 사는 것과 바로 사는 것의 차이점이 무
엇인가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잘사는 것.
1) 잘 먹고, 잘 쓰고, 잘 노는 것이다.
2) 하고픈 짓을 하고 사는 것이다.
3) 제 멋대로 사는 것이다.
4) 남의 간섭을 배제하고 사는 것이다.
바로 사는 것.
1) 자기를 통제하며 사는 것이다.
2)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며 사는 것이다.
3) 가치있게 사는 것이다.
4) 더불어 사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관점과 해석은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자녀된 사람들이 바르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
다. 바르게 삽시다.
4. 선한 일에 열심이기를 원하십니다.
14절 끝을 보면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하려 하심이니라"고 했
습니다.
구라파를 휩쓸던 나폴레옹이 1백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러시아를 쳐들어갔
습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러시아에서 참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워터루
전선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그는 외쳤습니다. "모든 것이 끝장이다. 각자 살
아 남을 방도를 찾아라"고.
그러나 내가 믿는 예수는 너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를 믿으면 산다,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산다.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이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최종 목적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헤야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을 선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영국 웨스터민스터 교회 목사인 [모건] 박사에게 한 소년이 편지를 보냈습
니다. "저는 지난밤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집회에 참석한 후 예수님을 구주
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 이후로 나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차 있
습니다. " 여기까지 편지를 읽은 모건박사는 깊은 생각이 잠겼습니다. 설교
를 듣고 깊은 슬픔에 빠지다니.. 그러나 그 다음을 읽는 순간 기쁨이 되살
아났습니다. "목사님 제가 그토록 슬퍼하는 이유는 제 아버님이 아직 예수
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사는 날 동안 해야할 가장 귀하고 크고, 위대하고, 절실한 선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 내 친구를 주님 앞으로
인도해 내는 것입니다.그것이 나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
입니다.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발행일 : 940619
분 류 : 설교
49
제 목 : 나와 내 집이 사는 길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행 16:29-34
역사 연구의 대가인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역사연구에서 그동안 역사의 지
평에 떠올랐던 21개의 문명이 있었는데, 그중 19개가 자멸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신론과 물질주의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종교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자도 없고 옷도 입지 않는 야
만인이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신도 있고, 종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지능지수가 높고 고급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개나 침팬지에게는 신이 없습니
다.
그 차이는 간단합니다.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고 짐승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학에서의 논의되고 있는 사람에게는 뇌의 의식활동이 정지되는 것을 말
합니다. 다시 말해 뇌의 의식활동이 멈추게 되면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
다. 마찬가지로 그 영혼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영적 활동을 하지 않
는다면 죽은 영혼이 되고마는 것이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람을 구성하
는 가장 중요한 중심은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본질이라고 본다면,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껍데기란 본질을
감싸고 있는 옷에 불구한 것입니다.
양장점 쇼윈도우에 서있는 마네킹은 철따라 달마다 새 옷으로 갈아 입곤합
니다. 그것도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최고급 의상입니다. 그러나 그 누
구도 마네킹을 바라보면 행복한 여인이라고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네킹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의식활동이 정지된 사람들이 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고, 잘 입는
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참 행복이나 보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살기좋고 잘 사는 나라로 유명합니
다. 인구는 400만 정도에 불구하고 수도인 오슬로는 47만명정도가 살고 있
습니다. 쿠웨이트 다음으로 석유가 많이 나오는 나라이며 GNP는 25,000불이
넘습니다. 병나면 국가가 고쳐주고 늙으면 국가가 책임지고 먹여 살려 줍니
다.
부자들은 섬이나 산속에 별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주말이나 휴가철이 되면
별장생활을 즐깁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별장들은 텔레비젼을 놓지 않고 수
도시설은 집 안에는 없습니다. 나무때서 밥해먹고, 물도 밖에서 길어다 먹
고, 맨발로 걸어다닙니다. 다시 말하면 원시적 삶을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
다.
여러분, 잘 산다는 것은 편한 것입니다. 편하다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며,
영적인 사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이 편안해야 몸도 삶도 편안해지는 것
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
습니다. 다시 말하면 온전하고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를 하신
것이빈다.
토인비가 지적한대로 문명이든, 국가든, 개인이든 무신론과 물질주의에 빠
지게 되면 침몰하게 됩니다.
그 좋은 예가 러시아의 붕괴입니다. 70년동안 러시아를 지배해 나온 것은
무신론과 유물론 사관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무너졌습니다. 세계적인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나님은 없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대로 살고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나쁜 것을 믿으면 나
쁜 짓을 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을 믿으면 좋은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건전한 종교와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최근 세계 의학계는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 못지 않게 전세계에 충격과
공포를 가져다준 [살을 먹는 괴박테리아]의 정체 규명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의학계는 성형수술을 잘못받은 후 괴사성 근막염 증세를 보이
고 있는 환자 두명을 놓고 연구한 결과 정확치는 않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
루어 성형수술 부작용이라는 개연성이 높다는 소견을 발표했습니다.
물론 개연성이 높다는 소견이기 때문에 성급한 결론을 삼가하는 것이 좋습
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것, 그것이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본래의 것이 무너지면 그 결과가 좋지 않습니
다.
인간의 본래 모습은 내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순천자(順天者)
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문명, 문화, 과학, 경제, 학문이
라는 조건들 때문에 계속 성형수술을 받아 나오는 동안 전혀 다른 이질적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 이즈러진 나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자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오늘 읽으니 성경 사도행전 16:31은 말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
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이와 비슷한 말씀이 요한복음 3:16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
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기독교가 강조하는 복음의 골자는 쉽고 간단합니다.
고대 빌립보 교도소에 바울이라는 죄수가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죄명은 귀
신들린 소녀를 고쳐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교도소 소장이
죄수 바울을 향하여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며 종교적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신분이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정상적인 가정과 가족이 있었습니다. 정신건강도 정상적이었습니
다. 그러나 그도 역시 영혼의 문제에 대해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는 어떻게 해야 내 영혼이 구원받고 사람답게 살 수 있겠는가를 물은 것입
니다. 그 물음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명료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
리하면 당신과 당신의 집(가족)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요...."
B.C 2세기 [안티파토루스]라는 사람은 세계의 7대 불가사의를,
1) 이집트의 피라미드.
2) 바빌로니아의 허공에 매달려 있는 정원.
3)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4)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5) 할리카르나수스의 마우솔로스 능묘
6) 로즈섬의 콜로수스 거상(巨象).
7)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영국의 시사잡지(이코노미스트)는 세계의 7대 불가사의 목록
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1971년 미국 인텔사의 테드호프가 발명한 마이크로 프로세서.
2) 전세계 9천만명의 여성이 사용하고 있는 피임약(1951년 멕시코시티에
있는 신텍사스의 젊은 연구원인 칼제라시가 발명).
3) 1876년 알렉산더 그레이엄 벧이 발명한 전화로 이것은 거대한 세계를
지구촌으로 좁힌 일동공신이라는 것.
4) 한번에 570명을 태울 수 있는 점보 제트기.
5) 해상 석유채굴 시설.
6) 1950년대 미국이 처음으로 실험한 바 있는 수소폭탄, 이것은 지구의
인류를 파멸시킬 수 있는 공포의 에너지라는 것.
7) 1969년 7월 20일 오후 10시 18분 미국 우주선인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아폴로 11호로 달에 첫발을 내디뎠고, 그곳에 "인류의 평화를 위해 이곳에
왔다"는 명판을 남긴 이후 달기지의 꿈을 실현해 나가는 것 등을 7대 불가
스의로 꼽았습니다.
7대 불가사의는 인간이 만든 지식과 지혜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더욱 불가
사의한 것은 그토록 위대한 업적과 유산을 남긴 인간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풀지 못한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우주선을 쏘아 올렸지만 여객기 추락을 막지 못하고 있는가하면 생명공학
을 발전시킨 인간들이지만 죽음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두 종류의 인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등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
것은 마치 빛을 향한 모습과 빛을 등진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빛을 등진
얼굴은 침울합니다. 그러나 빛을 바라보면 찬란합니다.
하나님을 등진 인간의 삶은 정신적으로 한대 지방과 같습니다.그래서 성경
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도소 소장의 "내
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은 빛을 등지고 살았던
한 사람의 고뇌에 찬 절규였습니다.
그에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
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 짤막한 대답 속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구원의 가능성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직업이 무엇이며, 신분이 무
엇이며, 나이가 몇이며, 재산이 얼마이며, 학벌이 어느 정도인가 등 그런
것들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정신이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
그리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
니다.
둘째는, 구원의 연쇄성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면 그 영향과 변화 때문에 가족과, 친척과, 이
웃과, 친구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무엇인가를 묻는 잡지사의 설문조사가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응답
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함께 사는 사람.
2) 함께 가는 사람.
3) 함께 나누는 사람.
4) 사랑하는 사람.
5) 서로를 보완하는 사람이라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렇스빈다. 가족이나 부부란 함께 살고, 가고,나누고, 보완하는 관계입니
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과 믿음을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그 비
결이 무엇입니까?
어느 교도소 소장의 경우처럼 가족이 함께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1956년도 미국의 100대 재벌 랭킹에 들었던 기업가운데 1992년까지 살아남
은 기업은 불과 21개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2천년이 되면 현재 10대 재벌 가운데 3개 정도가 탈락
하게 될 것이라고 대통령 직속 21세기 위원회가 예견했다고 합니다.
영원한 재벌도 영원한 건강도, 영원한 권력도 없습니다.
일본 주식회사의 얼굴이라는 평판을 듣던 [모리타 아키오]소니사회장이 뇌
출혈로 쓰러지자 일본은 물론 전세계의 경제인들은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키오 회장이 돈이 없어 쓰러졌겠습니까? 지정병원과
주치의가 없어 쓰러졌겠습니까?
그것은 모리타 아키오 회장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솔직하게 우리는 나 자신의 제한성과 한계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미국이 중요한가를 판단해 우선 순위를 따라 일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겐 무엇이 우선 순위일까요?
다시말하면 지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무리하다가 쓰러진 52세의 사장은 "제가 바보였습
니다. 쓰러지면 끝나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라며 나와 내 집이
사는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지금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좋은 일, 급한 일은 뒤로 미루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발행일 : 940612
분 류 : 설교
50
제 목 : 가면서 전파하라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마 10:5-15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신 이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
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가르치신 일과 병자들을 고치신 일과 복음을 전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신 궁극적 목적을 살펴 보면 복
음을 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수를 셀 수 없는 성공경부 운동과 제자훈련 운동이 일
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해서 전도하지 않는 성경공부나 제자
훈련은 의미가 없습니다.
도시마다 기독교 이름을 내건 병원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본래 선교사들이
그 병원을 세울 때의 정신은 가난하고 불쌍한 병자들을 고쳐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병원들이 복음전도는 없애
버리고 의료 행위만 계속한다면 병원문을 닫든지, 이름을 바꾸어야 할 것입
니다.
주님은 부단히 열 두제자를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전도현장으
로 파송하셨습니다.
본문은 열 두제자를 전도현장으로 파송하면서 그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 당부는 오늘 우리에게는 전도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피를 물려받은 동족입니다.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핍
박했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
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동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분부하신 선교명령도 맨 먼저 예루살렘
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
니라"고 했습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데서부터, 관계적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전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면서 늘 느끼는 것입다만 내 가족이 제일 어렵고 가장 가가
운 사람이 제일 힘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
다.
가령 남편이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듣는 순간부터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두번,세번, 진단
을 다시 해 보고 치료방법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
은 영혼이 죽어가는 문제에 대해선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박테리아 때문에 초긴장 상태에 돌입해 있
습니다. 24시간 만에 사람의 살점을 다 파먹고 죽게 만든다는 괴박테리아의
공포가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보다 더 무서운 박테리아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송두리채 파멸시키는 박테리아, 그 이름 [죄의 박테리아]입니다.
이 박테리아는 영혼도, 정신도, 육체도 모조리 썩게 만들고 맙니다. 이 죄
의 박테리아를 퇴치하고 고치는 백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
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죄를 사함받고 내가 새 사람이 되는 것입
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가족, 네 친척에게로 가라"고, "가서 그들을 건져내라"고. 어떤 주부
는 주걱으로 밥을 퍼서 담을 때마다 십자가를 그으며 예수 믿게 해달라고기
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느니 남편 구두를 새벽마다 싸가지고 나와 신발임자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는 6개월 아침 금식을 하면서 남편 구원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는 건성피부증 때문에 가려워 하는 남편의 등을 긁어 주면서 십
자가를 긋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구원
해야 합니다.
2. 가면서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이 여러가지 입니다만 그중에 하나는 기독교는 가
면서 전파하라는 종교인데 반해 불교는 한 곳에 머물면서 전파하는 종교라
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거리로 불교는 산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
즈음 웬일인지 불교가 기독교보다 더 설치고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가면서 전파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를 호흡하고 세상을
걸어가면서 그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16을 보면 "내
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보내십니다. 입산수도하는 도사처럼 찾아오는 사람
들에게만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가면서, 찾아가서, 기회를 만들어서 복
음을 전해야 합니다.
찾아 갑시다. 만납시다. 기회를 만듭시다.
그리고 가면서 전파하라는 말씀의 뜻은 중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두번으로 끝내지 말고 계속 가면서 하라는 것입니다.
3. 능력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면 "병든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 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전도자에게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의사도 아닌데 무슨 재주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
이르리 깨끗케 하며 귀신을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이 전도하면서 당하게 될 사태들을 미리 말씀하시면서 고치
고 내쫓는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둘째, 전도는 전투라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하셨는데 귀신은 순순히 쫓겨가는 법이 없습니다.
귀신은 더럽고, 악하고, 나쁜 존재입니다. 귀신은 방해꾼이고, 훼방꾼입니
다.귀신은 이간질에 능하고 평화를 깨뜨립니다. 그 귀신을 내쫓는 방법은
귀신보다 더 강한 능력을 받으면 되는데 그 능력은 예수 능력인 것입니다.
전도는 귀신이 점령하고 있는 영역을 빼앗는 전투이기 때문에 능력을 받아
야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마지막 때 사단이 인류를 위협하는 도구로 핵무기, 에이즈
박테리아 등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능력을 받아서 고칠 것을 고치고 막을 것을 막아내고, 내 쫓을 것
은 내 쫓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주여 능력을 주옵소서.
4.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9-10절을 보면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전도 이외의 다른 부수적인 것들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도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전도가 과연 될까? 그 사람이 내 말을 들어 줄까? 그 날 나와 줄까? 그 사
람이 예수를 믿으면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 될까? 나는 어떻게 처신을 해
야 하는가? 등등 전도 자체보다 걱정거리가 더 많게 됩니다. 그런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마치 무전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처럼 알몸으로 떠났습니
다. 이유는 관광 떠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예비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 전도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도를
시작했고 하고 있고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염려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힘 주시고 동행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8:20에서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평안을 빌라고 했습니다.
12절을 보면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했고, 13절을 보면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아니
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여행 도중 어느 집에 들어갔을 때 평안을 먼저 빌라는것입
니다.
그리고 평안을 비는 행위는 오늘 우리에게도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전도는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면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평안이 성립됩
니다. 영혼의 참 평안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둘째, 평안한 마음과 태도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작정하고 기도하는 대장자와 말다툼을 한다든지, 입씨름을 한다든지,
마음을 상하게 하면 안됩니다. 예수 믿는 것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양보
하고 후퇴해야 합니다.
정신질환자를 상담요법으로 치료하는 사람은 고성을 지르거나 책상을 치는
법이 없습니다. 환자의 심리상태를 편하고 안정되게 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말씨와 태도가 부드럽고 안정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태도 역시 평안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자면서 한숨을 내
리쉰다든지 팔자 타령을 한다든지 하면 안됩니다.
예수의 복음을 평안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6:15에서 "평
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했습니다.
6.지혜롭고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16절을 보면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지혜와 순결은 기독교인이 지녀야 할 두가지 큰 덕목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손해만 보게 되고 순결이 없으면 손가락질을 당하게 됩니다.
전도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손가락으로 글을 써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문서 전도라고 합니다. 입으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개인
전도라고 합니다. 발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방문 전도라고 합니
다. 온 몸으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인격 전도, 삶의 전도라고 합
니다.
우리가해야 할 전도는 온 몸 전도입니다. 그리고 가면서, 가서 하는 전도
라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은 매우 중요한 주간입니다.
다음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1)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2) 자신의 건강과 감정관리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3) 다툼이나 충돌을 피해야 합니다.
4) 다음 주일은 전도 대상자의 시간과 여건에 나를 맞춰야 합니다.
5) 단 한 사람만을 대상자로 작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는 실패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6) 대상자를 계속 양육해야 합니다.
(1) 좋은 본을 보입시다.
(2) 덕을 끼칩시다.
(3) 그를 위해 계속 기도합시다.
(4) 계속 양육합시다.
가면서 전파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도 가면서 전파하라"고.
전도합시다.
하면 됩니다.
내가 합니다.
아멘.
발행일 : 940605
분 류 : 설교
51
제 목 :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기도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욘 2:1-10
요나는 주전 790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무대로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활동상황은 요나서 이외에는 별로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요나서의 특징은 하나님의 보편성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지마는 다른 민족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 본
서의 특징입니다.
어느날 요나는 그당시 최대 강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들어가 하나님
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곳으로 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길이 멀기 대문입니다.
육로로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배를 타고 가야 합니다.
둘째 감정문제입니다.
앗수르는 그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대국가였습니다.
셋째, 선민사상과 우월감 때문입니다.
요나를 포함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네만을 선택했다고 믿었습
니다. 그런에 앗수르 서울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요나의 신앙이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혀 다른 곳으로 도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원인이 요나
에게 있음을 발견한 선원들이 그를 바다에 던졌으며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 본서의 줄거리입니다.
1.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이유를 살펴봅시다
1)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1:3을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하
여"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요나의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는 그 발상과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은 요나의
신관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시편 139편에 나타난 시인 다윗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
며"라고 했고,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가서
거할찌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피하면 피해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러나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사람의 낯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
님의 낯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이 던지셨기 때문입니다.
1:4을 보면 "여호와께서 태풍을 바다위에 내리셨다"고 했고 1:17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라고 했
습니다.
왜 하나님이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던져 삼키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요나가 가는 길과 하려는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선지자로 부르신 이유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어디든지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
다.그런데 요나는 그것을 기피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기피자의 불안한 삶과 사명자의 떳떳한 삶을 비교해 볼 필요
가 있습니다.
요나의 기피행각은 그 목적지로 정했던 다시스에 가기도 전에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사히고 요구하시는 일을 회피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가를 본 사건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 물고기 뱃속을 [스올]이라고 했습니다. 스올은 음부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음명령을 거역한 사람이 들어갈 곳은 스올이라는 것입
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을 [스올]로 표현한 데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음부처럼 답답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은 스올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음부의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경우 앗수르의 국법을 어긴 일이 없습니다. 돈을 내지 않고 몰래 배
를 탄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실정법을 어기고 도피한 것도 아니었습니
다. 그러한 그가 스올의 고통 속에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
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뭣니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라는 것이었
습니다.
요나는 그 명령을 거역한 것이빈다.요나로서는 그 명령을 거역할 만한 충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상숭배하는 나라, 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리며 침략하려는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복했던 요나는 스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물고기 뱃
속에 있는 동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요나서 2장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2. 요나의 기도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2절을 보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
고 했습니다.
기도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했습니다.
4절을 보면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지만 신령한 눈을 들어 성
전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세상을 보고, 물질을 보고,
사람만 바라보며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은 회개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깜깜한 스올의 뱃속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삽니까?
딸만 넷을 낳은 어떤 사람이 42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너무 귀한 아들이
라며 아들을 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날마다 귀인이 바라보는 재미로 산다
면 즐거워했습니다. 그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갔습니다. 어느날, 귀인이가
잘못한 일이 있어야 야단을 쳤습니다. 그날 밤 가족들이 둘러 앉아 이런 저
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귀인이한테 물었습니다. "얘 구인이라 넌 엄마가 좋
으니 아빠가 더 좋으니"라고. 귀인이 대답은 당당하고 또렷했습니다. "난
엄마가 더 좋아. 아빤 싫어 보기도 싫단 말이야. 난 아빠하고 안 놀거야"낮
에 야단 맞은 후유증이 남은 셈입니다.
그러나 귀인이 아빠가 그 순간 많은 것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야단한번 맞
고 싫어졌다는 그 감정표현을 긍정적으로 보면 진솔하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그러나 자식만을 바라보는 재미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람들에게는 경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를 가장 놀라게 했던 슬픈 사건은 유산 때문에 부모를 살해
한 어떤 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부모가 그 아들을 낳아서 키우는 동안 기대와 꿈의 컸을 것입니다. 어쩌면
유명한 교수나 의사 아니면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나갈 한약사가 되어 준느
것이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휘두른 흉기에 부모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학축제에 참석한 대학생이 마음이 허전해 어느 집에 들어가
이유가 없이 흉기를 휘두른 사건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의 파생성, 고질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수입 오렌지족들은 한달에 600만원에서 800만원을 용돈으로 쓴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중병을 무엇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요나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다."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만이 우리 시대와 병든 역사와 정치와 살마
들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2) 영혼이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6절 끝을 보면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에서 건지셨다"고 했고, 7절을 보면
"내 영혼이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요나는 해결의 방법을 올바로 찾았습니다. 내 영혼이 피곤할 때 내 생명을
구덩에서 건져 내시는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피곤할 때, 고통스러울 때, 괴롭고 답답할 때 무엇을, 누구를 생
각하십니까? 파도가 철석거리는 동해안의 백사장을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안개꽃 펼쳐진 들녘을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나를 도와 주리라고 기대하는
그 누군가를 생각하십니까?
요나의 고백은 다릅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그
이유를 9절 끝에서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
나이다"라는 요나의 고백인 것입니다.
친구란 가장 필요할 때 생각나는 사람이며, 그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라
고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친구들은 내가 꼭 필요할 때 내곁에 있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부부도, 자식도 타인인 셈입니다. 어린 자식과 아내를
남겨둔채 어느 날 남편 혼자 훌쩍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그런가하면 자식이 노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요나는 고백합니다. "나는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노라"고, "나
의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고.
이 고백은 오늘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인생 삶이 피곤할 때
주님을 생각한다","나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 이 고백이
곧 나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서의 결론은 요나가 니느웨로 들어가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는 것으로
끝납니다. 요나의 오침을 듣고 니느웨에 살고 있던 왕과 대신들과 신하들과
백성들이 옷을 찢고 무릎쓰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최근 잇달아 터지는 대형 사건들과 패륜을 지켜 보면서 니느웨의 회
갱누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6월 12일은 요나운동과 그리고 니느웨 운동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예수가 진실로 그 역사 속에 들어가고 가정 속에 들어가고 부모 속에 자식
속에 들어가면 패륜이나 죄악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교회 마당을 가득 매운체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는 것
을 볼 때면 행복하고 가슴이 벅찹니다.
예수를 전합시다.
예수를 말합시다.
예수를 이야기 합시다.
병든 역사,무너진 도덕, 망가진 정신이 다시 살려면 예수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전도 합시다.
하면 됩니다.
내가 합니다.
발행일 : 940529
분 류 : 설교
52
제 목 : 저주받은 도시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마 11:20-24
현대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구 집중문제, 교
통문제, 주택문제, 대기오염, 환경파괴,범죄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세계의 어느 나라를 가 봐도 도시가 크면 클수록 그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도 큰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대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시규모가 크면 클수록 문제도 크
고 많았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도시가 오늘까지 남아 있는 것도 없
어져 버린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돔과 고모라 라든지, 폼페이 같은 도시는 없어졌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도시도 없어졌습니다. 그 세도시는 고라신, 벱세다, 가
버나움입니다. 그 세도시는 서울이나 뉴욕처럼 큰 도시느니 아닙다만 그러
나 그 당시 그 지역에서는 큰 도시 구실을 했습니다.
그 도시들이 왜 없어졌는가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현대 도시의 성격 규명
과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불신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
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라고 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불신의 결과입니다. 믿으면 회개운동이 일어납니
다만 안 믿으면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도시를 사람으로 의인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라신,벱세다,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
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인간의 도리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과정입
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가 없으면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다음과 같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자각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느끼고 발견해야 합니다.
둘째 단계는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와 가지고 있는 잘못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변명하거
나 핑계를 대면 안됩니다.
셋째 단계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도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 하고 믿음도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다
시 말하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낱낱이 마치 자술서를 쓰는 것처럼 내가 지은 죄를 숨김없이 고백해
야 합니다.
넷째 단계는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고백만으로 끝나 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내가 고백한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다섯째 단계는 사죄를 믿어야 합니다.
내가 내 죄를 고백하면 그리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약속하고 있
습니다. 눈보다 더 희개 양털보다 더 희게 사하신다고 약속하셨고(사
1:18), 우리의 죄를 도말하신다고 했습니다 (사 44:22). 그리고 동이 서에
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가를 멀리 옮기시겠다고 했습니다 (시 103:12).
여섯째 단계는 돌아서는 것입니다.
참회개는 거기서 돌아서야 합니다. 거기서 발을 빼고 손을 씻고 그 현장을
떠나야 합니다. 죄에 대해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참된 회개는 방향을 바꾸
는 것입니다.
일곱째 단계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돌이켰으며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딴데로 가면 안됩니다.
여덟번째 단게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되돌이 근성이 있습니다. 회개했노라고 하지만 옛날 그때 거기
로 되돌아 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른다면 죄길로 되돌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 하
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대로 따라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고라신 도시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도 목격했습니다
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현대 도시들은 어떻습니까? 서울 장안에 사는 사람치고 교회를 모르는 사
람과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극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
니 서울 시민 1200만을 생각할 것까지도 없습니다.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 내 친구들 가운데 고라신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가 없으면 그 다음은 멸망 밖에 없는 것입니다.
2.교만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
지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에 올라 가겠다고 설쳤던 루시퍼 천사가 있었습니다.
그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시날 평원에 모여 성을 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벽
돌을 만들고 역청을 만들어 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성의 높이는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이었고 그 목적은 하나님을 낮추고 자
기네 이름을 떨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탑은 무너졌습니다. 인간이
최초로 쌓으려 했던 교만의 탑은 지금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역시 교만과 패륜과 부도덕과 불신
때문에 유황불에 녹아 없어졌습니다.
개인도, 도시도, 역사도, 왕조도 교만하면 안됩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의
교만은 금물입니다.
바벧론 왕조의 느브갓네살 왕은 교만 때문에 쫓겨났고, 이스라엘의 사울
왕도 왕위에서 쫓겨갔고, 페르시아의 국무총리 하만도 교만 때문에 죽었습
니다.
영국의 신학자였던 테일러(Jeremy Taylor)는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무엇
이었는가를 생각해보라. 그때 당신은 無였다. 그후 여러해 동안 당신은 무
엇이었는가를 생각해봐.그것은 연약함이었다.
그 다음 당신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큰 죄인이다. 당신은 이웃
과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부모와 이웃에게 빚진 자이
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한다면 날마다 우리는 겸손해야 된다"라고 했습니
다.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 산정현 교회의 청빙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대표로
조만식장로님이 주기철 목사님을 찾아가 교회의 청빙결정을 전하고 모시기
로 했습니다. 주기촐 목사님을 찾아온 조만식 장로님은 젊은 주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저희 교회에 부임하실 것을 허락해 주
십시오"라고 청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학교
를 다닐 때 조만식 장로님은 교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일화도 있습니다. 어느 주일 낮 조만식 장로님이 바쁜 일로 예배에
늦었습니다. 황급히 들어서는 조만식 장로님을 본 주기철 목사님이 소리쳤
습니다. '조장로님 거기 서 계십시오. 장로님이 예배에 늦으면 어떻게 본이
되겠습니까?" 그날 조장로님은 문간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 다시
는 예배에 늦지 않겠다고 사과를 했다는 것입니다.
초대 한국교회를 빛냈던 두 거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다던 가버나움 도시는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가버나움만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만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가운데 가온(gaon)이라는 말이 있스빈다. 그 뜻
은 "베풀다"라는 것입니다. 자기 실체나 가진 것은 손톱만한 것인데 그것을
부풀려서 마치 세상 것을 다 알고, 다 가졌고, 다 통달한 것처럼 자기도취
에 빠져 있는 것이 교만 즉 [가온]인 것입니다. 주드(zud)라는 단어도 있습
니다. 그 뜻은 우쭐대다. 거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을 가장 적절하
게 묘사한 헬라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투포(tupho)라는 단어입니다. 그 뜻
은 "천천히 타 버리다","꺼져가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사람
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일어섭니다. 그렇지만 교만한 사람은 천천히 마
치 촛불이 꺼져가는 것처럼 천천히 타버리고 맙니다.
그뿐입니까? 교만은 언젠가는 명성도,성공도, 소유도,인기도 꺼져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편 119:21을 보면 '교만은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6을 보면 "주께서는 굡나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만을 멀리 해야 합니다.
3.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라신,벱세다,가버나움,이 도시들이 왜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졌습니까?
20절을 보면 "책망을 받았고",21절을 보면 "화가 있을찐저"라고 저주를 받
았습니다. 그리고 23절을 보면 "음부에가지 낮아지리라"는 책망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땅도, 사람도 국가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저주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
니다.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 벗은대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러나 셈과 야벱은 얼굴을 돌리고 뒷걸음질로 들어가 옷을 덮어 드렸습니다.
잠이 깬 뒤 노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됐고 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바로 그 함의 자손들이 훗날 시돈, 그랄, 소돔,고모라에 흩어져 살았고 흑
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저주의 반대는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
가 바라는 것은 축복입니다. 나와 내 가족과 내 친척과 내 이웃과, 내 친구
와 그리고 우리나라가 축복받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복도 여러가지입니다. 재물의 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 명예의 복, 부부
이 복 등 그 종류가 가지가지 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복음 다 받거나 소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서 한 가지 복을 선택해야 된다면 여러분은
어떤 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예수 믿는 복을 선택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복의 비결이기 때문입니
다.
저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제대로 먹고,입고,
쓰는 것이 한스러울 만큼 부러웠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서 제가 제일 가
난했습니다. 그러나 제 어머님은 저에게 예수 믿는 것과 공부하는 것은 그
만두어선 안된다면 논을 팔고 밭을 팔아 공부를 시켜 주셨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공부를 계속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무엇이 무엇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눈앞이 아찔합니다. 박도둑놈
이 됐을까?깡패가 됐을가?아니면 벌써 죽었을까? 생각할 수록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몸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는 찬송이
감격으로 다가섭니다.
여러분, 불신은 저주의 원인입니다. 교만은 저주와 패망의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버립시다. 믿음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저주받아 죽어가는 내 가족, 내 친척,내 이웃, 내 친구들을 건져냅
시다.
저들에게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만난 예수
내가 사랑하는 예수
내가 받은 구원을 증거합시다.
저들을 저주의 무더기 속에 방치해 둘 수가 없습니다.
건져내야 합니다.
살려내야 합니다.
함께 축복받고 영생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발행일 : 940522
분 류 : 설교
53
제 목 : 한나의 성공비결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삼상 1:21-28
한나는 엘가나의 아내였고 불임증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사무엘을
낳아 유명한 선지자로 키웠을 뿐만 아니라 3남 2녀를 더 낳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성공을 한 것입니다.
1.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1:10을 보면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라고 했고,
1:12을 보면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라고 했고, 1:17을 보면
기도하여 구한 것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20을 보면 아들 이름을 사
무엘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라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한나의 기도로 문제를 푼 사람입니다.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불가능을 기도로 해결한 것입니다.
돼지는 병들어 드러누웠을 때 외에는 하늘을 보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병
아리도, 참새도, 소도, 말도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있지만 유일하게 돼지
는 땅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땅만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
람은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인간을 [안드로포스]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위를 바라보
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돼지처럼 병들어 드러누워야만 하늘 바라보고 소리친다면 그것은 불행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나는 기도로 문제를 해결했고 불임증을 고쳤고 자녀교육도 성공했습니
다.
2. 은혜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1:18을 보면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한나가 당시 제사장인 엘리에게 한 말입니다만 그러나 그것
은 그녀가 평소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고 갈망했는가를 설명해 주
고 있습니다.
은혜를 사모한다든지 갈망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없인 못한
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못산다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그 기간은 잠깐입니
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그 길이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사는 사람은 그가 누리는 건강과 행복과 성공이
길고 영원하게 됩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했던 한나는 그의 원대로 은혜를 받았고 그 결과 자
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3. 믿었기 때문입니다.
1:18을 보면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17절을 보면 한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엘리 제사장이 알려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후 한나는 집으로 돌아가 먹고 마시며 평안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나에게 직접 응답하신 것도 아니고 엘리 제사장을 통하여 응답
을 주셨습니다만 한나는 그 응답을 확신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환상을 본 일도 없고 음성을 들은 일도 없고, 계시를
받은 일도 없지만 엘리의 말을 그대로 믿고 그곳을 떠나 집으로 갔고 평안
을 찾게 되었습니다.
믿으면 믿는대로 됩니다.그러나 안 믿으면 안 믿는대로 안 됩니다.
한나의 성공비결은 믿음입니다.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믿음이 그녀에게
응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캐나다의 핼리팩스의 어느 호텔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긴급 출동한 소방
차들이 물을 뿌리고 투숙객들이 뛰어내릴 수 있도록 땅 위에 그물을 쳤습니
다. 한 아버지가 자기 어린 아들을 창문을 열고 던졌습니다. 그 아이는 그
물 위에 떨어져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 화재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구조된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신문기자가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너를 창 밖으로 던질 때
무섭지 않더냐"고 그러자 그 아이는 "무섭긴요, 아버지가 저를 위험한 데로
던졌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겨 버리는 믿음 일단 맡겼으면
믿고 평안한 마음을 지니는 것,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 밖으로 집어 던졌다고 합시다. 위험한 곳으로 던졌겠으
며 죽어 없어지라고 던졌겠습니까?
로마의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신하들에게 로마의 신에게 절하고 숭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대부분의 신하가 명령대로 로마 신에게 절을 하고 숭배
를 했지만 그중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드은 곧바로 투옥되
거나, 관직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기상천외의 인사를 단했습니다. 자기
명령에 복종한 신하는 다 내쫓아 버리고 자기 명령에 불복하다가 쫓겨난 신
하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요직에 앉혔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자기가 믿는 신에게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는
사람은 자기 왕에게도 충성을 다할 것이며 자기 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자는
신뢰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을 지킵시다. 불구덩이에 집어 넣어도 믿고, 창 밖으로 던져도 믿고,
내쫓겨도 믿음만은 버리지 맙시다.
4.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1:28을 보면 이적으로 낳은 아들 사무엘을 젖을 뗄 때까지 데리고 있다가
곧바로 성전으로 데리고가 그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녀 자신이 믿음으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이들도 하나님께 드리고
믿음으로 키웠습니다. 젖을 뗄 때까지만 양육을 책임졌고, 젖뗀 후엔 성전
에 맡겨 버렸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자녀교육에 과단성이 있었음을 보여 줍
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과잉보호 속에서 자랐기때문에 커서도 마마보이 틀을 벗
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주일 어른 예배와 같은 시간대에 맞춰 영아부
예배가 실시되고 있습니다.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무엘처럼 어려
서부터 신앙과 예배를 가르치자는 것이고, 다른 하는 부모의 과잉보호부터
해방시키자는 것입니다.
영아부 책임자의 말에 의하면 처음 엄마를 떨어질 때 몹시 울고 보채기만
한달만 훈련하면 적응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학원에 맡기고, 과외 선생한테는 맡기면서 그것도 막대한 돈다발과 함께
사정사정해서 맡기면서 거저 맡아주고 가르쳐주고 그 영혼을 살리는 교회에
맡기는 것은 주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면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교회 나와 예배드리는 가정은 복받은
가정입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의 두변째 왕으로 40년 동안 나라를 통치한 성군이었으
며 메시아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저이나 자녀 교육엔 실패자였습니다.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잘못된 결혼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딸인 미갈과 정략적으로 결혼했습니다. 미갈은 냉소적인
여자였고 부정적인 여자였습니다. 본래 사랑없는 정략 결혼이었던 탓으로
부부사이가 편치 못했습니다.
밧세바는 충신 우리아의 아내였는데 우리아를 암살하고 힘으로 빼앗아 아
내를 삼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무엘하 5:13을 보면 그는 수많은 처첩들을 권력을 빙자해
거느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첩간의 갈등, 적자 서자간의 갈등이 겹쳐 가
족관계와 가정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만 것입니다.
둘째 신앙교육의 실패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가운데 압살롬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왕 다윗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반
란군을 이끌고 다윗을 추격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만 생각해 보면 기
가 막힐 일입니다.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뒤쫓아 다니는 아들, 아들을 피해 망명생활을 해야
하는 아버지, 그 집안 꼴이 뭣니까?
다윗은 정치,성공,출세, 전쟁 때문에 자녀 교육을 바로 하지 못했습니다.
30여년 전에 미국에 건너가 공부하고 부부가 목회를 하는 목사님 가정이
있습니다. 3남매를 미국에서 낳아 길렀습니다. 그런데 그 3남매는 한국어도
잘 합니다만 부모말에 절대 순종입니다. 미국 아이들이 냉수처럼 마시는 코
카콜라도 건강에 좋지 않으니 먹지 말라고 했다면 코카콜라도 마시지 않을
정도입니다. 두 아이는 대학 다니고 한 아이는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순종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렇게 된 비결은 간단합니다. 매일 그 가정은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아
침에 못 드리면 저녁에라도 반드시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바로 그 예배시간이 복받는 시간이었고 가정교육의 시간이었고 가족 만남
과 교제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내일부터 가정예배를 시작합시다.
사도 행전 10정을 보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지는 한 가정이야기
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고넬료 가정입니다. 로마 장교인 그의 가정이
그토록 모범적인 가정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가족 신앙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행전 10:2을 보면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라고 했습니
다. 그리고 사도행전 10:24를 보면 "일가,친척,친구들을 모아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온 가족, 친구, 일가,이웃들의 영혼 구원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
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친구들을 모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도 선교사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는 "만일 종교가 가정에 머무를
수 없다면 성전에 제아무리 많은 종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구원시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청소년 범죄로 법정에 서는 청소년의 80
는 신앙 훈련이 없은 가정 출신의 아이들이며, 이혼부부의 90%는 가정 예배
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한나나 고넬료의 성공비결은 기도와 가족 신앙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
다.
둘째, 성령을 충만히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44을 보면 "성령이 말씀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고 했
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윤활유와 같기 때문에 불편한 부부관계, 삐걱거리는 가족관
계를 부드럽게 해줍니다. 그리고 성령은 깨닫게 하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죄와 잘못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령은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족이 성령을 받으면 태도가 변하고 언어가 변하고 생활이 변합니다.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 내 친구를 예수의 사람으로 만듭시다.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니까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행복이 오고 내 가정에 평화가 오는 첩경인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에는 네 쌍의 행복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곧 빅토리아
여왕부부,시인 브라우닝 부부, 캐논 버틀러와 조세핀 버틀러,윌리엄 우드부
부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행복한 부부는 신앙생활을 잘 했던 부부였
습니다.
6월 12일은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내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해 오는
날입니다.
1) 대상을 정합시다.
2) 그를 위해 1,3,5 기도를 드립시다.하루 세번 5분이상.
3) 그에게 내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립시다.
4) 그리고 6월 12일을 미리 알립시다.
5)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와 친절을 다합시다.
6) 계속 기도로 공격합시다.
7) 결과를 믿고 전진합시다.
오 주님, 나도 한나처럼, 고넬료처럼 가족구원과 신앙에 성공하게 하소서.
발행일 : 940515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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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어떤 부자의 일생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눅 16:19-31
초년 고생은 돈주고 사서도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년에는 고
생을 하고 살더라도 그 고생 때문에 성공하고 행복해진다면 고생을 참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초년은 행복했지만 중년기와 노년기를 불행하게
보내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초년은 행복했지만 그후의 삶은 처절한 불행으로 이
어졌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한 부자의 일생을 통해 주시는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편의상 부자의 일생을 둘로 나누겠습니다.
1. 죽기 전의 삶
19절 첫머리를 보면 "한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
었는가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의 이름이나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가
남긴 업적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습니다.
짐작컨대 유산을 물려 받았는지 자수성가를 했든지 아니면 때를 잘 만나
벼락부자가 됐든지 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는 생전에 호의호식했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자색옷
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고 했습니다.
자색옷과 고운 베옷은 그 당시 부자들과 상류층 사람들이나 입을 수 잇는
의상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사치와 연락으로 꾸며졌고 안일과 방종으로 채
워졌습니다.
미국 문화를 파티문화라고도 합니다. 그들은 파티를 즐깁니다. 그러나 매
일같이 파티를 즐길 수는 없습니다.
여가도 즐겨야 합니다만 나마다 놀고 먹는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여가를 영어로 리크레이션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재창조(Recreation)라는
것입니다.
호의호식하고 날마다 파티열고 사치와 방종을 일삼았던 어떤 부자의 이야
기는 그의 삶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무절제한 삶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심
심찮게 재벌 2세들의 파행적 삶이 언론에 오르내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신
문 가쉽은 타락한 재벌2세들을 가리켜 "먹고 놀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라
고 꼬집었스비다. 먹고 입고 여가를 즐기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닙
니다. 먹고 입고 여가를 즐기는 행위가 재생산을 위한 준비나 재충전을 위
한 것이라면 탓할 것도 없고 지탄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부자처럼 날마다 새옷 갈아입고 식도락을 즐기고 호화파티
를 열어 주지육림에 빠진다면 그것은 제아무리 제돈 쓰고 하는 짓이라고 하
더라도 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의 결정적인 큰 잘못은 다른데 있습니다.
그는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외면한채 살았습니다.
빌립보 3:19을 보면 하나님을 외면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
이 지적했습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두차례나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
다.
출애굽한 이후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
해낸 신이라며 숭배했습니다. 그때 주모자는 아론이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사마리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하나님이라고 숭배했습
니다. 그때 주모자는 여로보암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는 부자는 황금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배
가 신입니다. 그러다가 멸망으로 그 삶을 끝내고 마는 것입니다.
돈이 많다는 것이나 재산이 많다는 것은 결코 죄나 악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돈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
다.
본문의 부자는 살아있는 동안 가진 것 때문에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2. 죽은 후의 삶
22제을 보면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라고 했습니다. 죽음에 예외가 없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죽은 후부터입니다.
고통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23절을 보면 "저가 음부에서 고통중에"라고 했고 24절 끝을 보면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사치스럽고 화려했던 삶은 끝났습니다. 드디어 음부의 고통과 고민이
시작된 것입니다. 유대이은 음부를 [스올]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올은 악인
이 들어가는 곳인데 신약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가는 곳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잘 믿고 잘 살았기 때문에 지옥에 들어간 것이아니라 그
의 교만과 불신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안믿으면 지옥갑니다. 어제까지 떵떵거리고 세도부리고 잘 살던
사람의 신세가 변해서 불구덩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됐다면 변해도너무 많
이 변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잠깐 잘 살다가 영원한 고통의 세계에서 들어가게 된 것입
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마 10:28을 보면 "몸과 영혼이 함께 형벌받는 곳"
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불못,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 불과 유황이
타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거기 들어갑니까?
마귀와 그 사자(마25:41),믿지 않는자 (계 21:8),우상숭배자(계21:8),범죄
한 천사(벧후 2:4),거짓선지자 (계 19:20)등이 들어갑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첫째, 모든 욕구가 거절당하는 곳입니다.
본문을 보면 나사로를 보내 손끝에 물을 적셔 혀끝을 서늘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거절당했습니다. 나사로를 고향에 보내 다섯형제에게
전도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것도 거절당했습니다. 내 맘대로 안되
는 곳,인간적 욕망과 욕구가 거절당하는 곳입니다.
둘째, 단절의 세계입니다.
26절을 보면 건너갈 수도 올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한번가면 그것으로 끝
입니다. 되돌아올 수도 없고 기어서 나오는 방법도 없습니다. 편지를 주고
받을 수도 없고 친선방문을 할 수도 없습니다. 천주교 사람들처럼 돈많이
바치면 빠져나올 수 있다든지 기도를 많이하면 천당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
도 아닙니다.
죽는 순간 다시말하면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순간 지옥과 천당으로 갈라집
니다. 그리고 그 시간부터 그 누구도 어떤 노력으로 내왕이 불가능한 것입
니다.
지옥설교는 부담스러운 설교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교인이 지옥가는 것
을 방치하지 않으려는 목사라면 지옥얘기를 안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 고통의 세계입니다.
23절을 보면 "고통 중에"라고 했고24절을 보면 "고민하나이다"라고 했고
25절을 보면 "고민을 받느니라"고 했고 28절을 보면 "이 고통받는 곳에"라
고 했습니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이란 편한 것, 고통
없는 것입니다. 행복찾기에 전력을 쏟는 사람들이 왜 지옥의 고통을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까?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그때마다 놀라는 사실이 있습니다.그것은 부자의 다
섯형제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이 고
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지옥의 고통을 견디다 못한 부자는 한방울의 물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
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다섯형제가 살고 있는 고향에 나사로를 보내 이 사
실을 알려주고 그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물론 그것
도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의 영원한 고통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만이라도 지
옥에 오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여기서 우리와 그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형제가 없습니까? 오늘 죽으면 지옥갈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내 이웃이 없습니까>
내 형제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옥간 부자만도 못하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출애굽기 32:32에서 모세는 범죄한 동족의 죄를 용서해 주시든지 아니면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주시든지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자신
의 생명을 내걸고 동족구원을 기도한 것입니다.
로마서 9:3을 보면 바울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노라"고 했습니다. 내가족,내
친척,내 친구, 내 이웃을 향한 영적 관심이 지옥같 부자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스겔서 33:6을 보면 파수군이 자기 책임을 다 못해 성이 점령당하고 그
성 사람들이 적의 칼에 죽게된다면 "그 죄를 파수군의 손에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내가 예수 안믿으면 지옥가는 걸 알면서도
전도하지 않은 탓으로 내 부모, 내 형제, 내 친척, 내 이웃이 지옥을 가게
된다면 그들은 불신과 교만 때문에 지옥을 가게 되겠지만 그들이 지옥가게
된 그 책임은 전도하지않은 네게 물으리라는 것이빈다. 다시 말하면 그 피
값을 네게서 찾으리라는 것입니다.
8년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시내 모교회를 다니는 50대 후반의 여인이 저희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등록교인이 아니기 땜분에 깊은 관심이나
돌봄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구역장을 통해 심방 요청이 있
어서 벼르다가 심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에도 문제가 있는 듯했고 가
족관계도 복잡한 것같았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정신건강도 정상이 아니었습
니다. 그에게 가정의 안정과 본인의 건강을 위해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권
면과 함께 기도를 드리고 그 집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지방을 내려가는데 차중에서 갑자기 그 분 생각이 떠오르면서 궁금하고 급
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건강은 어떤지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는지, 가정은
안정이 됐는지 전화라도 당장 걸어보고픈 마음은 들었지만 고속도로였기 때
문에 지방에 그대로 내려가 저녁모임을 마친 후 교회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여자가 고층아파트에
서 투신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 그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립니다. 그리고 구원의 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 이시간에도 지옥으로 굴러떨어져가고 있는 내 가족이 있습니다. 내
형제가 있습니다. 내 친척이 있습니다. 내 이웃이 있습니다. 참효도가 무엇
입니까? 그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그들을 내버려둘 생각입니까?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녀, 내 형제,내 친족, 내 친구, 내 이웃이 지옥불
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방관만해야 합니까?
대상자를 찾아 정합시다.
기도를 시작합시다. 1,3,5, 기도를 시작합시다. 금식,철야,새벽연속,모든
기도를 총동원합시다. 모세처럼, 바울처럼, 내 생명과 맞바꾸는 기도를 합
시다.
대상은 가장 가까운데서 찾읍시다. 내 가족, 내 친족, 내 이웃,내 친구 중
에서 찾읍시다.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저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힘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려하지맙시다. 주님께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심하지 맙시다. 성령께서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6월 12일, 그날은 마귀가 통곡하고 귀신이 벌벌떠는 날이 될 것입니다.
주여 승리하게 하소서. 지옥 권세가 무너지게 하소서. 전도합시다. 하면
됩니다. 내가 합니다. 아멘.
발행일 : 940508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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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나님이 주신 기업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시 127:3-5
시편 127편은 이스라엘의 3대왕이었던 솔로몬이 읊었던 시 가운데 하나입
니다. 시의 길이는 짧지만 담고 있는 뜻이 아름답기 때문에 널리 애송되고
있습니다.
본편은 둘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1-2절은 하나님을 외면했을 때 오는 불행
한 결과에 대하여 3-5절은 하나님게서 주시는 축복에 대하여 밝히고 있습니
다.
1-2절의 요지는 개인도, 가정도, 국가도 하나님이 세우시고 지켜주실 때
그 존재와 위상과 행복이 지켜진다는 것입니다.그리고 3-5절에서는 하나님
이 주시는 자녀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녀란 내가 낳은 자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낳은 것만으로 자식이 되는 것
인 아닙니다. 올바른 양육이 자식을 자식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자식을 세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7:6을 보면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
께서 지상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했습니
다.
그리고 창세기 17:8을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
셨습니다. 여호수아 11:23을 보면 훗날 가나안 땅을 점령한 아브라함의 후
손들이나 가나안 땅을 기업을 차지하게 됩니다.
구약의 경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하셨고 그
들에게 가나안땅을 기업을 주셨습니다.
신약의 경우를 보면 기업의 의미가 다분히 영적인 것으로 발전합니다.
마태복음 25:34을 보면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했고 계시
록 21:7을 보면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두
구절의 뜻은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자식을 가리켜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이나 영원한 천국을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것처럼 자식은 하나
님이 주신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기업은 일회용품이 아닙니다. 자손만대 물려나가야 하는 유산이며 축복입
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이 받은 기업인 가나안 땅을 오늘
가지 지키고 유지하고 물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의 경우도 가정과 가문을 이어나가야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
니다.
말씀드린대로 기업은 지키고 전승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화민족일수록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전승해 나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문화재를 대하는 국민정서에도 문제가 있고 문
화재를 관리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문화지 밀반출사건이라든지 도굴이 그 한 예입니다.
그리고 불교사찰이나 불상등을 문화재라는 이유로 막대한 국고지원은 물론
신개축에도 국고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위대한 문화유산이라고 하더라도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없습니다.
영원한 기업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키고 아끼고 가꾸어야
할 기업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녀입니다.
제아무리 잘 지은 집도 관리가 소홀하면 금방 낡고 냄새가 납니다. 얼마전
모 교회 기도원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하룻밤 집회인도를 맡았기 때문에
거기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원은 규모도 그려니와 시설도 최
신시설이었습니다. 건축한지 7년 정도된 건물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하
룻밤을 지내며 악취와 싸워야 했습니다. 화장실 냄새가 방 안에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골 여인숙 화장실 냄새와 같은 악취가 배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관리
소홀의 결과였습니다. 건축물의 경우만은 아닙니다.
자식이라는 기업도 관리를 잘못하면 쓰러지고 벽에 무너지고 망가지고 냄
새나게 됩니다.
충청북도 어느 시골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벽에 걸린 족자에 눈이 쏠렸습니
다. 서툰 붓글씨로 쓴 족자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었습
니다.
"꾸지람 속에 자란 아이 비난하는 것 배우며
미움받으며 자란 아이 싸움질만 하게 되고
놀림당하며 자란 아이 수줍음만 타게 된다.
관용속에 자란 아이 참을성을 알게 되며.
격려받으며 자란 아이 자신감을 갖게 되며
칭찬받으며 자란 아이 감사할 줄 알게 된다.
공정한 대접 속에 자란 아이를 올바름을 배우게 되며,
안정 속에 자란 아이 믿음을 갖게 되며
두둔받으며 자란 아이 자신의 긍지를 느끼며
인정과 우정 속에 자란 아이 온 세상에 사랑이 충만함을 알게된다."
어떤 어머니가 교육학자에게 물었습니다.
[자녀 교육은 언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지금 댁의 자녀는 몇살이나 됐습니까?]
[다섯살입니다.]
[서두르십시오. 5년이나 늦었습니다.]
자식은 내가 낳긴 했습니다만 하나님이 주신 기업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은
하나님의 기업으로 믿고, 키우고,지키고, 관리해야 합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회원은 1천명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만든 좋은 아버지 20계명을 소개합니다.
(1) 공부하라는 말을 줄이고 먼저 독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라.
(2) 식사시간에는 가족과 대화를 많이 하라.
(3) 자녀가 스스로 판단한 일은 존중하라.
(4) 한번 한 약속은 꼭 지켜라.
(5) 아무리 화가나도 자녀를 직접 손으로 때리지 말라. 꼭 필요할때는 벌
을 서게 하거나 회초리를 쓰라.
(6) 똑같은 일로 두번 야단치지 말라.
(7) 함께 여행하는 등 자녀와 공동의 경험을 쌓아라.
(8) 자녀가 좋아하는 책이나 어린이 프로를 같이보라.
(8) 힘든 일이라고 자녀를 참여시켜 협동심을 길러라.
(9) 자녀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지말라.
(10) 똑같은 일을 두번 야단치지 말라
(11) 자녀 앞에서 신호를 어기거나,새치기,거짓말을 하지말라.
(12) 자녀와 함께 문구점과 서점에 자주가라.
(13) 가훈을 정하거나 가족놀이를 만드는 우리집만의 분위기를 만들라.
(14) 휴일은 박물관 견학,가재도구 손질,독서등으로 다양하게 보내라.
(15)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가정의 역사가 얽힌 것을 소중히 다루라.
(16) 자녀 앞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 좋은 점만 이야기하라.
(17) 다 쓴 물건은 바꿔쓰고 안쓰는 물건은 재활용하는 본을 보이라.
(18) 자녀가 자신의 의견을 스스럼없이 조리있게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
등 입니다.
요약되는 기둥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먼저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
다.
어떤 사업가가 대학 총장을 찾아가 그 대학애 입학한 자기 아들에 관해 부
탁을 했습니다.
[총장님 저는 19년동안 제 아들을 키웠습니다만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
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잘못됐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부디 총장님께
서 잘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총장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 19년동안 이해하지 못하고 바로잡지 못한 아들을 제가
4년 동안에 이해하고 바로 잡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기도로 키웁시다. 말
씀으로 키웁시다. 믿음으로 키웁시다. 진학보다,성공보다,성적보다 더 중요
한 것은 건강입니다. 그리고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지금 자
녀의 믿음이 어느 지점에 이르렀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2.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7:16을 보면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하
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고 열국의 어머니가 되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
이라는 것입니다.
런던에 있는 국립미술관에 들어가면 "코르넬리아와 보석"이라는 제목이 붙
은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그림은 두 여인이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
입니다. 한 여인이 코르넬리아에게 자신의 진주목걸이를 보여 주면서 당신
의 보석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코르넬리아는 자신의 품에 안고 있
는 두 아들을 바라보며 이 아이들이 나의 보석이라고 대답했다는 내용의 그
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상급으로 자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상
급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갈무리 하지 못한다면 그 상은 때로 욕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벤자민 스포크박사의 [육아법]이라고
말합니다. 전세계의 어머니들과 정신과 의사들과 소아과 의사,교사,심리학
자들이 그 책을 읽었습니다.
스포크는 말했습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를 다루고 가르치는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정신과의사,심리학자,교사,사회운동가,
소아과 의사들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부모들이 물
려받은 유산은 오늘날에도 타당하며 놀라운 결과를 낳을만한 생산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
금메달리니스트는 그 메달을 다른 사람의 목에 걸어주지 않습니다.
자기 목에 걸고 자기가 보관합니다.
흔히 자녀교육을 부모는 포기해 버린 채 특정한 기관에 맡기면 되는 것으
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교육의 경우도 부모가 올바로 신앙생활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최대한 교육시걸과 재원을 투자해야 합니다.
만일 자녀가 잘못되고 그 삶이 망가졌다면 그것은 일차적인 원인과 책임이
부모와 가정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더 빛나게
해야 합니다.
3. 젊은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같다고 했습니다.
젊은시절에 낳은 자녀는 그 부모가 노쇠했을 때 그 부모를 보호하고 그 영
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전쟁은 창이나 활이 주무기였습니다. 그런데 장군의 전통에 화살이
떨어졌다면 그 장군은 전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시인은 자식을 전통에 가
득 꽂혀있는 화살로 비유했습니다. 그만큼 든든하고 영광스러운 것이 자식
이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둔 부모는 언제나 두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는 지식 때문에 영광받게 될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자식 때문에 얼굴
을 들지 못하지도 모르는 불행한 가능성입니다.
열왕기상 15:26을 보면 나답이라는 왕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아비의 길로 행하며"라고 했습니
다.
나답 왕은 아버지처럼 못된 왕, 나쁜 왕이된 것입니다.
영국의 설교가였던 스펄젼(Spurgeon)목사는 "우리 교회에는 2700명의 교인
이 있다. 그들 중에는 때때로 제명해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 어려서부
터 믿음생활을 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페르시아 격언중에 "만일 당신이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자
녀들을 올바르게 가르치라 이유는 그들이 행한 모든 선행의 공로는 결국 당
신에게 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영광이 되고 자랑이 되려면 부모가 그 자녀에게 신앙의 영
향과 유산을 물려 주어야 합니다. 주의 자녀를 주의 말씀으로 키워야 합니
다. 내가 물려준 신앙의 유산만큼 자식은 나에게 영광이 되고 보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업이며 상급이며 화살같은 자녀들을 정성과 기
도와 말씀과 믿음으로 키웁시다.
발행일 : 940501
분 류 : 설교
56
제 목 : 실패에서 성공으로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요 21:1-6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 가운데 하나입
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몇몇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고 있었고 그곳에 다시 사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라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과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다
시 성공할 수 있다는 두가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가지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1. 실패원인
조건없는 실패는 없는 이유없는 고난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원인없는 실
패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지 못한 이유
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1) 과거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본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리잡던 어부
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주님은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고 부르셨고 3년동안 훈
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신 다음 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가 처형당하자 급히 예루살렘을 떠나 주셨
습니다. 돌아간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베드로가 말했을 때 다른 제자
들도 따라 나섰다고 했습니다. 이미 3년전 떠났던 곳으로 그들은 되돌아간
것입니다.
문제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경륜이나 연배에 있어서 그리고 예수님의 사
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점에 있어서 수장이었습니다. 만일 그때 그가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러 간다"고 나섰더라면 다른 제자들도 따라 나섰을 것
입니다. 그런데 그가 앞장서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면서 나서는 바람
에 다른 제자들도 따라 나서게 된 것입니다.
주경학자들 가운데는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간다고한 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기 때문에 갈릴리로 다른 제자들은
데리고 가기위한 방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맥
락은 허탈감과 실망감 때문에 십자가의 도시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마을 갈
릴리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과거로 돌아간 것입니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던 젊은이가 은혜를 받고 주의 종이 되
기로 결심한 후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3년동안 신학을 공부한 후 경
기도 시골마을의 전도사로 부임을 했습니다. 60년대 중반이었으니까 전도사
대우라는게 형편없었던 때였습니다. 회사에서 받던 월급의 7분의 1도 되지
않는데다가 전도사를 괴롭히는 몇 사람이 사사건건 문제를 삼고 나섰습니
다. 마침 그 무렵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사람이 필요하다며 승진발령을 내
줄테니 다시 나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주저치 않고 짐을 경기도 시
골교회를 떠나 회사로 복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친구들이 도와줘야
먹고 사는 신사게 되고 말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고있는 것입니다.
죄짓고 살던 과거로 돌아가는 사람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허영에 들더 살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결국 허영에 들뜨고 말 것입
니다. 불행했던 과거만을 곱씹는 사람은 행복해질 겨를이 없게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미래적이며 영원적이며 전진적입니다.
[앞으로 앞으로]의 종교이지 [뒤로 돌아가]의 종교가 아닙니다. 성찬식에
서 참석하고난 어떤 남자교인의 농담이 생각납니다. 예수 믿고난 후에도 상
당기간 동안 끊지 못했던 술 담배를 세례받고난 후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
리고 처음 성찬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포도주 한모금을 마시는 순간 옛
날 생각이 불쑥 나더라는 것입니다.크리스탈잔에 부어마시던 포도주 생각이
나서 그 생각을 지우느라 혼이 났다는 얘기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초신자의 농담이긴 합니다만 성찬식 포도주를 마시면서 옛날
에 놀던 술집이나 그 술맛이 생각난다면 안될 일입니다.주님의 십자가를 생
각하고 그 피의 공로로 죄사함 받아 들어가게 될 영원한 천국을 생각해야합
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옛동네, 지난 과거로 회귀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두려
워할 필요도 없고 그리워할 필요도없습니다. 오늘이 중요하고 내일이 더 중
요하기 때문입니다.
2) 작당했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해도 저희가 우리
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라고 했습니다. 그날 배타고 함
께 나선 사람들의 명단이 2절에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도마,나다나엘,야고
보,요한,그리고 다른 제자 둘입니다. 그러니까 11제자 중에 일곱 명이 작당
하여 고기잡으러 떠난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은 군중심리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군
종은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사를 들여다보면 여야 할 것 없이 선동정치에 능숙합니
다. 그리고 저마다 국민을 내세우고 애국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당리당략을 위한 선동과 흑색선전과 모략중상으로 얼룩져 있을 뿐입니다.
베드로의 말 한마디에 6명이 줄에 묶인 것처럼 따라 나섰다면 그 당시 그
들의 정신상태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 누구와 작당하느냐,누구와 친하느냐,누구와 자주만나
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과 신앙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영국의 명문 케임브리지대학의 근대사 교수였던 킹슬리(kINGSLEY
1819-1875)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아름
다운 인생을 살 수가 있었으며 명문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었느냐"고 그의
애답은 "나에게는 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말
한 그 친구는 곧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내 신앙과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과 작당하기를 즐기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과 작당하기를 즐기면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색잡기에
열을 올리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면 석달을 못넘기고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짝을 잘 만나야 합니다.
3) 불신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
지라"라고 했습니다. 고기잡는데 정신팔린 사람 눈에 예수가 보였을리 없습
니다. 사람도 물고기로 보였을 것입니다.
돈에 미치면 자나깨나 돈만 생각합니다. 여자에 미치고 남자에 미치면 자
나깨나 사람만 생각할 것입니다. 도박에 미치면 도박만 생각하고 권력에 미
치면 사람을 죽이고서라도 권력찬탈에 혼신을 기울입니다.
불신으로 눈이 가리워진 그들에게 예수가 보일리 없습니다. 믿음이 떨어지
면 실패,슬픔 야속한 것, 억울한 것, 원망스러운 것, 죽은 것들만 보입니
다.
그러나 믿음을 회복하면 갈릴리 바닷가에 웃음띤 채 서 계시는 예수가 보
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회복이 필요하고 부활신앙의 회복이 필요한
것입니다.
2. 성공원인
6절 끝을 보면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그들이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실패가 성공으로,빈손이 차고 넘치는 축복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찾아보십시다.
1)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면 갈릴리 바다에 찾아오신 주님께서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
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한 장면이 나옵니다.
우린 여기서 실패자와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시는 예수님 사이의 진솔한 대
화를 보게 됩니다. "있느냐""없나이다"
제자란 부르심에 응답하고 물으심에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대답의 사람,응답의 사람이었습니다.
출석을 부를 때 대답을 안하면 결석이 됩니다. 그리고 법정일수를 채우지
못하면 지금도 졸업도 못합니다.
대답이 시원찮거나 회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임받기가 어렵습니다. 왜
부르시든지 빨리 대답하고 그 앞에 대령해야합니다.
상전이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라고 부르면 대기하고 있던 집사나 하인
은 재빨리 "예, 밖에 대령중이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때 자리를
비우면 벼락이 떨어집니다. 그때 거기 있어야 합니다. 주일낮 주일밤 수요
일밤 금요일밤 그때 거기 있어야 합니다.
2)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하셨고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했습니다. 어부는 그물을
던질 때 배 오른편과 왼편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던집니다. 그리고 배 앞부
분이나 뒷부분에도 그물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잡지 못했습니다.
'배 오른편에 던져라' 이 명령은 이미 수십번 되풀이해서 던졌던 실패의
경험을 다시 해보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대로 순종했을 때 성공
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 비슷한 장면이 누가복음 5장에도 나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헛수고의 연속뿐이었습니다. 그
때 그곳을 찾아오신 주님께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르리 잡으라
"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라며 순종
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르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3
년전 부름받을 때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결정한 오른편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결정한 오른편은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분명해졌습니다.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에로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
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지 못했다면,
사업가가 사업에 실패한다면,
장사꾼이 돈을 못번다면,
교육자가 교육에 실패한다면,그것은 큰 문제이며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우리는 실패의 연속으로 절망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허탈감에 빠졌던 갈릴리 어부들이 성공한 비결은 간단했습니다.
바닷가에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살아서 찾아오신 예수,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실패로부터 해방되고 성공의 깃발을 꼿는 비결입니다.
나를 믿고 경험을 믿고 배경을 믿다가 실패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철석같이 믿었던 조건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깨어지는 바람에 주저앉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있고 방법이 있습니다. 실패와 허탈과 절망의 바닷가에 찾아
오신 예수를 만나면 됩니다.
그리고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내 경험과 내 생각과 내 상식에 안맞더라도 즉시 지금 순종하십시
오. 즉 예수 방법대로 다시 시작하십시오. 반드시 고기를 잡는 성공이 올
것입니다. 그날 아침 디베랴 바닷가가 예수님을 모신 축제의 자리가 됐던
것처럼 우리네 실패와 고통의 자리도 축제와 성공의 잔치자리가 될 것입니
다. 예수님이 계시면 말입니다.
발행일 : 940424
분 류 : 설교
57
제 목 : 배가 되기 위하여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창 35:9-15
성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
니다. 누구나 잘 살고 싶고 돈벌고 싶고 출세하고 있고 행복하고 싶은 욕망
을 가지고 있지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손자였던
야곱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었고 원하던 것을 얻었습니다. 한마디로 성공을
한 것입니다.
장자가 받는 축복을 원하더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원하는 처녀와 결혼하기 위해 노력하더니 그것도 이루었습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 애쓰더니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소원대로 다 얻었습니다. 그 성공비결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것은 오
늘 우리의 성공비결이 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1. 그는 성공과 복을 갈망했습니다.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형인 에서와 시간적인 차이는 얼마되지 않은채
동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제도상 장자와 차자의 차이는 엄청
났습니다.
모든 권한과 재산권은 장자의 몫이었습니다. 야곱은 동생이 싫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가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챘습니
다. 물론 그의 거짓말과 행동은 그 어떤 경에도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습
니다.
그러나 복을 원하고 바라는 그 태도와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형을 피해 하란으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아내감을 만
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아내로 맞기 위해 그는 14년 동안을 참고 기다리
며 일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한 목적을 이루기위해서라면 참고 바라고 힘쓰는 사람이었
습니다.
대부분 성공한 위인들이 지니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목적지향적이라는
것과 부지런하다는 것입니다.
한번 정한 목적을 향해 부단히 도전하고 전진하는가 하면 모두가 부지런합
니다.
성경은 게으른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개미에게 배우라고 했고 일하기 싫으
면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
라고 했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성공하려면 부지런하고 열심을 기울여야 합니
다. 하물며 영적 성공을 위해서라면 열심과 노력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제단신앙 때문입니다.
창세기 28장 18절을 보면 형을 피해 하란으로 가던 도중 벧엘에서 하룻밤
을 노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거기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했습
니다.
31:54을 보면 야곱이 산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했고 35:14을 보면 야곱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던 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을 부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28장이나 31장 그리고 35장의 경우는 야곱이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떠돌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의 생활이나 환경이 안정되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때를
따라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살았다는 증거인 것입니
다.
영국의 한 신문이 독자들을 대상으로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인가]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거기에 뽑힌 것은 세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있는 어린이
둘째는 아기를 목욕시키는 엄마
셋째는 대수술에 성공한 외과의사 순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대답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은혜받고 성전계단을 내
려가는 그리스도인의 그 표정,그것이야말로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없는 행복한 표정이며 마음이며 순간인 것입니다.
은혜받고 감격하는 여인의 모습은 모나리자에 비할 수 없고 그 얼굴은 미
스코리아에 비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했던 모세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습니다. 눈이 부셔서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교회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우리가 성
공하고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늘 만나야 합니다. 그 분과 늘 교제해야 합
니다. 하나님과 늘 교제하는 방법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취급하면 안됩니다.
바른 예배를 위해 몇가지 안내를 드립니다.
첫째, 정한 예배시간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새벽,낮,밤,정한 날, 정한
시간에 열심으로 나와야 합니다.
둘째, 정한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거리관계나 교통수단의 문제들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시간으리 지켜야 합니다.
셋째, 준비하고 드려야 합니다. 마음 태도 복장 헌금 등 미리 미리 준비해
야 합니다.
넷째, 모든 모임보다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가령 따로 둘러앉아서 회의를 하는 것 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배가 우
선입니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이며 예배가 교회의 최우선기능이며 과업인 것
입니다.
다섯째 예배는 생활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편의상 그리고 형편상 예배의 시작과 마침을 정하고 예배를 드립니
다. 그러나 예배는 끝이 있으면 안됩니다. 주일 낮예배가 끝나면 바로이어
삶의 현장으로 나가 생활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 그리고 목
숨이 다하는 날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3. 기도생활 때문입니다.
창세기 32:25을 보면 얍복강변에서 벌어졌던 야곱의 영적 전투장면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가솔들은 데리고 2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에게 청천벽력같은 급보
가 전해졌습니다.
장자권을 빼앗겼던 형 에서가 400명 장정을 이끌고 야곱을 처치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하고 막막했습니다.
그는 이런 저럭 궁리끝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기도를 시작
했습니다.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의 기도를 천사와의 씨름이라고 표현했
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천하장사 이만기와 국민학교 4학년 김복동이가 모래판에
서 씨름을 한다면 그 씨름판이 어울릴 것 같습니까? 하물며 천사와 야곱의
씨름, 이것은 하나마나한 씨름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천사를 이겨야 자기
앞에 가로놓인 문제가 해결된다는 절박한 믿음 때문에 밤이 새도록 천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기까지 씨름을 계속했습
니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 판정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천하장사가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기도로 이겼고 기도로 자신의 문
제를 해결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그날 밤 얍복강 나루터
의 기도가 없었더라면 야곱의 생애는 형님이 휘두른 몽둥이로 막을 내렸을
것이빈다.
우린 여기서 참으로 성공하고 문제를 푸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됩
니다.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즉 위기상황에 직면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
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놀라고 당황합니다.
둘째, 걱정하고 절망합니다.
셋째, 방법을 찾습니다.
넷째, 방법을 동원해 해결을 위한 노력을 다합니다.
다섯째, 해결이 안되면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신앙적 접근입니다. 우리에겐 기도라는 위대한 방법이 있
습니다. 야곱이 그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우리에겐 기도라는 위대한 방법이 있습니다. 야곱이 그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야곱은 뛰어난 기지와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임기웅변력도 뛰어났
습니다.
그러나 생사 흥망의 기로에 섰을 때 그는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만이 해결의 길이며 하나님과의 대면만이 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
니다. 진실로 해결을 원한다면 축복을 원한다면 지금 기도해야 합니다.
4. 하나님이 주신 복 때문입니다.
창세기 28장을 보면 야곱은 형을 속이고 장자가 받아야될 축복을 받았습니
다. 그런가하면 아버지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축복
했습니다. (28:3).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축복 때문이 아니라
는 것입니다.
창세기 31장42를 보면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
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다면 외삼촌께서 나를 공수
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
시고 어제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자신이 복을 받고 부자가 되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창세기 35장9절을 보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
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이 야곱의 성공과 복의 원인을 규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
게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미국 뉴욕 맨하탄 75번가에 [해피 유치원]이라는 심판을 내건 유치원이 성
업중에 있습니다. 이 유치원은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개를 맡아 돌보아 주
는 개 유치원입니다. 그런데 사람 유치원보다 개 유치원이 훨씬 더 사치스
럽고 시절이 좋습니다.
뉴욕의 언론은 이곳 [탁견소]를 개 사교클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개
운동기구를 설치해 개 헬스클럽도 만들어 놓고 개들에게 입힐 옷을 맞추주
는 고급 부티크 [파큐 애비뉴]도 성업중입니다. 그리고 전속 훈련사가 훈련
을 시키고 수의사가 건강을 체크해 줍니다. 돈만 더 내면 개인교수제도를
적용해 일대일로 교습을 시키기도 합니다. 교습비는 단체받은 주 6회 250달
러이고 개인교습비는 시간당 150달러입니다.
문제는 개들은 그러한 특별배려에 대해 전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 사는 집에서 딩굴고 뛰노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가관인것은 개들이 노는 꼴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위하고 만족감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정말 요지경입니다.한쪽에서는 개 유치원, 개 사교클럽이 성업중인
가하면 한쪽에서는 사철탕집이 성업중입니다.
지금 우리는 개 사교클럽같은 세상 것들 묻힌 채 그것들이 행복이고 가치
있는 것들인 양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인간의 참 행복은 내 영혼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
입니다.
1925년도에 노벧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영국의 극작가이며 비평가였던 버
나드 쇼(Grorge Bermard Shaw) 는 '비참해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당신이
지금 행복한가 아닌가를 놓고 빈둥거리며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한가해지면 불행이나 행복을 따지게 됩니다. 그러
나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이 기도하고 주님 섬기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생
각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라며 노래부르는 마이클 잭슨은 코
를 포함해 두번이나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80년대부터 피부에 흰반
점이 생기는 백반증으로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그가 무대에 설 때나 외출
할 때 얼굴에 회떡칠에 가까운 짙은 화장을 하는 것으니 얼굴에 번지고 있
는 백반증세를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돈,명예,인기를 다 얻은 그 사람이지
만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시사주간지 뉴스워크지는 최근호에서 '미국 10대들 꿈을 잃고 산다"라는
특집기사를 썼습니다. 총,마약,이혼,범죄등으로 뒤범벅된 미국사회 속에서
10대들은 꿈을 잃고 방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떠나면 그곳이 미국이든 구라파든 동부이촌동이든 압구정이든 불행
해집니다. 내가 행복하고 복을 받고 배가되려면 하나님의 은총의 우산아래
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 품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 손안에 잡혀야 합니
다.
발행일 : 940417
분 류 : 설교
58
제 목 : 사는 길로 인도 합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겔 33:10-11
먹으면 사는 약이 있는가 하면 죽는 약이 있습니다. 극약이나 독약은
먹으면 죽습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이 있는가 하면 섭취량이 많을수록
병의 원인이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사람이 걷는 길도 사는 길이 있고 죽는 길이 있습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살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죽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문]이라고 했고 [길]이라고 했습니다.
1980년 가을 요한복음을 읽던 중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는 주님의 말씀을 명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길]이라는 말씀
이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그해 성탄절 저는 교인들에게 [길]이라는
붓글씨를 써서 카드 대신 보냈습니다.
얼마후 모 일간지가 교계 지도자들의 칼럼을 연재하면서 칼럼 제목을
[길]이라고 정하고 제가 쓴 [길]을 題字로 삼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걸어야할 길은 두 가지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사는 길과
죽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의 길과 영멸의 길,천국길과 지옥길
입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먹으면 죽는 음식인줄 알면서 일부러 먹는 것은 자살행
위입니다.
얼마전 텔레비젼 교양프로에서 실험관 속에 실험용 새끼 쥐를 넣고
그 속에 담배 연기를 불어 넣었더니 그 자리에서 쥐가 죽는 것을 보았
습니다.
이 세상에는 의외로 죽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는 길은 제
쳐두고 죽는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담배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갓 태어난 신생아가 있는 방에 문
을 닫은 채 한 개비의 담배를 피우고 그 연기로 방안을 채웠을 때 신
생아에게는 치명적 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산모와
신생아가 있는 방안에서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식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살의가 있는 사림일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죽는 길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눈하나 깜빡거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스겔 33장 1-9절은 파숫군이 자기 할 일을 다하지 않았을 때 오는
불행과 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파숫군은 높은 망대 위에 올라가 사방을 살펴야 합니다. 만일 적군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만일 파숫군이 졸
거나 딴짓을 하느라 나팔을 미쳐 불지 못해 적군의 기습공격을 받게
되면 그는 그 책임 때문에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몇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파숫군은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그 땅 백성이 자기 중에 하나를 택하여 파숫군을 삼았
다"고 했고 7절을 보면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높은 성루에 올라가 파수를 서는 사람은 특별히 뽑혔거나 지정된 사
람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숫군으로 뽑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만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택은 영광입니다만 영광보다 더 무거
운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수만명의 축구선수 가운데서 국가대표팀으
로 뽑히는 것은 축구인의 최고 영광입니다. 그런가하면 대표선수는 한
국의 영예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정신적 부담이 이루 말할 수 없습
니다. 그러기에 운동장에 나서면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선택된 사람이라고 말씀삽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 주셨고 그 가운데서 다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선택해 주
셨습니다. 그만큼 선택된 사람들은 책임이 큰 것입니다.
2. 파숫군은 경고의 책임이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칼이 그 땅에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
되"라고 했고 7절을 보면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
들에게 경고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경고의 책임에 대한 원리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제대로 경고해야 합니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경고하라"고 했습니다. 개 발자국 소리를듣
고 너는 나팔을 불어댄다면 큰 일입니다. 바람에 나무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를 적군의 기습으로 알고 나팔을 불어도 큰일납니다. 제대로 들어
야 합니다.
92년 10월 28일 휴거 소동은 귀신이 속삭거리는 소리를 하나님의 소
리로 잘못 듣고 나팔 불어댔던 사건이었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파숫군에게 시시때때로 이상한 환청,환음,환상을 들려
주거나 보여 주면서 교란작전을 펴고 있습니다.
계시인양 위장하기도 하고, 진리인양 포장을 해서 파숫군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파숫군은 "내 입의 말을 듣고"라야 합니
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 66권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성경 외에 다
른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파숫군이 되려면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정신차리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미하게 들릴 때가 있기 때문에 귀 기울이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들립니다. 시끄럽고 복잡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
지 않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경고하는 것입니다.
7절 셋째 줄을 보면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찌어다"라고 했
습니다. 하나님은 파숫군을 통하여 경고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파숫군
에게 미리 알려서 경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 마이크로폰은 성능이 아주 좋은 것입니
다.
제 육성만으로는 이 넓은 방안을 울리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확성장치
를통해 저 먼 구석까지 제 설교가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줄이
끊어지거나 전기가 나가면 고성능 마이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인격이 고매하고 공부를 많이 하고 인물이 출중해도 소리를
전달하지 못하는 파숫군은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
신하여 경고의 소리를 발해야 합니다. 파숫군은 들은대로 받은대로 본
대로 전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클린턴을 만나러 간다면 그 친서
를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내가 대통령을 대신해 옐친을 만나러 간다면 그 책임을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가을 대신하여 파숫군의 책임을 진 사람들입니다.어떻게
소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1892년에 내한한 스왈른 여선교사가 황해도 안악 장날 장터를 돌며
노방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안악골에는 김익두라는 유명한
깡패가 있었습니다.
장보러 나오는 장사꾼들은 성황당에 들러 제발 오늘 김익두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돌맹이 한 개 집어서 던진후 장터에 나오곤 했습
니다.
그런데 스왈른 부인이 장터에서그 김익두를 만났습니다. 전도지를내
맬며 예수를 믿으라고 하자 김 익두는 전도지를 받더니 콜르 풀어 버
리는 것입니다. 화가 난 스왈른 부인은 김익두에게 "당신 오늘밤에 썩
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날밤 김익두는 내내 코가 썩을까봐 걱정하다
가 다음날 스왈른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내 코가 썩지 않겠느냐고 물
었습니다. 그러자 스왈른은 "예수 믿으면 코 안 썩습니다."라고 대답
했습니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김 익두가 예수를 믿고 한국 초대교회 거장이
되었습니다.
예수 안 믿으면 코가만 썩는 것은 아닙니다. 심장도, 신장도, 혼도,
영도 다 썩어 죽고 맙니다.
파숫군은 그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날 스펄젼(Spurgeon)목사가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기사가 반
색을 하며 인사를 청했습니다.
"조님 오랫만입니다. 전에 한번 뫼신적이 있습니다."
"저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그러실 것입니다. 14년 전이니까요 그때 손님께서 이 성경책을 주시
면서 전도를 하셨는데 그때 저는 이 책을 읽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
니다."그의 손에는 낡고 빛바랜 성경책이 있었습니다. 파숫군은 입을
다물면 안됩니다.
3. 파숫군의 책임은 무겁고 큽니다.
8절을 보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파숫군이 파숫군의 책임을 다 못하면 둘다 죽게 됩니다. 성 안에사는
백성도 죽고 파숫군도 죽게 됩니다.
그리고 혼자 살아남아도 그 책임을 물어 처형하고 맙니다. 본문은
"그 피값을 네 손에서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 책임을 철저하게 묻겠
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이며 워털루전쟁 영웅이었던 웰링턴(Arthrur
Sellington)장군에게 "총사령관이 행군 명령을내리면 어떻게 해야 합
니까"라고 묻자 그는 '진군하여 싸우는 것이다. 성공의 책임은 사령관
에게 있다. 만일 출발하지 않는다면 총살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옳
습니다. 복음의 나팔을 불지 않음으로 남편이 죽고 아내가 죽고 자식
이 죽고 부모가 죽는다면 그 파숫군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생 천국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와 부모와 자식이 지
옥을 가게 된다면 그 파숫군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4. 사는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떠나서사는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
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라고 했습
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앙하기 위해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그런
데 그 길을 떠나 죽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사는 길로 인도하
는 것이 교회가 할일 입니다.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신부가 결혼을 앞두고 혼수감 준비하며 장농,반지,시계,옷,드리
세,아파트,자동차,전자렌지,냉장고,숟가락,젓가락 사러 다니다가 지쳐
쓰러져 결혼식날 병원에 입원해 있다면 그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혼이 중요하지 혼수감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영혼구원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회의하고,세미나하고,결의하
고,조직하느라 정력과 시간낭비하고 정작 전도하는 일을 소홀히 한다
면 죽은 교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87세 되던 해 알렉산더 메더(Alesander Mather)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죄가 아니고는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그런 전도
자를 100명만 보내 주십시오. 그런 사람들이야 지옥문을 부술 수 있
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라고.
본문 20절을 주목합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각기 행한대로 심판하리라."
내 가족, 내 이웃, 내 친척, 내 친구, 내 동포를 사는 길로 인도합시
다.
죽도록 내버려두지 맙시다.
발행일 : 940410
분 류 : 설교
59
제 목 : 확실한 증거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행 1:1-5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온갖 이단들이 기독교의 진리와 유일성을
음해하고 파괴공작을 계속했습니다만 그러나 기독교만이 지니는 유일
성 때문에 전세계 인구이 3분의 1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이단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기독론 중심의 이단들입니다. 예
를들면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한다든지, 아니면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
도 있고,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가 하면 부활을 부인하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에수 믿지 않고 다른 것을 믿어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불교나 유교를 통해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십
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
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도 존재할 수가 없고, 신앙도 성
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
는 증거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19:15을 보면 어떤 사건의 사실 여부와 진실 여부를 증언하려
면 2-3명의 증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실 증명은 2-3명의
증인이면 성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 증거와 증인이 부지기수입니다. 그
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 증거가 너무나 많고 확실합니다. 몇가지 증
거를 살펴보겠습니다.
1. 사도행전이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1:1을 보면 사도행전을 받은 사람이 [데오빌로]라고 했습니
다. 데오빌로는 그 당시 로마 정부의 고위 관리였습니다. 누가는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해서 데오빌로에게 보냈습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생애를 사실대로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
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데오빌로는 로마의 고관으로 예수님
을 영접했고 그 나애 도미틸라(Domitilla)와 함께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AD 96년 도미시안 황제 때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당시 로마의 고관이었던 [데오빌로]에게 보낸 공식 문서
이며 기독교 변증문입니다. 공식문서와 변증문에 어떻게 거짓증거를
써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때 누가가 보낸 사도행전이 거짓말 투성이었다면 데오빌로가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가끔씩 역사 기술의 오류나 왜곡시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잘못된 역사기록이나 왜곡된 부분들이 만천하에 드러나
게 되는 것을 보게됩니다.
사도행전의 경우 만일 위증이나 오류가 있었다면 그 당시는 물론 훗
날 수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과 평가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
다.
그러나 기독교 2천년 동안 사도행전의 정경성과 정당성을 흔들리지
않은 채 초대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 친히 나타나 보여 주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15:4-8을 보면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
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9베드로)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 그
500여 형제에게 보이셨고 그후에 야고보에게, 그후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니라"고 했습니다.
주경기 카알(Carr)에 의하면 다시 사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나
나 자신을 보여 주신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에게 (마 28:9)
(2) 베드로에게 (눅 24:34,고전15:5).
(3) 글로바와 다른 제자에게 (눅 24:13-35).
(4) 도마가 없을때 제자들에게 (막 16:14,눅24:36,요20:19).
(5) 도마가 함께 열한 제자에게 (자됴20:26).
(6) 디베랴 바다에서 일곱 제자에게 (요21:1-24).
(7) 갈릴리 산위에서 열한 제자에게 (마 28:16).
(8) 500여 형제들에게 (고전 15:6).
(9)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 (고전 15:7).
(10) 예루살렘 부근에서 열한 제자에게..(막 16:19,눅24:50,행
1:3-12,고전 15:7).
횟수로는 열번 이상,사람 수로는 600여명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대로 구약이 경우 사실 증거는 증인 2-3명이면 됩니
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시기 위해 계속해서 많은 제
자들과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
요하겠습니까?
본문 3절을 보면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동
안 저희에게 보이시며"라고 했습니다.
시간적으로도 40일 간을 세상에서 계시면서 부활하신 자신을 보여 주
셨습니다. 너무나 명확한 증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3. 기독교 2천년 역사와 순교자들의 피가 증거 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예수의 역사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콩트(Auguste Comte)와 영국 시인 칼라일 (Thomas
Carlyle)이 어느날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철학자 콩트가 의
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기독교를 대신할 수 있는 완전한
종교를 창설하기 위해 구상 중에 있습니다. 그 새로운 종교는 기독교
가 내세우는 유치한 신비적인 이야기들을 배제할 것이기 때문에 완벽
하고 분명한 것이 될 것입니다"라고.
듣고 있던 칼라일이 대답했습니다.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니 좋은 일
입니다.그러나 그 전에 당신이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수처럼 당
신도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만
들고자 하는 종교가 생명있는 종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기독교는 부활과 생명을 가진 종교입니다. 그 힘 때문에 2천년 동안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를 셀 수
없는 신앙의 선배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영국의 로지경 (Oliver J.Lodge)은 영국의 물리학자였고, 버밍엄대학
의 창설자입니다. 그의 아들이 1차대전 당시 전쟁에 나갔다가 전사했
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전사하기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버님 제가 죽더라도 제 무덤엔 오지 마세요. 전 거기에 없을테니
까요."
어거스틴(Augustine)의 어머니 모니카도 어느날 아들에게 '내가 죽거
든 장지 문제로 고민하지 말고 아무데나 묻어주기 바란다.나는 바로
하나님께로 가게 될테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떳떳하고 편안합니다. 이유는 죽음
을 넘어선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고대 로마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300년동안 기독교를 박해했습니
다. 그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기독교를 박멸하려 했습니
다.
나병이 만연된 골짜기에 몰아넣기도 했고 사자굴에 던지기도 했습니
다. 그런가하면 불속에 던졌고, 칼로 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게임은
기독교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예수가 로마를 이긴 것입니다.
생명은 강합니다. 예수의 부활생명은 오늘 우리 속에서 역사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증거이며 웅변입니다.
예수는 다시 사셨습니다. 빈 무덤과 기독교 2천년 역사와 성경과 수
많은 증인들이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증인은 증
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
부활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이유 역시 예수가 누구시며 어떻게 죽으셨으며 다
시 사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부활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몇가지 감사할 조건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다시 사신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습니다.
죽은 신, 대답 못하는 잡신,우상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
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다시 사신 예수, 무덤이 없는 예수를 믿고 있
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둘째, 건전한 교단,건전한 교회에 소속돼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사이비 교단이나 이단 교히에 소속된 목사나 교인은 불행합니다. 그
집단이 잘못되면 교인도 낯을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다시 사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습니다.다시
말하면 죽은 예수를 다시 살아났다고 위증해야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
럽겠습니까?그러나 다시 사신 예수를 전하며 사는 것은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넷째, 다시 사신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산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지난 3월 18일 새벽 6시 천호동 제일교회 김인식 목사님이 새벽 기도
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길가 쓰레기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압축작업 직전의 청소차 곁으로 다가 갔습니다. 분명
신음소리, 울음소리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쓰레기 봉지 안에서 들
리는 소리였습니다.
미화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비닐 쓰레기 봉지를 개봉하자 그
안에 새파랗게 질린 피투성이 신생아가 들어 있었습니다. 한시간 정도
지난 신상아였습니다.
추위와 세균 감염 때문에 생명이 위급했습니다. 교회로 안고 와서 난
로를 피우고 물을 끓여 사모님과 함께 씻기고 응급조치를 취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누구가가 무책임하게 버린 생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 이름을 (금봉지)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쓰레기 봉지에서 죽었어야 할 핏덩이가 금봉지가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핏덩이를 내다
버린 비정이나 타락한 윤리 이야기는 제쳐 두기로 합시다.
만일 그때 그 핏덩이가 본능적인 울음을 터트리지 않고 신음소리를
내내지 않았더라면 그 생명은 죽음의 봉지 안에서 시체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소리, 그 울음, 그 신음 소리가 살게 해 준 것입니다. 성경은 소리
내어 부르짖고, 찬양하고,하나님을 찾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목사님에게 발견되었다는 것, 그것은 보통 일이 아
닙니다. 그 생명은 자기를 버린 생모에게 양육받고 자라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쓰레기 봉지가 금봉지가 된 것입
니다.
저는 곰곰히 제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야
말로 나에게는 금봉지를 주신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쓰레기만도 못한 존재, 쓰레기에 묻힌 채 죽어야 할 조인, 죄의 비닐
봉지에 싸여 숨막힌채 질식해 죽어가던 나를 주님은 거기서 건져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고 새 이름까지 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금종지는 김 목사님의 호적에 입양이 됐지만 나는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고 양자가 되었습니다.
이 기쁘고 감격스러운 뉴스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시렵니까?
어떤 날 인도의 스테판 닐 주교가 성공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서
류를 내밀고 도움으로 요청했습니다. 대주교는 한참 동안 서류를 들여
다 보다가 옆으로 밀어 넣으며 이렇게 물었싸브니다."당신은 최근에
마지막으로 누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했습니까"라고 .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고, 부탁을 드리는 우리네
열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시면서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최근에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나를 전했느냐"라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교회의 절대 과제입니다. 입
을 엽시다. "다시 사셨습니다."
"믿어야 다시 삽니다"라고.
아멘.
발행일 : 940403
분 류 : 설교
60
제 목 : 나의 객실이 있느냐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막 14:12-16
유대인이 지키는 가장 큰 절기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으로부터 해
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 준비는 철저했습니다.
첫째, 집안에 있는 누룩을 샅샅이 찾아 없앴습니다.
본래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이 되면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만들게 되었고,
한 걸음 나아가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펴 누룩을 찾아 없앴습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은 맛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 누룩은 빵을 부풀
이고 그 정도가 지나치면 부패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누룩을 찾아 제거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순결하고 성결한 삶
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룩을 넣어 만든 빵이 맛도 있고, 모양도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부패된 것은 막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마치 누룩없는 빵처
럼 맛이 없고 재미가 없어 보이더라도 부패하면 안됩니다.
썩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음식도 썩으면 먹을 수가 없고, 물도 썩으면 마
실 수가 없습니다. 정치도 썩으면 끝나고 왕조도 썩으면 그막을 내립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누룩을 제거합시다. 말씀의 불을 켜고 샅샅이 누룩을 찾
아 없애 버립시다.
둘째, 쓴 나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들이 쓴 나물을 먹은 것은 애굽의 학정 밑에 살면서 겪었던 고난을 생
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쓴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쓴 약일수록
당의정을 입히거나 캡술 속에 집어넣어 만듭니다.
그러나 쓰다고 무조건 멀리하고 외면한다면 쓴 약이 주는 효과는 기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로저스는 "향료는 으깨질수록 짙은 향기를 발한다"고 했습니다. 제아무리
고급스런 향료라고 했도 10년이나 20년 계속해서 향기를 발할 수는 없습니
다. 시간이 지나면 향이 날아가기 때문에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향기는 2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향기롭고 신선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십자가에서 으깨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장미 한그루 사다가 앞뜰에 심고 가꾸었습니다. 거름을 주고
물을 주며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도 장미가 피지 않자 꽃집을 찾아가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꽃집 주인은 "잘못 아셨군요 그 품종은 척박한
땅에 심어야 꽃이 피는 것입니다. 기름진 땅보다는 모래밭이 좋고 비료를
주면 꽃이 피지 않습니다. 모래 자갈 밭에 옮겨 심으시고 가지는 사정없이
잘라 주세요 그러면 반드시 향기나는 꽃이 필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
다.
우린 지난날 쓴 나물 먹고 살던 때를 잊어선 안됩니다. 그리고 지금도 쓴
나물 먹으며 살고있는 이웃들을 잊으면 안됩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겪었던 고난의 삶을 쓴 나물로 기념했던 것처럼 우리
도 지난 날 죄에 묻혀 살았던 삶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슨나물을 씹으면서 자신들을 낮추었고 교만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쓴 나물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어린 양 재물을 준비했습니다.
역사연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매년 유월절이 되면 예룻라렘
에는 100만 명으 인파가 몰려 들었고 25만 마리의 어린양이 유월절 제
물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학대받고 살던 유대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열가
지 재앙을 애굽 전역에 내렸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은 장자가 주는 재
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천사가 넘어가 재
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어린양
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드렸습니다. 어랜양의 피 때문에 재앙을 면했
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중요한 것은 유월절 어린양이 예
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던 유대인은 짐승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만 우리는 어린
양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문설주에 피를 바
르고 재앙을 면했습니다만 우리는 십자가에 흘린 피로 사망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은혜가 더 큰 은혜입니까?짐승 땜누에 재앙을 피한 사람의 감격
이 커야 합니까? 아니면 에수님때문에 재앙을 면한 사람들의 감격이
커야 하겠습니까?
수난주일 아침 어느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목사님
의 설교는 에수님의 고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봉독 시간에 목사님은 에수님이 수난 기사를 봉독했습니다. 유다
의 배신, 예수님의 체포,헤롯과 대제사장에게 끌려 다니며 조롱당하시
고 채찍에 맞으신 일 그리고 마침내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를 따로운 프로렌스라는 일곱살난 소녀가 훌쩍거리며 울
기 시작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자 어머니는 죄송하는 표정으
로 눈인사를 보낸후 낮은 목소리로 프로렌스를 꾸짖었습니다.
"너 왜 이러니, 조용히 하려므로 " 그러나 프로렌스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더 크게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어서 빨리 데리
고 나가라는듯 어머니와 우는 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엄마가 다그치
며 울음을 그치라고 하자 프로렌스는 울먹이며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이 한마디에 장내는 숙연해졌습니다. 그 소녀는 그날 위대한 설교를
한 것입니다. 훗날 그 소녀는 여류문학가 프로렌스 바클레이
(Florence Barclay)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불감증 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감격과 감사가
우리에게서 떠나 버렸습니다.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도 감동이 없습니
다. 성만찬에 참여하면서도 감격이 없습니다. 누룩없는 떡과 쓴 나물
과 어린양의 피를 잊지 맙시다.
본문은 에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월절 식사를 함께할 집을 준비하라
고 당부신 기사입니다. 제자들을 동네로 보내시면서 물 한동이를 가지
고 가는 사람을 만날텐데 그에게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그가 너희를 인도해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전에 제자들
과 함께 할 유월절 만찬 장소를 정해 놓으신 후 그들을 보내신 것입
다. 바로 그곳이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이었습니다.
"나의 객실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씀은 나귀새끼 주인에게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말씀과 이맥 상통합니다. 나귀새끼 주인에게 제자
들이 말했싸브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신다"라고.
그러자 주인은 아무말 없이 나귀새끼를 내주었고 주님은 그 나귀 새
끼를 타시고 벱바게 마을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로마의 개선 장군은 갑옷에 긴 칼을 뽑아 든 채 백마를 타고 성내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예수의 입성은 십자가를 지시려는 죽음의 입성입
니다.
그러기에 백마 대신 비틀거리는 어린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하실 때는 구름을 타고 천군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강림하
실 것입니다.
저는 그때 그 새끼 나귀를 생각해 보곤합니다. 청년 예수를 채운채
휘청거리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나귀, 그날 그 사건 때문에 나귀는
주님 오실 때까지 교훈과 설교의 테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때 두말없이 내놓았떤 나귀 주이;다의 헌신과
순종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다락방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웅장한 왕궁과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자들의대 저택도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락방은 호화주택도 아니었고, 공공건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 만찬은 호화판 파티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만찬이었습니다.
조촐한 다락방, 별로 꾸밈도 없는 다락방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있습니다만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하셨을 때 주인은 두말없이
그 다락방에 내놓았습니다.
우리 여기서 [나의 객실]이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곳은 주
인의 다락방이지 예수님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 사건이후 그 다락방은 세계 기독교인이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치고 만찬상을 베풀었던 다락방을
방문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힘없는 나귀도 주님 태우고 유명해졌고, 값싼 다락방도 예수님께 빌
려 드리고 세계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소유를 사용하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 혼자 쓰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나만 기쁘고 유익하고 만족합니다.
둘째는 남과 함께 쓰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함께 쓰는 사람과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다.
셋째는 도둑맞거나 빼앗기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속상하고 기분 나쁘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넷째는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나도 다른 사람도 그리고 주님도 기분이 좋고 기쁨이 넘칩
니다. 그것은 나귀 주인이나 다락방 주인의 기쁨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결론을 내립시다.
내 소유들 가운데 주님을 위해 내놓을 어린 나귀는 있습니까?
우리집 공간에 주님께 드릴 객실은 있습니까?
"나의 객실이 이느냐""내가 탈 나귀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
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내가 나귀입니다.
제 몸뚱이가 주의 어린 나귀입니다.
제 심령이 주의 객실입니다.
오셔서 좌정하옵소서
내 마음이 구유이며 객실입니다.
아멘.
발행일 : 940327
분 류 : 설교
61
제 목 : 은혜를 크게 받은 사람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단 10:18-21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다니엘은 여러가지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
습니다. 그의 신앙은 물론 남다른 성공과 출세에 있어서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벧론에 끌려간 유다 포로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바
니다만 바벧론왕국의 국무총리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1장을 보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이야기
가 나옵니다.그럭 저력 누구나 국무총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이나 다
니엘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 39:23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고 했고 창세기 41:38을 보면 "이와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니엘서 10:11을 보면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라고 했고, 19절에서도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
다.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복을 받고 성공한 것입니다.
본문의 교훈은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과 명예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복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제시하여 줍니다.
1.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1)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포로생활에서 지친 청년 다니엘에게 어느날 기회가 다가섰습니다. 그것은
유다 포로 청년 가운데 몇 사람을 선발해 특별교육을 실시한 후 바벧론왕
비서실에서 일하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바벧론은 세계를 제패한 최대 강국이긴 했습니다만 사회기강은 어
지럽고 도덕은 퇴폐일로를 치닫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휩쓸린 젊은이들은
가치관을 상실하고 정신적으로 휘청거리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쓸마한 사
람이 없었습니다.그래서 바벧론 왕은 비록 포로들이긴 하지만 쓸만한 젊은
이들을 골라서 쓰겠다는 용인술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1:8
을 보면 왕이 허락한 진미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이유
는 간단합니다.
자기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먹으면 식도와 위장을 거쳐 배설돼버리는 음식을 놓고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면 거절한 다니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때 그는 자기와 싸우고
있었습닐. 타협하느냐, 거절하느냐, 개방하느냐, 절제하느냐, 바로 사느냐,
멋대로 사느냐....
절제란 자기 욕망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자기 행동을 조절하고 삶의 균형
을 지키는 것이 절제입니다. 하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이라도 옳지 않은 것
은 금하는 것이 절제이며 극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경우 그런 상
황에서 왕이 뜻을 거역하고 자기 뜻을 관찰한다는 것은 모험이었고 위험스
런 일이었습니다. 만일 그때 다니엘이 타협하고 수용했더라면 하나님의 은
총은 그를 떠났을 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고집과 습관을 제어하고 내가 나
를 이겼을 때 하나님의 은총은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2) 중단없는 기도생활입니다.
6:10을 보면 그는 하루 세번씩 기도했고 9:3을 보면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릎쓰며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행위입
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역사 연구에서 세계를 지배했던 21개의 문명 가운데
19개 문명이 자멸했는데 그 이유는 무신론과 물질주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라
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무시한 문명과 물질숭배 문명은 자멸한다는 것입니
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과의 대화 통로를 개설하고 기
도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능력받아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영국 회중교회 목사였던 조세프 파커(jOSEPH PAKER)박사는 "그 사람의 얼
굴을 보면 기도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늘 기
도하는 사람의 얼굴은 정원에 핀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다"고 했습니다.
라디어 전파는 1초에 18만 6천마일을 간다고 합니다. 이전파의 속도는 음
속보다 1백배나 빠르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소도는 기
도의 전파입니다. 내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이 됩니다. 그보다 더 빠른 전파
도 음속도 없습니다.
다니엘은 그 기도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힘썼던 것
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명이
길지 못합니다. 기도하고 받은 은총이나 복은 그 수명이 길고 큽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두 사람이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내용은 [워싱
톤이 이긴다, 아니다 진다]였습니다.
위싱턴이 진다는 사람의 주장은 "워싱턴군이 열세이기 때문에 진다"는 것
이고 이긴다는 사라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난 겨울 찬바
람이 불던 어느날 숲속을 지나는데 숲 속에서 사람소리가들려 그 근처로 가
보았소 그랬더니 위싱턴 장군이 얼굴을 눈덮힌 땅에 댄 채 기도를 하고 있
었소. 나는 그때 위싱턴이 이긴다는 확신을 갖게 된거요"라고.
승리와 영광과 성공을 원한다면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총을
기도로 구합시다.
2. 큰 은총을 받은 후에 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1) 강건하게 됩니다.
18절을 보면 '나로 강건케 하여"라고 했고, 19절을 보면 "강건하라 강건하
라"고 했고 19절을 보면 "내가 곧 힘이 나서"라고 했습니다.
노벧 의학상을 받은 알렉시스 개렐 박사(ALEXIS GARREL)는 "기도할때 심신
을 위한 가장 강력한 지적, 도덕적 스테미나를 생산하는 홀몬이 분비된다"
고 했습니다.
저는 어려서 연날리기를 해 보았습니다. 실타래에 연을 달아 하늘 높이 뛰
웁니다. 바람을 탄 연은 높이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실이 끊어지면 연은 제
멋대로 둥실둥실 하늘로 날아갑니다. 얼마나 자유롭고 멋져 보입니까? 그러
나 그 연은 버림받은 연입니다. 강물에 빠지든지 어느 마을 나무가지에 걸
려 갈기갈기 찢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의 건강이나 강건한 신앙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5을 보면 "나를 떠
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소화제, 피로회복제,신경안정제, 비타민, 알로에, 로얄제리 등 몸에 좋다
는 약은 양복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복용하는 중년 신사가 있었습니다. 어
느날 더이상 지탱할 수 없는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진달겨
과는 약 과잉복용 때문에 병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약 때문에 병이 생겼다]는 것은 역설이며 아이러니 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약은 안 먹을수록 약이되고 먹을수록 약이 안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크게 받을수록 내 영혼과 정신과 몸이 건강하게 됩
니다.
요한1서 3절을 보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내 영혼과 몸을 강건케 하십니다. 그 은
총을 받아야 합니다.
다니엘이 은총받고 힘이 난 것처럼 우리도 은총을 받아야 힘이 납니다. 힘
이 나야 일하고 사업하고 공부하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주여 은총을 주옵
소서.
2)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19절을 보면 "두려워 하지 말라 평안하라"고 했습니다.
평안하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8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만나 "은혜를 받은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
께 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30을 보면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
니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평안이 임
합니다. 이유는 은혜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구체적인 증거이기 때문
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왜 두렵습
니까?
본문 19절을 보면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걱정이나 두려움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님을 향한 관심이 다른곳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바라보고 물 위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물결을 바라
보는 순간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셋째, 야단맞을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잘못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만 잘못이 있으면 두렵게 됩니다.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면 죄있는 사람은 무서워 떱니다. 고속도로를 달
리느라면 요소마다 교통경찰이 서 있습니다. 교통순찰 차나 경찰만 보면 가
슴이 철렁 내려앉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교통법을 바로 지키고
지정 속도만 지키면 심장떨릴 일이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경찰 차가 앞서가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따
라 붙었습니다. 빨리가면 빨리 따라가고 천천히 가면 천천히 따라 갔습니
다. 40분 정도 뒤따라 갔더니 창밖으로 손을 내민 경찰이 수신호로 앞서
가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그때 저도 손을 흔들며 앞서 달리기 시작했습니
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일이 없다면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태리가 가지고 있는 교향악단 가운데 싼타 세칠리아 오케스트라가 있습
니다. 훌륭한 악기들과 연주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인데도 빛을 보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휘자 때문입니다. 그동안 세칠리아 오케스트라
는 줄곧 객원 지휘자들이 지휘를 했습니다. 객원 지휘자는 잠깐 있다가 떠
날 사람이기 때문에 구태여 야단치고 잘못을 잡아내서 귀찮게 할 필요가 없
습니다. 적당히 구슬리고 칭찬만 해주면 됩니다. 그러나 상임지휘자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미세한 소리나 터치 하나하나를 꼬집고 야단쳐야 합니다.
그래야 격조높은 정상의 작품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객원 지휘자는 손
님입니다. 손님은 야단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를 야단치고 고쳐
주고 바로잡아 줍니다. 그렇다고 부모 버리고 손님따라 나선다면 그 자식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야단맞을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야단을 맞더라도
낙심하거나 빗나가면 안됩니다.
히브리서 12:5을 보면 "꾸지람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했고, 12:8을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받고 두려움을 버립시다. 그리고 평안하게 살아갑시다.
3)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본문 20-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벧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고 그 페르시아가 다시 헬
라에게 망하고 그리고 다시 그 헬라가 망하게 될 역사의 파노라마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함부로 계시를 주시거나 뜻을 밝히지 않습니다. 은총
을 크게 받은 사람에게만 당신의 뜻을 밝혀 주십니다.
은혜를 크게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주를 기쁘히게 해 드릴 수 있습
니다.
은혜를 받아야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평안한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서로 사랑하고 화목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처럼 은총을 크게 받고 살아 나갑시다.
발행일 : 940320
분 류 : 설교
62
제 목 : 차고 넘치는 교회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슥 1:16-17
바벧론 포로에서 70년만에 귀환한 이스라엘 민족의 최대 과업은 무너진 성
과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앞장서서 추진하거나 이끈 선지자와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은 에스라,느헤미야,학개,스가랴 등이었습니다.
스가랴는 학개 선지자와 동시대를 살면서 예언활동을 폈습니다.
스가랴서의 내용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1-8장은 스가갸가 본 환상에 대하여,9장-14장은 예언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 16-17절은 70년만에 이스라엘 민족이 바벧론에서 예룻라렘으로 돌아
오게 된 이유와 예루살렘 성읍들이 받게 될 복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
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1.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긍휼이 여김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은즉"이라고 했습
니다.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벧론의 침략으로 함락되면서 유다 민족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70년동안 바벧론에서 포로생활을 해야 겠습니다. 유
다 포로들의 소망은 하루라도 빨리 해방되어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
다.그러나 자기들의 힘으로 해방되거나 자유를 얻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이유는 당시 바벧론은 세계 최대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흥국가로
부상했던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주전 538년 바벧론을 멸망시키면서 유대
인들에게 해방을 주었고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
했습니다.
이 사건을 스가랴 1:16은 "내가 긍휼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남이 해 주었을 때와 내가 해낼 수 없는 일을 도와
주었을 때의 고마움이나 감동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상도 못했던 해방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이 그들을 긍휼히 보셨던 것입니다.
유다 민족이 바벧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싸워서 이기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둘째는 바벧론 왕이 특혜를 베풀어 주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페르시아를 일으켜 바벧론을 멸망시키시고 유다 민족을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는 비단 유다민족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도 받았고, 여러분
도 받았습니다.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던 일들, 내 노력으로는 불가능했
던 그 일들을 하나님께서 해결 해 주셨습니다.
죄에서 건져 주셨고, 위기에서 보호해 주셨고, 시험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그것을 성공이나 축복
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주택복권 10장을 매번 샀습니다. 그리고 당첨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당첨만 되면 10의 5조는 하나님께 드리고 5조는 자기가
쓰겠다며 기도를 했지만 500장의 복권을 샀어도 당첨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도 소용없고 쓸데없다"며 기도 무용론을 펴기 시작했습니다.이
기도가 옳은 기도입니까?
이태리의 경우 정초에 파는 복권을 30억 리라 짜리도 있습니다. 우리 돈으
로는 15억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그동안 30억 리라의 복권에 당첨된 40명을 추적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단 한명도 잘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명에 죽었거나 감옥
에 들어 갔거나 파산을 했습니다.
많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40명의 이태리 복권 당첨자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들은 오히려 많이 가졌다는 것 때문에 불행해 졌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2. 그들이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긍휼이 여김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
운데 건축 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는
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 먹줄을 치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목적이 보다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집짓고 돈벌고 자
식낳고 70년 동안 억눌려 살았던 욕망을 터트리며 향락을 일삼기 위해 돌아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행복한 망각입니다.
지난 날의 불행했던 기억과 불쾌했던 감정들, 다시 말하면 더 이상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행복한 망각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망각은 불행한 망각입니다. 그것은 잊어선 안될 것들
을 잊어버리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지난 날 받았던 은혜라든지, 하나님
과의 약속이라든지, 가난하고 불행했을 때의 겸손한 자세라든지... 이런 것
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불행한 망각입니다.
그런 것들은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내가 오늘 왜 어떻게 여기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살아 있으며 존재하는가를 생각해 보
아야 합니다.
돈벌고 잘 살고 일하고 놀고 먹고 마시는 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면 예
수를 모르는 사람과 다를게 뭐가 있겠습니까?
70년 동안 유다 민족이 그토록 애타게 열망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이 성전 건축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존재이유나 생존
이유도 보다 더 높고 신령한 데서 찾아야 하는 것이빈다.
그게 무엇입니까? 보다 더 값지고 귀한 것을 위해 나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해 나의 시간과 물질과 능력을 바쳐야
합니다.
어떤 한국 여행객이 로마 시내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덩치 큰 사내
들이 앞뒤로 막더니 마치 수사관인양 패스포트를 보자고 했습니다. 순간 깡
패라는 직감이 들었지만 상황이 험했기 때문에 지갑을 꺼내주었습니다. 지
갑 속엔 500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500불을 꺼내더니 마치 위조지폐
라고 가려내려는 듯 이리저리 살펴보면 요즘 위조화폐가 많다는등 너스레를
떠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여행객 왼손목의 금빛 나는 로렉스 시계를 보더니 슬며시 500불
을 지갑에 넣어주며 위조지폐는 아닌것 같다면 손목의 시계를 보자고 하더
라는 것입니다.
순순히 풀어주었더니 이리저리 뜯어 보고 흔들어 보고 만져 본 후 이런 고
급 시계를 손목에 차고 다니면 위험하니 주머니에 넣어주겠다며 여행객 주
머니에 시계를 넣어 준후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시계를 꺼내보니 로렉스 시계는 가져가고 그 사람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넣고 갔더라는 것입니다.
총총히 사라져가는 그들 뒤에 대고 한국 여행객이 회심의 미소를 띠며 중
얼거린 말이 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구". 그 로렉스 시계는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
한 3만원 짜리 가짜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듣고 처음엔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한참동
안 생각했습니다.
남의 것을 뻔뻔하게 탐닉하는 로마 사람, 위기를 모면하고 익살을 떠는 한
국 남자, 3만원 짜리 로렉스시계를 만들어 진짜처럼 국제 무대에 내놓는 한
국의 장인기술, 속고 속는 우리시대... 실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왜 삽니까? 왜 여행을 합니까? 왜 일합니까? 왜 공부를 합니까? 왜 자식을
낳습니까? 왜 사업을 합니까?
그것들이 하나님과 상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과 상관있는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뜻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
다. 그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
니다.
3. 넘치도록 다시 풍부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다시 차고 넘치는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기억하고 분명히 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차고 넘치는
회복과 복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인 가운데 정 명훈씨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 빠리 바스띠유 오페라의 상임 지휘자로 구라파 음악계의 거장으
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음악인이 순
수하게 음악을 사랑하면 언젠가는 그가 사랑하는 음악이 돈과 명예와 인기
와 행복 등 모든 것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인이 음악을 사랑하지
않고 그 음악이 가져다 줄 것들 예를 들면 돈, 명예, 인기, 따위 등을 사랑
하게 되면 음악은 그를 떠나게 될 것이다. 음악인은 음악 자체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도 흡사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섬기면 하나님은 나에게 성공과 명예와
인기와 돈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이 주시는 것들 예를 들면 돈, 명예,인기,행복 따위등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나를 떠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돈이나 명예나 성공 때문에
하나님을 외면하고 산다면 하나님도 그 부산물도 나를 언젠가는 떠날 것입
니다.
본문을 주목합시다.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여기서 말하는 성읍은 예루
살렘과 유다 나라를 뜻합니다. 그리고 내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의미합니
다.
어떻게 해야 푸부하게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맨 끝 순서에 놓고 틈나면 생각하고 여력생기면 감당
한다면 하나님도 나의 문제를 맨 끝 순서에 두실 것입니다.
이번 주간부터 새벽부흥회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부흥사경회가 시작됩니
다. 이번 사경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의 기회입니다.
시간시간 참석합시다.
은혜를 갈망합시다.
가족이 함께 참석합시다.
시간을 지키고 늦지 맙시다.
기도로 준비합시다.
은혜는 준비한 만큼 받는 법입니다.
축복은 자기 그릇대로 받는 법입니다.
주님께 나오는 일과 은혜받는 일을 우선순위 1번에 둡시다. 은혜 못받고
은혜 잊어버리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사업도, 장사도, 회사도 가정도 은혜 받아야 신장하고 평안하고 융성합니
다. 은혜 받기 위해 마련한 잔치에 빠지게 맙시다.
그리고 차고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받읍시다.
발행일 : 940313
분 류 : 설교
63
제 목 : 나중까지 견디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마 10:16-23
예나 지금이나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
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다시 그들을 파송하신 기사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
과 같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나가 전도해야 될 세상
과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광
야를 쏘다니며 먹이를 사냥하고 상대를 만나면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
맹수인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광야의 대표적인 맹수는 뱀,독수리,전갈,이리 등입니다.
그 가운데 이리는 사납고, 간교하고, 공격적인 맹수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맹수라도 사람보다 사납고 공격적인 것은 없습니다.
개를 훈련시키는 사람의 말을 빌리면 개는 훈련시키는대로 한다고 합
니다. 훈련받은 개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단 미친
개는 예외라는 것입니다.
외국 서커스단에서 쇼를 하는 호랑이나 코끼리 그리고 사자 같은 맹
수들도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누구에게나 대들고 배신을 일삼
고 있습니다. 사람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마음 아픈 일이지만
20년을 교육받고 훈련받은 사람이 고작 하는 일이 사기,횡령,협잡,부
정, 폭력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신 것
입니다.
본문을 보면 세가지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1. 지혜롭게 순결하라.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 당부는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난폭하고 거칠고 간교하고 공격적인 사람을 이리로 비기는가하면 뱀과
비둘기를 들어 교훈하셨습니다.
뱀은 하등동물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고등동물인 인간을 넘어 뜨렸습
니다. 뱀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언제나 다니던 길로만 다닙니다.
둘째 한번 공격하기로 작정한 대상을 바꾸지 않습니다. 집요합니다.
셋째, 서두르지 않습니다. 신중합니다.
넷째, 통채로 삼켜 버립니다.
다섯째, 냉혈동물입니다.
여섯째,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뱀은 마귀의 사자로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배로 땅을 기어 다니는 하등동물이지만 그 지혜는 고등동물이 따르지
못합니다. 바로 그 지혜를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비둘기는 뱀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동물입니다.
비둘기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목적지향적입니다.
한꺼번에 여러가지 사물을 복합시켜 보지 않고 한 가지만을 주시합니
다.
둘째, 평화적입니다.
다른 상대를 공격하거나 패거리를 지어 쪼아대는 일이 없습니다.
성경은 비둘기를 순결과 평화의 상징으로 그리고 성령의 상징으로 묫
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혜와 순결의 조화를 생각해야 합니
다. 뱀같은 지혜만 강조하다 도면 순수성이 결여되기 쉽고, 비둘기같
은 순결만 강조되다 보면 지혜가 모자라게 됩니다.
지혜와 순결을 마치 자동차와 두 바퀴처럼 한 축을 중심으로 함께 움
직이고 굴러가야 합니다. 지혜만 있으면 매끄럽고 순결만 있으면 속아
넘아가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혜롭고 순결한 양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리
때 같은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고 그리고 그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을 삼가라.
17절을 보면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
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교해야 될 대상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필요한 존재이면서 고통스
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개나 돼지나 소나 닭 때문에 속상하고 고통당하는 경우보다는 사람
때문에 속상하고 고통스럽고 손해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모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리나 전갈이나 독수리나
뱀 때문에 위기를 겪고 고통을 당했떤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 때문에 고통받고 어려움을 겪은 것은 수를 셀 수 없었습
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의 형이었던 아론과
누이였던 미리암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고라와 그의 일당들이 그를 괴
롭히고 반역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모세를 괴롭혔습니다.바울
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그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동족이며 선민인 유대인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디모데후서 4:9 이하를 보면 의도적으로 바울을 괴롭힌 사람이 있었
습니다. 그는 구리장색 알렉산더였습니다. 금속세공업자인 알렉산더는
바울을 대적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장점을 덮
어두고 단점을 들추는데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대하여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리시니"라고
했고, "너도 저를 주의하라 "고 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바울의 목회 일
생동안 크나큰 가시였습니다.
40여년을 목회하다가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이 쓰신 글 속에 [조심해
야 될 사람]이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밝힌 조심해야 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첫째 말이 많은 사람.
둘째, 앞에서 칭찬하고 뒤에서 흉잡는 사람.
셋째, 매사를 반대만 하는 사람 (부정적인 사람).
넷째, 성직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람.
다섯째, 의도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사람.
여섯째,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일곱째, 성직을 감투로 생각하는 사람.
여덟째 남을 대접하지 않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사람.
아홉째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열째 말로만 큰소리 치고 일은 하지 않는 사람.
이상에서 열거한 열가지 항목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런지 의문입
니다.
사람 때문에 성공하고 행복해 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람 때문에
고통당하고 실패하고 손해보고 길이 막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목사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
니다.
첫째는 노노 하는 사람입니다. (NO NO PEOPLE)
항상 안된다. 못한다고 머리 흔들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입니
다.
둘째는 요요하는 사람 (YO YO PEOPLE) 입니다.
줏대도 없고 소신도 없이 흔들리고 변덕스러운 사람입니다.
셋째는 블로우 블로우 하는 사람입니다 (BLOW BLOW PEOPLE):바람이
날리는 사람들.
생각도 크고 소리도 커서 떠들어 대지만 실제로 일을 해야할 때는 움
추려들고 뒤로 물러서는 사람입니다.
넷째는 고고 하는 사람입니다 (GO GO PLOPLE)
생각도 말도 크고 동시에 소신껏 밀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노노하는 사람, 블로우 블로우 하는 사람, 요요하는 사람들은 삼가해
야 할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친구가 좋다고 아무나 사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귀하다고 아무나 만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노처녀가 결혼이 급하다고 아무나 배우자로 정할 수는 업지 않습니까?
[만남]은 그 사람의 평생을 결정합니다. 그러기에 선택과 결정은 신
중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재치 (TACT)와 만남(CONTACT)이라는 두 친구가 똑같이 사랑(LOVE)이
라는 처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접근 방법은 달랐습니다.
재치(MR.TACT)군은 현관에서 소녀의 부모를 만나 열심히 자기를 소개
하고 집안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만남(MR CONTACT)은 뒷문에서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구혼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결혼에 성공
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성공비결은 세상 사람들이 사람 만나고 조건 만나고 타
협하고 로비하고 있을 때 은밀한 곳에서 먼저 주님을 만나는 것이빈
다. 천번 만번 만나도 유익될 것이 없는 사람, 예수 믿고 경건생활하
는데 도움이 안되는 사람이라면 그 만남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께서도 [그 사람은 삼가라]고 했습니다.
3.염려하지 말라.
19절을 보면 "너희를 넘겨줄 때에 또는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31을 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9절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
한복음 14:1이하를 보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를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전서 5:7을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말하는 것, 영원한 세계의 문제등 염
려하지 말고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널리 사용하는 단어는 오케이(OK)라
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
까?
미국 하버드대학 안에 있는 비지니스 스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
국 사람이 콕(COKE)이라고 부르는 코카콜라는 것입니다. 전세계 195개
국에 코카콜라가 진출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UN회원국 184개국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코카콜라를 가리켜 [미국 문화의 첨병] [자본주의의
우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1초에 4만병,1시간이면 1억4천4백만병, 하루면 30억병
가량이 소비됩니다.
코카콜라가 세계를 점령하게된 비결은 제조비법,독특한 광고전략,기
업경영 철학, 그리고 전쟁과 권력을 철저히 이용하는 네가지라고 합니
다.
그러나 물만큼 그 소비량이 많은 것은 아니빈다. 코카콜라는 떨어져
도 살지만 물 떨어지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세계도처
에 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산 속에도, 바다 속에도 땅 속에서도 물
이 있습니다.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당부는 헛소리
가 아닌 것입니다.
염려는 의심과 불신이 만들어 냅니다. 의심과 불신을 내쫓으면 염려
걱정도 함께 쫓겨난 것입니다. 본문의 결론을 찾겠습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참고 인내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다가 신앙을 포기한다든지
주님을 떠나버린다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합
니다.
물론 참고 견디는 그 고통은 클 것입니다. 아픔도 크고 외로움도 클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인내가 요청됩니다.
주님이 고통과 십자가의 아픔을 참으셨던 것처럼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아멘.
발행일 : 940227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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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창 13:10-18
창세기 13장은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교훈해 줍니다. 아브라함
과 조카인 롯은 점점 소유가 많아지면서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양가의 종들과 서로 티격태격 싸우는 것이 잦아지게 되자 큰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롯에게 주거지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13:9을 보면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
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살고 있던 곳에 그냥 머물
게 되었습니다.
우린 여기서 롯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처신이 주는 교훈을 찾아야 합
니다.
1. 롯의 선택
그것은 한 마디로 잘못된 선택이었고 성급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너 먼저 선택하라]고 했을 때 일말의 주저도
없이 선뜩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은 훗날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선택이 왜 잘못 되었는가를 찾아 보겠습니다.
1) 눈으로 선택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눈의 기능은 다양하고 경이적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제산적입니다. 전
체를 다 보진 못합니다. 가령 배우자를 선택할 때 눈으로만 결정한다
면 그 선택은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은 색깔, 생김, 크기는 볼
수 있지만 인격이나 사상이나 신앙은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 6:2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
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
신앙도 인격도 제쳐놓고 눈에 드는 여자,눈으로 보아서 이쁜 여자들
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타락과 범죄의 원
인이 되었고 홍수심판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3:6을 보면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라고 했습니다. 여
기서도 [눈]이 문제가 됩니다. 눈으로 보고 결단했습니다.
눈이라고 해서 다 눈이 아닙니다. 진리를 보고 주님을 바라보고 영원
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좋은 눈입니다.
클라라 스카(MRS.CLARA SCOTT)여사가 1985년에 만든 찬송의 1절 가사
가 생각납니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 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성령이여"
신령한 눈으로 사물을 보게 세계를 보고 역사를 보고 영원한 세계를
봅시다. 그리고 신령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봅시다.
2) 조건을 선택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롯이 눈으로 보고 선택한 곳의 조건이 열거되어 있습니
다. 그 조건이란 물이 온 땅에 넉넉했고, 여호와의 동산이었던 에덴동
산처럼 아름답고 애굽땅 처럼 비옥했습니다. 중동지방에서 물이 넉넉
하고 땅이 비옥하고 아름답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조건입니다.
롯은 바로 그 조건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곳은 조건이나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떤 돈 많은 재벌의 총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건강과 장수를 위해
물은 제주도 한라산의 생수를 공수해다가 마셨고,쌀이나 채소는 직접
무공해 재배로 먹었고, 생선은 남태평양에서 잡은 것을 먹고, 그리고
보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들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100년도 못
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수, 건강, 행복의 비결은 환경이나 조건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
다. 물론 썩은 물보다는 생수를 마시고, 중금속 오염된 쌀을 먹는 것
보다는 무공해 쌀을 먹는 것이 건강과 장수의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행복이나 건강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맑고, 공기 좋고, 경치 좋기로 친다면 노르웨이나 오스트리아, 스
웨덴, 덴마크 그리고 호주, 뉴질랜드, 미국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
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들에게 행복한가, 만족한가를 물으면 그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듭니다. 그리고 후진국보다 자살자 수가 몇 십배 더
많습니다.
롯이 선택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 물이 넉넉한 만큼 죄도 넉넉했
습니다. 먹거리 볼거리가 많은 것만큼 타락과 범죄도 많았습니다. 그
래서 결국 유황불로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돈만 있으면 만사가 형통이라는 사람들과, 환경문제만 해
결되면 지상은 낙원이 될 것이라고 믿는사람들이게 크나큰 경종을 울
려줍니다.
가난한 시골 젊은이가 열심히 공부해서 모 명문대학 법대에 진학했습
니다.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리
고 사법고시에 응시하여 3년만에 합격했습니다. 그는 내세울 것 없고
가난한 자기네 집안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장가만은 명문집안으로 가
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떵떵거리고 세도부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돈많은 회장의 손녀 딸이며, 그 재벌 계열회
사의 사장의 장녀였습니다.
그녀는 일류대학은 아니지만 대학을 나왔고, 나이는 남자보다 다섯살
위인 노처녀였습니다. 얼굴은 살짝 곰보였고 고등학교 때 입은 교통사
고로 턱 밑에 흉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고로 왼쪽 팔이 약간 굽어
있었습니다. 결혼 조건은 내개의 열쇠와 은행 통장을 준다는 것이었습
니다.
50평 아파트 열쇠, 자동차 열쇠, 별장 열쇠, 금고열쇠 그리고 예금통
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젊은이에게 더없는 조건과 환경이었습니다. 신부감은 맘에 들
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건을 선택하기로 하고 결혼을 했습니
다.
그가 그녀와 지금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을 것인가 불행해졌을 것인
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보다 조건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보다 조건
을 더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롯이 선택한 그곳을 가리켜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물이 넉넉하고 아름답고 비옥한 그곳이었지만 거기 사람들이 악했기
때문에 불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흔적도 없는 곳이
되고 만 것입니다.
롯은 잘못된 선택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내도
죽었고 재산도 불타버렸습니다.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1)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그는 선택을 자신의 의지나 판단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
존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떠나라면 떠나고, 머물라면 머물고, 바치라
면 바쳤습니다.
창세기 12:1-4을 보면 하란을 떠나라는 말씀 한마디에 즉시 고향을
떠났습니다.
창세기 14:20을 보면 즉석에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습니다.
그는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고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판단하지 않
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순종
했고, 그 뜻을 따라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 무엇이며, 순종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롯은 자신의 의지와 결정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지와 사고와 결정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순종했습니다.
미국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했습니다. 그 교회는 3천여 명이 모
이는 교회였습니다. 부임 첫 주일예배가 끝나고 나자 할머니 한분이
찾아와 인사를 하더니 "목사님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수천명 교인들
의 마음을 다 맞추시려면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
니다.
다음 주일 그는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수천명이 넘는
여러분의 비위나 마음을 맞춰주기 위해 이 교회에 부임한 것이 아닙니
다.
만일 저더러 3천여 명의 비위를 낱낱이 맞추라한다면 저는 이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제 말을 순종하고 따른다면
저는 생명 다해 일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저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하나님께 나를 맞춰가며 삽시다.
롯은 세상조건에 자신을 맞추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
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참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2)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나 조건들을 선택한 것이 아
니라 하나님 자신을 선택했습니다.
이 신앙이 바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환경이 나빠지고 조건이 악화되
고 난관이 앞을 가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주님으로 선택한 사
람은 원망하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롯과 같은 사람은 조건이 나빠지고 환경이 불리해지면 금방
신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젊은이의 결혼 뒷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래 애정
없는 결혼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처가집 가운이
기울고, 회사가 부도가 나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6개월만에 아
내와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선택과 목적을 정해야 합니다.
왜 많고 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를 선택했습니까?
왜 수만개의 교회 가운데 충신교회를 선택했습니까?
병을 고쳐준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부자가 되게 해 주겠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아니면 직업을 주고 직장
을 주고 회사를 일으켜 주겠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
들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선택한 것입니다.
최고 최상의 신앙은 조건이나 환경 다 빼앗겨도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그 신앙이라야 하나님의 끝없는
은총과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설명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볼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1)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14절을 보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
르시되"라고 했습니다. 혈육인 롯과 환경과 조건이 아브람을 떠난 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는 조건
들은 그를 떠났지만 그 조건들을 다스리시고 만드시는 하나님이 그에
게 오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2) 복을 주셨습니다.
15절-17절을 보면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네 자손을 땅
의 티끌같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롯에게는 땅을 주신다
는 약속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롯의 후손에게는 그 번영을 보장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맞췄던 아브라함은 땅도 받았고,
건강도 받았고, 아들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축복도 받아서 예
수 그리스도가 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조건 때문에 흔들리지 맙시다. 환경이 변했다고 원망하
지 맙시다. 조건만 바라보고 조건만 따르다가 예수 버리지 맙시다.
조건이나 환경은 사라져도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
다는 것을 확신합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동서남북에 편만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만 바라보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봅시다.
발행일 : 940220
분 류 : 설교
65
제 목 : 전진합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히 10:35-39
불교는 산속의 종교, 기독교는 거리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은 불교
의 경우 입산,수도,득도,성불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며, 기독교의 경우
에는 현실,역사,삶 구원에 중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명상과 사색을 중요시하는 정적인 종교라고 한다면 기
독교는 변화와 중생과 전진을 중요시하는 동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습
니다.
본문은 당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지녀야 할 신앙생
활의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교훈한 말씀입니다. 특히 뒤로
물러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통이나 실패나 박해
같은 여건들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위협하더라도 그런 것들 때문
에 뒤로 물러서면 안된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인 것입니다. 본문의 교
훈이 어떤 것인가를 찾아 보겠습니다.
1. 담대해야 상을 받습니다.
35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34절을 보면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는
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옥에 갇히고 재산을 빼앗기고 직장에서 쫓겨나
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용기를 잃어버리거나
믿음을 포기해 버리면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
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35절과 11:6을 연결시키면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
님께 나아가기를 힘쓰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나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담대한 믿음으로 이
기면 상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은 두가지 특징을 갖
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영예와 상은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상은 하나님
이 주시는 상입니다. 최고의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지성인들이 받기를 소마하는 상이 있습니다. 그 상이 바로
노벧상입니다.
노벧(Alfred Bernhard Nobel)은 스웨덴의 화학자이며 발명가였습니
다.
1863년 폭약을 발명하고 공장을 설립하여 폭약을 제조하기 시작했습
니다.그런데 그 과정에서 공장이 폭파되어 동생과 종업원 4명이 희생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 폭약 때문에 갑부가 되었
고, 그의 유언을 따라 1901년 노벧상 제도를 만들어 시상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1895년 11월 27일 유언장을 통해 "인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며 자신의 유산 3100만 크
로나를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에 기부했습니다.
상은 물리,화학,생리,과학,문학 ,의학 및 경제, 평화 부분에 걸쳐 시
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한 사람도 수상자가 없습
니다. 시상식은 매년 12월 10일 스웨덴 국왕이 임석한 가운데 진행되
며 수상자에게는 금메달과 22만 달러 정도의 상금을 줍니다.
그러나 용기와 인내로 자신의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받는 상은 하나
님이 주십니다. 노벧상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천군천사가 부
르는 승리의 노래 속에서 하나님이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얼마나 영광입니까?
저는 몇년 전 스톡홀름을 방문했을 때 노벧상 시상식장에 들어가 보
았습니다. 텅빈 방에서 상을 받는 흉내를 내면서 장차 받을 상을 생각
해 보았습니다.
둘째 영원한 상입니다.
노벧상이나 올림픽상은 지상에서만 그 가치와 영예가 인정되는 상입
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영원한 상입니다. 그영광과 가치
가 영원히 인정되고 평가받는 상입니다.
영원한 상이란 없어지지 않는 상, 녹슬지 않는 상, 그 가치가 영원히
존속되는 상인 것입니다.
2. 인내해야 약속을 이룹니다.
36절을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가장 소중한 품성입니다. 나아가 인간
이 지녀야 할 품성이기도 합니다.
짐승도 단번에 성을 내거나 단번에 자기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람이라면 인내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태리가 낳은 세계적인 바이얼리니스터 니꼴로 파가니니 (Niccolo
Paganini)가 어느 날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주도중 바이
얼린 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숨을 죽이고 있던 청중들은 깜짝 놀랐
습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남은 세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
다. 그러다가 한 줄이 또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두 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때 세번째 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졌습니다. 그는 잠시 연
주를 멈추더니 한 손으로 바이올린을 높이 치켜들며 "줄 하나와 파가
니니"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노련한 솜씨로 연주를 했습니
다.
그의 연주가 끝나자 관중들은 우뢰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포기하면
안됩니다. 인내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세줄이 끊어지고 단 한
줄만 남았더라도 그 한줄 믿음으로 성공을 연주해 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암놈 펭귄이 알을 낳으면 숫놈 펭귄이 날개로 덮고 따뜻하게 하여 새
끼가 나오게 한다고 합니다.
최소한 두달동안 먹지도 않고 영하 40도의 한냉과 싸우며 시속 40km
의 강풍을 견뎌 낸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인내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합니다.
신앙인의 인내도 예외가 아닙니다. 참을성도 없고, 기다릴 줄도 모릅
니다. 조그만 괴로워도 짜증내고, 약간만 고통스러워도 신경질을 내는
가 하면 쉽게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크리미어 전쟁 당시 부상으로 다리를 잘라야 하는 병사가 있었습니
다. 나이팅게일이 그 병사에게 "최대한 용기를 갖고 아픔을 참아야 된
다"고 말하자 그 병사는 막대리를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그 병사는 막대기의 끝부분을 입으로 깨물면서 수술이 끝날때까지 단
한마디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 막대기를 보니
끝 부분이 거의 짓뭉개져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의미깊은 교훈을 줍니다.
고통이나 좌절로 아픔을 겪을 때 실패나 절망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우리가 붙잡을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
다.
이유는 십자가보다 더 억울한 사건도, 십자가보다 더 쓰라린 아픔도,
십자가보다 더 골깊은 상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붙들때 우리에게 평화와 위로와 소망과 승리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약속을 이루지 못합니다.
인내해야 소망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인내해야 영원한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3. 전진해야 기뻐하십니다.
38절을 보면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뒤로 물러간다는 말의 뜻은 "철회하다","뒤로 끌다"라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이나 계획을 쉽게 철회해 버리는 사
람입니다.
그리고 남을 뒤로 끌어 내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뒤로 물러가는
사람은 자신도 주저않고 남도 끌어내리는 사람입니다.
굼벴이도, 지렁이도, 개미도 앞으로 갑니다. 하루살이도 앞으로 날아
갑니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사람도 앞으로 갑니다. 부산 목포는 20
시간, 대전은 10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20시간이 걸려도 목적지인
고향을 향해 앞으로 갔기 때문에 가족을 만나고 명절을 지킬 수 있었
습니다.뒤로 가는 것은 30분도 지겹고 힘이 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를 보면 애굽을 떠나 40년만에 가나안 땅에 도
착했습니다. 참으로 지루하고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났던 애굽으로 되돌아 가자고 대들었고 소리쳤습니다.
출애굽기 14:12을 보면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고 소리치며 저항했던 사건이 기록
되어있고, 출애굽기 16:3을 보면 신광야에 이른 그들이 광야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실컷 먹다가 하나님의 손에
편히 죽는 것이 좋을 뻔했다고 원망하는 장명이 기록되어 있스빈다.
그들은 전진에는 관심이 없고 되돌아가는 궁리에 바빴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늘 옛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 지난 날의 향수와 미련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엔 "과거에","소시적에","나 어렸을 때"라는
말이 일상어로 사용됩니다.
둘은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오늘 여기가 제일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과거가 필요없듯이 미래
도 필요없습니다. 이들은 수단과 한탕주의와 단발적인 삶에 만족하고
현싫을 엔조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는 언론사에서 압구정동을 서성대는 젊은이들을 붙잡고 [꿈이 뭣니
까]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꿈이요?"
"왜 꿈을 꿔요?"
"오늘 저녁 디스코텍에 가는 것예요"
"그런거 몰라요"
"여기 있잖아요 (엄지손가락을 보이며)"라는 것들이었다고 합
니다. 의외로 현실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당장 오늘
나한테 무슨 복이 떨어지느냐, 나한테 득되는게 뭐냐,유익한게 뭐냐를
따집니다. 그들은 바로 현실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셋은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고 열가지 재앙을 내리시며 이스라
엘을 애굽에서 나아오게 하신 것은 그들로 가나안이라는 미래지향적
복지를 향해 전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걸핏하
면 뒤로 되돌아갈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셨고,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0:28은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부산을 가기로 했으면 24시간이 걸려도 한발짝씩, 그리고 시속 10킬
로의 속도라도 부산을 향해 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면 힘들고 느리고 괴롭더라도 뒤돌아
서거나 중단하면 안됩니다.
범죄심리학자들은 범죄자에겐 귀소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
기가 죄지은 현장을 남몰래 둘러보고픈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
나 신앙인은 전진해야 합니다. 불행했던 과거, 불미했던 지난날 상처
였던 그 사건, 죄짓고 살았던 과거로 되돌아가면 안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영원한 가나안입니다.
되돌아가면 목적지에 못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지 않습
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노래불렀던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못갔고 가나안
땅에도 못들어 갔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산 교훈이 됩니다.
주님 바라보고 전진합시다. 곁을 보고 사람보다 사건보고 경치보면 전
진못합니다.
주님이 최종 목표이며 영원한 세계가 최종 목적지입니다.
뒤로 물러가지 맙시다.
계속 전진합시다.
발행일 : 940213
분 류 : 설교
66
제 목 : 빛이 있으라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창 1:1-5
*** 빛이 있으라! ***
충신교회:박종순목사
성경본문:창1:1-5.
인간이 제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든다고 해도, 하나님의
창조에는 비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게서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사역에 대한 기록
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특히 3-5절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
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는 말슴 속에서 찾아야 할 몇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1.첫째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기 전의 형편을 2졸이 다음가 같이 설명합
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슴의 의미는 이미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셨으나, 아직 그 땅에
는 생물이 살 수 있다든지, 조직된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
라고 주경가 스콜필드는 말했습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있어야 할 것이빛
이었습니다. 빛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빛이 아니면 혼돈고, 공허도 흑암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빛이 없다면 제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고 해도 볼 수 없습니다. 마음
의 빛이 꺼진 사람들이 겪는 불행은 더욱 심각합니다. 마음의 빛, 마음
의 등불이 꺼지면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의미있
고, 가치있으려면 빛이 꺼지지 않아야 합니다.
진리의 빛과 양심의 빛과 생명의 빛이 꺼지면 온 세상이 어두워질 것
입니다. 온통 세상이 어두워지면 세상은 무질서가 판을 치고, 혼돈과죄
악이 날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빛 없이는 못사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밝혀주고,
드러나게 하고 볼 수 있는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게 감사드려야 합니다.
2.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슴으로 빛을 창조하셧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인격적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빛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를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를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이 창세기 1장에만 9번이나 반복되고 있으
며, 성경전체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것은 한마디로 기독교가 말씀의 종교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1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고 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빛이 있으라"는 한마디 말씀에 빛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그 한마디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힘이나 권력은 부패하기도 하고, 무엇을 명령해도 그
대로 실현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빛이 있으라, 하늘이
있으라, 바다가 있으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다 창조되었습니다. 즉 하
나님의 말씀은 곧 실재였습니다. 거기에는 지체됨도 없었고, 고려됨도
없이 말씀과 동시에 실재가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잔잔하라, 고요하라." 는 말씀 한마디로 성난 파도를 잔
잔케 하셨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신 주
님께서 무덤 속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말씀 한마디에 나사로가 수족을 동이고, 천으로 얼굴을 감싼채 무
덤 속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
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슴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연을 다스리며,
인간의 모든 행사를 지배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감사를 드리고 위로와용
기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말씀하시는 인격이시며,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
는 것입니다.
3. 낮과 밤을 나누셨습니다.
빛 때문에 밝음과 어두움, 낮고 밤이 나누어졌습니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는 것은 주야가 시작되었다는 것입
니다.
어떤 사람은 낮은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 밤은 사단이 지배하게 되었
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시편 24:16을 보면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낮이건 밤이건 하나님이 지으셨
으므로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날과 시간과 물질을 인
간들이 제멋대로 죄짓고 악을 행하는 데 쓰고 있는 점입니다.
낮이 가면 밤이 오고, 밤이 지나면 낮이 오는 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밤만 계속되는 것도, 낮만 계속되는 것도 축복이 아닙니다.
인생도 비슷한 이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낮을 기쁘고 성공으로 채워
진 시간이라 하고, 밤을 어둡고 ,힘들고,괴로운 일들로 채워진 시간이라
고 해보십시다. 어떻게 인생이 밝고 기븐 낮시간만 계속 될 수 있겠습니
까? 어둡고, 괴롭고, 침울한 고통과 절망의 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러나 그것은 한정된 시간입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법입니다.
본문 5절 하반절을 주목하십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라."는 말씀의 뜻은 밤이 지나
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는 뜻입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되고,12
월이 가면 새해가 오는 것은 자연 법칙입니다.
우리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머물러 살기만 한
다면 어떤 고난과 고통의 밤중에 처해 있을지라도 새아침의 광명을 맞게
될 것입니다.
어둡고, 침울하고,고민으로 굳게 닫혀 있는 내 마음 속에 빛을 받아 들
입시다. 답답하고 복잡한 내 집 창문을 열고, 주님의 빛을 받아 들입시
다.
뭔가 뜻대로 되지 않고, 속상하고 그래서 산다는게 재미가 없는 내 인
생 속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주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합시다.
그리고 91년 한해를 빛을 따라서 살아나갑시다.
발행일 : 940215
분 류 : 설교
67
제 목 : 실패한 관리자들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창세기 1:26-31
인구문제를 연구한다는 어떤 사람이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창세기 1:28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다"고 했기 때문에 인구폭바가에 대한
전적인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원의 고갈이나 인구의 폭발 책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망상일뿐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창조는 모든 것이 다 좋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았습니다. 그러기에 창세기 1장을 보면 "여호
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여섯번씩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
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는 모두가 유익합니다.
하루살이 곤충도 유익하고 심지어는 사람 몸에 잔털까지도 유익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넉넉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번성하고 충만해도 쓰기에 넉넉한 자원을 만드셨고
살아가기에 아무 불편없는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자원이 고갈되고 환경이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창세기 3장의
타락사건 이후부터 입니다.
3:17하반절을 보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라고 했고 18절을
보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부터 땅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땅은 인간이 살기위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으리 관리하라고 맡겨 주셨습바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땅을 관리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인을 잘못 만난 농장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어려서 자란 곳은 농촌이었습니다.
저는 늘 가까이서 두 사람이 농사짓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농사를 마치 예술품을 만들듯이 짓곤했습니다. 논에 짓느
니 농사나 밭에 짓는 농사 모두가 얼마나 정성을 다 하는지 잡초가 자
랄 겨를이 없습니다.
못자리를 만들어도 미장할 때 쓰는 도구를 가지고 가서 다듬고 매끈
하게 만든 후에 거기에 종자를 뿌립니다. 그는 매년 모범농군으로 표
창을 받곤했습니다.
그에 비해 다른 한사람으니 잡초로 우거져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날이면 날마다 술이 취해 얼굴이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농사가 될
턱이 없습니다.
그는 농사가 귀찮다면서 몽땅 팔아 도시로 나가 술장사를 시작한다고
그 동네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몇년 후에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
니다.
지구의 점하나만도 못한 작고작은 논이나 밭도 주인을 잘 만나야 기
름지고 소출이 많은 법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은 지구관리에 실패
했습니다.
인간은 한마디로 파괴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형상을 파괴했습니다. 양심을 파고했고 하나
님과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양심을 파괴했고 하나님의
과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에덴동산을 파괴했고 환경마
저 파고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지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파괴자입니다. 인간이 파괴의 도구가 된 것은 사단이 그 배후
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파괴자입니다. 인간이 파괴의 도구가 된 것은 사단이 그 배후
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네 가정을 파괴하고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행복한 삶도 사단이
파괴하도록 사주했기 때문입니다.
1972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국연합 인간환경회의가 열렸었습
니다. 그리고 거기서 인간환경 선언문을 선포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6월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유엔환경개발회의
가 열리기까지 사람들은 계속 지구를 살리자는 구호를 외치면서도 계
속 지구를 파괴해 나왔습니다.
지구환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만일 인류가 10년내에 지
구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끝장이 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바니다.
지금 지구 도처에서는 매1분마다 6개의 축구장 크기만한 열대림이 파
괴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30년 안에 지구상
에 있는 열대림 3분의 2가 소실될 것이라고 합니다.
[조나단 포리트]는 "우리가 지구를 살려내는데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10년정도 뿐이며 이것은 마지막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
다.
오존층의 파괴로 이상 기온 현상이 일어나면서 지구는 사막화되어 가
고 있는가 하면 빙하가 녹아내려 바다 수면이 점점 높아져가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땅넓이는 점점 좁아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열대림이 소실됨에 따라 1년에 5만종, 하루에 140여종의 무척추동물
이 멸종해 가고 있으며 결국 다른 생물이 그런 식으로 죽는다면 인간
도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은 잦은 한발과 홍수의 교차현상을 일으키고 태
풍까지 잦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지구가 죽어갑니까?
마구 버린 중금속, 마구 뿌려대는 D.D.T , 살충제,농약, 공장폐수,
쓰레기, 프레온가스, 자동차 매연, 합성세제 등 결국 우리가 버리는
몹쓸 것들 때문에 지구가 병들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20:19을 보면 어느 성을 점령하더라도 그 성에 있는 나무는
도끼로 작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무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
에 그것들을 공격하거나 작벌해선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땅과 나무가 인간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해 주
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왜 인간들이 지구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성이 타락하고 썩었기 때
문입니다. 그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댈 수 있습니다.
창세기나 출애굽기에 의하면 그 당시 애굽은 중동지역의 곡창이었습
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그곳에 살면서 먹고 살 수 있었던
것도 그 나라가 비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집트는 한발고 흉년이 반복되는 사막입니다. 식량
도 외국에서 수입해다 먹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던 가나안 땅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젖
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백향목으로 울창했던 레바논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풀 한포기도 나무 한그루도 물주지 않으면 자라지 않는 황무지
기 되어 버렸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그렇게 만든것입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썩으면 자연도 썩고
그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그곳에 발붙이고 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
다.
환경학자들은 [환경난민]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환경난민
이란 그곳에 살 수 없는 환경위기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조나단 포리트는 그가 쓴 [지구를 구하자]란 책 속에서 우리는 지구
를 단기간 빌려쓰는데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개인의 책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이 지구는 저저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
리고 인간을 만드신 후 거기 살면서 지구를 제대로 관리하라고 얼마동
안 맡겨주신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몇억만년이라고 추측합니다만 그러나 그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이 지
구 위에서 지금까지 살면서 공부하고 장가들고 자식 낳고 그리고 일하
면서 살다가 얼마 후엔 땅에 묻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을 잠시 빌려쓰는 인간이라면 그 땅을 제대로 관리해야
합니다. 내 잘못 때문에 오존층에 구멍이 뚫리고 땅이 중금속으로 죽
어가면 안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인의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몇가지 실천방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새사람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시편 104:30을 보면 "주의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성령의 능력으로 새사람이 되면 땅도 새로와 진다는 것입니
다.
지구회의 환경회의 구호나 표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이 변해서 새사람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양심이 되살아나고 가치관이 되살아나면 더불어 환경도 땅
도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양심이 제디로 살아있다면 어떻게 공장폐수를 강으로 내보낼 수가
있으며 쓰레기를 몰래 버릴 수가 있으며 공해물질을 버릴 수가 있겠습
니까?
양심이 되살고 윤리가 되살고 도덕성이 되살려면 성령님의 능력이 역
사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둘째, 환경보존에 앞장서야 합니다.
찬송소리만 크고 기도소리만 크다고 훌륭한 믿음은 아닙니다. 훌륭한
믿음은 생활 솟에서 드러납니다.
철야기도 다녀와서 남몰래 연탄재나 오물을 길거리에 버린다면 그건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성령받고 은혜 받았다면서 산업폐수를 강으로 흘려보낸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조금 불펴하고 귀찮더라도 환경을 보존하고 지구를 살리는 일이라면
따르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를들면
* 물자를 절약해야 합니다.
* 버리는 것은 함부로 아무렇게나 버려선 안됩니다.
* 태울 수 있는 것과 태울 수 없는 것들을 구분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쓸 것은 써야 합니다.
* 화장실의 정화조같은 경우 자주 청소를 해서 그것들이 생활용수로
스며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 제아무리 펑펑 쏟아지는 수도물이라고 하더라도 아껴 써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일부터 기독교인은 실천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15:23이하를 보면 써서 먹지 못하는 물을 먹을 수 있도록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를 모세가 물에 던
졌을 때 쓴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땅을 고치고 물을 치료하고 인간성을 고치는 방법은 매튜헨리가 말한
대로 십자가를 통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2:19절 이하를 보면 여리고 지방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
해 밭에 씨를 뿌리지만 토질이 나빠서 곡식이 자라지도 못하고 결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알렸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가 새그릇
에 소금을 담아 오라고 하더니 그것을 물 근원에 뿌렸습니다. 그 때문
에 물이 치료되었고 그후로 농사가 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린 이 사건 속에서 소금을 물에 뿌렸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소금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13에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였습니
다. 기독교인이 곧 소금입니다.
우리는 맛이 잃은 소금입니까, 맛있는 소금입니까? 우리는 쓴물을 단
물로, 죽어가는 땅을 생명이 기식할 수 있는 땅으로 만들 책임이 있습
니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1천만 기독교인들이 마음만 하나로 묶
고 생각만 합친다면 우리가 사는 환경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잠시동안 빌려 쓴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쓰거나 포
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로 깨끗하게 관리해야 합니
다. 하나님이 주신 세계를 참 아름다운 세계로 만듭시다.
발행일 : 921007
분 류 : 설교
68
제 목 : 하나님의 대사들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에스겔 33:7-11
본문의 요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33:1-6을 보면 파숫군의 사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파숫군이란 높은 성루에 올라가 적군의 침략이나 기습여부를 살피는
사람입니다. 만일 적의 기습을 발견하게 되면 급히 나팔을 부어 긴급
사태를 전체 성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때, 나팔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않다가 성이 함락된다면 파숫
군의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파숫군이 적의 기습을 알아차리고도 나
팔을 불지 않음으로 그 성이 점령당한다면 그 파숫군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절을 보면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 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파숫군이며 하나님이 주신 말
씀과 경고를 마치 파숫군이 나팔을 불 듯 외치라는 것입니다.
남의 나라에 주재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를 대표하는 외교관을 대사
라고 부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서 보내신 대사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흩어져 사는 하나님의 대사들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라"는 말씀은 나의 대사가 되라는 것
입니다.
우리는 이 민족과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대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1. 복음의 대사가 되사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시다라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나는 그 복음 때문에 구원받았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늘도 존재
하는 것입니다. 세계도처에 선교사들이 흩어져 전하는 복음도 바로 예
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미국의 원주민이 인디언인 것처럼 뉴질랜드의 원주민은 마우이 족입
니다. 그들은 키가 작고 몸집이 뚱뚱합니다. 그리고 얼굴이 검고 투박
합니다.
그들의 반가운 인사법은 코를 맞대로 부벼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선교하는 한국선교사가 어느날 선교하러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반갑다
고 저마다 코를 부벼대는데 어느 한사람의 코가 몹시 헐어 있더랍니
다.
보나마나 그 사람의 코를 맞대로 부벼 댔다가는 틀림없이 세균이 옮
아 코가 헐게될 것 같더랍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 코만 외면해 버린다
면 얼마나 상처가 클까 싶어 "에라 모르겠다", "믿습니다" 두 마음으
로 코를 부벼 댔다는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자기 코를 맞대로 부벼대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마우이
족들이 저마다 선교사 부인한테 다가와 코를 맞대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온 몸도 다 내주셨는데 선교를 위해서라면 별로 잘 나지도 못
한 코, 못 부벼 댈 것도 없다면서 내밀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대사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하면
안되는 것이 복음의 대사입니다. 만일 위가 복음의 나팔을 불지 않는
다면 이민족이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피값을 책임져야 합
니다.
본문 33:6을 보면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
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함으로 그 중 한사람이라도 제함을 당하면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파숫군이 나팔을 불지 않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값으
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수년 전 지방 국도를 차를 타고 달리는데 마주오던 승용차가 대낮인
데도 헤드라이트를 깜박거리며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함께 탔던 사람
에게 저 차가 왜 저러느냐고 물었더니 전방에 교통경찰이 있다는 신호
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입니다만, 운전자끼리는 서로 그런 신호를 해 준다는 것
입니다.
그런 신호는 바람직한 신호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고 외쳐야 할 신호는 전방에 교통경찰이 있다는
정도의 소식이 아닙니다.
그 소식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하라고 주신 명령입니다.
전방에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며, 지옥이 입벌리고 있다는
뉴우스입니다. 믿으면 살고 안믿으면 죽는다는, 그래서 지금 당장 믿
으라는 그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의 대사가 됩시다.
2. 기도의 대사입니다.
바울사도들은 바알신에게, 몰렉신도들은 몰렉신에게, 불교도들은 부
처에게, 회교도들은 알라신에게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
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 틀이 지켜져야
합니다.
첫째,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응답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꾸밈없이 솔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내용도,고백도, 음성까지도 꾸미면 안됩니다.
넷째,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다섯째, 개인기도는 길어도 상관이 없습니다만 대표기도는 그것이 새
벽이건 주일 낮이건 주일 밤이건 수요일이건 부흥회때건, 사람이 많든
적든 짧게 해야 합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철 주일 낮 예배후 성가대가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
다. 땀을 흘리며 열심으로 연습하는 성가대원을 격려하기 위해 성가대
대장 장로님이 아스케익을 사들고 와서 하나씩 나눠 주었습니다.
지휘자가 장로님에게 잠깐 축복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런
데 그 기도가 창세기로 시작하더니 그칠 줄 모르고 길어졌습니다. 문
제는 아이스케익이 녹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방에서 쭉죽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니까 아이스케익은 온데간데없고 꼬챙이만 남았더라
는 조크가 있습니다. 대표로 하는 기도는 길면 안됩니다.
여섯째, 쉽게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운 문장이나 문법의 구성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쉽
게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일곱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해 할 사명을 받은 파숫군들입니다.
기도는 쉬면 안됩니다.
기도는 영혼의 숨소리이기 때문에 기도소리가 작아지고 줄어든다는 것
은 영혼의 숨이 가물거린다는 것이 됩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영혼의 기관이 정지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영이 병
들게 됩니다.
기도를 소홀히 하거나, 기도를 멀리하거나,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그 영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네 가정과 자녀
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그리고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나팔소리가 시들해지면 안됩니다.
지난 6월 7일-11일까지 인천제일교회 사경회를 인도했습니다.
1990년도에 사경회를 인도했던 교회인데 두번째 초청이 있어서 인도
를 하게 됐습니다.
집회가 끝나는 목요일 저녁설교 후에 헌금순서가 있었습니다. 목요일
저녁설교는 우리의 신앙과 삶을 환경과 건겅을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
는 분은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 능력이 오늘밤 역사하신다는 내용이었
습니다.
헌금이 끝난 후 저더러 축복기도를 해달라면서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저에게 쪽지 하나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시영집사 남편이
피 토하는 병으로 위기를 겪고 있으니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쪽지내용은 간단하지만 환자자신은 집회참석을 못하고 그 부인만 참
석을 한 느낌이었습니다. 헌금 감사 기도시간에 기도를 했습바니다.
피가 멎게 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라고.....
그 다음 주간 인천제일교회 담임목사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 내
용은 이시영집사 남편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기적이 일
어났다는 것입니다.
계속 피를 토해 혈소판이 5만 이하로 내려가면 죽게되는데 5만까지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요일 저녁 그 기도시간 이후부터 혈소
판이 계속 올라가 27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담당의사들이 이것은 기적이라면서 퇴원해서 잘 먹고 요양하면 된다
는 결론을 내려 퇴원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날 밤 기도의 대사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 것입니
다.
기도하면 될 것을 기도 안해서 안된다면 그것은 내 잘못입니다.
도무지 안될 일이 기도해서 됐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굴러 떨어져가는 신앙의 혈소판이 올라가게
합시다.
3. 신앙의 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을 향하여 경고하려고 하신
목적을 그들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을 정립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바른 믿음에 대하여 말하라는 것입니
다.
우리 모두는 믿음의 대사들입니다. 나의 믿음은 나만의 믿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믿음은 다음과 같은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첫째, 부부간에 서로 영향을 줍니다.
베드로전서 3장을 보면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아내의 단정하고
정결한 행위를 보면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런가 하면 남편의 신앙과 인격때문에 아내가 예수를 믿게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남편의 불신과 부덕때문에 아내까지 지옥가는 사람이 있
는가하면, 여자 잘못 만나서 신앙과 인생도 망가진 사람이 있는 것입
니다.
둘째,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영향을 줍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언행과 신앙을 보고 배웁니다. 돌연변이가 있
기 합니다만.대부분 부모의 신앙과 삶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게 됩니
다. 훌륭한 신앙의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녀가 양육됩니다.
모세는 어머니 요게벱의 영향을 받고 자라 훗날 민족 지도자가 되었
고 사무엘 역시 어머니 한나의 영향을 영적, 정치적 지도자가 된 것입
니다.
그런가 하면 자녀 때문에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부모들도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셋째, 이웃끼리 서로 영향을 줍니다.
이웃이란 나와 더불어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입니
다. 친구, 이웃집, 동창, 동네사람 등이 거기 포함됩니다.
내가 어떤 믿음생활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손해나 상처를 줄 수도 있
고 유익과 덕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믿음의 대사입니다.
지금 미국 대통령선거 열기로 정치가 뜨거워져가고 있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 억만장자라고 소문난 무소속 페로의 화제가 전 매스컴에 오
르내리고 있습니다.
1991년 4월 대통령 후보로서가 아니라 기업인으로 페로가 일본을 방
문했습니다.
일본과의 합작회사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축하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관례대로 술을 따라 건배를 하는 순서가 됐습니다. 그때 페로씨가 물
었습니다.
"잔 속에 들어있는것이 술인가?"라고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물잔으로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마시지 않아도 되니까 형식으로 건배만 하자고
하자 그는 "술을 마시지 않는데 마시는 척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
이다"라며 거절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로부터 페로씨가 좋아졌습니다. 그야말
로 신선한 바람을 쏘인 기분입니다.
교회가면 예수님 은혜를 들먹거리고 기독교인 행세를 하는가 하면,
천주교에 가서는 주님을 찾고 천주교인 행세를 하고, 절에 가선 부처
님 은공을 찾고, 회교사원에 가선 알라신을 숭배한다는 정치가나 지도
자를 우리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페로씨 같은 사람들이야 말로 믿음의 대사들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
니다.
신앙이란 역사나 정황을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믿음을 올바로 지키고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내가 사는 곳마다 예수님이 드러나고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사가 됩시다.
발행일 : 921008
분 류 : 설교
69
제 목 : 칭송하며 선포하며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시편 145:1-10
시편 145편은 [다윗의 찬송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시편입니다. 다
윗은 본문에서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고백을 노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그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
께 대한 자신의 고백과 결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 먼저 다윗의 신관을 살펴봅시다.
본문에 드러난 다윗이 하나님 신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145편의 서두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으로 시작됩니다.
다윗은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한 명왕이었고 현군이었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몇가지 실책이 있었고 잘못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비밀과
흑막에 쌓인 근대정치의 암울한 정황에 비긴다면 다윗의 실수나 잘못
은 문제시 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남북왕조의 역대 왕들 가운데 다윗만큼 선정을 베풀고 백성
의 신임과 존경을 받은 왕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왕을 마치 국부처럼 높이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본문 1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존경
받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라는 고백은 하나님 말고 다른 왕이 있을 수 없
다는 것이며, 하나님만이 영원한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고대 정치구조 안에서 왕과 신하의 관계는 대통령과 백성이라는 관계
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생사가 왕의 손에 달려 있었고,
소유의 여탈도 왕의 재량권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능과 재량권을 송두리채 하나님께
돌려드린 후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위대한 지혜와 신앙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자신이 모처럼 획득한 왕권과 통치능력을 포기해 버리
고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른다면, 손익득실 면에서 볼 때 어리석은 결
단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롭고 위대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유는 왕
의 보호와 인도와 공급을 받고 살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걱정이 많고 고민이 많습니까. 그것은 내가 책임진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능하면 공적인 책임을 맡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책임은 그만큼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보호아래
살지 않으시렵니까?
2) 광대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3절에서 시인은 "여호와는 광대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시인의 하
나님을 광대하시다라고 노래한 것은 다음의 세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스스로 광대하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나 어떤 힘에 의해서 광대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광
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존개 자체가 [스스로 있는 자]이시기 때문에 그
의 능력이나 크심도 스스로 있는 것이지 타력에 의해 정립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둘째, 영원히 광대하시는 것입니다.
정권이 길다든지 나라가 크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제한적입니다.
예를 들면 세계를 지배했던 초대강국이었던 로마도 지금은 별 볼일 없
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해지는 날이 없다던 영국도 지금은 껍질만 남았습니다. 즉 이 지상에
영원히 광대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정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권세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삶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말씀의 은사라는 것도 이 세상에서만 필요합니다.
천당가서 누구를 가르치거나 설교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병고
치는 은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천당에는 병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은사도 땅에서만 필요합니다. 천당가면 모두가 다 신령한 언
어를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크신 팔에 나를 맡기지 않으
시렵니까?
셋째, 끝없이 광대하시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소련이 제아무리 넓고 커도 끝이 있습니다. 바다가 제아무
리 깊고 넓어도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끝이 없
습니다. 광대하심 뿐만 아니라 사랑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 3:19에서 "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고 했습니다.
넓고 길고 크고 높다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한마디로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능력도 광대하시고 사랑도 자비도 용서도 광대
하십니다. 그 광대하심 때문에 오늘 내가 사랑받고 용서받고 축복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광대하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의 마음과 삶의 태도입니
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인데 내 마음은 왜 그리 협소합니
까?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데 왜 내 사랑은 국한적이고 편협합니까?
하나님의 용서는 무제한적인데 나의 용서는 선택적이고 부분적입니까?
만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때 나의 일부분만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만일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실 때 일부만 용서하신다
면 어떻게 될까요. 만일 하나님이 산소를 주실 때 충분한 양을 주시지
않고 일부분만 주신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배웁시다.
3)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고 다윗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린 여기서 은
혜를 받는 다윗의 태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으리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비하했습니다.
인간세계에서 다윗은 제일 큰 자입니다. 제일 높고, 제일 강하고 제일
큰 왕입니다. 그러한 그가 "지극히 작은자 보다 더 작은 나"라고 자신
을 낮춘 것입니다. 그는 은혜받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야고보 4:6 을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
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5에서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자들
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내용들을 8절이하에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며 선대하시며 긍휼
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는 좋은 것입니다.
많을수록 더 좋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28 을 보면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찌어다"라고 했습
니다. 나를 높이지 말고 은혜를 구합시다.
나의 능력이나 소유를 과대포장하지 말고 은혜를 받읍시다. 그것이 평
안하게 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의 결단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은 왕으로 광대하신 분으로 그리고 은혜를 주시는분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이 어데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나의 주로 높이겠다고 합니다.
1절에서 "내가 주를 높이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주로 높인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높이라고 권하지 않고 내가 높이
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높이면 주님이 나를 높여 주십니다. 내가 주를 낮추면 주
는 나를 지옥에 멸하십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크리스 조이스] 는 자신이 최근에 저술한 [정
신과 의사처럼 생각하라 (Think Like a Shrink)]라는 책에서 정신역학
요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신병 환자가 신속하게 치료되기 위해서는 일체의 자기 방어를 포기
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방어를 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세가기 유형
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무력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대개가 수동적이며 문제의 본질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둘은 감정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밑바닥의 고통을 숨기기 위해 감정을 이용합니다. 상
사한테 야단 맞고난 후 분노의 감정을 피하기 위해 운다는 것입니다.
셋은 지성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핑계를 만들고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기
위해 지능적인 합리화를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조이스에 의하면 환자가 일체의 자기방어를 포기할 때 그 치료가 단
기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론을 영적 삶에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일체의 자기 과시
나 방어를 유보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의지하고 신뢰할 때 영혼의 고통
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약사들의 말에 의하면 한꺼번에 심장약,위장약, 간약, 췌장약, 변비
약, 설사약, 신경통약을 먹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내가 한꺼번에 많
은 것을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은 높이고 그를 경배하
기만 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2)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겠다고 합니다.
본문 1절 -10절 사이에서 시인은 주님을 송축, 칭송, 찬양, 노래
한다는 말을 무려 일곱차례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영원히 계속 하겠다고 말합니다.
세계 어느나라 사람보다 한국사람은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노
래방, 노래연습장이 우후죽순처럼 성업중이라고 합니다.
노래방이 뭔가 궁금해서 어느 분에게 물었더니 30분이나 한시간 동안
악보를 받아서 칸막이 된 방에 들어가 돈을 내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교회에 나오면 돈도 안내고 오르간과
피아노 그리고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를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영원히 송축합시다.
성가대에게 권합니다. 다윗처럼 주님을 영원히 송축하는 신앙으로 찬
양하기 바랍니다. 찬양과 송축은 호흡이 있는 생명체가 해야할 당연할
의무입니다.
시편 150:6을 보면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라
고 했습니다.
3) 주의 능하심을 선포하겠다고 합니다.
4절을 보면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라고 했고 6절을 보면
신관도 중요하고 고백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찬송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한 선포의 신약적 의미는 선교이며 전도입니다. 우리는 주
의 복음을 만방에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회사가, 직장이, 그리고 다양한 일터와 만남이 선포의 현장
이 되어야 합니다.
에디슨은 "주님을 아낌없이 찬양하기에는 영원도 너무다 짧으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복음을 선포하고 전파하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70-80년 세월이 너무나 짧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얻
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입을 열어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멸망할 것입니
다. 그리고 나는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칭송합시다.
그리고 선포합시다.
복음선포는 우리에게 해야할 종말적 사명입니다.
발행일 : 921008
분 류 : 설교
70
제 목 :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람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고린도후서 12:1-9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늘을 셋으로 구분했습니다. 첫째 하늘은 날
짐승이 날아다니는 하늘이고 둘째 하늘은 달과 별 그리고 해가 떠 있
는 하늘이고 세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신령한 하늘이라고 생각했
습니다.
첫째, 하늘보다는 둘째 하늘이 높고 둘째 하늘보다는 세째 하늘이 높
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셋째 하늘은 에녹이나 엘리야같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올라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바로 그 세째 하늘에 올라가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본
분은 그가 세째 하늘에 올라간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의 바울의 세째 하늘 경험이 주는 간증과 교훈을 발
견하게 됩니다.
1. 그런 경험을 말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영적체험은 환상과 계시를 통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는 신령
한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계시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직접 날마다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뵉고 그 음성을 듣는다면 얼
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것은 무익한 자랑이라고 못박고 있
습니다.
바울이 가장 자랑했고 자랑스럽게 여긴 것은 신비한 체험이 아닙니
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즉,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자랑이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계시자랑, 환상자랑, 병고치는 자랑은 결국 자기를 과사히게 되기 때
문에 그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 능력받았다는 사람들과 병고치는 사람들과 기
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병자를 고치고 능력을 행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은 말로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예수의 복음자랑은 퇴색하고 자기 자랑쪽으로 세월이 지날수
록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병자를 수없이 고쳤다는 어느 권사
님은 천당 갔더니 자기 집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너는 세상에서 예수 이름으로 병고치고 능력행하면
서 영광은 다 받고 잘 살았기 때문에 받을 상이 없다"고 하더랍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만, 경고를 주는 이야기임엔
틀림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은사는 본인이 간직하고 복음 전하는데 사용해야지 그
것을 자랑하는 것은 무익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은사를 받았든지 어떤 능력을 받았든지 우리는 다음의
기본틀에서 벗어나면 안됩니다.
첫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나 가진 것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그 영광을 받거나 그 영광을 가로채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도 주셨지만 영광은 양보하지 않습니다.
둘째, 성경대로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활용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능력을 받고 은사가 충만하다고 해도 성경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셋째, 교회에 덕을 끼치고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은사받은 사람들일
수록 성령 충만한 사람들일수록 교회 덕을 세우고 교회의 지도자에 순
종해야 합니다.
넷째, 함부로 그 은사를 남용해선 안됩니다. 사도행전 2장의 경우 성
령을 충만히 주신 것은 복음 전하라고 주신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다양한 은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그 은사도 역시 복음
을 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전하지 않고 함부로 은사를 남용하거나 남발하면 하나
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부득불 자랑한다고 하는 본문의 말씀은 어쩔수 없어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세째 하늘에 이끌려 갔습니다.
2절 중간을 보면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두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가]라는 대명사로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경험한 신비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세째 하늘에 올라갔다면 그것은 최고의 하늘인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2절 끝을 보면 그가 몸안에 있었는
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입신상태
를 의미합니다.
4절을 보면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고 했습니다.
이쯤되면 자기 이름과 그 사건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자랑하고도 남은
이있습니다.
요즘 은혜받았다는 사람들은 바늘만한 신비를 체험하고도 황소만큼
부풀려 떠벌리는 일들이 많습니다. 천당 갔다왔다는 사람도 있고 죽었
다가 깨어났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통화를 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구실만 있
으면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를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엄청난 신비를 체험하고도 자기이름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우린 여기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내가 자꾸
드러나면 안됩니다.
둘은 이끌려 갔다는 것입니다.
2절 셋째 줄에서도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했고 4절에서
도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자기가 세째
하늘을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이끌려 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삶의 인도자가 하나님이시며 그 인도를 절대 순종하고
살아나온 바울의 삶을 한마디로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이끌림을 받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하
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결과를 따라 주시는 선물이며 은혜
입니다.
귀신의 영이나 사단의 능력은 내가 노력하고 힘씀으로 접신이나 강신
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내가 노력한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낙원을 구경했고 그곳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계시를 받았습
니다면 그는 하나님이 이끌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점이 바울
의 위대한 점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3.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5절을 보면 그런 것들은 자랑할 수는 있으나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
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쓴 서신들 속에서 위대한 교훈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가 쓴 서신들도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
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등 13권에 달합니다.
그런데 그는 단 한번도 자기 자신이 행한 기적이나 능력을 언급하거
나 쓴일이 없습니다. 바울도 기적을 많이 행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9:17 을 보면 아나니아에게 안수받고 성령충만을 체험했습
니다.
사도행전 14:8 이하를 보면 루스드라지방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는 한마디로 그를 고쳤습니다.
사도행전 16:25이하를 보면 빌립보옥 중에 갇혀있을 때 기도하다가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8:1이하를 보면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 물렸으나 죽지않고
기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적과 능력들은 바울 자신은 그가 쓴 편지들 속에서
단 하가지도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을 수행했던 의사인 누
가가 쓴 사도행전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입이 없어 말을 안한 것도 아니고 문자를 몰라서 그것을 남기
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자랑하면 자기 인기나 위신이 급상되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자랑하고 약한 것들만을 자랑
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어나 걸으라는 한
마디로 고쳤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마음을 꿰뚫고 그들
이 돈 감춘 사건을 들춰내는 능력을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9:32 이하를 보면 룻다지방에서 중풍병으로 8년을 누워 고
생하던 애니라는 사람을 고치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10:44을 보면 그의 설교만 들어도 방언을 하는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
사도행전 9:36 이하를 보면 욥바에서 다비다라는 여자가 죽어 그 시
체를 다락에 뉘어 놓았는데 기도하고 살려낸 기적도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5:15-16을 보면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 그림자만 환자위에
덮이면 병자들이 고침받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록
역시 베드로가 쓴 베드로 전후서에서는 없습니다. 누가가 쓴 사도행전
에만 언급이 되어 있을뿐입니다.
우리는 바울과 베드로의 능력과 기적을 대하는 자세 속에서 실로 많
은 것을 깨닫고 배우게 됩니다. 주님만 자랑하는 것은 성령충만이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사단의 유홀입니다. 주님만 자랑합시다.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한번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올바르게
관리하는 자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둘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셋째, 교회 덕을 세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넷째, 함부로 은사를 남용해선 안됩니다.
환청, 환상, 계시, 병고치는 능력, 영서,속삭임 등 이런 것들을 이미
주신 성경말씀보다 더 높이고 남용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다섯째, 함부로 기도해 준다로 머리에 손을 얹거나 아무나 찾아 다
니면서 안수받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기도생활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 기도 전문가처럼 기도해 준다든지 전문가를 골라
기도를 받으러 돌아 다니는 것은 금해야 합니다.
안수기도는 그 사람이 받은 은사나 능력을 전수한다는 긍정적 요소가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귀신의 영을 전수한다는 부정적
요소도 있기 때문에 함부로 안수를 하거나 받으면 안됩니다.
여섯째,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병고치는 은사 받았다고 왕진의사처럼 돌아다니면 안됩니다. 예언은
은사를 받았다고 점쟁이로처럼 안됩니다.
능력의 은사 받았다고 전능자처럼 굴면 안됩니다.
신령한 섹례를 듣고 보았다고 해서 함부로 입을 열고 말을 옮겨선 안
됩니다.
영적인 세계, 신비한 세계에 깊이 들어갈수록 마귀의 역사가 나를 강
하게 공격하고 틈타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깨어라 근신하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신 그 말씀의 대상은 불신자나 초
신자가 아닙니다.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조심해야된다는 것입니다.
말씀만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면 냉냉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신비한 세계를 사모하고 신령한 생활을 힘쓰다 보면 고무풍선처럼 붕
붕 뜨는 단점이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충신교회의 신앙생활)은 지적이면서 영적이고 영적
이면서 지적인 조화와 균형에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로 충만한가하면
그 은사를 조절할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말씀을 실천하는가 하면 깊이 있는 기도와 영
적은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받았다고 고무풍선처럼 들뜨는
것보다는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 그대로 살고 열심으로 전도하고 교
회에 봉사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합니다.
세째하늘에 올라갔던 바울이 그 사실을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
은 이유는 장차 우리가 다 들어가서 직접 보고 경험할 세계이기 때문
이었습니다.
성령충만하고 능력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신령한 힘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그리고 그 체험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도합시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그 능력을 쏟읍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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