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감동설교 74편

소록도 한국인 천사

by 【고동엽】 2022. 11. 29.

1994년 조선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한 오동찬 선생은

1995년 국립소록도병원에 공중보건의를 자임했다.

 

당시 말기암 환자였던 오선생의 어머니는

누구나 꺼려하는 소록도에 지원한 아들을 극구 만류했다.

공중보건의 1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드리고야

겨우 허락을 받은 그는

의료진마저도 한센인 진료를 기피하는 현실을 보고

이곳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가 소록도에 들어간 1995년 당시 손가락이 없어 양치를 못해 고름이 생기고

심지어 입에서 구더기가 나오는 환자도 있었다.

 

그는 한센병 후유증으로 아랫입술이 처져 침이 흘러내리고

음식물을 제대로 씹을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해 ‘아랫입술재건 수술법’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400여 명의 환자들의 입술 성형수술을 실시하는 등

20년 동안 1,600여명의 한센인들에게 참 인술을 펼치고 있다.

 

그렇게 바쁜 오선생의 시간을 뺏기가 어려워 많이 망설이다 연결된 그 분은

치료 중이어서 기자와 통화하는 1분도 정말 아쉬워 했다.

 

오동찬 선생에 따르면 나병균은 3개월만 약물치료하면 사멸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결핵균에 비해 100분의 1 정도로 약한데

그걸 모르는 우리들 때문에 어려운 ‘편견의 병’이 한센병이라고 알려준다.

“ 채널A의 ‘쾌도난마 등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이유도

이런 편견을 조금이라도 없애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다.

 

소록도는 오동찬 선생의 인생(人生) 그 자체다.

6년 동안 소록도 간호사로 근무하던 부인과 결혼하고

두 딸이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2014년

 

2005년부터 지난 9년 동안 가족 모두가

1년에 두세 번 여름휴가나 명절기간 해외의 한센인들을 찾아 돌봐오고 있다.

캄보디아, 몽골, 필리핀..오선생이 치료하면 부인은 소독,

큰딸은 통역하고 막내딸은 가글시키고 약을 준다.

 

그는 불과 7년 전까지만 해도 국립소록도병원 내에 진료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치과의사 임에도 불구하고 내과, 외과 등 모든 치료를 도맡아 진행하는 등

한센인들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는 무엇보다도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병”이라고도 불리는 한센병으로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환자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진료가 없는 날에는 환자들과 함께 밥먹고 대화한다.

 

한센병은 전염성이 강하다고 알려졌지만 1941년 특효약 DDS가 발명되면서

조기 완치가 가능하다. 한국에는 한센병을 앓는 환자는 이제 없다.

「소록도 한국인 천사 오동찬 의사는

2014년 '성천상'을 수상했다.

 

성천상은 故 성천 이기석 JW중외제약 사장은, 창업한 뒤

‘국민 건강에 필요한 의약품이라면 이윤이 박하더라도 생산해야 한다’는

생명존중의 정신을 바탕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했다.

 

1959년 당시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수액제를 국산화하는 등 국내 치료

의약품 산업의 초석을 다지는데 평생을 바친 '성천'을 기리는 상이다」

 

 

◑아래는 그의 간증 *인터넷에서 스크랩, 출처 분실

 

제가 소록도에 처음 갔는데, 첫 환자가 들어오는 거예요.

첫 환자가 아랫입술이 처집니다.

침을 질질 흘리겠죠. 그리고 첫 번째 환자는 손이 없어요.

손이 없어서 손 잘린 부분으로 침을 닦으며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당시는 돼지를 키우다보니까 방에 쥐도 많지요.

바퀴벌레도 많지요, 또 파리들이 정말 많아요.

진료실에 들어오면서 파리들하고 더불어 들어옵니다.

 

여러분들은 손이 있어서 하루에 두 번 이상 양치하시지요.

이분들은 손이 없으니까 양치질을 못 하시잖아요.

 

그런데 이런 환자분들이 진료실에 들어 왔을 때, 저는 행복했습니다.

남들은 무섭지 않았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하나님께 너무너무 <감사> 했습니다.

'아 드디어 제 일을 하게 해주시는구나'

 

아니나 다를까 제가 처음 소록도에 갔을 때, 약 1,500백 여분이 계셨습니다.

장애가 심해서 1, 2급 정도의 장애가 심해서 혼자 생활할 수 없는 환자가

거의 70퍼센트 정도 되었습니다.

 

자, 손도 없으시죠, 눈도 까만색은 없고 하얀색만 있으시죠,

얼굴은 틀어져 있죠. 그러다 보니까 너무너무 환경도 불결하고,

진료를 받으러 오시는 분들은, 여기 아랫입술이 쳐져서 침은 흘리시죠.

 

양치 안 하다 보니까 고름이 머리까지 올라가지요.

이 아랫입술 처진 사람들 수술을 해줘야 하는데,

당시에 대부분 의사들이 한센인에 대한 수술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제 나름대로 수술을 하다보니까

한센인 수술은 6~7시간 걸리거든요. 입술이 딱 붙어요.

 

과거에 1960년대에 벨기에 의사들이 아랫입술 처지신 분들의 근육을

머리 위쪽으로 올려 버립니다. 처지지 않게 하려고.

그러다보니 입이 안 벌어져요. 숟가락이 안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런 방법으로 안 하고,

근육을 손 안 대고, 다른 방법으로 수술을 했더니

입술도 붙고 입도 잘 벌어지고... 이건 제가 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주시고, 저는 째고 꿰매기만 하거든요.

그러나 치유는 하나님이 해 주시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힘들게 사시다 보니까

그 때 제 월급이 23만원이나 됐거든요.

물론 우리 동기들에 비해서 20배정도 월급이 적지만

저는 그 월급이 참 많았습니다. 총각이기 때문에 돈 쓸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돈으로 환자들 틀니 해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제가 수술해 주고, 뭐 틀니 해주고 이러면

보통 그것을 무료로 해주면, 환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고맙습니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우리 환자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고생하시네요!' 이러고 맙니다.

 

여러분 그런 말 들으면 기분 좋겠습니까? No

제가 물어 보았어요. 왜 그런 말을 하시냐고 그랬더니

'오 선생도 1년 있다가 갈 건데, 정 주기 싫다'는 것입니다.

 

왜 의사들이 1년 있다 가고, 1년 있다 가버리니까

정 주기 싫기 때문에 그냥 '고생하시네요' 이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소리 듣기 싫어가지고

이제 진료하고 수술 끝나면, 제가 마을에 찾아 갑니다.

 

뭐 하냐면, 제가 손이 제일 멀쩡 하니까

파리가 많으면 매달아 놓는 '파리 끈끈이' 라는 게 있어요.

그걸 방에 달아 드립니다. 그 노란색 끈끈이가 나중에 가면 파리가 가득 붙어서

시커매져요. 그렇게 파리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분들은 저한테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라는 말을 안 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처음에는 가운을 입고 다녔습니다.

가운을 입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저를 피합니다.

 

그래서 가운을 벗고 다니니까 젊은 총각인줄알고

한번 짐을 옮겨 달라고 해서, 제가 짐을 옮겨 준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총각 어디서 왔어?' 물어보셔서

'병원 의사입니다!' 하니까 깜짝 놀라요.

 

그래서 이제 그 할아버지가 '어이, 그럼 밥 좀 먹고 가!'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밥이 일반 밥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식탁이 조그마하거든요. 정말 지저분해요.

밥 푸고 밥통에 이틀만 넣어놔도 밥이 누렇게 되잖아요.

 

반찬은 뭐냐? 고추 딴 것에 된장,

그 다음에 물, 허연 김치

 

숟가락 뜨기 전에 파리들이 그 안에 버글 버글 합니다.

파리 쫓으면서 먹어야 되는.. 정말 지저분했었어요.

할아버지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설마 이놈이 먹겠어?'

 

그런데 소록도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80퍼센트가 기독교인 이예요.

(식전) 기도할 때 말씀이 생각나는 거예요.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왜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구절이 나옵니다. 마15: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나냐”

 

나오는 것이 더럽지, 들어간 것은 더럽지 않다.. 는 말씀이죠.

그 구절이 갑자기 생각이 난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밥을 기꺼이 먹었습니다.

인상 안 쓰고 그냥 먹었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계속 제 얼굴을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인상을 쓸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밥을 대접받고 돌아와서 계속 진료를 하고 있는데,

소록도의 세 마을에서 사시는 분들이 진료소로 찾아오시는 거예요.

 

진료를 하고 있는데, 물론 마찬가지로 파리와 더불어 오십니다.

‘어이 오선생, 어저께 정노인 집에 가서 밥 먹었다면서?’

‘예! 어떻게 아세요?’

 

섬이 참 좋은데 단점이 무엇인가 하면, 소문이 금방 퍼진다는 거예요.

‘오선생, 그럼 오늘은 우리 집에도 와봐!’

 

그래 가지고 제가 갔습니다. 그 집에 가서도 밥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과거 일이라서)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 하지만

그 당시에는 조금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먹고 나니까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저를 부릅니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 저 동네에서 밥을 먹고 하니까

지금은 저한테 ‘수고하시겠네요’ 라고 말 안합니다.

‘어이 고마워!’도 안 합니다.

 

손을 들며 ‘어이 오 선생! (반가워)’ 이렇게 합니다.

 

물론 제가 수술하기도 하고, 진료도 하고, 틀니도 만들어 드리고 하는데요.

지금은 이렇게 그분들과 스스럼없이 지냅니다. 20년이 되다 보니까.

 

이제는 같이 커피도 마시고

병실에 계신 분들은 하루 종일 계시니까 답답하거든요.

 

그러면 제가 점심 먹고 내려와서 커피를 마시고

저녁밥 먹고 또 내려와서 커피 마시고,

저 분들이 그래요.

‘자기들이 태어나서 가운 입은 사람하고 처음으로 커피도 마셔봤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 가슴이 아파요.

왜 저는 의사이기 전에 가족이니까

이렇게 지내다 보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저를 함부로 대합니다.

 

그래도 병원에서 서열 2위인데요.

옆에 그림은 정금옥 아주머닌데요. 손이 없어요.

손가락이 딱 3개뿐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고구마튀김을 좋아해요.

아침에 새벽2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하고 새벽기도 끝나고

고구마 썰어 가지고 튀김을 해 가지고 옵니다. 정말 맛있어요.

 

수술도 많이 해주고 진료도 많이 해주고..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냥 이분들이 저를 가족같이 대해 준 것에 대해서

이 분들은 저에게 항상 ‘고마워, 감사해!’ 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제가 더 이분들에게 감사함을 느끼죠.

지금은 소록도가 복지가 좋아져 가지고, 파리가 많이 없습니다.

 

2007년 이후로 돼지를 다 없앴어요.

그래서 환경도 좋아지고 많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밖의 사회 인식도 많이 좋아지고, 지금(2014)은 그렇습니다.

 

20년 전에는 소록도에 1500명 정도 있었는데, *1994

지금은 560여명 계시거든요.

전국에 한센인이 모여 사는 정착지가 약 90여 곳 있습니다.

거기에 약 12,000여 분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막 수술하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크게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가족들 데리고 해외에 있는 한센인 마을이나 무의촌에 진료를 갑니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는 한센인 진료가 다 끝났는데요.

최근에는 인도, 브라질, 모잠비크, 네팔, 인도네시아, 마다가스카르 등

6개국에 환자가 집중되어 있는데,

이들 국가의 환자수는 전세계 환자의 80%, 신환자의 85%를 차지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센병 환자가 끝났기 때문에 한 십여 년 전부터

외국에 있는 한센인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진료를 합니다.

저는 그런 진료를 즐깁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나 창녀나 죄인들과 더불어서 먹고 즐기시잖아요.

예전에는 (성경을 볼 때) 그냥 휙 보고 지나갔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다가와요.

의사로서 가는 게 아니라 이분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한사람으로서

그들과 더불어 살면 이분들도 마음을 열기도 하고요.

 

그래서 지금은 필리핀에 있는 한센인 마을에 가서 진료를 한다든지

또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이나 인도를 갑니다.

 

그래서 지금은 기도하고 있거든요. 일정부분 소록도에서 정리 되면

외국에 있는 한센인 마을에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외국도 마찬가지로 다른 질환은 편견과 차별이 없는데

한센인에 차별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심합니다.

 

중국 같은 경우는 돌아다니면 돌로 던집니다.

인도 같은 경우에도 너무나도 차별이 심하기 때문에

아예 밖으로 나와 살 수가 없습니다. 유독 한센인만 그렇습니다.

 

제가 소록도에서 20년 있었고, 앞으로 외국에 가서 한센인 들과 아마 살 것 같아요.

이게 제가 대단한 일을 한다든지,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는 20여 년 전에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먼저 들어 주셨기 때문에

그 약속을 조금 조금 지켜 나가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 해주십시오.

일정 부분 우리나라에서 소록도에서 정리가 되면

외국에 있는 나환자촌에 가서 즐겁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Q : 소록도에도 자원 봉사자가 필요한가요…….

 

A : 예, 필요합니다. 소록도에 계신 분들이 평균 연령이 75세이고,

혼자 생활 할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 80퍼센트 정도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원 봉사자들이 오셔서 해주면 더욱 좋고요

무엇보다도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자원봉사자 분들이

소록도에 와서 직접 한센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면 한센 병이 별거 아니네…

한센 병 차별을 극복하는데 큰 효과가 있더라고요.

 

자원봉사를 원하면 저희 병원에 자원봉사부가 있거든요.

그쪽에 연락을 하면 와서 자원봉사를 하실 수 있습니다.

 

Q : 20년 동안 소록도에 계시면서 힘든 일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A : 집사람이 바가지 안 긁어서 버텼습니다.

환자분들하고 지내는 것은 참 즐겁고 감사했는데요.

물론 지금도 감사하고 있는데,

자녀들하고 집사람에게 많은 걸 못해 줘서, 항상 그것을 힘들어 했습니다.

 

큰 애가 초등학교 때 ‘아빠 나도 다른 친구들과 같이 학원을 다니고 싶어요’

지금 고1인데 학원과 과외를 다닌 적이 없거든요. 집 학교, 집 학교만 다녔어요.

아빠가 엉뚱한 데다가 돈을 써버리니까요.

 

큰 애가 4학년 때 이제 아빠가 치과 의사이니까

큰 집에도 살고 좋은 차... 이런 걸 비교를 하더라고요.

그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집사람이 출근할 때 ‘여보, 쌀 떨어졌어요’ 할 때는 웃고 넘어 갔는데,

아이들이 그런 말을 할 때가 힘들었어요.

 

다행히 아이에게 1년 내내 주입을 시켰더니

아이에게 ‘아빠 나가서 개업 할까?’ 했더니

‘그럼 불쌍한 소록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떻게 하냐?’고 그런 말을 합니다.

 

지금은 4식구가 소록도에서 같이 살고 있습니다.

이때가 가장 힘들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가 환자와 의사로 지냈다면 아마 20년을 보낼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분들과 한 가족이니까..

가족이니까 이렇게 20년 동안 지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싸움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싸움을 하는 것보다는 많이 웃으면서 가족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제별 설교 > 감동설교 74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망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0) 2022.12.01
소록도 박권찰 이야기  (0) 2022.12.01
소명은 점점 완성시켜 나가는 것  (0) 2022.02.27
시어머니의 반지  (0) 2022.02.27
아내 잠5:18  (0) 2022.02.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