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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히 11:7-12)

by 【고동엽】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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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히 11:7-12)

 

'교회 밖에서 만나는 재미있는 교회이야기'라고 하는 긴 이름의 책 이 있습니다. 그 책의 20
장에 마틴 루터의 스캔들이라고 하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요새 많은 스캔들 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만 은 500년 전 마틴 루터의 스캔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번쯤
재미있게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마 틴 루터는 1525년 6월 13일 수녀, 카톨릭 수녀 출신의 카
타리나 본보 라와 화촉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정 상적이고
합법적인 결혼입니다만은 500년 전 당시로 돌아가 볼 때에는 교회에서는 이것은 절대로 용
납할 수 없는, 당시의 교회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이것은 스캔들이 틀림이 없는 사건이었습
니다. 왜냐 하면은 카톨릭 수녀와 카톨릭 수도사가 결 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에 있던
사람이 뛰쳐나왔고 수녀원에서 한평생을 살다 죽어갈 사람이 거기 서 탈출해 나와 가지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것은 세계적인 스캔들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카 톨릭적 개
념으로 볼 때에는 수도사 와 수녀, 그것은 분명히 이것은 간 음입니다. 이 결혼은 간음이요,
마 틴 루터는 타락한 성직자라고 하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 습니다. 뿐만 아
니라 종교개혁을 하고 있는 동료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필이면 농민들이 자 유를
위하여 이렇게 싸우다가 실패 해서 좌절과 패배를 겪고 있는 이 비참한 현실, 지금과 같은
때에 하 필이면 결혼을, 자기 자신의 행복만 추구하고, 결혼을 해서 교회를 어지 럽히느냐
하는 거죠. 종교개혁을 했다는 것만 가지고도 큰 사건인데 하필이면 안 해도 될 걸, 결혼까
지 해 가지고 왜 이렇게 시끄럽게 만드 느냐 이거죠. 다시 말해서 종교개 혁을 지지하는 분
들에게까지도 이 사건은 아주 골치 아픈 사건이요, 스캔들이 아닐 수 없는, 유감스러운 사건
으로 그렇게 인정된 것입니다.
자 이제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 스같은 사람은 아주 빈정대는 조소 조의 글을 썼습니다. '
장엄한 비극 으로 등장한 종교개혁이 코메디로 막을 내렸다.' 이렇게 비웃기도 했습 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에게는 그 렇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면 믿음으로 행해야 됩니다. 하
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복을 따른다면 사람이 날더러 뭐라고 하던 말던,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 께서 어떻게 인정하느냐, 어떻게 의 롭게 여기느냐 그것만이 그의 관심 이
었습니다. 루터는 이 모든 비난 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럴 것도 알 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당하게 떳떳하게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또 다른 얘기가 있습니다. 1520 년 초반부터 마틴 루터의 이 종교 개혁사상은 많은 사람에
게 영향을 주되 특별히 루터 자신이 수도원에 있다가 뛰쳐나온 사람이기 때문에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에게 종교개 혁사상이 깊이 파급되었습니다. 그 래서 많은 수도사들이 수도원
에서 뛰쳐나왔고, 또 카톨릭 수녀원에서 수녀들도 탈출해 나오게 됩니다. 아홉 명의 수녀가
나왔는데 이 사람 들은 자생할 능력이 없습니다. 수 도원에만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서
일 할 줄을 모른단 말입니다. 또 무얼 먹고 살겠습니까! 수도원 에서 나오고 나면 말입니다.
그래 서 루터는 부득불 저들에게 직장을 얻어주기도 하고 또 서로서로 짝을 맞추어 결혼을
시켰습니다. 수도사 들과 수녀들과…… 이런 일들을 다 해서 그 루터만을 쳐다보고 수도원
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의 생애를, 생 계를 책임져야 했던 겁니다. 그런 데 아홉 명중의 여덟
사람이, 그 처 녀들이 다 이렇게 저렇게 결혼을 했 는데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그게 카타리
나입니다. 아무도 이 사람하 고는 결혼은 안 하겠다는 거예요. 길다란 얼굴에 툭 튀어나온
이마, 또 볼품없이 길쭉한 코, 그리고 불 쑥 튀어나온 광대뼈, 아주 고집스럽 게 생긴, 못생
긴 얼굴이었답니다. 아무도 이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아서 이 마지막 여자는, 이 카타
리나는 시집을 못 가게 되는데, 마 틴 루터가 그러면 '내가 데리고 살 지.' 그래서 결혼을
했답니다. 이렇 게 해서 카타리나와 결혼을 한 건데 이 세상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 했
습니다. 그저 비난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이 카타리나는 역사적으 로 유명한, 아주 현명한 부인이었습 니다. 그는 아주 지성의
사람이요, 화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하 게 루터를 내조해서 종교개혁을 성 공하게 했다
는 겁니다. 마틴 루터 는 너무나 엄청난 사건을 이렇게 맡 아 가지고 종교개혁을 할 때에
사방 에서 루터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죽음의 공포 속에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가운데서 살 아갔기 때문에 그는 우울증에 시달 려야 했습니다.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는 겁니다. 언젠가는 큰 소 리로 이렇게 소리를 지르더라고 합 니다.
"마귀야! 나 좀 잠 좀 자게 내버려둬라. 내가 내 죄를 많이 지 은 죄인이라는 걸 알고 있으
니 이제 그만 좀 해라"
무슨 말이겠습니까? 종교개혁을 하는 이 엄청난 사건을 놓고 밀고 나갈 때에 자기의 죄가
자꾸 생각이 나요. 과거의 죄, 현재 의 죄, 잘못한 것. 마귀가 계속 공 격을 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 는 죄인이다.' 루터가 중얼거리기를 '마귀야! 나 잠 좀 자자. 이제 그만 해 둬
라. 내가 죄인이거 나 잘 알 고 있는데 그만 좀 해라.' 그러더라 는 겁니다. 이렇게 우울증
에 시달 리고 있을 때에 유명한 에피소드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밖에서 돌아 오니까 마틴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가 상복을 입고 울고 있더랍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서 누가 죽었느냐,
왜 울고 있느냐 했더니 그 부인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돌아가셔서 상 복을 입었습니다."
루터가 펄쩍 뛰 면서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무슨 불경한 말이냐!"고 벌컥 화는 내니 까 그 부인이 조용히 하는
말이
"하 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째서 당신이 낙심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면서 왜 피곤해 하는 겁니까?"
여기서 용기를 얻어 서 종교개혁을 완성했다는 게 아닙 니까! 카타리나의 공이 큽니다.
여러분,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 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득의 (以身得義)의 교리를 들
고 오직 믿 음으로 그 신앙을 가지고 종교개혁 을 합니다. 그는 믿음을 가졌습니 다. 그리고
믿음을 신학화 했습니 다. 성경적 진리에 의해서 설명하 고 철학적 진리에 의해서 변경했습
니다. 루터 나름의 종교개혁적 개 혁신학을 이루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믿는 대로 살았습니다. 믿음을 생활화했습니 다. 신앙에 가장 무서운 함정이 있 습니다. 그
하나가 주관적 신앙입 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신앙 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 믿음을 스
스로 자기가 자기 생각을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병 나을 줄 믿습니다, 복
받을 줄 믿습 니다, 아들 날 줄 믿습니다 주여, 뭐 이런 거 그건 자기 마음 대로지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까지는 그거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저 내 나름대 로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김치
국 부터 먼저 마신다고 믿음이 되는 게 아니에요. 이런 주관적 신앙, 주관 화 참 무서운 것
입니다.
두 번째 잘못된 것이 바로 추상 화입니다. 지식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깨
닫고 많 이 기억하면 이게 마치 믿음인 줄 압니다. 그리고 성경진리에 감격하 면 이게 무슨
믿음인 줄 아는데, 그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건 지식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합
리적 이해가 절대로 신앙이 아닙니 다. 그건 지식일 따름입니다.
우스운 얘기입니다만은 제가 어 느 교회에 한번 저녁에 설교하러 갔 을 때에 그 교회에서
성경암송대회 를 하더만요. 성경 잘 외우는 사람 을 이렇게 심사해 가지고 그 중에도 최고
로 잘 외우는 사람 몇 사람을 데려다 놓고 성경을 외우게 하는데 요, 깜짝 놀랐습니다. 좌우
간 빌립 보서를 외우는데 그 넉장을 숨도 안 쉬고 외어요. 눈 질끈 감고 쫘 악…… 하나도
안 틀려요. 제가 심사를 했는데 하나도 안 틀려요. 이렇게 해서 1등 상을 받는데 상을 줄 때
에 이상하게도 온 교인이 아무 도 박수를 치지 않아요. 2등 탄 사 람은 박수 쳐요. 3등 탄
사람 박수 더 많이 쳐요. 1등을 받았는데 박 수를 안 쳐요. 이것 참 이상하다 했더니요, 그
다음에 얘기 들어보니 까 그 사람이 성경은 잘 외우는데 시어머니하고 싸우는데 아주 용감
하 답니다 아주 그냥. 아주 유명한 악 처랍니다. 남편에게나 아이들에게 할 것 없이. 그런데
머리는 좋아 가지고 성경은 잘 외우는 거야. 이 게 믿음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 까? 성경
66권을 다 외우면 어떻다 는 얘기요! 이것을 믿음으로 생각 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이게 추
상 적 신앙이요. 문제는 신앙이 생활 화되어 돼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히브리서 11장은 여러분이 잘 아는 믿음 장입니다. 첫 절부터 말합니다. '믿음
을 바라 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 의 증거니라. 이것이 믿음이라.' 그래요. 그리고
역사 속에서 실제 사건들 속에서 생활 속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지 그 살아간 믿음 의
사람들의 모습을 여기서 설명하 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Case Study 입니다.
슈프링거라고 하는 학자의 말속 에는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 혹은 그들의 기본 생활 철학에
는 여섯 가 지 유형이 있답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형, 만사에 돈만 생각하는 거예 요. 타산
적이요. 또 이론형, 자기 논리에 맞아야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지식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있 고, 어떤 사람은 심미형. 이 사람은 항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런 감 상에 젖은 사람
이 있고, 어떤 사람 은 권력형이요. 꼭 남을 지배해야 만 되지 그 외에는 행복이 없어요. 또
한 어떤 사람은 사회형, 많은 사 람과 더불어 사귀고 친교하는 그것 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종 교형, 항상 하나님을 생각해요. 범 사에 하
나님의 뜻을 생각해요. 식 사를 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잠자리에 들 때도 할렐루야예
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 종교형이다 이말 이 예요. 믿음이라는
것은 보지 못하 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 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이 생
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합니 다. 그리고 오늘을 삽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학화합니다. 의롭
다 하심 에 얻은 그 놀라운 진리 안에 살아 갑니다. 여러분 이 믿음은 하나님 의 의를 수용
하는 믿음입니다. 이 것을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비유를 통해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한
평생 생각해도 무궁무진한 진리가 그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탕 자 비유입니다.
탕자는 분명히 불효자입니다. 탕자가 분명히 탕자입니다. 집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한가닥
믿음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돌아왔다는 사 실 하나만 가지고 아버지는 기뻐합 니다. '돈 얼
마 남겼느냐' 묻지도 않고 '그러기에 집을 나가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과거를 묻지도 않았
습 니다.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 너 무너무 좋아서 잔
치를 합니다. 아 들은 말합니다.
"나는 아들 중의 하나가 될 수가 없기 때문에 머슴꾼 의 하나로 대해 주시기를 바랍니 다."
라고 하지만은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 합니다. 그리고 잔치를 합 니다. 이때에 말입니다, 이
아들이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 하면 제가 더 비참해 집니다."라고 말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건 율
법주의자입 니다.
"정 이렇게 대하면 내 체면 이 말이 아니니까 나는 집을 나가고 말겠습니다"
했다면 그 사람은 영영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돌 아보면 무자격합니다.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 이 그러하니 아버지가 너는 내 아들 이다 하니까 아들이
지. 내 사랑하 는 아들이다 그러면 내가 사랑 받는 아들이지.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 은 좀
그처럼 체면이 없는 겁니다. 염치가 없어요. 염치가 없는데 그 걸 극복하는 것이 믿음이요.
이렇 게 받아들이고 그 잔치에서 이 아들 이 아들 노릇을 하지 않습니까! 이 것이 믿음입니
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십자 가를 통하여 확증해 주시는 하나님
의 사랑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 다.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의 인이 된다는 말이 아
니요, 죄인은 여전히 죄인이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덮어서
"너는 내 아들 이다 나는 너를 위하여 이 같은 십 자가를 지노라"
할 때에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종교개혁적 신앙 입
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제 는 더 이상 율법에 매일
필요도 없 고, 과거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 사 랑 그 안에
살아가는 것이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의 삶이올시다.
오늘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역사 적인 예를 듭니다. 믿음으로 산다 는 것이 뭐냐! 보세요. 노
아는 어 쨌습니까? 온 세상이 죄로 말미암 아 다 멸망될 때 어쩌면 노아도 그 랬던 것 같아
요. 노아도 신통치 않 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 다.
"120년 후에 홍수로 멸하리라."
이건 꼭 노아만 들어야 될 말은 아 니에요. 누구든지 이 메시지를 받 고 120년 후에 망한다
고 하는 메시 지를 받아들이면 노아와 같이 방주 를 짓는 거예요. 그것도 산꼭대기 에다, 바
닷가에다 짓는 게 아니고 산 위에다가 120년에 걸쳐서 그 많 은 날, 많은 비난을 받으면서
정신 나간 할아버지라는 말도 들었겠지 요. 미친 짓이라는 말도 들었겠지 요. 그러나 저만은
저 120년 후에 있을 홍수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서 생각하면서 방주를 예비합니다. 이것
이 믿음으로 산 것이요, 하나님 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오늘 나의 생활을 지배했단 말이올
시다. 이것 이 믿음입니다.
전 어느 목사님의 딸 하나를 아 는데요, 그 목사님에게 오남매의 자 녀가 있었는데 아들 둘
딸 셋, 목사 님의 평생 소원은 '아들 둘 중에 하 나라도 좋으니까 목사가 돼 줬으 면……'
목사님들의 일관적인 소원 입니다. 잘 크고 대학 마치고 좋은 아들들인데 제발 이중에 내
뒤를 이 어서 목사가 돼 줬으면 했는데 목사 가 안돼는 거예요. 딸들도 다 제멋 대로 갔어
요. 마지막에 막내딸 하 나가 아버지의 그 간절한 소원을 알 고 나는 목사는 못 되도 목사
부인 이 되겠다고 그래서 목사를 내조해 서 훌륭한 목사 되게 하련다하고, 대학교 1학년 때
부터 이대 1학년 때 부터 제가 아는데 각 교회 돌아다니 면서 주보를 다 모으고 많은 목사
님 들의 설교를 연구하고 목회를 연구 하고 또 설교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 를 그냥 이렇게
스크랩해서 모아놓 는 거예요. 아 그 신통하더라고요. 꾸준하게 이렇게 하더니 대학 졸업 반
때 농촌봉사 나갔다가 눈 맞아 가지고 목사하고 결혼하더라고요. 아 그 서울 안에 있는 목
사님 사모 님이에요. 내가 왜 이 말을 하는고 하니 목사 사모가 되겠다고 생각했 으면 그것
이 그의 믿음이라면 오늘 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것이 노아가 보여주는 믿음입 니다. 또한 아브라함, 여러분 잘 아 시는 대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을 떠나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납니다. 지 시할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리고 자녀를 주겠다
고 약속합니 다. 공간과 시간적인 중요한 의미 가 있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듭
니다. 그 땅을 지키지 못 하고 애굽으로 피난을 갑니다. 자 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한 10년 기다려 보고 아내가 단산하고 뭐 이렇게 저렇게 되니까 아마 이게 뭐 내가 하나님
말씀을 잘 못 들었 나 첩을 얻어 가지고 떡 아들을 봅 니다. 하나님은 그게 아닙니다. '너는
내 앞에서 온전하라. 왜 휘청 거리느냐!'고 책망하십니다.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제 25년
후에 아 내는 단산한지 오래됐습니다. 그때 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년 에 아들을 주마!"
25년 전에 듣던 말씀이에요.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그러나 그 기다림에서 그는 온전하 지 못
했어요. 그 믿음을 똑바로 지 키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자책이 많아요. 부
끄러움도 많고 하나님 말씀을 다시 받아들이 기엔 너무도 자격이 없어요. 무자 격이요. 그럼
에도 불구하고 '주여!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받아요. 믿 어요.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의롭다
하세요.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사하 시고 자식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는 사람이에
요. 그 약속 을 믿음에 내 부족한 허물을 다 그 약속 속에서 다 소화해 버려요. 약 속만을
받아들입니다. 이게 아브라 함의 믿음이에요.
또 오늘 본문에 강조된 것은 사 라입니다. 사라는 죽은 자와 방불 한 가운데 나이 90세요,
단산한지 이미 오래 됐어요. 그러나 내년에 아들을 주마 할 때에 다시 용기를 냅니다. 저는
이것을 좀 더 구체적 으로 생리적으로 생각하고 싶어요. 아브라함이 90세가 된 할머니를 언
제 만났던지 몰라요. 아마 별방한 지가 오래됐어요. 거들떠보지 않은 지가 오래 됐는데 하나
님 다시 말씀 하십니다.
"네 아내, 저 할망구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이거예요. 이 엄청난 말씀을 믿고 다시 합방을
합 니다.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여기 서 이삭을 낳습니다. 이 얼마나 놀 라운 믿음입니까!
사도바울은 이것 을 로마서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걸 부활의 교리로 설명하고 있습 니다.
놀라운 얘기예요. 다 죽은 것과 같아요. 인간적으로는 다 벌써 단산한 지가 언젠데 다 끝난
사람인 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용기를 냅니다. 그리하여 약속의 자녀를 얻었다. 이것은
자기 약점과 인간 적인 모든 부족한 것을 믿음으로 다 극복한 것이에요. 한계를 넘어서는
위대한 믿음이올시다.
여러분, 종교개혁이란 믿음이 세 속화 된 것을 다시 재정비하는 것이 에요.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복음진 리 그 진수가 무엇이냐 원점으로 다 시 돌아가는 일이요. 복음에 대한 재해석
이요. 그리고 종교개혁이란 믿음을 구체화하는 것이올시다. 우 리의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머리 속에 있던 신앙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실제의 구체적인 생활 속에 서 믿음으로 살
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이요, 순 교자의 마음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께
서 약속의 엄청난 축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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